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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는 궁녀처럼 벼슬인 품계를 받는 신분도 있었지만,궁궐을 드나들며,대비전,동궁전등에서 궁녀들이 담당하지않는 허드렛일을하는 노비신분의 천인들인 파지와 무수리가 있었다.


파지는 사내아이를 말하고,무수리는 소녀아이를 말했는데,이들의 신분은 천민이었다.


천출이기에 양인신분을 얻기도 쉽지않았는데,중전의 낳은 아이에게 젓을 먹이는 유모들의 신분또한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특별대우를 받는 신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민이었다.



간혹,아이를 잘 키워준 유모역할의 공으로,노비의 신분을 벗어나 양인의 신분을 얻는 경우도있긴 했지만 특별한 경우일뿐이었다.파지나 무수리들은 궁녀들보다 신분상으로 낮은 천민이었지만,궁녀들에게 메인 숙명적 한계인 오로지 왕이외의 남자는 업다라는 속박은 없었다.

궁녀들중에서 병이들어,간혹 궁궐을 나가서 사는 경우도 있었는데,이런경우도 죽을때까지 궁녀였던 굴레는 벗어날수가 없었다.궁녀의 신분이었다가,궁궐밖에 나가서 일반인으로 살아갈때,이들을 아내로 맞아드리려는 "간큰남자"도 드물었지만,있었다해도,그결과는 비극적이었는데,역사속에서 궁녀를 자신의 아내나첩으로 삼았던 "간큰남자"는 있었을까? 있었다.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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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광해군이 집권하던 시대인 1613년,궁녀중 영생이라는 여자가 병이들어,궁궐밖으로 나가서 살게되었는데 광해군의 옹립에 공을 세운 정인홍의 일파중에 임혁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신분질서가 하늘의 뜻이고,진리처럼,공자왈,맹자왈했던 시대에 왕의 여자였던 궁녀를 자신의 아내나 첩으로 맞아드리는것은 간이 배밖에 나오지 않고는 실행할수없는 일이었다,

간큰남자 임혁과 영생은,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영생왈:아무리 제가 병때문에 궁밖에 나와서 살게되었다해도,궁녀였는데,궁에 알려지면 나리에게 피해가 있을것인데 저를 버리시옵소서 임혁왈:영생아,사랑에 국경이 어디에 있겠느냐,너가 비록 궁녀였다고는해도,현재는 아니지않느냐,그리고 우리가문이 명문가인데,너하나 못지켜주겠느냐,내가 목숨을 잃을지언정,너를 버리지 않겠다.

이둘이 서로같이 살고있다는 소식이 급기야,궁궐에까지 들어가게되었는데,신하들이 들고일어나 임혁은 쳐줄일놈이고,위아래도없는 금수만도못한 강상의죄를 지었으니,참수형으로 다스려야한다고 연일 광해군에 상소를 하게된다.

광해군이 생각하기에,임혁의 잘못은 있으나,임금에대한 역신으로 참수형으로 처단하면,임혁뿐만아니라,가문자체가 멸문지화가 되기에,자신의 측근공신인 정인홍의 일파였던 임혁의 가문만은 살려주고자,사약을 내려 죽이는 형벌로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왕조시대에는 같은죽음일지라도,어떤형으로 죽느냐에따라 죄를 진 본인에게만 화가 미치기도하고,일가친족모두가 연좌로 걸려 효수가되기도했기에,tv속에서 임금이 신하에게 사약을 내렸는데 신하가 사약을 마시며,임금의 성은에 감사합니다라고 임금이 사는 궁궐을 향하여 절을하고 죽는 모습을 볼수있는데,이게 다 이유가 있는것이다.

부모,형제,자식등을 묶어서 목숨을 댕강시키지않겠다는 표시였기에,죽는 신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되었든,그렇지 않던간에,부모,형제,자식의 장래와 목숨의 안전은 보장해주겠다는것이기에 감사할수도 있는것이다.우리나라에서 사약을 내리는것이 선처였다면,이웃나라 일본에서는 할복이였다고 볼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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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은 연일 신하들의 상소에 항복한 광해군은 임혁을 참수형에 처하게되는데,같은날 영생도 죽음을 맞이하게되었지만,영생에게는 사약을 내렸다.같은장소에서 같은날,같은시각에 두사람은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게되는데,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묻자,임혁왈:사랑이 죄라면,떳떳이 죽겠다.영생왈:우린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인가봐요,마지막 죽는순간까지 눈물맺힌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무언가를 기원하듯 미소와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죽었는데.주위에 이모습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궤이하게 생각하며 말하길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구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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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죄수가 남자죄수들의 방으로 보내져 윤간당하는 형벌이,우리나라에도 있었는데,이러한 일이 왜 일어났었는지,그 배경부터 살펴보면

1596년 조선의 암군중 하나로 평가받는 선조, 재위29년 어느 추운 겨울날 발생했던 이사건은 그시기가 임진왜란시기,

선조는 의주까지 백성을 버리고 혼자 도망가,여차하면 중국으로 튀어서 도망갈 준비를하고 있었는데,마침 원조하러 중국의 군사들이 도착했기에,

그들의 비위를 잘맞춰서 일본군을 몰아내주기만을 학수고대했고,

백성들 또한 얼른 전란이 끝나 평화가 찾아오길 기원하는 마음이 강했지만,중국군사들과 일본군은 서로의 지도부 대가리들의 비위만을 맞추는 시늉만이 더 중요했기에 되도록 싸우기보단 ,서로 말을 맞춰서 자신들의 군사가 피해가 없는 방향을 지향했기에 주둥아리로만 싸우는것을 좋아하였다.

어느때고 마찬가지지만,나라에 전란이 일어나면 가장 피해를 보는것이 힘없는 어린아이와 여자들인데,툭하면 천자의 군사가 도와주러왔는데 그런편의도 못봐주냐하면서,마을에서 보이는 여자들은 족족 자신의 군영으로 잡아다가,중국군장교나 수하들이 첩이나 성적노리개감으로 삼는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실을 보다못한 지방관리가 선조에게 상소를 하면 선조의 반응은 "그럼 어쩌라고?" 너가 직접가서 따져보던지,이러면,지방관리는 명나라군영을 찾아가서,이번에 잡아간 마을의 아무개는 이미 결혼한 여자이므로 돌려보내줄수 없느냐고,명분을 내세워 사정하고 데리고,오고하니,일반민가에서는 그래도 자신들의 여식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안볼수있지 않을까해서,조혼풍습이 유행하게되었는데,이러다보니 중국군의 성적노리개로 유린당하는 문제에대하여는 힘없고,가난한 백성들의 여식들이나,신분적처우가 미천한 여자들이 일순위가 될수밖에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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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 5년차에 접어들무렵인 1596년,중죄를 지어서,목에 나무칼을찬 여자죄수가 감옥으로 들어왔는데,고려와 조선시대에,정식관리가 아닌,지방의 잡다한 공무를 보는 향리들을 통틀어 색리(色吏)라고 불렀는데,감옥의 업무를 담당하던 색리가 으슥한 밤에 목에 칼을찬 여죄수에가 다가가서 말하길 "너는 어자피 죽을목숨이잖느냐,너도 알다시피  죄없는 마을의 여자들이 중국군사들에 의하여 강제로 잡혀가 성적노리감이 되고있는데,덜 피해를 볼수있게 너가 희생좀 해라"하고는 여자죄수의 목에 차던 나무칼을 풀어주고는 중국눔에게 넘겨 밤새도록 중국눔에게 시달리게했다.

이튼날 명색이 죄수신분이었기에,여자죄수가 초죽음인 상태 다시 옥으로 돌아오자,색리가 여자죄수에게 말하길" 너 혼자 옥에있으면 몸도 그런데,돌봐줄 사람도없고,무서울거같으니,남옥에서 같이 지내는게 좋겠다"

여자죄수왈 "안돌봐줘도 좋다, 이캐새퀴야!!!,혼자 있게해달라,그러나 여자죄수의 외침은 아무런 소용이없었고,여자죄수는 남자죄수들과 같은방에 집어 넣어져,급기야는 이러한 사실이 선조에게까지 이르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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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왈:그런 일이 있었냐? 어떻게 했음 좋을까? 신하들왈:"그날 감옥을 담당해던 색리를 파면하는 정도가 어떨지?" 선조왈: 그렇게 하도록해라,신하들왈: 알겠습니다.아,그런데 여죄수를 성적노리개로 이용한 하늘같은 중국인은 어떻게? 선조왈:"나보고 어쩌라고,내가 직접 창칼들고 싸우러 나가리? 알믄서,사람을 보내어,앞으로는 이런일이 되도록 없도록,넓으신 아량을 베풀어주십사하고 잘구슬려봐,명나라군사를 뿔나게해서 철군하게만들면,보낸사람 목이 달아날걸 각오는 잘하고,중국군사도움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되겠냐,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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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서 인간으로서 최악의 왕을 뽑으라면 조선시대 왕인 인조이다.

인조는 왜 말년에 거이 자멸에 가까운 미친짓을하고 죽게 되었을까?
 
그 배경을 살펴보면 조소원이라는 후궁이 있음을 알수가 있는데,

태생적으로 역사의 반역정권이었던 인조의 즉위도 문제였지만 늙어서도 여색에 미친결과였다.

인조는 54살에 죽었는데 죽기4년전부터 후궁인 조소원이라는 여자에 미쳐


밤마다 "베게"사이로 나누는 대화를 통한 결과는 인간으로서는 생각할수없는 짐승의 행동만을 행하다가 죽었다.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선해지는 경우가 많은데,인조는 죽을때까지 여자에 미쳐서 폐악을 저지르다 죽었기에 인조라는 왕은  왕의대접을 해줄 가치가 전혀없는 인간이라고 볼수가있다.

인조와 조소원사이에도 딸이있었지만,인조의 후궁인 조소원이 스스로 왕위를 이을수도 없었는데,왜 소현세자일가를 저주했는지는 의문인데,그결과는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에의하여 처리가 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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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먼저 그당시 국제적인 안목을 가진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소현세자가 비록 아들이었지만 늘 불안했다.이것은 인조정권이 태생적으로 주둥아리로만 외치는 반청의 기치로 탄생되었기에,국제정세를 잘파악했던 소현세자의 행동과처신은 눈에 가시거리였을 뿐이었다.

인조는 국내의 사대부들에게 인기를 얻고 왕권을 유지할수있는 길이,주댕아리만일지라도,부모의 나라 명나라 어쩌구하는 허울데기 행동을해야함을 잘알고있었다.이것밖에는 광해군을 몰아내어 반역정권을 만들어낸 명분우위가 없었다.

이미 국제정세를 잘 파악했던 소현세자는 이러한 허울데기명분에 연연하지않았기에,인조의 마음속에는 소현세자는 아들이기 이전에,자신의 허울데기 처신을 비웃는것같고,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갈수있는 흉악한눔으로 여겨졌다.

이러한때에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소원은 인조의 마음을 가장 잘파악할수있는 총애받는 후궁이었지만,소현세자빈이었던 강씨와는 아주안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는데,이 근본에는 강씨의 일족과 조씨의 일족간에 외척들의 국가에 참여의 대립이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기에,조소원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자신의 일족이 정치참여를 탐탁치않게 생각했던 소현세자빈에대하여 안좋은 감정을 가지게되는데,조소원과 인조는 그모양새는 달랐으나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부귀영화의 지속측면에서는 서로의 대갈박이 맞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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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죽음은 인조가 독살했다,아니다가 아니라,인조가 소현세자 죽음뒤에 벌인 행동을보면 독살인지 아닌지 미루어 짐작해볼수가 있다.소현세자가 죽기전에 이미 조소원과 소현세자빈 강씨사이에는 암투가 벌어지고있었고,인조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애첩이며,후궁이었던 조소원을 편애했고,세자빈강씨가 하는일은 사사건건 미워했다.결국 인조<->소현세자,조소원<->세자빈 강씨의 대립관계에서 자신의 국제정세관을 븅신취급하는 아들인 소현세자보다 밤마다 귀에 좋은소리를하는 자신의 애첩인 조소원을 더신뢰하게되는데,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인조와 조소원은 뒷날의 문제가 발생하지않도록,철처하게 소현세자의 일가를 말살하게된다.

조소원의 계략을 받아드린 인조는 먼저,홀로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키우던 세자빈 강씨를 모시던 나인을 역모라는 누명을 씌워서 궁녀인 계환과 계옥을 잡아다 옥에서 죽여,소현세자의 죽음에대한 세자빈 강씨가 하고싶은말이나 유언등을 전혀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고립시킨후,허울데기 명분을 붙이고는 세자빈 강씨의 두 오라버니를 잡아다가,곤장을쳐 죽인다.그리고 사관과 신하의 무수한 상소를 모두 배척하고,기어이 세자빈 강씨를 사약을 먹여 죽였다.

인조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애통하고,슬프게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라고 진실로 생각했다면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인조의 친손자들이기에 원손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인조는 어찌된것인지 세자빈 강씨를 죽일때 붙인 허울데기 명분을 손자들에게도 붙여서 모두 섬으로 귀향을 보낸다.

아비가 병으로 죽으면,손자들이 불쌍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주는게 인간의 도리이며,역사상 왕권문제로 자신의 아들을 스스로 죽인 영조조차도 그 손자를 원손으로삼아 돌봤는데,인조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계속하기에 사관들이 얼마나 황당했으면,엄한 왕조의 기록물에 의문스럽다는 표현을 적어놓았는지 알수가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수없는 짓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인조를 그당시 신하들과 사관뿐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했던 청에서는 용골대를 보내어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어디있는가 묻고,소현세자의 큰아들을 청으로 데려가 양육 하겠다고한다.이러한 제의가있은후 갑자기 섬에 귀향가서 살던 소현세자의 큰아들의 죽음으로 대답이 돌아왔다.뒤이어 둘째도 죽고,뒤이어 마지막남은 아들도 남해어딘가에 유배되었다가,왕의 친손자였음에도 역사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마지막 세째도 왕의 친손자가 살아서 일가를 이루어 살았다면,당연히 역사속에 기록되어있을것인데.아무런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는것은 어릴때 이미 죽음을 당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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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자신의 친아들,며느리,손자등 모두를 죽이는데 이러한것이 51살에서 54살까지의 3년사이에 모두 이루어졌다는것이다.인조는 자신의 인생에있어 마지막 남은 3년의 삶의 기간속에 들어있던 왕권,부귀영화,후궁의 미색을 취하기 위하여 이러한짓을 태연하게 벌였다는것이다.

조소원의 종말은 인조가 54살의 나이로 죽자,뒤를 이은 효종3년 1652년에  조소원이 세자빈 강씨에게 씌웠던 역모혐의처럼 효종에의하여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잡혀 죽임을 당했을뿐만아니라,조소원의 일가친척등이 모두 잡혀죽여 패가망신 하게된다.

인조는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손자들을 모두 죽여놓고 단지 3년을 더 살았고,조소원은 스스로가 지은 악업에따라,세자빈 강씨가 죽은지 6년만에,자신뿐아니라 일가친족 모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인과응보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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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공통적인 기록중에 하나가 중요한 인물인 왕이 돌아가기전에
 

미리 자연현상적인 기이한 징조들이 나타남을 예고하는데,어떠한 징조들이 나타나고,


왕의 죽음을 미리 알려주는 베스트 1위에 해당하는 기괴한 자연현상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글이다.

왕이 죽음에 앞서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현상들중에 대표적인 것들이 다음과 같았다



"궁궐이 있는 성문의 문짝이 부셔진다.궁궐안에있는 우물안속에서부터 구름이나 안개같은 현상속에 용같은 괴물체가 튀어나와 사라진다,궁궐이 있는 산위에서 개가 사흘 밤낮으로 운다.염전이있는 소금창고에서 소울음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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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를 지키는 성문의 문짝이 무너지거나 부서지는 일이 발생하는것은,역사서에서 아주 불길한 징조를 의미하는데,일반적인 개인들의 사생활에서도 실제로 자연현상에 의하여 집에 문짝이 날아거나,꿈속에서 집의 대문이나 방문이 부서지는 꿈은 집안에 중요한 인물이 하늘나라로 올라가게됨을 의미하는 흉조인 꿈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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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우물안에서 구름과 안개속에 용같은 괴물이 홀연히 나와서 사라진다,이런경우 왕이 하늘나라로 올라가기전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기록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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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을 둘러싼 산위에서 개가 사흘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들린다.이런 경우 일반 개인들의 사생활에서도,개가 밤에 우는 현상은(개가 우는것과 짓는것은 그 소리가 다르다) 민간에서도 길조가 아니라 집안에 우환이 생기는 흉조로 여겨졌기에,밤에 우는개는 집안에서 기르지 말아야한다고 선조들의 경험의 산물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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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전이있는 소금을 모아두는 창고안에 소가 없는데 소금창고에서 소울음소리가 들린다.이런경우 소금이 모여져있는 창고안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나오면 왜 흉조라고 여겨졌는지는 요즘의 일반사회생활에서 흔히 볼수없는 모습이기에 알수는 없으나,미루어 짐작해보면 일상생활에 안좋은 일이나,재수없는 사람이 다녀가면  "에이,소금뿌려라"하는것처럼,소금과 소울음이소리가 결합되는 소리는,액운과 곡소리를 의미하지않나 생각할수가있다.

어찌되었든 대표적인 현상중에,삼국사기에 기록된 왕의 죽음을 예고하는 베스트 자연현상 1위는 궁궐의 성문이나 문짝이 무너지거나 부서지는 현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왕조체제가 없기에,이러한 현상으로 알수있는 왕의 죽음은없다고 생각했는데,가만히 생각해보니,족벌왕조체제가 아직 존재하는 미수복된지역이 아직 존재하기에,역사기록대로라면 자연현상으로 평양의 성문이나 문짝이 무너져내렸다는 언론기사가 나온다면,조만간에 생명운이 다한 인간이 소식이 들려오겠구나라고 생각해볼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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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의 바위는 칼을갈아 다없애고,두만강 푸른물은 말에게 다먹이리라"는 활달한 기상을 가졌던 조선시대에 보기드문 용장으로

20대의 젊은나이임에도 이룬공적이 높아 오늘날로보면 20대에 정부부처의 장관을지낼정도로 능력과업적이 탁월했던 남이인데

왜 재평가를 받지못하고 역사속에 미스테리로 뭍혀져있을수 밖에없는지 그까닭을 생각해보게되었다.

단지 유자광의 모함에의하여 역적으로 몰려 젊은나이에 억울하게 죽었다라는 정도로는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역사속기록을 통하여 남이장군의 숨겨진 미스테리를 파헤쳐보자.1468년 5월 세조임금이 집권하던시절,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있던 남이에 관한기록에서 의외의 구절을 발견할수있는데,


남이가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말하길" 저의 처는 어머니에게 불효하고,첩들을 시기하니 이혼하게해주십시요" 세조왈"칠거지악에 해당하니,너의 생각대로 하도록하여라"하였다.이러한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은 특이한 사항들에대하여는 자신의 판단을 가끔씩 적어놓기도하는데 사관이 판단하여 기록하길"남이의 어머니는 며느리와 아들이 동침하는것을 좋아하지않았는데,왜 그런지 이유를 알수가없었다"


4개월이지나 1468년 9월에 세조가죽고 그의 둘째아들인 예종이 왕위에올랐는데,한달이 채지나지않은 10월에 유자광의 밀고로 남이가 역적모의로 잡혀서 국문을 받게된다.남이의 친적들도 역적연루혐의로 심문을 받게되는데 그중에 남희라는 사람이 예종과 나눈 대화도 괴이한데 이러했다.


예종이 말하길 "너도 남이하고 역적모의를 같이했지 않느냐?" 남희가 말하길 "남이의 장인이 저에게 이야기하길 (남이는 권남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권남은 세조의 등극을 도운 주요공신중에 한명인데 남이와 권남의 딸사이에는 남구을금이라는 딸이있었는데,권남은 남이의 역모가 일어나기 3년전에 이미죽었다) 남이와 그 어미사이에는 천지간에 용납할수없는 죄를 저지르고있는데,그눔이 인간이냐,짐승이냐라는 소리를 들은후,그이후로 남이와 단교하여 지낸지 오래입니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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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들에서 더 이상한점은 남이의 어머니에대한 형벌이다.남이는 역적의 죄를 지었으므로 당시 법률에따라 죽는것은 이해가되지만,그당시 법률에 따라 연좌제를 행했다하더라도 역적집안의 남자들은 죽인다해도,여자들은 노비나 관비로 만드는게 당시 법률이었다.그러나 어찌되어진건지 남이의 어머니는 극형인 소달구지를 이용한 환열형에 처해진것도모자라,여자인데도 3일동안 사람들이 오고가는곳에 메달아 두었다는점이다.남이장군을 재평가하여 좋게 만들고자해도 그렇게하지못하고 미스테리속에 뭍여 남길수밖에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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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희가 그렸다는 240여년전의 그림은 어디로 사라졌고,왜 영조임금은 전복을 언급하며 캐기어렵다고 했을까?

심성희(1684-1747)는 청송심씨로 이조참판,탐라어사,도승지,대사헌등의 벼슬을 했던 문관으로 그림에도 능했음을 알수있는데,

영조 45년 1769년의 기록에 영조가 말하길"심성희가 전복캐는 그림을 그려서 바쳐는데,그것을보고 전복캐는것이 힘든일임을 알았다"라고했는데,

그림이 얼마나 세세하게 잘 그려져 있었길래,그림만보고도 영조는 알수있다고했겠는가


오늘날에 심성희가 그렸다는 "전복캐는 그림"이 발견된다면 보물이겠는데,이 그림의 존재유무는 아직까지 발견되지않았다.오늘날에도 자연산 전복은 오래전방식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바다에서 여자들이 직접 채취하기에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전복캐는 모습은 비슷할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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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전복을 어떻게 채취하는지는 본적이 없기에,영조가 그림을보고 알았다는 전복캐는 고난함과 어려움이 어떤모습을 말하는것인지 알수는없다.


그러나 상식선으로 생각해봤을때,여자들이 깊은바다속의 바위에 딱붙어있는 전복을 숨을 참으며 딴다는것은,수영장에서 물속에 잠겨있는 물건을 숨을 참으며 들고 나오는것도 힘든데,살아있는 전복이 바위에서 쉽게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을것이기에,인간의 짧은숨으로는 수십번은 물속을 왔다갔다해야 겨우 캘수있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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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통하여 오래전부터 전복은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인 귀한 음식재료였음을 알수있고,몇백년전에도 전복을 캐어바치는 해녀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자연산 전복을 먹을때는 왜 가격이 이렇게 비싼가?이런 볼따구 맞을 말을하지말고,영조임금조차도 캐기어려워,힘들겠다고 생각했던 자연산 전복을 캐주는 해녀분들이 있어서,몸에 좋은 전복을 먹을수 있는것이구나라는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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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년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왕위를 차지하고자하는 사람들사이에 암투가 벌어졌다.



김우징과 김양은 김우징의 아버지인 균정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하였고,제륭의 어머니를 누이로둔 김명은 제륭을 왕위에 오르게하려고하였다.


이 두세력간에 궁중암투가 벌어지는데,먼저 왕궁을 접수하여 왕위에 오른것은 균정이었으나,이러한소식을 들은 제륭과김명의 군대가 적판궁을 포위하여 두세력간에 전투가 벌어지게된다.



이 두세력간의 군사를 지휘하는 실세인물은 김양과김명이었다.포위된 궁의 수비대장인 김양이 말하길"새 임금이 여기에 계시는데,어찌하여 반란을 일으키는가?"하고 반란군의 사기를 꺽으려고하였으나 김명의 부하였던 배훤백이 김양을 향하여 화살을 쏘아 맞추며 물러서지않는다면 죽이겠다는 표시를하자,


이에 균정이 거사가 실패했음을 알고 김양에게 말하길"적의 군사와 맞서싸우기에는 궁을지키는 우리의 군사가 숫적으로 너무적다,각자 포위를 돌파하여 훗날을 도모하자"하니,포위를 뚥고 김양은 나아갈수있었지만,균정은 도중에 잡혀 죽음을 당하게된다.


균정이 잡혀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양은 하늘을 두고 "균정의 한을 반드시 갚겠다"는 맹세를 한다.궁궐의 전투에서 승리한 제륭이 왕위에 오르니 이사람이 희강왕이었다.희강왕은 제위3년만인 838년에 자신의 매부였으면서,왕위계승을 도왔던 김명의 반란에의하여 스스로 자결을하게되는데,김명 희강왕의 뒤를이어,신라의 44대 민애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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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식을들은  김양은 자신의 맹세를 지킬때가 왔음을 알고,군사를 모아 장보고가 지휘하는 청해진으로가서 균정의 아들 김우징과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군사와 합류하여 막장 민애왕을 치러 경주로 진격하게된다.


이때 김양과장보고의 연합군사의 군세는 기병3,000명 보병 2,000명인 대략 5,000명의 군사였다.이러한 소식을 들은 민애왕은 838년 12월 광주에 군사를 집결하여 김민주로하였금 막게하였으나,대패하게된다.


839년 1월 김양의 군사가 대구에 이르렀을때 민애왕은 남은군사를 모두모아 직접나아가 결전하였으나 또다시 패하자 도망가다가 김양의 병사들에게 포로로잡혀 죽음을 맞이하게되는데,포로중에는 김양을 화살로 쏘아 맞추었던 배훤백도 있었다.민애왕을 처단한후,배훤백을 보고 김양이 말하길 "개는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주군을 위하여 나에게 화살을 쏘은것은 부하의 당연한 도리이다"하고 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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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년 4월 왕궁을 정비하여,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하니,이사람이 신라45대 신무왕이다.김양은 대중11년 8월13일(857년) 김우징의 아들인 문성왕19년에  50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문성왕은 김양의 장례를 김유신장군의 장례와 동급으로 행하였고,문성왕또한 김양이 죽은후 한달후에 연이어 죽게되는것을 보았을때 그당시 신라에있어 김양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있다.


김양은 균정,김우징(신무왕),문성왕 3대에걸친 인연을 가진 무인이었을뿐만아니라,그당시 신라에서 최대의 군사조직이라고 할수있는 청해진의 장보고와 맞설수있는 대등한 힘을가진 무장이아니었을까 생각해볼수가있고.역사의 이면속에 감춰진 장보고의 최대 라이벌이었을것같은 김양장군에대하여는 일반인들의 역사속에서는 잘알려져 있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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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나 기타사정으로 궁궐밖에 나가살게되는 궁녀들은 비록 민가에서 산다고해도,왕의 여자들이었던 까닭에 결혼하거나,남자와같이 살수가없었다.


형식상으로는 민간인 처녀들이었기에 법으로 궁녀의 신분이었다가,민간인이되었다고 결혼하지말라는 그러한법은 없었지만,


왕가의 입장에서 왕조의 여자였던 궁녀들을 신하가 데리고산다는것은 주.종의 신분관계가 엄격한 조선유교주의사상하에는 불충의 개념이 될수밖에없었기에,나서서 결혼하려는 사람들은 존재할수가없었다.


이러한 예외를 깬 특이한 경우가 있었는데,남치원이라는 사람이다.병으로 궁궐밖을 나간 궁녀을 첩으로 맞아들여서 살고도,무사했을뿐만아니라,벼슬까지도 할수있었는데,어떠한 사연이 있었길래 감히 왕의여자를 첩으로 두고도 살아남을수있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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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의 슬하에는 배다른 형제자매가 많았다.성종의 첫째아들이 연산군이었고,배다른 둘째아들이 진성대군인 중종이었다.연산군과 진성대군의 나이차는 12살이었는데,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는 일찍죽었고 진성대군의 생모인 숙의윤씨(정현왕후)는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의원수를 갑는다고 일으킨 피바람속에서도 숨죽이며 살아남아 자신의 아들인 진성대군과 자신의 목숨을 유지할수있었다.


연산군과 진성대군의 배다른 형제자매중에 성종의 후궁인 숙의심씨의 맏딸인 경순옹주가 남치원에게 시집을갔기에 남치원은 성종의 부마이면서,연산과진성의 처남이기도했다.숙의 심씨와 훗날 중종의 어머니가되는 숙의 윤씨는 서로를 잘아는 사이의 친분을 가지고있었다.


연산군시대에도 남치원은 우대를 받았고,중종시대에도 배려를받았는데,중종은 연산군을 내쫓고 왕이된 임금이었기에,쫒겨난 왕의 측근들은 대부분 처단되기마련인데,남치원은 연산군의 배려를많이 받았는데도,중종대에 이르러도 특혜를 받는걸보면 평소처신을 잘하지 않았을까하겠지만,


남치원이라는 사람의 일상생활행동을 살펴보면,오늘날의 망나니나 조폭같은 인물이었기에,성종의 여러 부마들중 한사람인 부마라는 관점보다는 경순옹주의 어머니인 숙의심씨와 중종의 어머니인 숙의윤씨의 관계가 특별했다고 생각할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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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치원에대하여 기록된 행동들을보면,다른지방을 50명정도의 무리를 이루어 여행다니며,자신에게 잘못보이는 사람은  일부러 시비나꼬투리를 잡아 그자리에서 패거나 가둬둔다든지,승려들이 사냥하는데 방해가된다고 절간자체를 박살내버린다든지 일반사람같았으면,중한형벌을 받았을것인데,유야무야로 넘어가는 기록들뿐이다.


평소행실이 이모양이었던 남치원이 궁궐의 대비전에서 나인으로 일했던 궁녀가 병으로 민가에 나가살게되었는데,그 궁녀를 데려다 자신의 첩으로 만들어 버린일이 생기게된다.다른것은 그냥 넘어간다고해도,이것은 그냥넘어갈수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조정에서는 연일 궁녀를 데려다 첩을삼은 남치원은 불충이기에,잡아다 죽여야한다고 상소를하니,


처음에는 이복동생의 남편이였기에 생각해서 눈감아 줄려고해도 궁녀의 체계자체를 무너뜨릴수있는 행위였기에 형벌은 내려야겠고 잡아들이면,반드시 죽여야하는 불충에 해당했기에,처단해버릴까 하다가도,어제밤에 자신의 모후이면서 대비인  정현왕후가 한말이 귀가에 멤돌았다.


"성종시대,악독한 폐비윤씨의 피박속에서 그리고 연산군아래에서도 나와 숙의심씨는 서로를 도우며,이겨냈었는데 이번일은 불문하고 넘어갔으면 하네" 하지만 어머님,신하들의 상소가 너무강해서......."신하들의 말은 중요하고,내말은 암것두 아니라는 말이지,아이고 내가 지금까지 누굴믿고 모진 연산군의 핍박속에서도 살았는데,늙으면 빨리죽어야 할까보네 내말은 상관말고,신하들 말 잘듣고 잘사시게,그만 물러가게......."  어머님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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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대간들이 남치원을 잡아들여 죽이라고 탄핵했지만,중종의 입에서 나오는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불허한다,불허한다,불허한다" 결국 남치원을 유배를 시키는가싶더니,유야무야되어지게된다,중종의 생몰년은 1488-1544 이고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는1462- 1530 이기에,남치원은 중종25년 1530년까지는 중종의 어머니의 보호를 받았을것같기는 한데,남치원의 공식적인 벼슬은 중종14년 1519년이후로 사라져,생몰년을 알수가없다.


병으로 민가에나가 사는 궁녀에대하여,사람들이 남치원처럼 행동했다가는 목숨이 열개라도 부족한 왕과신하의 관계가 엄격했던 불충하면 같은형제라도 죽임을 당하는 조선시대에서 부마로서 대놓고 꺼리김없이 행동하며 살다간 인물 1위를 고른다면  남치원이다.중종과 남치원의 기록을 살펴보다보니,왕이라고할지라도,자신의 어머니가 후원하는 사람에게는 어쩔수가 없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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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나는 조선의 국모이니라"라고 외쳤다는 고종의 왕비 민황후는 과연 그러한 말과 자세를 보여줬을까를 아무리 역사기록을 찾아보아도 보이지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로 궁녀의 복장을하여,구차하게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려고했을뿐이었다.


조선의 민황후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행동을했던 대비되는 왕비가 고려에 있었으니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14세기 후반에 머리에 빨간두건을쓴 도적의 무리였던 홍건적이 자주 고려를 침범하여,우리나의 백성들 괴롭히곤하였다.훗날 이 도적의 무리의 괴수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데,근본부터가 도적의 무리들이였기에 허약한 근본토대를가진 왕조일수밖에없었다.


1363년 고려 공민왕의 나이 33세가 되던해,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의 논공행상에 불만을품은 김용이라는자가,자객단을 이끌고 흥왕사의 행궁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나라일을 보던 공민왕을 암살하려고하였다.


김용의 자객단이 흥왕사로 급시에 습격을가하자,공민왕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는데,공민왕의 아내였던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공민왕을  어머니의 방에 왕을 숨기고,그문앞에 서서 자객단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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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단의 무리가 칼을 휘두르며 방문앞에 이르러 말하길 왕은 어디에있는가? 왕비가 홀로 나아가 외치길"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방안에 들어가려거든 먼저 나를치고 들어가라"하메,무리들이 두려워 태후의 방안에 들어갈수없었다.


김용의 자객단은 나중에 최영의 정예군에의하여 처단되어 반란은 진압되게되고 훗날 아내의 도움으로,자신의 목숨을 구한 공민왕은 흥왕사의 변이 일어난후 2년이 지난 35세되던해 눈이 소복히 많이 내린 2월 추운겨운날에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죽자,


훗날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남긴 조의문에 그때의 상황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는데 자신을 남기고 떠나버린 아내를향한 사랑과 비통한심정을 느낄수가있다."나에게있어 아내보다 중한것이 없었고,흥왕사의 변이 일어나메,나의 몸의 지척에서 적을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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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사후  공민왕은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은왕비를 살아있는사람처럼대하며,식사할때마다 자신의 음식과 왕비의음식을 같이차려  함께 대화를하며 음식을먹었고,일체의 고기를 먹지않았을뿐아니라,나라를 다스리는 일조차 관심을 끊어버려,국제정세에 밝아 요동을 정벌하며 호기롭고,영민했던 공민왕은 이후 360도 다른 무기력한 왕의 모습을 보이며,슬픔속에서 살아가다 결국 신하의 손에의하여 죽음을 당하게된다.


훗날 조선을 개국한 반역의무리들이 공민왕의 후손인 우왕과창왕의 씨를 가짜라고하며,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위하여 역사를 왜곡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보아도 공민왕은 35세에 이미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하여,아이를 낳다가 죽었던걸보면,공민왕의 남성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했음을 알수있고,공민왕 스스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했던 우왕을 훗날 반역의 무리가 "아니다"라고 기록것은 반역을 정당화하기위한 역사조작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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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역사에서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자객단앞에서도 당당히 홀로맞선 여인이었지만,궁중에서의 일상생활모습은 내성적이고,여린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전해지는데,사랑앞에서는 한발자국도 물러 서지않았다.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사랑을보면,남녀간의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라는 말이 사실인거같다.


드라마나 사극일지라도,역사를 조작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것은 반역의무리들이 늘행해왔던 목적을위하여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르지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반만년역사에 왕비로서,노국공주가 행하였던 행동은,실존하는 유일한 기록이며,"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라는 그러한 비장미와 당당함을 보여줬던 인물을 찾는다면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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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전 서울에서 발생했던 소녀가장 성폭행사건을 살펴보고,이러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형벌을 내려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1404년 조선태종시기에 조선의 문신관리였던 이자지의 슬하에는 딸3명만이 있었고

큰딸인 내은이가 16살이되었을때 부모가 모두 연이어 죽자,큰딸인 내은이는 자신의 두여동생과 여종인 연지와소노와함께 자신의 부모의 3년상을 행하려고하였다.

경기도 과천에 살면서 서울로 출퇴근하며 이자지집안을 도왔던 가외노비인 살구지형제가



하루는 찾아와서 말하길 "주인 어르신이모두 돌아가셨는데,과천에서 서울로 왔다갔다하며 저희형제가 모시는것보다,과천으로 내려와서 저희와 함께사시면,저희도 편리하고,더욱 잘모실수있을거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이자지의 큰딸인 내은이가 대답하길"비록 내가 여자이지만 부모님의 3년상을 집에서 모셔야하는데,이런때에 내가 어떻게 집을 떠날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실구지가 말하길"상전의 의식주가 우리형제에게 달려있는데,저희 형제의 청대로 하지않으면,저희는 도망가 돌보지않겠습니다"하니,내은이와두여동생과 여종2은 부득히 과천으로 내려갈수밖에 없었다.


과천으로 소녀가장인 내은이가 내려오자,살구지형제는 좋은음식을 대접하며 환심을샀는데,밤이 깊어졌을때,살구지형제가 처남인 박질을 건너방에 몰래들어가 숨어있게하고는 내은이를 그방으로 들어가 쉬게하였는데,방안에 들어간 내은이가 불숙 튀어나오는 박질을보고 놀라 큰소리치며 울었다.이에 밖에있던 내은이의 두동생과 여종들도 함께놀라 소리쳤는데,살구지형제가 그들을 붙잡아 위협하며 소리치지못하도록 붙잡고있었다.


방안에있던 내은이가 강간을 모면하기위하여 힘을 다하였으나,박질은 저항하는 내은이의 손과발을 묶어 기어이 욕심을 채웠다.어느날 감시가 소홀한 틈을타,내은이가 도망하여 서울의 한성부관아를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이에 한성부에서 살구지형제와 박질을 잡아다 심문하니,범죄사실이 밝혀지게되어 강간을한 박질뿐아니라,공범인 살구지형제 모두 능지처참형에 처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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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처참형은 죄를 범한 죄수에게 줄수있는 최극형으로 왼팔,오른팔,왼쪽다리,오른쪽다리,몸통,목으로 6등분하여 죽이는 형벌이었기에,소녀가장을 강간하는 범죄에대하여 얼마나 엄격한 처벌을했는지 알수있고,


오늘날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상관없이 강간범에대하여 사형이나,정상참착할 사유가있더라도 250년징역같은 형벌로 엄격하게 처하는데,우리나라의 오늘날 법의처벌은 선조들이 처벌했던 형량과비교해도 너무관대하고,기타나라들과 비교해도 처벌형량이 너무관대한 측면이있는데,과연 무슨생각으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법원이 강간범들에게 법적처벌을 관대하게하는지 알수가없다.


도덕률인 성경이나 경전에따르더라도,강간범은 돌로 쳐죽이는게 신의법률인데,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강간범들은 인간이 아닌 짐승들이기에,반드시 죽이도록하였던것이다.왜 선진국일수록 다른범죄의 형량에 비하여 강간범에대하여는 더욱 무거운형벌인 예외없는 극형의 형벌을 가하는지 생각해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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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9대왕 김춘추가 재위2년에 접어든 655년,백제,왜,고구려의 연합전선으로 연이은 공격을받은 신라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되었다.


이에 태종무열왕은 장수 김흠운이 전지,예파,적득,보용나등과함께 백제의 조천성을 공격하도록하였다.



김흠운은 어려서부터 나라가 어려움에빠졌을때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바쳐 나라를 지켜냈던 화랑들에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곤했다.





김흠운이 백제의 조천성아래 양산이라는곳에 진을치고있을때 백제의 대군이 야음을틈타 기습공격을해오자,신라군의 진중은 혼란에빠져 미쳐 전열을 가다듬고 싸워보기도전에 많은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수많은 화살이 날아오는중에서도 김흠운은 홀로 말위에서 창을 든채 맞서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어려운상황에 처하자,김흠운이 부하였던 전지가 김흠운을 구하기 위하여 다음과같이 말하였다.


" 적이 어둠속에서 지척을 분간할수없는 상태로 공격해오니,만일 장군께서 그들에게 죽더라도 아무도 아는사람이 없을것입니다.또한 장군께서는 신라의 명문가의 자제이고,대왕의 사위이므로 적의손에 죽게된다면 백제의 자랑거리가되겠지만,우리에게는 커다란 슬픔이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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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운이 말하길"대장부가 나라를 위하여 몸을바친이상,남이 알아줄 상황이든,그렇지않든 무슨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앞으로 나아가 힘이다하는 순간까지 적과싸우다 죽었다.이를지켜보던 예파와 적득도 적에게 달려나가 함께싸우다 전사하였다.


후군에서 지원 기마병대를 이끌었든 보기당주 보용나가 흠운이 죽었다는말을 전해듣고 말하길"흠운은 권세와영화가있어,사람들의 사랑과 아낌을 받을수있었는데도 스스로 절개를지켜 죽었다,나 보용나는 생이무익,사이무손호?"라고 말하며 적진으로 달려나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훗날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를듣고,슬퍼하며 그들을 추모하기위하여 양산가를 지어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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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점을치는 사람이었던 지화라는 사람의 관계를 통하여,세종이 풍수나 점같은것에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수가있다.


지화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때부터 국가의 점치는 일과,혼례에대한 궁합을 보는일을 맡아서했다.

지화의 운명은 태종과 세종에대한 "말한마디"인과응보에의하여  극과극인 운명을 살게된다.


태종은 세종처럼 남녀관계에는 금슬이 좋아서 왕비뿐아니라 많은 궁녀들에게서 아이를 낳았다.




태종은 궁녀에게서 나은 자신의 딸들이 혼례할 나이가 차자,궁합을 잘보는  판수인 지화를 시켜,알맞은 사위감을 찾도록한다.지화는 장성한 아들이 있는사대부집들을 돌아다니며 생년월일을 알아보러다니던중,이속이라는 관리의집에가서 그 집의 아들의 생년월일을 묻자,


이속이 지화에게 말할길 "명문가의 비빈의 딸이아닌,일반궁녀에게서 난 딸의 혼례를 위하여 우리아들의 생년월일을 묻는거라면,우리아들은 죽을걸로 가서 말해주게" 지화는 자신의 들은 말을 그대로 태종에게 해버렸다.


태종이 누구인가? 자신을 거스리는것은 외척이고,형제이고 박살내버리는 조선조 최대의 터프가이 왕이 태종이었다,대노한 태종은 이속을 잡아오게하고는 말할길" 근본이 틀려먹은 가문인걸 내 익히 알고있었기에,나도 혼인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그러나 네놈의 말투는 용서할수가없다"하고는 이속을 감옥에 가두어 말에대한 댓가를 치루도록한다.


지화의 입장에서는 꼭 이속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궁합을 맞춰볼 사대부집의 아들들이 많이있었기에,이속이 한말을 사적인 대화로알고 뭍어주고 태종에게 말하지않을수도 있는 문제였다.지화는 평소 이속을 좋게보지않았거나,태종이 자신에대한 신임을 널리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훗날 이러한 말실수에대한 연은 결국 지화 자신도 범하여 자신의 운명이 박살나버리걸보면 연에의한 인과응보라는 말을 되새겨보게된다.


세월이 흘러 태종이 죽고,세종이 왕위에 올랐다.지화는 선대부터 국가의 점과 혼례에대한 일을 잘한 공이있었기에 세종은 신하들이 "점쟁이에게 벼슬을 내리는것은 가당치 않습니다"라는 상소를 물리치고 지화에게 사옹원사직이라는 3품에 해당하는 꽤 높은 벼슬을 내린다.


1444년 겨울 어느날에 부련듯 나라의 일에대한것을 점쳐보려는 생각이 들었던 세종이 신하를 시켜 지화를 보고싶다고 하였다.신하가 지화의 집을 찾아가보니,지화는 없고,그대로 돌아갈수없어 여러곳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지화를  찾아냈는데 다른사람의 집에서 술을 먹고있었다.


신하가 말하길 "전하께서,나라의 일에대하여 점을 칠일이 있다고 부르십니다" 술을 먹어서인지 눈에 뵈는게 없던 지화가 말하길 (오늘~꺼억,노새,노새 젊어서 놀아~ 아 좋다~ )"술을 많이 먹어,오늘은 점을 칠수가 없으니 잘말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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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가 세종에게가서 그대로 말하길 "술을 많이 먹어 오늘은 점보는 일을 못하겠답니다" 이말을 들은 세종이 대노하여 "이눔이 운명보는것을 좀 안다고 음흉하고 간교하기 짝이 없는눔이구나,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그 말뽄새에대하여 문초하도록하여라"하고는 결국 세종은 지화를 남도땅 외딴섬인 진도로 귀향보내버려,지화의 운명도 한순간에 막장인생으로 변해버리게된다.


세종이 풍수지리나 점치는것에대하여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진 왕인지는 1449년 4월의 조선왕조기록으로 분명하게 알수가있는데 세종이 말할길 "장님인 지화가 운명에 대하여 점친것들이 모두 맞은것은 아니지만,예로부터 성현들이 풍수지리등인 복서를 중히여겼는데,인간세상일로는 알수없는 일들이 생겼을때 무엇으로 의지할수있겠는가,그렇기에 운명에 관한책은 널리 구하여 올리도록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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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2대왕인 남해왕이죽자,3대 왕위를 누가 물려받을지에대하여 정해지지않았다.남해왕에게는 아들인 유리와 사위인 탈해가 왕권의 후보였다.



먼저 유리가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는 마음으로 탈해에게 말하길 '백성들의 추앙을받는 자네가 왕위를 잇는것이좋겠네"


탈해가 말할길" 왕의 자리는 그 그릇에 맡는 어질고,현명한 사람이 맡아야하는것으로 아무나 감당할수있는것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현명한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알고있습니다(석탈해는 자신보다 유리가 더많은 치아를가지고있는것을 알고 있었던듯하다)그리고는 떡을가져다 한입씩 물고 떡에난 이빨자국을보니 유리가 많았기에 신라의 3대왕은 유리왕이되었다.


이후로 신라의 왕을 이사금이라고 불렀는데,이사금이란 "이의 자국"이라는 기원을가지게되었다.신라3대 유리왕은 과부,고아,자식없는 노인등의 처지가 불우한 백성들에게 더많은 관심을가지고 정치를하였기에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하고,복되었다.


유리왕시대에 신라의 6부에게 성씨를 하사하였는데 양상부는 이씨,고허부는 최씨,대수부는 손씨,간진부는 정씨,가리부는 배씨,명활부는 설씨라는 성을 내렸다.이,최,손,정,배,설씨 6가지 성씨는 신라의 6부족과 관련이 있는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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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신라의 설씨 성을가진 처녀는 얼굴이곱고,심성이 지조가있었기에.삼국사기열전에 설씨처녀에대하여 따로 부가하여 기록할정도였다.유리가 죽을때 유언을 남기길 자신의 뒤를이을 왕은 자신의 아들들이 아니라,탈해에게 왕위를 잇도록 엄명하고는 죽었기에 신라의 4대왕은 석탈해가 되었다.유리와 탈해의 관계는 이처럼 서로를 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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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사진은 티스토리달력 사진공모전의 출품작입니다.사진제목은 "바위섬"입니다.바위섬~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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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관대한처벌을 받는것이 고위공직자등 정치권활동을하면서 뇌물쳐먹는 인간들에게대한 법의 처벌이아닐까 생각한다.

부패가 만연한 중국조차도,빽이나 끊이 떨어진 정치인이라서인지는 모르지만, 백성들을위한 안정책으로 고위정치인들을 공개처형하는 기사를 접할수있다.


쇼라도좋으니,우리나라도 제발 조선왕조 500년동안 쭈욱이어져,오늘날까지도 너무도 뇌물이나 부정부패에대한 처벌이 관대한 법적정의를 제대로 시행했으면 좋겠다.




일반서민은 사이다1병 훔쳤다고,실형을선고하면서 뇌물쳐받아먹고,부정부패한 정치인들은 뭔 빽이 그렇게좋길래,툭하면 집행유예로 관대한처벌을 하는지 이해할수없다.말로만 엄중이 처벌한다,엄벌하겠다 주둥아리만 놀리지말고,형량과판결로써 엄벌에 처하는 전통을 만들어줬음 좋겠다.뇌물과부정부패에 관련된 정치인이나공직자들은 평생 정치인나공직에서 활동할수없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잠시지나면 무슨로비를했는지,사면받아 정치인이나 공직으로 복귀하는 이런 작태는 없어져야한다.그러기위해서는 법의 정의가 제대로되야된다.이런 뇌물이나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정치인이나공직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더라도,그 처벌이 무겁지 않다.이들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일반 살인범죄자의 피해보다 더심하고,악영향을 미친다.


정치가 3류에서 계속머무는 이유가 뇌물처먹거나 부정부패한 이런 공직자나정치인들이 너무나 쉽게 정치인나공직자로 복귀시키는 저주받은 조선왕조 500년의 부패한 정치문화가 아직까지도 남아있기때문이다.역사로부터 배워보자.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불렸던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의 처벌과 복귀과정을 역사기록을 통하여 살펴보고,뇌물과부정부패한 정치인이 얼마나 쉽게 다시 공직자로 복귀해서 호의호식을하는지 아울러 썩은대가리가밑에서는 탐관오리들은 어떻게 오뚜기처럼 부활하는지도 알수있다.


1894년 고부민란일어나자 고종은 근엄한 얼굴로 정색한채 조병갑에대하여 백성들에게 보여주기위한 모습에서는 이렇게 명령한다" 이놈은 단지 국고를 횡령만한게아니라,백성들을 학대까지한 자이니,엄중히 조사하여 처벌하도록 하여라"이렇게 말해놓고는 고종은 단지 조병갑을 고금도에 유배시키는것으로 마무리해버린다.


그리고 유배한지 채 1년이되지도않는 1895년 여름에,법부에서 "조병갑을 풀어주는게 어떻겠습니까?"하고 물으니 고종은 "좋아"라고 말하며,사면해버린다.그당시 조씨집안이 정치권에 힘있는세도가였기에 여기저기 로비가 고종에게 들어갔을거니,짝짝쿵손발이 맞아 사바사바 잘했을것은 미루어짐작할수있다.


그런데 더 기가막힌것은 고부군수로있으면 백성들에게 뇌물과 부정부패를저질러,고부민란이생기게했던 어떻게보면 오늘날이아니라 그당시에도 엄청난사건이었는데,2년이 조금지난 1898년 1월2일 조선왕조실록을보면,고종이 조병갑에 공직을 부여하는 기록이나온다.기록은 짤막하다 "4품 조병갑 법무민사국장에 임명한다" 이게 뭥미?


고부민란으로 백성들이 어육이되고,전봉준또한 참수되는 큰사건이었는데,고작 2년도 안돼서,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은 오뚜기처럼 부활하여 정치인으로 복귀하도록 고종이 도와준다.오늘날에도 뇌물이나부정부패에 연루되었던 정치인이나공직자들이,빽이나 줄을타고,오뚜기처럼 복귀하는것들이 있다.이런것을 집행유예해버리고 사면해버리고하니,2-3년만에도 다시 얼굴을 내미는것이다.엄벌이 집행유예고 사면이냐?


어째든 다시 돌아가서 탐관오리 조병갑은 오뚜기처럼부활해서 다시 공직자로 임명된다.여기서 4품이라고 나오는걸보면,조선시대의 관리의 품계상 관찰사 종2품,목사 정3품,군수 종3품이 임명되는데,고부군수를 지냈다면 종3품이었을것인데,그래도 공직에 재임용하면서 백성들에게 눈치는보였던지 한단계 강등된 4품품계로 공직을 임명했음을 알수가있다.


탐관오리 대명사인 조병갑을 것도 정의를 심판해야할 사법부에 공직자로 등용시킨 고종의 대갈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올수있었을까? 2년새에 조병갑일가가 얼마나 로비를 잘했던지,아니면 서슬퍼렇게 "이눔은 횡령만한게아니고 백성을 학대 어쩌구하면서 했던말이" 기억이 안날정도로 치매에 걸린건지 그 대가리밑에 그놈이다.


우리가 만화영화에서보면 흔히 나오는 악인은 패하고,선인은 승리하는 해피엔딩이아니라,슬플게도 그당시 현실은 탐관오리 조병갑은 68세까지 장수하며,죽을때까지 호의호식하며 잘먹고 잘사다가 죽었다.


제발 오늘날 선진국으로 가려는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어떠한 범죄보다,유영철아니 그어떤 살인범보다 더 나쁜놈이 뇌물이나부정부패를 저지른 정치인이나공직자라는 일반공유적 가치관이 있어야하고,사법부또한 지난세월 정치인,공직자로 나라에 이바지한 공로가있어 이따구 볼따구맞을 명분을 갇다붙이고 처벌에관대할게아니라,다시는 정치인이나공직자로 부활하여 오뚜기처럼 악인이 해피엔딩하지못하도록 중한형벌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조선왕조 500년도 모자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탐관오리들의 부활오뚜기 정치문화를 이대로 계속이어갈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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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오늘날처럼 길거리에서 몸을파는 여자들이 있었는지,창녀들에대한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여러가지 명칭기록으로 남아있음을 알수있다.


일반적인 형태의 창녀는 관가의 노비로예속되어 활동하는 관기,기생,운평으로 불려던 여자들로서 조선시대의 양반문화의 기득권을 가진 관리들의 노리개감으로 합법적으로 활동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의 삶속에서는 이러한 여자들이아닌 나라에서 인정하지않기에 불법적인,노는여자를 뜻하는 유녀의 역할을 무당이라는 호칭을가진 사람들이 하였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쓰여지는 신내림개념만을 가진 무당이아니라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사이에서 행하여지는 매춘,일탈행위를 기업적으로하는 포주의 개념으로 받아드려졌기에,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하는 조선시대에서는 무당은 온갖 나쁜것의 대표적상징으로 사용되어졌다.


무당은 아름다운 미모를가진 여자를 현수라고하여 데리고 다니면서 거문고를 타거나 노래를 부르게하였는데,무당의 눈치에의하여,현수와 일반백성간의 성매매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또한 무당은 남자무당인 박수를 데리고다니면서 일반백성들이나 양반집부녀자들과 사통하여 거래하기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남자무당을 화랑이나,양중으로 불리웠는데,삼국시대의 진취적 무예기상을 화랑이라는 개념이,유교문화 시대인 조선시대에는 오히려,똑같은 화랑이라는 단어가,오늘날의 호스트바종업원정도의 개념으로 사용되어졌다.이러한 호스트바의 영업방식이 중종(1513년)시대에 전라도관찰사 권홍이 왕에게 올린 장계에서 살펴볼수있는데.그내용은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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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굿을할때 젊은남자를 여자복장을하게하고,얼굴에는 분을바르고,여자무당과함께 방안에있다가,밤이 깊어지면,틈을 엿보아,여자무당이 젊은남자와 부녀자간의 매춘를 알선하고있습니다."



여자무당은 예쁜여자인 현수도 거느리고,젊은남자인 화랑도 거느리고하면서,마음껏마시고,노는 굿판이 벌어지면 틈을보아 굿판을 벌이는 집안의 남자나 부녀자와 매춘을 알선하는 포주역할을 조선시대에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엄격한 신분계급사회를 이상향으로한 유교문화인 입으로만 도덕,공자,맹자,열녀문,정조를 외친 조선시대조차도 일반백성을 상대로하는 무당의 매춘문제는 해결할수없었던 근본적이유는 유교적도덕을 주댕아리로만 외쳐던 기득권양반들이,관아의 노비신분으로 삼던 성노리개감인 여자들인 관기나 기생제도를 조선왕조가 패망할때까지,전혀 스스로 폐지할생각을 하지않았던 이중적도덕률을 가졌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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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속의 역사드라마나 사극들을보면,기껏해야 궁궐밖에서 문을 지키는 병졸들이나 포도대장정도만이 칼을차고 있는 모습이고,

왕들앞에서는 모두 유약하게보이는 유교문신들만이 대가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인다.

문치의 시대라는 조선시대,그중에서 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던 세종조의 기록을 통하여 오늘날 tv속의 역사드라마처럼 왕의주변에 칼을차고 서있는 사람들이 없었는지 살펴보자.

세종14년(1432년) 세종과 신하인 권맹손과 나눈 대화는 이러했다.



세종:중국은 무신만이 칼을차고 시위하는게아니라,일반신료들도 칼을차지 않는사람이 없다하고,아버지인 태종때에도 중국에 사신으로갔던 정역이 아래기를,중국의 신료들은 모두 칼을 차고있습니다라고 했는데 그러지 아니한가?



 

권맹손:중국에서는 그렇게하고 있사옵니다.



 

세종:그런데 왜,우리나라에서는 무반재상들조차 칼을차고 다니는것을 부끄럽게여기고,들고다녀야할 칼을 시종에게 들고다니게하니,이게 뭔꼬라지냐,왕앞에서 신하들이 시위할때 칼을 차는 문제에대하여 격식을 정하여 아래도록하여라.



세종대왕의 분부에의하여 세종14년(1432년)10.29일 병조에서 신하들이 궁궐에 들어올때나 시위할때 칼을차는 문제에대하여 격식을 정하여,왕에게 아래었다.


"중국의 대소무관은 모두 칼을차고 다니는데,오직 우리나라 무관만이 입직과 시위할때 칼을 차고있지않고 2품이상의 무관이 되어도,별운검이외는 칼을 들고다니지 않으니 잘못된것으로 생각합니다.앞으로는 품계와 상관없이 무관은 칼을차고 시위하도록하고 유신이라도 무관직을 겸하는경우는 칼을차도록 제도화하는것이 좋겠습니다하니,세종이 이르기를 제도화하여 지키도록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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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이러한 혜안은 뒷날의 엄청난사건의 성공과실패의 단서가되는데,세종의 아들문종 그리고 문종의 아들 단종대에 이르러,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제거하기위한 사육신사건이 일어났다.이때 무관으로 칼을차고 왕을 시위하던 사육신중의 한명이 유응부였는데,명나라 사신을위한 연회를 창덕궁에서  베풀고있을때 재수없게도 한명회의 충고를받은 수양대군이 그날따라 칼을찬 무관이 시위하는것을 하지말라고하여,결국 사육신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게된다.


세종이 좀더 엄격하게 제도화시켰다면,손자가 불행하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수양대군에게 죽게되는일을 막을수도 있었을것이다.어찌되었든 역사드라마에서 유약한 신하들만이 기립하여 서있는 모습은 그당시 실제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점이다.조선시대의 왕앞에서 칼을차고 서있는 무관신하들도 있는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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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동안 죽어있었다가 살아난 사람에대한 기록이 우리나라의 삼국역사서에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은 사흘동안 죽어있다가 살아나셨는데,무려...무려....무려....한달....우리나라의 정사인 역사서에 기록된것이기에,허튼소리보다는
진실일 가망성이 많다.


또한 위대한 왕이나,인물을 높이기위한 기록이아니라,일반백성에게서 일어난 기이한 현상을 기록해둔것이기 때문이다.




때는 서기 222년 신라 10대왕 내해왕때였다.경주 남쪽지역에 있는 남신현이라는곳에 사람이 죽어,장례까지 다치루었는데,죽은지 한달뒤에 살아서 무덤에서 관뚜껑을 열고 나왔다.사람들이 이를보고 기이하게여겨 나라에 고하니,그에관한 기록이 역사서에 기록되게 되었다.


사람의 부활이라는것이 부활은 사전적의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이다.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에대한 기록은 현대화된 오늘날에도 언론기사로 때때로 전해진다.


의사에게 사망진단서를 받고,냉동실에 안치되었다가 살았났다든지,죽은사람의 장기이식을 위하여 수술하다가,아픔때문에 죽은사람이 살아났다든지하는 기사들이 전해진다.


현실적으로도 바다의 물고기인 복어의 독을 이용하여,의학적인 사망선고를 받게하고,매장해서는 며칠이 지나 무덤의 관에서 사람을 살려내어,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그러한 부류의 집단도 존재하고있다.사람의 부활이라는 개념이 종교에서만 일어날수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흘만에 죽었다가 부활한것을 믿습니까,안믿습니까?라는 단순한 종교의 선택이아니라,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현상은 공상이아니라,현실적으로 그러한 많은 사례들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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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농담한마디했다가 자신도죽고 나라끼리의 전쟁을 일으킨 석우로라는 사람에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석우로의 이러한 행동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하기위해서는 먼저 석우로처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석우로는 신라의 10대왕 내해왕의 아들로서 태자였는데,내해왕의 딸이 신라의 11대왕이되는 조분왕의 왕비였다.결과적으로 왕위가 내해왕의 아들이아닌,딸의 사위가 되었던것이다.




조분왕의 입장에서는 석우로가 왕위를 이어야했었는데 그렇지못함에대한 미안함과,석우로가 매형인입장이였기에,석우로를 중히여겨 나라의 중요한일들을 맡겼다.석우로는 무예에는 능하였기에,백제와 왜와의 싸움에서 공적이 많아 승승장구하여 신라의 대장군의 직위까지 올랐다.


시간이 흘러,조분왕의 딸이 석우로의 아내가 되었는데,석우로와 조분왕의 딸 명원부인사이에 흘해라는 아이가 태어나는데,이 아이는 어머니의 공적과배경때문에 훗날 최고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석우로의 농담으로 인하여,나라간의 전쟁이 발생한 상황은 이러했다.조분왕이죽고,조분왕이 동생인 신라12대 첨해왕시기인 249년에 석우로의 집안이나 세력이 신라에서는 제일이라고 할수있을만큼 튼튼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있었기에,대갈박이 좀 무식하더라도 첨해왕도 석우로의 위치를 무시할수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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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년에 왜국의 사신인 갈나고가 신라에 왔을때,왜국사신이 머무는곳에 석우로가 찾아가,자신의 신라사회에서의 위치와 용맹성을 자랑할겸,갈나고에게 이렇게 말하였다."조만간에 너희 왜왕을 잡아다가 염전일을시키고,그왕비는 잡아다 식모살이를 시키겠다.하하하" 갈나고는 이말을 듣자마자,사신의 임무고,뭐고간에 왜국으로 돌아가 왜왕에게 듣은바를 그대로 전하자,뿔이난 왜왕이 대병을 보내 신라를 치도록하여,왜의 대병이 신라를 침략하여,왜와 신라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렇게되자,뭔 이유인지 잘알수없던 침해왕에게 석우로가 앞에나아가 말하였다."제가 말을 조심하지않아서 이러한 결과가 생겼습니다.제가 적진에게가서 상황을 잘설득해 보겠습니다"하고는 왜의 대병이 진을치고있는곳으로 가서 왜의 장군들에게 말하길"저번에,말한것은 농담이었는데,진짜로 군사를 이끌고와서 전쟁을하자면 어떻게합니까?"이에 왜인들이 얼빵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대답도하지않고,석우로를 잡아다가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에태워죽이고는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신라13대왕 미추왕(262-284년)때에 다시 왜국사신이 신라에왔는데,자신의 남편인 석우로가 농담한마디로 인하여 원통하게 죽은것을 분하게여겨,이를갈던 석우로의 아내 명원부인은 미추왕에게 나아가,자신이 왜국사신을 극진하게 대접하겠다고 청하여,허락을 얻은후 상다리가 부러질만큼 맛있는음식과 술을준비하여,왜국사신이 흠뻑취하고 마시고 놀게하던중,술을 마시면,농담도하게되었을것인데,이것을 빌미로 왜국사신을 뜰에 잡아다가 자신의 남편이 죽게되었던 방법그대로 왜국사신을 불에 태워죽였다.이러한 소식을들은 왜국에서는 다시 대병을 거느리고 복수를하려 침략하였지만,신라를 이길수가 없었다.


명원부인의 이러한 "눈에는 눈,이에는 이"의 복수는,훗날 자신의 아들이 흘해가 신라 16대왕인 흘해왕(310-356년)이되는 바탕이 되었다.흘해의 아버지인 석우로또한 자신의 대에서는 정상적인 왕위를 얻지못했지만,자신의 자식은 왕위에 오를수있었다.어찌되었든 석우로는 농담한마디 잘못했다가,나라간의 전쟁을 만들고,그책임으로 죽은 불쌍한 위인으로 삼국사기열전에 전해져온다.역사의 교훈은 말해주고있다.사람을 유쾌하게하고, 웃기게하는 농담도,때와장소에 맞지않으면,죽을만큼 된다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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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평왕때 백제와의 국경지역에있는 봉우리성 성주인 찬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해론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해론이 나이 7살이 되었을때,백제가 많은군사로 봉우리성을 포위하여 백여일동안 공격하였지만 성을 함락할수는 없었다.


진평왕은 악전고투하는 찬덕을 위하여 상주,하주,신주의 3개주의 군사로 봉우리성을지원하도록하였다.





3개주의 장군은 백제군사의 위세가 강함을보고,싸우는척만하고 이길수 없다고 말하며 퇴각하여 돌아가버렸다.멀리 성안에서 이모습을 지켜보던 찬덕이 하늘을 우러러 말하길"아군이 위급함을 알고도,적의 강함을 생각하여 싸워보지도 않고 가버림은  의가 아니다.의를 버리고 구차하게 살기보다,의를 위하여 죽을것이다"하고 분전하였지만,포위된지 4개월이 넘어가자 성안에 음식과 물이 다 떨어졌다.



이에 이르자 찬덕은 물대신 오줌을 받아 마시면서까지 최후의 항전을하였지만,이미 성이 함락되는것을 막을수는 없었다.최후의 순간이 온것을 안 찬덕이 남아있는 부하들에게는 항복하여 살도록 명하고,정작 자신은 항복하지않고,눈을 부릅뜬채 나무에 스스로 머리를 박아 죽었다.그후 13년이 흘러,찬덕의 아들 해론이 20살이되었을때,신라와 백제는 다시 봉우리성에서 전투를 하게되었는데,기이한 인연에 따라 종군한 장수중에 해론이있었다.



해론은 백제와의 싸움에 앞서 주위 장수들에게 말하길"나의 부친이 이곳에서 죽었다.내가 앞에 나가 싸우려는것은 의를 버리고 구차하게 사는것보다,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애달픈 선친의 맹세를 느끼기에,기쁜마음으로 신라의 정신을 보여주고 오늘 죽을것이다"하고 칼을 들고 홀로 적진으로 달려가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싸우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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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여자 연예인들이 합죽이가 안되기위해서 보톡스를 맞는경우가 종종있다.보톡스같은 겉모양을 추구하는것이아닌 내면의 심성을 바랄볼수있는 삼국시대의 죽죽이라는 사람에대한 역사기록이 전하여진다.

때는 선덕여왕11년(642년) 요즘같은 날씨에,백제장군 윤충이 신라의 영토인 대야성을 빼앗기위하여 쳐들어온다.

대야성의 성주는 김품석이었고 그의 아내는 태종무열왕의 딸이었다.백제군사가 쳐들어오자,김품석의 부하중에,백제와 내통하여 성에 불을질러 성안의 상황이 위급해지자,



김품석의 부하중에 서천이라는 장수가 태종무열왕의 딸과 주군의 목숨이라도 구해보려고, 성위에서 백제장군 윤충을 보며 말했다."만약 장군이 우리 주군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겠다면 항복하겠습니다" 윤충이 말할길" 하늘에 떠있는 태양을 두고 맹세하는바,서로 좋은게 좋은것이니 그약속을 꼭지키겠소.나를 믿으시오"


서천과 윤충의 약속을 믿고 품석이하 군사들이 성문을 열고 나가려고하자,품석의 부하였던 죽죽이 나서며 말할길"구차하게 항복하여 사느니,차라리 호랑이처럼 싸우다 죽는것이 낫습니다.백제는 말에 대한 약속을 배신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이제 윤충이 태양을 두고 맹세한다는 그럴듯한 말에 속아,항복하여 나간다면 뱀에 먹이가되는 쥐처럼 싸워보지도 못하고 힘없이 모두 죽게 될것입니다."
 

품석은 죽죽의 건의를 무시하고,성문을 열었다.먼저 군사들이 항복하러 성문밖으로 나가자,주위에 복병을 숨겨두었던 백제장군 윤충은 그들을 모두 죽여버린다.이러한 광경을 본 품석은 상황이 모두 끝나버렸음을 알고,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모두 죽이고,자신또한 자결해버린다.


성에 남아있던 죽죽은 황급히 성문을 닫고,일부 남아있는 군사를 수습하여 약속을 배반한 백제군사와 최후의 항전을 하려고한다.이때 죽죽의 친구 용석이 말하길" 지금 남아있는 군사로 성을 지키는것은 불가능하다.살아서 후일을 도모하는게 어떻겠는가?"


죽죽이 말하길" 그대의 말처럼 이미 상황이 어찌할수 없다는것을 나도 잘안다.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나의 이름을 죽죽이라고 지은것은,추운 겨울일지라도,시들지 않기를 바람이었고,차라리 부러질지언정,구부러지지말라는 의미였는데,이제 상황이 가망이 없다고하여,구차하게 살고싶지는 않다" 이말은 들은 용석이 친구의 마음을 느낀바있어, 죽죽과함께 힘이 남아있는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다 함께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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