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은 용과 학이 교미를해서 태어난 새가 봉황이라구알려져있다.조선시대부터 오늘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봉황은 임금을 표현하는 상징이었다.그러나,봉황은 사대주의정신을 철저하게 표현하는
아주 기분나쁜잡종새이다.중국은 황제의나라라구해서,황색에 용을 황제의 상징으로 썼구,조선시대의
왕들은 중국황제가 쓰는 황색과용은 감히 황제의 상징이기에,사대하여 스스로 낮춰 조선시대왕은
황색옷을 입는것은 황제에대한 불충이라구여겨,적색옷에 봉황을 왕의상징으로 사용하였다.
봉황이 조선시대왕의 상징으로 사용한 이면에는 이처럼 철저한 중국에대한 사대주의의
썩어빠진 소중화적사관이 자리하구있었다는것이다.또한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봉황을
황제의 여자를 상징하는뜻으로 여겨왔다.
조선시대 역사극을보면,임금이 황금색옷을입구있는것을 볼수가없을것이다.오로지 빨간색옷을 입구있는데,이속에는 철저한 사대주의정신이 숨어있었다.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을 어찌감히 왕이 사용할수가있는가하는 논리였다.
봉황두 마찬가지루,중국황제의 여자,이런의미였구,봉황자체두 용의 씨를 받아 태어난 잡종이라는 의미이기에,주체성은 결여되구,용의 사생아나,아류정도라는것을 함축한,재수없는상징이라는것이다.
이러한 사대주의를 함축한 봉황문양은,조선시대이후로,주욱 현재 대통령까지 아무런 생각없이
그대로,사용되어왔다는것이다.정말 재수없는 것이 용의 씨를 받은 잡종인 봉황이라는것이다.
봉황은 사라져야할 구시대적,상징으로,용을 사용할지언정,용의 씨를 받구 잡종으로 태어난
봉황은 애시당초,용보다 덜떠어진 지위나,상징에 사용되는 상상의 새라는것이다.
썩어빠진 사대주의상징인 봉황은 중국황제를향한 흠모하는 여자인 왕을 의미하는 상징이기에
조선시대에 사용되어진 이런 썩어빠진 사대주의문화인 용의 잡종인 봉황을 계속 대한민국의
대통령의 상징으로 사용한다는것은 치욕이며,대한민국의 수치라구볼수가있다.
봉황은 다시말하지만,우리나라의 국운을 막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왕을상징하는 재수없는
의미를함축하여 만들어진 새라는것이다.주류가아닌 잡종으로 만들어진걸,그래두 용의씨를
받았으니 황송하다구,받들어야겠는가?
역사자료
- 봉황의 의미와상징 2008.02.17 3
- 연산군과 김정일의 사주팔자 2008.02.10 2
- 한글로 명하노라 2008.02.09 2
- 간도와백두산정계비 2008.02.08
- 중국을 절대 배신하지않겠습니다 2008.02.05 2
- 조선시대의 로또 호랑이 2008.02.05
- 세종의 미스테리 2008.02.04
- 역사드라마에서 꼭나오는 대사 2008.02.01
- 오늘밤에~ 2008.01.04 2
- 우리나라의 민족성 2008.01.02 1
- 은장도라면 이정도는 돼야 2007.09.30
- 궁녀들의 삶은 어떠했을가 2007.09.19 4
- 왜 그러셨어요? 2007.09.15
- 장녹수에 대하여 2007.09.14
- 광개토태왕 첫회 시청소감 2007.09.11
- 태왕사신기 주변모습 2007.09.02
- 태왕사신기 무엇에 쓰는 물건일가? 2007.08.31
- 태왕사신기 건물들 2007.08.30
- 태왕사신기 2007.08.30
- 고구려의 기상 2007.07.03
봉황의 의미와상징
연산군과 김정일의 사주팔자
연산군이 재위기간은 12년이었다.그런데 이 연산군의 사주팔자와 김정일의 사주팔자는 아주 운명적으로딱맞아떨어진다.두사람의 본성이나 행실모두가 비슷한면이있다.
연산군은 시와음악등의 예술을 좋아했구,전국에서 얼굴이 반반한 처녀는 청녀라는 명칭을으루궁중으로 불러서 놀았구,김정일또한 예술을 사랑하는기질과 반반한여자들을 기쁨조라구 불러서노는것은 아주 똑같이 닮았다.
연산군은 특히 파티나연회같은것을 자주열구,아주좋아라했는데,이같은 성격두 김정일하구똑같이 닮았다.
연산군은 툭하면 자신이 지은시라구,신하들에게 어떤가하구 의견을 묻기를
좋아했는데,말한번 잘못하면,죽임을 당하니,전하의 예술은 최고입니다라구 아니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나 멋진시를 자주써는지,조선왕조실록 연산군에기록된 수많은 연산군의 시중 그 하나를 살펴보자
"비 개이고 바람 맑아 풍경 걷은 듯
금전에 아지랑이 둘러 떠 있네
잔치를 자주 여니 우애 좋은데
넌지시 사람 끄는 홍분 얼마뇨"
도성주위에 가뭄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시체가 길바닥에 널려 쌓여있는데두,연산군은 파티가
얼마나 인간사이의 정을 돈독히해주는지,너희는 아느냐란식의 시를 적어 짜빠져있음을 알수가잇다.
연산군은 더 나아가,길가에 배고픔에 쓰러져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너무많아,치우는사람이 없자
길가에 시체가 그대로있으면,고을이나 이웃사람을 잡아다 책임을 물어 옥에가두게하는 법률을
만들기까지했다.
이러한것은,주위사람이 잘못하면,친지와 일가족및 이웃에게 책임을 물어,하루아침에 집안전체가
쥐도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지게하는 김정일의 통치방법과 다르지않다.
연산군은 또한 특이하게,남의 아내를 잡아다 음욕을 채우는것을 좋아했는데,이러한 성품은 김정일이
자신의 아내들을보면,남의 아내를 빼았아 자신의 아내로 만든것두 두사람이 공통점이다.
연산군은,잔치나 파티라는 명목으로,관리들의 부인들을 궁중으로 불러,가슴에는 남편이름을
붙여넣게하여,옷을 똑바루 입혀준다는 구실을되게하여,자신의 욕심을 채우고,하루두 좋구,
일주일두좋구 놀데까지놀다,밖으로 내어보냈다.
인권을 탄압하구 백성을 도륙하는 김정일정권이 아무리 강력한 독재를한다구해두,우리나라의 백성들의
기상을 살펴보면,엄격한 신분제사회의 왕조시대인 연산군시대에두,패악한 왕이라면,패망시키구
내쫒았던걸보면
김정일 자신은 호의호식으로 파티나열며,온갖 악독한짓은 다하면서두,백성들은 옥수수죽두 제대로 못
먹구, 300만명이 넘는 국민을 굶어죽게만든죄는 하늘에 다았다.
또한 이러한 현실을 비난하는 백성들을 잡아다 어육을 뜨구,공개총살하며,수용소에 가두어둔사람만해두
수십만이넘었구,현재까지두 배고픔에 떨면 죽어가는 백성들이 널부러져있다.국민을 자신의 호의호식
도구로 이용한 연산군보다,더하면 더했지 덜하지않은 악독한 지도자이며,둘의 기록을 살펴보면,
성품이나,행동거지,태어난 배경등이 하나두 틀림이없이 똑같다는 점이다.
또한 이 두명이 사주팔자는 기이하게두 재위 12년을 넘기지못하여,권좌에서 쫒껴나게되며,권좌에
서 쪼겨나더라두,그즉시 죽임을 당하거나 암살당하지는않구,유배지나 교도소에 생을 마감하게되는
사주또한 똑같이 나옴을 알수가있다.
백성을 도탄에빠뜨리구,어육이되게한 연산과 김정일은 같은운명과 사주를 가지구
태어났기에,재위 12년을 넘기지못하구,백성과부하들에게 돌팔매를 당하여,정권이 마감될 운명을
가지구있음을 알수가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통일은,멀리있는것이아니라,길어두 2년내에 긴급사태가 발생한 가망성이
많기에,우리나라의 동맹외교를 굳건히하여,우리나라의 통일을 방해하여 침략하는 적(구체적으로
보면 동북공정을 의도하는 나라라구볼수있다.)에게는 강력한 대응작전계획을 미리세워둬야한다.
한글로 명하노라
인목대비는 선조의 정비인데,광해군과는 악연을가진 여인이었다.자신의 아들뿐만아니라,부모형제,일가
친척모두를 광해군에게 죽임을당하구,대비의 명칭마저 폐위되어 10년동안을 골방에 갇혀지냈기에
광해군에대한 원한은 짐작하구두 남는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구난후,인목대비의 글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는데,
“ 부모의 원수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는 한 나라에 같이 살수 없다. 역괴가 스스로 모자의 도리를 끊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이 있고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두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에 딱어울리는 구절이 아닐수없다.
이런구절때문에 인목대비를 주목한게아니라,한글과 관련된 선구자적인 여인이라는 측면에서 인목대비를
살펴보고자하는것이다. 인목대비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선구자적인 획기적일을 했는데,교서를 한글로
내린 전후후무한 여인이라는것이다.
세종대왕시대에 한글이 만들어졌지만,조선시대내내 한글은 왕가의 교서로 사용된적이 없었다.
그런데,쇼킹하게두,인목대비는 당당하게 한글로 교서를 내린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실제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을지는몰라두,한글사랑을 실생활에서 사용하여 사랑한 임금이라구는
전혀볼수가 없다.역대 조선시대의 문무관리나 왕들은 한글을 천시했으며,신분이 낮은 일반백성들이나 ,
여인들이 실질적인 한글사랑을 실천했던 대상들이었다는 점이다.
인목대비의 선구자적 한글사랑이 얼마나 조선시대의 관료들에게는 쇼킹그자체였으면, 사간원에서
상소올리게 된것인지 조선왕조실록의 구절을 살펴보자
1623년 인조1년 12월7일
"지금 공주를 시집보내는 예(禮)를 보건대 의복과 기물의 사치가 보통 때보다 배나 되고 있으니, 이미 조종조에서 절약하고 검소하였던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언서(諺書)로 하교하신 사실을 보고 듣기에
더욱 놀랍습니다.
"옛날 성인이 훈계하신 뜻과 뭇 신하들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로써 조용히 아뢰어, 이미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고 언서로 하교하는 일이 앞으로 없도록 하심으로써 조종조의 가법(家法)을 밝혀 후손에게 남겨주는 법으로 삼으소서.”
조선시대의 관리들은,한글을 무시하는것은 당연하구,오히려 한문을 안쓰구,한글을 쓴건 불법한짓을 했다는 투로말하구있음을 알수가있다.
오늘날같으면,대갈박깨지는건 둘째치구,사회에서 매장될인간들이 조선시대 신하라는것들의 가치관이었음
을알수가있다.이런 덜떨어진 신하들에게,통쾌한 일격을 가한 선구자적 여인이 인목대비였다는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구,반정에 성공한 집권초기인 인조로서는,인목대비라는 백그라운드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에,인목대비의 교서에대하여 문제삼지말라구 신하들에게 명령한다.
만약에,인목대비라는 대담무쌍한 여인이아니구, 일반 선비나,신하가 한글로 상소를 올리던지,
공문서를 올렸다면,한글을 썼다는 그이유하나로 접수불가는 물론이구,임금을 모독했다구 죽임을
당할수도있는 일이었다.오늘날의 현실로는 이해할수없는 그러한일들이 공자왈 맹자왈하는 신분제사회하에서는,상소를 한글로 올린다는 그자체, 양반이라는 껍데기인 자신의 속한신분에서 왕따나 사회적매장을 당할충분한 이유가될수도있는 사회체제였다는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후기 신분제사회가 종말을 기할때까지두 이어졌으면,이가 득실대는 상투머리에
상투를 짜르느니,차라리 목을 짜르는게 더현명하다는 가치관이 조선후기까지 이어졌기에,
한마디루 말해서,오늘날에 사람이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살게되면 복장터져죽을 일이 다반사였을것이다.
한글을 사랑하구싶어두,사랑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시대가 조선시대였다는것이다.그이면에는
썩어빠진 공자왈 맹자왈이 그런 사회적가치관과 문화를 만드는데 아주지대한 역할을 해다는점이다.
인목대비는 이러한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속에 빠져들었던사회에,혁신적 한글사랑을 몸소실천한 선구자
라구 볼수가있다.
간도와백두산정계비
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국 사이에 백두산 일대의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비석. 당시 청나라의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과 조선 관원들의 현지 답사로 세워졌다.
이보다 앞서 압록강·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청나라 두 나라 사이에는 자주 분쟁 사건이 일어났다. 즉 거의 빈땅으로 되어 있던 이 지역에 인삼을 캐는 사람, 사냥하는 사람들이 자주 내왕하며 때로 충돌을 일으켜서 말썽이 되었다.
1685년(숙종 11)에는 백두산 부근을 답사하던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건너 삼도구(三道溝)에서 조선 채삼인(採蔘人)들의 습격을 받아 크게 외교 문제가 발생하였다. 1690년과 1704년, 1710년에도 두만강·압록강 건너에서 중국인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살해된 일이 생겨 청나라 정부의 항의가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에는 청나라에서 이러한 범법 월경 사건들을 문제삼아, 백두산에 올라가 국경을 정하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청나라 왕실의 발상지로 인정하는 백두산을 청나라의 영역 안에 넣으려는 저의도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에서는 그 해 2월, 목극등을 장백산(長白山 : 백두산)에 보내 변경을 사정(査定)하려 하니 협조해 달라는 공문을 조선 정부에 보냈다. 이어 4월에는 목극등 일행이 두도구(頭道溝)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와 후주(厚州)에 도착하였다.
청국의 공문을 받은 조선 정부에서는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을 보내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와 함께 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혜산진에서부터 산간 험지를 10일간이나 강행군해 5월 15일 백두산 천지(天池)가에 이르게 되었다. 일행은 거기서 내려와 동남쪽으로 4㎞ 지점인 2,200m고지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웠다.
애초 국경 사정(査定)문제가 일어날 때, 조선 정부의 의견은 백두산 정상을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갈라 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경을 사정하는 임무를 띠고 나아갔던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는 늙고 허약한 몸으로 험한 길을 갈 수 없다고 하여 중간에서 뒤떨어졌다.
결국 목극등이 애초 의도한 대로,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와서 두 물이 ‘人’자 모양으로 흐르는 분수령 위의 호랑이가 엎드린 모양 같은 바위를 그대로 비석의 귀부(龜趺)로 삼고 높이 약67㎝, 폭 약45㎝ 정도의 정계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 비에는 ‘대청(大淸)’이라는 두 글자를 머리에 크게 쓰고, 그 아래에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답사해 이곳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土門)이 되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
강희오십오년오월오일(烏喇摠管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五日).”라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어 청국인 수행원으로 필첩식(筆貼式) 소이창(蘇爾昌), 통관(通官) 이가(二哥)를 적고 아래에 조선 관원 6인의 이름도 함께 새겼다.
비를 세운 후 일행은 다시 지세를 살피며 무산으로 내려가서 각기 헤어졌다. 이 때 목극등은 다시 조선관원들에게 토문강의 수원이 되는 물길이 중간에 땅속으로 들어가서 경계를 확인할 수 없는 곳에는 여기저기에 돌 또는 흙으로 돈대(墩臺)를 쌓아 아래쪽 강물에까지 연결해 범법 월경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부탁하였다. 한·중 두 나라의 경계선이 비로소 그어진 셈이다.
그 뒤 1881년(고종 18) 청나라에서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 흠차대신(欽差大臣) 오대징(吳大徵)을 보내어 간도의 개척에 착수하였다. 그러자 1883년 조선 측은 어윤중(魚允中)·김우식(金禹軾)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고 9월에 안변부사 이중하(李重夏), 종사관 조창식(趙昌植)을 보내어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했으나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그 뒤 1909년 일제는 남만철도의 안봉선(安奉線) 개축 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해 남만주에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지방을 넘겨주고 말았다.
------------------------------------- empas 백과사전-------------------------------------------
중국을 절대 배신하지않겠습니다
김정일이 중국에게 "중국을 절대 배신하지않겠습니다"라구 말했는데,이 의미속에 담긴 메세지가무엇인지에 대하여,김정일정권이 그간에 보여준 행적을 토대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도하여,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로편입하려는 시도를하였을때,북한의 반응은꿀먹은 벙어리였구,중국과 우리나라가 역사전쟁이 벌어졌을때,중국은 북한에게는 협상이나 외교특사를파견하지두않구 ,오로지 우리나라에게만 외교특사를 파견하여 직접협상을하구,북한에게는 사과라든지,아무런 조치두하지않았다는점이다.
북한의 김정일정권은 자신의 독재안위가 민족적이익보다 더중요하며,우리민족의 기상인 고구려사를
팔아먹든,가져가든,자신이 배터지게 호위호식할수있는 독재유지만될수있다면 중국의 뜻대로
따르겠다는 의지를 보여준것이었다.
중국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속에 나타난 절대가 가지는 의미는 어떠한상황이나 일에두라는
의미를 가지구있다.자신의 독재정권을 유지만시켜준다면,민족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모든것을 따르겠다는
의미를 포함하구있다는 점이다.외교적협상에서 한 국가의 지도자가,사용하는 외교적언어는,아무것이나
사용하지않는다,그러함에두,절대라는 단어를 썼다는것이다.
절대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절대(絶對):상대(相對)하여 견줄 만한 다른 것이 없음,
국가간의 외교는 상황에따라,여러가지수가있기에,국가수반은 깡패조직의 우두머리가 아니기에
어느나라에게든지,절대충성이니 절대배신이니라는 단어를 쓰면 안된다.그러나 김정일은 깡패조직에게나
있을법한 두목에게나 할법한 충성맹세를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구,절대 배신하지않겠습니다라구 했다는
것이다.
이런 얼빠진 김정일정권을 도와서 연명시켜준다는것은 민족적 치욕일뿐아니라,크게보면,이미 북한독재정권
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서는 유사시 중국에게 나라의 영토를 팔아넘길 생각을 가지구있다구볼수있다.
민족의 이익에 반한다해두,백성들이 굶어죽든,도탄에 빠져살든 자신의 독재권력을 유지할수만 있다면
모든걸 팔아서라두, 절대충성을 바칠수있는 대상이 중국이라는것이 김정일의 가치관이기에
"중국을 절대 배신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나올수있었다는것이다.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구있는 김정일을 봤을때 남한이 자신의 독재권력을 유지시켜주고 안정화시켜주는
도구의 역할이외는 바라는것이 없구,그 도구의 역할을 충실해주던,지난 10년간의 정권이 바껴 새정부가
들어서자,자신이 부귀영화를 누릴수있는 권력을위한 도구역할을 해줄수없음을 알구,오래되구 허름해진
줄이라두 잡아야하기에 줄을 중국으로 바꿔타서 독재권력을 유지만 시켜준다면 모든것을 팔아바치겠다는
의사를 표현한것으로 볼수있다.
조선시대의 로또 호랑이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재미있는 사건과이야기들이 많다.조선시대에 로또라구 볼수있는 호랑이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자.
태종5년(1405년) 호랑이가 궁궐의 근정전에 돌아다녔다.호랑이가 엄격한 사람의 통제를받는 궁궐안까지 침입해서 돌아다닐정도면,허허벌판이나 경계병이없는 일반백성들이 사는 주거지는 쉽게돌아다니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것이다.
비디오테이프에서 나왔던 어린아이의 울음두 그치게만든다는 호환마마 이런구절이 말장난이아니라 조선시대의 민중의 삶속 현실에서 직접적인 공포그자체였음을 알수가있다.
저녁 으쓱한 시간에 싸립문밖에 혀를 내름두르고,사람을 잡아먹으려구 집문밖을 돌아다니는
호랑이문제는 단순한 호기심차원이아니라,백성의 삶과연결된 조선시대의 정권안위의 차원이었다.
이런현실이다보니,다음과 같은구절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성종2년(1471년) 군인가운데 호랑이에게 창이나 화살을 맨먼저 맞힌자에게는 휴가 50일을주고,
두번째루 맞힌자에게는 휴가 45일을 주고.......
세조9년(1463년) 호랑이를 잡는 궁술에 능한 권이(權耳)라는 사람에게 겸사복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세조14년(1468년)
악한 짐승(호랑이)을 잡아 죽이는것은 상줄 만하니, 그것을 논공(論功)하여 아뢰라
몇가지 구절만을 살펴보더라두,조선시대에서 호랑이를 잘잡아 죽이는것은 휴가를 얻는
길일뿐만아니라 벼슬까지두 얻을수있구, 말이나 비단등의 물질적혜택두 아울러 상으로
받을수있는 로또였다.
이와는 반대루 호랑이문제를 잘대처하지못하는경우는 잘나가던 벼슬두 댕강되어
파직당하는 사람두있었으니
중종26년(1531년) 호랑이를 잡을때 임무를 소홀히한 대장 김호를 파직하였다.
500년이 넘는 조선시대동안 호랑이에 대한 피해인 호환문제는 어느왕때만 발생하는
일부인 20-30년의 단기간의 문제가아니라 조선시대내내 고질적인문제였다는점이다.
세계각국에는 야생호랑이들이 사는나라들두 많다.그러나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동물원이
아니라,우리나라에서 야생호랑이가 멸종된것이 슬픈일이니 복원하여 지리산이나 설악산,
한라산등에 야생호랑이를 풀어논다는 정책을 나라에서 시행한다면 과연? 현실적면에서
그 슬픔만으로 국민들이 호환의 문제를 받아드리겠는가?
세종의 미스테리
세종대왕은 조선시대에 성군으로 알려져있다.그러나 세종의 무슨병으로 죽었는지는 역사의미스테리루 남아있다.무려 22명의 자식을 둘만큼 왕성한 정력을가진 왕이었음을 알수가 있는데,역사에 기록된 병의 증상은,피부에 궤양이 있었음을 알수있구,단순히 피로하여 걸리는 대상포진이라는 설두있구,매독이나 임질등의 성병에 걸려죽었다는 설두있다.
매독등이 성병은 유전이되기에,이후 세종의 아들이나 손자들이 어떠한 모습을 보여는지살펴보면,단순한 대상포진인지,아니면 설로만 나도는 성병에 걸려죽은것인지 유추해볼수가 있겠다.
세종의 왕위를 이어받은것은 문종인데 문종은 젊은나이에 재위2년못되어죽었고,같은 형제인
세조또한 왕위에 올랐으나,몸에 피고름이 생기는 종양으로 재위기간 고생하다가 죽은기록이
보인다.또한 세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예종또한 재위1년을 채우지못하구 19살이 나이에
죽었고,예종의 아들은 4살정도쯤에 죽었음을 역사는 기록해주고있다.
세종-문종-세조-예종-손자에 이르는 가계도에서 피부궤양이나 조기에 죽은것을보면
체질적으로 무엇인가 유전되어진병으로 죽지않았나 유추해볼수가있다.
태종의 자신이 죽은후 상중에두,세종이 육류가 없으면 밥을 안먹으니 고기를 먹게하라는
유훈을 남긴것을보면,세종은 오늘날에 만원짜리 보여주는 핸섬하구 날씬한 얼굴체형보다는
비대한체격을가졌음을 유추해볼수가있다.세종의 초상화는 김기창화백이 그려다구
알려져있다.실제 세종대왕의 얼굴은 우리가 지폐로보는 핸섬한 얼굴이아닌 전혀 다른
못생긴 비대한 몸집을한 모습일수있다는것이다.
그림상식중에 잘못된개념이,나쁜사람은 얼굴이못생기구,괴물처럼생기게그리구 좋은사람은
이쁘구,잘생기게그리는데,현실과 동떨어진 그림표현법이라구 볼수있다. 나쁜짓잘하는 사람중에두
얼굴이 잘생기거나 이쁘사람이 많다는것이구,훌륭한 사람들중에두 몰골이 별볼이없는 사람두
많다는것이다.무조건 훌륭한 사람은 미남.미녀로만 그리는것은 잘못된 그림이라구 볼수있다.
역사드라마에서 꼭나오는 대사
팽창하는 중국군의 어제와오늘,그리구 우리나라의 정예군이 어디일까,궁금증이 생겼다.그래서 찾아봤는데,오늘날의 현대전에서두,아무리 공중전이 강하다해두,직접침투제압하는,해군과상륙군이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실전경험을 바탕으로,최강의 인적구성으로 이루어진 상륙군은 해병대루 볼수있다.
중국이 한반도의 영토에 비상사태이든 뭐든,압록강을 건너 진격했을경우에는,길림,요녕,흑룡강성의 허리를 끊어 고토회복과 더불어 전멸시키려면 신속상륙군으로 적후방을 끊어야하는데 생각나는 군대는 해병대이다.
중국상륙군의 옛날모습과 오늘날의 모습,한국상륙군인 해병대의 옛날모습과 오늘날의 모습의
사진을 찾아보았다.
옛날의 한국상륙군인 해병대의 사진
오늘날의 중국상륙군인 중국군의 사진
오늘날 우리나라의 해병대사진
오늘날 중국군의 상륙작전사진
오늘날 해병대의 상륙작전사진
우리나라의 역사드라마에서 전투중에 대장군들이 꼭하는 대사가있는데
"한놈두 살려두지마라"
역사기록을 살펴봤을때두,우리나라군대와 적이 싸웠을경우는 전멸을 시켰다는 기록이부가
되는걸보면,드라마대사에서만 나오는 허튼소리는 아니라는것이다.
"한놈두 살려두지마라" 이말이 얼마나 무서운말인지
우리나라군대와 싸워보면 느낄수있다는것이다.
풀한포기조차 다뽑아버리며,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군대조차
40년을 싸우고도,학을띠며 강화를 택할정도인 나라가 우리나라백성들이었음
오늘밤에~
오늘밤,그대 모습이 자꾸 내곁에 다가와, 그만 흐르는 눈물 감출 수 없어 ,온통 베게만 적시었네,오늘밤
웬일일까 ,잠못 이루겠네,하얀 종이위에 쓰여진 그대의 글씨,이젠 안녕이라는 그대의 말이였나,
오늘밤,두눈가에 눈물 흐르는데-규리-오늘밤.
1231년 9월 세계를 제패한 몽고군이,고려를 치기위하여 전사상 유래없는 잔혹한 몽골기병 3만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하였다.이당시 몽골기병 3만은,당나라군대 300만명보다 더 강력한군대라구 볼수있수있으며
몽골이 러시아정벌에 가동한 기병이 3만명정도였던것을 보았을때,몽고기병 3만은 그당시 세계최강의
군대라구 볼수있었다.순수 몽골기병은 많아봐야 10만명정도를 유지할수있었던 몽고가 세계를 제패한
것을 보았을때,그 위력과 공포는 상당했을것이다.
중국두 망하구,러시아두 망하구,이슬람,헝가리,유럽등 몽고군이 가는곳마다,패망하지않은 나라가 없었다.
끝까지 저항한 나라는,몽고기병이 살아있는 생명은 풀한포기,돌하나 남기지않구 완전히 패망시켜버리는
그러한 몽고기병을 상대로 무려 30년간을 끝까지 항쟁하여,고려라는 나라의 국체를 지켜내었다.
이러한 끈질긴 항쟁은 세계전사에 드물뿐아니라,그렇게 저항한 나라를 온전히 국체를 보존하게
해준것두 징기스칸의 군대특성을 보았을때,특이한 사례라구 볼수가 있다.
이러한것은 몽골기병이 마음씨가 좋아서 그랬던것이 아니라,그에 맞서 강인한 항쟁의식을 보여주었기에
힘으로 일시적으로 굴복시킬수는 있어도,지배할수는 없는 민족임을 깨달았기에 그렇게 한것이다.
1231년 9월 훗날 승장인 김윤후에게 죽임을 당하는 몽고기병 총대장 살리타이의 몽골 3만기병이
고려를 침략하였다.이때 고려군의 항쟁의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준것이 귀주성전투라구 볼수가있다.
몽골기병이 빠른기동력으로 방어거점인 성들을 함락시키구,저항하는 성들은,엄청난 살육을 전개하면서
여러부대로 나누어 일부는 개경으로 진격하구,부대중 1만기병을 이끈 살리타이군이 귀주성에 당도하였는데,
이때 귀주성에는 4-5천명의 고려군이 있었다.그중에 대부분이농사를 짓다가,군인으로 변한 농민군들이
대부분이었기에,적의 수적우위뿐만아니라,저항하면 모두살육했다는 그러한 소식들을 들었던 몽골기병들이
성을 에워쌓기에,공포심은 극도로 달했다구 볼수가 있다.
귀주성에는 김경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싸워보기두전에,성내의 사기가 꺽인걸보구,결사대를 규합하여
오히려,성문을 열구나가,기습적으로 몽골군을 공격하였는데,뜻밖의 공격을 받은 몽골군은 의외의 반격에
적전분열이 되었다.전투에서는 숫적우위가아니라,죽기살기루 달려드는 사람한테는 몽골기병두,어쩔수
없다는점이다.수십명의 기병으로,수천의 몽골기병을 치러 성밖으로 나갔다는 자체가,대단한 정신력이라
아니할수가 없다.이렇게 서전에서 상대방의 기를 꺽어 당당히 싸워이기는걸본 성내의 군민들의 사기두
올라가게 되었다.
9월 초순에 시작된 귀주성전투가 10월이 넘어가도록,함락시키지 못하자,몽고군의 피해두 많아졌기에
몽고군은 성의 함락되면,모두 도륙하기전에,항복하라구,사자를 보내었지만,성내의 고려군은
사자의 목을 베어 결사항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몽고군이 사력을 다하여,발석차를 이용하여 돌을 날려 성벽을 부수면,성내의 군민은 혼연일체가
되어,무너진곳을 다시쌓구,여의치않으면,몸으로 성벽을 대신하여 막으면서 11월이 다가도록 항전을
하였다.성안의 화살과 무기가 다떨어지면,주위에있는 돌을가지구 싸웠구,돌마져없으면,끊는물을 만들어
무기로 사용할만큼 이미 함락되두 모두죽을것이구,가만히 있어두 죽을것이구,이판사판인 상황이었다.
성내의 항전의 결사적이었기에,몽고군은 몽고와 고려가 강화협상이 진행되구있으므로,항복하라는
고려왕실의 항복권고사절을 동행하여 보내었으나,성안에 군민은 죽임은 있어두,항복은없다라는 자세를
취하였다.해를 넘겨 1232년이 되어,몽고와 고려의 강화협상이 타결되었어두,귀주성이 항복하지않자
몽고군은 고려정부에 귀주성이 항복하지않으면,강화협상두 끝장이라는 협박과함께,귀주성에 대한
총공격을 단행하였다.
몽고군이,강화협상이 타결되었음에두,항복을 강요하는 이유는,귀주성은 거란의 30만대군이 고려의
수도인,개경까지 깊숙히 침입했다가,퇴각하던중,강감찬장군에 의하여,귀주에서 거란군이 퇴로가
막혀 몰살당한 역사적기록이 있었다.이러한 사실을 잘알구있는,몽고군이였기에,안전한 퇴로를
확보하기위해서두,강화협상타결은 고사하구,고려왕조의 어명조차거부하는 귀주성의 군민은
목에 가시일수밖에 없었다.귀주성에 발이묶여 더이상 전진하지못한 살리타이는,개경근처까지
깊숙히 진입한 타부대를 동원하여,고려왕조를 위협하구,귀주성이 항복을하지않으면,강화협상은
무효구,재차 공격하겠다는 협박을 하므로,고려왕조에서는 다시 어명을 지닌 관리를 귀주성에
몽고군과함께 보내어,항복하도록 권고하였다.
성안에 당도한 정부관리의 항복권고에두,성안의 군민은 결사항전의 자세를 굽히지 않으므로
어명을 받든,정부관리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므로,자결하려구하였다.이에 성안의 책임자가
항복을 받아드려,강화를할수밖에없는 나라의 처지를 이해하구,출성하여 항복을 결정하자
성안의 남.녀노소가 울지않는사람이 없었다.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당한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달했으나,어쩔수없이,몽고군의 안전한
퇴각을 바라볼수밖에없었다.이후에두 30년이 넘는기간동안,몽고와 고려의 전쟁은 지속되어지만
전쟁기간이 길어질수록,항쟁의식은 더욱깊어졌으며,이러한 백성들의 항쟁의식은 나라의 국체를
지켜내는 원동력이 되었을뿐만아니라,원의 부마국으로,원황실의 공주를 고려의 왕의 아내로
맞이하는 제도가 생긴것두,고려인이 중국한족보다,높은계급을 부여받은것두,작지만 굴하지않는
민족성에 기인한것이었다.
원나라인 몽고황실은 몽고족이아니면 황제나 황후가 될수없었는데,원황실에서
몽고족이아니면서 황후가될수없는데두,또한 유일무일하게 이민족이면서 원황실의 황후가된것두
우리나라의 기황후가 유일했다.세계를 제패했던 몽고가,유독 자그만한 나라인 우리나라만큼은,신경을
많이 썼다는걸 알수가있다.우리나라가 몽고에 등돌리자,우연인지몰라두.원나라가 망한걸보면
우리나라는 작지만,강대국의 틈바구니속에서두,오뚝이처럼 살아남아,캐스팅보트를 쥐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음을 알수가있다.우리나라를 만만히 봤다가는,세계를 제패한 국가두 꼼작없이 덕분에
망한다는 수많은 역사기록이 보여주고있다.
우리나라의 민족성
우리나라의 역사속에 면면히 흘러왔던 국민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한다.
우리나라 백성들의 불의한 외세에대하여
맞써싸우는 정신은 세계에서 그유래를 찾기어려울 정도로 강인하다.
고구려가 망해두,끝까지,성에 남아 항전했었다.이러한 민족성은,세계를 재패한
몽고군에대하여두,세계전사에 유일무일한 30년이상을 맞서싸워 나라의 국체를
지키는 밑바탕이 되었다.
몽고와의 항전당시두,지도층들은 자신의영달과 안녕을위하여,화친을 주장할때두
우리나라의 왕과조정관료가 나서서 성을버리구 항복을 하라구,어명이 내렸다해
두,끝까지,항복하지않구 저항했으며,아무리 대국이라할지라두,싸워보지않구,민족의 자존을 버리지않았던
강한 정신력을 가지구있었다.비록 국제정세와 동떨어져,대의명분을 고집하여,백성들의 도탄에 빠진적두
있었지만,이러한 기상은 이민족의 침략에 끝까지 맞서서 국체를 유지할수있는 원동력두 되었다.
몽고나,수당,청태종등 세계를 제패했던 국가들조차도,이러한 특이한 민족성을 전투중에 깨달았기에
힘으로 일시적으로 굴복시킬수는 있어도,지배할수는없는 나라라는 인식을하게되었다.
왕을 사로잡거나,죽이면 이기는게 옛날의 전쟁이었으나,우리나라는 정반대루,나라의 위급상황에서는
왕을 죽였다해두,오히려 백성들이 더강한 항전의식으로 저항했으며,하물며,항복하라구 지도층이 나서서
권해두,끝까지 항전하였던것이다.우리나라의 국체는 왕의것이아니라,백성의 것이었다.
우리나라만큼,북한또한 우리나라의 일부이기에,세계를 제패한 국가들과 다 싸워본 국가는 우리나라가
유일무일하다.과거역사나 현대사나 우리나라는 작지만,굴하지 않았으며,국체를 유지하는데는,혼연일체가
되는 민족성을 가지구있다.
통일한국은,우리선조들이 살았던 간도에대한 권리는 역사이래,한민족의 터전이었다.2,000년전에 자신의
선조가 살던땅이라구,2,000년후에 그곳에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민족보다못하지않다.
간도는 우리나라땅이다,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이 신라의 경주에 내려온것두아니며,고구려의 기원인 고조선
이전부터,간도는 우리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대한민국을 지구에서 지우지않는한,간도는 반드시 찾아와야할
대의명분을 가진곳이다.광개토태왕,을지문덕,장수왕,그리고 수많은 선조들의 무덤들이있는 땅이 어째서 중국
의 권리가 있단말인가,지구에서 한민족이 사라지지않는한,언젠가는 반드시 고토를 회복할것이다.
동북공정이다 뭐다하지만,북한의 혼란한틈을 타 북한지역을 중국이 지배할수있다는 생각은,아주 얼빠진
망상일뿐이며,그러한 시도가있는순간 공중분해되는것은 중국이다.강이식장군이 말한,무례한 국서에는
답서가 아니라 칼로 화답해야한다는 정신이 우리나라이다.중국이세계의 강대국 어쩌구 폼잡지만,역사이래루
우리나라는 세계를 다지배한 어떤국가가 위협한다해두,국체에 관한문제는 혼연일체가 되어 싸웠다.
진실은 하나다.티벳은 티벳인의 땅이며,내몽고는 몽골의 땅이며,간도는 대한민국의 땅이다,
아무리 무슨공정이다하면서 역사를 날조한다구해두,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온 민족이
사라지지않는한 바꿀수없다.
은장도라면 이정도는 돼야
지름: 65cm, 칼잡이:25cm,칼날:40cm
칼의 용도:나무짜르기,여인들의 호신용 은장도
명칭:(?)
길다란 휘어진 칼처럼 생겼지만,베는용도가 아닌,
물건을 두동강내는역할을 했으며,여인들의 호신용칼로써,
머리맡이나,이불밑에 두었던 물건.
실생활에서는 나무를 짜르는데 사용되어졌지만,
여인들의 호신용이나,악몽이나 기타 안좋은꿈을 물리치는
의미의 칼로두 사용되어졌다.
칼의 위력
베어지는게 약하나,내리치면 베어지는정도가
아니라,절단이 되어버린다.작은은장도는 보기에
쪼메하게 생겨서,호신용보다는 장식용으로 보이지만
이칼은,호신용으로 손에 들려있는것자체가 무섭게
보이며 실제위력으로도 가히 은장도의 대부임.
쪼메한 은장도같이,웃기는장식용이 아니라,최소한 은장도의
진정한 역할을할려면,이정도는 되야.......(づ ̄ ³ ̄)づ
궁녀들의 삶은 어떠했을가
궁녀들의 삶은 어떠했을가?
그것을 알기전에 먼저 궁녀의 품계에 대하여 먼저알아보자
정1품 : 빈, 종1품 : 귀인 정2품 : 소의 종2품 : 숙의 정3품 : 소용
종3품 : 숙용 정4품 : 소원 종4품 : 숙원 정5품 : 상궁 종5품 : 상복
정6품 : 상침 종6품 : 상기 정7품 : 전빈 종7품 : 전설 정8품 : 전찬
종8품 : 전등 정9품 : 주궁 종9품 : 주치
오늘날 우리나라의 공무원의 계급또한 품이 급으로 바뀌었을뿐
1급에서 9급까지 존재한다.
자신의 본관을 나타내는 족보책에 공무원이 사무관 5급이상의 경력을
지냈다면 족보에 기록하듯이,궁녀의 계급또한 정5품을 기준으로
정5품아래는 궁관이라구하여 우리가 흔히 드라마에서 들을수있는
후궁의 신분은 아니었다.
종4품이상부터가 궁녀는 후궁으로 불렸으며,상궁과 후궁은
한끗발차이 벼슬차이었지만,오늘날 공무원의 계급에서 6급주사와
5급 사무관이차이처럼,그대우와 위치가 확실하게 차이가 났다.
후궁은 왕과 눈이맞은 궁녀만이 후궁이 될수있었으며
눈이 맞지않는 궁녀중에 가장높은 궁녀가 정5품의 품계를
가진 상궁이었다.
궁녀의 신분은 아니었지만,궁궐내에서 살지는 않구
출퇴근하면서 궁궐내의 청소일을 도와주던 여자를 무수리라구
했는데,무수리는 몽골어로 그뜻은 소녀라는 의미였다.
무수리 출신중에 가장성공한 여자로는 영조의 어머니인
최무수리가 있다.
궁녀의 신분중에 가장성공한 여자로는 한동안
왕비의 지위를 얻었던 희빈 장씨로 불린 여자인
장희빈이라구 볼수가 있으나,그러나,궁녀로서 이보다
더한 지위를 가진분이 궁녀의 역사상 딱 1분이 전후후무하게
존재하구있다.
종3품 숙용이라는 품계를 얻은 궁녀중에 (오늘날 공무원
계급체계로 보면 행정기관의 국장급의 벼슬이다.)
가장 유명한 궁녀는 장녹수라는 여인이 있었다.
궁녀의 삶은 품계가 주어졌으므로,오늘날의 공무원들의 월급처럼
녹봉을 품계에 따라 받을수 있었으나,후궁인 궁녀와
그렇지 않은 상궁이하의 궁녀는 왕의 승은을 입었냐
안입었냐의 한끗발차이로 대우와 생활수준이 확달라졌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궁녀의 역사상,전후후무한
품계를 가진분이 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숙명여학교를 설립한 嚴純獻皇貴妃라는 분이다.
장희빈이후로 법으로 후궁은 왕비가 될수없게
되었으나,엄순헌황귀비는 순헌이라는 시호를 받았을뿐만아니라
궁녀인 여자에게는 이름이 없었으나,이분은 선영이라는
개인적 이름까지 있으셧고,성은 엄씨였다.
아무리 찾아봐두,정1품인 빈에서 종9품인 주치까지
비(妃)라는 왕비 비자를 쓰는 단어가 쓰인 궁녀의 품계는 없다.
거기다 황(皇)자가 더해져,황귀비라니,궁녀로서 전후후무한
품계를 받으신분이다.이러한 칭호의 밑바탕에는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이 생모였기에,궁녀의 한계를 초월해버린
비(妃)라는 명칭이 주어진것으로 추정할수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영조의 어머니인 최무수리라는
분은 아들이 비롯 왕이되었으나,궁녀가 아닌 천한 무수리
출신으로 인하여,영조가 비록 왕이었으나,자신의 어머니를
비로 높여드릴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무수리와 궁녀의 차이는 가깝고도 먼 신분이
차이가 존재하였음을 알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적여성교육에 선구자적 역할을
한 엄순헌황귀비의 파란만장한 삶과 행적은 우리나라의
여성의 발자취중에 일반인에게 잘알려지지 않았구 그에 대한
평가또한 미비하지만.궁녀중에 이분만큼 전후후무한 기록과
발자취를 남긴분은 없었다.
왜 그러셨어요?
고구려 19대왕인 광개토대왕이 아들인
고구려 20대 장수왕은 394년에서-491년 100세 가까이 사신분이구
재위기간이 413년에서-491년이므로,79년을 왕으로 재위를
하신분이다.이분은 부왕인 광개토대왕이 젊은나이로 승하하자
왕위를 이어받아 오랜기간 재위를 하셨다.
그런데,이분이 아들이 조다라는분인데.
우리가 어떤일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을 조다같은것
하는걸보면,조다라는분은 아버지인 장수왕이 79년을
재위하는바람에,왕이 되어보지두 못하구,도중에 죽었다.
장수왕은 부왕에게 젊은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아 오랜재위를
했지만,그와는 반대로,자식에게는 절대루 양위함이 없이
죽는 마지막순간까지,권력을 향유하여 훗날,자식이 조다같은
놈이라는 욕의 주인공이 되게하는 역할을 한 측면두 있으신분이다.
이런케이스를 찾아보면,영조라는분두 있습니다.
조선의 21대 왕인 영조는 1694-1776년으로 80여세 정도사신분인데
재위기간이 1724-1776년이므로 무려,52년을 왕으로 재위하셨다.
이분의 아들인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사도세자)또한 왕위를
이어받지 못하구,도중에 죽습니다.
조다왕이나,장조는 공통적으로 왕위재위기간이
태자나 세자에게 이어질수없을만큼 부왕이
오랜기간동안에 왕위에 있었다는것을 알수있습니다.
권력이란것은 이처럼,늙어죽는 마지막순간까지두 향유하구
싶어하는것인지는 몰라두,어느정도 재위하구,자식에게
물려줬다면,조다나 장조가 불행한 삶을 살다가,한맺힌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것입니다.
단지 부왕이 권력이양을 하지않아,조다라구 후세에
까지 안좋은 의미로 사용되어지는 것과,뒤주에 갇혀
온갖 나쁜사람으로 기록되어지구 죽은댓가로 역사에는
오랜재위기간으로 자랑으로 기록되어질지 모르지만
권력을 죽는순간까지 향후하려는 욕심이 자리한결과로
자식이 불행진 케이스입니다.
그러나,이와는 다르게,홍익인간에 맞는 백성의 안위와
평안을 준 위대한 임금으로 기록되어지는 세종대왕은
위에 권력욕에 물들어,양위를 하지않구,자식이 못난것이라구
해야 죽을때까지 권력을 놓지않을수 있을것이기에,죽는순간까지
재위한결과 자식이 불행한 결과를 만든왕들에 비하여,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은,오히려,자신이 막강한 권력을
유지할수있는 재위기간이었는데두,오히려 자식에게 왕위를
양위하므로서
오늘날 우리가 위대한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이
되게하는 터전이 되게해준걸보면,후세에 자식이 욕의 대명사나
사악한 사람으로 기록되어지는 자식의 불행이 오히려 권력의
무상함에 있는것일때두 있다는것이다.
장녹수에 대하여
사연담아ㅡ어드메냐,
부귀도 영화도 구름인양 간곳없고,
청산에ㅡ홀로 우는가....
우리나라의 역사속에서 발자취를
남겨진 이름을 가진 여인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특이하게,천민의 신분으로 종3품
숙용의 벼슬에 이르렀고,자신에게 가혹한
운명과 숙명을 지게 만들었던 위선자적인 권문세족들을
비웃고,조롱거리를 만들어,자신의 발아래 무릎꾾게 만들
었던 여자가 장녹수라는 분이다.
장희빈두 있지만,그래두,이분은 처녀의 신분으로
왕비까지 되신분이었으나,장녹수라는분은 노비의 남편을
두고,자신의 신분또한 노비였기에,반상제도가 존재
했던 조선시대에 이분이 태어난 환경은 최악의
조건이었다구 볼수있다.
이분에 대한 역사드라마가 만들어지기두 했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것처럼,폭군 연산군을
만드는데 일조를 한 여인으로 기록되어,목이베이는
참형에 처해졌지만,
그러나,이분의 삶은 그시대에 여자로서 숙명과
환경의 운명을 이겨낸 입지전적 인물이다.
사람에게 교훈을 주는 삶은 역사기록에 나쁘다
기록되어 졌다구,그것이 진실은 아니며,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는것이다.
장녹수라는 인물은 시대의 희생양이며
연산군의 실정을 일으키게만든것은 연산군과 그시대의
주류인 권문세족들이었지만,모든책임을 여자인
장녹수에게 뒤집어 씌어,책임을 회피한 조선시대의
정쟁에 몰두했던,비겁한 권문세족들에게 있으며
또한 역사기록또한 그런 비굴한 권문세족들에
의하여 기록되어졌다.
외세를 이용하여 백성들의 삶과 생명을 무참하게
빼앗았으며,기아와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외면하구
무능력하구 부패한 일가친족을 중용하여,백성들의 고혈을 뽑아먹는
탐관오리의 시대상을 만든 사람을 철의 여인 어쩌구 미화시킨
명성황후를 만들어낸걸 보면,역사드라마라구 다 좋은영향을
주는게 아님을 알수있으며,명성황후를 삶의 모델로 배우느니 차라리
kungmi는 장녹수라는 분의 삶이 배울게 많다구생각한다.
광개토태왕 첫회 시청소감
tv를 거이시청하지 않는,특히 드라마는 전혀
관심없는 kungmi이지만 태왕사신기라는 특별한 작품이
방송된다구해서,티브리스인 kungmi두 tv드라마에 관심을
갖구 시청해보았다.
태왕사신기 첫회방송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은 분노한 남쪽을
지키는 주작과 그에 따라 나타나는 사신도에서
나오는 동물들의 모습이었구,그장면에서 나온
kungmi가 개인적으로 감동있게봤던 무사쥬베이의
쥬베이와 카케로의 이별장면이 오버랩되던데
암튼 이부분장면에서 뭔가 후일에 피바람을 예시하는것
같았다..
드라마이지만,24편의 좋은영화를 감상할수있겠다는
생각이들었구.반만년 역사위에 내려온 홍익인간의 이념은
우리나라의 개국이념이기에 아무리 자주들어두,감동이다.
세세하게보면 뭔이야기는 잘모르겠구,
전체적으로보면,우리나라의 개국신화인 호랑이와 곰
그리고 단군을 묘사하는것같은데,
세세한 부분에서는 뭔이야기인지 진부해보이지만
전체적의 모양에서는 개국신화를 이해한다면
흐름을 이해할수있게 보였다.
연3일동안 연속해서 방송해준다구 했으니가요
최소한 3회분정도는보구,좋은 드라마인지
아니면, 티브리스인 kungmi의 본래모습으로
돌아갈지 생각해봐야겠어요.
태왕사신기 주변모습
대문에 글자가 적혀있는거보면 귀족들이 사는 집건물일듯
이곳은 저잣거리내지,일반인들이 사는 건물들이 아닐가 추측(?)
견우가 직녀가 만나는 다리인가?^^;; 나중에 티브이를 보면
어떤사람들이 사는 배경인지 알수있을듯.......
오작교 비슷한것 밑에 해자인가,수로인가? 물이 없는걸보면 비상시
적이 침입했을때 도망가는 비상구가 아닐가하구 생각(ノ^O^)ノ
주위에 소나무는 무엇인지 알겠는데,중간에 괴물의 뿔처럼 튀어나온 거대한 나무
저것이 용도는 나무곳곳에 뿔이 달리거보면,병사들의 옷걸이(?)
아니라면 나무에 저런 쇠꼬챙이같은 뿔이 튀어나올일이 무에 있을가(づ ̄ ³ ̄)づ
태왕사신기 무엇에 쓰는 물건일가?
얼굴은 도깨비같기두하구, 머리카락을 보면 사람얼굴 같기두하구,
몸을 보면 네발인거보니 무릎꾸른 사람상(?).......
절에 가면 있는 해우소같기두하구,사람을 가둬두는 감옥같기두 하구
그것도 아니면 탈곡하는 물레방아간인가?.......
건물안 바닥이 거울처럼 보일정도로 반짝,반짝 스케이트를 타두 될듯한데
소화기는 알겠는데,널브러져있는 저것은 무엇에 쓰던 물건인고?.......
광개토태왕비가 414년에 돌로 만들어졌는데,1,600년이 흘러었도 존재하는데
돌무더기가 저리 많을정도면, 건물에 나무가 아니라 돌이 엄청나게 들어간듯보여
천년이상은 끄덕없이 튼튼할듯한데, 돌무더기 사이로 건물에서 튀어나온 거북선
머리같은 저것은 무엇에 쓰는 .......배수구(?) 배수구라면 첫번째 용대가리같은
것은 물이 나오는데,왼쪽끝에 있는것은 저것은 먼산만 바라보네요???????
태왕사신기 건물들
성문밑에서 작아지는 사람의 모습
크기는 서울의 경복궁보다 더높아 보였다.
그리고 저 성문너머로 다리밑으로 강이 흐르는 다리가 있다는거,
인간은 위대하다(?) 초원위에 지어진 궁궐다리밑으로 흐르는 강을 만들었다.
작은폭포두 있던데,흐르는 강물은 깨끗했다.
다리위에서 보면,성과 강이 어울어져 한폭의 그림같다.
다리하나하나의 조형물이 무늬하나하나 섬세하게 세트가 아니라
진짜 다리로 이용될 정도로 잘만들었다.
태왕사신기 궁궐밖으로는 주차하기 편하도록 넓다란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to be contiue.......
태왕사신기
키가 컸으며,덕과 지혜를 갖춘 대제였다.
아래로는 백성을 사랑하여,민생을 돌봐 태평성대를 이끌
었으며,고구려라는 국가의 자존과 존엄을 이룩하여 그의
위대한 이름은 사해에 이르렀다.
연호는 영락이라했으며,374년에 태어나 18세나이인
391년에 제위에 올라, 413년 39세의 나이로 요절할때까지
22년간 다스렸으며,그의아들 거련인 장수왕이 414년에
우리나라의 고토인 간도지역에 거대한 석비인 광개토태왕비를
세워 그의 덕과업적을 기리었다.
자주와 존엄을 국가의 모토로한 광개토태왕은
외세와 결탁하여,민족을 분열하거나 이간질
하는 자에게는 결단코 왕이라할지라도 용서치
않았으며,이러한 정신은 그의 아들 장수왕에까지
이어져,중국과 결탁하여,민족을 이간질하려한 백제의
개로왕을 잡아 쳐죽이게된다.
미래의 대한민국의 나아가야할 프론티어정신은
고구려의 기상과 자존의 정신이며,그 핵심에는
광개토태왕이 위치하구 있다.
오늘날,그의 무덤인 태왕릉과 능비는 중국과
일본의 불법적인 간도협약에 의하여 중국땅에 포함되어
조상의 무덤을 남의나라에서 관리하게하는 불손한 후손이
되어있지만,
그의 정신과 기상만은 오늘날의 한민족의 피속에 도도한
강처럼 흘러왔다.태왕사신기라는 역사드라마는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라는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피는 물보다 진하다"
라는 본능적인 한민족의 핏속에 흐르는 유구한 역사의식이 깨어나는
뜨거운 함성인 것이다.
고구려의 기상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597년
수나라의 황제 수양제는 고구려에 다음과 같은류의
외교문서를 보낸다.
"고구려왕이 직접 나에게로와 두손모아 삭삭빌던지,아니면
지난세월 행동은 잘못했으니,수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살겠다구
맹세하는 글을 올려라,말을 듣지않으면 300만대군으로
고구려라는 나라를 지구상에서 없애버리겠다"
이러한 국서를 본 사람중에 강이식장군이 있었으니
그가 한말은 고구려의 자존과 기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내용이었다.
"이런 무례한 외교문서에는 글이아니라 칼로 화답해주겠다"
그이후,고구려를 침입한 수나라의 300만대군은 전멸을 당하여,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가 망하게된 계기가 되었구,무례한 외교문서를
보냈던 수양제의 말로는 부하의 칼에의하여 죽임을 당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