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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전 서울에서 발생했던 소녀가장 성폭행사건을 살펴보고,이러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형벌을 내려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1404년 조선태종시기에 조선의 문신관리였던 이자지의 슬하에는 딸3명만이 있었고

큰딸인 내은이가 16살이되었을때 부모가 모두 연이어 죽자,큰딸인 내은이는 자신의 두여동생과 여종인 연지와소노와함께 자신의 부모의 3년상을 행하려고하였다.

경기도 과천에 살면서 서울로 출퇴근하며 이자지집안을 도왔던 가외노비인 살구지형제가



하루는 찾아와서 말하길 "주인 어르신이모두 돌아가셨는데,과천에서 서울로 왔다갔다하며 저희형제가 모시는것보다,과천으로 내려와서 저희와 함께사시면,저희도 편리하고,더욱 잘모실수있을거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이자지의 큰딸인 내은이가 대답하길"비록 내가 여자이지만 부모님의 3년상을 집에서 모셔야하는데,이런때에 내가 어떻게 집을 떠날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실구지가 말하길"상전의 의식주가 우리형제에게 달려있는데,저희 형제의 청대로 하지않으면,저희는 도망가 돌보지않겠습니다"하니,내은이와두여동생과 여종2은 부득히 과천으로 내려갈수밖에 없었다.


과천으로 소녀가장인 내은이가 내려오자,살구지형제는 좋은음식을 대접하며 환심을샀는데,밤이 깊어졌을때,살구지형제가 처남인 박질을 건너방에 몰래들어가 숨어있게하고는 내은이를 그방으로 들어가 쉬게하였는데,방안에 들어간 내은이가 불숙 튀어나오는 박질을보고 놀라 큰소리치며 울었다.이에 밖에있던 내은이의 두동생과 여종들도 함께놀라 소리쳤는데,살구지형제가 그들을 붙잡아 위협하며 소리치지못하도록 붙잡고있었다.


방안에있던 내은이가 강간을 모면하기위하여 힘을 다하였으나,박질은 저항하는 내은이의 손과발을 묶어 기어이 욕심을 채웠다.어느날 감시가 소홀한 틈을타,내은이가 도망하여 서울의 한성부관아를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이에 한성부에서 살구지형제와 박질을 잡아다 심문하니,범죄사실이 밝혀지게되어 강간을한 박질뿐아니라,공범인 살구지형제 모두 능지처참형에 처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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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처참형은 죄를 범한 죄수에게 줄수있는 최극형으로 왼팔,오른팔,왼쪽다리,오른쪽다리,몸통,목으로 6등분하여 죽이는 형벌이었기에,소녀가장을 강간하는 범죄에대하여 얼마나 엄격한 처벌을했는지 알수있고,


오늘날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상관없이 강간범에대하여 사형이나,정상참착할 사유가있더라도 250년징역같은 형벌로 엄격하게 처하는데,우리나라의 오늘날 법의처벌은 선조들이 처벌했던 형량과비교해도 너무관대하고,기타나라들과 비교해도 처벌형량이 너무관대한 측면이있는데,과연 무슨생각으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법원이 강간범들에게 법적처벌을 관대하게하는지 알수가없다.


도덕률인 성경이나 경전에따르더라도,강간범은 돌로 쳐죽이는게 신의법률인데,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강간범들은 인간이 아닌 짐승들이기에,반드시 죽이도록하였던것이다.왜 선진국일수록 다른범죄의 형량에 비하여 강간범에대하여는 더욱 무거운형벌인 예외없는 극형의 형벌을 가하는지 생각해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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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9대왕 김춘추가 재위2년에 접어든 655년,백제,왜,고구려의 연합전선으로 연이은 공격을받은 신라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되었다.


이에 태종무열왕은 장수 김흠운이 전지,예파,적득,보용나등과함께 백제의 조천성을 공격하도록하였다.



김흠운은 어려서부터 나라가 어려움에빠졌을때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바쳐 나라를 지켜냈던 화랑들에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곤했다.





김흠운이 백제의 조천성아래 양산이라는곳에 진을치고있을때 백제의 대군이 야음을틈타 기습공격을해오자,신라군의 진중은 혼란에빠져 미쳐 전열을 가다듬고 싸워보기도전에 많은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수많은 화살이 날아오는중에서도 김흠운은 홀로 말위에서 창을 든채 맞서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어려운상황에 처하자,김흠운이 부하였던 전지가 김흠운을 구하기 위하여 다음과같이 말하였다.


" 적이 어둠속에서 지척을 분간할수없는 상태로 공격해오니,만일 장군께서 그들에게 죽더라도 아무도 아는사람이 없을것입니다.또한 장군께서는 신라의 명문가의 자제이고,대왕의 사위이므로 적의손에 죽게된다면 백제의 자랑거리가되겠지만,우리에게는 커다란 슬픔이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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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운이 말하길"대장부가 나라를 위하여 몸을바친이상,남이 알아줄 상황이든,그렇지않든 무슨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앞으로 나아가 힘이다하는 순간까지 적과싸우다 죽었다.이를지켜보던 예파와 적득도 적에게 달려나가 함께싸우다 전사하였다.


후군에서 지원 기마병대를 이끌었든 보기당주 보용나가 흠운이 죽었다는말을 전해듣고 말하길"흠운은 권세와영화가있어,사람들의 사랑과 아낌을 받을수있었는데도 스스로 절개를지켜 죽었다,나 보용나는 생이무익,사이무손호?"라고 말하며 적진으로 달려나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훗날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를듣고,슬퍼하며 그들을 추모하기위하여 양산가를 지어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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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점을치는 사람이었던 지화라는 사람의 관계를 통하여,세종이 풍수나 점같은것에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수가있다.


지화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때부터 국가의 점치는 일과,혼례에대한 궁합을 보는일을 맡아서했다.

지화의 운명은 태종과 세종에대한 "말한마디"인과응보에의하여  극과극인 운명을 살게된다.


태종은 세종처럼 남녀관계에는 금슬이 좋아서 왕비뿐아니라 많은 궁녀들에게서 아이를 낳았다.




태종은 궁녀에게서 나은 자신의 딸들이 혼례할 나이가 차자,궁합을 잘보는  판수인 지화를 시켜,알맞은 사위감을 찾도록한다.지화는 장성한 아들이 있는사대부집들을 돌아다니며 생년월일을 알아보러다니던중,이속이라는 관리의집에가서 그 집의 아들의 생년월일을 묻자,


이속이 지화에게 말할길 "명문가의 비빈의 딸이아닌,일반궁녀에게서 난 딸의 혼례를 위하여 우리아들의 생년월일을 묻는거라면,우리아들은 죽을걸로 가서 말해주게" 지화는 자신의 들은 말을 그대로 태종에게 해버렸다.


태종이 누구인가? 자신을 거스리는것은 외척이고,형제이고 박살내버리는 조선조 최대의 터프가이 왕이 태종이었다,대노한 태종은 이속을 잡아오게하고는 말할길" 근본이 틀려먹은 가문인걸 내 익히 알고있었기에,나도 혼인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그러나 네놈의 말투는 용서할수가없다"하고는 이속을 감옥에 가두어 말에대한 댓가를 치루도록한다.


지화의 입장에서는 꼭 이속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궁합을 맞춰볼 사대부집의 아들들이 많이있었기에,이속이 한말을 사적인 대화로알고 뭍어주고 태종에게 말하지않을수도 있는 문제였다.지화는 평소 이속을 좋게보지않았거나,태종이 자신에대한 신임을 널리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훗날 이러한 말실수에대한 연은 결국 지화 자신도 범하여 자신의 운명이 박살나버리걸보면 연에의한 인과응보라는 말을 되새겨보게된다.


세월이 흘러 태종이 죽고,세종이 왕위에 올랐다.지화는 선대부터 국가의 점과 혼례에대한 일을 잘한 공이있었기에 세종은 신하들이 "점쟁이에게 벼슬을 내리는것은 가당치 않습니다"라는 상소를 물리치고 지화에게 사옹원사직이라는 3품에 해당하는 꽤 높은 벼슬을 내린다.


1444년 겨울 어느날에 부련듯 나라의 일에대한것을 점쳐보려는 생각이 들었던 세종이 신하를 시켜 지화를 보고싶다고 하였다.신하가 지화의 집을 찾아가보니,지화는 없고,그대로 돌아갈수없어 여러곳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지화를  찾아냈는데 다른사람의 집에서 술을 먹고있었다.


신하가 말하길 "전하께서,나라의 일에대하여 점을 칠일이 있다고 부르십니다" 술을 먹어서인지 눈에 뵈는게 없던 지화가 말하길 (오늘~꺼억,노새,노새 젊어서 놀아~ 아 좋다~ )"술을 많이 먹어,오늘은 점을 칠수가 없으니 잘말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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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가 세종에게가서 그대로 말하길 "술을 많이 먹어 오늘은 점보는 일을 못하겠답니다" 이말을 들은 세종이 대노하여 "이눔이 운명보는것을 좀 안다고 음흉하고 간교하기 짝이 없는눔이구나,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그 말뽄새에대하여 문초하도록하여라"하고는 결국 세종은 지화를 남도땅 외딴섬인 진도로 귀향보내버려,지화의 운명도 한순간에 막장인생으로 변해버리게된다.


세종이 풍수지리나 점치는것에대하여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진 왕인지는 1449년 4월의 조선왕조기록으로 분명하게 알수가있는데 세종이 말할길 "장님인 지화가 운명에 대하여 점친것들이 모두 맞은것은 아니지만,예로부터 성현들이 풍수지리등인 복서를 중히여겼는데,인간세상일로는 알수없는 일들이 생겼을때 무엇으로 의지할수있겠는가,그렇기에 운명에 관한책은 널리 구하여 올리도록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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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2대왕인 남해왕이죽자,3대 왕위를 누가 물려받을지에대하여 정해지지않았다.남해왕에게는 아들인 유리와 사위인 탈해가 왕권의 후보였다.



먼저 유리가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는 마음으로 탈해에게 말하길 '백성들의 추앙을받는 자네가 왕위를 잇는것이좋겠네"


탈해가 말할길" 왕의 자리는 그 그릇에 맡는 어질고,현명한 사람이 맡아야하는것으로 아무나 감당할수있는것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현명한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알고있습니다(석탈해는 자신보다 유리가 더많은 치아를가지고있는것을 알고 있었던듯하다)그리고는 떡을가져다 한입씩 물고 떡에난 이빨자국을보니 유리가 많았기에 신라의 3대왕은 유리왕이되었다.


이후로 신라의 왕을 이사금이라고 불렀는데,이사금이란 "이의 자국"이라는 기원을가지게되었다.신라3대 유리왕은 과부,고아,자식없는 노인등의 처지가 불우한 백성들에게 더많은 관심을가지고 정치를하였기에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하고,복되었다.


유리왕시대에 신라의 6부에게 성씨를 하사하였는데 양상부는 이씨,고허부는 최씨,대수부는 손씨,간진부는 정씨,가리부는 배씨,명활부는 설씨라는 성을 내렸다.이,최,손,정,배,설씨 6가지 성씨는 신라의 6부족과 관련이 있는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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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신라의 설씨 성을가진 처녀는 얼굴이곱고,심성이 지조가있었기에.삼국사기열전에 설씨처녀에대하여 따로 부가하여 기록할정도였다.유리가 죽을때 유언을 남기길 자신의 뒤를이을 왕은 자신의 아들들이 아니라,탈해에게 왕위를 잇도록 엄명하고는 죽었기에 신라의 4대왕은 석탈해가 되었다.유리와 탈해의 관계는 이처럼 서로를 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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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사진은 티스토리달력 사진공모전의 출품작입니다.사진제목은 "바위섬"입니다.바위섬~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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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관대한처벌을 받는것이 고위공직자등 정치권활동을하면서 뇌물쳐먹는 인간들에게대한 법의 처벌이아닐까 생각한다.

부패가 만연한 중국조차도,빽이나 끊이 떨어진 정치인이라서인지는 모르지만, 백성들을위한 안정책으로 고위정치인들을 공개처형하는 기사를 접할수있다.


쇼라도좋으니,우리나라도 제발 조선왕조 500년동안 쭈욱이어져,오늘날까지도 너무도 뇌물이나 부정부패에대한 처벌이 관대한 법적정의를 제대로 시행했으면 좋겠다.




일반서민은 사이다1병 훔쳤다고,실형을선고하면서 뇌물쳐받아먹고,부정부패한 정치인들은 뭔 빽이 그렇게좋길래,툭하면 집행유예로 관대한처벌을 하는지 이해할수없다.말로만 엄중이 처벌한다,엄벌하겠다 주둥아리만 놀리지말고,형량과판결로써 엄벌에 처하는 전통을 만들어줬음 좋겠다.뇌물과부정부패에 관련된 정치인이나공직자들은 평생 정치인나공직에서 활동할수없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잠시지나면 무슨로비를했는지,사면받아 정치인이나 공직으로 복귀하는 이런 작태는 없어져야한다.그러기위해서는 법의 정의가 제대로되야된다.이런 뇌물이나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정치인이나공직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더라도,그 처벌이 무겁지 않다.이들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일반 살인범죄자의 피해보다 더심하고,악영향을 미친다.


정치가 3류에서 계속머무는 이유가 뇌물처먹거나 부정부패한 이런 공직자나정치인들이 너무나 쉽게 정치인나공직자로 복귀시키는 저주받은 조선왕조 500년의 부패한 정치문화가 아직까지도 남아있기때문이다.역사로부터 배워보자.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불렸던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의 처벌과 복귀과정을 역사기록을 통하여 살펴보고,뇌물과부정부패한 정치인이 얼마나 쉽게 다시 공직자로 복귀해서 호의호식을하는지 아울러 썩은대가리가밑에서는 탐관오리들은 어떻게 오뚜기처럼 부활하는지도 알수있다.


1894년 고부민란일어나자 고종은 근엄한 얼굴로 정색한채 조병갑에대하여 백성들에게 보여주기위한 모습에서는 이렇게 명령한다" 이놈은 단지 국고를 횡령만한게아니라,백성들을 학대까지한 자이니,엄중히 조사하여 처벌하도록 하여라"이렇게 말해놓고는 고종은 단지 조병갑을 고금도에 유배시키는것으로 마무리해버린다.


그리고 유배한지 채 1년이되지도않는 1895년 여름에,법부에서 "조병갑을 풀어주는게 어떻겠습니까?"하고 물으니 고종은 "좋아"라고 말하며,사면해버린다.그당시 조씨집안이 정치권에 힘있는세도가였기에 여기저기 로비가 고종에게 들어갔을거니,짝짝쿵손발이 맞아 사바사바 잘했을것은 미루어짐작할수있다.


그런데 더 기가막힌것은 고부군수로있으면 백성들에게 뇌물과 부정부패를저질러,고부민란이생기게했던 어떻게보면 오늘날이아니라 그당시에도 엄청난사건이었는데,2년이 조금지난 1898년 1월2일 조선왕조실록을보면,고종이 조병갑에 공직을 부여하는 기록이나온다.기록은 짤막하다 "4품 조병갑 법무민사국장에 임명한다" 이게 뭥미?


고부민란으로 백성들이 어육이되고,전봉준또한 참수되는 큰사건이었는데,고작 2년도 안돼서,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은 오뚜기처럼 부활하여 정치인으로 복귀하도록 고종이 도와준다.오늘날에도 뇌물이나부정부패에 연루되었던 정치인이나공직자들이,빽이나 줄을타고,오뚜기처럼 복귀하는것들이 있다.이런것을 집행유예해버리고 사면해버리고하니,2-3년만에도 다시 얼굴을 내미는것이다.엄벌이 집행유예고 사면이냐?


어째든 다시 돌아가서 탐관오리 조병갑은 오뚜기처럼부활해서 다시 공직자로 임명된다.여기서 4품이라고 나오는걸보면,조선시대의 관리의 품계상 관찰사 종2품,목사 정3품,군수 종3품이 임명되는데,고부군수를 지냈다면 종3품이었을것인데,그래도 공직에 재임용하면서 백성들에게 눈치는보였던지 한단계 강등된 4품품계로 공직을 임명했음을 알수가있다.


탐관오리 대명사인 조병갑을 것도 정의를 심판해야할 사법부에 공직자로 등용시킨 고종의 대갈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올수있었을까? 2년새에 조병갑일가가 얼마나 로비를 잘했던지,아니면 서슬퍼렇게 "이눔은 횡령만한게아니고 백성을 학대 어쩌구하면서 했던말이" 기억이 안날정도로 치매에 걸린건지 그 대가리밑에 그놈이다.


우리가 만화영화에서보면 흔히 나오는 악인은 패하고,선인은 승리하는 해피엔딩이아니라,슬플게도 그당시 현실은 탐관오리 조병갑은 68세까지 장수하며,죽을때까지 호의호식하며 잘먹고 잘사다가 죽었다.


제발 오늘날 선진국으로 가려는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어떠한 범죄보다,유영철아니 그어떤 살인범보다 더 나쁜놈이 뇌물이나부정부패를 저지른 정치인이나공직자라는 일반공유적 가치관이 있어야하고,사법부또한 지난세월 정치인,공직자로 나라에 이바지한 공로가있어 이따구 볼따구맞을 명분을 갇다붙이고 처벌에관대할게아니라,다시는 정치인이나공직자로 부활하여 오뚜기처럼 악인이 해피엔딩하지못하도록 중한형벌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조선왕조 500년도 모자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탐관오리들의 부활오뚜기 정치문화를 이대로 계속이어갈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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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오늘날처럼 길거리에서 몸을파는 여자들이 있었는지,창녀들에대한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여러가지 명칭기록으로 남아있음을 알수있다.


일반적인 형태의 창녀는 관가의 노비로예속되어 활동하는 관기,기생,운평으로 불려던 여자들로서 조선시대의 양반문화의 기득권을 가진 관리들의 노리개감으로 합법적으로 활동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의 삶속에서는 이러한 여자들이아닌 나라에서 인정하지않기에 불법적인,노는여자를 뜻하는 유녀의 역할을 무당이라는 호칭을가진 사람들이 하였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쓰여지는 신내림개념만을 가진 무당이아니라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사이에서 행하여지는 매춘,일탈행위를 기업적으로하는 포주의 개념으로 받아드려졌기에,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하는 조선시대에서는 무당은 온갖 나쁜것의 대표적상징으로 사용되어졌다.


무당은 아름다운 미모를가진 여자를 현수라고하여 데리고 다니면서 거문고를 타거나 노래를 부르게하였는데,무당의 눈치에의하여,현수와 일반백성간의 성매매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또한 무당은 남자무당인 박수를 데리고다니면서 일반백성들이나 양반집부녀자들과 사통하여 거래하기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남자무당을 화랑이나,양중으로 불리웠는데,삼국시대의 진취적 무예기상을 화랑이라는 개념이,유교문화 시대인 조선시대에는 오히려,똑같은 화랑이라는 단어가,오늘날의 호스트바종업원정도의 개념으로 사용되어졌다.이러한 호스트바의 영업방식이 중종(1513년)시대에 전라도관찰사 권홍이 왕에게 올린 장계에서 살펴볼수있는데.그내용은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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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굿을할때 젊은남자를 여자복장을하게하고,얼굴에는 분을바르고,여자무당과함께 방안에있다가,밤이 깊어지면,틈을 엿보아,여자무당이 젊은남자와 부녀자간의 매춘를 알선하고있습니다."



여자무당은 예쁜여자인 현수도 거느리고,젊은남자인 화랑도 거느리고하면서,마음껏마시고,노는 굿판이 벌어지면 틈을보아 굿판을 벌이는 집안의 남자나 부녀자와 매춘을 알선하는 포주역할을 조선시대에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엄격한 신분계급사회를 이상향으로한 유교문화인 입으로만 도덕,공자,맹자,열녀문,정조를 외친 조선시대조차도 일반백성을 상대로하는 무당의 매춘문제는 해결할수없었던 근본적이유는 유교적도덕을 주댕아리로만 외쳐던 기득권양반들이,관아의 노비신분으로 삼던 성노리개감인 여자들인 관기나 기생제도를 조선왕조가 패망할때까지,전혀 스스로 폐지할생각을 하지않았던 이중적도덕률을 가졌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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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속의 역사드라마나 사극들을보면,기껏해야 궁궐밖에서 문을 지키는 병졸들이나 포도대장정도만이 칼을차고 있는 모습이고,

왕들앞에서는 모두 유약하게보이는 유교문신들만이 대가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인다.

문치의 시대라는 조선시대,그중에서 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던 세종조의 기록을 통하여 오늘날 tv속의 역사드라마처럼 왕의주변에 칼을차고 서있는 사람들이 없었는지 살펴보자.

세종14년(1432년) 세종과 신하인 권맹손과 나눈 대화는 이러했다.



세종:중국은 무신만이 칼을차고 시위하는게아니라,일반신료들도 칼을차지 않는사람이 없다하고,아버지인 태종때에도 중국에 사신으로갔던 정역이 아래기를,중국의 신료들은 모두 칼을 차고있습니다라고 했는데 그러지 아니한가?



 

권맹손:중국에서는 그렇게하고 있사옵니다.



 

세종:그런데 왜,우리나라에서는 무반재상들조차 칼을차고 다니는것을 부끄럽게여기고,들고다녀야할 칼을 시종에게 들고다니게하니,이게 뭔꼬라지냐,왕앞에서 신하들이 시위할때 칼을 차는 문제에대하여 격식을 정하여 아래도록하여라.



세종대왕의 분부에의하여 세종14년(1432년)10.29일 병조에서 신하들이 궁궐에 들어올때나 시위할때 칼을차는 문제에대하여 격식을 정하여,왕에게 아래었다.


"중국의 대소무관은 모두 칼을차고 다니는데,오직 우리나라 무관만이 입직과 시위할때 칼을 차고있지않고 2품이상의 무관이 되어도,별운검이외는 칼을 들고다니지 않으니 잘못된것으로 생각합니다.앞으로는 품계와 상관없이 무관은 칼을차고 시위하도록하고 유신이라도 무관직을 겸하는경우는 칼을차도록 제도화하는것이 좋겠습니다하니,세종이 이르기를 제도화하여 지키도록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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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이러한 혜안은 뒷날의 엄청난사건의 성공과실패의 단서가되는데,세종의 아들문종 그리고 문종의 아들 단종대에 이르러,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제거하기위한 사육신사건이 일어났다.이때 무관으로 칼을차고 왕을 시위하던 사육신중의 한명이 유응부였는데,명나라 사신을위한 연회를 창덕궁에서  베풀고있을때 재수없게도 한명회의 충고를받은 수양대군이 그날따라 칼을찬 무관이 시위하는것을 하지말라고하여,결국 사육신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게된다.


세종이 좀더 엄격하게 제도화시켰다면,손자가 불행하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수양대군에게 죽게되는일을 막을수도 있었을것이다.어찌되었든 역사드라마에서 유약한 신하들만이 기립하여 서있는 모습은 그당시 실제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점이다.조선시대의 왕앞에서 칼을차고 서있는 무관신하들도 있는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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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동안 죽어있었다가 살아난 사람에대한 기록이 우리나라의 삼국역사서에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은 사흘동안 죽어있다가 살아나셨는데,무려...무려....무려....한달....우리나라의 정사인 역사서에 기록된것이기에,허튼소리보다는
진실일 가망성이 많다.


또한 위대한 왕이나,인물을 높이기위한 기록이아니라,일반백성에게서 일어난 기이한 현상을 기록해둔것이기 때문이다.




때는 서기 222년 신라 10대왕 내해왕때였다.경주 남쪽지역에 있는 남신현이라는곳에 사람이 죽어,장례까지 다치루었는데,죽은지 한달뒤에 살아서 무덤에서 관뚜껑을 열고 나왔다.사람들이 이를보고 기이하게여겨 나라에 고하니,그에관한 기록이 역사서에 기록되게 되었다.


사람의 부활이라는것이 부활은 사전적의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이다.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에대한 기록은 현대화된 오늘날에도 언론기사로 때때로 전해진다.


의사에게 사망진단서를 받고,냉동실에 안치되었다가 살았났다든지,죽은사람의 장기이식을 위하여 수술하다가,아픔때문에 죽은사람이 살아났다든지하는 기사들이 전해진다.


현실적으로도 바다의 물고기인 복어의 독을 이용하여,의학적인 사망선고를 받게하고,매장해서는 며칠이 지나 무덤의 관에서 사람을 살려내어,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그러한 부류의 집단도 존재하고있다.사람의 부활이라는 개념이 종교에서만 일어날수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흘만에 죽었다가 부활한것을 믿습니까,안믿습니까?라는 단순한 종교의 선택이아니라,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현상은 공상이아니라,현실적으로 그러한 많은 사례들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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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농담한마디했다가 자신도죽고 나라끼리의 전쟁을 일으킨 석우로라는 사람에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석우로의 이러한 행동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하기위해서는 먼저 석우로처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석우로는 신라의 10대왕 내해왕의 아들로서 태자였는데,내해왕의 딸이 신라의 11대왕이되는 조분왕의 왕비였다.결과적으로 왕위가 내해왕의 아들이아닌,딸의 사위가 되었던것이다.




조분왕의 입장에서는 석우로가 왕위를 이어야했었는데 그렇지못함에대한 미안함과,석우로가 매형인입장이였기에,석우로를 중히여겨 나라의 중요한일들을 맡겼다.석우로는 무예에는 능하였기에,백제와 왜와의 싸움에서 공적이 많아 승승장구하여 신라의 대장군의 직위까지 올랐다.


시간이 흘러,조분왕의 딸이 석우로의 아내가 되었는데,석우로와 조분왕의 딸 명원부인사이에 흘해라는 아이가 태어나는데,이 아이는 어머니의 공적과배경때문에 훗날 최고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석우로의 농담으로 인하여,나라간의 전쟁이 발생한 상황은 이러했다.조분왕이죽고,조분왕이 동생인 신라12대 첨해왕시기인 249년에 석우로의 집안이나 세력이 신라에서는 제일이라고 할수있을만큼 튼튼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있었기에,대갈박이 좀 무식하더라도 첨해왕도 석우로의 위치를 무시할수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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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년에 왜국의 사신인 갈나고가 신라에 왔을때,왜국사신이 머무는곳에 석우로가 찾아가,자신의 신라사회에서의 위치와 용맹성을 자랑할겸,갈나고에게 이렇게 말하였다."조만간에 너희 왜왕을 잡아다가 염전일을시키고,그왕비는 잡아다 식모살이를 시키겠다.하하하" 갈나고는 이말을 듣자마자,사신의 임무고,뭐고간에 왜국으로 돌아가 왜왕에게 듣은바를 그대로 전하자,뿔이난 왜왕이 대병을 보내 신라를 치도록하여,왜의 대병이 신라를 침략하여,왜와 신라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렇게되자,뭔 이유인지 잘알수없던 침해왕에게 석우로가 앞에나아가 말하였다."제가 말을 조심하지않아서 이러한 결과가 생겼습니다.제가 적진에게가서 상황을 잘설득해 보겠습니다"하고는 왜의 대병이 진을치고있는곳으로 가서 왜의 장군들에게 말하길"저번에,말한것은 농담이었는데,진짜로 군사를 이끌고와서 전쟁을하자면 어떻게합니까?"이에 왜인들이 얼빵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대답도하지않고,석우로를 잡아다가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에태워죽이고는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신라13대왕 미추왕(262-284년)때에 다시 왜국사신이 신라에왔는데,자신의 남편인 석우로가 농담한마디로 인하여 원통하게 죽은것을 분하게여겨,이를갈던 석우로의 아내 명원부인은 미추왕에게 나아가,자신이 왜국사신을 극진하게 대접하겠다고 청하여,허락을 얻은후 상다리가 부러질만큼 맛있는음식과 술을준비하여,왜국사신이 흠뻑취하고 마시고 놀게하던중,술을 마시면,농담도하게되었을것인데,이것을 빌미로 왜국사신을 뜰에 잡아다가 자신의 남편이 죽게되었던 방법그대로 왜국사신을 불에 태워죽였다.이러한 소식을들은 왜국에서는 다시 대병을 거느리고 복수를하려 침략하였지만,신라를 이길수가 없었다.


명원부인의 이러한 "눈에는 눈,이에는 이"의 복수는,훗날 자신의 아들이 흘해가 신라 16대왕인 흘해왕(310-356년)이되는 바탕이 되었다.흘해의 아버지인 석우로또한 자신의 대에서는 정상적인 왕위를 얻지못했지만,자신의 자식은 왕위에 오를수있었다.어찌되었든 석우로는 농담한마디 잘못했다가,나라간의 전쟁을 만들고,그책임으로 죽은 불쌍한 위인으로 삼국사기열전에 전해져온다.역사의 교훈은 말해주고있다.사람을 유쾌하게하고, 웃기게하는 농담도,때와장소에 맞지않으면,죽을만큼 된다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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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평왕때 백제와의 국경지역에있는 봉우리성 성주인 찬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해론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해론이 나이 7살이 되었을때,백제가 많은군사로 봉우리성을 포위하여 백여일동안 공격하였지만 성을 함락할수는 없었다.


진평왕은 악전고투하는 찬덕을 위하여 상주,하주,신주의 3개주의 군사로 봉우리성을지원하도록하였다.





3개주의 장군은 백제군사의 위세가 강함을보고,싸우는척만하고 이길수 없다고 말하며 퇴각하여 돌아가버렸다.멀리 성안에서 이모습을 지켜보던 찬덕이 하늘을 우러러 말하길"아군이 위급함을 알고도,적의 강함을 생각하여 싸워보지도 않고 가버림은  의가 아니다.의를 버리고 구차하게 살기보다,의를 위하여 죽을것이다"하고 분전하였지만,포위된지 4개월이 넘어가자 성안에 음식과 물이 다 떨어졌다.



이에 이르자 찬덕은 물대신 오줌을 받아 마시면서까지 최후의 항전을하였지만,이미 성이 함락되는것을 막을수는 없었다.최후의 순간이 온것을 안 찬덕이 남아있는 부하들에게는 항복하여 살도록 명하고,정작 자신은 항복하지않고,눈을 부릅뜬채 나무에 스스로 머리를 박아 죽었다.그후 13년이 흘러,찬덕의 아들 해론이 20살이되었을때,신라와 백제는 다시 봉우리성에서 전투를 하게되었는데,기이한 인연에 따라 종군한 장수중에 해론이있었다.



해론은 백제와의 싸움에 앞서 주위 장수들에게 말하길"나의 부친이 이곳에서 죽었다.내가 앞에 나가 싸우려는것은 의를 버리고 구차하게 사는것보다,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애달픈 선친의 맹세를 느끼기에,기쁜마음으로 신라의 정신을 보여주고 오늘 죽을것이다"하고 칼을 들고 홀로 적진으로 달려가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싸우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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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여자 연예인들이 합죽이가 안되기위해서 보톡스를 맞는경우가 종종있다.보톡스같은 겉모양을 추구하는것이아닌 내면의 심성을 바랄볼수있는 삼국시대의 죽죽이라는 사람에대한 역사기록이 전하여진다.

때는 선덕여왕11년(642년) 요즘같은 날씨에,백제장군 윤충이 신라의 영토인 대야성을 빼앗기위하여 쳐들어온다.

대야성의 성주는 김품석이었고 그의 아내는 태종무열왕의 딸이었다.백제군사가 쳐들어오자,김품석의 부하중에,백제와 내통하여 성에 불을질러 성안의 상황이 위급해지자,



김품석의 부하중에 서천이라는 장수가 태종무열왕의 딸과 주군의 목숨이라도 구해보려고, 성위에서 백제장군 윤충을 보며 말했다."만약 장군이 우리 주군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겠다면 항복하겠습니다" 윤충이 말할길" 하늘에 떠있는 태양을 두고 맹세하는바,서로 좋은게 좋은것이니 그약속을 꼭지키겠소.나를 믿으시오"


서천과 윤충의 약속을 믿고 품석이하 군사들이 성문을 열고 나가려고하자,품석의 부하였던 죽죽이 나서며 말할길"구차하게 항복하여 사느니,차라리 호랑이처럼 싸우다 죽는것이 낫습니다.백제는 말에 대한 약속을 배신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이제 윤충이 태양을 두고 맹세한다는 그럴듯한 말에 속아,항복하여 나간다면 뱀에 먹이가되는 쥐처럼 싸워보지도 못하고 힘없이 모두 죽게 될것입니다."
 

품석은 죽죽의 건의를 무시하고,성문을 열었다.먼저 군사들이 항복하러 성문밖으로 나가자,주위에 복병을 숨겨두었던 백제장군 윤충은 그들을 모두 죽여버린다.이러한 광경을 본 품석은 상황이 모두 끝나버렸음을 알고,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모두 죽이고,자신또한 자결해버린다.


성에 남아있던 죽죽은 황급히 성문을 닫고,일부 남아있는 군사를 수습하여 약속을 배반한 백제군사와 최후의 항전을 하려고한다.이때 죽죽의 친구 용석이 말하길" 지금 남아있는 군사로 성을 지키는것은 불가능하다.살아서 후일을 도모하는게 어떻겠는가?"


죽죽이 말하길" 그대의 말처럼 이미 상황이 어찌할수 없다는것을 나도 잘안다.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나의 이름을 죽죽이라고 지은것은,추운 겨울일지라도,시들지 않기를 바람이었고,차라리 부러질지언정,구부러지지말라는 의미였는데,이제 상황이 가망이 없다고하여,구차하게 살고싶지는 않다" 이말은 들은 용석이 친구의 마음을 느낀바있어, 죽죽과함께 힘이 남아있는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다 함께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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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의 마지막 유언내용은 오늘날에도 되새겨 역사의 교훈으로 삼을만하다.



673년 7월1일에 김유신장군은 죽는다.죽기전에 문무왕이 유신의 집을 방문하여 유신에게 앞으로 자신과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유념하여 지켜야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묻는다.



문무대왕이 울며 말하길,"만약에 나라의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백성과사직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유신이 말할길 "백성을 등용함에 있어서,왕께서 저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처럼 사람을 믿고 등용하셨으면,의심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임무를 맏기시고 왕께 개인적으로 바라는것은 공을 이루는것은 쉽지않음을 아시며,그것을 지키는것은 더욱 힘써 스스로 노력해야함을 생각하시고,시종여일하시옵소서"



 

"오랜기간 삼국이 서로 갈라져 항상 싸워왔기에 삼한의 백성들은 나라를 가리지않고 전란의 불안에 살아왔습니다.이제 삼한이 하나가되어 한백성이라는 의식으로 뭉쳐, 나라의 기틀이 번영하고 부강하여진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왜 김유신이 "문무왕에게 공을 이루는것이 쉽지않음을 아시며"라는 말을 했는지는,문무왕과 김유신의 관계를 살펴보면 알수가있다.김춘추와 결혼한 김유신의 누이동생이 낳은아들이 문무왕이었다.관료문화에서 신분적질서가 철저했던 신라사회에서 가야의 왕족으로 신라사회에 편입된 김유신일가는 원칙적으로 신라왕족의 핵심층에 들어갈수 없었다.


할아버지인 무력,아버지인 서현,아들인 유신 3대에 걸쳐 스스로의 능력으로 국가에 공을세워 집안을 일으켰고,3대에 걸친 노력이 문무왕의 근본토대가 되었다는것이다.유신의 호국정신 유언을 받든 문무왕은 죽어서도 넋이나마 바다를 건너오는 왜적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맹세를하고 지금의 경주시 감포앞 바다속에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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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왕중에 전투의 신으로 불리우는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은 주몽의 손자이다.대무신왕은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이름은 고무휼이었고,서기 4년에서-44년까지 살아 이른 나이인 40세에 죽었지만,그의 재위기간은 27년으로 짧지는 않았다.

11세에 태자가되고 15세에 아버지인 유리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특이한점은 대무신왕의 두번째 왕비의 아들중에 호동왕자가 있었고,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첫번째 왕비의 모함으로 ,스스로 자결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게되는데,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있다.



역사기록에 나타난 대무신왕의 행적을 살펴보면, 대무신왕 3년 봄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그해 겨울 10월에 부여왕 대소가 몸은 두개이고 붉은머리가 하나인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왔다.고구려가 부여에 병합되는것이 마땅하다는 의미로 보낸것이었다.


이에 대무신왕은 붉은 까마귀에 대하여 해석하길,두나라가 합쳐지는 의미를 가진것은 맞으나,그 새가 나에게로 보내줬으므로,나에게 길한징조이다 라고하였다.


대무신왕 5년 2월에 부여국의 왕인 대소를 잡아 죽였다.대무신왕 9년 10월에 개마국을 쳐서 멸망시키고,스스로 항복한 구다국을 병합시켰다.


대무신왕 15년 11월에 둘째왕비의 아들인 왕자 호동이 스스로 칼을 세워 엎드려 자결하였다.대무신왕 20년 낙랑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대무신왕 27년 10월 고무휼이 죽자,대수촌언덕에 장사를 지내고,시호를 대무신왕이라고 하였다.대무신왕의 뒤를 이어 동생인 민중왕이 고구려 4대왕이 되었으나 재위 5년만에 죽었다,


고구려 5대왕은 대무신왕의 맏아들이 왕위를 이었다.이왕을 모본왕이라고하는데,오늘날로 보면 개망나니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서,아버지인 대무신왕은 나라의 부강과 번영을 위하여 온힘을 기울여 싸웠다면,그 아들인 모본왕은 자신의 백성과 신하를 잡아죽이는데 온힘을 기울이다,신하인 두노의 칼을 맞고 재위 6년만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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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진평왕때 설씨 성을 가진 처녀가 나이든 아버지와함께 살고 있었다.집은 가난해도 얼굴이 아름다워 관심을 가지고있는 남자들이 많았다.

어느날 설씨처녀의 아버지가  3년간의 군역의 의무를 해야했는데,몸이 병들어 그것을 할수없는 처지였다.

이러한 어려운 형편을 알고있던 설씨처녀를 짝사랑하던 남자중에 가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가실은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기회라고 생각하고,설씨처녀의 집으로 찾아가 아버지의 병역의무를 자신이 대신해 주겠다고 하였다.



설씨처녀는 별로 가실이 탐탁치않았으나,병든 아버지를 대신하여 준다니,그말에 혹하여,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결혼해주겠다고 약속했다.그 말을 믿고,가실은 군인의 의무를 대신하기 위하여 타지로 떠나갔다.



3년이 지나도 가실이 돌아오지않자,설씨처녀의 아버지가 말하길"3년이 넘었는데,돌아오지 않는걸보니,죽어는가보다. 약속한 기한도 다 지났고,너도 별로였던 남자였으니,잘되었다.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것이 어떻겠느냐?"



설씨처녀가 말하길" 아버지가 편히 지낼수 있던것은,가실의 덕분입니다.처음에 아버지를 위하여,덜떨어진 가실이를 이용하려고 비록 마음에도 없는 약속을하였지만,가실은 저를 생각하며 생사를 알수없는 적과의 싸움을하면서도 오직 제가 해준 약속하나를 진실로 믿고,힘든것을 견뎌냈을 것입니다.가실의 그마음은 100년을 기다린다해도 제가 먼저 약속을 깰수없는 소중한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사기 열전에 인물이 기록된다는것은 그만한 가치가있기에 기록해 뒀을것이다.설씨처녀의 행적은 오늘날에도 시공간을 초월하여 약속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역사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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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는 우리나라에서 복을 불러다주는 동물로 인식되어지고있다.중동이나 유럽에서는 돼지가 행운과복과는 관련이 없는데,어떻게 우리나라에서 유독 돼지가 행운과복을 상징하는 믿음이 생겨는지,그 근원을 찾아보다가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라는 나라는  돼지를 신성시하는 문화가 있었음을 알수가있었다.


돼지와 고구려가 잘매치 되지않는것 같지만,돼지는 고구려의 중요한 일이 생길때,어김없이 등장하여 해결해주는 영특한 동물로 기록되어있다.




돼지가 가른 사람의 운명을 고구려의 역사기록에서 찾아봤다.고구려는 전통적으로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희생물로 돼지를 사용하였다.주몽의 아들인 유리왕편에 돼지에 관련된 기록이 여럿보인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위하여 돼지를 애지중지하여 기르고있었는데,그만 돼지가 탈출하여 도망가버리자,왕이 탁리와사비라는 사람을 시켜,쫓아가 돼지를 잡아 오도록하였다.


힘들게 돼지를 추격하여,잡은 탁리와 사비는 생각하길,이놈에 돼지때문에,이런 생고생을하게 되었으니,돼지발의 힘줄을 짤라버리면,도망가지 못할것이므로,돼지 다리의 힘줄을 잘라버렸다.이를 안 유리왕이 탁리와 사비의 행동은 자신들의 편리를 위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낼 돼지에 상처를 냇으니,돼지보다 못한것들이라고하여,탁리와 사비를 구덩이속에 넣어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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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0대왕 산상왕편에는 왕이 자식이없어 애통해하다가,하늘에 제사를 지내려고 기르던 돼지가 도망을 가버렸는데,그 돼지를 따라가다보니,주통촌이라는 마을에 이르러,돼지가 마을의 한집에 들어가서 얌전히 있었는데,그집에는 고운처녀가 살고있어서,그여자를 통하여 왕이 후손을 얻게해주기도하였다.


고구려의 수도가 국내성이 될수있었던것도
,돼지를 뒤쫓아갔는데,국내성에 이르러 멈추었다.그래서 유리왕은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이처럼 고구려에있어서 돼지의 존재는,특별할때 나타나,나라의 일에 길흉화복을 정해주는 동물로 묘사되어 기록되어있다.


고구려의 상징은 삼족오인것같지만,실질적으로 고구려인들에게 있어 운명을 안내하는 상징은 돼지였다.그러므로 오늘날에와서 우리민족이 갑자기 돼지에대한 상징적 믿음이 생긴게아니라,고구려시대부터,돼지는 행운과복을 가져다주는 상징으로 존재해왔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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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이 고국천이라는 지명에있어 고국천이라고 불리우는 고구려의 9대왕에게는 발기,연우,계수라는 동생이 있었고.왕비는 우씨였다.


왕비우씨는 고국천왕이 죽자,꾀를 내어서 왕비의 신분을 계속유지하려고,고국천왕이 동생중 제일 연장자인 발기를 찾아가 유혹을하였으나,넘어가지않았고,두번째인 연우를 찾아가 유혹하여,왕위를 이어받는대신에,자신을 왕비로 맞이해주도록하였다.


연우는 왕비 우씨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하고,고구려 10대왕인 산상왕이되었다.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안 발기가 연장자순으로 자신에게 올 왕위를 동생이 빼았갔다고하여,반란을 일으켰으나,이미 실권을 가지고있던 왕비우씨의 지원을 받은 연우에게 민심이 돌아간 상태였다.


이에 불따구가 난 발기는  이민족인 공손도를 찾아가,자신의 원한을 풀도록 군사를 지원해주면,고구려를 정벌해주겠다고하여,공손도의 군대 3만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한다.이에 산상왕은 자신의 아우 계수에게 고구려군사를 이끌고가 막도록한다.


발기와 계수의 싸움에서 발기가 패하자,동생인 계수는 차마 형을 죽일수없어서,살려보내어주지만,얼마안가서 발기는 스스로 자살해버린다.계수는 발기의 장례를 예를 다하여 치루어준다.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안 산상왕은 동생인 계수를불러 반역의뜻이 있는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한다.


계수가 말하길,왕께서는 왕위를 형제간의 우애를위하여,순리에따라 발기에게 양보하는,형제의 미덕을 보여주지않았고,발기는 사사로운 개인적인 분노로인하여,나라를 망하게하려는 매국의짓을 하려고하였습니다.죽어서까지 형제의를 보여주지않는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왕비우씨는 고국천왕이죽자,자신의 위치를 유지시켜줄 사람이면,발기이든 연우이든 왕위를 주려고하였는데,발기는 밤늦게 찾아온 우씨를보고,"여자가 야심한 밤에,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것입니까?"했고, 동생인 연우는 왕비우씨가 "밤길이 무서운데,왕궁으로 돌아가는데 같이가주면 안될까요?"하자, "노프라블럼!!",결국 왕위는 연우에게로 같다.


왕비우씨는 천수를 다누리고 죽을때,유언하기를 고국천왕의 무덤옆에 자신의 묘를하지말고,산상왕의 무덤옆에 묘를 해달라고하여,산상왕곁에 뭍히게 되었다.왕비우씨가 살아있을때는 자신의 부귀영화를지키기위하여,그러했다고해도,죽어서까지 산상왕곁에 묘소를 만들어 달라고한것은 오늘날까지도 미스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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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열전에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인물들의 생애가 나온다.그중에 머리에 사마귀가 뿔처럼 달려서 태어난 기이한 인물에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천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이야기속에 포함된 교훈은 오늘날에도 의미가있다.

신라의 중원경(충청북도 충주)에,아버지의 이름이 석체라는 사람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다.아이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머리에 뿔난사람을 봤는데,


태어난 아이의 뒷머리에는 사마귀처럼 생긴뿔이 튀어 나와있었다.



아버지 석체는 기이한 형상을하여 태어난 아들의 모습을 보구,역술가를 찾아가,아이의 운명을 물어봤는데,역술가는 사람의 얼굴에 난 사마귀는 불행이지만,머리에 난 사마귀는 길하니,큰 인물이 될것입니다라고 하였다.아들의 이름을 강수로 짓고,애지중지하며 키웠다.아버지인 석체와 아들인 강수의 대화를 통하여,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의미를주는 교훈을 살펴보자.


석체:너는 불교를 배워 국사가 되고싶으냐,아니면 학문을 배우고싶으냐?


 

강수:저는 세상학문을 배워 나라와백성을 위하여 일하고 싶습니다.



 

석체:네뜻대로하되,열심히 공부하여 나라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거라.




강수는 열심히 학문을 배워,20살이 되기도 전에,벼슬길에 나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되었다.강수의 나이가 20살이되자,강수의 아버지는 마을의 처녀들 가운데 얼굴이 곱고,집안이 좋은여자를 골라 장가를 들게하려고 하였다.그러나 강수는 어렸을적부터,천민집단이 모여사는 부곡에 대장장이의 딸과 마음이 통하여,정분을 가지고 사귀어왔기에,아버지의 중매에 대하여 간곡하게 거절을하였다.아버지 석체가 노하여 말하되


석체:너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귀한신분을 얻었는데,빈천한 아내를 얻는다면 내 꼴이
      뭐가 되고,부끄럽지도 않느냐?


강수:(아버지에게 공손히 절하며)가난하고 천함이 부끄러운것이 아니라,학문을 배우고 행하지
      않음이 더 부끄럽습니다.배움에서 이르기를,조강지처는 버리지아니하고,빈천할때의 친구는
      잊지 말아야한다고 하였습니다.이제 제가 귀하게 되었다고하여,천한 아내라고 버릴수는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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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사수대첩은 널리 알려져있지만,자세한내용은 전하지않는다.연개소문의 지략과용맹성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대첩이었는데도,여러가지 의문점을 남기는 기록을 보여주고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하여,사수대첩의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자.먼저 백제를 신라와연합하여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운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사수대첩이후로 죽음이 역사기록속에서 전혀 나타나지않고 있고,

살았다면  고구려 멸망당시에 70이넘은 이세적같은 늙은장수가 참가하는것을보았을때도 그러하고,또한 소정방이 고구려침략군에 직위만 바뀌고,항상 장수명단에 들어있었던 관례를보아도,


사수대첩이후에 행방이 묘연해지고,죽은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는걸보면 그의 죽음이 비참했음을 의미한다.사수대첩과 연관되어지는 또다른 당나라 장수가 당나라의 병부상서,오늘날에보면 국방부장관이라고 할수있는 임아상이라는 장수이다.이사람또한 사수대첩 기록이후로 전장에서 죽었다라고 짤막하게 기록되어있을뿐,어떤싸움에서 누구에게 죽음을 당했는지 기록되어있지않다.

소정방,방효태,임아상  3사람이 우연히 일치로,사수대첩이후로 역사속에서 사라져버린다.3사람에대한 기록을 찾아보고,사수대첩이 어떻게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는지 알아보고자한다.먼저,삼국사기에 나타난 연개소문,소정방,임아상,방효태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보장왕19년(660년)11월 패강도행군대총관 계필하력,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평양도행군대총관 유백영등으로 하여금,당나라는 여러갈래의 길을 따라 고구려를 침공하게했다.


 

보장왕20년(661년)4월 임아상 패강도행군대총관,계필하력 요동도행군대총관,소정방 평양도행군대총관등 35군을 수륙으로 나누어 고구려로 진군하게하였다.


 

보장왕20년(661년)8월 소정방이 대동강에서 고구려군사를 격파하고,평양성을 포위하였다.


 

보장왕20년(661년)9월 연개소문이 남생에게 군사를주어,압록강을 지키게하니,당나라의 군사가 넘어오지를 못했다.계필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했을때에는 강에 얼음이얼어있었고, 남생의 군사를 상대로 크게이겼으나,당나라에서 철수하라는 조서를 내려서,평양으로 진격하지않고 그냥 돌아갔다



 

보장왕21년(662년)1월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연개소문과 사수언덕에서 싸우다 군사가 전멸당했으며,함께참가했던 방효태의 아들 13명도 모조리 죽었다.이때 평양성을 포위하고있던 소정방의 군사는 폭설이 내려서,후퇴하여 돌아갔다.중국측기록에 662년 2월 전장에서 임아상이 죽었다라고 나온다



660년도의 당나라장수의 직책과 661년의 직책은 사라진 사람이보이구,기존직책을 살아남은 사람으로 재편되어 부여되고 있음을 알수가있다.평양도행군대총관 유백영은 11월에 고구려침략을 하는데,다음해 4월에는 소정방이 평양도행군대총관이 된것을보면,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11월에 고구려에 들어갔던 유백영은  전멸을 당했던지,대패를했기에, 5개월도 안되는 사이에 직책이 사라져버린다.이사람이 패전기록또한 기록되어있지않다.


소정방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킬 당시를 보더라도,바다를 건너 군사를 이동하였다는것이다.661년에 평양도행군대총관에 임명되어,고구려를 침략하는루트는 육로를따라 요동을거쳐 평양으로 진군한것이 아니라,바다를건너
수군을 이끌고 곧바로 대동강을따라,평양으로 들어갔음을 알수가있다.


임아상의 패강도행군대총관또한 소정방과함께 대동강을따라,곧바로 평양으로 진격했음을 알수가있다.나머지  요동도행군대총관 계필하력은 ,압록강을 통하여,육로로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했음은,연개소문이 계필하력군에 맞서기위하여,남생을 압록강수비로 보낸것을보면 알수가있다.


그렇다면,일반적인 고구려침공루트인 요동지역인 백암성,요동성,안시성등을 격파하고 내려온것이아니라,소정방,임아상,방효태,계필하력은,바다를 통하여,오늘날의 상륙전을 감행했음을 알수있고,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곧바로 진격했던 소정방과 임아상의 군대는 후방지원군의 식량의 도움없이는 완전히 고립되게됨을 의미한다.


그런데,고립된 소정방군과 임아상의 군대를 지원해줄 요동도행군을 이끄는 계필하력이 압록강에서 남생의 군대를 대파하고도,당나라의 철군조서를 받아서,돌아가버렸다라고 기록되는데,소정방군과 임아상군은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을상태라,멀리 떨어진 신라에게조차 식량도움을 요청하는 상태였는데,고구려의 남생군을 대파했다는  계필하력군이 진격을하지않고,이기고 돌아가버렸다는것은,앞뒤가 맞지않다.


육로를 통하여 요동을 거쳐 고구려로 들어올수있는 상태가 모두 막혀있었고,그나마 남아있는 압록강을 통한 당나라군의 진격또한,남생에의하여 저지되었다고 볼수있다.당나라군이 대승을한게아니라,남생군에게 대패를 했을 가망성이 많고,패배의 결과로 계필하력은 돌아갔을것이다.


그렇다면,왜 요동도행군총관인 계필하력은,소정방군을 지원하기위하여,곧바로 대동강으로 상륙한게아니라,압록강으로 움직였나하는 의문이생긴다.이것은 요동지역을 수비하고있던  고구려군사를,제압하면서 내려온게아니기에,계필하력군이 압록강에서 싸우지않았다면,평양성 깊숙이 들어간 소정방군은 요동지역의 고구려군사가 평양성을 응원하기위하여 남하 할수있기때문이라고 볼수있다.


그러나 계필하력군이 고구려의 남생에게 패하고 돌아가버리자,평양에서 고립되어진 소정방과 임아상군은 철수를 하지않으면,전멸당하게되는 상황에 빠졌다고 볼수있다.그렇기때문에,당나라에서는 이들을 구원하기위하여,긴급별동대인 20만명규모의 방효태군을 바다를 건너 배를 이용하여,직접 평양으로진격하여 들어가 도와주도록 했을것이다.


소정방군과 임아상군은 평양을 포위한상태라기보다는 꺼꾸로 고구려군에의하여 바다로 도망갈수도없는 퇴로가 완전히 차단된상태였다.이를 간파한 연개소문이,별동대인 방효태군이 배를타고 들어와서,사수언덕에 상륙하는 당나라군사를,전멸시켜버렸다고 볼수있다.1월에 연개소문의 사수대첩으로 긴급지원군인 방효태군이 전멸했고,2월에 임아상이 전장에서 죽었는데,임아상은 패강도행군총관이고,소정방은 평양도행군총관,계필하력은 요동도행군총관,그런데 이중에,계필하력은 압록강에서 남생에의하여,패전을했기때문에,계필하력은 고립되지않고 살아돌아갈수있었지만,소정방과 임아상은,이미 방효태군이 전멸당한 1월 이후에는,연개소문에 의하여 모두 전멸했을 것이다.


임아상은 662년 2월에 전장에서 죽었다라고 중국기록에 나오는데,패강도행군은 1월에 방효태별동대 군이 전멸당하자,고립되어있던 패강도행군또한 전멸당했을것이다.한달기간안에,임아상이 다른 전장에서 죽었다고는 볼수없겠고,사수대첩과 연결되어 패강도행군이 전멸당했다고 생각하는것이 이치에 맞다.


그리고 662년 1월 연개소문의 사수대첩과관련하여 소정방이 폭설인 자연재해때문에 철수한게아니라,사수대첩과연계되어,평양도행군또한 전멸해버렸을것이다.소정방이 죽음이 기록되지않은것은,그 죽음이 비참했기때문이고,고구려를 침략했던,소정방,임아상,방효태등 행군총관들이 연개소문에 의하여 모두전멸되어 죽어버렸다는 치욕적인 기록을 남기는게 창피했기때문에,직접적인 별동대인 방효태군의 전멸은 기록해두고,나머지 임아상과 소정방은  어떻게,어디서 죽었는지 역사속에 감춰 버린것이라고 볼수있다.


사수대첩은 완벽하게 당나라군대를 한사람 남김없이 전멸시킨 우리나라역사에있어,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스케일이 큰규모인 대첩이었음을 알수가있다.연개소문의 성격이나 지휘스타일상,고립되어 차단된 당나라군대를 온전히 돌아가도록할만큼,자비로운 장군이 아니었다.소정방이 역사속에서 사수대첩이후로 죽은기록이 사라져버린것은,사수대첩에서 그의군사들과함께 전멸해서 죽었거나,그에대한 책임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을가능성이 많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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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에있어,주댕아리로는 명분과 대의 그리고,백성과나라를 위한다고외치면서 행동은 그와는 정반대로 자신의 자리보전과 탐욕만을 추구했던 조선왕조 최대의 망조왕이 바로 인조이다.


인조의 사람됨을 역관 정명수의 인생기록을 통하여 살펴보자.역관정명수는 우리나라사람이었지만,청나라의 주구가된 인물이다.


역사속에 훌륭한 인물에 대한기록도,조선왕조실록에는 몇줄 기록이없는경우도 많은데,이자는 인조실록에만 151건의 기록이 남아있는걸보면,



역관이라는 중인계급의 신분으로,우리나라 역사상 가장많은 역사기록을 남긴인물이다.얼마나 악행을 많이 했는지 미루어짐작할수있다.여진족인 금나라에 굽신거리며,눈치보는것은 배은망덕이고,명나라에대한 부모의은혜를 져버린것이라고 외치면서,광해군을 폐위시켜,왕위에 오른 인물이 인조이기에,과연 주댕아리만큼 행동도 언행일치가 된 왕이었는지,역사기록을 들여다보면알수있다.


1639년,심양에 볼모로잡혀가서 살고있던,소현세자를 모시는 신하중에,정뇌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역관 정명수가 우리나라에 청나라황제의 칙사로와서는 뇌물을 받는일이 많았다.이러한것을 보다못한 정뇌경이 뇌물을 받아쳐먹는 정명수를 처벌해야한다는것에 동참하다가,오히려 역관 정명수의 반격으로,청나라황제가,인조에게 정명수가 실제로 뇌물을 받아처먹었는지 아닌지 인조의 생각을 말해보도록하라고하였다.이미 청나라황제가 정명수의 편으로 기운것을 안 인조는,대갈박을 굴린다.신하들을 모아두고 대화를 나누는데,

인조:정뇌경이 무고의 죄가 없다것을 알겠는데,잘못하면,황제의 화가 나에게까지 미칠것같은데 어떻게들 생각하느냐?


 

우의정 심열:정명수를 처단하는게 무슨 큰일이라고,청나라황제가 나서게까지 일을 만들었는지모르겠습니다.동궁을 모시는 정뇌경이 남의 나라에가서,입을 가벼이 열어,화가 조정에 미치게까지 되었는데,어찌죄가 없겠습니까?


 

인조:그렇겠지? 황제의 진노가 나에게 미치기전에,무사 이응징을 심양으로 보내,정뇌경을 죽여버리도록해라. 내가 누구냐? 살기위해 대갈박을 3번이나 바닥에 박으면서,살아난사람인데,뇌물을 주는게 되수냐? 입주댕아리 잘못놀려,나에게까지 화가 미치게되었구나.정명수는 뇌물받은 적이 전혀없다고 가서 황제에게 잘 말하도록해라.



이러한일이있고부터,정명수가 요구하는것이나 바라는일은,앞장서서 인조는 다들어준다.

정명수:내 처의 동생이 벼슬이없는데.......
인조:아이고,그러셨세요? 벼슬을 내려야죠.

정명수:매부가 군대생활이 쪼메 힘들다구하는데요.......
인조:진작에 애길하지~ 군역을 면제시키도록하여라

정명수:황제의 일을하느라,바빠서 부모님 묘소관리가 힘든데 조카가 그일을 하고있다는데.......
인조:효자시구려,그런생각까지,조카에게 군수벼슬을줘 타의 모범이되게하라

정명수:나를위해 일하는 사람을 병조좌랑이 기분나쁘게해서 내가,몽둥이로 병조좌랑을 좀 패습니다.
인조:감히 황제의 칙사를 기분나쁘게하다니,맞아도 싸죠.잘하셨구려.패시느나 힘드셔쬬, 여봐라 역관 정명수에게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리도록하여라.



역사기록에서 인조와 그의 유신들이 광해군을 폐위시키며,가슴을 뜨겁게하는,명분과대의,그리고 북벌론을
외치며,민족의 자긍심을 보여주는가 싶더니,권력을 잡자마자,주댕아리는 잘놀렸지만,실제로 행동은 무지렁뱅이보다못한 비열하고,자신의 권력만을 탐하며,나라의 기상을 망조들게하여,이중적인간들이 출세하게하고,백성을 위하여 바른말하는 사람들은 아예,싹이자라지도 못하도록 밟아죽여버리는 패악한 나라기상을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반복되어,우리가 정권을잡으면,서민을 위하고,나라를 위한다고 주댕아리로는 어느정권이라도 외치지만,실제행동의 결과가 그러했는지는 인조처럼 역사가 재평가할것이다.조선시대 자신의 안위와 탐욕만을위하여 온갖악행을 저지른 가장 사악한 임금은 인조였다.역적 정명수가 날뛸수있었던것도,인조라는 나라를 망조로들게한 매국노왕이 있었기때문이다.유유상종인것이다.


오늘날에도 되새겨봐야할 교훈이있다.인조처럼,자신의 자리보전과 탐욕을위하여 관직을 내리는것이 얼마나 나라를 망조들게하는지 보여준다.관직을 내림에있어 사람의 애증의 강도에따라 내리는것이아니라,그 사람의 능력에따라,맞는 지위를 주어야한다,


너는 나하고친하니,능력이 모자라도,높은자리해라,너는 나에게 밑보였으니 죽을줄알라식으로는 안된다.나라의 지도자는,애증에따라 사람을 쓰면안된다.오직 능력에따라 그에 맞게 사람을 써야한다.역사기록속에서 나라가 망조가 든경우는,그 근본이 인사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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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백제를 이길수있었던 이유는 김유신이라는 당대 세계최고의 명장이 있었기때문이기도 하지만,신라상류층이 위기상황에서 솔선수범하여,나아가 싸우는 싸울아비정신을 평소에 가지고있었기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나온 불영자의 기록을 토대로,신라의 싸울아비정신을 이해해보자.


진덕왕(647~654)=진덕여왕(왕의 이름 김승만)때에,백제의 정예 3만대군이 신라의 성을 빼앗기위하여,쳐들어온다.이때에 맞서싸운 신라의 장군이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신라 군사1만명을 이끌고 나아가,맞서싸우게되는데,백제의 군사들이 용맹할뿐아니라,정예화된군사들이었기에,신라의 군사들은 서로먼저 죽지않으려구,싸우기만하면 뒤로 도망가기가 바빴다.이때에 김유신은 땅에 떨어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위하여,특단의 전술이필요하였다.김유신은 위기상황을 역전시키기위하여,자신의 친구인 불영자를 막사로 불러 대화를 나누게된다.


김유신:추운 겨울이된후에야,소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것을 알게된다.죽음을 두려하지않고,나라를위하여 목숨바칠 정신을 보여줄때이다.나의 둘도없는 친구 영자여,술한잔을 받으라.


 

불영자:위급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오직 저를 선택하고  믿어주심이 ,진실한 친구입니다.그 믿음에 진실로 목숨을바쳐 보답하겠습니다.


두번 절하고 막사를 나와 그의 종 합절을 불러이르길,

불영자:내가 오늘 위로는 나라를 위하고,아래로는 친구를 위하여 죽을것이다.다만 걱정이있다면,나와함께 종군한 나의 아들 거진이 내가죽으면,나를 따라 죽으려할것인데,너는 그러한것을 막아,나의 시체를 수습하여,나의아들과함께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도록하여라.


 

합절:목숨을 바쳐 주인님의 명을 지키겠습니다.


말이끝나자마자,불영자는 말에채찍을가하여,창을들고 홀로,적진으로 들어가,목숨이 다할때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이것을 지켜보던 불영자의 아들 거진이,말을 몰고 홀로적진으로 나아가려하자 합절이 말고삐를 잡으며 말하였다.

합절:주인님께서 유언하시기를,도련님과함께 집으로 돌아가서,어머님의 슬픔을 위로하라구하셨습니다.이제 도련님이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어머니의 슬픔을 더하게하는것이 효도라고할수있겠습니까?


 

거진:아버지가 죽는것을보고도,구차하게 사는것이 그럼 효자이겠는가?


거진이 합절이 잡고있던 말고삐를 칼로 쳐내고,적진으로 들어가 싸우다 죽었다.이것을 바라보던 합절이
"내가 비록 미천한 종이나,대의를위하여 모두죽었는데,나만,구차하게 살아돌아가 무엇을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적진으로 홀로들어가 싸우다죽었다.


세사람의 죽음을보고,느끼는봐가있던 병사들이 앞다투어 진격하여 나아가 싸우니,백제의 군사들이 대패를하였다.대승을 하고난후,유신이 세사람의 시체를 거두어,자신의 옷을벗어 덮어주고,밤새 슬피울었다.


불영자의 이야기에서보듯이,신라에서는 나라가 위급한상황에서는 위에것들은 탱자탱자하면서,도망이나 가면서,졸따구들에게만  죽어도 막아라식이 아니라,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직접실천하는 모범을 보여,군사들의 사기를 높여다는것이다.


신라의 이러한 싸울아비정신은 자기가 아끼는 사람은,뒤에숨겨두고 도망가게하고,아래것들에게만 싸우게한것이아니라,자신이 가장사랑하는 사람부터,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 솔선수범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었기에,신라는 백제를 이길수가있었다.백제도 패망의 마지막순간에,걸출한 영웅 계백장군이 이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지만,상황이 너무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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