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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백제를 이길수있었던 이유는 김유신이라는 당대 세계최고의 명장이 있었기때문이기도 하지만,신라상류층이 위기상황에서 솔선수범하여,나아가 싸우는 싸울아비정신을 평소에 가지고있었기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나온 불영자의 기록을 토대로,신라의 싸울아비정신을 이해해보자.


진덕왕(647~654)=진덕여왕(왕의 이름 김승만)때에,백제의 정예 3만대군이 신라의 성을 빼앗기위하여,쳐들어온다.이때에 맞서싸운 신라의 장군이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신라 군사1만명을 이끌고 나아가,맞서싸우게되는데,백제의 군사들이 용맹할뿐아니라,정예화된군사들이었기에,신라의 군사들은 서로먼저 죽지않으려구,싸우기만하면 뒤로 도망가기가 바빴다.이때에 김유신은 땅에 떨어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위하여,특단의 전술이필요하였다.김유신은 위기상황을 역전시키기위하여,자신의 친구인 불영자를 막사로 불러 대화를 나누게된다.


김유신:추운 겨울이된후에야,소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것을 알게된다.죽음을 두려하지않고,나라를위하여 목숨바칠 정신을 보여줄때이다.나의 둘도없는 친구 영자여,술한잔을 받으라.


 

불영자:위급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오직 저를 선택하고  믿어주심이 ,진실한 친구입니다.그 믿음에 진실로 목숨을바쳐 보답하겠습니다.


두번 절하고 막사를 나와 그의 종 합절을 불러이르길,

불영자:내가 오늘 위로는 나라를 위하고,아래로는 친구를 위하여 죽을것이다.다만 걱정이있다면,나와함께 종군한 나의 아들 거진이 내가죽으면,나를 따라 죽으려할것인데,너는 그러한것을 막아,나의 시체를 수습하여,나의아들과함께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도록하여라.


 

합절:목숨을 바쳐 주인님의 명을 지키겠습니다.


말이끝나자마자,불영자는 말에채찍을가하여,창을들고 홀로,적진으로 들어가,목숨이 다할때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이것을 지켜보던 불영자의 아들 거진이,말을 몰고 홀로적진으로 나아가려하자 합절이 말고삐를 잡으며 말하였다.

합절:주인님께서 유언하시기를,도련님과함께 집으로 돌아가서,어머님의 슬픔을 위로하라구하셨습니다.이제 도련님이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어머니의 슬픔을 더하게하는것이 효도라고할수있겠습니까?


 

거진:아버지가 죽는것을보고도,구차하게 사는것이 그럼 효자이겠는가?


거진이 합절이 잡고있던 말고삐를 칼로 쳐내고,적진으로 들어가 싸우다 죽었다.이것을 바라보던 합절이
"내가 비록 미천한 종이나,대의를위하여 모두죽었는데,나만,구차하게 살아돌아가 무엇을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적진으로 홀로들어가 싸우다죽었다.


세사람의 죽음을보고,느끼는봐가있던 병사들이 앞다투어 진격하여 나아가 싸우니,백제의 군사들이 대패를하였다.대승을 하고난후,유신이 세사람의 시체를 거두어,자신의 옷을벗어 덮어주고,밤새 슬피울었다.


불영자의 이야기에서보듯이,신라에서는 나라가 위급한상황에서는 위에것들은 탱자탱자하면서,도망이나 가면서,졸따구들에게만  죽어도 막아라식이 아니라,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직접실천하는 모범을 보여,군사들의 사기를 높여다는것이다.


신라의 이러한 싸울아비정신은 자기가 아끼는 사람은,뒤에숨겨두고 도망가게하고,아래것들에게만 싸우게한것이아니라,자신이 가장사랑하는 사람부터,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 솔선수범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었기에,신라는 백제를 이길수가있었다.백제도 패망의 마지막순간에,걸출한 영웅 계백장군이 이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지만,상황이 너무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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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는 선조이다.선조는 무능력했을뿐만아니라,국제적인 시대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못한 왕으로써,일본이 임진왜란으로 침략했을당시,명의 힘을 이용하여,국난을극복하려했지만,
결과적으로 사대주의적경향을 심화시켜,자체적인 국가적 발전기회를 소멸시켰을뿐만아니라,조선이 망조의길에있어서,그 근본적모델을,후세에남겨,조선왕조가 망하게되는 근원이되었다.

임진왜란당시,일본이 의주로 도망간 선조를 추격하여,잡지않은이유는 명의 군대와의 다툼이아니라,누르하치라고 불리는우는 여진족의 걸출한 영웅이,만주지역을 완충지대로 지배하구있었기때문이었다.

고구려시대에 한국가의 백성을 이루었던,여진족에대하여만큼은,비타협하는 사대적가치관을 강조하여 국제적인 시대상황를 꺼구로가게하는 결정적인 역할을한 매국적 왕이었다.


두번째는 인조이다.사대적인 정치의 근본인 선조와는 다르게,권력을 획득한 광해군이,여진족에대하여 대결보다는,중립적인위치로,나라의 발전을 도모하려구하였으나,선조시대에 강화된 사대적매국노정신을 이어받은 유신들에의하여,쿠데타가 발생하여,인조가 집권하게되었기에 국제적상황에서,시대상황에 맞지않는 정반대의 길을추구하여,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하였음은 물론,청에 볼모로 잡혀갔던 자신의 첫째아들인 소현세자와 세자빈그리고 손자까지 무참히 죽이면서까지,유신들의 눈치를보며,자신의 권력기반을 유지하려고하였다.그결과 청은 중국을평정하여,중국에 청이라는 큰나라를 세웠지만,우리나라는,얻은것없이 몰매만맞고,오히려,한수아래로,가르침을 받던 여진족보단 못한 나라의 모습을만들었으며 조선이 망하는날까지,주체적의식이없는,속국이나 속방으로서,만족하여 살아가는 나약한시대상을 만들었다.


세번째는 고종과민비그리고 흥선대원군이다.정통성에있어,그권력이 미약했던 고종의 왕위계승은,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휘두룰수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었으며,고종과 흥선대원군의 권력다툼에,민비가 가세하면서 결과적으로,우물안개구리식의 국가의 미래보다는 왕조의안녕과권력의 강화에만 눈똑을 드린결과,스스로 고종과민비vs흥선대원군의 권력다툼을 파생시켜 자충하여 무너져,식민시대로 들어가게하는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다.


시대를 꺼구로돌려,선조와 인조 그리고 고종과민비그리고 흥선대원군이 시대에,올바른 지도자의 선택을보여줬다면,우리나라의 모습은,만주를 아울러지배할수있는 기반을가졌음은 물론이고 나라를 잃어 식민지상태로가게되는, 비극적인선택을 하지않았을것이다.후세의 역사가들이,선조나 인조또는 고종.흥선대원군.민비를 높이는 어떠한시도두 옳지않으며,이들은 나라를 잘못이끌어,패망의 상태를 구걸하여,국가의 미래를 지킨것이아니라,왕조의 안위와안녕만을지킨,조선시대에 나오지말어야할,매국적지도자의 표상들이다.


조선시대의 결단의시기에,매국적행보를한 선조,인조,고종의 전철을 비판하며,나라의 위급상황하에서,국제적정세를 파악하지못하는 지도자가주는 해악이 얼마나 나라를 망조를 이끌어주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구할수가있다.선조,인조,고종의 공통점을 볼수있는데,이들왕은 나라의 운명을 주변국에 맏겨,의탁하려는 사대적정신이 너무투철하여,스스로 뭘해보겠다는 생각은 전혀없구,언제나 수동적역할로,자신의안위와 권력을 유지하는데만 정신이팔린,대표적인 매국노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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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1767년)시대에 있었던,엽기적인사건에대한 황당무계한 판결내용대한 이야기이다.


산음현이라는곳에 7살 여자아이가 동정녀로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80살이었던 영조는,이사건이야기를 듣고,어찌된일인지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구하였다.


영조와 신하들사이에있었던 문답을 종합하여,엽기사건의 내용과 판결에대하여 살펴보자.



영조:7살짜리 여자아이가 혼자 아이를 낳았다니,이게뭔 변고이냐?

신하:나라에 불길한일이니,잡아다 죽여합니다.

영조:남자없이 여자아이혼자 아이를 잉태해서,무럭무럭 잘자란다니.어떻게 된것인지,소상히
     살펴보고난후 처리해도늦지않다.


며칠후.......




산음어사 구상:산음현에서 일어난 일에대하여 자세히알아본봐,7살여자아이가 사내아이를 낳은것은 분명하고
그마을에 돌아다니는 소금장사가 자백하였는데,소금장사의 아들이 틀림없습니다.

영조:여자아이가 7살이 진짜맞아? 키는 어느정도하던데?

구상:7살이 맞습니다.몸은 이미 다자라 보였습니다.

영조:내나이 80이지만,괴물들이로구,괴물이야,이 잡것들을 처리하는것은 별거아닌데,알아보지두않구,여자아이혼자 잉태해서 무럭무럭 잘자라구있다구 요따구 글을 올리면 되겠냐? 성현들이 남녀7세부동석이라는 말을 괜히 한것이 아닌것이야,다 이유가있는것이다.

구상: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영조:7살여자아이,여자아이의 엄마,임신시킨 남자와 여자아이에게서 태어난 사내아이  모두 잡아다가,따로따로 귀향보내어,노비로 삼도록하여라.



오늘날에서보면,대갈박이 제대로 되었다면,저런판결은 나올수가없다.그러나 조선시대는 연좌제로 인하여,집안의 한사람이 잘못하면,죄없는 부모형제,일가친족까지 3족을 잡아다 멸하는 시대상황이었기에,7살여자아이의 엄마에게두 그책임을 물었다구볼수있고.


오늘날같으면,7살여자아이는 피해자로서 보호받아 마땅할것인데,이또한 조선시대의 유교적 공자왈,맹자왈 꼬부랑헛소리나해되는 시대였기에,순결을 잃은여자는 보호의 대상이아니라 비난이나,매장을 시키는면이 더욱컸다.또한 신분제가존재했던 시대였기에,하찮은 신분의 7살여자아이에게는 보호해줘야한다는 그런측면보다 오히려,벌을받아야 사회풍습이 올바른윤리가 선다는 궤변적.이중적가치관이 지배하구있었기에,귀향을보내 노비로 만들어 버린것이다.


여자아이를 임신시킨 남자야 오늘날에 관점에서봐두,처벌받는것은 당연하겠지만,태어난 사내아이는 아무죄두없는데도,이또한 그시대상황에서는,비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보호해주는게아니라,들이나 야산에 버려서 굶어죽게하거나,처벌로 태어나자마자 노비신분으로 예속되었음을 알수가있다.


시간을 되돌려,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정상적인교육을 받은사람이,영조시대로 돌아가,영조임금을보구," 너 대갈박이 제대로 됬으면,이런판결이 내릴수있어"이런식으로 따진다면,그것은 오늘날의 가치관이구,그시대상황에서는 즉각 목이댕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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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반만년역사이래,지도자들이 남긴글이나 말들은 많이전해져 내려온다.

그중에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두 영원히 변치않구 남겨질 감동을주는 명문장을 찾아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의 지도자들이 말한것들은 잘알구,즐겨말하면서,진정 우리나라의 지도자가 말했던 후세에남길만한 어록에대하여,
잘알구있는경우가 드물다.

전체적인 의미와 글에있어서,역대왕이나,대통령을 총망라하여,찾아서살펴본봐
,최고의 글은 다음과같은 글이었다.


뒤돌아 찾아보니,이런글두 있었구나싶은데,
외국인에게 우리나라의 지도자가한 교훈되는 글을 소개할때 말해줘도 좋을것같다.


"우리 함께 꿈을 현실로 만들어 봅시다.
정직하구 성실하게사는 사람,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봅시다.불신과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개혁의시대,
통합의 시대로 갑시다.우리 아이들에게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물려줍시다."



위에 글에서 단한치두 꺼구로 가려는 대통령이라면,그 존재이유가없으며,국민을 두려워하지않구,지배의 대상으로 가르침을 받아야할 존재로 여기는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역사속에서 반복되어왔듯이,왕이 다스리는 봉건시대였을때두,우리나라국민들은 그왕을 폐위시켜버렸다.모든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부여되었으며,권력의 회수또한 국민에게서 나온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통령이 한말이든,그렇지않은 대통령이했든 상관없이 좋은어록은 기록하구,후세에남겨져야한다.두번,세번 읽어봐두 멋있다.대한민국 헌법조문서문에 기록되어두 좋을만한 의미를 가졌다구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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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봉상왕때의 창조리라는 사람에대한 기록이있다.

고구려에 흉년이들어,식량은부족하구,백성들은초근목피로 연명하며,정처없이 유량하는 백성들이많았다.


그러나 봉상왕은,황실의 위엄을보이기위해서는 궁궐을 크게지어야한다구 생각하여,전국에 15세이상의 장정들을 강제루 데려다 궁궐짓는 노역을하게하였다.


이에,고구려의 재상이었던 창조리가 봉상왕에게 충언을하였다.



창조리:폐하,백성이 곤궁하구,유리걸식을하며,노인과어린아이들이 굶어죽어가는 현실입니다.지금은 하늘을 두려워하구,백성을 불쌍히여겨,스스로를 경계하여야할때입니다.폐하께서,이러한현실을 외면하시구,궁궐짓는일에 백성들을 동원하는것은 올바르지않다구 생각합니다.



 

봉상왕:황제가 사는궁궐이 허접하면,지나가던 개두 나무랄것이아닌가,궁궐이 화려하지않으면,위엄없게된다.그대는 나를 비난함으로서,백성들에게 인기를얻으려는것이 아닌가?



 

창조리:폐하가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않는것은,어질지않음이옵니다.이러함에두,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않는것은 불충이라구 생각합니다.



 

봉상왕:으하하하,네가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기전에, 내가 너를 죽일수있다는걸 모르느냐? 더이상말하지말라.




이후 창조리는 봉상왕이  백성들의 곤궁함을 살피기보다,일신의안위와 잘먹구,배터지는길만추구하므로 ,신하들과 모의하여 거사를 일으켜,봉상왕을 패위시킨다.거사날 봉상왕은 주위의 모든사람에게,자신을 도와달라구 구원을 요청해지만 아무도 봉상왕을위하여,나서는사람이없었다.이에 모든것이끝날걸 안 봉상왕은 스스로,나무에 목메어죽었다.



우리나라는,신분의차이가 엄격한,봉건왕조시대라구해두,임금이 어질지못하면,신하와백성들에의하여,폐위를 당하였다.그런데 북한의 뽀그리는,봉상왕보다 더 악한일을 많이했음에두,창조리같이 충언을하는 인간이 단1명두없는 체제라는것은,사상이나 문화나 사회적의식의 문제가아니라,근본적인 무엇인가,우리나라의 민족성과는 다른 괴상한 짱개의피가 그속에 흐르구있다구봐야한다.바꿔말하면,북한의체제는 사람의영혼을 말살해버렸다구 볼수가있다.북한을 6글자로 요약하면,"로보트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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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과 징기스칸은 서로닮은점이많다.이들의 모습을통하여,오늘날에있어서두,배울만한점이있다하겠다.롬멜은 북아프리카라구 불리우는 리비아,이집트등의 나라에서 사막의 여우라는 별칭답게,지략이뛰어난 덕장이었다.



탱크를 주무기로한 기갑사령관으로,빠른기동력으로 치구나가는 대담무쌍한전술로 육군의 최고계급인 원수칭호를 얻었다.징키스칸의 몽골기병전술또한,빠른기동력을 이용한 전격전이었으며,몽골부족들에의하여 으로 추대되었다.





롬멜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와관련된일을 하였지만,전술과전략면에서는,과감한추진력을 가지구있었구,징키스칸또한,자신의 목표로한것을 이루기위해서 사용된전술은,식량보급이나,후방지원등을따지는게아니라,일단 목표가정해졌으면,후방의 지원이없더라두 빠른기동력으로,자체해결하는 전술을구사했다.



극한의 상황인 싸움에있어서,제일 얼빠진지휘관은,모든것을 자로잰듯이 다준비하구,충분한상태가갖춰져야 싸울수있다는 스타일이다.나라가 패망하느냐,승리하느냐의 싸움에서 징키스칸이,후방지원과식량보급이 다잘갖춰진상태에서,싸우겠다는식이었다면,국가전체인구가 백만명정도인 몽골의 상황상,후방보급로지원여력으로는 중국을 차지하기두 힘들었을것이다.징기스칸이 2,000년 세계역사의 가장위대한 인물 1위가되었던것은,"모든게 갖춰져야 그때야 시도해본다"가아니라,"없어두 갖추어나가면서싸우겠다"는 지휘력을 가지구있었기때문이다.



롬멜은 사막의 여우란 별칭처럼,영리한 지휘관이었지만,모든게 갖춰져야 행동했던게아니라,먼저 갖춰지도록 기갑부대를 이끌고 치고나갔다.적의 점령지를 직선으로 통과하여 지나가면,적의 한가운데에 들어가게되구,진격하는곳에서는 이기더라두,좌,우,후방에 포위될것이기에,이런전술을 사용하면,시도두하기전에 뒷다마만까며 시비를 거는인간들이 있었을것이다.이런부류들은 언제나 자로잰듯이,모든것이 다갖춰져야 행동하려구하기에,언제나 나라이든,기업이든 망조를들게하여,아예시도조차하지못하도록 만든다.그러나 롬멜의 이러한전술은 그를 최고의 지휘관으로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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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키스칸이 오늘날에 태어나산다면,롬멜처럼 교사를 직업으로하구있지않을까 생각한다.왜그렇게생각하냐하면,무엇을 가르치구,이끌어가는 리더쉽이없이,무조건 폭군이나,무식함으로는,쪼가리두목은될수있을지언정,세계적인 발자취를 남기지못했을것이다.징키스칸이나 롬멜은 분명히,부하나 무리들을통솔하는 교사적능력이 있었을것이다.롬멜이나 징기스칸이 공통점은,이러한 리더쉽을위하여,부하들과 똑같이생활을했다는점이다.징키스칸의 전투사를보면,들판에서 같이먹구,같이싸우며,직접 몸으로 부하들과함께했다.롬멜또한 아프리카의 사막이라는 특수한 환경속에서,혼자 편하게 안전한  후방에서 자빠져,"공격하라,사수하라,후퇴는없다"이런 헛소리를 한게아니라,직접전투상황을 체험하구,현실에 바탕을둔전술을 구사하며,부하들과 한몸이되어 포탄이 날아오는 실전상황에서 함께했기에,부하들이 신뢰와믿음을 가져던것이다.



롬멜과 징기스칸은 위대한 지휘관이었다.또한 이러한 세계적인 위대한지휘관으로 역사에 남을수있었던것은,"모든것이 갖추어져야 뭘해보겠다"라는 얼빠진자세가아니라,해나가면서 갖추어나간다라는 추진력과
결단력이있었다는점이다.



롬멜이 교사라는직업에서 기갑사령관으로 최고의 명성을얻었듯이,우리나라에서는 박정희대통령두 교사에서 군인의 길을걸어,우리나라의 근대화의 토대를 마련한 공이있었는데,박정희 대통령이 과실이있음에두,존경을받는이유는,무엇인가를 하려구했을때,허허벌판인 울산에,현실적으로 어느누가 투자를하겠읍니까?이렇게 해보기두전에 자빠져 뒷다마만친 장관의 정강이를것어차이게만들만큼,해보기두전에 잣대만굴리구,안됍니다요,가망성이없습니다요라구만 외치는부류들에대하여,"해나가면서 갖추어나갈수도있다"라는 지휘력이있었기때문이다


롬멜과 징키스칸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삼천포로빠졌다.어째든 기적이라든지,역사에 족적을 남겼던인물들은
"해나가면서 갖추어나간다"였지,대갈박만 굴리며,시도조차안해보구 자빠지는 스타일들은
아니었다는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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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기록들을보면,하늘위로 소원을적어서 날린 풍선이 몇개월있다,지구반대편의 나라에 도달했다느니,소원을적어 바다에 띄운 종이가 몇십년이지난후,살아있는 물고기에달려있었다는 그러한기사들을 봤을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보면,이미 200년전에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예보다,더극적인스토리가기록되어있다.



때는 정조18년(1794년),망망대해인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되어 죽게될상황에서,




박계곤이라는사람이 배안에있던 널빤지에다가 간절한염원을 담아 부모님에게남기는 글을적구 죽었는데,그널빤지가 부모가 사는 마을에 밀려와 부모가 그것을보구,아들이 사고가난것을알구,배를빌려 바다를 수색하여,죽은아들의 시체을 찾을수있었는데,이것은 하늘이 아들의 효성에감동하여 나타난 징조라하여,나라에서 정문을내려줬다는 기록이보인다.



집앞이나 마을입구에 세우는 정문(열녀문포함)은,효부나,열녀뿐아니라,남자두 받을수있는것이었다.이기록을 보면서,분명히 있었던 실화이니,기록되었을것인데,배가 난파되기직전에,언제먹을갈구,언제붓으로 글을쓸시간이있었을까 하는의문두 들지만,오늘날에두,비행기사고로추락하는 그짧은 순간에두,수첩이나 여권등을꺼내 가족들에게 당부와기록을 남기는예가있는것을보면,불가능한상황인거같지는않다.



어찌되었든,사람이 진정 간절히 기원하는 소원이나 바램은 속담에" 지성이면 감천이다"말처럼,비록사람이
죽을상황에서두 이루어짐을알수가있다.무엇인가 진정바란다면,이루어짐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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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는 다양한 고분군들이있다.우리나라에서두,아직미발굴상태로 남아있는 많은고분군들이있는데,그중에서두,가야의고분군들이 대표적이다.박물관에서 보여지는 진귀한 우리나라의 보물들은 대부분이 고분에서 출토되어진 유물들이다.




정식으로 발굴하는게 아니라 고분속에 들어있는 보물들을 몰래 도굴하는 도굴꾼두 시대와상관없이 있어왔을것이다.이미 도굴된 고분들속에는 컵라면이나,음료수병이라든지 이런오늘날에 쓰여지는 물건들도 발견되어진다구한다.







고분유물들이 연대측정에서,저런물건들이함께있다면,참황당한일일것이다.도굴의 문제는 오늘날에의 문제만이아니라,고대로부터 존재했을것이기에,고분의 연대에있어,전혀 나라와시대배경이 안맞는 물품이 들어있다면,대갈박을 굴리며,이물건은 어찌된연고로 이곳에있는가? 정식으로 발굴하는 사람들을 미스테리에 빠지게한다.




어찌되었든,세계의 고분군들이,우리나라의 고분군들과 비슷해보이는것들두있지만,스케일이나 모양면에서
특이한고분들두 보인다.
세계의 고분들은 어떤모습들인지,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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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거대한 산전체가 하나의 고분,스케일이 웅장해보이는 고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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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맹이를 세워놓은 모양이 특이한 고분이다.무엇을 상징하는 고분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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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광개토태왕릉처럼,돌무더기루 쌓아올리것같긴한데,돌은 국가를불문하는 고분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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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가야시대의 무덤같은 모양인, 언덕같은 고분이,다른나라에두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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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분하면 둥근모양의 봉분이 생각하는데,피마미드처럼 삼각형이네요.







전체적으로보면 세계의 고분들의 모습이,우리나라의 고분들과는 조금씩다르게보여두,자신들의 역사유물인 고분들에대하여,보존하구,기리는정신은 어느나라나 똑같은것같습니다.우리나라의 영산강유역에있는 가야시대의 언덕처럼 큰고분의 봉문위에 올가가 사진찍구,앉아 김밥벅구,음료수먹는분들,봉분위에서 그러는거,몰상식한짓입니다.가야시대의 고분의 주체가 우리선조가아니라구해두,그래서는안되는것입니다.어떤주체가 뭍혀있든,그곳은 우리역사의 중요한 고분들이기에,후세에두 잘보존하여,가꾸어나가야할,우리역사의 일부분인 역사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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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용서받지못할 죄가있다면,어떠한죄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게끔하는 일이생겼다.다른것은 몰라두
이러한죄를 저지른사람은
작두로 벌해야한다구 생각한다.



kungmi가 생각하는기준에서,나라의 근본을 엎어버리는 가장 사악한죄는,첫째가 열심히 공부한학생들의 성적을조작하는 교육에대하여 저지르는범죄,둘째는 공무원또는공공기관의 시험에관련되어 조작하는 인간부류들은 작두처벌두 약하다구생각한다.





감사원에서 발표되어진 내용을보니,입이 딱버러져 말이안나오는 금수만도못한짓거리를 한것들이있었다.
증권예탁결제원이 2007년도 신규직원을 뽑으면서,공적인 필기시험성적을조작하여 11명을 탈락시키구
자격미달인 14명은 올리구,면접단계에서조차 이미평가되어진 면접결과조차 조작하여,국가공공기관을
사익적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데 가담한것들이있다는 발표였다.



그옛날 탐관리오리라는 명칭처럼,사소한것같지만,국가의 공적채용시스템을 팔아먹은 이런짓거리들은
나라의 근본자체를 망가지게하는 어떠한범죄보다 악독한영향력을끼치며,사회를 부패하게만든다.


들어갈때부터,저런부패고리로  나라에 채용되었는데,증권관리를 어떻게할것인지는 삼척동자두
알수있는것이다.완전히 이런것들은,쳐버려야한다.부패와무능의고리를 만들어,국가기관을 사익적기관으로
만들어버린 저런것들은,완전히 개작두시켜두 그들의 행위에대한 분노가 가시지않는다.



일개인의간의 문제는 일개인에게 미치지만,교육과,국가기관의 부패는,나라자체를 망가뜨린게된다.
엄격한처벌이 필요하다구생각하며,증권예탁결제원뿐만아니라,국가기관으로 이러한짓거리하는것들은
철저한 감사를 통하여,엄격하게 처벌해야한다구생각한다.이런죄를 범하는것들은 나라를 망조들게하는
가장기초적인 근본적 기생충들이며,그피해는 수천만 국민들에게 해악을끼친다.



저런짓거리한것들에게,내가 주고싶은것은 개작두다.이런 버러지만두못한것들,사회와국가의 근본을
왜곡시키구,열심히 공부하는인간들을 좌절케하구,절망케한,너희들에게는 "버러지"가 딱어울린다.


2007년도 증권예탁결제원사건
,역사고리카테고리루 남겨두겠다.후세에두 영원히,버러지소리들어 마땅하며
반면교사를 삼아,경계해야할 버러지들이였기에 기록해둔다.이런버러지들이,글거모은돈으로 변호사를 구해 미꾸라지처럼, 엄격한처벌이 유,야무야넘어가지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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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동물과다른 가장중요한 덕목은,대의를 의하여,자신을 희생하는정신이다.그 대상이 국가이었던,국민이었던,달콤한 개인적사익을포기하구,더큰 대의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많은나라일수록,세계에견주어 부끄럽지않는 일류국가가 될수있는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래루,백성이니,국민을위한다는말을하는 주댕아리들은 넘쳐났지만,문제가 생기면 제일먼저 나라와국가를위하여,초개와같이 목숨을바친것은,힘없구,배운것없는 민초들이 항쟁의식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는 반만년역사속에,주위에 아무리 강대국들이 침략한다구해두,끝까지 나라의 국체를
수호하여,
한민족의 기상을 오늘날까지 유지하구있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힘들만큼의 강인한 민족성을
가지구있다.



역사를보면,넘쳐나는 주댕아리들은 많았었구,그들이 주장하는 국민을위한다는 명분은 많아지만,실제로 위급시,제일먼저 도망갔던것은 지도부와 국민을위한다던 권력층이었다,실정과 주댕아리들에의하여 국가가 약해져,백성들이 삶이 도탄에빠졌을지라두,외적의 침략에맞서,결사항전하여,한민족의 기상을 끝까지 지켜낸것은 뒤에남겨진 학정에 시달리던 민초들이었다



이번의 총선을보면,입으로 국민들을위한다구 주댕아리를놀리면서,국회의원이 뭐가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오로지 자신이 안뽑힌것은 국민을위한것이아니라는 궤변적논리루,말로는 국민을위한봉사를 하구싶다면서
행동으로는 국회의원한번 더해먹구싶은 사익을위한 행동들을하는 쇼로느껴져서,분노가생긴다.



대선에서 국민들이 보여준 심판은 분명했구,그메세지또한 명확했다.말로만,주댕아리로만 국민들을위한
다구 쇼하는것들을 심판하겠다는 메세지였다.여,야를 막론하구,탈락되어진사람들이,또다시 국민이라는
명분을 내걸구,그들에게있어 주댕아리로 외치는 국민은 있을지언정,그러한 볼성싸나운행동속에  국회의원한번더해먹으려는 욕심은 느껴질지라두,국민들을위한 다는 헛소리는 다 쇼로느껴진다.



대통령의 아들이라서 억울하게 교도소간거라느니,햇빛정책때문에 교도소갔다느니,무슨박터지는 희생때문에 그래서 연대라느니,그리하여 무소속이라두 나오는것이 국민을위한 봉사라구 외치는것을보면 다 쇼로만보인다.솔직히말해라,국민을위한 봉사를하구싶은거냐? 국회의원 한번더 해먹는 달콤함이냐? 자신이아니면,국민들을위하여 봉사할사람이 대한민국에없다구 보구 그런짓거리들이냐? 오로지 자신만이,해먹어야 국민을위한것이구,아니면,국민을위한 봉사할 사람이 없는가?




사람은 물러나야할때와,나아가야할때를 잘알아야한다
.뉴스를보니,강재섭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국회의원
공천권을 반납하구 총선불출마했다는기사를 보았다.강재섭이 한당의 대표인것은 알지만,자세히 그사람이 누구인지는 난 모른다.그러나 그가한 행동은 박수를 쳐주고싶다.주댕아리가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것,그러한 정치인들을 바랬기에,박수를 쳐주고싶은것이다.




도대체가 여,야가 대갈박들이 조금이라두있다면,국민의 원하는바가 뭔지,무엇을바라는지,알아야할것
아닌가,정도를 가라는것이다.정도는 무엇이냐? 나억울해요,나아니면 안돼요,원칙이라는것이있다.어느당
이든지,자신이 진실로 국민을위한 봉사를하기위해서는 이길이아니면 전혀없구,오로지 국민을위한 삶을
살게다구,대갈박을 하늘을향하여 부끄럽지않다구 생각한다면,원칙을 깨구나가 무소속으로 나온다해두
국민들은 그런사람은 뽑아준다.




그러나 원칙을깨구 ,갖가지 변명과명분을 치덕,치덕붙이구 단지,자신이 뽑이지않았다구,정도를 벗어난것이라면,그런인간류들에게 국민의 선택은 없다.단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한번더 해먹으려구 급조되는 정당은 후진적 정치문화가 살아져가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통하지않느다는걸,대선에서두 국민들이보여줬다.




대의를위하여 책임지않구,행동하지않는 그러한정치인들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사라져야한다구본다.
입으로만,주댕아리로만 국민들을위한다구하구,실제루 국민를위한 대의적 행동을보여주지못하는
정치문화는 반드시 사라져야한다구생각한다.




이번에 강재섭이라는 사람이 행동을보면서,쇼킹한 감동이 느껴졌다.우리나라의 변화하는 정치문화를 볼수있음에감동이구,진실로 국민을위한 자기결단의 희생이뭔지보여주었기에,국민의 한사람으로 박수를 쳐주고싶다.



행동과 결과가없는 정치인들은 가라,주댕아리로만 국민을위한다는것들은 사라져라
,행동없는 주댕아리들에 신물이났었기에,감동으로 다가온다.흐르는물은,여울져 구비쳐가더라두,망망대해인 큰바다로 향하는것이다.우리나라의 후진적정치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꿀려면,이러한 행동하는 실천들이 많아져야한다구 생각한다.주댕아리로만이 아닌,행동하구 실천하는 그러한 선진적정치문화가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질때두 되었다구생각한다.새로운 정치문화를 향한 패러다임의변화라구 생각하기에,역사자료카테고리루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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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두,오늘날의 국방의 의무처럼,징병제로 상시근무하는지역이 있었는데,경원,회령,경성등의 북쪽변방지역으로,2년간의 근무를하였다.


그당시 군인들은 대부분,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변방을지켰는데,오늘날의 군대가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미혼이지만,조선시대에 그나이정도는 미혼일수가없는 나이대에 해당한다.


가정을 이룬 일반병사들에게는 관사라든지,군인아파트라는 그런제도가 아예없구,오로지,의무로서 가정과분리된채 변방지역에가서 군복무를하게했다.




조선시대에 가정을 남겨두고, 2년동안 홀로 변방지역으로가서 군복무 일을했던,의무군인들의
성적인문제에대하여,어떤관례를 가지구있었는지 살펴보자.


세종 18년(1436년)

세종과 함길도 감사에게내린 어명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져있다.

세종:자고로 변방에,아내없이 근무하는 병사들을위하여,창기를두어 위무하게하는것은 그유래가
      오래되었다
.병사들이 고생이많은데,창기나,기녀를두어 사졸들을 위하는것이 이치에 합당하다.



우리가 알구있는 세종대왕의 모습과는 일견다른모습으로 보일지두모르겠다.군인들이있는곳에
함께하는 창녀의 문제는,오늘날에만 존재하구있는 모습이아니라,6백년이넘는 세종대왕 당시의
조선시대상을 살펴보면,공자왈 맹자왈하며,남녀 7세부동석이라구할만큼,오늘날보다는 100배
더 엄격한 도덕룰을 강조했던 시대였음에두 세종이,저러한 전지를 내릴정도인것을보면,
이중적 도덕률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조차두,도덕성을 눈감구 예외로해주는 지역이있었음을 알수있다.



조선시대에는,관리뿐만아니라,일반서민들의 삶속에서두,결혼하지않은이성간의 관계에대하여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였구,그것을 어겼을때의 처벌또한 아주엄했다.일반관청에 소속된 관기라구
할지라두,관리와 관기의 관계까지 간통으로 처벌받은 기록들이 많이있다.조선시대상황에서,배우자가있었다 하더라두, 변방의 사졸들에게,창녀나 기녀를두어,위무하도록하는것이 오래된유래구,그렇게하도록 왕명을 내리는걸보면,공자왈,맹자왈을 부르짓으며,엄격한 도덕사회를 강조했던 그러한 시대상황에서조차,군인과 창녀사이의 관계는 예외로해주었다는것은 특이한 도덕률이라구볼수있다.


오엑스퀴즈로, 조선시대에 간통죄를 예외로해주는신분과지역이 있었다,맞으면 0,틀리면 x
정답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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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국민은 인류보편적인 자유와인권를 외칠권리가있다구봅니다.중국의 강제지배를받구있다구할지라두 티베트국민이 자유와독립을외치다구하여,학살할권리가 중국에게없음두 분명합니다.


약하구,힘없구 무지한나라의 국민들이라구,강제루합병하구 탄합하구 학살하는 중국의 행위는 규탄받아마땅합니다
.

티베트사태를보며,분명히 알아야할 교훈이 우리나라에두있습니다.우리가 힘없구,약하면 언제든지 티베트처럼,무자비한 탄압과학살로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구 자신의나라영토라구 주장할것이기때문입니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이러한 인류보편적가치에반하는 행위를한다구해두,자신의 나라에 이익을쫓아
모르는척하는 국가들이있는 현실을보면서,우리나라국민들두 똑똑히 알아야한다는것입니다.인류보편적가치에대한 이성에 따라 외치는게아니라 자신들의 나라의 유불리에따라 인류보편적가치가 말살되구있는데두,침묵한다는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군사적으로 강하기에,저런꼴을 안당하구있을뿐,우리가 원하는 자유와인권이있는 국가의 논리는 우리나라가 힘이없으면,조선후기 우리나라가 힘이없어 도와달라구 모든나라에 외쳐두,모든국가가 침묵하였던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우리나라의 이익을위한다구해두,지난날 우리나라가 껵었던 나라잃은 설움을 당한
기억과 반성을가지구있기에,강제지배당하는 티베트의 국민에대한 중국의 학살에 모든나라가 침묵한다구해두,우리나라는 그러면 안돼는것입니다.



티베트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의 역사라구날조하구,강제침략하여합병하구,티베트인들을 학살하는 중국을 강력히 규탄합니다.우리나라가 티베트에대한 중국의 학살을 우리나라의 유,불리만을따져,침묵하구 모른척
한다는것은,지난날 우리나라가 당했던,그리구 지금도 진행되구있는 우리나라역사에대한 중국의 역사날조에대한 침묵이며,인류공통인 3.1독립선언정신을 팽개치는것이며,우리나라의 존재이유로서 부끄러운일입니다



우리나라정부가 목소리를내지않는다면,언론이나국민이 정부로하여금 움직이도록,인류보편적가치를 말살하구 티베트인을 학살하는 중국을 규탄하는 분명한 목소리를 우리나라가 내도록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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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의하여 무자비하게 학살당하구있는 티베인들의 영혼과 그들의 피와 눈물에대하여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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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테이토칩으로 만들어먹어두맛있구,잘게썰어서 볶아먹어두 맛있구,굽거나 쪄서먹어두 맛있는 감자
감자 그이야기속으로 들어가보자~^^;;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감자는 귤을 의미하구있다.우리가 먹는 현재의 감자라는 단어는 감저(甘藷)라는말이 표준으로 기록되어있다.감자는 귤을 말하구,감저는 오늘날의 감자를 말합니다.


감저는 조선왕조실록에보면,그기록이 거이없구,언제 우리나라에 감저가 알려지게되어는지,유추해볼수있는구절이있다.우리나라에 감저가 들어온시기는 대략 1800년도로 볼수있으며,그이전에는 감저라는 식물은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거나, 있지않았다구 볼수가있다.그러므로 우리나라 국민들이 감저를 좋아하게된것은 200년이 채안된다구 볼수있다.



옛날에 일본의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상당히 밀접하게,물건이든,인적교류이든 활발하게이루어지구
있었다.
감저에 대한 전래를 유추해볼수있는 구절이 순조9년(1809년)에 대마도를 방문해서 그곳의 생활상을
기록하여 순조임금에게 바친 현의순이라는 사람의 기행문에서 볼수있다.



대략적인 요지는,"대마도는 우리나라와 의존하여 살아갈수밖에없는 무역활동을하구있구,대마도주는 자신의
다스리는 백성이 해촌에 사는 사람에게는 배(고깃배)를 내려주고,산속에사는 사람에게는 총을 내려주어
살게해주고있었으며,대마도의 가난한 백성들은 감저를 식량으로 삼구있었습니다"



귤을 뜻하는 감자는 조선개국인 태조때부터두 그기록이 보이나,오늘날의 감자를 뜻하는 감저는
조선말기 순조임금때에야 비로소 감저라는 단어가 나타나구,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감저가 아니라
대마도의 백성들의 삶을 묘사하는 구절에서 감저가 나오는걸 보았을때,1809년경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대마도를 방문해서 감저를 먹어봤던지,감저를 가져왔던지,아무튼 감저를 우리나라 백성들이 인식하게
되었음을 알수있다
.예를들어  병자호란때의 역사극을 하면서,배고픈 백성들이 감자를 쪄서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나온다,
이러면 대갈박을 맞아야겠죠^^;;감자는 빨라두 조선왕조기록을 보면 1809년이 넘은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것입니다.



감자는 조선말기부터 구황작물로 가난한 백성의 주식이었지만,의식주가 풍부하구 다양해진 오늘날에는
웰빙식품입니다
.감자가 가진 효능은 우리의 몸을 좋게해주는데,그중에서두 달덩이같은 뽀얀피부와
피부를 탱탱하게주는 성분을 감자가가지구있는데
,못먹구,굶주리는 북한동포인 여자들이 화장빨이 없어두,달덩이같은 피부를 가지구있는것은,먹을게없어서 감자를 주식으로 먹는 북한의 식습관의 영향이라구두
볼수가있습니다.



여자들인경우,감자를 좋아하구,틈틈히 감자요리를 자주해먹으면,건강에좋을뿐아니라 피부에두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먹을것이 많아진 우리나라현실에서 감자는 가난한 백성들의 주식이아니라,웰빙의
간식거리정도가 되었습니다.감자탕에 감자가 없으면 아무리 맛있는 뼈다구가 들어있다해두,먹은것같지가
않는것처럼, 감자는 맛으로뿐만아니라 피부건강면에서두 고운피부를 가지게해주는 좋은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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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스가 수신이 안될때,



팩스가 수신이 안되는경우는 팩스모델마다 그형태가 다르지만,그기능에있어서는 비슷합니다.
팩스가 오류현상으로 안될경우는 그오류에대한 메세지를 보여주는 창을 팩스마다가지구있습니다.
그창에 나타나는 오류메세지를보면,어디가 문제인지를 알수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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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스가 수신이 안되는경우,대부분은 paper jam이라는 용지걸림메세지인경우입니다.


paper jam이라는 메세지가 나타나며 팩스수신이 안되는경우는,팩스모델마다 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용지걸린것을 빼어낼수있게 열수있는부분이있습니다.


옆의 모델인 cf-360인경우는 메세창이보이는곳 자판전체를 잡아당기구,복사용지를넣는곳을 들어주면,걸린용지를 빼어낼수가있습니다.




걸린용지를 빼어낸후,타이어바퀴처럼 동그란 고무가붙어있는 길다란 막매기부분인 롤러가있습니다.고무부분을 약간물을 뭍인수건으로 딱아준후,그주변에 걸린용지에 찢어진 종이조각이나,기타 이물질이 들어있지않은가살펴보구난후,마른천으로 잉크카트리지 주변을 청소해주면 paper jam으로 인한 팩스수신이 안되는문제를 해결할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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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를 보다보면,병졸이 허겁지겁 달려와서,"장군님,어쩌구,저쩌구되었사옵니다."
이렇게 장군님이라구 호칭하는데,진짜루 그랬을까?


사실은 전혀그렇지않다.장군이라는 일반명사에 님짜를 붙이구,좋아라하는 사람은 역사상 딱 1명이있는데 김정일 장군님이라구 호칭을받는 김정일뿐이다.


자신이 태양처럼 위대하니,관직명옆에 님자를 더붙여 부르게하는 사람두 있을수있다.이것은 잘못된사용이다.





역사기록에서 사람은 관직명에 님을 붙이는것은,있을수없는일이었다.
역사드라마에 장군이라는 단어에 님을붙여서 호칭하는것은,역사의 허구이다.
장군들에게 장군님이라구 부르지두않았지만,역사드라마의 성격상 불러야한다면,"장군,어쩌구,
저쩌구 되었사옵니다."이것이 바른호칭이다.



실제루 역사기록에서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벼슬을 가진 무관들을 호칭할때 장군이라구
부르지않았구, 그사람의 맡은직책 예를 들어 병마절도사라면, "절도사합하" 이렇게 불렀다는것이다.



역사드라마에서 일반명사루 장군을 사용한다구해두,님자를 붙여서 사용하는것은,완전한
잘못된조합의 호칭이며,역사기록에 장군을 장군님이라구 호칭하였다구 기록된것두 전혀없다.



장군에다가 님자를 붙이거나,대통령에다가 님자를 붙이는것은,이중긍정은 부정의 뉘앙스를갖구
이중부정은 긍정이 의미를 가지듯이 옥상옥을만드는 단어로,각하라는 호칭보다 더 황당무계한
조합으로,역사상 장군님이나,대통령님으로 기록되거나,불려지는것은 완전히 잘못된 부정적의미를
포함하게되는 호칭이다.



대통령은 대통령이란 단어자체가 가장최고를 나타내며,장군또한 그러하다.
거기다가 님자를 덧붙이는것은,자신이 우월해서 칭송받아 마땅하다는 교만함이 담겨져있다.



대통령인경우 예외적으로 현대적의미로 부가하여 사용될수는있는 단어가있다.
상대방사이에 부를경우는 이때 부가되는것은  대통령각하,이렇게 부르는것이 합당하다.



미국대통령을 부를때 mr.president 라구부를때,mr는 ~씨라는 의미보다,대통령이라는 직위에
대한 존칭을 붙여다구 볼수가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신문이나,기타 3자가 부를때는 대통령이렇게 글을적으면 되겠지만,
당사자로 부르게될경우는,대통령 이렇게부른것은 예의가아니다.그렇다구 미국처럼 미스터가
씨라는 의미를가진다구, 대통령씨 이렇게 부를수는 없다.또한 프레지던트 앞에 수식된 미스터는
존칭의 의미로부여된것이지,김씨,이씨 이처럼~씨라는 의미로 붙여져 사용된다구 볼수가없다.



당사자로 부를때는,대통령 각하, 3자로 글이나 방송으로 부를때는 대통령이라구 부르는게,올바르다.
어찌되었든,"님"이라는 단어조차두없던 시대의 역사드라마에, "장군님" 이렇게 부르는것은 높임을
받는대상을 더높여서 엿먹이는 단어이며 꼭 장군으로 불러야한다면,장군님이 아니라 장군,
이렇게부르는것이 역사기록에 부합된다.



우리나라에서 역사기록에 장군이란 직책에, "님"자를 붙여서 장군님이라는 칭호를 만들어낸것은
배불뚝이 김정일,뽀그리하나로 족하다.장군님이라는 단어는 역사속에 존재하지않았던
날조된 호칭이다.대통령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사람이나,장군님이라는 호칭을 만들어낸
사람이나 대갈박수준이 비슷하기에 고따구 엉뚱한 조합의 을끌어다 붙여다구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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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행적과 이미지는 다양한해석이 가능하지만,그사람의 공이나 전술등의 면에있어서는 제대로 알려져있지않다.

연개소문에대한 공에대한 기록은 달랑 2줄밖에없다.
삼국사기의 보장왕21년(662)에 기록되어있다.


"21년 봄 정월, 좌효위 장군 백주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개소문과 사수 언덕에서 싸우다가 그의 군사가 전멸하였다. 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소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다. 그 때 마침 폭설이 내렸으므로 그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역사란 문장구절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그당시 시대적상황을 고려하여 전체적인 문맥을 이해하구
풀이해야한다.세계3대해전의 한사람인 도고헤이아치로 제독두 실전사령관은,수도나 궁성에 머물러
지휘하는게아니라,직접 현장에서 지휘했다는것이다.또한 당나라 장군 이세적을 보더라두,
옛날의 장군들은 80살먹었더라두,현장에서 싸우지,수도에 머물며,현장의 군을 지휘하지않는다는것이다.


그런데,유독 연개소문은은 실전사령관이었는데,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에서 연개소문이 위치는
언제나  평양성에서 지휘했을것이라는 어리석은추정에서 사수대첩의 의미가 축소되구있다.


사수는 평양성근처에 위치해있지않았으며,연개소문은 고,당전쟁시 수도평양에서 머물면서
지휘했다는 이런엉터리해석은 기본적으로  상충되는구절을 만들어내는 허구의 가설일뿐이다.


연개소문은 왕이아니었구,실전사령관이었다.적국과 싸울때 누구보다 먼저,앞장서서 나아가
싸웠을것이다.
연개소문은,평양성에서 지휘하다가,방효태군의 별동대가 온다는것을알구,
소정방에게 포위되어진 평양성을 빠져나가,평양성근처에서 방효태군을 기다리다가 싸워서 이겼다라는
이러한 논리는 전혀 엉터리가설일뿐이다.


좌효위대장군 방효태가 이끄는 군은 별동대가 아니라,핵심적 지원군으로,그병력규모는
기존에 평양성을 에워싼 당군사보다 더많았을것이며,군사의 수는 못해두 30만명은 넘었을것이다.


방효태가 이끄는 군사는 수군이아니라,육로로 행군해서 들어왔다.이미 평양성이 포위된상태에서
지원부대가 오구있다는걸 알았다면,연개소문이 위치는 원래부터,평양성에있지않았구,최전선에
위치해있었다구 보는것이 타당하다
.요동성이나 안시성등 지금의 동북3성근처의 사수라는 강
어디에서인가 퇴로를 끊구,연개소문이 기다리구있었다구 볼수있다.


이때 주목해봐야할 기록이 사수대첩이 일어난 당고조때가 아닌 당태종이 이전에 고구려를 침입하여,
도종이라는 사람하구 나눈대화의 요점이,어째서 자신이 고구려공략에 실패하였는가라구 물었을때
안시성에 집착하지말구,평양에 먼저 별동대를 보내서 혼란케해어야 하지않았나 대답하는기록이다.


연개소문은,최전선에서 싸웠을것이며,싸움에 승리는,오히려 당나라영역으로 꺼구로 진격하는
전술로 맞대응했다구볼수있다.당태종이,늪지를 급하게 도망갔던 이유도,후방이 연개소문에게
차단되었구,오히려 당의 영역에 연개소문이 진격하였기때문이었을것이다.


연개소문이 평양성에 머물러 지휘했다면,어느세월에 평양성에서 연개소문이나와  당태종이 그렇게 겁을
먹구 살기급급하여  급히퇴각하구 도망갔는지 그해답이 나오지않는다.


사수대첩에서두,연개소문의 위치는 평양성이 아니라,최선에위치해서 싸웠을것이구
평양성에 밀구올라간게아니라,최선에서 오히려 당나라영역쪽으로 밀구올라갔다구 볼수가있다.


후방이 퇴로가 막혀있던,소정방군대뿐만이아니라,지원군으로  넘어왔던 모든 행군도총관들두,
요동지역에서 현장지휘를했던,연개소문에 의하여,다 궤멸되었다구볼수있다.


그러므로 사수대첩에서 죽은 당군의 숫자는 최소한 30만명이상이었으며,연개소문의 성격상
단1사람두 남김없이 죽였을것이다.전멸이 뜻하는것은,포로가 없다라는의미로 해석하는것이
타당하다.


어찌되었든,고.당전쟁에서 연개소문의 지휘위치는 평양성이아니라,최전선이었으며,안시성전투,
사수대첩등 모든전투에서 연개소문이었을것이다. 안시성성주 양만춘이라는 인물두 허구일
가망성이 100%라구 생각한다.안시성이 포위되었을때 고구려에서 지원군을 10-20만을 보냈다는것은,
안시성을 구하기위하여 우리나라는 전력을 기울였다구 볼수있으며,그렇게한 가장중요한이유는,
그러한 병력을 동원할수있구 지원할수밖에 없는 중요한인물이 안시성에 포위되어 지휘하구
있었다구볼수있다.


즉,당태종의 눈까리를 맞춘화살이나,당태종이 늪을따라 목숨을 구걸하면서 도망가게한,당나라영토
깊숙히 추격할수있는 권한이나 배포를가진것은,그당시 상황하에서는 일개성주가 그렇게했을리는없구,
현장지휘자가 연개소문이었다면,가능한 이론이라구볼수있다.


안시성전투나,사수대첩 이모든 일련의 전투는 연개소문이 직접지휘했구,당태종이 눈까리에 화살을
맞구,안시성성주를 기특하게여겨,비단과 의복을 내렸다는데,그대상은 허구인 양만춘이아니라,
연개소문을 역적이라구 기술한 삼국사기의 잘못된평가기록때문이었다구 볼수있으며,역적에게는
공이 있었두,작게하거나,없게기술하는게 역적기술에 더합당하기에,누구인지는 모르는 안시성성주라는
두리뭉실한기록으로 넘어가버렸다구 볼수있다.


이런한 시대적기록이 조선후기에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로기록돼지만,조선시대는 고구려역사의
암흑기였기에,제대로된 개념을가지구 고구려역사를 논할수있는 사관이나 역사가는 애시당초 존재하지않구
멸종되었던시대였기에,조선시대에 기록된 고구려역사기록은 가장신뢰할수없는 기록이라구 볼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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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최대의 미스테리가,광개토태왕의 아들인,장수왕의 평양천도부분이다.


삼국사기 장수왕 15년에 적혀있는 "이도평양"이라는 단어로,평양은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를 했다는 데,과연 지금의 평양이,장수왕이 천도했다는 평양인지에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삼국사기를 전체적으로 읽어보니,전혀앞뒤가 안맞는 구절이많기에,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어디인가에대하여 나름대로 생각해보았다.





광개토태왕은,고구려역사에서,북방민족을 제압하면서 정복군주로서 북방영토를 넓히며 광활한 영토를
만든왕이었다.그리구 그러한 막강한 권력을 이어받은 아들이,북방에는 눈을떼구,그렇다구,백제의
왕을 잡아죽이면서두,그나라를 영토로 편입할생각두 없었다는것은 장수왕의 행적을보면 알수있구,전혀
백제나 신라를 패망시켜 나라를 흡수할생각두 없었음을 알수있는데,어느날 갑자기,남진정책을
위하여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했다는것은,뭔가 평양이라는 위치가 지금이 평양이 아닐수있다는
생각이들었다
.



삼국사기 광개토태왕편을 보면,광개토태왕 16년 궁궐을 중축하고.18년에는 동쪽 지방에 독산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라구 나오는데,동쪽지방에 성을 쌓았는데
자신의 아들이 수도로 옮길, 평양의 사람을 이주시키구,얼마없으면 떠날 궁궐을 뭐하러 중축하구
있었겠는가,평양의 위치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는의미로 보여지구,평양은,지금의 간도라구부르는
동으로 토문강이라구하는곳,그곳어디엔가 위치한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의미는,지금의 평양으로 장수왕이 천도했다는의미가
아니라,송화강근처,지금의 흑룡강성일대 토문강주변에있던 지역을 부르는말이 아닌가생각이든다.
삼국사기 고구려편에는 왕에 관련된 기사들중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이런 비슷한 구절들이 여러개보인다.



특이하게 생각되는것중하나가,평양이 장수왕이래루,고구려의 수도였다면,왕의 무덤들은 당연히
지금의 평양에 산재해있는게 당연할것인데,평양에는 고구려의 왕들의 무덤이라구 알려진게 하나두
없다는점이다
.죽기는 평양에서죽고,묻힌곳은 졸본에가서 뭍혀다구 이해할수도있겠지만,어째든
삼국사기 장수왕조에 기록된 네글자 "이도평양"을 근거로,장수왕때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했다구
해석되어지는것은 잘못되어졌다구 생각되어진디.장수왕이 말한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어디인가,평양이라는곳이 별도로 존재하구있었다구보는것이 더 합리적이다.



지금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로 고구려의 왕들이 왕성이된것은 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보면, 지금의 평양은  장안성이라구 기록되어곳이라구 보는것이 더합당하다구 생각되어진다.
장안성=지금의 평양이라구본다면 장안성을 근거로 기록을 찾아보면



양원왕8년, 장안성을 쌓았다. 평원왕 (평원왕 양원왕의 맏아들이다)28년,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영양왕( 평원왕의 맏아들이다),영류왕은(영양왕의 이복 아우이다)보장왕 (영류왕 아우인 대양왕의 아들이다)



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이렇게 5명의 왕만이 지금의 평양에 살았던 임금이라구
볼수가있다.장수왕이 도읍을 옮겼다는 평양이 지금이 평양이라면,그이후 오래세월이 지난
평원왕28년에 나오는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기록된,장안성은 그럼 어디란말인가?



현재의 평양에서 장수왕이후 쭈욱수도로 삼아왔다면,평원왕이 아버지 양원왕이 공들여 장안성을쌓구
그아들인 평원왕이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겨버렸는데,분명한것은 궁궐을 옮긴게아니라,도읍을 옮겼다구
기록되어져있는데
,장수왕조 15년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것만가지구,그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
이라구 단정하는것은,그이후의 왕인 평원왕이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구 기록되어지는것을보면
이상하다.



그러므로 지금의 평양은,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이렇게 이어져온 장안성을 의미하구
광개토태왕조나 장수왕조에 나오는 평양은,지금이 평양이아니라,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수도가
있었던,상경용천부지역인,우리나라의 간도부르는곳,그곳에 고구려의 평양이있었다구볼수있다.



개인적인 생각이므로 신뢰성은 없다.그러나 삼국사기기록을 보더라두,장수왕조의 평양천도는
절대성립될수없는,그시대상황과 전혀맞지않는 이도평양이라는 네글자에 억메인 오류라구
생각한다.설령 평양으로 장수왕이 도읍을 바꿔다해두,지금의 평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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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김대중,노무현각하,지난 10년간 수구보수세력의
모진공격에두,대한민국의 철없는 국민은 몰라서 그러는거니,


가르침을 받아야 제대로 된다는 넓으신 자애로운마음으로 대한민국을위하여,밤을 낮인냥 불철주야 오로지 국민만을 생각하며,고생하시던 보습이 눈에선합니다.


애쓰시구 고생하셨습니다.훗날 역사의 정당한 평가가 있을것으로 생각합니다.





비가오는데,우리 위대하신 지도자동지 사진을 비맞게하면 됩니까?
이딴거 두고볼수없습네다.이따구로하면 응원단이구뭐구,돌아가겠시요~


우리아바이 수령님 국기하구,북한국가연주하시라우요.
북한국가를 들으며, 통일을 위한 위대한일을 하구있습네다.눈물 줄줄~ 
위대하신 지도자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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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월드컵축구대회예선에서 만나자.태도는 180도 달라진 뽀끄리


민족이중요하지,남한국기나,애국가는 반통일적인것이야.
남한을 국가로 인정하느니 차라리 전쟁을 하갔어,남한이 무슨국가냐
때중이샤키하구 뭇현이 어뎄갔어.갸들 대한민국 국가구,애국가구 이런거 알아서
내가 신경안쓰게 자발적으로 굽신거리던데, 정권이 바꼈다구 대들겠다는거야?.......
불바다돼봐야?정신차릴래? 확~


한민족인데 응원단이 왜필요해? 우리가 알아서 응원두해줄테니,
응원단 그딴거 오지마라, 응원단오는건 반통일적인것이야,
오로지,국기두,국가두,응원단두 오직 나를위해서존재할때 비로서,
통일적인것이구, 나머지는 다 반통일적이야,다죽이갔어


300명만이 넘게 굶겨죽이거나,고문하거나,수용소에가둬서 죽인 위대한 뽀그리에 이로운것은 통일적이구,뽀그리에게 안이로운것은 반통일적인것이라는.......


뽀그리의 공과사는
모두,대쭝이와뭇현의 공과업적에 동기화된것이므로 ,두눔이 뽀그리와함께 후세 역사가들에 의하여 역사의 평가를 받게될것이다.햇볏정책이 과연 북한동포를 이롭게해준건지,아니면 뽀그리를
이롭게 해준 통일을 방해한 비겁자의 반통일협조정책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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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를보면,역사드라마에서 나오는 백성들의 모습과 전혀다른모습이었지 않을까생각한다.그중에서 칼에대한부분이다.우리나라는 칼을 숭상하는문화였구,그러한 전통은 반만년역사속에서 흘러왔으며,이러한 문화가 왜곡되어진것은 반만년역사중 조선왕조기간뿐이었다는것이다.


고구려시대에두,평민이든,귀족이든 상관없이,무를 숭상했으며,고구려에서 다른나라에 파견된고구려사신의 고분벽화의 모습은,역사드라마에서 자주나오는 글쟁이 사신모습이아니라,칼을차구있는 모습이라는것이다.오늘날로보면,타국나라에 파견되어진 우리나라 외교관이 칼을차구 공무를 보는것하구 똑같다.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듯이,연개소문은 칼을 몸에 5개나 차구다녔다는 기록두있다. 칼을 차구다닌다는것과 칼을 들구다니는것은 비슷해보이지만,




실생활에서보면,일이있거나,군사훈련할때만 칼을 가지구다니는것은 들구다니는개념에 가깝구, 일반생활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칼을차구다녔다는 의미와 비슷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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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 귀족이라서 칼을차구다닌게아니라,고구려의 일반백성들두 칼 1-2개는 보통으로 일상생활처럼차구다녔다는것이다.


신라에서두,칼을 중시했던 문화가 화랑이란집단에서 찾아볼수있는데 ,일상생활과 군인생활이 구분없는,
일상화된 개념으로 칼을차구 다녔다는것이다.


이러한 일상화된 집단인 칼을차구다니는 화랑도가있었기에 신라가 3국을 통일할수있는 튼튼한 정신적
토대가 될수있었던것이다.



현재 역사드라마에서 보여지는,시대구분할것없이 군인이나 칼을 들구다니지,일반백성들은 봇짐이나 광주리등을 들구다니구,평상시 칼을들구 다니는 그러한모습은 전혀안보임을 알수있는데,이건뭔가 틀렸다구본다.


삼국사기를 보면,신라,고구려,백제와의 전쟁시에 자주나오는게,승패의 결정적향방은,칼을 들구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일부러죽음을 당하여,사기를 높여서 이겼다라는 기록이많다.


일본사무라이들이,홀로 칼을들구 외치면서 적진에돌격하는 모습의 원조는 우리나라에서 아주오래전
삼국사기에 일찍부터 그러한 모습을 가지구있었다는걸 기록하구있다.


통일신라이후 후삼국시대에두,혼란한시기상,일반백성들이 봇짐이나 메구다니구,이렇지는 않았을것이구
일상화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기위해서라두 칼을 차구다녔을것이다.


고려시대에 넘어와서두,이러한 숭무의 전통이 남아있었기에,무신정권이 생겨나는 밑바탕이되었을것이며
고려와 몽고의 항쟁만해두 30년넘게 싸웠구,무신정권하에서두,숭무가 상징하는것은 곧 칼이었다.


이러한  칼숭상문화가,조선에 들어오면서,철저한 사대주의의 결과,500년동안에 큰전쟁이라구해봐야,
정묘,병자,임진 3개정도뿐이었구,양반입네,부모의 나라이네  어쩌구하는 개벽따구,유교적 공자왈,맹자왈을 집권자들이 강요한결과,전혀 엉뚱한 이미지로 일반백성들은 시대구분없이 개나리봇짐이나 광주리들구다니는 모습으로 고정화시켰다구본다.


우리나라의 고대무덤에서,죽은사람의 무덤에 평소사용하던 칼이나 무기류가 함께 있는걸보면,
일상생활에서 칼을차구다닌것이지,장식용이나, 나라의 위급상황에서만 칼을 들구다녔다구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중 지극히 일부인 조선시대를 빼놓구,칼을 숭상하는 문화는 고구려시대부터~
고려까지
주욱이어져오지않았나 생각되어진다.


우리나라가 칼을숭상했다구해서 다른나라를 침략하는 호전적면이있었던것두아니지만,그렇다구
순한양처럼,어느시대건 통틀어 백성들은 개나리봇짐이나 광주리나 들구다니는 그런모습은,절대아니라본다.
분명히 호신용이든,공격용이든,일반백성들두 칼을차구 다녔을것은 분명하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졌을때,히로히또천황이 " 겨울에 푸르른 소나무처럼~"이런말루 일본국민을
단결시켰는데,이말은,이미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에 비녕자열전편에 김유신장군이 한 말이다.
"추운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는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법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만 강조되구,우리나라는 일반백성은 어느시대구,조선시대의 일반백성의 모습인
개나리봇짐이나 광주리만 들구다니는 순한양같은 어벙벙한 모습으로 표현되는것은 영 아니올시다이다.
최소한 고구려 시대의 일반백성들은  칼한자루 필수적으로 차구다니는 모습이 더 역사적사실에 가깝
다구생각한다.


우리나라두 칼을 일상화처럼 차구다녔던,시대가있었구,그러한 사무라이보다,더한 정신력을 가진
문화두있었다는것이다
.안타깝게두,그러한 고구려시대로부터 이어져온 전통이,조선시대에 멸종되어버렸다.
조선시대가 민족의 기상면에있서는 가장 부끄러운시대였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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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우리나라의 들과산에는 표범이 살구있었다.표범이 들과야산에 돌다다녔던 조선시대에 표범과 그시대의 가치관에대하여 찾아보려구한다.


실용과 실사구시적 측면보다는 가식과 명분등의 것치레에 치중해서 싸우기를 좋아했던 조선시대의정치문화의 단면이,표범이라는 동물과 관련되어 나타나는데,오늘날에두,이런 공자왈,맹자왈하면서,쓸데없는 이념이나 체면에치후쳐,백성을 위한 실사구시적 정치보다는 당파적 이익에만 몰두하여 주댕아리싸움을 즐겨하는 그러한 뒤떨어진 정치문화의 관습이 이어져오구있다.




아나운서가 음주운전을하지말라구 방송에나와서 캠페인을 벌이면서,뒤로는 술처먹구 음주음전
으로 단속된다든지
,겉으로는 키스해본적두 없구,순결을 지켜야한다는 방송에나와 입바른 소리를
하면서
뒤로는 호빠를 가면서 이중적모습을 보이는 여자연예인 ,남에게는 엄격하구,자신에게는
너무나 관대한,그러면서두 주댕아리는 정의와자유를 외치구,실제행동은 개차반이구,
이미지로 단물을 빨아먹는 가식적인것들의 사고방식속에는 이러한 이중적 것치레를 중시했던
양반입네,쌍눔이네하는 그러한 유교적 명분주의의 영향이 크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표범과 관련되어진 황당한 시츄에이션속으로 들어가보자


때는 1428년 세종 10년의 일이다.

양주에사는 최종생이,표범을 잡아서 나라에 바치니,세종대왕이 면포7필을 표범을 잡아 받친
사람에게 내렸다.


그런데 도중에 그 명을 받들어 시행하는 관리인 최습이  상을 주라는 명을 시행할려고
상세한 내용을 확인해보니, 표범을 직접잡은 사람두있었지만,표범잡는데 몰이꾼으로 도움을준
사람두있었다는것을 알게되어서,시행과정에서 표범을 직접잡은 사람에게는 면포5필,조력하여
도운사람에게는 면포2필을 나누어지급했는데,이 일이 세종에게 알려지게되었는데.


세종:내가 표범잡은 사람에게 면포7필 주라구했어,안했어?
최습:제대로 명을 시행하여 면포를 주었습니다.
세종:똑바루 시행했는데,2필은 도움을준사람에게 줬다는 소리가 왜들리냐?
최습:표범을 잡는데,조력한사람두 공이있지 않겠습니까?
세종:표범잡은사람에게 주라구했어 안했어?
       여봐라 최습 저눔의 벼슬을 박탈하구,장80대를 치도록해라.
최습:억울하옵니다
세종:억울은 개뿔,너가 왕이냐? 누가 너맘대루 명을 시행하라구했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늘날에 관점에서보면,최습의 일처리가 타당한면이 있는것같은데,조선시대의 당시 사회문화에서는
이것은,맞아죽을일이었다는것이다.조선시대는 호랑이를 잡은 공에대하여두 포상에 차이를두는 절차
까지두  문서로서 정해놓았는데,맨먼저 창이나 화살을 맞춘사람,두번째로 창이나 화살을 맞춘사람
세번째루.......
이런식으로 호랑이를 직접잡았더래두,선,후를 가려서 포상하는데,직접잡은것두아니구
그냥 옆에서 조력한사람에게 공이있다구하여 상을줬으니,가식적인 겉모습을 중시하던 시대상황에서는
통용될수없는 판단이며 행위였다.


오늘날에서보면,화려한 주연배우가있다면,그뒤에서 주연배우를 빛나게하는 조연두있구,말없이 도움을
주는 스텝두있을것인데,눈에보이는 주연배우 그자체만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볼수가있다.


눈에보이는것,직접적인행동을 한사람만 최고라는, 결과가아닌 것모습이나 보여지는 체면에 집중한 이러한,
덜떨어진 이중성이 표범의 상벌처리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구있다.


선진화된 사회일수록,썩어빠진 눈에보이는,주댕아리는 정의와명분 외치구 실제행동과결과는 개차반들이
이미지쇼댓가로 단물을 빨아먹는 그런 이중적인것을 멀리하는 사회적시스템이 가동된다는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두,실용과 실사구시적측면보다는,이념이나 주댕아리, 쇼맨쉽등 눈에 보여지는
이미지만을 추종하구 실제의 결과보다,보여지는 허상이나 겉치레를 더좋아하는 이중적가치관이
아직두 남아있구,
이러한 명분론적 공자왈,맹자왈하는것들은 타파되어야할,사회의 암적인
가치관이라는것이다.


실사구시와 실용의 이면은,당리당략적인 명분론적 싸움보다는 최우선으로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두고
그러한 관점에서 나라의 부강을 이루어낸다는것이다.아직까지두 표범의 일처리처럼,겉치레와 명분에 치후쳐,개소리나발을불며,백성들을 분열시키구,이간질시키며,결과가없는 빈깡통,이미지쇼에만 오,교주님, 오,교주님하는 덜떨어진 것치레의 이중성을 보여주는것들이 많다는것이다.


이미지정치는 단물은,묵묵히 가려진 삶속에 사는 백성들이 혜택을본게아니라,이미지정치를한 
당사자와패거리들에게 돌아갔구,그러한것들은 뭐한자리라두 챙겨먹었구,더  안도와줘두 나라세금으로
평생 잘처먹구 잘살게되었다는것이다.


오,교주님,오~ 교주님하기전에,자신의 삶을 살펴보자,과연 자신에게 무엇을 더낫구,좋게해주었는지
결과야 어떻든 허울데기가 감동만주면돼 이런식이라면,사기꾼의 말과 언변두 참으로 듣기에는
달콤하구,좋지만
결과는 언제는 그말을 믿은사람에게는 비참한 결과가 생기게된다는것이다.


허울데기의 명분이나 주댕아리가아닌,백성의 삶을 낫게하여 더욱부강한 나라,그것을 염원하는것이지,
달콤한 말이나 주댕아리들의 쇼와이중성에는 이젠 넌덜머리가 난다는것이다.


북한에대한 정책두마찬가지다,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의 삶두 제대루못챙겨,300만명이 넘게 죽였구
계속 헐벗은 동포들을 굶겨죽어나가게하는 것들은,아무리좋은 민족이구,이념이구,동질성어쩌구하기전에,
이미 인간말종의 정치인들이라는것이구 그러한 악독한정권지배층에대하여 굽신이 아니라,
매를 들어야한다는것이다.


또한 이런거지같은것들에게 협조하여,뒷돈까지주면서 굽신거린시기에
죽어나간 300만명이 넘는 우리동포들의 원혼을 위해서두 악독한정권지배자의 몰락과함께
역사에 단죄를 받아야한다는것이다.


악독한 지도체제가 붕괴되지않는한 해결될수없는 문제인데두
닝기리주사만 처방하여,암을 암이라구안하구,잘될거라구 거짓쇼를한 댓가는 반드시 심판받아야한다.
의사가,암에걸린사람은 암이라구 판정하구 말해줘야지,암은아니구,암은아니구여,닝기리만 주사만해주면
다 잘될거라구 환자를 속여,악독한정권만 더공고하게해준 돌팔이 의사는 더이상 나타나지않도록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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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축구선수들은 프리킥을찰때,손으로 남자의 중요부분을 감싸는것을 볼수가있다.그렇다면 여자들의 급소는 어디일가? 아무리 황소만한 몸집을가진 남자라두,낭심을 가격당하면 아픈것은 둘째치구,죽을수도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여자의 급소가 어디인지에대한 사건기록이 기록되어져있다.그이야기속으로 들어가보자^^

때는 성종 6년(1475년)
조선시대는 신분사회였지만,여자들이 상업에 종사하는것을 금하지는 않았기에 여자들두 상품의 판매나 장사를할수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여자거상인 김만덕이라는분두 있었다.
상인들이기에,여기저기돌아다니다보면,상인들끼리 싸움두날수두있었구,남자상인이
여자상인을 겁간하는경우도 있었다.이럴경우,보부상집단에서는 남자상인을,거세를 해버렸다.
여자들끼리 장사문제로 싸움을하게될경우도 있었는데,이러다가 일이발생하게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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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리:여긴 내가 물건파는곳이니까,딴데루가~
주원
:노점상이 니땅,내땅이 어디냤,나두 여기서 장사할거다

건리:오늘 노란손수건쓰구 누워있을래?
주원
:굶어서 죽으나,장사못해죽으나 이판사판이다,에잇~

여자들의 싸움은,머리끄댕이를 잡구,싸우는것이 일반적이구 남자의 낭심처럼 서로
때리지말아야곳이 있었는데
,건리는 얼마나 화가났던지,머리루,주원의 가슴을 냅다 박아
버린것이다
.딱한번 머리루 가슴을 부디친것뿐인데,주원은 가슴을 움켜쥐고,진짜루 노란손수건쓰구
하늘나라로 올라가버렸다.

사람을 죽이면,조선시대에는 교수형을 시켰으나,너무나 황당한사건이었기에 성종은
신하들의 교수형을시켜야한다는 주청에두,건리의 죄를 감하여,살려주었다.

여자의 가슴은,아름다움의 상징이기두하지만,치명적급소라는점이다.여자끼리 싸울때라두
절대 여자의 가슴은 때리면 안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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