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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대묘의 석실은 이미 도굴되어 텅 빈 상태이기에 그 안에 누가 안치되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어졌다. 그러나 강서대묘의 위치는 커다란 벌판위에 주위에 다른 커다란 봉분들이 혼재하여 있지 않은 특이한 의미 없는 봉분 3개만이 존재하는 형태로 시사 하는 바가 존재한다.  

고구려 특정 왕릉의 고분군이라면 여러 개의 무덤이 혼재해야 하나, 그 넓은 들판에 딱 지름이 50m에 이르는 강서대묘가 홀로 우뚝 솟아 있다는 것은 이 무덤자체가 평범한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았을 가망성이 상당히 높고 왕이 아닌 왕보다 더 우월한 힘을 가졌던 사람이 생전에 축조하여 사후에 묻힌 곳임을 알 수가 있다.  

강서대묘의 지상부분인 석실은 텅 빈 형태이지만 구조적 형태를 보았을 때 주인공과 부장품은 지상부분 석실에 매장된 게 아니라, 지하2층 규모로 지상석실아래에 2개의 다른 석실로 이루어 졌음을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지하2층 지상1층으로 이루어진 무덤형태로 조관해 볼 수가 있는데 중요한 것은 지상부분 석실바닥을 들어내 3m아래에 파보면 똑같은 형태의 석실이 존재하고, 다시 그 아래에 최종적인 석실이 위치함을 가르쳐주는 의미로 3이라는 허위인 봉분이 지상에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점이다.

강서대묘의 지상석실은 도굴에 대비하여 만들어졌고, 실제적으로는 그 아래에 수많은 부장품이 매장되었을 가망성을 강서대묘의 위치와 의미 없는 나머지 봉분이 조성된 이유일수가 있다는 점이다.

만약에 강서대묘의 지하에 도굴되지 않는 석실이 존재하고 매장 주체가 연개소문 같은 사람으로 그 주체와 부장품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면  

                    (연못과 관련 있는 인물을 의미하는 강서대묘 사신도)

 

오늘날 파편적으로 남아있는 고구려유물 들에 있어 그 존재만으로 획기적이며, 강서대묘의 거대한 크기와 위치를 고려해보면 출토될 고구려유물들의 가치는 자기, 세공품, 서적. 일상용품 등을 합하여 30조원이상의 가치도 모자랄 만큼에 해당한다.

통일이 된 후에 강서대묘의 텅 빈 지상석실 바닥 평면돌 부분들을 모두 들어낸 후 지하를 재 발굴할 가치가 충분한 유물이 강서대묘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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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다. 아시아선수 최초 1억 달러 돌파라는데 엄청나다. 저 정도 이익을 내려면 일반 대기업이 1조4천억 정도의 매출을 올리면 이익이 천4백억 정도 될 것인데 수천,수만명이 일해서 벌어들일 돈을 오로지 한사람이 야구로 벌어들이다니, 능력이 개쩐다.

ㅎㄷㄷ 진짜 우리나라 스포츠선수중에 레전드중에 최고의 레전드로 남을 추신수 이런 유의 인간이 한국인이라는 정말 자랑스럽다. 추 씨 문중에서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올 수 없는 거대한 인물이 탄생했군여.

추계추씨중에 중시조로 삼아 하나의 새로운 계파를 창조해도 될 만한 추 씨하면 추신수라는 인물이 떠오를만한 대단한 일을 하셨군요. 추신수가 이번에 야구에서 이룩한 업적은 한국의 스포츠역사 그리고 아시아의 스포츠역사에서 신기원을 쓴 선구자이며,

앞으로 100년간 다시 이러한 인물이 우리나라에서 나올 수 있는 가망성은 전혀 없다고 봐야할 만큼 추신수라는 인물은 대한민국의 위대하고, 멋지고, 대한민국 만세를 받을만한 이후로 다시 나올 수 없는 대한민국 스포츠계의 전후후무한 인물이라는 사실.

추신수 만세, 추 씨는 한국의 성씨의 자랑이며 추 씨 만세!! 한국인으로서 세계에 이름을 떨친 그 영광은 대통령만 받는 무궁화대훈장을 받아도 지나침이 없을 만한 오천년 대한민국의 역사의 자랑스러운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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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끼리 물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하되 벼슬의 높고 낮음에 의지하여 서로를 대하려 말라.” 연개소문의 일생의 철학을 표현하여 아들들에게 한 이 말의 의미는 형제끼리 화합하라는 의미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는 연개소문은 자신보다 지위와 혈통이 높은 왕이라 할지라도 단칼에 베어버리는 주관을 가졌기에, 세상에 절대적인 지위나 벼슬은 없다는 경험을 이야기 하고 세상사의 일을 함에 있어 오직 혈통과 벼슬에만 의지하여 맹종하는 인간은 반드시 단칼에 목이 베어지는 망조에 이르게 된다는 인생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물고기와 물은 서로에게 절대적인 존재이며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고, 형제 관계의 바탕은 서로의 지위나 세속적 부귀의 서열로 만들어 지지 않는 운명적인 핏줄을 바탕으로 하기에 서로를 대할 때 지위와 부귀로 다퉈 우열을 가리려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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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오천년 역사에 있어 전후후무한 주변강대국들에 자주적으로 하늘주권의 독립선언을 한 역사적인 날 2013년 12월8일 오후2:00

우리나라의 역사에 있어, 수문제의 무례한 외교문서에 항전하여 수나라를 망하게 한 역사기록이후, 한민족이 세계최강대국들을 상대로 우리나라의 하늘주권을 건드리면 어떠한 나라에게도 항전하겠다는 드넓은 기상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고구려기상과 혼을 간직한 민족임을 대내외에 선언한 첫발자국을 남겼다.

 

 

후세들에게 이러한 선언의 자주적 기상을 통하여, 세계를 이끌어 갈 한민족의 토대가 될 것은 분명하다. 중국의 무례한 외교적 선언의 두목과 선제적이며 능동적인 대처를 못한 역적이자, 간신에 해당하는 인물 3인방: 수나라 문제유형: 시진핑, 주중 한국대사: 권영세 외교부장관: 윤병세 

 

우리나라의 오천년 역사에 하늘독립주권을 선언한 기념비적인 선언으로 후세들에게 한민족의 기상을 보여준 첫발자국의 토대를 만든 역사적 인물 3인방: 한민족의 중흥: 박근혜, 청와대안보실장: 김장수 국방부장관: 김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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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우리나라의 윤병세 외교부장관을 간신이라고 불렀다는 언론기사를 보고는 일본에게 간신이면 우리나라에는 충신이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요즘 이어도를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으로 무례한 외교적 선언을 한 것을 보면서, 외교부수장으로서 간신이 맞는 거 같다. 서희 같은 국익을 위한 외교를 펼친 게 아니라, 일본에 대항하여 중국과 한국이 친구로서 서로 신뢰하고 외교문제에 있어 잘해보자는 국익을 잘 시행하는 줄 알았더니,

결론적으로 보면 일본의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에 치명적이고 매국적인 상황을 만든 외교적 결과를 만들어 냈으니, 간신의 정의인 나라를 불리하게하고 망하게 하는 역할인데, 결과적으로 그러한 방향의 외교가 되었다.

 

 

일본을 왕따 시켜 중국과 친밀적 외교관계를 추구했다면서, 뒤통수에 중국방공구역이란 칼을 맞는 사태를 만들지 않도록 외교의 균형추 방향제시를 잘 해야 할 외교부의 수장으로서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우리나라가 이어도의 방공구역확대를 확정하여 선포하고 난후에 결과적으로 중국의 뒤통수 맞아 국익에 해가 되게 한 그 책임을 져야할 간신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다.

중국 측은 시진핑이 출범하는 시기와 같은 시기인 박근혜정부가 시작되는 이미 1년 전부터 이어도의 중국방공구역설정을 추진했다는데 외교부의 수장으로 그러한 것도 전혀 예측 못하고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의 외교적 정보관리를 하여 국가가 뒤통수를 맞게 한 죄는 간신에 버금간다고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국익외교의 기본적 목표도 제대로 못한 것은 다른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 기타 국가들의 예를 보면 이러한 국익에 저해되는 외교 사안을 제대로 파악도 못하고 대처도 못했다면 그 나라에 주재했던 자국대사가 제일 먼저 소환되어 해임되는 것이 올바른 모습이었다.

중국의 뒤통수에 대하여 주중 한국대사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겠지만, 이어도에 대한 카디즈선언이 마무리된 후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분명하고 계속 그러한 인간을 대사로 남기는 것은 대중국외교에서 우리나라에 도움보다는 해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와 함께 그러한 무능한 대사를 교체시키고 우리나라의 외교적 방향 추를 올바르게 제시해야할 외교장관이라는 것이 결과적으로 국익에 반하는 뒤통수를 맞게 한 간신역할이 되었으니

 

나라의 외교를 단세포적으로 이끌어 제시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윤병세 외교장관이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일본으로부터 간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결과적으로 이어도의 중국방공구역설정의 역사자료에 있어 제대로 대처 못한 주중한국대사와 함께 간신은 어떠한 상황에서 들어야 하는 말인가에 대한 역사자료의 기록으로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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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의 문제가 한민족을 겁박하여 복종시키고자 수나라에 굴종하라는 외교적인 문서를 일방적으로 대내외 발표했을 때

고구려 병마원수 강이식장군이 나서서 “ 이러한 무례한 행위에 대해서는 칼로써 응답해야”라고 주장하며 결전을 주장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수나라와 나라의 흥망성쇠를 건 일대결전을 시작하게 되며, 임유관대첩으로 시작되어진 여. 수전쟁의 결과는 수나라는 통일왕조를 개국하여 1세기가 미치지 못하고 망해버리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중국이 공산화되어 집권한지 1세기에 미치지 못한 이때에 양탄일성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힘을 준비한 후 세계패권의 시작점으로 동아시아의 한국과 일본을 최우선적 타깃으로 설정하였다. 중국의 고대역사속에서 중국의 통일왕조의 패권의 시작과 완성의 시작은 주변국가중 한국과 일본을 굴복시키지 못하고는 제대로 된 통일왕조가 지속되어지지 못했다.

 

 

 

시진핑은 통일된 중국을 분열시켜 망하게 할 관상을 지녔다고 봤는데, 이번에 중국이 발표한 방공구역의 일방적 외교선언은 한국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외교적 선언임은 분명하고, 이러한 중국의 행위를 일련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한 인간이 시진핑임은 분명하다.

시진핑의 의도는 수나라의 문제가 중원의 통일왕국 만든 후 주변국에 패권의 영향력을 강요하고 복종시키려했던 전철과 전혀 다름이 없는 사고의식을 내포하고 있고, 똑같은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폭주한 중국의 패권행위의 종말이 무엇인지는 결국 알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떠한 전 세계를 지배한 강대국이 탄생한 경우에도 끝까지 저항하여 오천년의 국체를 백성의 손으로 지켜온 민족성을 오늘날까지 이어왔다. 옛날에는 강이식장군이 외쳤다면 오늘날에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시진핑과 국운을 건 칼로써 결전하더라도 강요한 굴종에 굴복하지 말라는 저항권을 외쳤다.

외교적으로 이어도를 포기하라는 무례한 국서를 선언한 것은 시진핑이었고, 그에 대항한 한민족이 항전을 다짐하는 선언을 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 모든 결과에 대한 책임은 중국을 분열되게 하여 망하게 할 관상을 가진 시진핑이 직접 시행한 결정과 결과 때문임은 분명하다.

영국의 대처수상이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로 국민적인 영웅으로 세계역사에 남게 된 것은 포클랜드전이 일어나자 민간해운회사들 소유의 컨테이너선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항모로 개조시켜 민간회사 들이 불만을 제기하자 단칼에

“나라가 있어야 기업이 있는 것이다”라고 강철 같은 밀어 붙이는 행동으로 국민을 일치단결되게 하여 포클랜드승리를 이끌어 낸 결과이다.

 

우리나라에 여성대통령이 다시 나오는 역사가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은 박근혜대통령이 여성으로 대처수상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에 달려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이어도에 대한 중국의 무례한 외교선언에 대하여 묵인하거나 아무런 대책이 없는 행동으로 역사에 남겨졌을 경우 후손들에게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조선왕조 오백년의 성리학적 궤변의 속담이 계속되어지게 하는 매국의 주역적 인물로 강이식장군과는 정반대의 인물로 우리나라의 역사에 두고 두고 기록되어질 것이다.

수문제가 강이식장군의 대응에 식겁하여 망조가 된 것처럼, 대한민국을 향한 무례한 외교선언에 대하여 칼로 응답해 한다는 식의 직설적이고 웅대한 기상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시진핑이 식겁할 정도의 외교적 선언 수준으로는 맞대응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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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고대역사서를 살펴보면 통일신라이후로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국가원수나 수반에 대하여 어떤 호칭을 사용했는지 살펴보면

국가원수격인 천황 가에는 이미 우리나라의 고대국가들이 천황폐하란 호칭으로 국서를 보내고 받은 기록들이 아주 많이 보인다.

 

 

천황이라는 말도 모자라 그 옆에 폐하라는 호칭까지 국서에 존칭으로 올렸다는 점이다. 폐하라는 호칭아래가 전하이고 그 아래가 각하이고 부모와 자식은 슬하에 해당한다라는 호칭에대한 정확한 의미는 이전 글들에 자세히 발해의 기하라는 호칭을 분석하며 적어 놓았기에 그것을 찾아 읽어 보면 될 것이고,

오늘 언론기사를 보니 일본총리에게 각하라는 호칭을 썼는데 의견이 분분하다는 기사를 보면서, 이러한 몰상식한 논란이 있는 것은 역사공부를 제대로 못한 인간들이 많아 졌기 때문일 것이다.

천황이라는 호칭은 우리나라의 고대국가이후로 천년 넘게 공식적인 문서에 사용되어져 쓰였던 문구였고, 우리나라는 중국의 황제에게만 폐하라고 국서를 한 게 아니라, 일본천황에게도 폐하라는 단어를 공식외교문서로 써서 보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물론 우리나라 자체에서도 우리나라의 왕을 우리가 스스로 대왕폐하라고 부르며 황상이나 황상폐하로 높여 부르는 것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폐하라는 개념이 역사속제도로 완전히 멸하여 졌기에 호칭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지만, 천년이상을 천황폐하로 불리어온 제도가 계속 유지되는 국가에 우리나라가 고대이후로 공식적인 외교문서에 당연하게 사용했던 천황폐하라는 호칭을 우리나라의 전통으로 사용하지 않은 양 하는 것은 역사왜곡에 해당한다.

 

일본막부의 우두머리인 장군을 무엇으로 부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중국과 우리나라가 갈피를 못 잡고 일본 왕이나 일본국왕이라는 호칭을 공식문서를 작성했다. 즉 일본국왕보다 더 위 단계가 존재함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절차를 공식외교문서의 예로 정했다는 점이다.

일본총리는 과거의 고대국가처럼 우리나라가 일본국왕이라는 명칭으로 외교문서를 쓸 수도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영어의 프레지던트라고 부를 수도 없고,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3국의 명칭은 가장 전통적이라면 일본총리는 일본국왕이라 호칭해야 전통에 부합한다. 그러나 왕정체제가 중국이나 한국이 이미 사라져버린 상태에서 상대국 총리를 우리나라의 왕정시대처럼 부를 수는 없기에 각하라는 호칭은 전혀 이상 할 게 없다.

아울러 역사를 배웠다면 왕정을 타파한 중국이 자신의 우두머리를 주석이라고 호칭으로 부르기에 우리나라도 그에 따라 주석으로 불러줄 뿐 주석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의 우두머리에 대한 호칭인 전통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다.

 

각하를 일본국에서 사용한다면 우리나라의 공식호칭으로 각하를 써준다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전통과 역사에 쓰여져온 호칭의 근원을 단 하루도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임에 틀림없는 감정만 앞서는 무뇌아수준으로 역사공부를 등한시한 부류들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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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조의 줄기에서 조이삭 만을 잘라내어 펴서 말린다.

 

 

 

 

기다란 나무 몽둥이를 손으로 잡고 반복해서 내리 친다.

 

 

날 알갱이들이 밑에 수북이 쌓여있게 되는데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모두 한데 모아서 바람에 불리면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쭉정이라 하여 버리고 밑에 떨어지는 것은 좁쌀이라 하여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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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일컬을 때 솔롱고스라고 한다. 몽골어 솔롱고스를 몽골어의 설렁거스와 발음이 유사하여 무지개의 나라는 뜻이다라고 날조하는 것은 우리나라말의 사랑해와 싫어해를 발음이 비슷하다고 정반대의 뜻을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다.

사랑해와 싫어해를 한국 사람은 누구나 구별할 수 있는 것처럼 몽골인 들도 솔롱고스와 설렁거스를 구별할 수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을 지칭할 때 고려에 기원을 둔 코리아라고 다 부르는데 유독 유일하게 세계적으로 몽골에서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명칭을 솔롱고스라고 표기하고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에서 옛날의 고어와 몽골어의 특징이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도 많이 남아있는 지방어가 제주어이다. 제주어의 일정낱말은 몽골어와 일맥상통하고 그 의미가 통하기에 솔롱고스라는 단어를 풀이할 열쇠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솔롱고스를 구별하여 풀이해보면 다음과 같다. 솔은 동물이나 사람의 피부를 말하는데 살이 빠졌다라고 말할 때 제주어의 솔 빠져저와 같은 의미이다. 이때의 솔은 살=피부를 의미한다.

롱은 제주어의 아래아 보존에 따라 한자어 랑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제주의 오름이나 산에 랑을 붙여서 월랑봉이라든지하는 다랑쉬라든지 하는 랑자가 조합되어 불러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의 랑의 의미는 아름답다,훌륭하다라는 것이다.

 

 

솔롱의 고대의미는 살갗이 아름답다, 피부가 아름답다, 또는 살가죽이 훌륭하다는 뜻에 해당함을 알 수가 있다. 이어지는 단어인 고는 성씨인 고 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둥글다는 원의 의미로 담아둔다라는 뜻의 고대어 의미를 가지고

스는 솔롱고가 한 개가 아닌 복수의 여러 개를 의미하여 솔롱고스는 몽골어와 제주어의 고대의미가 통한다며 다음과 같은 의미가 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그것들의 몸에서 아름답거나 훌륭한 피부나 가죽을 벗겨내어 담아두는 사람이나 민족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몽골어에서 말하는 솔롱고스의 고대의미는 무지개 어쩌구하는 아름답게 날조된 의미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고, 이러한 솔롱고스의 사용 또한 코리아로 불린 고려시대보다 앞선 삼국시대이전부터 사용되었음을 원나라의 기황후의 숙양합씨 기록을 근거하여 날조되어지는 무지개의 나라에서 온 황후의 어원보다 정확함을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오천년전통중에 솔롱고스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주는 풍습이 현대까지도 존재했던 것이 왕이나 권력자나 우두머리 등이 자신의 신분의 위엄을 강조하기위하여 호랑이나 표범 등의 가죽을 벗겨 의자에 걸쳐두거나 발아래에 깔아 놓아 외교사신이나 사람들을 만나는 의식을 치루는 행태로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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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조선에서 발생하였던 자주적 민중개혁의 원동력인 동학혁명과 자주적 정치개혁의 근본인 갑신정변을 외세와 결탁하여 국민과 백성들을 탄압하고 어육 화시켜 천세 만세 이씨왕조의 영원한 부귀영화만을 추구하였던 민비이하 고종을 비롯한 이 씨 왕족 집권세력이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있어 식민지 지배와 식민지 근대화론을 동류적인 시각으로 판단하거나 보는 세력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매국노에 해당할 뿐이다. 두 가지 관점은 전혀 다른 역사적 인식을 포함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식민지 지배라는 불행한 역사를 통하여 교훈과 가치를 얻고 더 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가르치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관점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점이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부정하고 근세조선의 역사를 가르치려는 것은 곡학아세하려는 학문을 가르치려는 망조의 역사학자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두리뭉실 식민지 지배라는 명분으로 모든 관점을 서술하려는 역사 판단의식은 결국 그 당시 지배세력인 이씨왕조에 대한 면죄부를 확대하고, 식민지배의 책임을 외세에게만 돌려, 자체 지배세력의 무능과 극악함과 일신과일족의 영화와영속이 국민과 국가보다 위에 존재하려고 했던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을 봉쇄해버리고, 어떻게든 엉터리 미화나 미담을 만들어 내려는 역사적 왜곡과 관점을 만들어 내게 된다.

조선시대의 3대 암군 중에 하나인 고종과 백성을 외세를 빌려 도륙한 민비를 미화하려는 시도 등이 식민지 지배는 전체가 악이라는 관점에서 그에 관련된 왜곡 측면을 가진 것이라도 악이란 관점을 상승 승화시킬 수 있다면 어떤 것이든 미화. 왜곡하려는 역사적 왜곡을 자행하고 실행하게 된다.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과 책임을 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지극히 당연한 것을 위하여 지배세력의 악행과 실정으로 인한 백성들이 고통과 피눈물을 오로지 식민지 지배의 결과라는 식으로 포장하여 왜곡해버리는 모든 역사적 관점은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얻는다는 역사교육의 가치를 부정하는 매국노들인 것은 틀림이 없다.

역사에 대한 진실을 가르치고, 역사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교훈을 후세들에게 물려주기 위해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부정하거나 왜곡하거나 매장시키려는 세력과 시도들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해야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역사적 사실과 관점에서 진실에 부합하고, 이를 통하여 백성과 국가보다는 일신과 일족의 부귀영화만을 추구하여 백성들을 도탄과 피눈물 속에 살아가도록 만든 장본인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처단을 올바르게 할 수가 있다. 식민지 지배라는 명분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거나 결과를 조작하거나 역사를 왜곡하거나 그 당시 현실의 상황을 거짓으로 곡학아세하는 학문을 가르치거나 선전하려는 그 자체가 후세에 역사를 가르치는 것에 있어 죄이다.

얼마나 역사를 웃기게 만들었으면 이 씨 왕족의 부활 어쩌구하는 짓거리에 이른 현실이란 말인가, 근세조선인 조선말기의 상황에 있어 그 어떤 사람들보다 이 씨 왕족의 처신과 행위는 매국적이었으면 영원히 매국노로 처단평가된다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집권세력들이었다. 이들을 황실복원이니 어쩌구하는 자체가 먹혀든다는 게 얼마나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이들에 대한 책임과 처단을 미루거나 조작 미화시켜는 지 반성하고 되돌려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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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왕조시대에서 왕보다 높은 신분은 존재하지 않는 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왕을 폐위시키거나 왕의 계승권 자를 정하거나 왕의 정무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대비였다. 왕이라는 신분은 종신적이기에 왕이 죽은 후에야 다음 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기에 왕의 사후부재는 일반적이고 이러한 때에 대비가 있고 없음은 천양지차의 양상을 띠게 된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일하게 폐위된 2명의 왕인 연산군과 광해군이 강제 폐위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대비에게 불효했다는 이유였다. 위에 열거한 왕이 아무리 잘못된 정사를 펼쳤다해도 대비와 맞서지 않고 효를 행했다면 조선왕조의 특성상 폐위될 수가 없었다.

조선왕조는 충과 효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 국가였는데 인륜을 져버린 불효를 행하는 왕은 마찬가지로 신하로부터 충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규정되어졌고 폐위가 사필규정으로 여겨졌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왕과 자신의 모친이 죽을 경우 신하는 어떠한 것이 먼저이고 앞서 참여하여 행하는 것이 올바른 신하의 도리라고 여겨졌을 생각해볼 때 공과사라는 개념으로 왕의 국상을 먼저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조선왕조에서는 절대 그러하지 않았다. 왕의 국상과 자신의 모친의 상이 겹쳤을 때는 모친의 상을 우선하여 효를 행하도록 규정하고 철저하게 지켜졌다.

이러한 사례는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의 죽음과 유자광의 모친의 죽음에 있어, 모친상을 먼저 행하도록 조야의 의견이 일치하여 시행한 것을 보아도 잘 알 수가 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허울 데기이지만 광해군이나 연산군이 대비에게 불효를 행하지 않았다면 오랑캐에게 사대를 했든 폭군이었든 절대 폐위되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연산군은 대비에게 불효를 행하였을 때 자신이 폐위 될 것을 짐작하지 못했을 까라는 점에서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자신의 아버지인 성종은 어려서부터 인수대비의 지도와 가르침에 충실히 따라 정사를 행하였고 슬하에 30여명에 이르는 자식을 뒀고 그중에서 왕자들만 해도 십여 명이 넘었는데 연산군이 그러한 상황에서 다른 왕자들을 이겨내고 끝내 왕위를 이어받을 것을 보면 머리나 처신에 있어 빈틈이 없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러한 처세의 달인인 연산군이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를 핍박하고 불효를 행할 때에 스스로가 폐위가 될 수 있겠다고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면 왜 연산군은 막장으로 치달아 끝내는 스스로를 폐군이 되는 길을 선택했을까 하는 점이다.

실록에 기록된 연산군의 기질을 자세히 살펴보면 연산은 스스로를 천하에서 제일로 뛰어난 호남아로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명나라 사신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한다하여 중국 사신을 박대하고 병을 핑계를 이러한 의식을 다른 사람에게 시켜 며 거부하는 모습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성종이나 연산군의 모후인 폐비윤씨는 오늘날로 보면 꽃미남과 절세가인의 만남의 얼굴을 한 사람들임을 역사기록으로 알 수가 있는데 그러한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연산군은 몸과 얼굴이 아주 잘생긴 왕이었다. 인물도 잘났고, 성격도 호방하고 영웅기질이 있었고, 자존감도 스스로 삼한 제일로 굳게 믿었던 왕이었기에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에는 한 치도 결단을 머뭇거리지 않는 오늘날의 강남스타일 왕이었다.

연산군이 폐위로 간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자존감의 폭주에 의한 궁극적 파멸이었다. 사약을 받아 죽은 폐비윤씨 때문에 정신이 돌아서 파멸되었다는 연속극의 상투적 연관성은 전혀 사실과 일치하지 않고 연산군이 폐위된 것은 나르시시즘에 해당하는 일종의 정신병의 궁극적 결과였다. 폐비윤씨의 사건은 자신의 나르시즘을 극대화시키려는 좋은 구실로 활용했을 뿐이다. 이러한 성향이 너무 지나쳐 조선왕조에서는 건들지 말아야할 역린을 건드리는데 인수대비를 핍박하여 죽게 하는 지경에 이르는데, 이것에도 자신이 최고다라는 개념으로 조선왕조체계에서 마지막 최후의 절대 지존인 대비와 겨루다 결국 스스로 파멸하게 된다.

왕이 살아있든지 죽었던지 왕을 폐위나 등극 시킬 수 있는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권능을 가진 존재가 조선왕조시대하의 대비의 계급이었다. 충효를 나라의 근본이념으로 하는 조선시대 하에서는 왕이 얼마나 뛰어나서 잘났든 못났든 왕이 건드리지 말아야할 최후의 궁극적 존재가 대비라는 사람인데, 연산군과 광해군은 이것을 건드렸다는 공통점을 가진 존재였다는 점이다. 이것이외에 나머지 반정과정이라든 반정주체나 상황 등은 부차적인 곁가지들에 불과하고 궁극적인 것이 이러한 왕과 대비의 관계의 서열관계를 거꾸로 돌려 행한 불효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는 부모가 잘못했을 때 자식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가치관으로 변화되었지만 조선시대 하에서 아무리 대역죄나 도덕이 무너지는 후안무치한 범죄를 저지른 부모라해도 그러한 죄를 경찰에 자식이 신고했을 때에는 오히려 신고한 자식을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몽둥이로 패는 것이 조선시대의 법이며 현실이었다. 일반서민들에게도 이러한 엄한 효의 실천과 인내를 강제했는데 하물며 왕이 어떠한 이유나 명분을 같다 붙이든 대비에게 불효하는 것은 역린에 해당하였다. 오늘날의 법에도 이러한 친분상의 잔재가 남아 부모의 죄를 자식이 안 다고해도 신고하지 않거나 보호해줘도 처벌받지 않게 법률로 규정되어 이어져 오고 있다.

결론적으로 보면 조선시대나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아버지에게 불효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불효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핵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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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재위51년(629년),8월에 고구려의 땅인 낭비성(오늘날의 청주시 인근)의 공격을 명령하고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장군을 포함하는 5명의 군 수뇌부에게 5천의 군사를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 유신의 계급은 중당당주(오늘날의 3개 중대인 300명 정도를 지휘하는 대대장)로 여단급 규모의 공격군을 편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유신과 유신의 아버지 서현과의 관계는 장군과 대대장의 참전계급이었다.

신라의 오천의 군사가 낭비성을 공격하러 에워싸자 고구려는 역으로 성문을 열고,1만의 군사가 성 밖으로 나와 신라의 군사와 정면대결을 벌였다. 이에 신라군은 2천여 명이 죽는 대패를 당하고, 낭비성의 5리 밖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아군의 상태가 위급함을 느낀 유신은 스스로 서현장군 앞으로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평생 함께 아버님에 대한 효도를 다하길 기원했으나, 전쟁에 임하여 그러할 수 없음이 한이나 국가에 대한 충을 선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사들이 무릇 전투에 임하여 용기와 사기가 있어야 하나, 우리의 군사가 패함은 이러함이 부족에 있습니다. 옷걸이에 옷을 걸면 옷이 모양이 바르게 되고, 그물코에 동아줄을 넣어야 제역할 을 할 수 있듯이 제가 옷걸이와 동아줄의 역할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말위에서 칼을 뽑아 적진으로 홀로 쏜살같이 들어가서 막아서는 무수한 적군을 베면서 기어이 적장의 목을 베어 들고 돌아왔다. 홀로 분전하던 유신의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신라군은 분연히 일어나 적을 맹렬히 공격하여 5천의 수급을 베고,1천의 넘는 고구려군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낭비성의 남겨진 군민들은 죽기를 기원하고 달려드는 신라군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껴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훗날에 반굴과 관창의 예처럼, 부하를 사지로 보내 전세를 역전시키는 김유신장군의 전술행동은, 스스로가 선행했던 자세였음을 이해할 수가 있고, 적진이나, 위급한상황이든 항시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에 최후의 사선의 맨 앞에 앞장서 나아간 이는 유신 그 자신이 솔선수범을 실천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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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멸망의 이유가 신하의 배신이었다라는 고고학 유물연구 결과가 나왔다는데,

배신한 신하가 지배했던 지역을 살펴보면,오늘날 전라도 명칭의 근원이되는 주와주의 세력임을 알수있고,이 신하의 근본이 外人세력이었다는 논리가 전개되었는데,

오늘날 고려를 세운 고려태조 왕건의 훈요10조의 내용중 배역의 땅이니 중용치 말라는 구절에대하여,역사적 사실이라는 설,왕건의 신하가 위조를 했다는설,원래 그러한 구절이 없었다는 설,표기된 지역이 전라도가 아니란 설등등 여러가지 설들이 존재하고 있는데.이 구절을 보다가 생각난것이,어째서 사람을 말하지 않고,배역의 땅이라는 지역을 말했느냐 하는점이다.

좋은사람만 사는지역도 없고,나쁜사람만 사는지역도 없는데,예를 들어,천민이나 피부색,종족등과 같이 사람의 특징이나 특색을 기준으로 했다면 신분제사회인 고대국가의 개념상 이해가 될수도 있는데,엉뚱하게 지역자체를 배역의 땅이라고 규정했다는 점을 눈여겨 볼필요가 있다.

이러한 근원에는 그지역에 무엇인가 태조왕건이 생각하기에 용납치 못할것이 존재하고 있었다라고 생각해 볼수가 있다.그러한 기준이 사람이아니고,지역이라는 점에서 그렇다.태조왕건은 좀더 다른 외향으로 발전한 발해까지도 왕족 성씨를 하사하며 동류의식을 가지고 후하게 대했는데,

자신의 왕비의 지역이기도하고,자신을 도운 개국공신들의 지역 이기도한 곳을  어째서 "배역의 땅"이라고 규정했느냐 하는 점이다.사적인 정과 은혜에 냉정할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이러한 구절에는 필수적으로 그 근원이 존재할것인데,무엇일가 곰곰히 역사의 고고학적 유물과 연계해 생각해보니,그곳이 우리민족의 전통 주류로 인정하지 말아야할 비주류적 세력이 웅거했던 지역이기에 이러한 훈요10조를 만들어 내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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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있어서 최대의 미스터리는 전라도에 존재하는 영암의 장동고분과 나주의 영산강고분들이다.

충청도는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며 유물과유적들을 보관하는데 정성을 다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경상도는 신라의 역사유물과 유적들을 보호하기위하여 도시전체를 문화재로 만드는 노력을 다하여 후손들에게 전하려 노력하고,

북한지역은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고 자랑스러워하며 수천년전의 고분군들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보존하는데,유독 전라도지역에 남아있는 고분과유적들에서는 푸대접이고,그주체가 무엇이었는지 조차도 아직까지 모른다는 이런 소리들만 하고있다.신라의 왕릉급 고분,백제의 왕릉급 고분,고구려의 왕릉급 고분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수많은 고분과 유적,유물들이 존재함에도,오직 전라도지역에있는 왕릉급 고분유적들에 대해서는 역사도없고,보존도 그저그렇고,애써 후세에 남겨야할 자랑스러움조차 보이지 않는다.

은글 슬쩍 백제의 역사나 유물들인 것처럼 구렁이 담넘어가듯 넘어가려고 조작이나 하려고 하고.분명하게 전라도지역은 고구려,신라,백제와 버금가는 왕국이 존재했고,그것을 증명하듯 왕릉급 고분과 유적들이 수많이 산재해 있는데,경상도,충청도,이북지역의 주체는 고분 몇기만 발굴하면,그 무덤의 주인세력까지도 다파악하면서,

어째서 전라도 고분발사조사를 들어갔다가 나오면 주체가 누구냐,어떤왕국 이었는것 같은가?무덤주인은 누구였던것같은가?등등 다른지역의 고분군들을 발굴했으면 의레 궁금하고,발표되었을 것들이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것인지,알려져서 좋을게없으니 자빠져있으라는 것인지,

도대체 전라도의 왕릉급 고분군에 발굴조사만 들어가면 뭐가 보였길래,입이 딱벌어지면서 벙어리가 되어버리냐 하는 것이다.왜 유독 삼국시대에 전라도지역의 역사만이 사라졌는지,왜 전라도를 애꿎은 백제와만 연결시키려고 억지를 부리는지,전라도지역의 왕릉급유적과 유물들이 오늘날까지 버젓이 존재함에도 이것을 역사속에서는 누구인지 모른다라니,

보통 왕릉급고분이 만들어지고,그러한것이 무더기로 산재할정도면 그지역의 주체로써 수백년을 이어왔다는것이고,수십년내에 그런 고분군들을 산재하여 만들어 낼수있는 경우는 고대사에서는 가망성이 희박하다.전라도지역의 왕국의 역사는 깡그리 사라졌는데,왕릉급고분이나 유물들은 넘쳐나고,앞뒤가 안맞는 현상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있다.전라도지역에 분포하는 왕릉급고분이나 유물들만 잘관리하고 보존한다면,신라의 경주나,충청도의 부여에 버금가는 경제적효과와 자부심을 가질수있는데,전라도는 백제에 뭍어버리고,그시대 그지역의 주체적 왕국에대하여 유물과 유적이 넘쳐남에도 꿀먹은 벙어리냐는 점이다.전라도 지역의 역사이중성을 논하라한다면 첫번째로 제기하고 싶은게,왜 전라도지역의 고분와 유물들에대한 자부심이 다른지역과 다르게 그따구냐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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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제도와 풍습을 이은 발해의 주축군은 고구려기병이었는데,고구려기병과 발해기병은 모습은 같았다.

사극에서나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갑기병이 고구려의 기병으로 묘사되는데 순전히 엉터리다.

유목민족은 빠른 공격과 기동성을 위하여 식량조차 말린고기를 휴대할정도로 무게에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말에다가 쇠갑을 입히고,군사들의 몸에는 철갑을 입혔다는 그러한 철갑기병은 전투와는 전혀 맞지않는다.유럽의 기사들이 훈족이나 기타 몽골기병을 이기지 못한것은 차림새부터가 정반대였기 때문에 철갑으로 무장한 유럽기병이 전멸할때 맨몸인 빠른 유목기병은 거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갑기병의 용도는 전투용도가 아닌 유목기병에 있어서는 의전이나 행사용이지 실전기병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구려와 발해기병은 적과 싸울때 정면으로 부딪치는게 아니라 항상 측면으로 일정간격을 유지하며,적의 측면과 정면을 돌아가면서 빠른속도로 움직이며 활을 쏘고 치고빠지는,치고빠지는 전술이고 결국 상대군사가 절대적인 열세라고 판단되어질 때서야 기동력을 멈추고 나머지 군사를 쓸어버렸다.

자연으로보면 정면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멧돼지를 정면에서 받아쳐서 승부를 보는게아니라,정면으로 들어오면 옆으로 갈라지고,옆으로 들어오면 다시 횡으로 갈라지고,결국 어떻게든 정면승부를 할수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데 이러한 전략을 구사하는 기병은 상대편보다 월등하게 기동력이 빨라야 하는데 철갑을 두른 유럽풍기사들은 거이 학살수준으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하게 되었다.



대등한 기동력의 기병과 만났다면,이럴경우는 정면승부를 할수밖에 없는데 이때를 대비하여 고구려기병은 대도와 함께,활의 거리와는 비교할수 없는 단거리에서 던질수있는 단검을 다리와 양옆구리등에 지니고 있었다.

고구려기병의 기본휴대칼의 갯수는 6개이다.단검과 장검을 휴대하는 고구려기병뿐만 아니라 동이족을 이루는 몽골족도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할수가 있다.고구려와 발해의 기병은 싸움을 위하여 필수적으로 여러개의 칼을 휴대하는것이 군사의 기본무장이었고,머리에 철갑투구를 두르는것도 전혀 맞지 않는 고구려기병의 모습이고,



머리에는 천으로 두른 모자정도에 새의 깃털을 꼽아두른 정도로 단순했다.거란이나 여진등의 유목기병들이 머리카락의 앞 이마쪽을 완전히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하는것도 멋있으라고 하는게 아니라 말을타고 바람을 가를때 앞머리의 머리카락이 휘날림으로 인하여 시야의 제약을 받기에,상대방보다 기병 전투력의 장점을 유지한다는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고구려.발해기병은 머리를 밀어버리는 풍습을 행하지는 않았지만,기병의 자존심인 고구려기병이 머리에다가 철투구를 쓰고,말에다가 철갑을 입히고 싸웠다는것은 아예 동이족임을 포기한 모습이다.이럴 가망성은 거이없고,한곳에 완전히 정착하여 살았던 농경풍 유럽의 기병이나 중국 한나라처럼 농경기반의 기병들은 머리에다가 투구와 철갑을 두르는게 이상할것이 없지만 사냥이 의식주고,전투가 삶인 고구려기병의 머리는 두건정도 그이상은 실제적인 고분벽화모습이 그려져있지 않은한 그러한 경우가 없다라고 하는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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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갑자기 무너진 이유를 백두산화산의 영향이었다든지 하는 황당무계한 논리들이 등장하지만,발해의 멸망은 내부의 쿠테타로 발생하였기에,밖으로의 외적영향을

찾을래야 찾을수없고,외적인 영향을 설명할길이 없자 갑자기 멸망되어진 이유를 자연재해로 인한것이다라는 비논리적 개념을 주장하기도한다.


발해를 이해하기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고구려를 이해해야하고,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이해하기위해서는 발해에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한다.


동이족의 기원이되는 고조선의 영역은 오늘날의 한반도내에 한정 되어진것이 아니라 영토의 크기가 한반도와 대륙의 벌판에 이어져 있었기에 그곳에 사는 부족들이 모두 한민족이지는 않았고,광대한 영토크기상 여러부족이 존재 할수밖에 없었다.

고조선.고구려라는 나라의 주류는 한민족이고,그속에 포함되어진 부족들이 거란(몽골),말갈(여진)이 있었다.
가족으로보면 주체적 권리는 한민족인 고구려인이고,나라의 구성에서 서자쯤되는 부족이 거란과 말갈이었다.

고구려인과 거란,말갈인은 서로 같지 않은 민족이지만,국가구성에있어서는 주류냐 비주류로 나뉘어진 구성원들에 속했다.발해는 스스로의 내분에의하여 망했다는것은 거란과 고려의 역사기록을 통하여 알수가있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거란에대한 정책과 기록,거란에대한 중국의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거란은 "발해의 풍습과 제도를 따랐다"라고 되어있고,고려태조 왕건이 거란의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시켜 죽게하고,선물로 바친 낙타 50마리를 아사시켰던 이유를 말하는데,



"발해와 거란은 서로가 연합하여 한마음이었는데 이제 갑자기 배신을 때리고,발해를 멸했으니 무도하다"라고 하였다.이말을 이해하려면 훗날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을때,서희의 담판에서 거란은 고구려를 발해가 계승했고,그것을 자신들이 다시 계승했으니 그영토에 속한 땅은 자신들이 땅이다고 하였는데,

고려는 자신들이 오히려 고구려의 계승국이다라고 하였는데,거란이 이러한 주장에대하여 고려가 고구려인의 적장자라는데 부정을 하지않고 물러갔다는 점이다.

고려왕건은 고구려인의 적장자를 고구려인의 나라인 발해와 고려로 보았고,방계로서 거란과 말갈이 존재하는데,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고구려가 할아버지라면,발해와 고려는 아들,거란과 말갈은 손자쯤되는 상속서열을 가지고 있었는데,손자가 자신의 부모를 친것을 무도한짓이라고 꾸짓고있는것이다.



거란은 발해의 부여부에 위치하고있음을 보거나,거란이 세운 요나라 태조가 발해의 풍습과제도를 그대로 따라했다는 역사기록을 봤을때 거란은 오늘날에보면 몽골족의 한부류였지만,고구려인들이 대륙벌판에 근거하여 나라를 세울당시,고조선을 이루던 동이족의 한갈래였고,그중에서 부여족과 관련이 되어져있다는것이고,

고구려의 뿌리와 오늘날 한민족이 뿌리가 부여족에서 나왔음을 보았을때,부여라는 갈래는 거란,고구려인,말갈을 다포함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것을 알수가 있다.발해의 지방제도중에 부여부는 거란을 말하는 의미와 동격인데,거란이 부여와 관계가 없다면 통솔부락을 부여부로 명칭을 하지 않았을것이다.

발해와 거란에있어 공통적으로 주목해야할 단어가 迭(질)이라는 단어인데,발해관리들의 품계를 나누는 단위기도했지만,거란의 8부족의 명칭중에 하나의 부족에도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한민족의 뿌리인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묘비를 세우거나 기록할때 부여라는 단어는 빠지면 안될 신성시되는 계승자가 될려면 부여라는 말은 꼭 집어넣어야할 명칭이었음을 보았을때,발해의 제도에서 거란이 부여부의 중심이라면,거란도 고구려인들과 마찬가지로 부여에대한 일정지분을 계승한다는 의식이 분명하게 존재했음을 알수가있다.

결론을 내자면,고려가 고구려의 적장자라고했을때,거란도 부정하지 못했고,발해의땅이 적장자는 고구려인이었기에,발해를 내부적으로 평정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세운 요나라도 자신들도 고구려의 계승자를 주장했지만,정확하게 말하면 발해의 계승자임을 주장했지만,그보다 앞선 적장자인 고구려인들이 세운국가인 고려에게있어서 마땅히 부정할 명분이 존재할수 없었다.

몽골이나 여진이 훗날 중국대륙을 집어삼키지만,부여족 고구려인의 본류인 한민족의 국가에 대하여는 왕을 잡아 국가를 패망시킬수 있는 최후의 순간에서도 그렇게하지 않은것은 뭔지모를 동질감,형제감등 오늘날 일본천황의 가계를 막부장군들이 없애버리지않고 형식적으로라도 유지시키려 했던 관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한민족의 고구려인들은 마지막까지 지켜져야할 그 무엇인가였다.그만큼 동아시아의 동이족에있어서 천년왕국 고구려가 차지하고있던 개념은 동이족의 관념속에 뿌리 깊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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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한민족의 국가였다는 근거에대하여 살펴보자.발해의 시조는 대씨이며,대중상,대조영등이.대중상은 말갈족출신이 맞으나

오늘날에보면 귀화한 한국인이라는것이고 귀화한 말갈인이 수대를 거치다보니 고구려인으로 되어진것이 대중상이었다.

이러한것을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기록한것은 역사기록이 정확하게 표현 했음을 알수가있다.

역사기록에서 발해의 건국과정을 나타날때 당나라장군 이해고의 천문령전투당시에 이에맞선 군사들은 고구려군인과 말갈족군인들로 구성된 대조영군사들이라고 고구려군과 말갈족군을 구분하여  기록하는것을 보았을때 말갈군사와 고구려군사는 그당시에도 서로 의미있게 구분되어졌고,발해건국의 주체군사에 고구려기병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대중상이나 대조영의 군사는 말갈족 지휘관이라기보다는 패망한 고구려군사를 이끌었던 세력을 대표하고,말갈족군사는 따로 말갈족추장이 이끌었음을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는데,발해의 풍습은 부여를 이었고,부여의 풍습은 고구려,백제와 동격이었으므로 발해는 말갈을 강조한것이 아닌,고구려인의 풍습을 건국초기부터 강조하고 있음을 알수가있다.

역사기록에 남아있는 발해의 풍습중에 발해의 관리들은 신분에따라 '금색,은색등의 복주머니를 몸에 차고 다녔다'라고 하였는데 그모양은 물고기모양과 비슷한 복주머니였다고 기록 되어져 있다.오늘날 한민족의 복주머니 풍습은 삼국시대이후로 고려,조선에까지 이어졌고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복주머니의 모습은 복주머니의 입구는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처럼 생겼고 전체적으로보면 물고기모양과 비슷함을 알수가있다.

이러한 복주머니를 몸에지니고 복을 받거나,액운을 물리치거나하는 풍습은 고조선이래에 한민족의 풍습이었다.이것이 첫번째로  발해인은 한민족이었다는 증거이다.

두번째는 발해라는 국가명에서보듯이,건국초기에는 발해인과 말갈인의 연합으로 이루어졌기에 고구려인의 국가인 발해로할것인가,아니면 말갈인의 국가인 말갈로 할건인가 명칭의 문제로 보인다 결국은 지배계층의 주류인 고구려인을 나타내는 발해로 국가명이 정해졌음을 보았을때,발해는 스스로를 고구려인다라는 주체적 표현으로 한것이 두번째증거이다.이러한 사례는 훗날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창건과 궤를 같이하는데,이성계가 말갈족속에서 살고,혼인관계를 유지했고 말갈족 연합세력의 구성으로 조선을 창건했다고해서 조선을 말갈족정권이었다라고 주장하는것은 현세를 살아가는 한민족이 존재가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한 그렇지 않다는것을 한민족 스스로가 증거할수있다.

세번째는 발해는 온돌이나 된장등 한민족의 생활문화를 답습했고,고구려인 중심의 천하관을 바탕으로 주변 말갈족을 제압하고 합병해 갔다는것이다.말갈족이 고구려인을 통치해 다스리는 국가로 표현되기 보다는 주변말갈족을 하나씩 발해인으로 통합해가는 과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때 당시에도 말갈족과 부여족은 서로 다른종족임을 서로 알고있었고,고구려이든,발해이든 국가의 주체는 부여족이라는 부여에서 여러국가가 나왔다라는 부여일통의 관념은 발해국에도 확실하게 이어졌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멸망할때까지 말갈족의 풍습을 따랐다고 한것이 아니라,부여와 고구려의 풍습을 따랐다라고 일관되게 주장했고,역사에서도 발해는 말갈의 풍습을 따랐다라는 기록은 없고.특이하게도 말갈과는 전혀다른 거란의 풍습도 남아있었다라는 기록을 봤을때,발해는 말갈정권이다라고 주장하는것은 머리와 꼬리를 빠꾸는 황당한 왜곡이다.

네번째 오늘날까지 이루어지는 역사왜곡중에 동북지방의 조선족은 조선말기에 이루어진 현상이다라는것이다.동북지방은 발해가 멸망했을 당시에도 그지역에는 고구려인들이 존재했었고,고려로 10만명이 넘는 고구려인들이 귀순했지만,계속 동북삼성지역에는 고구려인들의 후예들이 남아서 살아갔다.

원나라때에도 고려국왕이 요동지역의 왕을 겸임했던 이유도 그곳에 고구려인들이 계속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고,명나라때에도 이곳이 누구의 관할이냐에 따른 대립으로 위화도회군문제가 발생하여,반역의 정권이 탄생되었지만 이쪽지역에는 고구려인들과 말갈족들의 후예가 사는 땅이라는 개념은 이어져왔고,동북지방에대한 한민족의 삶의 터전과 역사는 고구려,발해가 망한이후에도,오늘날의 동북삼성의 조선족이 존재하듯이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동북삼성의 고구려인들이 후예가 이어져 오는것이 조선말기에 형성된 일시적현상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그래서 조선과 청나라간에 국경분쟁이 생겼다라는 관점은 잘못 되었다.중국를 지배했던 한나라,수나라,당나라,원나라,명나라,청나라,오늘날의 중국까지 동북삼성지역이 고구려.발해인들의 영토이며 터전이라는 관념은 계속 이어져왔다.이것을 조선말기에 갑자기 조선인이 이주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라것은 궤변일뿐이다.

애시당초 한민족은 일본의 남방계민족이 아니라,북방계민족이 민족의 주류였다.한민족하면,말을달리며 활을쏘는 북방민족의 피가 흐름을 말을 안해도 본능적으로 느낄수있다.특이한것은 전라도지역에서 발견되는 왕릉급 거대고분의 인골들은 일본의 남방계민족과 관련 되어지는것이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유물들이 만들어졌고,오늘날까지 전해졌는지는 역사가 전하지 않기에 뭍혀있다.발해인은 고구려인이고,백제인이고,신라인이고 같은뿌리인 북방민족계의 고조선인이다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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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라는 나라는 이해하기위해서는 大(큰대)라는 민족의 전통에대하여 살펴봐야한다.

우리나라는 밖으로 한민족의 위대함을 나타낼때 대라는 글자를 병기했다.왕에다가 대자를 첨가하여 대왕이라고 부르는 전통이 그러하며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명인 대한민국에 대를 붙인이유도 우연히 그렇게 붙인것이 아니라 위대한 민족이라는 천손의식이 내포되어있다.

몽골의 왕은 칸이라하고,일본의 왕은 천황이라하며,중국의 왕은 황제라고 불렀다면 한민족의 왕은 대왕이라고 표기했다.우리나라의 역사중에 가장 사대주의적 태도를 취했던 조선의 왕들조차 죽어서 시호는 대왕으로 표기하려고 했을만큼 왕이라는 표현보다 대왕이라는 표현을 좋아했다.

발해도 또한 한민족이었기에 발해왕들은 스스로를 대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스스로 황제라고 표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황상이라는 말은 사용되었지만 이때의 황상은 천손의 자손이 다스리는 나라의 왕이라는 주체성의 표현이지,천자라는 의미의 황제를 의미하지 않았다.천자와 천손의 차이는 이미 설명했기에,부연하지않는다.

고구려는 고씨의 나라였고,발해는 대씨의 나라였다는데는 관직명에 기록된 이름들을 보면 쉽게 파악할수있다.그런데 고씨와 대씨 (높다는것과 크다는것)는 일반적인것보다 더하다라는것에는 동격의 표현이다.

발해의 관직을 가졌던 사람들의 성씨들에는 대씨도 있고,고씨도 존재하는데,역사서에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고,고구려의 풍속을 지킨다고 하였다.고구려시대부터 이미 대씨와 고씨는 존재하였고,대씨는 바다쪽를 담당하는 갈래의 성씨였고,고씨는 산악쪽을 담당하는 갈래의 성씨임을 알수가 있다.고구려는 육군도 용맹했지만,수군도 수.당의 수군을 궤멸시킬만큼 강했다.

고구려와 발해는 그 근원을보면 동격적인 명칭임을 알수있다.즉 지배계층의 부족의 성씨를 표현한 국가명임을 알수가 있다.발해는 대발해라고하면 되겠는데,바다를 지배했던 나라의 의미를 가지고있다.발해의 명칭이 호수의 지명이거나 고어에서 유래한다는 주장은 맞지않고,

고구려의 부족중에 고씨족의 부족과 대씨족의 부족이있는데,이중에 고씨족의 국가가 고구려,대씨족의 부족은 발해라고 불려졌음을 알수가있다.고씨족은 산악쪽,대씨족은 바다쪽으로 지배했던 부족성씨임을 의미하고있다.

발해는 고구려,백제,신라와같은 북방민족의 계통인 한민족이었고,(전라도지역은 제4의 무엇인가 존재했었는데무엇이 존재했는지 역사자체가 완전히 뭍혀버렸기에 논외로하고)그의미는 바다를 지배했던 부족의 명칭임을 알수가있다.발해는 정식명칭이 고구려와 동격으로 대발해라고해도 이상할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조선기술은 오늘날에도 최고지만 이미 삼국시대부터 세계최고였고,한민족은 북방민족계열이면서도,바다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가진 민족으로,중국처럼 육지만을 중요시하는 민족성을 가졌던게아니라,우리나라의 역사이래,바다라는 지역의 지배권을 고구려의 광개토태왕,백제의 담로,신라의 유라시아해상무역,고려의 아라비아무역,조선의 수군등 바다의 해전뿐만아니라 바다의 역사기록은 한민족이라 할만했다.

발해의 당나라 선제공격이 바다의 수군을 이용하여 당나라를 기습적 궤멸시킨것이나,발해시대에 고구려유민의 우두머리인 이정기장군이 당나라의 등주를 바다를 이용하여 진격해 들어가 60여년을 지배하여 독자적 세계를 구축한것등을 보아도 고구려인들은 바다에 능했고,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국가의 국명이 발해인것은 고구려와 발해는 동일한 민족이 세운 국가의 연속성을 가졌음을 증명한다.

우리나라를 활만 잘쏘는 기마민족의 특징뿐아니라 수전에도 강한 민족이었음을 고구려,발해,고려,신라,조선수군이 증명해주고있다.여진,거란,몽고,한족등의 민족은 바다에서는 약했고,고래로부터 동아시아민족중에서 바다하면 한민족보다 활발했던 민족이 위에 갈래민족은 어디이겠고.발해는 어느나라의 역사인가는,바다라것이 어떤뿌리의 민족에게 어울리는 명칭이었겠는가?고구려,백제,신라의 각각건국신화에도 나온다.바다와 강의 신의 딸이 어머니이고,천손과 바다와 관련된 민족의 결합임을 강조함을 알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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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고구려의 풍속을 지키며 유지하고,왕을 기하라고 부른다고 중국역사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고구려의 왕은 대왕또는 태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음을 알수있는데,

쉽게생각하는 부분이 대왕이나 태왕이라는 호칭이다.일본의 왕을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우리나라가 국서를 주고받았음을 나타내주는 역사기록은 무수히 많다.

오래전 발해의 3대 황상인 대흠무가 일본국 왕을 천황이라고 국서에 표기하는것을 보았을때,천황이라는 호칭은 일본국 왕을 부르는 고유명사로 삼국시대이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왔음을 알수가있다.

중국은 진시황이후로 황제라는 호칭을 오늘날까지 고유명사로 이어져 오고있다.그러나 오직 우리나라만이 우리나라의 왕들에게 주어진 고유명사인 명칭을 통일되게하여 오늘날에 이르지 못하고있다.

우리나라의 왕의 명칭인 대왕은 일반적인 의미가아닌 중국의 황제,일본의 천황,한국의 대왕이라고 정하여도 이상할것이 전혀없을 정도로 고구려,백제,신라,발해의 각나라에 두루 고유명사로 사용되어졌다.



같은뿌리인 이들 나라들에는 왕에대한 여러가지 명칭이 존재했지만 공통적인 명칭으로 널리쓰인게 대왕 호칭이다.발해또한 같은뿌리인 우리나라 민족이기에 대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고,이때의 대왕의 의미는 황제,천황과 동격의 의미를 가지는 호칭으로 쓰였다.

대왕폐하라는 의미가 전혀어색하지 않았고,황제만이 폐하라는 호칭을 쓴다는 의식또한 우리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았다.왕폐하는 없어도 대왕은 폐하라는 호칭을 함께붙여 사용할수가 있었음을 볼때,

대왕의 의미는 단순히 왕이라는 의미로 쓰이지 않았음을 알수가 있다.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울때 고구려이든 신라이든 백제이든 모든 임금을 표현할때 왕으로 표기하고 부르는것은 선조들도 행하지않은 사대주의적 표현이다.

선조들은 외교문서에는 상대방국가에대하여 스스로를 낮추었지만,현실적인 통치속에서는 황제와 천황과 동격으로 생각하고 명칭이나 호칭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연원을 사용하거나 시호를 사용하는점에서도 독자적이었고,조선시대에 들어 독자적연호와 시호를 굴복하여 사대굴종한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이것은 조선의 태생뿌리자체가 배역의땅에서 나온 존재들이었기때문에 이루어진것이다.

배역의 땅이라는것에는 민족의 뿌리와는 다른 별종의 뿌리가 우리나라의 역사속에 존재했었다는 의미다.오늘날에 와서는 교묘히 감춰져 포장되었지만 종자부터가 달랐다.

우리나라의 역사속에있던 나라들의 기본인식은 우리나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천손의 자손이라는 관념을 가지고있었다.중국은 천손의 개념이아니라 천자의 개념으로,같은 의미같지만 전혀다른 개념으로 천자는 어떤부족이나 민족이든 뛰어난 자는 하늘의 아들을 자처할수있지만,

우리나라  천손의 개념은 동일한 부족이나 민족의 뿌리속에서 나온다라는 개념을 가지기에 이민족이 우두머리가 될수가 없는 통치체제관념을 가지고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발해의 대왕을 기하라고 했는데 기하라는 표현은 폐하와 동격이면서 우리민족이 독창적 황제나 천황에 동격으로 불리어진 명칭이다.

발해의 황제가 폐하라는 명칭을 몰라서 기하라는것을 사용했다고 볼수 없는것이 발해2대 대무예가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폐하가 천하를 속이려고하시오?"라는 구절에서보면 폐하라는 명칭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있었지만,폐하라는 명칭을 사용하지않고,발해의 신하들은 자신들의 황상에대하여 기하라고 사용했음을 알수가있는데,발해는 건국초기부터 고구려의 풍습과 제도를 이었다고 주장했었는데 고구려가 대왕기하,태왕기하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것은 발해와 고구려의 건국터울이 30년이 넘지않기에 고구려시대의 대왕들에게도 똑같이 사용되어졌음을 미루어 유추할수가 있다.

고구려,발해등의 황제들에게 황제폐하라고 사극에서 표현하는것은 잘못되었고,만약에 실제로 사용되었다면 대왕기하나 단독으로 기하라고 불려졌을것이다.대왕기하는 우리나라의 고유명칭이었고,황제폐하는 중국의 고유명칭이었고 이둘은 그당시부터 서로의 의미를 알고있었고 명칭이 상호존재했기에 어떤것을 취사선택하여 사용했겠는가는 민족의 입장에서 봤을때 당연히 알수가 있다.





조선왕조 600년동안이 우리나라역사와 문화에 끼친 영향은 그 폐혜가 너무깊고 악해서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어지고있다.민족과 역사의 반역집단인 조선이라는 나라는 우리나라역사에서 존재하지않았다면 더 좋았을뻔 했다.

고구려,신라,백제,발해,고려는 우리나라 민족의 계통이 세운나라가 맞고,조선은 그 근본이 백제와 대립각을 세웠던 특정지역의 일부지역에서 태동되어,여진족쪽으로 도망갔다가 그쪽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결국 한민족을 집어삼킨것으로,조선이 태동자체가 항명과 배역으로 시작하였듯이,원래뿌리자체가 배역의 땅에서 근거를 두고 정권이 탄생되었기에 어쩔수없는 운명이었다.

오늘날에 와서 이들지역에서 있었던 감춰진 역사가 역사속에서 사라져 없어졌지만,어찌되었든 두번다시 조선과같은 정권을 탄생시켜서는 한민족의 미래가 없다는 점이다.자주적,민족적이며,호방했던 기상을 조선이라는 기풍속에서 전부 꺼꾸로 민족성을 이끌어갔을뿐아니라 민족의 기상을 갈가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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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에게는 무예에가 뛰어난 광개토태왕를 닮은 아들들이 있었으니 발해2대왕이되는 무왕 대무예와 그의 친동생 대문예다.

대조영이죽고 2대 황제로 즉위한 대무예(676-737)는 국가의 튼튼한 기틀을 마련한 조선의 태종처럼,국내외의 상황들을 정리해야할 임무가 주어질수밖에 없었다.

당나라의 현종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로 영속되는것을 마땅치않게 생각했으며,신라의 성덕왕또한 고구려의 영토의 주인을 자처하면 발해와 대립하며 영토를 확장하는데 노력하고있었다.


726년 당나라는 백두산과 연해주부근에 근거를삶아 세력권을 형성했던 흑수말갈족을 이용하여 발해의 세력이 팽창되는것을 견제하고,아울러 옛고구려영토의 일부라도 간접적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였다.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발해의 무왕은 자신의 대에서 고구려 패망의 원흉이며,한민족의 천년원수인 당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계획한다.




먼저 내정의 안정을위하여 당나라와 손을 잡은 흑수말갈을 제압하기위하여,황제의 군령권을 발령하여 동생인 대문예를 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정예기병 5만의 군사로 흑수말갈을  제압하라고 하였다.이에 대문예가 상소하여 말하길"소신이 당나라에 숙위하며 당나라의 국력과 나날이 발전되는 정세를 그동안 보아왔는데,흑수말갈과의 전초전으로 당나라와 대립하여 전쟁를하려는것은 발해의 국체를 어렵게 할수있기에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이에

인안황제인 무제가 꾸짓어 가로대"너는 당나라의 강함만을 두려워하고,고구려의 혼은 잊었으냐?,평화는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가 있을때 지킬수 있는것이다.여기서 굴복하기 시작한다면 후대의 기틀을 기약할수없음을 알고 출전하라."대문예는 내키지않는 심정으로 흑수말갈의 제압을위하여 백두산쪽으로 나아갔다.



오늘날에 보았을때 이 흑수말갈은 중국대륙을 삼킨 건주여진이 일족으로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갈래이며 조선 인조임금의 대갈박을 땅에 두드리게했던 삼전도의 주인공 청태종의 속한 갈래이기도 하다.

흑수말갈의 경계선에 다달을쯤에 다시 대문예는 전령을 통하여 상소를 올리며 회군하기를 청한다.이에 분노한 무제는 즉시 군사령관을 대일하로 바꾸고 임지로 나아가게하고,대문예는 궁성으로 돌아오라는 소환명령을 하게된다.이에 대문예는 돌아가면 황제의 군령을 어긴죄를 지게될까 두려워 당나라로 투항하여 도망을갔다.

나라를 끝까지 지켜야할 지도층 장수가 먼저 당나라에 투항해버리는 어이없는 상황에서 흑수말갈과의 싸움은 싸워보기도전에 무너져내리게된다.패전을 접한 무제는 당나라에대하여 친동생인 대문예의 소환을 요구하였으나,당나라현종은 오히려 대문예에 당나라 대장군의 벼슬을주며 우대하였다.

이에 발해황제 대무예는 신하들을 모아두고,발해국 국체의 안위를 모두걸고,당나라와일전을 할 뜻을 비추며"우리선조의 나라 고구려가 망할때 형제들의 대립을 이용하였듯이,오늘날에 와서도 똑같은 정책으로 우리발해를 망하게하려는 의도를 숨지지 않고 있소,이에 이후로 당나라가 발해를 건드릴 생각조차하지 못하도록 전멸적 보복을 가하도록 하려고 하며,이싸움에 유불리논하면 개전을 머뭇거리는 신하들은 짐에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겠으며,2년내에 정벌준비를 완료하도록 하시오"

발해국의 문무신하들은 당나라의 정세염탐과 주변국들과 전략적 선택을 추진하게된다.이때당시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하여 굴종의 평화를 얻으려는 세력과 투쟁하려는 세력간의 타툼속에있었는데 발해는 강경파의 우두머리인 가돌한을 적극지원하여 당나라의 복속을 받아드리려는 온건파 이소고를 처단하게한다(730),


거란과 돌궐세력들을 발해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만들기에 2여년을 공을드린 732년 9월,무제는 장문휴(693-749)장군을 수군원수로 삼아  발해정예수군 2만명과 함께,당나라 동북아 수륙합동군기지인 등주(산동성 봉래현=중국 칭다오=청도)을 선제공격하도록 명령하고,아울러 동시에 무제는 직접 수륙합동연합총사령관의 직책을 가지고,발해 고구려기병 5만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진격해 드러간다.

먼저 선제공격 별동임무를 맡은 장문휴장군이 이끄는 발해수군은 압록강하구를 출발하여 등주에 도착하여
상륙작전을 개시하자,등주에는 당나라군 10여만명이 지키고있었으나,기습적인 공격에 당나라군은 사분오열 흩어져 도망가기에 바빴고,등주자사 위준또한 대적하여 전열을 정비하여 싸워보지도못하고,목이 달아났다.

등주를 점령한 장문휴장군이하 병사들은 등주에 살아있는 모든것과 건물들을 완전히 전멸시켜 이후 등주가 복구되는데 당나라의 국고의 대부분이 소비될 정도로 참혹했다.당나라 현종은 이러한 전황를 전했듣고 즉시 장군 개복신으로하여금 지원군을 이끌고 등주로 내려보냈지만,개복신이 도착했을때에는 상황이 종료되고 모든것이 폐허가 된 이후였다.

육로쪽으로는 대무예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북경쪽으로 진격해 들어온다는 전령을 들은 현종은 대문예를 사령관으로여 2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가서 대적하도록하고,급히 신라의 성덕왕에게 도움을 청하여,발해의 남쪽방향을 공격해주도록 요청하자,성덕왕은 이기회를 이용하여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에대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달라는 요구조건을 선행하자,당나라현종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요구조건을 들어주었다.



이에 성덕왕은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에게 3만의 군사를 주며 밀명하길"발해국의 무왕은 선조인 광개토태왕의 환생이라고 할만큼 군신으로 불리는 인물이고,서로말이 통하는 백성들인 발해와 우리는 같은 뿌리이기에,싸울일이 생기면 피하고,피할수없는 상황이면 후퇴하여 도망해도 가하니 공격하는 척만하도록 하라."

대문예와 출전하는 당나라군사들은 발해국의 무제가 직접 친정하여 공격한다는 소리를 듣고,싸우기도전에 이미 사기가 땅에 떨어져,발해국의 군사들을 만나기도전에 80-90%가 추위에 죽거나,도망을 가버려,대문예는 싸워보기전에 철군할수 밖에 없었다.

김윤중의 이끄는 신라군또한 당나라군의 전세를 이제나 저제나 지켜만보다가,후퇴했다는 전황을 듣자마자,행군방향을 바꿔 신라로 돌아가 버렸다.발해황제 대무예가 이끄는 육로군은 북경근방까지 진격하여 정복한후,이후로 발해가 멸당할때까지 발해영토로 지배하였고,당나라는 이후로는 발해에대하여,군사적공격을 할생각을 전혀 하지못했음을 보았을대,이때 무제의 공격의 얼마나 공포스럽고 참혹했는지 미루어 짐작할수있고,

춘추필법으로 유명한 중국의 사서들이 발해 대무예의 공격과 당나라의 패전에대하여 숨김없이 기록해놓은것을보면 그당시 당나라역사에있어 반드시 기록되어져야할 정도로 충격이었음을 알수가 있다.당나라 역사서들이 패전했을때 승전한 상대국 장수의 이름을 기록치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발해의 수군원수였던 장문휴장군에대하여는 정확하게 이름을 전하는것을 봤을때,우리선조인 장문휴장군에대한 연구와 관심이 더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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