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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仁祖 15년 1월2일(임인) 條
홍서봉·김신국·이경직 등을 오랑캐 진영에 파견하였다. 홍서봉 등이 한의 글을 받아 되돌아왔는데, 그 글에,“대청국(大淸國)의 관온 인성 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朝鮮)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고유(誥諭)한다. 짐(朕)이 이번에 정벌하러 온 것은 원래 죽이기를 좋아하고 얻기를 탐해서가 아니다. 본래는 늘 서로 화친하려고 했는데, 그대 나라의 군신(君臣)이 먼저 불화의 단서를 야기시켰기 때문이다.짐은 그대 나라와 그 동안 털끝만큼도 원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대 나라가 기미년1366) 에 명나라와 서로 협력해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해쳤다. 짐은 그래도 이웃 나라와 지내는 도리를 온전히 하려고 경솔하게 전쟁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동(遼東)을 얻고 난 뒤로 그대 나라가 다시 명나라를 도와 우리의 도망병들을 불러들여 명나라에 바치는가 하면 다시 저 사람들을 그대의 지역에 수용하여 양식을 주며 우리를 치려고 협력하여 모의하였다. 그래서 짐이 한 번 크게 노여워하였으니, 정묘년1367) 에 의로운 군사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그대 나라는 병력이 강하거나 장수가 용맹스러워 우리 군사를 물리칠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짐은 생민이 도탄에 빠진 것을 보고 끝내 교린(交隣)의 도를 생각하여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우호를 돈독히 하고 돌아갔을 뿐이다.그런데 그 뒤 10년 동안 그대 나라 군신은 우리를 배반하고 도망한 이들을 받아들여 명나라에 바치고, 명나라 장수가 투항해 오면 군사를 일으켜 길을 막고 끊었으며, 우리의 구원병이 저들에게 갈 때에도 그대 나라의 군사가 대적하였으니, 이는 군사를 동원하게 된 단서가 또 그대 나라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우리를 침략하기 위해 배[船]를 요구했을 때는 그대 나라가 즉시 넘겨 주면서도 짐이 배를 요구하며 명나라를 정벌하려 할 때는 번번이 인색하게 굴면서 기꺼이 내어주지 않았으니, 이는 특별히 명나라를 도와 우리를 해치려고 도모한 것이다.그리고 우리 사신이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여 국서(國書)를 마침내 못보게 하였다. 그런데 짐의 사신이 우연히 그대 국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준 밀서(密書)를 얻었는데, 거기에 ‘정묘년 변란 때에는 임시로 속박됨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에 입각해 결단을 내렸으니 관문(關門)을 닫고 방비책을 가다듬을 것이며 여러 고을에 효유하여 충의로운 인사들이 각기 책략(策略)을 다하게 하라.’고 하였으며, 기타 내용은 모두 세기가 어렵다.짐이 이 때문에 특별히 의병을 일으켰는데, 그대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실로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단지 그대 나라의 군신이 스스로 너희 무리에게 재앙을 만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대들은 집에서 편히 생업을 즐길 것이요, 망령되게 스스로 도망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해를 당하는 일이 일체 없도록 하라.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며 도망하는 자는 반드시 사로잡고 성 안이나 초야에서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조금도 침해하지 않고 반드시 정중하게 대우할 것이다. 이를 그대 무리에게 유시하여 모두 알도록 하는 바이다.”하였다. 상이 즉시 대신 이하를 인견하고 이르기를,“앞으로의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 하겠는가?”하니, 홍서봉이 대답하기를,“저들이 이미 조유(詔諭)란 글자를 사용한 이상 회답을 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한(漢)나라 때에도 묵특의 편지에 회답하였으니, 오늘날에도 회답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하고, 김류가 아뢰기를,“회답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신하들에게 널리 물어 처리하소서.”하였다. 상이 각자 마음속의 생각을 진달하게 하였으나 모두 머뭇거리기만 하였다. 최명길이 아뢰기를,“신의 뜻은 영의정·좌의정과 다름이 없습니다.”하고, 김상헌이 아뢰기를,“지금 사죄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 노여움을 풀겠습니까. 끝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요청을 해 올 것입니다. 적서(賊書)를 삼군(三軍)에 반포해 보여주어 사기를 격려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고, 최명길이 아뢰기를,“한이 일단 나온 이상 대적하기가 더욱 어려운데, 대적할 경우 반드시 망하고 말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성첩(城堞)을 굳게 지키면서 속히 회답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김상헌은 답서의 방식을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극력 간하였는데, 최명길은 답서에 조선 국왕(朝鮮國王)이라고 칭하기를 청하고 홍서봉은 저쪽을 제형(帝兄)이라고 부르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지금이야말로 존망(存亡)이 달려 있는 위급한 때이다. 위로 종묘 사직이 있고 아래로 백성이 있으니 고담(高談)이나 하다가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하라. 예판은 여전히 고집만 부리지 말라.”하니, 김상헌이 아뢰기를,“이렇게 위급한 때를 당하여 신이 또한 무슨 마음으로 한갓 고담이나 하면서 존망을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신은 저 적의 뜻이 거짓으로 꾸미는 겉치레의 문자에 있지 않고 마침내는 반드시 따르기 어려운 말을 해올까 두렵습니다.”하였다. 이성구(李聖求)가 장유(張維)·최명길·이식(李植)으로 하여금 답서를 작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당시 비국 당상이 왕복하는 글을 소매에다 넣고 출납하였으므로 승지와 사관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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