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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仁祖 15년 1월2일(임인) 條
홍서봉·김신국·이경직 등을 오랑캐 진영에 파견하였다. 홍서봉 등이 한의 글을 받아 되돌아왔는데, 그 글에,“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짐은 그대 나라와 그 동안 털끝만큼도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대 나라가 기미년1366) 에 명나라와 서로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해쳤다. 짐은 그래도 이웃 나라와 지내는 도리를 온전히 하려고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동(遼東)을 얻고 난 뒤로 그대 나라가 다시 명나라를 도와 우리의 도망병들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다시 저 사람들을 그대의 지역에 수용하여 양식을 주며 우리를 치려고 협력하여 모의하였다. 그래서 짐이 한 번 크게 노여워하였으니, 정묘년1367) 에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그대 나라는 병력이 강하거나 장수가 용맹스러워 우리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짐은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끝내 교린(交隣)의 도를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우호를 돈독히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 그대 나라 군신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망한 이들을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명나라 장수가 투항해 오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막고 끊었으며, 우리의 구원병이 저들에게 갈 때에도 그대 나라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대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 배[船]를 요구했을 때는 그대 나라가 즉시 넘겨 주면서도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그리고 우리 사신이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國書)를 마침내 못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密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입각해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關門)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策略)을 다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짐이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대 나라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 것이요, 망령되게 스스로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고 성 안이나 초야에서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반드시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이를 그대 무리에게 유시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하였다. 상이 즉시 대신 이하를 인견하고 이르기를,“앞으로의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겠는가?”하니, 홍서봉이 대답하기를,“저들이 이미 조유(詔諭)란 글자를 사용한 이상 회답을 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한(漢)나라 때에도 묵특의 편지에 회답하였으니, 오늘날에도 회답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하고, 김류가 아뢰기를,“회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 처리하소서.”하였다. 상이 각자 마음속의 생각을 진달하게 하였으나 모두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신의 뜻은 영의정·좌의정과 다름이 없습니다.”하고, 김상헌이 아뢰기를,“지금 사죄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노여움을 풀겠습니까. 끝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해 올 것입니다. 적서(賊書)를 삼군(三軍)에 반포해 보여주어 사기를 격려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한이 일단 나온 이상 대적하기가 더욱 어려운데, 대적할 경우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성첩(城堞)을 굳게 지키면서 속히 회답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김상헌은 답서의 방식을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극력 간하였는데, 최명길은 답서에 조선 국왕(朝鮮國王)이라고 칭하기를 청하고 홍서봉은 저쪽을 제형(帝兄)이라고 부르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지금이야말로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이다. 위로 종묘 사직이 있고 아래로 백성이 있으니 고담(高談)이나 하다가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라. 예판은 여전히 고집만 부리지 말라.”하니, 김상헌이 아뢰기를,“이렇게 위급한 때를 당하여 신이 또한 무슨 마음으로 한갓 고담이나 하면서 존망을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신은 저 적의 뜻이 거짓으로 꾸미는 겉치레의 문자에 있지 않고 마침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말을 해올까 두렵습니다.”하였다. 이성구(李聖求)가 장유(張維)·최명길·이식(李植)으로 하여금 답서를 작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당시 비국 당상이 왕복하는 글을 소매에다 넣고 출납하였으므로 승지와 사관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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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略)내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쳤으므로 짐이 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벌했던 것이다. 이것을 강대하다고 약자를 없신여겨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무엇 때문에 그 뒤에 너희 변방 장수들을 거듭 타이르되, '정묘년에는 부득이하여 잠시 저들의 무리한 요구를 받아들여 화약을 맺었지만, 이제는 正義로 결단을 내릴 때이니 경들을 여러 고을을 타일러 충의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지략을 다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적을 정벌하는 대열에 따르게 하라'는 등등의 말을 했느냐. 이제 짐히 친히 너희를 치러왔다.
너는 어찌하여 지모 있는 자가 지략을 다하고 용감한 자가 종군하게 하지 않고서 몸소 一戰을 담당하려 하느냐. 짐은 결코 힘의 강대함을 믿고 남을 침범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도리어 약소한 국력으로 우리의 변경을 소란스럽게 하고, 우리의 영토 안에서 산삼을 캐고 사냥을 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그리고 짐의 백성으로서 도망자가 있으면 너희가 이를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또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두 사람이 짐에게 귀순코자 하여 짐의 군대가 그들을 맞이하러 그곳으로 갔을 때에도, 너희 군대가 총을 쏘며 이를 가로막아 싸운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으나 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정묘년에 네가 섬으로 도망쳐 들어가 화친을 애걸했을 때, 글이 오고간 상대는 그들이 아니고 누구였더냐. 짐의 아우나 조카가 너만 못하단 말인가. 또 몽고의 여러 왕들이 네게 글을 보냈는데도 너는 여전히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었지, 그들은 당당한 원나라 황제의 후예들인데 어찌 너만 못하랴!
원나라 때에는 너희 조선이 끊이지 않고 조공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어찌 하여 하루아침에 이처럼 도도해졌느냐. 그들이 보낸 글을 받지 않은 것은 너의 昏暗과 교만이 극도에 이른 것이다. 너희 조선은 遼, 金, 元 세 나라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대대로 臣이라 일컬었지, 언제 北面하여 남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편안히 지낸 적이 있었느냐.
짐이 이미 너희를 아우로 대했는데도 너는 갈수록 배역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도성을 포기하고 대궐을 버려 처자와 헤어져서는 홀로 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설사 목숨을 연장해서 천년을 산들 무슨 이로움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했다면 어찌 하여 몸을 도사려 부녀자의 처소에 들어앉아 있느냐. 네가 비록 이 성 안에 몸을 숨기고 구차스레 살기를 원하지만 짐이 어찌 그대로 버려두겠는가.
짐의 나라 안팎의 여러 왕들과 신하들이 짐에게 황제의 칭호를 올렸다는 말을 듣고, 네가 이런 말을 우리나라 군신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대저 황제를 칭함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우면 필부라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면 천자라도 외로운 필부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말을 한 것은 방자하고 망령된 것이다.
이제 짐이 大軍을 이끌고 와서 너희 팔도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아버지로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너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를 두고볼 것이다. 자식의 위급함이 경각에 달렸는데, 부모된 자가 어찌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네가 스스로 무고한 백성들을 물불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니, 억조중생들이 어찌 너를 탓하지 않으랴. 네가 할 말이 있거든 서슴지 말고 분명하게 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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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태왕은

아명은 담덕이요,성은 고씨이다.

재위기간은 23년으로, 그의 위명과 나라의 국력은

동아시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주었다.


그의 재위기간동안, 짱개나의 수도 베이징을 비롯하여

왜,신라,백제,숙식,거란,몽골,연등 각국나라를 복속하여

고구려의 영향아래 두었으며,


짱개나라는 광개토대왕릉을 일부러 미궁속에 무덤의 존재를

없애려구하였으나, 근래에 무덤주위에서 광개토대왕릉임을

증명해주는 유물이 출토되어,현재 광개토대왕릉이 존재함을

알려주게되었다.


역사서에 이르기를, 광개토대왕은 190cm에 달하는

장대한 키와,담력을 가지고 있어고,그의 지략과 용맹은

신출귀묘하여,그를 당할 나라가 없었다구 기록되어져있다.


그의 사후,아시아의 최대의 석비인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하여,그의 업적을 기리었다.


우리민족의 강인한 민족정신과 불굴의 정신의 토대를 이루는

기원이 되셨으며, 우리나라의 국호인 korea 어원이

근본은 고구려에서 나온것으로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하겠다.


광개토대왕의 이념은 짱개를 척살하구,나라의 기틀과 영광을

위하여,전생애를 바쳤던것이다.이를 기념하여,사후

광개토대왕릉비를 건립하여,그의업적과 위대함을 후세가

알도록 기록한바,그의 가치관인 천손의 자손으로,왕중의 왕인

즉 태왕으로서 연호를 사용하였으니,영락대제라 하셨다.


불굴의 민족정신과,강인한 민족성은 이후,국가의 안위가 위협될때는

똘똘뭉치는 강인한 민족성의 근본이 되었으며,5,000년 역사의

흥망성쇠에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광활한 만주벌판과,우리선조들의 드높은 민족정신의 고향인

간도지역은,예로부터,한민족의 터전이었으며,짱개나라가

그땅에 대하여 일제시대에 간도협약을 통하여 취하여 자신의

선조가 살았던곳이며,또한 고구려는 자국의 역사라구

왜곡하구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조들의 터전이었으며,고향인 간도지역은

역대 고조선, 고구려,발해,고려,조선으로 면면히 우리나라의 영토

임을 선포하였구,타민족이 지배할때에두,우리나라는  그지역이

수복할 고토라는 개념을 가지구 있었지,위에 어느시대두,그지역이

짱개나라의 영토라구 인정한 적이 한번두 없었다.



민족적 자긍심과,불굴의 정신을 없애구,수복할 선조들의 고토인

간도지역을 짱개나라의 영토로 인정하구,민족적 자긍심을 내팽개친

북한정권은,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을 해야할 역사적 매국의 짓을

하였다.


이결과,북한정권은 짱개나라와 국경선에 관한 비밀조약을

체결하여,선조들의 고토를 짱개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조.중변계

조약을 체결하는 민족적 매국짓을 하였다.


조.중변계조약을 체결한 내용을 보면,간도지역을 짱개나라의 영토로

인정한것과 더불어,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조차두 짱개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천인공노할 매국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북한정권은 정권의 안위를 위하여,고구려가 짱개나라의 역사라구

주장함에두,방관과 침묵으로,민족적 자긍심을 팔아먹는 짓을

현재까지두 하구있다.


우리나라조차두,고구려역사에 대하여 방관한다면,5,000년

역사에 면면히 흘러내러온 민족의 정체성 자체가 부정되는

최악이 결과가 나타나므로,통일시 북한정권이 인정한

영토에 관한 매국조약인 조.중변계조약은 그 효력이 부정

되어지는것이 당연하다 하겠다.


짱개나라의 고구려역사왜곡에 대하여,방조하구,침묵하며

수복해야할 고토인지역에 대하여 짱개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한 북한정권은,민족의 매국노집단이다.



우리나라는 간도는 수복되어야할 선조들의 고토이며,

짱개나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하느니 차라리

일전을 불사할 마음과 민족적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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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홈에 실려 있는 김만덕 이미지)

 

▲ 구좌읍 동복리(東福里), 그녀가 태어난 곳

 

 오늘날 제주 사람들에게 '김만덕(金萬德)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조선시대 지독한 흉년이 들었을 때 사재를 털어 제주 백성들을 배고픔으로부터 구한 여인'으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제주시 사라봉에 자리한 모충사에 그녀의 선행을 기리는 의인 묘탑과 만덕관, 그리고 탐라문화제 때 시상하는 '만덕봉사상' 등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기도 했겠지만, 초·중학교 교실 향토학습관의 '내 고장을 빛낸 인물'에 어김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향토사학자 김찬흡(金粲洽) 선생의 <제주사인명사전>에 나오는 그녀의 출생지 구좌읍 동복리(東福里)를 찾은 것은 바람이 몹시 부는 초겨울이었다. 동복리는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22km 떨어진 구좌읍의 첫 마을로 속칭 '곳막(邊幕)'이라 불리는 해안부락이다. 이제는 골목길처럼 돼버린 일주도로로 들어서서 휴게소를 지나 마을회관을 찾았다. 노인회관으로 쓰는 1층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사무소로 쓰는 2층으로 올라가 마침 담소를 나누고 있던 이 마을의 두 어른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기록에 나온 대로 "만덕은 본관이 경주로 구좌읍 동복리에서 1739년(영조15)에 아버지 김응열(金應悅)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는 것과 "그녀의 나이 9살 때 부모와 사별하고 외숙댁에 머물렀으나 10살 때 제주성안 무근성의 퇴기(退妓) 월중선(月中仙)에 맡겨졌다."는 내용을 열거하면서 혹시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실 방문하기 전 '구좌읍 동복리' 마을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마을 사람들' 난에 유일하게 김만덕이 올라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비교할 바는 못되지만 전라북도 정읍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 가보면, 의기(義妓) 논개(論介)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수몰지역의 생가를 옮겨다 한 장소에 복원해 놓고 주변에 기념관과 비를 세워, 충효열의 산 교육장으로 또 관광지로 활용하는 것을 본 터라, 혹시나 해서 찾아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 동복리는 4·3때 마을이 전소되다시피 피해를 입었던 곳이어서 다시 복구할 때 원형이 많이 훼손됐을 것을 감안해서 그 터만이라도 확인할 수 없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었는데, 기대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올 수 없어 마을을 돌아보았다. 골목을 들어서는 순간1970년대 초가를 걷어내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바꾼 집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해풍 때문에 팽나무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산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예로부터 농토가 빈약하여 대부분 바다에 의존해 살았던 이곳 사람들, 어린 만덕도 이곳 주민들처럼 아침 먹기 전에 해풍에 밀려온 감태나 모자반 같은 거름용 해조(海藻)를 한 짐 져 올렸을까? 지금 제주섬 어느 마을이 풍요롭기야 하랴마는 양파와 마늘, 콩 같은 농산물과 성게, 톳, 우뭇가사리를 지역 특산물로 삼고 있는 이곳은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식당이 마을의 상징처럼 돼버렸다.

 

 김만덕의 출생에 관하여는 두 가지 이견(異見)이 있다. 하나는 본관이 김해김씨냐 경주김씨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생지가 제주 성안이냐 구좌읍 동복리냐 하는 것이다. 이는 1971년 김태능(金泰能) 선생이 김만덕 기념사업회의 요청에 의해 제주신문에 12회에 걸쳐 연재했던 <의녀 김만덕전>에 의해 쉽게 그 의문이 풀린다. 물론 김만덕이 돌아갈 당시 세워져 지금도 남아 있는 묘비문에는 김해김씨로 되어 있다. 당시에는 수로왕 후손과 경순왕후손의 일부는 다같이 본관을 김해김씨로 썼고, 그를 구분하기 위하여 선김(先金)과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1846년(헌종12)에 국왕의 윤허를 받아 후김은 경주김씨로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김만덕의 후손들을 추적한 결과 구좌읍 동복리에서 출생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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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봉 모충사에 있는 비석들. 제일 뒤 위가 둥근 것이 김만덕 묘탑)

 

▲ 수양어머니 때문에 본의 아니게 기녀(妓女) 노릇

 

 속칭 '무근성'은 지금 삼도2동의 일부 지역으로 목관아지 서쪽에 위치한 동네를 일컫는 말이다. 제주시가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652-6호인 이형상(李衡祥) 목사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중 '건포배은(巾浦拜恩)'을 보면, 관덕정 서쪽에서 서문에 이르는 부분에 민가가 조금 나타나 있고, 제주판관과 관련된 관청(官廳)과 목관(牧官), 작청(作廳) 건물 서쪽으로 제법 많은 민가가 나타난다. 바로 이 민가 중 어느 곳에 만덕의 몸을 의탁했던 퇴기 월중선(月中仙)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 하면 관에 소속된 기녀들이 쉽게 부름에 응하려면 가까운 곳에 기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탐라순력도> 그림 중 '승보시사(陞補詩士)'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목관아지 군기고와 과원(果園) 사이에 기생방(妓生房)이 있으며, '귤림풍악(橘林風樂)'에는 잘 익은 귤밭 가운데서 목사와 관리들이 기녀들과 함께 풍악을 즐기는 광경과 과원 옆에 음악을 익히던 교방(敎坊)이 나와 있다. 오갈 데 없던 만덕은 결국 수양어머니인 퇴기 월중선의 인도로 기녀가 되는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관기(官妓)는 주로 여악(女樂)과 의침(醫針)을 담당하게 했는데, 의녀(醫女)로 행세하는 약방기생, 상방(尙房)에서 바느질을 담당하는 상방기생도 있었으나, 주로 연회나 행사 때 노래와 춤을 맡기 때문에 거문고, 가야금 등의 악기도 능숙하게 다루어야 했다.

 

 김만덕의 기녀 생활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그녀의 기민 구휼의 자선을 강조하기 위하여 기녀 생활 부분을 거의 생략하거나 지조를 지키다 조용히 물러나는 식으로 그려져 있고, 다른 하나는 객주집을 차려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필요 이상으로 용모가 출중하고 재치가 있는 활달한 성품으로 그리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에 와서 증명해 줄 아무 근거도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시대 제주여인으로서 혼자 힘으로 객주집을 차려 성공하고 그 재산을 내어 기민을 규휼한 점과 과감하게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을 유람하겠다는 생각까지 한 것으로 보아 통이 크고 외향적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다.

 

 따라서, 관기에서 제적되는 과정을 기록한 부분도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는 조상에 대한 죄스러움과 천한 기생이 되어 가문을 더럽힌 죄를 씻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탄원해서 결국 기적(妓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식이고, 후자인 경우는 행수기생까지 올라 목사나 판관과의 친분을 이용해서 '물러나게 되면 쓰러지는 친정을 일으키고 돈을 벌어 사회를 위해 쓰겠다'는 말로 설득하여 뜻을 이룬다는 식이다. 기적에서 벗어난 후 당시동헌(東軒)에 소속된 제주 출신 통인(通引)이었던 두 딸을 가진 홀아비 고선흠(高善欽)을 만나 부부생활을 했으나 얼마 후 병사해버렸다는 기록도 가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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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봉 모충사에 있는 옛 무덤에 세웠던 비석과 석물들) 




활동]
1794년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전 재산을 털어 곡식을 구입하여
십분의 일은 친족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관가에 보내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함
진휼이 끝나자 제주목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임금이 소원을 들어 시행하라 하니
김만덕은 '서울에 올라가서 임금님이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보고 금강산에 올라가
일만 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라고 소원하여 서울로 상경
김만덕을 만난 정조는 의녀반수를 제수하고 궁에서 살도록 하였으며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유람하도록 함
만덕이 궁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려 하자, 채제공이 만덕의 거룩한 뜻을 담은「만덕전」을 지어 건넸고
병조판서 이가환은 만덕의 선행을 시에 담아 전함
김만덕은 1812년 10월 12일 74세로 사망하였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제주 안이 한 눈에 보이는 '가운이마루' 길가에 안장
1840년 제주에 유배온 추사 김정희는 만덕의 진휼 행장에 감동하여 손수「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글씨를 지어
양손 김종주에게 전하기도 함
1960년경 김만덕 묘소의 위치에 공장시설이 들어서자 1977년 1월 3일 모충사로 이묘

[김만덕 기념관 : 金萬德記念館]
1794년(정조 18)에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죽게 되자 자신의 돈으로 쌀을 사들여 제주 사람들을 살려낸
의인 김만덕의 유품을 전시한 박물관으로 사라봉 기슭 남서쪽 모충사 오른쪽에 위치
1976년 설립되었으며 만덕관에는 만덕이 살았던 1739년부터 1812년까지의 각종 의상과 생활용구
영정등 180여점의 유물을 중요무형문화재 80호 자수장 한상수씨에게 임대하여 전시
2000년 6월 소장자의 요구에 의해 자료가 반환되고, 8월부터는 한국화가 강부언씨가 그린 작품 만덕의 일대기가 전시되고 있음
해마다 한라문화제 때 의녀 김만덕을 기리는 '만덕제'가 열리고있으며, 사회봉사에 공헌한
제주도 여성을 선정해 만덕봉사상을 수여

위치 : 제주 제주시 건입동 387-4
관람시간 : 06:00-18:00(동절기 17:00), 연중무휴
관람료 : 무료
가까운 곳에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민속박물관, 제주교육박물관 등이 있음

[병조판서 이가환이 지은 만덕의 선행을 담은 시]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인일세
예순 얼굴이 마흔쯤으로 보이는구려
천금 내어 쌀 사들이고 백성을 구제하였으니
한번 바다 건너 궁궐을 찾아 뵈었구려
다만 원하는 건 금강산을 한 번 유람하는 건데
산은 동북에 안개와 연기로 사이에 있도다
임금께서는 날랜 역마를 내도록 허락하시니
천리에 뻗힌 광휘는 관동을 떠들썩하게 했네
높이 올라 멀리 굽어보며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는
표현히 손을 저으며 바다굽이로 돌아가려나
탐라는 저 멀리 고량부 신인 때부터인데
여인네가 이제야 나라 임금 뵐 수 있었다네
칭찬 소리 우뢰 같으며 고니 노닐 듯 빼어나니
높은 기풍 오래 머물러 세상을 맑게 하겠구려
사람이 나서 이름을 세움에 이 같음이 더러 있겠지만
여회청대로 기림은 어찌 족히 몇이나 되리요




김만덕(1739∼1812)은 1794년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전 재산을 털어 곡식을 구입해 십분의 일은 친족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관가에 보내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했다.
진휼이 끝나자 제주목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니 임금이 소원을 들어 시행하라고 했다. 김만덕은 "소원하는 바가 없으나 서울에 올라가서 임금님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보고 금강산에 올라가 일만 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소원해 서울로 올라갔다. 김만덕을 만난 정조 임금은 의녀반수를 제수하고 궁에서 살도록 했다. 만덕은 또 소원에 따라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유람했다. 만덕이 궁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려 하자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만덕의 거룩한 뜻을 담은 「만덕전」을 지어 건넸고, 병조판서 이가환(1742∼1801)은 만덕의 선행을 시에 담아 주었다. 헌종 6년(1840) 제주에 유배온 추사 김정희는 만덕의 진휼 행장에 감동하여 손수 '恩光衍世' 찬양한 글을 지어 양손 김종주에게 주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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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始勤終怠는 人之常情이니 원컨데 終眞할 것을 如始하소서"

 

국역


1.

"처음에는 부지런하구 나중에는 게으른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데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


2.

"처음에는 부지런하구 나중에는 게으른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데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


 

영작

 


" To initially the estuary comes being lazy eagerly to lastly mind of the person is force to be bitter initially and the end to be  same under the smallness from "


" to initially site len the estuary to the lastly lazy thing upper affection of the person is in small cymbal case place true feelings won khen the place lastly the trivalent flag  like initially under smallness fr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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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대묘


3개의 무덤으로 구성되어있으며,그중에 제일큰 무덤을 대묘라구 한다.

무덤이 길이는 50m, 높이는 9m이며 ,사신도의 벽화가 그려져있는 무덤이다.

이 무덤이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하여,지금까지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구있다

그러나 이무덤이 축조된 시기는 7세기경이라는데는 일치하구 있다.


7세기경에 이러한 거대한 무덤과 세련되구,기품있는 벽화를 남길수있는 주인공은

왕이나,그시대의 권력에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을 추정할수있다.


강서대묘에서 주인공의 누구인지 알려주는 단서가 존재한다.

아래의 벽화를 보면 특이한 동물그림이 나타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신도중의 하나인 북쪽을 나타내는 현무의 벽화이다.

이 벽화를 보면 무슨동물인지,쉽게 알수가 없다.그러나 이동물의 등부분이

거북이 등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수가 있어,거북이임을 알수있다.그 몸을 뱀이

감싸구 있는것을 알수가 있다.


자세히 보면 거북이의 다리가 4개로 보이지만,앞부분에 다리로 보이는것은

뱀의 꼬리이기에 이 거북이의 다리는 3개라는걸 알수가 있다.뱀의 꼬리가

아니구,거북이 다리로 보인다면 할수 없겠지만 ㅡㅡ;; 나의 눈에는 다리가

아니라 뱀의 꼬리로 보인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이 662년에 죽었다구,역사에 기록되어 있다.또한 죽은후

그의 무덤은 평양근처에 무덤이 만들어졌을것이라는건 쉽게 추정이 가능하다.


강서대묘가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7세기부근이고, 그당시에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 연개소문이 권력을 잡았던 시기임을 알수가 있구,


가장 중요한것은, 벽화에서 보듯이,거북이를 상징하는 벽화가 왕릉급 고분에서

나타난것은 이무덤이 유일하다는점이다.이 무덤이전에 거북이가 이런모습이라는

건 상상할수조차 없었다.


거북이는 물을 상징하는 동물인것이다.거북이와 토끼의 전설에서 처럼

용왕의 심부름을 하는 신하가 거북이었듯이,이 무덤이 주인공은

물과 관련있는 신분을 나타내는 인물이라는것이다.


연개소문은 평상시,항상 자기는 물속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든지,

물과 깊은 관련이 있는 물의 후손임을 강조했었다구,전해지구 있다.


연개소문의 이름자체두 물과관련된 이름인것이다.

물을 상징하는 동물이 자신이 사후의 무덤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그려넣은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강서대묘는 연개소문의 무덤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자료를 통하여 개인적인 추리를 한 글이기에 객관적 신뢰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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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사진이다.이 거대한 규모의 무덤이,누군지 모르겠다니,말이 돼냐.............................

 저 정도의 거대한 규모를 만들정도의 집권자라면,당연히 그에 대한 역사가 기록되어있어야

 하는데,그냥,부족장이 저런무덤만들수 있었다면,,경주나,백제의 무덤군의 집권자는

 별것두 아니겠네..부족장보다 더 못한 무덤을 썼으니....




가야(伽倻 혹은 加耶)라는 나라의 역사는 미스테리루 남아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는가에 대하여 살펴보면


가야사람들이 사용했던 생활용품인 토기나,기타 갑옷등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출토유물과는 상당히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나구 있다.


일본서기에는 가야라는 부분에 대하여 상세하구두,자세히

역사서에 기록된 반면에,우리나라의 역사서에는 고의적으로

이 가야부분에 대하여,아예 삭제해버렸고,개인적으로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아니라면 어째서 600년 넘게 존재했던

나라의 왕들은 누구고,무덤군들은 어째서 저렇게 거대한지

일개부족장이 고인돌이나 뭍힐것이지,저런 거대규모의 무덤을

남겼는데 역사기록에 기록된 활동이나 행적이 전혀 없다는게

말이 되는가


고구려,백제,신라와 같은시기에 건국되었고  600년이상 존재했던 나라였구,

백제가 망한것이 662년인데 가야는 그보다 백년정도 앞서서 망했을뿐인데

대부분시기는  삼국시대와 함께 가야국이 역사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가야라는 부분의 역사는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그 흔적이 지워지구

자세한 부분에서는 둥리뭉실 개관하는정도로 지우고 싶은 ,깊게

연구해서는 안되는,그저 둥리뭉실넘어가면 제일좋다는식으로

남아있다구 볼수있다.


가야의 핵심은 일본서기 신공황후편에 기록된 임나임본부설

을 부정해야하는 모순에서,이러한 모습이 나오구 있다구 본다.


나주의 영산강 고분군을 보면, 그 규모는 오히려 경주의

왕릉고분들보다 그 크기가 더크고,무덤양식또한 일본의

무덤양식을 나타내구 있는데,이무덤의 주인공은 왜인이라

단정적으로,확신한다.


현실적으로 보면, 경주의 천마총이나 왕릉급고분 무덤에

우리나라 사람은  그 무덤위에 올라가서 밟구다닌다던지

봉분위에서 관광객들이 모여 놀구 그런 몰상식한 행동을

하지는 않는데


나주의 영산강 고분군의 무덤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위 봉분위에서 잘두 돌아댕기구,관광객들이

봉분위에 돌아댕기면서 놀구,모여서 사진두 찍구 뭔가 대접이 전혀 다르다.


만약에 나주 영산강 고분군이 조상님의 묘라구 생각했다면

어째서 이런 극과극의 행동이 나타날수 있겠는가.


광개토대왕릉비에서두, 신라국경를 침범한 왜라는

존재가 표시되구 있으며,이시기는 가야국이 존재했던

시기로, 왜라는 나라가 신라의 국경을 침범했을때

광개토태왕이 바다건너서 왜나라 정벌을 한것두

아닐것인데,왜국 깊숙히 쳐들어가,정벌을 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때,나타난 즉 신라와 국경을 맞댄 국가는

아무리 찾아봐두,백제,가야이외는 없구

신라 국경에 왜인가득찼다는 의미는

왜인들의 근거지가 한반도내에 존재했다는

의미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둥리뭉실,그리고

600년이 넘게 존재했던 가야라는 나라가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이유가 감추고 싶은

역사라서 그렇다구 나는 생각한다


왜인이 살았던 나라는 가야로 설정함이

올바르다고 본다.


엉터리루 부정하구 있지만,임나일본부설은

그 시대에 존재했었구,가야라는 나라는

왜인이 지배했던 나라였다구 생각한다.


구석기시대 유적지두 발견되면

아주,귀한 대접을 받는데..


어째서,가야시대의 고분들은

경주의 왕릉급고분군들보다

규모나,크기나 형태에서 훨씬더

거대한데두,대우는 천양지차가

되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가야의 역사나 유물은 없어서

연구못하는게 아니라,사방에 널려있는데

널려져있는 가야시대고분군들이

오히려,백제나 신라의 고분군들보다

더많은데,어째서 가야사는 둥리뭉실

은폐되어있단 말인가..


삼국시대에 왜인들이

나라가 남부일부지역에

나라로서 존재했다는것은

사실로 보여진다.





개인적 생각이므로,객관적 신뢰성은 없다.

그러나 가야가 임나일본부설의 대상인

나라라구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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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왕의 명칭을 보면

어떤분은 세조,순조,영조,등이 붙고

어떤분은 세종,숙종,태종 등이 붙는데

구분하지 않구 그냥 아무렇게나 붙인 명칭은 아닙니다.




왕의 명칭뒤에 조와종이 차이는

적통인 왕계를 이어서,왕이 되었을경우는

종이라구 붙이구,


적자가 아닌 이종이나 후궁,찬탈등의 경우의 왕은

조를 붙입니다.


예외적인경우 나라를 창건한경우,적통을 이어받는게

아닌 스스로 나라를 만들었으므로,나라의 시조가

되므로,조를 붙입니다,태조 이성계


그리고,우리나라의 마지막왕은 순종으로

순종은 명성황후인 정비의 소생이므로

적통자이므로 종을 붙입니다.


순조 이렇게붙이면,이분은 적통자로서 왕위에

오른게 아닌,방계자손으로 왕위에 오른분입니다.

그래서,순조가됩니다.



철종,헌종 이런분들은 적통자가 아닌 방계인데

어째서 종을 붙여냐하는 의문이 들수도 있습니다.


이분들은 양자로 입적하여,적통이 되신분들이기에

양자로 입양된경우는 적통자로 인정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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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1517-1578) 호는 토정



이지함은 충청도를 대표하는 문신으로 1573년 포천현감,1578년 아산현감 벼슬을 하셨다.

자신의 묘를 직접 선택하는등 풍수지리에두 능했으며,사람들의 길흉,화복에 대한 사주,
팔자를 적어놓은 토정비결이라는 책을 만드셨다.


토정님의 묘는 충남 보령시 주교면 보정리 산 27-3에 위치해 있으며 문화재 자료 유적으로 지정되었다.토정비결은 후세에 전해져,오늘날까지 서민들의 사랑을 받구있다.


아마두,우리나라에서 일반인에게 가장 역사가 깊구,실생활에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책을

꼽으라면 토정비결이라구 할수 있겠다.


토정비결이 출판된지 500년이 넘어갔어두,그속에 담긴 지혜와 사람의 길흉,화복에 관한

자연의 진리는 변치않구 오늘날에두 적용되구 있다.


가마득한 시간이 흘러어도  토정비결이라는 책이 그 생명이 유지되구,

오늘날의 가치관에서두 애용되는 것을 보면,시대를 초월하는 생명력이

책속에 포함되어 있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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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우리나라의 개국신화인 단군신화에

단군이 천제의 자손으로 하늘에서 내려온곳이

백두산으로서,그 기원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민족의 영산이다.



백두산의 높이는 2,744m이며,주봉(2,744)은 장군봉으로

북한이 소유하구 있기에,중국루트로 올라가는경우 백두산 정상을

등정했다구 볼수가 없다.


백두산 천지의 수심은 200-300m 깊이를 유지하는

산정상에 위치한 호수로서 그 깊이가 아득함을 알수가 있다.

이러한 깊은수심으로 인하여,천지의 괴물미스테리가

나타나구 있다.



단군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역사와 함께 존재한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모든 산의 기본산맥인 백두대간을 형성하여

금수강산의 모태의 산맥으로 위치해 있는 산이 백두산이다.

그러므로,백두산이 없는 대한민국은 존재할수 없으며

백두산을 잃어버리고는 한민족의 웅비의 기상또한 존재할수가 없다.



백두산의 절반은 북한이 임의로 조약을 맺어

포기하므로인하여, 중국의 땅으로 변해버린 현실에서

우리나라의 혼과 정신이 반을 빼아껴버린것이므로

단군왕검이래에 한민족의 개국신화의 신령한 산으로서

어떠한 상황에 직면한다구 하여두,반드시 찾아와야할

민족적 사명이 부여된 산이다.



백두산은 우리나라땅이라는 명제는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변치않구 지켜져야할 절대적 신념이며,백두산을 창바이산이라고

부른다던지,간도는 중화민족의 선조가 살았던 땅이라느니,이미 빼아겨버린거

포기하자느니 하는 개념을 가진 인간은 한민족의 얼과혼을 부정하는

것으로 을사오적보다  더한 매국노인 것이다.


단군이래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단군이래 백두산은 한민족의

영산이었으며,반만년 역사의 커다란 물의 흐름속에 백두산은 한민족의

가슴속에 도도히 흘러왔던것이다.이러한 산을 창바이산이라구 부르며

살자는 인간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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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 부터 600년전인 1,400년도에 살았던 남이장군두 백두산은

우리나라땅이라구 분명한 역사의식으로 표현했는데,,중국의 창바이산

이 뭐가 어쩌구 어째다구...에라이...............................................


조선후기뿐만아니라 조선전기에두 분명히,백두산,간도는

우리나라땅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던것이다.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男兒二十  未平國(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後世受稱  大丈夫 (누가후세에 대장부라 일커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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