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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테이토칩으로 만들어먹어두맛있구,잘게썰어서 볶아먹어두 맛있구,굽거나 쪄서먹어두 맛있는 감자
감자 그이야기속으로 들어가보자~^^;;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감자는 귤을 의미하구있다.우리가 먹는 현재의 감자라는 단어는 감저(甘藷)라는말이 표준으로 기록되어있다.감자는 귤을 말하구,감저는 오늘날의 감자를 말합니다.


감저는 조선왕조실록에보면,그기록이 거이없구,언제 우리나라에 감저가 알려지게되어는지,유추해볼수있는구절이있다.우리나라에 감저가 들어온시기는 대략 1800년도로 볼수있으며,그이전에는 감저라는 식물은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거나, 있지않았다구 볼수가있다.그러므로 우리나라 국민들이 감저를 좋아하게된것은 200년이 채안된다구 볼수있다.



옛날에 일본의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상당히 밀접하게,물건이든,인적교류이든 활발하게이루어지구
있었다.
감저에 대한 전래를 유추해볼수있는 구절이 순조9년(1809년)에 대마도를 방문해서 그곳의 생활상을
기록하여 순조임금에게 바친 현의순이라는 사람의 기행문에서 볼수있다.



대략적인 요지는,"대마도는 우리나라와 의존하여 살아갈수밖에없는 무역활동을하구있구,대마도주는 자신의
다스리는 백성이 해촌에 사는 사람에게는 배(고깃배)를 내려주고,산속에사는 사람에게는 총을 내려주어
살게해주고있었으며,대마도의 가난한 백성들은 감저를 식량으로 삼구있었습니다"



귤을 뜻하는 감자는 조선개국인 태조때부터두 그기록이 보이나,오늘날의 감자를 뜻하는 감저는
조선말기 순조임금때에야 비로소 감저라는 단어가 나타나구,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감저가 아니라
대마도의 백성들의 삶을 묘사하는 구절에서 감저가 나오는걸 보았을때,1809년경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대마도를 방문해서 감저를 먹어봤던지,감저를 가져왔던지,아무튼 감저를 우리나라 백성들이 인식하게
되었음을 알수있다
.예를들어  병자호란때의 역사극을 하면서,배고픈 백성들이 감자를 쪄서 허겁지겁
먹는 모습이 나온다,
이러면 대갈박을 맞아야겠죠^^;;감자는 빨라두 조선왕조기록을 보면 1809년이 넘은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것입니다.



감자는 조선말기부터 구황작물로 가난한 백성의 주식이었지만,의식주가 풍부하구 다양해진 오늘날에는
웰빙식품입니다
.감자가 가진 효능은 우리의 몸을 좋게해주는데,그중에서두 달덩이같은 뽀얀피부와
피부를 탱탱하게주는 성분을 감자가가지구있는데
,못먹구,굶주리는 북한동포인 여자들이 화장빨이 없어두,달덩이같은 피부를 가지구있는것은,먹을게없어서 감자를 주식으로 먹는 북한의 식습관의 영향이라구두
볼수가있습니다.



여자들인경우,감자를 좋아하구,틈틈히 감자요리를 자주해먹으면,건강에좋을뿐아니라 피부에두 좋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먹을것이 많아진 우리나라현실에서 감자는 가난한 백성들의 주식이아니라,웰빙의
간식거리정도가 되었습니다.감자탕에 감자가 없으면 아무리 맛있는 뼈다구가 들어있다해두,먹은것같지가
않는것처럼, 감자는 맛으로뿐만아니라 피부건강면에서두 고운피부를 가지게해주는 좋은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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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스가 수신이 안될때,



팩스가 수신이 안되는경우는 팩스모델마다 그형태가 다르지만,그기능에있어서는 비슷합니다.
팩스가 오류현상으로 안될경우는 그오류에대한 메세지를 보여주는 창을 팩스마다가지구있습니다.
그창에 나타나는 오류메세지를보면,어디가 문제인지를 알수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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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스가 수신이 안되는경우,대부분은 paper jam이라는 용지걸림메세지인경우입니다.


paper jam이라는 메세지가 나타나며 팩스수신이 안되는경우는,팩스모델마다 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용지걸린것을 빼어낼수있게 열수있는부분이있습니다.


옆의 모델인 cf-360인경우는 메세창이보이는곳 자판전체를 잡아당기구,복사용지를넣는곳을 들어주면,걸린용지를 빼어낼수가있습니다.




걸린용지를 빼어낸후,타이어바퀴처럼 동그란 고무가붙어있는 길다란 막매기부분인 롤러가있습니다.고무부분을 약간물을 뭍인수건으로 딱아준후,그주변에 걸린용지에 찢어진 종이조각이나,기타 이물질이 들어있지않은가살펴보구난후,마른천으로 잉크카트리지 주변을 청소해주면 paper jam으로 인한 팩스수신이 안되는문제를 해결할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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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드라마를 보다보면,병졸이 허겁지겁 달려와서,"장군님,어쩌구,저쩌구되었사옵니다."
이렇게 장군님이라구 호칭하는데,진짜루 그랬을까?


사실은 전혀그렇지않다.장군이라는 일반명사에 님짜를 붙이구,좋아라하는 사람은 역사상 딱 1명이있는데 김정일 장군님이라구 호칭을받는 김정일뿐이다.


자신이 태양처럼 위대하니,관직명옆에 님자를 더붙여 부르게하는 사람두 있을수있다.이것은 잘못된사용이다.





역사기록에서 사람은 관직명에 님을 붙이는것은,있을수없는일이었다.
역사드라마에 장군이라는 단어에 님을붙여서 호칭하는것은,역사의 허구이다.
장군들에게 장군님이라구 부르지두않았지만,역사드라마의 성격상 불러야한다면,"장군,어쩌구,
저쩌구 되었사옵니다."이것이 바른호칭이다.



실제루 역사기록에서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벼슬을 가진 무관들을 호칭할때 장군이라구
부르지않았구, 그사람의 맡은직책 예를 들어 병마절도사라면, "절도사합하" 이렇게 불렀다는것이다.



역사드라마에서 일반명사루 장군을 사용한다구해두,님자를 붙여서 사용하는것은,완전한
잘못된조합의 호칭이며,역사기록에 장군을 장군님이라구 호칭하였다구 기록된것두 전혀없다.



장군에다가 님자를 붙이거나,대통령에다가 님자를 붙이는것은,이중긍정은 부정의 뉘앙스를갖구
이중부정은 긍정이 의미를 가지듯이 옥상옥을만드는 단어로,각하라는 호칭보다 더 황당무계한
조합으로,역사상 장군님이나,대통령님으로 기록되거나,불려지는것은 완전히 잘못된 부정적의미를
포함하게되는 호칭이다.



대통령은 대통령이란 단어자체가 가장최고를 나타내며,장군또한 그러하다.
거기다가 님자를 덧붙이는것은,자신이 우월해서 칭송받아 마땅하다는 교만함이 담겨져있다.



대통령인경우 예외적으로 현대적의미로 부가하여 사용될수는있는 단어가있다.
상대방사이에 부를경우는 이때 부가되는것은  대통령각하,이렇게 부르는것이 합당하다.



미국대통령을 부를때 mr.president 라구부를때,mr는 ~씨라는 의미보다,대통령이라는 직위에
대한 존칭을 붙여다구 볼수가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신문이나,기타 3자가 부를때는 대통령이렇게 글을적으면 되겠지만,
당사자로 부르게될경우는,대통령 이렇게부른것은 예의가아니다.그렇다구 미국처럼 미스터가
씨라는 의미를가진다구, 대통령씨 이렇게 부를수는 없다.또한 프레지던트 앞에 수식된 미스터는
존칭의 의미로부여된것이지,김씨,이씨 이처럼~씨라는 의미로 붙여져 사용된다구 볼수가없다.



당사자로 부를때는,대통령 각하, 3자로 글이나 방송으로 부를때는 대통령이라구 부르는게,올바르다.
어찌되었든,"님"이라는 단어조차두없던 시대의 역사드라마에, "장군님" 이렇게 부르는것은 높임을
받는대상을 더높여서 엿먹이는 단어이며 꼭 장군으로 불러야한다면,장군님이 아니라 장군,
이렇게부르는것이 역사기록에 부합된다.



우리나라에서 역사기록에 장군이란 직책에, "님"자를 붙여서 장군님이라는 칭호를 만들어낸것은
배불뚝이 김정일,뽀그리하나로 족하다.장군님이라는 단어는 역사속에 존재하지않았던
날조된 호칭이다.대통령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사람이나,장군님이라는 호칭을 만들어낸
사람이나 대갈박수준이 비슷하기에 고따구 엉뚱한 조합의 을끌어다 붙여다구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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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행적과 이미지는 다양한해석이 가능하지만,그사람의 공이나 전술등의 면에있어서는 제대로 알려져있지않다.

연개소문에대한 공에대한 기록은 달랑 2줄밖에없다.
삼국사기의 보장왕21년(662)에 기록되어있다.


"21년 봄 정월, 좌효위 장군 백주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개소문과 사수 언덕에서 싸우다가 그의 군사가 전멸하였다. 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소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다. 그 때 마침 폭설이 내렸으므로 그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역사란 문장구절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그당시 시대적상황을 고려하여 전체적인 문맥을 이해하구
풀이해야한다.세계3대해전의 한사람인 도고헤이아치로 제독두 실전사령관은,수도나 궁성에 머물러
지휘하는게아니라,직접 현장에서 지휘했다는것이다.또한 당나라 장군 이세적을 보더라두,
옛날의 장군들은 80살먹었더라두,현장에서 싸우지,수도에 머물며,현장의 군을 지휘하지않는다는것이다.


그런데,유독 연개소문은은 실전사령관이었는데,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에서 연개소문이 위치는
언제나  평양성에서 지휘했을것이라는 어리석은추정에서 사수대첩의 의미가 축소되구있다.


사수는 평양성근처에 위치해있지않았으며,연개소문은 고,당전쟁시 수도평양에서 머물면서
지휘했다는 이런엉터리해석은 기본적으로  상충되는구절을 만들어내는 허구의 가설일뿐이다.


연개소문은 왕이아니었구,실전사령관이었다.적국과 싸울때 누구보다 먼저,앞장서서 나아가
싸웠을것이다.
연개소문은,평양성에서 지휘하다가,방효태군의 별동대가 온다는것을알구,
소정방에게 포위되어진 평양성을 빠져나가,평양성근처에서 방효태군을 기다리다가 싸워서 이겼다라는
이러한 논리는 전혀 엉터리가설일뿐이다.


좌효위대장군 방효태가 이끄는 군은 별동대가 아니라,핵심적 지원군으로,그병력규모는
기존에 평양성을 에워싼 당군사보다 더많았을것이며,군사의 수는 못해두 30만명은 넘었을것이다.


방효태가 이끄는 군사는 수군이아니라,육로로 행군해서 들어왔다.이미 평양성이 포위된상태에서
지원부대가 오구있다는걸 알았다면,연개소문이 위치는 원래부터,평양성에있지않았구,최전선에
위치해있었다구 보는것이 타당하다
.요동성이나 안시성등 지금의 동북3성근처의 사수라는 강
어디에서인가 퇴로를 끊구,연개소문이 기다리구있었다구 볼수있다.


이때 주목해봐야할 기록이 사수대첩이 일어난 당고조때가 아닌 당태종이 이전에 고구려를 침입하여,
도종이라는 사람하구 나눈대화의 요점이,어째서 자신이 고구려공략에 실패하였는가라구 물었을때
안시성에 집착하지말구,평양에 먼저 별동대를 보내서 혼란케해어야 하지않았나 대답하는기록이다.


연개소문은,최전선에서 싸웠을것이며,싸움에 승리는,오히려 당나라영역으로 꺼구로 진격하는
전술로 맞대응했다구볼수있다.당태종이,늪지를 급하게 도망갔던 이유도,후방이 연개소문에게
차단되었구,오히려 당의 영역에 연개소문이 진격하였기때문이었을것이다.


연개소문이 평양성에 머물러 지휘했다면,어느세월에 평양성에서 연개소문이나와  당태종이 그렇게 겁을
먹구 살기급급하여  급히퇴각하구 도망갔는지 그해답이 나오지않는다.


사수대첩에서두,연개소문의 위치는 평양성이 아니라,최선에위치해서 싸웠을것이구
평양성에 밀구올라간게아니라,최선에서 오히려 당나라영역쪽으로 밀구올라갔다구 볼수가있다.


후방이 퇴로가 막혀있던,소정방군대뿐만이아니라,지원군으로  넘어왔던 모든 행군도총관들두,
요동지역에서 현장지휘를했던,연개소문에 의하여,다 궤멸되었다구볼수있다.


그러므로 사수대첩에서 죽은 당군의 숫자는 최소한 30만명이상이었으며,연개소문의 성격상
단1사람두 남김없이 죽였을것이다.전멸이 뜻하는것은,포로가 없다라는의미로 해석하는것이
타당하다.


어찌되었든,고.당전쟁에서 연개소문의 지휘위치는 평양성이아니라,최전선이었으며,안시성전투,
사수대첩등 모든전투에서 연개소문이었을것이다. 안시성성주 양만춘이라는 인물두 허구일
가망성이 100%라구 생각한다.안시성이 포위되었을때 고구려에서 지원군을 10-20만을 보냈다는것은,
안시성을 구하기위하여 우리나라는 전력을 기울였다구 볼수있으며,그렇게한 가장중요한이유는,
그러한 병력을 동원할수있구 지원할수밖에 없는 중요한인물이 안시성에 포위되어 지휘하구
있었다구볼수있다.


즉,당태종의 눈까리를 맞춘화살이나,당태종이 늪을따라 목숨을 구걸하면서 도망가게한,당나라영토
깊숙히 추격할수있는 권한이나 배포를가진것은,그당시 상황하에서는 일개성주가 그렇게했을리는없구,
현장지휘자가 연개소문이었다면,가능한 이론이라구볼수있다.


안시성전투나,사수대첩 이모든 일련의 전투는 연개소문이 직접지휘했구,당태종이 눈까리에 화살을
맞구,안시성성주를 기특하게여겨,비단과 의복을 내렸다는데,그대상은 허구인 양만춘이아니라,
연개소문을 역적이라구 기술한 삼국사기의 잘못된평가기록때문이었다구 볼수있으며,역적에게는
공이 있었두,작게하거나,없게기술하는게 역적기술에 더합당하기에,누구인지는 모르는 안시성성주라는
두리뭉실한기록으로 넘어가버렸다구 볼수있다.


이런한 시대적기록이 조선후기에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로기록돼지만,조선시대는 고구려역사의
암흑기였기에,제대로된 개념을가지구 고구려역사를 논할수있는 사관이나 역사가는 애시당초 존재하지않구
멸종되었던시대였기에,조선시대에 기록된 고구려역사기록은 가장신뢰할수없는 기록이라구 볼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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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최대의 미스테리가,광개토태왕의 아들인,장수왕의 평양천도부분이다.


삼국사기 장수왕 15년에 적혀있는 "이도평양"이라는 단어로,평양은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를 했다는 데,과연 지금의 평양이,장수왕이 천도했다는 평양인지에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삼국사기를 전체적으로 읽어보니,전혀앞뒤가 안맞는 구절이많기에,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어디인가에대하여 나름대로 생각해보았다.





광개토태왕은,고구려역사에서,북방민족을 제압하면서 정복군주로서 북방영토를 넓히며 광활한 영토를
만든왕이었다.그리구 그러한 막강한 권력을 이어받은 아들이,북방에는 눈을떼구,그렇다구,백제의
왕을 잡아죽이면서두,그나라를 영토로 편입할생각두 없었다는것은 장수왕의 행적을보면 알수있구,전혀
백제나 신라를 패망시켜 나라를 흡수할생각두 없었음을 알수있는데,어느날 갑자기,남진정책을
위하여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했다는것은,뭔가 평양이라는 위치가 지금이 평양이 아닐수있다는
생각이들었다
.



삼국사기 광개토태왕편을 보면,광개토태왕 16년 궁궐을 중축하고.18년에는 동쪽 지방에 독산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라구 나오는데,동쪽지방에 성을 쌓았는데
자신의 아들이 수도로 옮길, 평양의 사람을 이주시키구,얼마없으면 떠날 궁궐을 뭐하러 중축하구
있었겠는가,평양의 위치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는의미로 보여지구,평양은,지금의 간도라구부르는
동으로 토문강이라구하는곳,그곳어디엔가 위치한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의미는,지금의 평양으로 장수왕이 천도했다는의미가
아니라,송화강근처,지금의 흑룡강성일대 토문강주변에있던 지역을 부르는말이 아닌가생각이든다.
삼국사기 고구려편에는 왕에 관련된 기사들중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이런 비슷한 구절들이 여러개보인다.



특이하게 생각되는것중하나가,평양이 장수왕이래루,고구려의 수도였다면,왕의 무덤들은 당연히
지금의 평양에 산재해있는게 당연할것인데,평양에는 고구려의 왕들의 무덤이라구 알려진게 하나두
없다는점이다
.죽기는 평양에서죽고,묻힌곳은 졸본에가서 뭍혀다구 이해할수도있겠지만,어째든
삼국사기 장수왕조에 기록된 네글자 "이도평양"을 근거로,장수왕때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했다구
해석되어지는것은 잘못되어졌다구 생각되어진디.장수왕이 말한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어디인가,평양이라는곳이 별도로 존재하구있었다구보는것이 더 합리적이다.



지금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로 고구려의 왕들이 왕성이된것은 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보면, 지금의 평양은  장안성이라구 기록되어곳이라구 보는것이 더합당하다구 생각되어진다.
장안성=지금의 평양이라구본다면 장안성을 근거로 기록을 찾아보면



양원왕8년, 장안성을 쌓았다. 평원왕 (평원왕 양원왕의 맏아들이다)28년,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영양왕( 평원왕의 맏아들이다),영류왕은(영양왕의 이복 아우이다)보장왕 (영류왕 아우인 대양왕의 아들이다)



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이렇게 5명의 왕만이 지금의 평양에 살았던 임금이라구
볼수가있다.장수왕이 도읍을 옮겼다는 평양이 지금이 평양이라면,그이후 오래세월이 지난
평원왕28년에 나오는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기록된,장안성은 그럼 어디란말인가?



현재의 평양에서 장수왕이후 쭈욱수도로 삼아왔다면,평원왕이 아버지 양원왕이 공들여 장안성을쌓구
그아들인 평원왕이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겨버렸는데,분명한것은 궁궐을 옮긴게아니라,도읍을 옮겼다구
기록되어져있는데
,장수왕조 15년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것만가지구,그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
이라구 단정하는것은,그이후의 왕인 평원왕이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구 기록되어지는것을보면
이상하다.



그러므로 지금의 평양은,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이렇게 이어져온 장안성을 의미하구
광개토태왕조나 장수왕조에 나오는 평양은,지금이 평양이아니라,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수도가
있었던,상경용천부지역인,우리나라의 간도부르는곳,그곳에 고구려의 평양이있었다구볼수있다.



개인적인 생각이므로 신뢰성은 없다.그러나 삼국사기기록을 보더라두,장수왕조의 평양천도는
절대성립될수없는,그시대상황과 전혀맞지않는 이도평양이라는 네글자에 억메인 오류라구
생각한다.설령 평양으로 장수왕이 도읍을 바꿔다해두,지금의 평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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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김대중,노무현각하,지난 10년간 수구보수세력의
모진공격에두,대한민국의 철없는 국민은 몰라서 그러는거니,


가르침을 받아야 제대로 된다는 넓으신 자애로운마음으로 대한민국을위하여,밤을 낮인냥 불철주야 오로지 국민만을 생각하며,고생하시던 보습이 눈에선합니다.


애쓰시구 고생하셨습니다.훗날 역사의 정당한 평가가 있을것으로 생각합니다.





비가오는데,우리 위대하신 지도자동지 사진을 비맞게하면 됩니까?
이딴거 두고볼수없습네다.이따구로하면 응원단이구뭐구,돌아가겠시요~


우리아바이 수령님 국기하구,북한국가연주하시라우요.
북한국가를 들으며, 통일을 위한 위대한일을 하구있습네다.눈물 줄줄~ 
위대하신 지도자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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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월드컵축구대회예선에서 만나자.태도는 180도 달라진 뽀끄리


민족이중요하지,남한국기나,애국가는 반통일적인것이야.
남한을 국가로 인정하느니 차라리 전쟁을 하갔어,남한이 무슨국가냐
때중이샤키하구 뭇현이 어뎄갔어.갸들 대한민국 국가구,애국가구 이런거 알아서
내가 신경안쓰게 자발적으로 굽신거리던데, 정권이 바꼈다구 대들겠다는거야?.......
불바다돼봐야?정신차릴래? 확~


한민족인데 응원단이 왜필요해? 우리가 알아서 응원두해줄테니,
응원단 그딴거 오지마라, 응원단오는건 반통일적인것이야,
오로지,국기두,국가두,응원단두 오직 나를위해서존재할때 비로서,
통일적인것이구, 나머지는 다 반통일적이야,다죽이갔어


300명만이 넘게 굶겨죽이거나,고문하거나,수용소에가둬서 죽인 위대한 뽀그리에 이로운것은 통일적이구,뽀그리에게 안이로운것은 반통일적인것이라는.......


뽀그리의 공과사는
모두,대쭝이와뭇현의 공과업적에 동기화된것이므로 ,두눔이 뽀그리와함께 후세 역사가들에 의하여 역사의 평가를 받게될것이다.햇볏정책이 과연 북한동포를 이롭게해준건지,아니면 뽀그리를
이롭게 해준 통일을 방해한 비겁자의 반통일협조정책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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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를보면,역사드라마에서 나오는 백성들의 모습과 전혀다른모습이었지 않을까생각한다.그중에서 칼에대한부분이다.우리나라는 칼을 숭상하는문화였구,그러한 전통은 반만년역사속에서 흘러왔으며,이러한 문화가 왜곡되어진것은 반만년역사중 조선왕조기간뿐이었다는것이다.


고구려시대에두,평민이든,귀족이든 상관없이,무를 숭상했으며,고구려에서 다른나라에 파견된고구려사신의 고분벽화의 모습은,역사드라마에서 자주나오는 글쟁이 사신모습이아니라,칼을차구있는 모습이라는것이다.오늘날로보면,타국나라에 파견되어진 우리나라 외교관이 칼을차구 공무를 보는것하구 똑같다.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듯이,연개소문은 칼을 몸에 5개나 차구다녔다는 기록두있다. 칼을 차구다닌다는것과 칼을 들구다니는것은 비슷해보이지만,




실생활에서보면,일이있거나,군사훈련할때만 칼을 가지구다니는것은 들구다니는개념에 가깝구, 일반생활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칼을차구다녔다는 의미와 비슷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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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이 귀족이라서 칼을차구다닌게아니라,고구려의 일반백성들두 칼 1-2개는 보통으로 일상생활처럼차구다녔다는것이다.


신라에서두,칼을 중시했던 문화가 화랑이란집단에서 찾아볼수있는데 ,일상생활과 군인생활이 구분없는,
일상화된 개념으로 칼을차구 다녔다는것이다.


이러한 일상화된 집단인 칼을차구다니는 화랑도가있었기에 신라가 3국을 통일할수있는 튼튼한 정신적
토대가 될수있었던것이다.



현재 역사드라마에서 보여지는,시대구분할것없이 군인이나 칼을 들구다니지,일반백성들은 봇짐이나 광주리등을 들구다니구,평상시 칼을들구 다니는 그러한모습은 전혀안보임을 알수있는데,이건뭔가 틀렸다구본다.


삼국사기를 보면,신라,고구려,백제와의 전쟁시에 자주나오는게,승패의 결정적향방은,칼을 들구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일부러죽음을 당하여,사기를 높여서 이겼다라는 기록이많다.


일본사무라이들이,홀로 칼을들구 외치면서 적진에돌격하는 모습의 원조는 우리나라에서 아주오래전
삼국사기에 일찍부터 그러한 모습을 가지구있었다는걸 기록하구있다.


통일신라이후 후삼국시대에두,혼란한시기상,일반백성들이 봇짐이나 메구다니구,이렇지는 않았을것이구
일상화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기위해서라두 칼을 차구다녔을것이다.


고려시대에 넘어와서두,이러한 숭무의 전통이 남아있었기에,무신정권이 생겨나는 밑바탕이되었을것이며
고려와 몽고의 항쟁만해두 30년넘게 싸웠구,무신정권하에서두,숭무가 상징하는것은 곧 칼이었다.


이러한  칼숭상문화가,조선에 들어오면서,철저한 사대주의의 결과,500년동안에 큰전쟁이라구해봐야,
정묘,병자,임진 3개정도뿐이었구,양반입네,부모의 나라이네  어쩌구하는 개벽따구,유교적 공자왈,맹자왈을 집권자들이 강요한결과,전혀 엉뚱한 이미지로 일반백성들은 시대구분없이 개나리봇짐이나 광주리들구다니는 모습으로 고정화시켰다구본다.


우리나라의 고대무덤에서,죽은사람의 무덤에 평소사용하던 칼이나 무기류가 함께 있는걸보면,
일상생활에서 칼을차구다닌것이지,장식용이나, 나라의 위급상황에서만 칼을 들구다녔다구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중 지극히 일부인 조선시대를 빼놓구,칼을 숭상하는 문화는 고구려시대부터~
고려까지
주욱이어져오지않았나 생각되어진다.


우리나라가 칼을숭상했다구해서 다른나라를 침략하는 호전적면이있었던것두아니지만,그렇다구
순한양처럼,어느시대건 통틀어 백성들은 개나리봇짐이나 광주리나 들구다니는 그런모습은,절대아니라본다.
분명히 호신용이든,공격용이든,일반백성들두 칼을차구 다녔을것은 분명하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졌을때,히로히또천황이 " 겨울에 푸르른 소나무처럼~"이런말루 일본국민을
단결시켰는데,이말은,이미 우리나라의 삼국사기에 비녕자열전편에 김유신장군이 한 말이다.
"추운겨울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는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법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만 강조되구,우리나라는 일반백성은 어느시대구,조선시대의 일반백성의 모습인
개나리봇짐이나 광주리만 들구다니는 순한양같은 어벙벙한 모습으로 표현되는것은 영 아니올시다이다.
최소한 고구려 시대의 일반백성들은  칼한자루 필수적으로 차구다니는 모습이 더 역사적사실에 가깝
다구생각한다.


우리나라두 칼을 일상화처럼 차구다녔던,시대가있었구,그러한 사무라이보다,더한 정신력을 가진
문화두있었다는것이다
.안타깝게두,그러한 고구려시대로부터 이어져온 전통이,조선시대에 멸종되어버렸다.
조선시대가 민족의 기상면에있서는 가장 부끄러운시대였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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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우리나라의 들과산에는 표범이 살구있었다.표범이 들과야산에 돌다다녔던 조선시대에 표범과 그시대의 가치관에대하여 찾아보려구한다.


실용과 실사구시적 측면보다는 가식과 명분등의 것치레에 치중해서 싸우기를 좋아했던 조선시대의정치문화의 단면이,표범이라는 동물과 관련되어 나타나는데,오늘날에두,이런 공자왈,맹자왈하면서,쓸데없는 이념이나 체면에치후쳐,백성을 위한 실사구시적 정치보다는 당파적 이익에만 몰두하여 주댕아리싸움을 즐겨하는 그러한 뒤떨어진 정치문화의 관습이 이어져오구있다.




아나운서가 음주운전을하지말라구 방송에나와서 캠페인을 벌이면서,뒤로는 술처먹구 음주음전
으로 단속된다든지
,겉으로는 키스해본적두 없구,순결을 지켜야한다는 방송에나와 입바른 소리를
하면서
뒤로는 호빠를 가면서 이중적모습을 보이는 여자연예인 ,남에게는 엄격하구,자신에게는
너무나 관대한,그러면서두 주댕아리는 정의와자유를 외치구,실제행동은 개차반이구,
이미지로 단물을 빨아먹는 가식적인것들의 사고방식속에는 이러한 이중적 것치레를 중시했던
양반입네,쌍눔이네하는 그러한 유교적 명분주의의 영향이 크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표범과 관련되어진 황당한 시츄에이션속으로 들어가보자


때는 1428년 세종 10년의 일이다.

양주에사는 최종생이,표범을 잡아서 나라에 바치니,세종대왕이 면포7필을 표범을 잡아 받친
사람에게 내렸다.


그런데 도중에 그 명을 받들어 시행하는 관리인 최습이  상을 주라는 명을 시행할려고
상세한 내용을 확인해보니, 표범을 직접잡은 사람두있었지만,표범잡는데 몰이꾼으로 도움을준
사람두있었다는것을 알게되어서,시행과정에서 표범을 직접잡은 사람에게는 면포5필,조력하여
도운사람에게는 면포2필을 나누어지급했는데,이 일이 세종에게 알려지게되었는데.


세종:내가 표범잡은 사람에게 면포7필 주라구했어,안했어?
최습:제대로 명을 시행하여 면포를 주었습니다.
세종:똑바루 시행했는데,2필은 도움을준사람에게 줬다는 소리가 왜들리냐?
최습:표범을 잡는데,조력한사람두 공이있지 않겠습니까?
세종:표범잡은사람에게 주라구했어 안했어?
       여봐라 최습 저눔의 벼슬을 박탈하구,장80대를 치도록해라.
최습:억울하옵니다
세종:억울은 개뿔,너가 왕이냐? 누가 너맘대루 명을 시행하라구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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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 관점에서보면,최습의 일처리가 타당한면이 있는것같은데,조선시대의 당시 사회문화에서는
이것은,맞아죽을일이었다는것이다.조선시대는 호랑이를 잡은 공에대하여두 포상에 차이를두는 절차
까지두  문서로서 정해놓았는데,맨먼저 창이나 화살을 맞춘사람,두번째로 창이나 화살을 맞춘사람
세번째루.......
이런식으로 호랑이를 직접잡았더래두,선,후를 가려서 포상하는데,직접잡은것두아니구
그냥 옆에서 조력한사람에게 공이있다구하여 상을줬으니,가식적인 겉모습을 중시하던 시대상황에서는
통용될수없는 판단이며 행위였다.


오늘날에서보면,화려한 주연배우가있다면,그뒤에서 주연배우를 빛나게하는 조연두있구,말없이 도움을
주는 스텝두있을것인데,눈에보이는 주연배우 그자체만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볼수가있다.


눈에보이는것,직접적인행동을 한사람만 최고라는, 결과가아닌 것모습이나 보여지는 체면에 집중한 이러한,
덜떨어진 이중성이 표범의 상벌처리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구있다.


선진화된 사회일수록,썩어빠진 눈에보이는,주댕아리는 정의와명분 외치구 실제행동과결과는 개차반들이
이미지쇼댓가로 단물을 빨아먹는 그런 이중적인것을 멀리하는 사회적시스템이 가동된다는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두,실용과 실사구시적측면보다는,이념이나 주댕아리, 쇼맨쉽등 눈에 보여지는
이미지만을 추종하구 실제의 결과보다,보여지는 허상이나 겉치레를 더좋아하는 이중적가치관이
아직두 남아있구,
이러한 명분론적 공자왈,맹자왈하는것들은 타파되어야할,사회의 암적인
가치관이라는것이다.


실사구시와 실용의 이면은,당리당략적인 명분론적 싸움보다는 최우선으로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두고
그러한 관점에서 나라의 부강을 이루어낸다는것이다.아직까지두 표범의 일처리처럼,겉치레와 명분에 치후쳐,개소리나발을불며,백성들을 분열시키구,이간질시키며,결과가없는 빈깡통,이미지쇼에만 오,교주님, 오,교주님하는 덜떨어진 것치레의 이중성을 보여주는것들이 많다는것이다.


이미지정치는 단물은,묵묵히 가려진 삶속에 사는 백성들이 혜택을본게아니라,이미지정치를한 
당사자와패거리들에게 돌아갔구,그러한것들은 뭐한자리라두 챙겨먹었구,더  안도와줘두 나라세금으로
평생 잘처먹구 잘살게되었다는것이다.


오,교주님,오~ 교주님하기전에,자신의 삶을 살펴보자,과연 자신에게 무엇을 더낫구,좋게해주었는지
결과야 어떻든 허울데기가 감동만주면돼 이런식이라면,사기꾼의 말과 언변두 참으로 듣기에는
달콤하구,좋지만
결과는 언제는 그말을 믿은사람에게는 비참한 결과가 생기게된다는것이다.


허울데기의 명분이나 주댕아리가아닌,백성의 삶을 낫게하여 더욱부강한 나라,그것을 염원하는것이지,
달콤한 말이나 주댕아리들의 쇼와이중성에는 이젠 넌덜머리가 난다는것이다.


북한에대한 정책두마찬가지다,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의 삶두 제대루못챙겨,300만명이 넘게 죽였구
계속 헐벗은 동포들을 굶겨죽어나가게하는 것들은,아무리좋은 민족이구,이념이구,동질성어쩌구하기전에,
이미 인간말종의 정치인들이라는것이구 그러한 악독한정권지배층에대하여 굽신이 아니라,
매를 들어야한다는것이다.


또한 이런거지같은것들에게 협조하여,뒷돈까지주면서 굽신거린시기에
죽어나간 300만명이 넘는 우리동포들의 원혼을 위해서두 악독한정권지배자의 몰락과함께
역사에 단죄를 받아야한다는것이다.


악독한 지도체제가 붕괴되지않는한 해결될수없는 문제인데두
닝기리주사만 처방하여,암을 암이라구안하구,잘될거라구 거짓쇼를한 댓가는 반드시 심판받아야한다.
의사가,암에걸린사람은 암이라구 판정하구 말해줘야지,암은아니구,암은아니구여,닝기리만 주사만해주면
다 잘될거라구 환자를 속여,악독한정권만 더공고하게해준 돌팔이 의사는 더이상 나타나지않도록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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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축구선수들은 프리킥을찰때,손으로 남자의 중요부분을 감싸는것을 볼수가있다.그렇다면 여자들의 급소는 어디일가? 아무리 황소만한 몸집을가진 남자라두,낭심을 가격당하면 아픈것은 둘째치구,죽을수도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여자의 급소가 어디인지에대한 사건기록이 기록되어져있다.그이야기속으로 들어가보자^^

때는 성종 6년(1475년)
조선시대는 신분사회였지만,여자들이 상업에 종사하는것을 금하지는 않았기에 여자들두 상품의 판매나 장사를할수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여자거상인 김만덕이라는분두 있었다.
상인들이기에,여기저기돌아다니다보면,상인들끼리 싸움두날수두있었구,남자상인이
여자상인을 겁간하는경우도 있었다.이럴경우,보부상집단에서는 남자상인을,거세를 해버렸다.
여자들끼리 장사문제로 싸움을하게될경우도 있었는데,이러다가 일이발생하게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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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리:여긴 내가 물건파는곳이니까,딴데루가~
주원
:노점상이 니땅,내땅이 어디냤,나두 여기서 장사할거다

건리:오늘 노란손수건쓰구 누워있을래?
주원
:굶어서 죽으나,장사못해죽으나 이판사판이다,에잇~

여자들의 싸움은,머리끄댕이를 잡구,싸우는것이 일반적이구 남자의 낭심처럼 서로
때리지말아야곳이 있었는데
,건리는 얼마나 화가났던지,머리루,주원의 가슴을 냅다 박아
버린것이다
.딱한번 머리루 가슴을 부디친것뿐인데,주원은 가슴을 움켜쥐고,진짜루 노란손수건쓰구
하늘나라로 올라가버렸다.

사람을 죽이면,조선시대에는 교수형을 시켰으나,너무나 황당한사건이었기에 성종은
신하들의 교수형을시켜야한다는 주청에두,건리의 죄를 감하여,살려주었다.

여자의 가슴은,아름다움의 상징이기두하지만,치명적급소라는점이다.여자끼리 싸울때라두
절대 여자의 가슴은 때리면 안되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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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에 관해 잘못알려진상식이,내시는 남성을 상징하는것이없어서,여자와 성관계를 못하는존재루알려져있다.그러나 내시들은 성기를 절단했던게아니라,고환(동그란것)이라는부분만을 없앴으므로,정자를 생산할수없었을뿐,남성의 성기는가지구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내시들두 여자와 결혼해서 살수있었구 아내를가지구있었구 성관계두 할수있었다.그러므로 내시가 아내이외의 여자와 관계를 하여 처벌받는 사례두 조선왕조실록에는 많이기록되어있다.







여기서,조선왕조실록에 재미난 사례를 찾아보면,내시 이만과 태조의 아들인 세자의 세자빈인 현빈유씨에대한이야기가 기록되어져있다.

세자의 나이는 11살이었구,현빈유씨는 18살이넘었으므로,남편이라구해봐야 남녀간의 정을 나눌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으며 나눈다해두 세자빈의 입장에서는 외로웠을것이라구 볼수가있다.
그리하여,궁궐일을 맡아보는 이만이라는 내시를 유혹하게되는데,

세자빈 유씨: 밤이 외로굽나,이만아,이리오거라 ㅎㅎ
이만:마마,이러시면 저는 죽겠됩니다.미천한 제가죽는것은 괞잖지만,마마두 죽게됩니다.고정하소서
세자빈 유씨:너는 죽는것이 그렇게 두려우냐,사랑을 위해선 차라리 난 죽을란다 ㅎㅎ
이만:마마,,,,,

이후 두사람은 남모르게 사랑의 불을 지피다가,태조에게 그사실이 알려지게된다.
태조2년 1393년 6월19일
내시 이만을 목베고,세자 현빈유씨를 사가로 내쫓다
.

보통의 조선시대의 가부장적인 율법으로는,여자를 죽이구,남자에게는 여자보다 약한벌을 내렸는데
왕실의 여자는 대역죄에 관련된죄를 짓지않구는,어떠한죄루두 처벌받지않는 특권을 가졌음을
볼수있다
.일반 궁녀나,일반백성의 여자였으면,교수형을 당했을것인데,친정으로 돌려보내는것으로
처벌을 마무리했음을 알수가있다.세자빈 유씨의 유혹을받은 이만은 참형을 당하여 목이 댕강된것과
비교해보면,조선시대에는 신분의차이에따라 법의처벌두 다름을 알수가있다.

여기서 더웃긴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져있는데,내시 이만을 태조가 목베어죽이자,
눈치없는 신하가,어쩐일루 이만이 목베어 죽게되었는지 알수있게해주소서.

태조:진정그이유가 뭔지알구싶으냐?
홍보:사람을 죽였으면,뭔이유인지 알아야 할게 아니겠습니까?
태조:대갈머리없는것,감옥에들어가서 곰곰히 생각해봐,너가 뭘 잘못한거지
       여봐라,홍보 저눔을 옥에 가두어라,앞으로 세자빈유씨 어쩌구,고따구로 말하는것들은
      다 집어넣을것이니 그리알라.

조선시대에는 아무리합당한 말이라구해두,때와장소를 잘못선택하여 말한마디 잘못하면
그날부로,자신은 물론 일가친족까지 화가미쳐 길바닥에 나았는것이다.오늘날에두 어쩌면
자신의 가족이 잘못한것이있다해두,그것을 뭐라말을하는 사람에게,좋은말을 해주어서,고맙구려
하는것보다,
태조처럼,가족일을 이렇쿵저러쿵이야기하는건 곧 나에대한 도전이야 콱~ 
가족과관계된것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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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은 용과 학이 교미를해서 태어난 새가 봉황이라구알려져있다.조선시대부터 오늘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봉황은 임금을 표현하는 상징이었다.그러나,봉황은 사대주의정신을 철저하게 표현하는
아주 기분나쁜잡종새이다.중국은 황제의나라라구해서,황색에 용을 황제의 상징으로 썼구,조선시대의
왕들은 중국황제가 쓰는 황색과용은 감히 황제의 상징이기에,사대하여 스스로 낮춰 조선시대왕은
황색옷을 입는것은 황제에대한 불충이라구여겨,적색옷에 봉황을 왕의상징으로 사용하였다.

봉황이 조선시대왕의 상징으로 사용한 이면에는 이처럼 철저한 중국에대한 사대주의의
썩어빠진 소중화적사관이 자리하구있었다는것이다.또한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봉황을
황제의 여자를 상징하는뜻으로 여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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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극을보면,임금이 황금색옷을입구있는것을 볼수가없을것이다.오로지 빨간색옷을 입구있는데,이속에는 철저한 사대주의정신이 숨어있었다.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을 어찌감히 왕이 사용할수가있는가하는 논리였다.

봉황두 마찬가지루,중국황제의 여자,이런의미였구,봉황자체두 용의 씨를 받아 태어난 잡종이라는 의미이기에,주체성은 결여되구,용의 사생아나,아류정도라는것을 함축한,재수없는상징이라는것이다.








이러한 사대주의를 함축한 봉황문양은,조선시대이후로,주욱 현재 대통령까지 아무런 생각없이
그대로,사용되어왔다는것이다.정말 재수없는 것이 용의 씨를 받은 잡종인 봉황이라는것이다.

봉황은 사라져야할 구시대적,상징으로,용을 사용할지언정,용의 씨를 받구 잡종으로 태어난
봉황은 애시당초,용보다 덜떠어진 지위나,상징에 사용되는 상상의 새라는것이다.

썩어빠진 사대주의상징인 봉황은 중국황제를향한 흠모하는 여자인 왕을 의미하는 상징이기에
조선시대에 사용되어진 이런 썩어빠진 사대주의문화인 용의 잡종인 봉황을 계속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상징으로 사용한다는것은 치욕이며,대한민국의 수치라구볼수가있다.

봉황은 다시말하지만,우리나라의 국운을 막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왕을상징하는 재수없는
의미를함축하여 만들어진 새라는것이다.주류가아닌 잡종으로 만들어진걸,그래두 용의씨를
받았으니 황송하다구,받들어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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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재위기간은 12년이었다.그런데 이 연산군의 사주팔자와 김정일의 사주팔자는 아주 운명적으로딱맞아떨어진다.두사람의 본성이나 행실모두가 비슷한면이있다.

연산군은 시와음악등의 예술을 좋아했구,전국에서 얼굴이 반반한  처녀는 청녀라는 명칭을으루궁중으로 불러서 놀았구,김정일또한 예술을 사랑하는기질과 반반한여자들을 기쁨조라구 불러서노는것은 아주 똑같이 닮았다.

연산군은 특히 파티나연회같은것을 자주열구,아주좋아라했는데,이같은 성격두 김정일하구똑같이 닮았다.

연산군은 툭하면 자신이 지은시라구,신하들에게 어떤가하구 의견을 묻기를
좋아했는데,말한번 잘못하면,죽임을 당하니,전하의 예술은 최고입니다라구 아니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나 멋진시를 자주써는지,조선왕조실록 연산군에기록된 수많은 연산군의 시중 그 하나를 살펴보자

"비 개이고 바람 맑아 풍경 걷은 듯
 
금전에 아지랑이 둘러 떠 있네
 
잔치를 자주 여니 우애 좋은데
 
넌지시 사람 끄는 홍분 얼마뇨"

도성주위에 가뭄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시체가 길바닥에 널려 쌓여있는데두,연산군은 파티가
얼마나 인간사이의 정을 돈독히해주는지,너희는 아느냐란식의 시를 적어 짜빠져있음을 알수가잇다.
연산군은 더 나아가,길가에 배고픔에 쓰러져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너무많아,치우는사람이 없자
길가에 시체가 그대로있으면,고을이나 이웃사람을 잡아다 책임을 물어 옥에가두게하는 법률을
만들기까지했다.

이러한것은,주위사람이 잘못하면,친지와 일가족및 이웃에게 책임을 물어,하루아침에 집안전체가
쥐도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지게하는 김정일의 통치방법과 다르지않다.


연산군은 또한 특이하게,남의 아내를 잡아다 음욕을 채우는것을 좋아했는데,이러한 성품은 김정일이
자신의 아내들을보면,남의 아내를 빼았아 자신의 아내로 만든것두 두사람이 공통점이다.

연산군은,잔치나 파티라는 명목으로,관리들의 부인들을 궁중으로 불러,가슴에는 남편이름을
붙여넣게하여
,옷을 똑바루 입혀준다는 구실을되게하여,자신의 욕심을 채우고,하루두 좋구,
일주일두좋구 놀데까지놀다,밖으로 내어보냈다.

인권을 탄압하구 백성을 도륙하는 김정일정권이 아무리 강력한 독재를한다구해두,우리나라의 백성들의
기상을 살펴보면,엄격한 신분제사회의 왕조시대인 연산군시대에두,패악한 왕이라면,패망시키구
내쫒았던걸보면

김정일 자신은 호의호식으로 파티나열며,온갖 악독한짓은 다하면서두,백성들은 옥수수죽두 제대로 못
먹구, 300만명이 넘는 국민을 굶어죽게만든죄는 하늘에 다았다.

또한 이러한 현실을 비난하는 백성들을 잡아다 어육을 뜨구,공개총살하며,수용소에 가두어둔사람만해두
수십만이넘었구,현재까지두 배고픔에 떨면 죽어가는 백성들이 널부러져있다.국민을 자신의 호의호식
도구로 이용한 연산군보다,더하면 더했지 덜하지않은 악독한 지도자이며,둘의 기록을 살펴보면,
성품이나,행동거지,태어난 배경등이 하나두 틀림이없이 똑같다는 점이다.

또한 이 두명이 사주팔자는 기이하게두 재위 12년을 넘기지못하여,권좌에서 쫒껴나게되며,권좌에
서 쪼겨나더라두,그즉시 죽임을 당하거나 암살당하지는않구,유배지나 교도소에 생을 마감하게되는
사주또한 똑같이 나옴을 알수가있다.

백성을 도탄에빠뜨리구,어육이되게한 연산과 김정일은 같은운명과 사주를 가지구
태어났기에,재위 12년을 넘기지못하구,백성과부하들에게 돌팔매를 당하여,정권이 마감될 운명을
가지구있음을 알수가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통일은,멀리있는것이아니라,길어두 2년내에 긴급사태가 발생한 가망성이
많기에,우리나라의 동맹외교를 굳건히하여,우리나라의 통일을 방해하여 침략하는 적(구체적으로
보면 동북공정을 의도하는 나라라구볼수있다.)에게는 강력한 대응작전계획을 미리세워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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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대비는 선조의 정비인데,광해군과는 악연을가진 여인이었다.자신의 아들뿐만아니라,부모형제,일가
친척모두를 광해군에게 죽임을당하구,대비의 명칭마저 폐위되어 10년동안을 골방에 갇혀지냈기에
광해군에대한 원한은 짐작하구두 남는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구난후,인목대비의 글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는데,
“ 부모의 원수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는 한 나라에 같이 살수 없다. 역괴가 스스로 모자의 도리를 끊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이 있고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두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에 딱어울리는 구절이 아닐수없다.

이런구절때문에 인목대비를 주목한게아니라,한글과 관련된 선구자적인 여인이라는 측면에서 인목대비를
살펴보고자하는것이다. 인목대비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선구자적인 획기적일을 했는데,교서를 한글로
내린 전후후무한 여인이라는것이다
.

세종대왕시대에 한글이 만들어졌지만,조선시대내내 한글은 왕가의 교서로 사용된적이 없었다.
그런데,쇼킹하게두,인목대비는 당당하게 한글로 교서를 내린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실제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을지는몰라두,한글사랑을 실생활에서 사용하여 사랑한 임금이라구는
전혀볼수가 없다.역대 조선시대의 문무관리나 왕들은 한글을 천시했으며,신분이 낮은 일반백성들이나 ,
여인들이 실질적인 한글사랑을 실천했던 대상들이었다는 점이다.

인목대비의 선구자적 한글사랑이 얼마나 조선시대의 관료들에게는 쇼킹그자체였으면, 사간원에서
상소올리게 된것인지 조선왕조실록의 구절을 살펴보자

1623년 인조1년  12월7일
"지금 공주를 시집보내는 예(禮)를 보건대 의복과 기물의 사치가 보통 때보다 배나 되고 있으니, 이미 조종조에서 절약하고 검소하였던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언서(諺書)로 하교하신 사실을 보고 듣기에
더욱 놀랍습니다.

"옛날 성인이 훈계하신 뜻과 뭇 신하들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로써 조용히 아뢰어, 이미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고 언서로 하교하는 일이 앞으로 없도록 하심으로써 조종조의 가법(家法)을 밝혀 후손에게 남겨주는 법으로 삼으소서.”

조선시대의 관리들은,한글을 무시하는것은 당연하구,오히려 한문을 안쓰구,한글을 쓴건 불법한짓을 했다는 투로말하구있음을 알수가있다.

오늘날같으면,대갈박깨지는건 둘째치구,사회에서 매장될인간들이 조선시대 신하라는것들의 가치관이었음
을알수가있다.이런 덜떨어진 신하들에게,통쾌한 일격을 가한 선구자적 여인이 인목대비였다는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구,반정에 성공한 집권초기인 인조로서는,인목대비라는 백그라운드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에,인목대비의 교서에대하여 문제삼지말라구 신하들에게 명령한다.

만약에,인목대비라는 대담무쌍한 여인이아니구, 일반 선비나,신하가 한글로 상소를 올리던지,
공문서를 올렸다면,한글을 썼다는 그이유하나로 접수불가는 물론이구,임금을 모독했다구 죽임을
당할수도있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현실로는 이해할수없는 그러한일들이 공자왈 맹자왈하는 신분제사회하에서는,상소를 한글로 올린다는 그자체, 양반이라는 껍데기인 자신의 속한신분에서 왕따나 사회적매장을 당할충분한 이유가될수도있는 사회체제였다는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후기 신분제사회가 종말을 기할때까지두 이어졌으면,이가 득실대는 상투머리에
상투를 짜르느니,차라리 목을 짜르는게 더현명하다는 가치관이 조선후기까지 이어졌기에,
한마디루 말해서,오늘날에 사람이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살게되면 복장터져죽을 일이 다반사였을것이다.

한글을 사랑하구싶어두,사랑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시대가 조선시대였다는것이다.그이면에는
썩어빠진 공자왈 맹자왈이 그런 사회적가치관과 문화를 만드는데 아주지대한 역할을 해다는점이다.

인목대비는 이러한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속에 빠져들었던사회에,혁신적 한글사랑을 몸소실천한 선구자
라구 볼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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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국 사이에 백두산 일대의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비석. 당시 청나라의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과 조선 관원들의 현지 답사로 세워졌다.

이보다 앞서 압록강·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청나라 두 나라 사이에는 자주 분쟁 사건이 일어났다. 즉 거의 빈땅으로 되어 있던 이 지역에 인삼을 캐는 사람, 사냥하는 사람들이 자주 내왕하며 때로 충돌을 일으켜서 말썽이 되었다.

1685년(숙종 11)에는 백두산 부근을 답사하던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건너 삼도구(三道溝)에서 조선 채삼인(採蔘人)들의 습격을 받아 크게 외교 문제가 발생하였다. 1690년과 1704년, 1710년에도 두만강·압록강 건너에서 중국인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살해된 일이 생겨 청나라 정부의 항의가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에는 청나라에서 이러한 범법 월경 사건들을 문제삼아, 백두산에 올라가 국경을 정하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청나라 왕실의 발상지로 인정하는 백두산을 청나라의 영역 안에 넣으려는 저의도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에서는 그 해 2월, 목극등을 장백산(長白山 : 백두산)에 보내 변경을 사정(査定)하려 하니 협조해 달라는 공문을 조선 정부에 보냈다. 이어 4월에는 목극등 일행이 두도구(頭道溝)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와 후주(厚州)에 도착하였다.

청국의 공문을 받은 조선 정부에서는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을 보내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와 함께 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혜산진에서부터 산간 험지를 10일간이나 강행군해 5월 15일 백두산 천지(天池)가에 이르게 되었다. 일행은 거기서 내려와 동남쪽으로 4㎞ 지점인 2,200m고지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웠다.

애초 국경 사정(査定)문제가 일어날 때, 조선 정부의 의견은 백두산 정상을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갈라 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경을 사정하는 임무를 띠고 나아갔던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는 늙고 허약한 몸으로 험한 길을 갈 수 없다고 하여 중간에서 뒤떨어졌다.

결국 목극등이 애초 의도한 대로,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와서 두 물이 ‘人’자 모양으로 흐르는 분수령 위의 호랑이가 엎드린 모양 같은 바위를 그대로 비석의 귀부(龜趺)로 삼고 높이 약67㎝, 폭 약45㎝ 정도의 정계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 비에는 ‘대청(大淸)’이라는 두 글자를 머리에 크게 쓰고, 그 아래에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답사해 이곳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土門)이 되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

강희오십오년오월오일(烏喇摠管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五日).”라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어 청국인 수행원으로 필첩식(筆貼式) 소이창(蘇爾昌), 통관(通官) 이가(二哥)를 적고 아래에 조선 관원 6인의 이름도 함께 새겼다.

비를 세운 후 일행은 다시 지세를 살피며 무산으로 내려가서 각기 헤어졌다. 이 때 목극등은 다시 조선관원들에게 토문강의 수원이 되는 물길이 중간에 땅속으로 들어가서 경계를 확인할 수 없는 곳에는 여기저기에 돌 또는 흙으로 돈대(墩臺)를 쌓아 아래쪽 강물에까지 연결해 범법 월경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부탁하였다. 한·중 두 나라의 경계선이 비로소 그어진 셈이다.

그 뒤 1881년(고종 18) 청나라에서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 흠차대신(欽差大臣) 오대징(吳大徵)을 보내어 간도의 개척에 착수하였다. 그러자 1883년 조선 측은 어윤중(魚允中)·김우식(金禹軾)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고 9월에 안변부사 이중하(李重夏), 종사관 조창식(趙昌植)을 보내어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했으나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그 뒤 1909년 일제는 남만철도의 안봉선(安奉線) 개축 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해 남만주에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지방을 넘겨주고 말았다.

------------------------------------- empas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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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중국에게 "중국을 절대 배신하지않겠습니다"라구 말했는데,이 의미속에 담긴 메세지가무엇인지에 대하여,김정일정권이 그간에 보여준 행적을 토대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도하여,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로편입하려는 시도를하였을때,북한의 반응은꿀먹은 벙어리였구,중국과 우리나라가 역사전쟁이 벌어졌을때,중국은 북한에게는 협상이나 외교특사를파견하지두않구 ,오로지 우리나라에게만 외교특사를 파견하여 직접협상을하구,북한에게는 사과라든지,아무런 조치두하지않았다는점이다.



북한의 김정일정권은 자신의 독재안위가 민족적이익보다 더중요하며,우리민족의 기상인 고구려사를
팔아먹든,가져가든,자신이 배터지게 호위호식할수있는 독재유지만될수있다면 중국의 뜻대로
따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것이었다
.

중국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속에 나타난 절대가 가지는 의미는 어떠한상황이나 일에두라는
의미를 가지구있다
.자신의 독재정권을 유지만시켜준다면,민족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모든것을 따르겠다는
의미를 포함하구있다는 점이다.외교적협상에서 한 국가의 지도자가,사용하는 외교적언어는,아무것이나
사용하지않는다
,그러함에두,절대라는 단어를 썼다는것이다.

절대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절대(絶對):상대(相對)하여 견줄 만한 다른 것이 없음,

국가간의 외교는 상황에따라,여러가지수가있기에,국가수반은 깡패조직의 우두머리가 아니기에
어느나라에게든지,절대충성이니 절대배신이니라는 단어를 쓰면 안된다.그러나 김정일은 깡패조직에게나
있을법한 두목에게나 할법한 충성맹세를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구,절대 배신하지않겠습니다라구 했다는
것이다.

이런 얼빠진 김정일정권을 도와서 연명시켜준다는것은 민족적 치욕일뿐아니라,크게보면,이미 북한독재정권
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유사시 중국에게 나라의 영토를 팔아넘길 생각을 가지구있다구볼수있다.

민족의 이익에 반한다해두,백성들이 굶어죽든,도탄에 빠져살든 자신의 독재권력을 유지할수만 있다면
모든걸 팔아서라두, 절대충성을 바칠수있는 대상이 중국이라는것이 김정일의 가치관이기에
"중국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올수있었다는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구있는 김정일을 봤을때 남한이 자신의 독재권력을 유지시켜주고 안정화시켜주는
도구의 역할이외
는 바라는것이 없구,그 도구의 역할을 충실해주던,지난 10년간의 정권이 바껴 새정부가
들어서자,자신이 부귀영화를 누릴수있는 권력을위한 도구역할을 해줄수없음을 알구,오래되구 허름해진
줄이라두 잡아야하기에 줄을 중국으로 바꿔타서 독재권력을 유지만 시켜준다면 모든것을 팔아바치겠다는
의사를 표현한것으로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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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재미있는 사건과이야기들이 많다.조선시대에 로또라구 볼수있는 호랑이
대한 기사를 살펴보자.

태종5년(1405년) 호랑이가 궁궐의 근정전에 돌아다녔다.호랑이가 엄격한 사람의 통제를받는 궁궐안까지 침입해서 돌아다닐정도면,허허벌판이나 경계병이없는 일반백성들이 사는 주거지는 쉽게돌아다니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것이다.

비디오테이프에서 나왔던 어린아이의 울음두 그치게만든다는 호환마마 이런구절이 말장난이아니라 조선시대의 민중의 삶속 현실에서 직접적인 공포그자체였음을 알수가있다.


저녁 으쓱한 시간에 싸립문밖에 혀를 내름두르고,사람을 잡아먹으려구 집문밖을 돌아다니는
호랑이문제는 단순한 호기심차원이아니라,백성의 삶과연결된 조선시대의 정권안위의 차원이었다.

이런현실이다보니,다음과 같은구절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성종2년(1471년) 군인가운데 호랑이에게 창이나 화살을 맨먼저 맞힌자에게는 휴가 50일을주고,
두번째루 맞힌자에게는 휴가 45일을 주고.......

세조9년(1463년) 호랑이를 잡는 궁술에 능한 권이(權耳)라는 사람에게 겸사복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세조14년(1468년)
악한 짐승(호랑이)을 잡아 죽이는것은 상줄 만하니
, 그것을 논공(論功)하여 아뢰라

몇가지 구절만을 살펴보더라두,조선시대에서 호랑이를 잘잡아 죽이는것은 휴가를 얻는
길일뿐만아니라 벼슬까지두 얻을수있구, 말이나 비단등의 물질적혜택두 아울러 상으로
받을수있는 로또였다.

이와는 반대루 호랑이문제를 잘대처하지못하는경우는  잘나가던 벼슬두 댕강되어
파직당하는 사람두있었으니

중종26년(1531년) 호랑이를 잡을때 임무를 소홀히한 대장 김호를 파직하였다.

500년이 넘는 조선시대동안 호랑이에 대한 피해인 호환문제는 어느왕때만 발생하는
일부인 20-30년의 단기간의 문제가아니라 조선시대내내 고질적인문제였다는점이다.

세계각국에는 야생호랑이들이 사는나라들두 많다.그러나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동물원이
아니라,우리나라에서 야생호랑이가 멸종된것이 슬픈일이니 복원하여 지리산이나 설악산,
한라산
등에 야생호랑이를 풀어논다는 정책을 나라에서 시행한다면 과연?  현실적면에서
그 슬픔만으로 국민들이 호환의 문제를 받아드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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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조선시대에 성군으로 알려져있다.그러나 세종의 무슨병으로 죽었는지는 역사의미스테리루 남아있다.무려 22명의 자식을 둘만큼 왕성한 정력을가진 왕이었음을 알수가 있는데,역사에 기록된 병의 증상은,피부에 궤양이 있었음을 알수있구,단순히 피로하여 걸리는 대상포진이라는 설두있구,매독이나 임질등의 성병에 걸려죽었다는 설두있다.

매독등이 성병은 유전이되기에,이후 세종의 아들이나 손자들이 어떠한 모습을 보여는지살펴보면,단순한 대상포진인지,아니면 설로만 나도는 성병에 걸려죽은것인지 유추해볼수가 있겠다.



세종의 왕위를 이어받은것은 문종인데 문종은 젊은나이에 재위2년못되어죽었고,같은 형제인
세조또한 왕위에 올랐으나,몸에 피고름이 생기는 종양으로 재위기간 고생하다가 죽은기록이
보인다.또한 세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예종또한 재위1년을 채우지못하구 19살이 나이에
죽었고,예종의 아들은 4살정도쯤에 죽었음을 역사는 기록해주고있다.

세종-문종-세조-예종-손자에 이르는 가계도에서 피부궤양이나 조기에 죽은것을보면
체질적으로 무엇인가 유전되어진병으로 죽지않았나 유추해볼수가있다.

태종의 자신이 죽은후 상중에두,세종이 육류가 없으면 밥을 안먹으니 고기를 먹게하라는
유훈을 남긴것을보면,세종은 오늘날에 만원짜리 보여주는 핸섬하구 날씬한 얼굴체형보다는
비대한체격을가졌음을 유추해볼수가있다.세종의 초상화는 김기창화백이 그려다구
알려져있다.실제 세종대왕의 얼굴은 우리가 지폐로보는 핸섬한 얼굴이아닌 전혀 다른
못생긴 비대한 몸집을한 모습일수있다는것이다.

그림상식중에 잘못된개념이,나쁜사람은 얼굴이못생기구,괴물처럼생기게그리구 좋은사람은
이쁘구,잘생기게그리는데,현실과 동떨어진 그림표현법이라구 볼수있다. 나쁜짓잘하는 사람중에두
얼굴이 잘생기거나 이쁘사람이 많다는것이구,훌륭한 사람들중에두 몰골이 별볼이없는 사람두
많다는것이다
.무조건 훌륭한 사람은 미남.미녀로만 그리는것은 잘못된 그림이라구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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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창하는 중국군의 어제와오늘,그리구 우리나라의 정예군이 어디일까,궁금증이 생겼다.그래서 찾아봤는데,오늘날의 현대전에서두,아무리 공중전이 강하다해두,직접침투제압하는,해군과상륙군이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실전경험을 바탕으로,최강의 인적구성으로 이루어진 상륙군은 해병대루 볼수있다.

중국이 한반도의 영토에 비상사태이든 뭐든,압록강을 건너 진격했을경우에는,길림,요녕,흑룡강성의 허리를 끊어 고토회복과 더불어 전멸시키려면 신속상륙군으로 적후방을 끊어야하는데 생각나는 군대는 해병대이다.



중국상륙군의 옛날모습과 오늘날의 모습,한국상륙군인 해병대의 옛날모습과 오늘날의 모습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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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중국상륙군인 중국군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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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한국상륙군인 해병대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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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중국상륙군인 중국군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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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나라의 해병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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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국군의 상륙작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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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해병대의 상륙작전사진


우리나라의 역사드라마에서 전투중에 대장군들이 꼭하는 대사가있는데
"한놈두 살려두지마라"

역사기록을 살펴봤을때두,우리나라군대와 적이 싸웠을경우는 전멸을 시켰다는 기록이부가
되는걸보면,드라마대사에서만 나오는 허튼소리는 아니라는것이다.
 
"한놈두 살려두지마라" 이말이 얼마나 무서운말인지
우리나라군대와 싸워보면 느낄수있다는것이다.

풀한포기조차 다뽑아버리며,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군대조차
40년을 싸우고도,학을띠며 강화를 택할정도인 나라가 우리나라백성들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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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그대 모습이 자꾸 내곁에 다가와, 그만 흐르는 눈물 감출 수 없어 ,온통 베게만 적시었네,오늘밤
웬일일까 ,잠못 이루겠네,하얀 종이위에 쓰여진 그대의 글씨,이젠 안녕이라는 그대의 말이였나,
오늘밤,두눈가에 눈물 흐르는데-규리-오늘밤.

1231년 9월 세계를 제패한 몽고군이,고려를 치기위하여 전사상 유래없는 잔혹한 몽골기병 3만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하였다.이당시 몽골기병 3만은,당나라군대 300만명보다 더 강력한군대라구 볼수있수있으며
몽골이 러시아정벌에 가동한 기병이 3만명정도였던것을 보았을때,몽고기병 3만은 그당시 세계최강의
군대라구 볼수있었다.순수 몽골기병은 많아봐야 10만명정도를 유지할수있었던 몽고가 세계를 제패한
것을 보았을때,그 위력과 공포는 상당했을것이다.

중국두 망하구,러시아두 망하구,이슬람,헝가리,유럽등 몽고군이 가는곳마다,패망하지않은 나라가 없었다.
끝까지 저항한 나라는,몽고기병이 살아있는 생명은 풀한포기,돌하나 남기지않구 완전히 패망시켜버리는
그러한 몽고기병을 상대로 무려 30년간을 끝까지 항쟁하여,고려라는 나라의 국체를 지켜내었다.

이러한 끈질긴 항쟁은 세계전사에 드물뿐아니라,그렇게 저항한 나라를 온전히 국체를 보존하게
해준것두 징기스칸의 군대특성을 보았을때,특이한 사례라구 볼수가 있다.

이러한것은 몽골기병이 마음씨가 좋아서 그랬던것이 아니라,그에 맞서 강인한 항쟁의식을 보여주었기에
힘으로 일시적으로 굴복시킬수는 있어도,지배할수는 없는 민족임을 깨달았기에 그렇게 한것이다.

1231년 9월 훗날 승장인 김윤후에게 죽임을 당하는 몽고기병 총대장 살리타이의 몽골 3만기병이
고려를 침략하였다.이때 고려군의 항쟁의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준것이 귀주성전투라구 볼수가있다.
몽골기병이 빠른기동력으로 방어거점인 성들을 함락시키구,저항하는 성들은,엄청난 살육을 전개하면서
여러부대로 나누어 일부는 개경으로 진격하구,부대중 1만기병을 이끈 살리타이군이 귀주성에 당도하였는데,
이때 귀주성에는  4-5천명의 고려군이 있었다.그중에 대부분이농사를 짓다가,군인으로 변한 농민군들이
대부분이었기에,적의 수적우위뿐만아니라,저항하면 모두살육했다는 그러한 소식들을 들었던 몽골기병들이
성을 에워쌓기에,공포심은 극도로 달했다구 볼수가 있다.

귀주성에는 김경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싸워보기두전에,성내의 사기가 꺽인걸보구,결사대를 규합하여
오히려,성문을 열구나가,기습적으로 몽골군을 공격하였는데,뜻밖의 공격을 받은 몽골군은 의외의 반격에
적전분열이 되었다.전투에서는 숫적우위가아니라,죽기살기루 달려드는 사람한테는 몽골기병두,어쩔수
없다는점이다.수십명의 기병으로,수천의 몽골기병을 치러 성밖으로 나갔다는 자체가,대단한 정신력이라
아니할수가 없다.이렇게 서전에서 상대방의 기를 꺽어 당당히 싸워이기는걸본 성내의 군민들의 사기두
올라가게 되었다.

9월 초순에 시작된 귀주성전투가 10월이 넘어가도록,함락시키지 못하자,몽고군의 피해두 많아졌기에
몽고군은 성의 함락되면,모두 도륙하기전에,항복하라구,사자를 보내었지만,성내의 고려군은
사자의 목을 베어 결사항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몽고군이 사력을 다하여,발석차를 이용하여 돌을 날려 성벽을 부수면,성내의 군민은 혼연일체가
되어,무너진곳을 다시쌓구,여의치않으면,몸으로 성벽을 대신하여 막으면서 11월이 다가도록 항전을
하였다.성안의 화살과 무기가 다떨어지면,주위에있는 돌을가지구 싸웠구,돌마져없으면,끊는물을 만들어
무기로 사용할만큼 이미 함락되두 모두죽을것이구,가만히 있어두 죽을것이구,이판사판인 상황이었다.

성내의 항전의 결사적이었기에,몽고군은 몽고와 고려가 강화협상이 진행되구있으므로,항복하라는
고려왕실의 항복권고사절을 동행하여 보내었으나,성안에 군민은 죽임은 있어두,항복은없다라는 자세를
취하였다.해를 넘겨 1232년이 되어,몽고와 고려의 강화협상이 타결되었어두,귀주성이 항복하지않자
몽고군은 고려정부에 귀주성이 항복하지않으면,강화협상두 끝장이라는 협박과함께,귀주성에 대한
총공격을 단행하였다.

몽고군이,강화협상이 타결되었음에두,항복을 강요하는 이유는,귀주성은 거란의 30만대군이 고려의
수도인,개경까지 깊숙히 침입했다가,퇴각하던중,강감찬장군에 의하여,귀주에서 거란군이 퇴로가
막혀 몰살당한 역사적기록이 있었다.이러한 사실을 잘알구있는,몽고군이였기에,안전한 퇴로를
확보하기위해서두,강화협상타결은 고사하구,고려왕조의 어명조차거부하는 귀주성의 군민은
목에 가시일수밖에 없었다.귀주성에 발이묶여 더이상 전진하지못한 살리타이는,개경근처까지
깊숙히 진입한 타부대를 동원하여,고려왕조를 위협하구,귀주성이 항복을하지않으면,강화협상은
무효구,재차 공격하겠다는 협박을 하므로,고려왕조에서는 다시 어명을 지닌 관리를 귀주성에
몽고군과함께 보내어,항복하도록 권고하였다.

성안에 당도한 정부관리의 항복권고에두,성안의 군민은 결사항전의 자세를 굽히지 않으므로
어명을 받든,정부관리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므로,자결하려구하였다.이에 성안의 책임자가
항복을 받아드려,강화를할수밖에없는 나라의 처지를 이해하구,출성하여 항복을 결정하자
성안의 남.녀노소가 울지않는사람이 없었다.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당한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달했으나,어쩔수없이,몽고군의 안전한
퇴각을 바라볼수밖에없었다.이후에두 30년이 넘는기간동안,몽고와 고려의 전쟁은 지속되어지만
전쟁기간이 길어질수록,항쟁의식은 더욱깊어졌으며,이러한 백성들의 항쟁의식은 나라의 국체를
지켜내는 원동력이 되었을뿐만아니라,원의 부마국으로,원황실의 공주를 고려의 왕의 아내로
맞이하는 제도가 생긴것두,고려인이 중국한족보다,높은계급을 부여받은것두,작지만 굴하지않는
민족성에 기인한것이었다.

원나라인 몽고황실은 몽고족이아니면 황제나 황후가 될수없었는데,원황실에서
몽고족이아니면서 황후가될수없는데두,또한 유일무일하게 이민족이면서 원황실의 황후가된것두
우리나라의 기황후가 유일했다.세계를 제패했던 몽고가,유독 자그만한 나라인 우리나라만큼은,신경을
많이 썼다는걸 알수가있다.우리나라가 몽고에 등돌리자,우연인지몰라두.원나라가 망한걸보면
우리나라는 작지만,강대국의 틈바구니속에서두,오뚝이처럼 살아남아,캐스팅보트를 쥐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음을 알수가있다.우리나라를 만만히 봤다가는,세계를 제패한 국가두 꼼작없이 덕분에
망한다는 수많은 역사기록이 보여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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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속에 면면히 흘러왔던 국민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한다.

우리나라 백성들의 불의한 외세에대하여
맞써싸우는 정신은 세계에서 그유래를 찾기어려울 정도로 강인하다.

고구려가 망해두,끝까지,성에 남아 항전했었다.이러한 민족성은,세계를 재패한
몽고군에대하여두,세계전사에 유일무일한 30년이상을 맞서싸워 나라의 국체를
지키는 밑바탕이 되었다.

몽고와의 항전당시두,지도층들은 자신의영달과 안녕을위하여,화친을 주장할때두
우리나라의 왕과조정관료가 나서서 성을버리구 항복을 하라구,어명이 내렸다해

두,끝까지,항복하지않구 저항했으며,아무리 대국이라할지라두,싸워보지않구,민족의 자존을 버리지않았던
강한 정신력을 가지구있었다.비록 국제정세와 동떨어져,대의명분을 고집하여,백성들의 도탄에 빠진적두
있었지만,이러한 기상은 이민족의 침략에 끝까지 맞서서 국체를 유지할수있는 원동력두 되었다.

몽고나,수당,청태종등 세계를 제패했던 국가들조차도,이러한 특이한 민족성을 전투중에 깨달았기에
힘으로 일시적으로 굴복시킬수는 있어도,지배할수는없는 나라라는 인식을하게되었다.

왕을 사로잡거나,죽이면 이기는게 옛날의 전쟁이었으나,우리나라는 정반대루,나라의 위급상황에서는
왕을 죽였다해두,오히려 백성들이 더강한 항전의식으로 저항했으며,하물며,항복하라구 지도층이 나서서
권해두,끝까지 항전하였던것이다.우리나라의 국체는 왕의것이아니라,백성의 것이었다.

우리나라만큼,북한또한 우리나라의 일부이기에,세계를 제패한 국가들과 다 싸워본 국가는 우리나라가
유일무일하다.과거역사나 현대사나 우리나라는 작지만,굴하지 않았으며,국체를 유지하는데는,혼연일체가
되는 민족성을 가지구있다.

통일한국은,우리선조들이 살았던 간도에대한 권리는 역사이래,한민족의 터전이었다.2,000년전에 자신의
선조가 살던땅이라구,2,000년후에 그곳에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민족보다못하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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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는 우리나라땅이다,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이 신라의 경주에 내려온것두아니며,고구려의 기원인 고조선
이전부터,간도는 우리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대한민국을 지구에서 지우지않는한,간도는 반드시 찾아와야할
대의명분을 가진곳이다.광개토태왕,을지문덕,장수왕,그리고 수많은 선조들의 무덤들이있는 땅이 어째서 중국
의 권리가 있단말인가,지구에서 한민족이 사라지지않는한,언젠가는 반드시 고토를 회복할것이다.

동북공정이다 뭐다하지만,북한의 혼란한틈을 타 북한지역을 중국이 지배할수있다는 생각은,아주 얼빠진
망상일뿐이며,그러한 시도가있는순간 공중분해되는것은 중국이다.강이식장군이 말한,무례한 국서에는
답서가 아니라 칼로 화답해야한다는 정신이 우리나라이다.중국이세계의 강대국 어쩌구 폼잡지만,역사이래루
우리나라는 세계를 다지배한 어떤국가가 위협한다해두,국체에 관한문제는 혼연일체가 되어 싸웠다.

진실은 하나다.티벳은 티벳인의 땅이며,내몽고는 몽골의 땅이며,간도는 대한민국의 땅이다,
아무리 무슨공정이다하면서 역사를 날조한다구해두,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온 민족이
사라지지않는한 바꿀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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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 65cm, 칼잡이:25cm,칼날:40cm
칼의 용도:나무짜르기,여인들의 호신용 은장도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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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란 휘어진 칼처럼 생겼지만,베는용도가 아닌,
물건을 두동강내는역할을 했으며,여인들의 호신용칼로써,
머리맡이나,이불밑에 두었던 물건.

실생활에서는 나무를 짜르는데 사용되어졌지만,
여인들의 호신용이나,악몽이나 기타 안좋은꿈을 물리치는
의미의 칼로두 사용되어졌다.

칼의 위력
베어지는게 약하나,내리치면 베어지는정도가
아니라,절단이 되어버린다.작은은장도는 보기에
쪼메하게 생겨서,호신용보다는 장식용으로 보이지만
이칼은
,호신용으로 손에 들려있는것자체가 무섭게
보이며 실제위력으로도 가히 은장도의 대부임.

쪼메한 은장도같이,웃기는장식용이 아니라,최소한 은장도의
진정한 역할을할려면,이정도는 되야.......(づ ̄ ³ ̄)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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