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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재위51년(629년),8월에 고구려의 땅인 낭비성(오늘날의 청주시 인근)의 공격을 명령하고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장군을 포함하는 5명의 군 수뇌부에게 5천의 군사를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 유신의 계급은 중당당주(오늘날의 3개 중대인 300명 정도를 지휘하는 대대장)로 여단급 규모의 공격군을 편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유신과 유신의 아버지 서현과의 관계는 장군과 대대장의 참전계급이었다.

신라의 오천의 군사가 낭비성을 공격하러 에워싸자 고구려는 역으로 성문을 열고,1만의 군사가 성 밖으로 나와 신라의 군사와 정면대결을 벌였다. 이에 신라군은 2천여 명이 죽는 대패를 당하고, 낭비성의 5리 밖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아군의 상태가 위급함을 느낀 유신은 스스로 서현장군 앞으로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평생 함께 아버님에 대한 효도를 다하길 기원했으나, 전쟁에 임하여 그러할 수 없음이 한이나 국가에 대한 충을 선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사들이 무릇 전투에 임하여 용기와 사기가 있어야 하나, 우리의 군사가 패함은 이러함이 부족에 있습니다. 옷걸이에 옷을 걸면 옷이 모양이 바르게 되고, 그물코에 동아줄을 넣어야 제역할 을 할 수 있듯이 제가 옷걸이와 동아줄의 역할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말위에서 칼을 뽑아 적진으로 홀로 쏜살같이 들어가서 막아서는 무수한 적군을 베면서 기어이 적장의 목을 베어 들고 돌아왔다. 홀로 분전하던 유신의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신라군은 분연히 일어나 적을 맹렬히 공격하여 5천의 수급을 베고,1천의 넘는 고구려군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낭비성의 남겨진 군민들은 죽기를 기원하고 달려드는 신라군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껴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훗날에 반굴과 관창의 예처럼, 부하를 사지로 보내 전세를 역전시키는 김유신장군의 전술행동은, 스스로가 선행했던 자세였음을 이해할 수가 있고, 적진이나, 위급한상황이든 항시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에 최후의 사선의 맨 앞에 앞장서 나아간 이는 유신 그 자신이 솔선수범을 실천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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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멸망의 이유가 신하의 배신이었다라는 고고학 유물연구 결과가 나왔다는데,

배신한 신하가 지배했던 지역을 살펴보면,오늘날 전라도 명칭의 근원이되는 주와주의 세력임을 알수있고,이 신하의 근본이 外人세력이었다는 논리가 전개되었는데,

오늘날 고려를 세운 고려태조 왕건의 훈요10조의 내용중 배역의 땅이니 중용치 말라는 구절에대하여,역사적 사실이라는 설,왕건의 신하가 위조를 했다는설,원래 그러한 구절이 없었다는 설,표기된 지역이 전라도가 아니란 설등등 여러가지 설들이 존재하고 있는데.이 구절을 보다가 생각난것이,어째서 사람을 말하지 않고,배역의 땅이라는 지역을 말했느냐 하는점이다.

좋은사람만 사는지역도 없고,나쁜사람만 사는지역도 없는데,예를 들어,천민이나 피부색,종족등과 같이 사람의 특징이나 특색을 기준으로 했다면 신분제사회인 고대국가의 개념상 이해가 될수도 있는데,엉뚱하게 지역자체를 배역의 땅이라고 규정했다는 점을 눈여겨 볼필요가 있다.

이러한 근원에는 그지역에 무엇인가 태조왕건이 생각하기에 용납치 못할것이 존재하고 있었다라고 생각해 볼수가 있다.그러한 기준이 사람이아니고,지역이라는 점에서 그렇다.태조왕건은 좀더 다른 외향으로 발전한 발해까지도 왕족 성씨를 하사하며 동류의식을 가지고 후하게 대했는데,

자신의 왕비의 지역이기도하고,자신을 도운 개국공신들의 지역 이기도한 곳을  어째서 "배역의 땅"이라고 규정했느냐 하는 점이다.사적인 정과 은혜에 냉정할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이러한 구절에는 필수적으로 그 근원이 존재할것인데,무엇일가 곰곰히 역사의 고고학적 유물과 연계해 생각해보니,그곳이 우리민족의 전통 주류로 인정하지 말아야할 비주류적 세력이 웅거했던 지역이기에 이러한 훈요10조를 만들어 내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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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있어서 최대의 미스터리는 전라도에 존재하는 영암의 장동고분과 나주의 영산강고분들이다.

충청도는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며 유물과유적들을 보관하는데 정성을 다하고 자랑스러워하고,

경상도는 신라의 역사유물과 유적들을 보호하기위하여 도시전체를 문화재로 만드는 노력을 다하여 후손들에게 전하려 노력하고,

북한지역은 고구려의 후손을 자처하고 자랑스러워하며 수천년전의 고분군들을 대대적으로 확장하고 보존하는데,유독 전라도지역에 남아있는 고분과유적들에서는 푸대접이고,그주체가 무엇이었는지 조차도 아직까지 모른다는 이런 소리들만 하고있다.신라의 왕릉급 고분,백제의 왕릉급 고분,고구려의 왕릉급 고분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수많은 고분과 유적,유물들이 존재함에도,오직 전라도지역에있는 왕릉급 고분유적들에 대해서는 역사도없고,보존도 그저그렇고,애써 후세에 남겨야할 자랑스러움조차 보이지 않는다.

은글 슬쩍 백제의 역사나 유물들인 것처럼 구렁이 담넘어가듯 넘어가려고 조작이나 하려고 하고.분명하게 전라도지역은 고구려,신라,백제와 버금가는 왕국이 존재했고,그것을 증명하듯 왕릉급 고분과 유적들이 수많이 산재해 있는데,경상도,충청도,이북지역의 주체는 고분 몇기만 발굴하면,그 무덤의 주인세력까지도 다파악하면서,

어째서 전라도 고분발사조사를 들어갔다가 나오면 주체가 누구냐,어떤왕국 이었는것 같은가?무덤주인은 누구였던것같은가?등등 다른지역의 고분군들을 발굴했으면 의레 궁금하고,발표되었을 것들이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것인지,알려져서 좋을게없으니 자빠져있으라는 것인지,

도대체 전라도의 왕릉급 고분군에 발굴조사만 들어가면 뭐가 보였길래,입이 딱벌어지면서 벙어리가 되어버리냐 하는 것이다.왜 유독 삼국시대에 전라도지역의 역사만이 사라졌는지,왜 전라도를 애꿎은 백제와만 연결시키려고 억지를 부리는지,전라도지역의 왕릉급유적과 유물들이 오늘날까지 버젓이 존재함에도 이것을 역사속에서는 누구인지 모른다라니,

보통 왕릉급고분이 만들어지고,그러한것이 무더기로 산재할정도면 그지역의 주체로써 수백년을 이어왔다는것이고,수십년내에 그런 고분군들을 산재하여 만들어 낼수있는 경우는 고대사에서는 가망성이 희박하다.전라도지역의 왕국의 역사는 깡그리 사라졌는데,왕릉급고분이나 유물들은 넘쳐나고,앞뒤가 안맞는 현상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있다.전라도지역에 분포하는 왕릉급고분이나 유물들만 잘관리하고 보존한다면,신라의 경주나,충청도의 부여에 버금가는 경제적효과와 자부심을 가질수있는데,전라도는 백제에 뭍어버리고,그시대 그지역의 주체적 왕국에대하여 유물과 유적이 넘쳐남에도 꿀먹은 벙어리냐는 점이다.전라도 지역의 역사이중성을 논하라한다면 첫번째로 제기하고 싶은게,왜 전라도지역의 고분와 유물들에대한 자부심이 다른지역과 다르게 그따구냐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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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제도와 풍습을 이은 발해의 주축군은 고구려기병이었는데,고구려기병과 발해기병은 모습은 같았다.

사극에서나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갑기병이 고구려의 기병으로 묘사되는데 순전히 엉터리다.

유목민족은 빠른 공격과 기동성을 위하여 식량조차 말린고기를 휴대할정도로 무게에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말에다가 쇠갑을 입히고,군사들의 몸에는 철갑을 입혔다는 그러한 철갑기병은 전투와는 전혀 맞지않는다.유럽의 기사들이 훈족이나 기타 몽골기병을 이기지 못한것은 차림새부터가 정반대였기 때문에 철갑으로 무장한 유럽기병이 전멸할때 맨몸인 빠른 유목기병은 거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갑기병의 용도는 전투용도가 아닌 유목기병에 있어서는 의전이나 행사용이지 실전기병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구려와 발해기병은 적과 싸울때 정면으로 부딪치는게 아니라 항상 측면으로 일정간격을 유지하며,적의 측면과 정면을 돌아가면서 빠른속도로 움직이며 활을 쏘고 치고빠지는,치고빠지는 전술이고 결국 상대군사가 절대적인 열세라고 판단되어질 때서야 기동력을 멈추고 나머지 군사를 쓸어버렸다.

자연으로보면 정면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멧돼지를 정면에서 받아쳐서 승부를 보는게아니라,정면으로 들어오면 옆으로 갈라지고,옆으로 들어오면 다시 횡으로 갈라지고,결국 어떻게든 정면승부를 할수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데 이러한 전략을 구사하는 기병은 상대편보다 월등하게 기동력이 빨라야 하는데 철갑을 두른 유럽풍기사들은 거이 학살수준으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하게 되었다.



대등한 기동력의 기병과 만났다면,이럴경우는 정면승부를 할수밖에 없는데 이때를 대비하여 고구려기병은 대도와 함께,활의 거리와는 비교할수 없는 단거리에서 던질수있는 단검을 다리와 양옆구리등에 지니고 있었다.

고구려기병의 기본휴대칼의 갯수는 6개이다.단검과 장검을 휴대하는 고구려기병뿐만 아니라 동이족을 이루는 몽골족도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할수가 있다.고구려와 발해의 기병은 싸움을 위하여 필수적으로 여러개의 칼을 휴대하는것이 군사의 기본무장이었고,머리에 철갑투구를 두르는것도 전혀 맞지 않는 고구려기병의 모습이고,



머리에는 천으로 두른 모자정도에 새의 깃털을 꼽아두른 정도로 단순했다.거란이나 여진등의 유목기병들이 머리카락의 앞 이마쪽을 완전히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하는것도 멋있으라고 하는게 아니라 말을타고 바람을 가를때 앞머리의 머리카락이 휘날림으로 인하여 시야의 제약을 받기에,상대방보다 기병 전투력의 장점을 유지한다는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고구려.발해기병은 머리를 밀어버리는 풍습을 행하지는 않았지만,기병의 자존심인 고구려기병이 머리에다가 철투구를 쓰고,말에다가 철갑을 입히고 싸웠다는것은 아예 동이족임을 포기한 모습이다.이럴 가망성은 거이없고,한곳에 완전히 정착하여 살았던 농경풍 유럽의 기병이나 중국 한나라처럼 농경기반의 기병들은 머리에다가 투구와 철갑을 두르는게 이상할것이 없지만 사냥이 의식주고,전투가 삶인 고구려기병의 머리는 두건정도 그이상은 실제적인 고분벽화모습이 그려져있지 않은한 그러한 경우가 없다라고 하는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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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갑자기 무너진 이유를 백두산화산의 영향이었다든지 하는 황당무계한 논리들이 등장하지만,발해의 멸망은 내부의 쿠테타로 발생하였기에,밖으로의 외적영향을

찾을래야 찾을수없고,외적인 영향을 설명할길이 없자 갑자기 멸망되어진 이유를 자연재해로 인한것이다라는 비논리적 개념을 주장하기도한다.


발해를 이해하기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고구려를 이해해야하고,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이해하기위해서는 발해에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한다.


동이족의 기원이되는 고조선의 영역은 오늘날의 한반도내에 한정 되어진것이 아니라 영토의 크기가 한반도와 대륙의 벌판에 이어져 있었기에 그곳에 사는 부족들이 모두 한민족이지는 않았고,광대한 영토크기상 여러부족이 존재 할수밖에 없었다.

고조선.고구려라는 나라의 주류는 한민족이고,그속에 포함되어진 부족들이 거란(몽골),말갈(여진)이 있었다.
가족으로보면 주체적 권리는 한민족인 고구려인이고,나라의 구성에서 서자쯤되는 부족이 거란과 말갈이었다.

고구려인과 거란,말갈인은 서로 같지 않은 민족이지만,국가구성에있어서는 주류냐 비주류로 나뉘어진 구성원들에 속했다.발해는 스스로의 내분에의하여 망했다는것은 거란과 고려의 역사기록을 통하여 알수가있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거란에대한 정책과 기록,거란에대한 중국의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거란은 "발해의 풍습과 제도를 따랐다"라고 되어있고,고려태조 왕건이 거란의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시켜 죽게하고,선물로 바친 낙타 50마리를 아사시켰던 이유를 말하는데,



"발해와 거란은 서로가 연합하여 한마음이었는데 이제 갑자기 배신을 때리고,발해를 멸했으니 무도하다"라고 하였다.이말을 이해하려면 훗날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을때,서희의 담판에서 거란은 고구려를 발해가 계승했고,그것을 자신들이 다시 계승했으니 그영토에 속한 땅은 자신들이 땅이다고 하였는데,

고려는 자신들이 오히려 고구려의 계승국이다라고 하였는데,거란이 이러한 주장에대하여 고려가 고구려인의 적장자라는데 부정을 하지않고 물러갔다는 점이다.

고려왕건은 고구려인의 적장자를 고구려인의 나라인 발해와 고려로 보았고,방계로서 거란과 말갈이 존재하는데,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고구려가 할아버지라면,발해와 고려는 아들,거란과 말갈은 손자쯤되는 상속서열을 가지고 있었는데,손자가 자신의 부모를 친것을 무도한짓이라고 꾸짓고있는것이다.



거란은 발해의 부여부에 위치하고있음을 보거나,거란이 세운 요나라 태조가 발해의 풍습과제도를 그대로 따라했다는 역사기록을 봤을때 거란은 오늘날에보면 몽골족의 한부류였지만,고구려인들이 대륙벌판에 근거하여 나라를 세울당시,고조선을 이루던 동이족의 한갈래였고,그중에서 부여족과 관련이 되어져있다는것이고,

고구려의 뿌리와 오늘날 한민족이 뿌리가 부여족에서 나왔음을 보았을때,부여라는 갈래는 거란,고구려인,말갈을 다포함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것을 알수가 있다.발해의 지방제도중에 부여부는 거란을 말하는 의미와 동격인데,거란이 부여와 관계가 없다면 통솔부락을 부여부로 명칭을 하지 않았을것이다.

발해와 거란에있어 공통적으로 주목해야할 단어가 迭(질)이라는 단어인데,발해관리들의 품계를 나누는 단위기도했지만,거란의 8부족의 명칭중에 하나의 부족에도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한민족의 뿌리인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묘비를 세우거나 기록할때 부여라는 단어는 빠지면 안될 신성시되는 계승자가 될려면 부여라는 말은 꼭 집어넣어야할 명칭이었음을 보았을때,발해의 제도에서 거란이 부여부의 중심이라면,거란도 고구려인들과 마찬가지로 부여에대한 일정지분을 계승한다는 의식이 분명하게 존재했음을 알수가있다.

결론을 내자면,고려가 고구려의 적장자라고했을때,거란도 부정하지 못했고,발해의땅이 적장자는 고구려인이었기에,발해를 내부적으로 평정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세운 요나라도 자신들도 고구려의 계승자를 주장했지만,정확하게 말하면 발해의 계승자임을 주장했지만,그보다 앞선 적장자인 고구려인들이 세운국가인 고려에게있어서 마땅히 부정할 명분이 존재할수 없었다.

몽골이나 여진이 훗날 중국대륙을 집어삼키지만,부여족 고구려인의 본류인 한민족의 국가에 대하여는 왕을 잡아 국가를 패망시킬수 있는 최후의 순간에서도 그렇게하지 않은것은 뭔지모를 동질감,형제감등 오늘날 일본천황의 가계를 막부장군들이 없애버리지않고 형식적으로라도 유지시키려 했던 관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한민족의 고구려인들은 마지막까지 지켜져야할 그 무엇인가였다.그만큼 동아시아의 동이족에있어서 천년왕국 고구려가 차지하고있던 개념은 동이족의 관념속에 뿌리 깊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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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한민족의 국가였다는 근거에대하여 살펴보자.발해의 시조는 대씨이며,대중상,대조영등이.대중상은 말갈족출신이 맞으나

오늘날에보면 귀화한 한국인이라는것이고 귀화한 말갈인이 수대를 거치다보니 고구려인으로 되어진것이 대중상이었다.

이러한것을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기록한것은 역사기록이 정확하게 표현 했음을 알수가있다.

역사기록에서 발해의 건국과정을 나타날때 당나라장군 이해고의 천문령전투당시에 이에맞선 군사들은 고구려군인과 말갈족군인들로 구성된 대조영군사들이라고 고구려군과 말갈족군을 구분하여  기록하는것을 보았을때 말갈군사와 고구려군사는 그당시에도 서로 의미있게 구분되어졌고,발해건국의 주체군사에 고구려기병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대중상이나 대조영의 군사는 말갈족 지휘관이라기보다는 패망한 고구려군사를 이끌었던 세력을 대표하고,말갈족군사는 따로 말갈족추장이 이끌었음을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는데,발해의 풍습은 부여를 이었고,부여의 풍습은 고구려,백제와 동격이었으므로 발해는 말갈을 강조한것이 아닌,고구려인의 풍습을 건국초기부터 강조하고 있음을 알수가있다.

역사기록에 남아있는 발해의 풍습중에 발해의 관리들은 신분에따라 '금색,은색등의 복주머니를 몸에 차고 다녔다'라고 하였는데 그모양은 물고기모양과 비슷한 복주머니였다고 기록 되어져 있다.오늘날 한민족의 복주머니 풍습은 삼국시대이후로 고려,조선에까지 이어졌고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복주머니의 모습은 복주머니의 입구는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처럼 생겼고 전체적으로보면 물고기모양과 비슷함을 알수가있다.

이러한 복주머니를 몸에지니고 복을 받거나,액운을 물리치거나하는 풍습은 고조선이래에 한민족의 풍습이었다.이것이 첫번째로  발해인은 한민족이었다는 증거이다.

두번째는 발해라는 국가명에서보듯이,건국초기에는 발해인과 말갈인의 연합으로 이루어졌기에 고구려인의 국가인 발해로할것인가,아니면 말갈인의 국가인 말갈로 할건인가 명칭의 문제로 보인다 결국은 지배계층의 주류인 고구려인을 나타내는 발해로 국가명이 정해졌음을 보았을때,발해는 스스로를 고구려인다라는 주체적 표현으로 한것이 두번째증거이다.이러한 사례는 훗날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창건과 궤를 같이하는데,이성계가 말갈족속에서 살고,혼인관계를 유지했고 말갈족 연합세력의 구성으로 조선을 창건했다고해서 조선을 말갈족정권이었다라고 주장하는것은 현세를 살아가는 한민족이 존재가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한 그렇지 않다는것을 한민족 스스로가 증거할수있다.

세번째는 발해는 온돌이나 된장등 한민족의 생활문화를 답습했고,고구려인 중심의 천하관을 바탕으로 주변 말갈족을 제압하고 합병해 갔다는것이다.말갈족이 고구려인을 통치해 다스리는 국가로 표현되기 보다는 주변말갈족을 하나씩 발해인으로 통합해가는 과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때 당시에도 말갈족과 부여족은 서로 다른종족임을 서로 알고있었고,고구려이든,발해이든 국가의 주체는 부여족이라는 부여에서 여러국가가 나왔다라는 부여일통의 관념은 발해국에도 확실하게 이어졌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멸망할때까지 말갈족의 풍습을 따랐다고 한것이 아니라,부여와 고구려의 풍습을 따랐다라고 일관되게 주장했고,역사에서도 발해는 말갈의 풍습을 따랐다라는 기록은 없고.특이하게도 말갈과는 전혀다른 거란의 풍습도 남아있었다라는 기록을 봤을때,발해는 말갈정권이다라고 주장하는것은 머리와 꼬리를 빠꾸는 황당한 왜곡이다.

네번째 오늘날까지 이루어지는 역사왜곡중에 동북지방의 조선족은 조선말기에 이루어진 현상이다라는것이다.동북지방은 발해가 멸망했을 당시에도 그지역에는 고구려인들이 존재했었고,고려로 10만명이 넘는 고구려인들이 귀순했지만,계속 동북삼성지역에는 고구려인들의 후예들이 남아서 살아갔다.

원나라때에도 고려국왕이 요동지역의 왕을 겸임했던 이유도 그곳에 고구려인들이 계속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고,명나라때에도 이곳이 누구의 관할이냐에 따른 대립으로 위화도회군문제가 발생하여,반역의 정권이 탄생되었지만 이쪽지역에는 고구려인들과 말갈족들의 후예가 사는 땅이라는 개념은 이어져왔고,동북지방에대한 한민족의 삶의 터전과 역사는 고구려,발해가 망한이후에도,오늘날의 동북삼성의 조선족이 존재하듯이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동북삼성의 고구려인들이 후예가 이어져 오는것이 조선말기에 형성된 일시적현상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그래서 조선과 청나라간에 국경분쟁이 생겼다라는 관점은 잘못 되었다.중국를 지배했던 한나라,수나라,당나라,원나라,명나라,청나라,오늘날의 중국까지 동북삼성지역이 고구려.발해인들의 영토이며 터전이라는 관념은 계속 이어져왔다.이것을 조선말기에 갑자기 조선인이 이주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라것은 궤변일뿐이다.

애시당초 한민족은 일본의 남방계민족이 아니라,북방계민족이 민족의 주류였다.한민족하면,말을달리며 활을쏘는 북방민족의 피가 흐름을 말을 안해도 본능적으로 느낄수있다.특이한것은 전라도지역에서 발견되는 왕릉급 거대고분의 인골들은 일본의 남방계민족과 관련 되어지는것이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유물들이 만들어졌고,오늘날까지 전해졌는지는 역사가 전하지 않기에 뭍혀있다.발해인은 고구려인이고,백제인이고,신라인이고 같은뿌리인 북방민족계의 고조선인이다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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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라는 나라는 이해하기위해서는 大(큰대)라는 민족의 전통에대하여 살펴봐야한다.

우리나라는 밖으로 한민족의 위대함을 나타낼때 대라는 글자를 병기했다.왕에다가 대자를 첨가하여 대왕이라고 부르는 전통이 그러하며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명인 대한민국에 대를 붙인이유도 우연히 그렇게 붙인것이 아니라 위대한 민족이라는 천손의식이 내포되어있다.

몽골의 왕은 칸이라하고,일본의 왕은 천황이라하며,중국의 왕은 황제라고 불렀다면 한민족의 왕은 대왕이라고 표기했다.우리나라의 역사중에 가장 사대주의적 태도를 취했던 조선의 왕들조차 죽어서 시호는 대왕으로 표기하려고 했을만큼 왕이라는 표현보다 대왕이라는 표현을 좋아했다.

발해도 또한 한민족이었기에 발해왕들은 스스로를 대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스스로 황제라고 표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황상이라는 말은 사용되었지만 이때의 황상은 천손의 자손이 다스리는 나라의 왕이라는 주체성의 표현이지,천자라는 의미의 황제를 의미하지 않았다.천자와 천손의 차이는 이미 설명했기에,부연하지않는다.

고구려는 고씨의 나라였고,발해는 대씨의 나라였다는데는 관직명에 기록된 이름들을 보면 쉽게 파악할수있다.그런데 고씨와 대씨 (높다는것과 크다는것)는 일반적인것보다 더하다라는것에는 동격의 표현이다.

발해의 관직을 가졌던 사람들의 성씨들에는 대씨도 있고,고씨도 존재하는데,역사서에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고,고구려의 풍속을 지킨다고 하였다.고구려시대부터 이미 대씨와 고씨는 존재하였고,대씨는 바다쪽를 담당하는 갈래의 성씨였고,고씨는 산악쪽을 담당하는 갈래의 성씨임을 알수가 있다.고구려는 육군도 용맹했지만,수군도 수.당의 수군을 궤멸시킬만큼 강했다.

고구려와 발해는 그 근원을보면 동격적인 명칭임을 알수있다.즉 지배계층의 부족의 성씨를 표현한 국가명임을 알수가 있다.발해는 대발해라고하면 되겠는데,바다를 지배했던 나라의 의미를 가지고있다.발해의 명칭이 호수의 지명이거나 고어에서 유래한다는 주장은 맞지않고,

고구려의 부족중에 고씨족의 부족과 대씨족의 부족이있는데,이중에 고씨족의 국가가 고구려,대씨족의 부족은 발해라고 불려졌음을 알수가있다.고씨족은 산악쪽,대씨족은 바다쪽으로 지배했던 부족성씨임을 의미하고있다.

발해는 고구려,백제,신라와같은 북방민족의 계통인 한민족이었고,(전라도지역은 제4의 무엇인가 존재했었는데무엇이 존재했는지 역사자체가 완전히 뭍혀버렸기에 논외로하고)그의미는 바다를 지배했던 부족의 명칭임을 알수가있다.발해는 정식명칭이 고구려와 동격으로 대발해라고해도 이상할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조선기술은 오늘날에도 최고지만 이미 삼국시대부터 세계최고였고,한민족은 북방민족계열이면서도,바다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가진 민족으로,중국처럼 육지만을 중요시하는 민족성을 가졌던게아니라,우리나라의 역사이래,바다라는 지역의 지배권을 고구려의 광개토태왕,백제의 담로,신라의 유라시아해상무역,고려의 아라비아무역,조선의 수군등 바다의 해전뿐만아니라 바다의 역사기록은 한민족이라 할만했다.

발해의 당나라 선제공격이 바다의 수군을 이용하여 당나라를 기습적 궤멸시킨것이나,발해시대에 고구려유민의 우두머리인 이정기장군이 당나라의 등주를 바다를 이용하여 진격해 들어가 60여년을 지배하여 독자적 세계를 구축한것등을 보아도 고구려인들은 바다에 능했고,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국가의 국명이 발해인것은 고구려와 발해는 동일한 민족이 세운 국가의 연속성을 가졌음을 증명한다.

우리나라를 활만 잘쏘는 기마민족의 특징뿐아니라 수전에도 강한 민족이었음을 고구려,발해,고려,신라,조선수군이 증명해주고있다.여진,거란,몽고,한족등의 민족은 바다에서는 약했고,고래로부터 동아시아민족중에서 바다하면 한민족보다 활발했던 민족이 위에 갈래민족은 어디이겠고.발해는 어느나라의 역사인가는,바다라것이 어떤뿌리의 민족에게 어울리는 명칭이었겠는가?고구려,백제,신라의 각각건국신화에도 나온다.바다와 강의 신의 딸이 어머니이고,천손과 바다와 관련된 민족의 결합임을 강조함을 알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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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고구려의 풍속을 지키며 유지하고,왕을 기하라고 부른다고 중국역사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고구려의 왕은 대왕또는 태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음을 알수있는데,

쉽게생각하는 부분이 대왕이나 태왕이라는 호칭이다.일본의 왕을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우리나라가 국서를 주고받았음을 나타내주는 역사기록은 무수히 많다.

오래전 발해의 3대 황상인 대흠무가 일본국 왕을 천황이라고 국서에 표기하는것을 보았을때,천황이라는 호칭은 일본국 왕을 부르는 고유명사로 삼국시대이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왔음을 알수가있다.

중국은 진시황이후로 황제라는 호칭을 오늘날까지 고유명사로 이어져 오고있다.그러나 오직 우리나라만이 우리나라의 왕들에게 주어진 고유명사인 명칭을 통일되게하여 오늘날에 이르지 못하고있다.

우리나라의 왕의 명칭인 대왕은 일반적인 의미가아닌 중국의 황제,일본의 천황,한국의 대왕이라고 정하여도 이상할것이 전혀없을 정도로 고구려,백제,신라,발해의 각나라에 두루 고유명사로 사용되어졌다.



같은뿌리인 이들 나라들에는 왕에대한 여러가지 명칭이 존재했지만 공통적인 명칭으로 널리쓰인게 대왕 호칭이다.발해또한 같은뿌리인 우리나라 민족이기에 대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고,이때의 대왕의 의미는 황제,천황과 동격의 의미를 가지는 호칭으로 쓰였다.

대왕폐하라는 의미가 전혀어색하지 않았고,황제만이 폐하라는 호칭을 쓴다는 의식또한 우리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았다.왕폐하는 없어도 대왕은 폐하라는 호칭을 함께붙여 사용할수가 있었음을 볼때,

대왕의 의미는 단순히 왕이라는 의미로 쓰이지 않았음을 알수가 있다.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울때 고구려이든 신라이든 백제이든 모든 임금을 표현할때 왕으로 표기하고 부르는것은 선조들도 행하지않은 사대주의적 표현이다.

선조들은 외교문서에는 상대방국가에대하여 스스로를 낮추었지만,현실적인 통치속에서는 황제와 천황과 동격으로 생각하고 명칭이나 호칭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연원을 사용하거나 시호를 사용하는점에서도 독자적이었고,조선시대에 들어 독자적연호와 시호를 굴복하여 사대굴종한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이것은 조선의 태생뿌리자체가 배역의땅에서 나온 존재들이었기때문에 이루어진것이다.

배역의 땅이라는것에는 민족의 뿌리와는 다른 별종의 뿌리가 우리나라의 역사속에 존재했었다는 의미다.오늘날에 와서는 교묘히 감춰져 포장되었지만 종자부터가 달랐다.

우리나라의 역사속에있던 나라들의 기본인식은 우리나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천손의 자손이라는 관념을 가지고있었다.중국은 천손의 개념이아니라 천자의 개념으로,같은 의미같지만 전혀다른 개념으로 천자는 어떤부족이나 민족이든 뛰어난 자는 하늘의 아들을 자처할수있지만,

우리나라  천손의 개념은 동일한 부족이나 민족의 뿌리속에서 나온다라는 개념을 가지기에 이민족이 우두머리가 될수가 없는 통치체제관념을 가지고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발해의 대왕을 기하라고 했는데 기하라는 표현은 폐하와 동격이면서 우리민족이 독창적 황제나 천황에 동격으로 불리어진 명칭이다.

발해의 황제가 폐하라는 명칭을 몰라서 기하라는것을 사용했다고 볼수 없는것이 발해2대 대무예가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폐하가 천하를 속이려고하시오?"라는 구절에서보면 폐하라는 명칭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있었지만,폐하라는 명칭을 사용하지않고,발해의 신하들은 자신들의 황상에대하여 기하라고 사용했음을 알수가있는데,발해는 건국초기부터 고구려의 풍습과 제도를 이었다고 주장했었는데 고구려가 대왕기하,태왕기하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것은 발해와 고구려의 건국터울이 30년이 넘지않기에 고구려시대의 대왕들에게도 똑같이 사용되어졌음을 미루어 유추할수가 있다.

고구려,발해등의 황제들에게 황제폐하라고 사극에서 표현하는것은 잘못되었고,만약에 실제로 사용되었다면 대왕기하나 단독으로 기하라고 불려졌을것이다.대왕기하는 우리나라의 고유명칭이었고,황제폐하는 중국의 고유명칭이었고 이둘은 그당시부터 서로의 의미를 알고있었고 명칭이 상호존재했기에 어떤것을 취사선택하여 사용했겠는가는 민족의 입장에서 봤을때 당연히 알수가 있다.





조선왕조 600년동안이 우리나라역사와 문화에 끼친 영향은 그 폐혜가 너무깊고 악해서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어지고있다.민족과 역사의 반역집단인 조선이라는 나라는 우리나라역사에서 존재하지않았다면 더 좋았을뻔 했다.

고구려,신라,백제,발해,고려는 우리나라 민족의 계통이 세운나라가 맞고,조선은 그 근본이 백제와 대립각을 세웠던 특정지역의 일부지역에서 태동되어,여진족쪽으로 도망갔다가 그쪽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결국 한민족을 집어삼킨것으로,조선이 태동자체가 항명과 배역으로 시작하였듯이,원래뿌리자체가 배역의 땅에서 근거를 두고 정권이 탄생되었기에 어쩔수없는 운명이었다.

오늘날에 와서 이들지역에서 있었던 감춰진 역사가 역사속에서 사라져 없어졌지만,어찌되었든 두번다시 조선과같은 정권을 탄생시켜서는 한민족의 미래가 없다는 점이다.자주적,민족적이며,호방했던 기상을 조선이라는 기풍속에서 전부 꺼꾸로 민족성을 이끌어갔을뿐아니라 민족의 기상을 갈가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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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에게는 무예에가 뛰어난 광개토태왕를 닮은 아들들이 있었으니 발해2대왕이되는 무왕 대무예와 그의 친동생 대문예다.

대조영이죽고 2대 황제로 즉위한 대무예(676-737)는 국가의 튼튼한 기틀을 마련한 조선의 태종처럼,국내외의 상황들을 정리해야할 임무가 주어질수밖에 없었다.

당나라의 현종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로 영속되는것을 마땅치않게 생각했으며,신라의 성덕왕또한 고구려의 영토의 주인을 자처하면 발해와 대립하며 영토를 확장하는데 노력하고있었다.


726년 당나라는 백두산과 연해주부근에 근거를삶아 세력권을 형성했던 흑수말갈족을 이용하여 발해의 세력이 팽창되는것을 견제하고,아울러 옛고구려영토의 일부라도 간접적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였다.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발해의 무왕은 자신의 대에서 고구려 패망의 원흉이며,한민족의 천년원수인 당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계획한다.




먼저 내정의 안정을위하여 당나라와 손을 잡은 흑수말갈을 제압하기위하여,황제의 군령권을 발령하여 동생인 대문예를 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정예기병 5만의 군사로 흑수말갈을  제압하라고 하였다.이에 대문예가 상소하여 말하길"소신이 당나라에 숙위하며 당나라의 국력과 나날이 발전되는 정세를 그동안 보아왔는데,흑수말갈과의 전초전으로 당나라와 대립하여 전쟁를하려는것은 발해의 국체를 어렵게 할수있기에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이에

인안황제인 무제가 꾸짓어 가로대"너는 당나라의 강함만을 두려워하고,고구려의 혼은 잊었으냐?,평화는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가 있을때 지킬수 있는것이다.여기서 굴복하기 시작한다면 후대의 기틀을 기약할수없음을 알고 출전하라."대문예는 내키지않는 심정으로 흑수말갈의 제압을위하여 백두산쪽으로 나아갔다.



오늘날에 보았을때 이 흑수말갈은 중국대륙을 삼킨 건주여진이 일족으로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갈래이며 조선 인조임금의 대갈박을 땅에 두드리게했던 삼전도의 주인공 청태종의 속한 갈래이기도 하다.

흑수말갈의 경계선에 다달을쯤에 다시 대문예는 전령을 통하여 상소를 올리며 회군하기를 청한다.이에 분노한 무제는 즉시 군사령관을 대일하로 바꾸고 임지로 나아가게하고,대문예는 궁성으로 돌아오라는 소환명령을 하게된다.이에 대문예는 돌아가면 황제의 군령을 어긴죄를 지게될까 두려워 당나라로 투항하여 도망을갔다.

나라를 끝까지 지켜야할 지도층 장수가 먼저 당나라에 투항해버리는 어이없는 상황에서 흑수말갈과의 싸움은 싸워보기도전에 무너져내리게된다.패전을 접한 무제는 당나라에대하여 친동생인 대문예의 소환을 요구하였으나,당나라현종은 오히려 대문예에 당나라 대장군의 벼슬을주며 우대하였다.

이에 발해황제 대무예는 신하들을 모아두고,발해국 국체의 안위를 모두걸고,당나라와일전을 할 뜻을 비추며"우리선조의 나라 고구려가 망할때 형제들의 대립을 이용하였듯이,오늘날에 와서도 똑같은 정책으로 우리발해를 망하게하려는 의도를 숨지지 않고 있소,이에 이후로 당나라가 발해를 건드릴 생각조차하지 못하도록 전멸적 보복을 가하도록 하려고 하며,이싸움에 유불리논하면 개전을 머뭇거리는 신하들은 짐에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겠으며,2년내에 정벌준비를 완료하도록 하시오"

발해국의 문무신하들은 당나라의 정세염탐과 주변국들과 전략적 선택을 추진하게된다.이때당시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하여 굴종의 평화를 얻으려는 세력과 투쟁하려는 세력간의 타툼속에있었는데 발해는 강경파의 우두머리인 가돌한을 적극지원하여 당나라의 복속을 받아드리려는 온건파 이소고를 처단하게한다(730),


거란과 돌궐세력들을 발해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만들기에 2여년을 공을드린 732년 9월,무제는 장문휴(693-749)장군을 수군원수로 삼아  발해정예수군 2만명과 함께,당나라 동북아 수륙합동군기지인 등주(산동성 봉래현=중국 칭다오=청도)을 선제공격하도록 명령하고,아울러 동시에 무제는 직접 수륙합동연합총사령관의 직책을 가지고,발해 고구려기병 5만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진격해 드러간다.

먼저 선제공격 별동임무를 맡은 장문휴장군이 이끄는 발해수군은 압록강하구를 출발하여 등주에 도착하여
상륙작전을 개시하자,등주에는 당나라군 10여만명이 지키고있었으나,기습적인 공격에 당나라군은 사분오열 흩어져 도망가기에 바빴고,등주자사 위준또한 대적하여 전열을 정비하여 싸워보지도못하고,목이 달아났다.

등주를 점령한 장문휴장군이하 병사들은 등주에 살아있는 모든것과 건물들을 완전히 전멸시켜 이후 등주가 복구되는데 당나라의 국고의 대부분이 소비될 정도로 참혹했다.당나라 현종은 이러한 전황를 전했듣고 즉시 장군 개복신으로하여금 지원군을 이끌고 등주로 내려보냈지만,개복신이 도착했을때에는 상황이 종료되고 모든것이 폐허가 된 이후였다.

육로쪽으로는 대무예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북경쪽으로 진격해 들어온다는 전령을 들은 현종은 대문예를 사령관으로여 2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가서 대적하도록하고,급히 신라의 성덕왕에게 도움을 청하여,발해의 남쪽방향을 공격해주도록 요청하자,성덕왕은 이기회를 이용하여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에대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달라는 요구조건을 선행하자,당나라현종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요구조건을 들어주었다.



이에 성덕왕은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에게 3만의 군사를 주며 밀명하길"발해국의 무왕은 선조인 광개토태왕의 환생이라고 할만큼 군신으로 불리는 인물이고,서로말이 통하는 백성들인 발해와 우리는 같은 뿌리이기에,싸울일이 생기면 피하고,피할수없는 상황이면 후퇴하여 도망해도 가하니 공격하는 척만하도록 하라."

대문예와 출전하는 당나라군사들은 발해국의 무제가 직접 친정하여 공격한다는 소리를 듣고,싸우기도전에 이미 사기가 땅에 떨어져,발해국의 군사들을 만나기도전에 80-90%가 추위에 죽거나,도망을 가버려,대문예는 싸워보기전에 철군할수 밖에 없었다.

김윤중의 이끄는 신라군또한 당나라군의 전세를 이제나 저제나 지켜만보다가,후퇴했다는 전황을 듣자마자,행군방향을 바꿔 신라로 돌아가 버렸다.발해황제 대무예가 이끄는 육로군은 북경근방까지 진격하여 정복한후,이후로 발해가 멸당할때까지 발해영토로 지배하였고,당나라는 이후로는 발해에대하여,군사적공격을 할생각을 전혀 하지못했음을 보았을대,이때 무제의 공격의 얼마나 공포스럽고 참혹했는지 미루어 짐작할수있고,

춘추필법으로 유명한 중국의 사서들이 발해 대무예의 공격과 당나라의 패전에대하여 숨김없이 기록해놓은것을보면 그당시 당나라역사에있어 반드시 기록되어져야할 정도로 충격이었음을 알수가 있다.당나라 역사서들이 패전했을때 승전한 상대국 장수의 이름을 기록치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발해의 수군원수였던 장문휴장군에대하여는 정확하게 이름을 전하는것을 봤을때,우리선조인 장문휴장군에대한 연구와 관심이 더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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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이세민의 눈을 파서 눈물을 머금게했던 고구려의 유명한 안시성전투에서의 장군의 이름은 역사기록속에서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않다.

안시성전투는 실제했으나,양만춘은 실제하지않는 가공의 인물이라는것이다.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살펴보면,설혹 이것이 의미가있다고 조금이라도 가정해보더라도 이것은 이름이아니라

당나라와 고구려의 전투가 벌어졌던 계절을 의미할뿐,장군의 이름은 아니다.


안시성싸움이 벌어진 고당전쟁의 계절은 이른봄부터 초가을까지인데,양만춘을 문자그대로 풀이하면 "버드나무가 만발한 계절인 봄"이라는 의미일뿐이다.고구려시대에대한 정확한 기록들은 고려시대에 작성된 역사서들이 그나마 사실적이고,조선시대에 기록되어지는 고구려역사들에대한 기록은 거이가 창작이거나 사실과 동떨어진 경우가많고,그 일례가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야사에다가 기록했다는것이다.

안시성 성주와 연개소문은 동시대 사람이기에 안시성 성주가 누구였느냐를 이해하려면 먼저 연개소문의 생몰년을 살펴봐야한다.연개소문이 죽을때 나이가 백전노장의 흰수염을 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진 전투도가 보이긴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고 연개소문은 광개토태왕처럼 이른 나이에 죽었는데,

생몰년은 616-665년이 역사적 기록과 부합하고,오늘날의 나이로보면 49세정도에 죽었기에 그당시 사회상에서는 노인이라고 주장할지모르지만 오늘날의 나이로는 이른나이에 죽었음을 알수가 있다.안시성 성주가 누구냐를 유추해보기 위해서는 안시성성주와 연개소문은 서로 상명하복의 관계가 아니였음에 주목해야한다.

이러한 의미는 안시성 성주나 연개소문은 독자적인 세력과부족을 가지는 지위에있는 우두머리였음을 알수
가있고,연개소문은 기록에보아도 서부대인의 부족장의 위치에 있음을 알수있고,영류왕을 단칼에 내리칠때에 동원된 부하들은 서부에 소속된 부족군 집단이었기에 왕의 말보다,직속 우두머리의 말에 더 충성했음을 알수가 있다.

안시성 성주가 연개소문에 맞서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고 맞설수 있었던것도 자신또한 하나의 부족의 우두머리였기에 가능했고,그에따른 부족민들의 절대적 신임이있었기에 가능했다.연개소문과 안시성성주의 관계를 알아봤다면,역사에 기록되어지지않은 안시성 성주의 부족은 무엇이냐라는 의문이 들어야 정상일것이다.



이사람의 부족을 알려면 현재 중국에 속해있는 동북삼성의 위치에 어떠한 부족들이 강했는지 살펴보면 알수가있는데,러시아쪽 국경으로는 흑수말갈,요동과요서를 구분하는 중국과 맞따은 쪽은 속말말갈,그리고 두만강이나 백두산쪽으로 위치한 말갈이 존재했는데,안시성이 위치했던곳에는 속말말갈부족이 강했던곳이다.

오늘날에 와서야 말갈은 다른나라로 민족으로 구분되어졌지,고구려라는 나라에서는 여러부족들속에 하나로 뭉쳐진 통합 고구려의 나라였기에,중원에서 보기에는 말갈부족은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기록하여도 이상할게 전혀없다.

말갈은 우리나라역사속에서는 물길,여진,만주족등의 여러이름으로 불려졌는데 공통적으로 강이나 물하고 깊은 의미를 가지는 부족이름을 가지고있다는것이다.물길이나 말갈의 의미는 호수나 강물과 관련되어 불려진다는것이다.안시성 성주는 정체는 어느정도 파악이되었다.



연개소문처럼 하나의 부족의 우두머리라는 것인데,그휘하에 속한 안시성의 부족민이 기록상 10만명 정도되었음을 알수가있는데 이정도의 일가를 이루는 부족은 안시성근처에서는 속말말갈뿐이었다.오늘날에 중국의
동북삼성은 러시아쪽에있는곳은 흑룡강성,중원쪽 경계에있는곳은 요녕성,중앙인 조선족이 살고있는 연변이있는 길림성으로 구분되어지는데,

여기서 흑룡강성은 흑수말갈지역이니 검은 흑이 붙어있고,중간에 위치한 길림성은 조선족의 자치구이니 의미를 알수가있는데 요녕성쪽에 존재했던 속말말갈의 존재는 지리명으로는 알수가 없다.속요녕성 이랬으면 쉽게 알수도있었겠는데,그러지않은 이유는 더 큰 위대한 나라가 그곳을 기반으로 세워졌기때문이다.

고구려의 장수이면서 역사기록속에 연개소문과 동시대에 살았고,안시성을 근거지로했고,망한 고구려를 대신하여,끝까지 저항하고 결국에는 고구려의 후예라고 선언한 나라의 아버지였던 대걸중상이라는 사람을 역사속에서는 기록하고있다.

대걸중상은 연개소문보다 8년이 늦게 태어난 생몰년이 622-698 이다.대걸중상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이고 대조영은 중국사서에" 고구려의 별종"으로 기록되어져있는데 별종이라는 의미는 고구려의 사람이나 부족이 다르다는 의미로 받아드려도 이상할것이 없다.

안시성은 고구려가 망한후에도 끝까지 저항한 성에 속하는데 이러한 저항정신의 밑바탕은 자신들의 부족이 속한 토착 지역이었기에 안시성이 함락되는 670년대까지 항전했다고 볼수있고 성이 함락되면서 당나라에 끌려가지만,결국은 당군을 격파하고 고구려가 망한지 30년도 넘지않아서 발해라는 고구려의 계승국이 탄생한것이다.

대걸중상은 그의 아들 대조영이 발해를 세우기이전부터 이미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왕이라는 칭호를 내려줬어도,그런칭호 필요없다라고 할만큼 독자적 군사력과 세력을 갖추고 이끌수있는 힘을 가진 장군이었음을 알수가있고,대조영의 아버지 대걸중상이 안시성 성주였다라는 것은 역사에 기록을 살펴보면 양만춘이라는 허울데기 거짓말 가공의 인물보다는 더 사실적인 역사에 부합될수 있음을 알수가있다.

양만춘이라는 이름의 장군은 애시당초 고구려에는 존재하지않았다.대걸중상은 역사속에 확실하게 기록되어진 안시성의 위치했던 지역의 이름난 장군이었고,연개소문도 힘으로 해서 국력을 낭비할만큼의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안시성성주와 싸울필요가 없다고 느겼을 만큼 당대의 영웅이었고,당태종을 격파할정도의 담력과 베짱이 있었기에 고구려의 기상을 계승하여 발해를 세울 수있었던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발해를 우리나라의 역사로 보지 않는다면 안시성전투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아니라는 부정이 되어버리기에,고구려역사왜곡만 관심을 가지고 발해를 내버려두는것은 황당한 논리이고,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낸 조선후기 인물이 적은 다른내용을 보면,광개토태왕비를 아예 말갈황제인 금나라의 왕의 비석이라고 전한다고 기록할만큼 역사인식이 미천했던 사람이 안시성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전한다고 적었놨다고 맞는 이름이라고 한다면 지나가던 소대가리가 웃을 일이다.

역사기록에서 유명한 사람은 후손들이 중시조이든 어떤형식이든지 자신의 성씨의 시조로 숭상하는것이 우리나라의 풍습이었는데 양만춘은 누구의 시조라는 말을 들은적이 전혀없다.애초부터 가공의 양씨 성을 가진 만춘을 날조했기 때문이다.엉터리 야사의 인물을 사실인냥 이름을 전하는것 또한 역사왜곡이며,연개소문과 맞짱을 뜨고,당태종 이세민을 격파할정도의 담력을 가진 동시대의 인물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대걸중상인 고구려의 대중상 장군뿐이다.

안시성 성주는 대걸중상인데 왜 역사에 기록되어져있지 않았는가 하는것은,역사의 기록이 되어있지 않은게아니라 역사기록의 행간에 의문을 갖지 않기때문이다.고구려를 망하게한 측천무후가 왜 별볼일없던 아무 전공이 기록되어지지않은 대걸중상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내리겠다고 애걸했는지,그만한 무력과 전공을 고구려 장군이었을때부터 보여줬기에 인정받은것이고,고구려가 망하자 그러한 칭호를 주려고했다는 것이다.역사교과서에 안시성전투의 장군은 양만춘이라고 기록하는것은 광개토대왕이 말갈황제라고 전한다고 기록한것을 믿는것과 다르지않을 정도로 코메디임을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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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훈요 10조에는 전라도지역은 배역의 땅이니 인재라도 등용하지 말라는 조항이 들어있다.

이러한 훈요 10조에대하여 위조설이나 첨삭했다는 의견등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지만,이러한 구절은 우리나라의 역사, 일부의 미스테리를 숨겨 놓았기때문이고,훈요십조의 내용은 위조나 첨삭된 구절이 아니라 진실한 구절이었으며,


그당시 동족인 발해를 멸하는 거란에대하여 극한 분노를 표현했고 배척했던 고려인의 모습을보면 왜 이러한 구절이 훈요10조로 후대에 널리 전하라고했는지 충분히 이해할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로 축소하여 삼국의 시대로 이해하고 은폐하려했던되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오늘날의 전라도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다스리던 백제지역이 아니었고,백제의 주류문화는 충청도이고,전라도는 우리민족이 입장에서 볼때는 이민족이 한민족을 협박하고 멸하려는 세력의 주거점지역이었다.

역사속에서는 이들에관한 기록이 역사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충청도와 아울러 백제의 나라였다고 두리뭉실 역사를 만들었기때문에,이웃나라의 역사기록이나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속에 틈틈이 전라도지역에 존재했던 주체세력에대한 삼국시대와는 동떨어진 비상식적인 기록들이 나타나고있다.

이러한 전라도지역에 지배 주체세력이 이룬 국가가 백제가 아니라면 누구였는가가 문제인데,결론적으로보면 이민족중에 유물이나 유골등으로 봤을때 북방계통의 민족이아니라,일본계통의 민족이었음을 알수가 있다.전라도지역에 살았던 주체세력이나 주민들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입장에서 봤을때 멸해야할 대상이고,정복해야할 대상이었다.이러한 역사적사실을 후삼국을 통일했던 고려의 왕건이나 그당시 사람들은 잘알고있었고,민중의 밑바탕에 그러한 역사의식이 존재하고있었기에,전라도지역의 사람은 정부관리로 중용하지말라는 훈요10조구절이 들어있게 되었고 역사속에서 전해졌다고 할수가있다.

백제와 전라도의 관계는 정복과 멸해야할 대상으로 규정했는데,역사적으로보면,백제는 점차적으로 전라도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정복하고 멸하면서 확장되어갔는데,이러한 전라도지역은 백제만 정복전쟁을 한것이 아니라,고구려나 신라또한 이지역에대한 정복을 꾸준히 진행하였다.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왜라는 세력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국경과 인접했음을 알수가있는데,이러한 구절은 왜라는 세력이 일본열도에있는 왜라는 나라와 혼동하기때문에 생기는것이고,한반도내에 고구려,백제,신라와 국경을 맞대는 왜라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세력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에있어 멸하고 정복해야할 대상이었으며,오늘날 그지역이 어디였는가하면 전라도지역이다.오늘날 고구려의 지배지역을 경상도는 신라이고,전라도는 백제가 지배했던 지역이라는식으로 뚜렷하게 구별하여 표시하는데,사실은 지금의 전라도지방에는 고구려가 정복하고 지배했던 고구려지역도 존재하고있었고.마찬가지로 신라지역이라고 표시된곳 또한 고구려가 정복하고 지배했던 고구려지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영향을 미치던 지역은 한강이북지역만이 아니라,남으로는 제주도까지 그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삼국사기 문자명왕 13년 4월의 기록에는
특이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고구려 사신이 위나라에 가서 나누는 대화가 기록되어있다.

고구려 문자명왕 13년은 서기 504년이기에 그시기에 涉羅爲百濟所幷:섭라를 백제가 병합하였는데,이것때문에 섭라에서 생산되는 옥이라는 특산품을 바칠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섭라는 제주도를 말하고,섭라가 백제에 복속되었을때는 동성왕 20년 서기 498년이었는데

복속이라는 말은 공납과 조세를 바친다는 의미였고,이말은 그전까지는 섭라는 고구려에 공납과 조세를 바치고있었는데,중간에 백제가 가로채서 지금은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전복껍데기속에 들어있는 옥이라는 제품을 바칠수가 없다고 생각할수가 있다.

이런의미가 아니라면,고구려,백제,신라등 모든 국가는 서로 국가간의 교역을 하였는데,그전에는 구했는데 섭라가 백제에 복속되어 제품을 구할수가 없어서 바칠수가 없다는것은 비상식적이다.이러한것을 보았을때,충청도지역을 제외한 남쪽지역은 무주공산이었고 상황에따라 고구려,신라,백제에의하여 정복되거나 멸하게되었다고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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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대왕 유리왕은 주몽의 아들로 예씨부인의 소생이었다.


주몽에게는 많은 부인이 있었으나,부여에 있을때 결혼하여 태어난 맏아들인 유리가 자신을 찾아오자,여러 왕비들과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리를 태자로삼아 고구려 2번째왕이 되게하였다.


역사속에서 유리왕의 발자취는 고구려의 옛시조인 황조가라는 시조가 전해 내려오고있는데 유리왕은 남녀의 운우지정에는 관심이 많은 왕이었으나,자식과 나라일에 관해서는 망조의 왕이었다.



유리왕의 첫번째 아들이며 태자인 도절의 죽음은 유리왕때문이었다.고구려가 아직 나라의 깃틀이 잡히않아,부여가 더 강할때였기에,부여의 왕은 고구려의 태자를 볼모로 보내기를 원했고,유리왕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태자 도절을 볼모로 부여국에 보내려고했으나,도절은 죽어도 볼모로 가기싫다고 거절했기에,아버지인 유리왕의 미움을 샀고,그일이 있은후 6년만에 세상을 떠난다.

다시 두번째 아들인 해명을 태자로 삼았으나,해명또한 아버지인 유리왕의 미움을 사 스스로 달리는 말위에서 창을 땅에박은후 자결하였는데 그 이유또한 이웃나라의 왕에게 자신의 아들이 밉보여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태롭게하였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하였다.이처럼 유리왕은 자신의 두아들을 이웃나라와의 관계에 도움이 되지않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게하였는데,

유리왕의 이러한 처사는 자신의 아버지인 주몽의 호방하고 ,주위나라에 당당하게 맞써 싸웠고,주위에 신하와 왕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속을 천금같이 여겨 유리를 태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어준 고주몽이 이룩한 고구려제국의 기상과는 전혀 딴판인 모습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아들들을 쳐죽이면서,그와반대로 여자들 문제에있어서는 "훨훨나는 저꾀고리 암수 서로 정겹구나......."이따구 희희낙낙하여,역사에 전해지는것을 보았을때 유리왕은 애시당초 고구려제국을 건국한 고주몽과는 전혀다른 기질을 가진 별종의 아이였거나,돌연변이가 아니라면 고주몽의 핏줄이 아닐가망성이 매우 높다.

두명의 형이 이웃나라와의 관계때문에 처참하게 죽어가는것을 보았던 유리왕의 세번째 아들이 있었으니 이사람이 고구려의 전후후무한 전략과 지략의 군신으로 추앙받게되는 대무신왕이다.후에 대무신왕이되는 무휼은 아버지인 유리왕에게 자신의 주장을 해보지도 못하고 어처구니없게 죽어가는 형들의 모습을 봐왔기에 형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게된다.

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고구려의 유리왕을 찾아와서 꾸지고,가르치기에 또다시 유리왕은 굴복하여,부여의 요구대로 잘따르는것이 만복이 근원이될것이다라고 말하자,무휼은 부여의 사신을 따로 불러내어 말하데,"고구려를 무시하는 너희 부여왕 대소가 문제이다.칼에는 칼로써 맞써겠다"고 꾸짓고 사신을 돌려보내자,이를 들은 유리왕은 전철의 태자들처럼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망치다는 명목으로 벌을준게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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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휼의 기상에 놀라 잠자코 따르게되는데 이후로 부여와의 전투는 무휼이 직접나아가 싸우게되고,무휼이 고구려의 3대왕에 오르고나서도 이웃나라의 칼에는 칼로써,예의에는 예의로써 화답하여 죽을때까지 이웃나라와의 전쟁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고 승전했기에,백성과 신하들이 군신으로 추앙하여 고구려의 군신 대무신왕이 되었다.

고구려 왕들에관한 많은 이야기와 내용들이 있었을 것인데,다사라지고 고구려의 기상과는 전혀 딴판인 왕이었던 유리왕이 여자와 희희낙낙했던 시조가 삼국사기 기록속에 남아전혀지는걸 보면,자신의 아들의 잘못에는 추상같이 자결을 명령하는 사람이 "여자싸움에는 이내 몸은 외롭구나" 이따구 시조를 써서 자랑스럽게 기록했다는것은 그당시 상황과 이웃국가간의 대처능력을 보았을때 허구적인 내용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황조가의 작자가 유리왕이라고하더라도 이러한 고구려기상과는 전혀딴판인 왕의 시조는 교과서에서 가르쳐 배우게할 교훈적 가치가없으며,후세에 전혀 모범이 될수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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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와 첩의 차이에대하여,한자로 처(妻)는 어려움이나 좋은일등을 모두 함께처리한다는 뜻을 가지고있고,

첩(妾)은 의미그대로 시중들기위해서 서있는 여자를 의미한다.

시중하기위해서 상시대기한다는 의미는 분명한 의미가 첩은 단지 성교의 대상일뿐이고 집안일이나 가족관계상에서 배제됨을 의미하는 한자단어이다.


이와같은 단어상의 구별뿐아니라 처와첩의 자손은 구별하여 조선시대에서 엄격한 적서의 차별을 법률로써 규정하여 불이익을 받게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보통은 첩이었다가 처가 될수있는 경우가 전혀 없었지만 간혹 예외적인 경우가 존재하여 첩도 처가 될수가있었는데,그길은 바로 처가 자식이없고 첩만이 아들을 낳았을 경우이다.신분제사회에서 사대부집안 여자들에게 적용된 차별이 처첩관계라면 왕의 여자에게있어 적용된차별은 왕비와 후궁의 관계이다.후궁도 후비가 될수가있는경우가 있는데,왕비가  아들이없고  후궁이 아들을 낳았을 경우이다.후처나 후비는 정식처로 첩의 신분이아니기에 그의미는 첩과는 달랐다.

신분제 사회상에서 첩이 처가 될수있는 유일한 가망성이 있는 신분의 로또는 아들을 낳는것이었다.예를 들어살펴보면 1466년 세조임금시절,중추원부사 김형은 자식을 낳지못하는 민씨와 두아들을 낳은 도씨 두여인을 함께 데리고 살았었는데 김형이죽자,도씨의 아들중 김견이 자신의 어머니는 첩이아니라 처의 신분임을 확인해달라고 세조에게 상소를 하였다.

이에 세조가 신하들의 서로다른 의견을 취합하여 내린결론은 도씨는 먼저 결혼한 민씨와 같이 살았기에 나중에 들어온 도씨는 첩이 분명하나,민씨가 자손이 없으므로, 아들을 낳은 도씨가 후처로서의 지위를 갖는것이 합당하다하였다.이러한 결론은 아들의 의미가 중요했음을 알수가있다.

오늘날에는 처의 아들이든 첩이 아들이든 상관없이 상속이나 신분에있어 똑같은 대우를 법률에의하여 받지만,신분제사회인 조선시대에서는 첩의 자식은 아예 인간의 구실을 할수없도록  법제화하였기에 처인지 첩인지의 구별은 조선시대에서는 아주중요했다.오늘날에도 처가 아닌 첩을가지는 사람들은 어떤계층의 사람들일가하고 궁금해서 포탈검색창에 첩이라고 검색해봤더니 아래와 같은 관련검색어가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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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는 입으로는 공자왈 맹자왈하면서 도덕군자인척하며 힘깨나 쓰는 사대부양반가문층의 도덕적 이중성을 가장 잘나타내는 단어가 첩이라는 단어였다.일반백성들은 처이외에 다른여자에게 관심을가지면 부인이외에 여자를 간음하였다고하여 교수형에 처했으나,왕이나 특권계급층들은 첩이나 후궁제도를 활용하여 도덕적,법률적처벌에서 예외의 특권을 향유하는 그들만은 예외였다.

오늘날에 포탈에서 첩이라고 검색했을때 관련검색어로 제시되어지는 단어들을보니,첩이라는것은 아무나 관련검색어로 붙어서 제시되는 명칭은 아닌거같고 능력있는 남자(?)를 대표하는 관련검색어인거같다는 생각이 들정도이다.실제로 그러해서 관련검색어가 된것인지,첩은 부유함을 상징해야하는것으로 규정되어서 관련검색어로 제시된것인지는 알수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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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동안 미제사건으로 남은 두다리가 잘린 여자아이의 실화속으로 들어가보고,

오늘날에 법관점에서는 어떠한 법의 심판이 내려졌을까을 살펴보고자한다.


1533년 중종임금때인  2월 눈내리던 어느날, 서울에 두다리가 잘려진채 버려진 5세여아가 발견되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여,이러한일이 중종임금의 귀에 들어가게된다.

중종은 천인공노할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자를 잡아드리도록 어명을내리고 철저한 조사를 하도록했다.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잡혀서 문초를 받게되는데,5세여아의 이름은 옥가이였는데,옥가이는 처음부터,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일관되게 한사람을 지목하여,구체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진술하게되는데 그사람은 맨처음 길가에 울고있던 옥가이를 데려다가,수양딸로 삼으려던 한덕이라는 여자였다.

비천한 여아의 신분이었기에 형조에서 처리해야했지만 특별히 중종임금의 관심사였기에 의금부에서 사건을 담당하게되는데,피해자인 5세여아인 옥가이의 증언에따라 한덕을 잡아다 문초를 했으나,

한덕이 말하길" 올해 1월 10일경에 길에서 울고있는 아이를 데려다 기르려고 했지만,자신의 상전인 주인이 반대하므로,그다음날 길에 다시 버렸고 아이의 두발을 짜른적이 전혀없다"라고 하면서,자신이 길에 여아를 버렸을때,다른사람이 데려갔는데,데려간 사람들이 두발이 없는채 되려간건지,그렇지 않은지 확인해보면 될것이라 주장하였다.그래서 다시 그아이를 데려간 사람들을 모두 잡아다 문초를해도,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람들마다,자신이 데려갔을때는 아이의 두발은 멀쩡했었다라고 일관되게 진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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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임금이 개인적으로 생각하길,어린아이이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의 발이 칼로 짤렸을때 손을 묶고 입에 솜뭉치를 물리게하고는 칼로 자신의 두다리를 한덕이 짤랐다고 상황을 일관되게 진술하는 옥가이의 말에 신뢰가갔기에,혹시 한덕이 나중에 몰래 다시 옥가이를 찾아가서 두다리를 짤라버렸지않나 의심하고,더욱 엄중하게 관련자들을 문초하도록 지시한다.

여러번 길가에 버려진 옥가이를 마지막으로 데려간 사람이 귀덕이라는 무당이였는데,귀덕을 잡아다 문초하니 귀덕이 말하길"옥가이를 길가에서 1월27일경 데려왔을때 두다리가 동상에 걸려있었지만,다리는 멀쩡해었는데,시간이 지나면서 동상으로인하여,두다리가 저절로 뭉개 빠져서,자신에게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어서 다시 길가에 버렸다"라고 진술하였다.

중종임금이 생각하길 두다리가 짤린 5세된 옥가이가 일관되게 한덕을 가르키며 자신의 두발을 칼로 잘랐다라고 진술하기에,옥가이를 데려갔던 관련자중에 누군가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있다고 생각했기에,의원을 시켜서 동상으로 자연적으로 두다리가 잘려나간것인지,아니면 칼로 일부러 짤라버린것인지 자문을 구하게되는데 의원은 여아의 잘려진 두다리 부분을보고는 칼에의하여 절단된것이 분명하다고 진술하였다.

이에 중종임금은 더욱 엄하게 관련자들을 문초하여 진상을 밝혀내도록 지시하였다.문초를 담당했던 신하들이 아무리 생각하여도,한덕이 여자아이를 버렸을때는 분명히 여아의 두다리가 멀쩡했고,나중에 최종적으로 옥가이를 데려갔던 무당인 귀덕이 옥가이의 두다리는 동상에의하여 자동적으로 사라진것이라고 주장하기에,5세된 여아의 진술만을 가지고 지목한 한덕을 범인으로 단정하여 죄를 줄수가있는가에대하여 논란이 분분하게된다.

중종임금은 어찌되었든 5세된 여아인 옥가이의 진술을 더 신뢰하여,한덕을 벌주려고했지만,신하들이 반대하길"조선의 법률은 80세이상과 10세이하의 진술은 증언으로 채택할수가 없다라는 법규정을 들며",아무리 5세된 여아인 옥가이가 일관되게 증언한다고해도,가치가없고,그증언만을 가지고,처벌하게되면 억울한 죽음이 생길수도있기에,그냥 결론을 내리지않고 유야무야 내버리는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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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초를직접담당했던 신하들뿐만아니라,정승들까지 같은의견을 주장하므로,중종임금또한 어쩔수없이 미제사건으로 아무도 처벌받지않는 사건으로 남겨지게된다.오늘날에 다시 두다리가 칼로짤린 옥가이의 사건을 재심하게된다면,관련자들인 한덕이나 귀덕등은 무죄가 될것인가 살펴보면,오늘날에는 5세된 여아의 진술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있게 진술한다면,다른증거가 없다고해도 오직 옥가이의 진술자체만으로도,한덕은 유죄로 처벌을 받을것이고,상충되는 진술을한 무당인 귀덕은 위증죄내지,공범으로 처벌을 받을것이다.5세된 여아의 유일한 증언만으로 유죄의 증거로삼아 처벌을 할수있는가가 요점인데,조선시대에서는 무죄,오늘날에는 유죄가된다.400년전에 관련자들이 무죄로 끝난 다리가 절단된 5세여아의 미제사건은 오늘날 재심을한다면 한덕은 유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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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을우동의 집안은 어떻게 됬을까? 1480년 조선 성종때,음행을 이유로 교수형을 당한 어울우동의 집안은 그로부터 8년후,


조선을 발칵뒤집히는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나게되는데,어울우동의 오빠인 박성근에의하여 발생하게된다.1488년,어울우동의 오빠인 박성근이


강도를 위장하여,자신의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하는데,그 내용을 살펴보다보니,어을우동은 오늘날의 정신병이 일종인 여자가 섹스에 미쳐서 집착하는 병인 님포마니아일 가망성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에도 100명당 5명정도의 여자들이 이러한 색정증의 정신적병을 가지고있다고  한다.현대에서보면 어울우동은 교수형을 당할게아니라,정신과적인 치료를 받아야할 여자였음을 알수가있는데,어울우동의 어머니인 정씨또한 남자와 자는것을 좋아해서,어려서부터 이러한 행동을 일상다반사로 보아온 아들인 박성근은 어릴때부터,자신의 어머니의 행동을 탐탁치않게 생각해왔고,이러한 결과 박성근의 어머니인 정씨도 아들을 미워하고,학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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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년 어을우동이 조선의 신분질서의 도덕을 망조로 만들었다는 죄명으로 교수형을 당했을때,어을우동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단지 남자를 좋아하는 성향이 남들보다 조금더했을뿐이지,남자들이 잘못이라고 항변을 한다.딸이 그렇게 죽은지,8년이 지난후에도 어을우동의 어머니인 정씨는 남자들에대한 음행은 그치지않고 계속이어졌기에,어울우동의 오빠이면서 정씨의 아들이었던 박성근은 조카와 하인들과 공모하여,강도가 집안에 들어서,자신의 어머니가 죽인것으로 음모를 꾸며 죽게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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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이 발각되어 박성근과 조카 정소는 처벌형량이 정해지기도전에 엉덩이에 장을 맞다가,재판과정에서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어울우동과 그 어머니인 정씨의 비극적결과의 원인인 님포마니아라는 여자의 색정증은 유전적인면이 있지않나 생각이들고,이러한것은 딸의 죽음을 보고도 그치지 못하는것을 보았을때 일시적인것이아니라,정신과적 치료를 받아야할 정신병의 일종이었음을 알수가있다.결론적으로보면 사대부집안이었던 어울우동의 집안은 어머니인 정씨로인하여,아들과 딸 그리고 자신까지도 모두 죽음에 이르게되는 비극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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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무현,그분의 유서전문을 나름대로 영어번역을 해보았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려니,의미나,단어,어감에있어 모호한부분에대하여는 개인적인 주석을 ※괄호속에 첨가했습니다.개인적인 주석이므로 그러한 의미가 아닐수도 있겠습니다.


저도 정확한 영문번역을 보고싶지만,저의 영어실력 한계로인하여,그렇게하지 못하는것이 아쉽습니다.어찌되었든


우리나라 반만녁역사에 나라를 이끌었던  최고통수권자중에 마지막심정을 유서전문으로 남긴분도 처음이었고,전례에없던 유일한 기록이기에 역사자료에 기록해둡니다.

영국 bbc뉴스의 사이트에 2009년 5월29일 해드라인은 노무현 전대통령에 관한 기사가 해드라인 탑뉴스로 나왔습니다.우리나라뿐아니라 전세계의 공정한 언론방송들이 노무현 전대통령을 기억하고 추모하고있었습니다.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중에 체재와이념을 넘어 세계가 추모하며 기린분은 노무현 전대통령이 유일한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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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y people helped me, so.

Many people are suffering because of me.

Harassment to prepare is too many for me.

The remaining time of life will be a burden to others.

I can not do anything because health is not good(※they torment me).

Can not read a book,moreover can not write.

Do not be sad.

both life and death is one of nature.

Do not be sorry.

Do not blame anyone.

It is fate(※Roh Moo-hyun analects Reference "Chosun Dynasty 600 years")

Do cremate.

Do leave a small memorial stone near my home.

It is my belief.

Republic of Korea President Roh Moo-hyun,16,the whereases in the w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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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꿈과희망을 끝까지 지키려했던 그분의 마지막 슬픈눈망울을 기억합니다.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어록,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역사의 교훈과 지향점,


진정한 국민의 대통령이었으며,세계의 위대한 지도자들과 비교하여 한치이 꿀릴것없는 자유와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에있어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대통령으로 기록될 노무현대통령을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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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독재자의 공통점,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윤씨 사건때문에 폭군이되어진것으로 인식되어지고있지만,사실은 그렇지않다.


역사속에 남겨진 기록들을 살펴보면 연산군 그자체가 독재자 유형의 길을 즐겨하고,좋아하는 왕이었을뿐이었다.


연산군의 모델을 통하여,인류역사가 시작된이래 시간과공간에 상관없이 독재자가 되어가는 과정상에 공통점들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연산군은 집권을하자,제일 처음 한일이,백성과 자신과의 관계설정의 신비주의였다.자신이 사는 궁궐의 성벽을 높이,높이 쌓아올리도록하는것도 모자라,아예 자신의 사는곳에서 자신이 무슨짓을하든 아무도 볼수없도록,궁궐주위 사방 40km주변을 누구도 살수없는 지역이라고 "금표"를 부착하여 자신이하고 싶은행동을 꺼리낌없이 할수있는 장소를 만들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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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행동하는것들이 백성들이나 외국에 전파되지못하도록 외국으로가는 사신들에게는 미리 예상문답내용을 암기시켜보내고,자신이하는 행동들에대하여 누설하는 신하를 가장큰 죄로 다스렸으며,궁궐안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잘알수있는 내시들의 결혼상대 배우자까지도 법으로 규정하여,사대부나 국민들속에 자신의 행동들이 새어나가는것을 금했다.이렇게 연산군은 자신의 행동들에대하여 비밀이 유지될수있게 철저하게 주변환경을 만든후,오로지 신하와 백성들에게는 충성과 도리에대한 이야기들 강조하였다.

중종반정인 군사쿠테타로인하여 힘없이 연산군이 강제퇴위 당하는것을보면 연산군이 자신을 지켜줄 군사의 양성이나 무에대하여  연약한 왕이었지 않나 생각할수있지만,연산군은 자신의 부모들의 제사에도 군복을입고 참여할정도였고,개성이나 주요도시를 순시를 할때는 3만명에 이르는 기병과보병을 완전무장시킨채 이끌고 행차할만큼 자신을 보위하는 친위군을 많이두었으며,그자신이 말위에서 활을쏘고 말달리는것을 즐겨하던 힘이나 무에있어 강성한 체력을 가지고있었다.

이런 평상시 강대한 군사수로 자신을 호위하고,만일의 사태에 대비를 철저했는데도 왜 연산군이 박원종이 이끄는 소수의 임시규합적인 군사들이 궁궐을 포위하던 그날밤에 한번 대항도 못해보고,친위군들이 무너졌냐하면 궁궐을 지키는 친위군들이 반란군이 궁궐로 쳐들어오고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마자,단 한사람도 우리의 왕을 지키자하는 군사들이 없었고,평소에는 아양과 아첨을떨며 연산군에게 잘보이려던 장교들과 군사들이었지만,막상 연산군을 지켜야할때에는 평소봐왔던 연산군의 모습을 잘알고있었기에 이런왕을 보호해,자신들의 목숨을 바칠 필요가 뭐있냐는 생각으로 궁궐의 개구멍을 통하여 모두다 도망가버려,반란군이 궁궐로 진입했을때는 연산군을 지키던 군사들은 하나도 보이지많고,연산군만이 궁안에 덩그러니 남아있게 되었다.

연산군은 먼저 자신과 백성과의 간격과 거리를 벌리게하고는 두번째로 한일은 여자들에 관한것이었다.여자의 신분이나 유부녀인지 처녀인지 상관없이,이쁘거나 반반한 몸매를 가진 여자들을 전국에서 불러들였을뿐만아니라,거사라하는 이동할수있는 임시가옥을 만들어,그곳이 길가이든,산이든,민가한복판이든, 밤이든,낮이든 반반한 여자가 보이면 불러들여 그것이 놓인곳은 그자체로 침실이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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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로 한일은 백성들의 송사나 분쟁,경제적어려움등 사사로운일들이나,천재지변같은 현상들은 자신에게 절대 상소하지 못하도록하여,애시당초 자신을 향한 불평 여론근원이 자신에게 도달되지 않도록 한반면에,자신의 보위와 관련되는 문제는 형제자매나 일가친족이라고해도,아예 호적을 파버리거나,서슴없이 죽여버리며 "가엽게 생갈할 가치도없다"라는 말로 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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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로 한일은 자신보다 힘이큰 나라였던 중국에게는 잘보이려고 갖은 아양을 다떨었는데,중국사신이 오면,"내가 어찌 황제의 어명을 갖고온 사신과 마주보고 앉을수있겠습니까"하며,중국사신보다 아래좌석에 앉으며 자신보다 강자인 사람이 존재하는 나라에게는 철저하게 비굴했다.

다섯번째는 신기한 동물들에 관심이 많고 음악과시같은 예술적분야게 관심이 많은척,후원하는척하며,예술적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으레 시를 짓거나,음악을들으며, 나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지?라는 칭찬을 항상듣고 싶어했고,술을 좋아라했다.술을 좋아한 나머지,법률로 업무시간이라도  술을먹고 비틀거리거나,헤롱헤롱한다고,아랫사람이 그러한것을 흉보는 투서를한다면,그 투서를한 아랫사람을 세상의 도를 모르는것들이라하여 잡아다 벌주도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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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소말리아의 해적선에대한 이야기들이 많다.조선시대의 역사속에서도 해적선이 출몰했다는 기록들이 많이 나타나는데,그중에는 중국해적선에대한 기록도 나타난다.

때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9년이지난 어느봄날,해주앞바다에서 우리나라의 무역선을 추격하던 해적선을 잡았는데,그 배안에는 우리나라의 물건들이 많이 들어있었다.


중국해적선에는 호유충을 우두머리로하여 19명이 타고있었고,배에는 대포같은 무기등이 장착되어있었는데,이들은 자신들은 중국군사들이고,



중국지방관리가 발행한 정체불명의 공문서를 보여주며 표류했던것이라고 주장하였다.지방관리는 법대로 처결하고자 했으나,중국군사라고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황제폐하의 성은에 망극하옵니다라는 임금인 선조의 자세였기에 중국해적선을 잡은 지방관리는 장계를올려 그처리에 대하여 선조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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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왈:해주에서 우리나라의 무역선을 추격하던 중국배를 잡았는데,자신들은 표류한것이지 해적질을 한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있습니다.

선조왈:표류가 맞다.

신하왈:우리나라의 무역선을 추격하고,배안에 우리나라의 물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선조왈:어허,표류가 맞다니까,우리나라 무역선을 추격하였다고 말하는것은,우리나라 지방관리가 해적선으로 둔갑시켜 공을 챙기려고하는거야,그리고 중국배에 문서가 있었다며? 해적선이 그런것을 가지고다닐 이유가 뭬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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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왈:저들 배의 소행과 물건들을보면 해적선으로 의심될만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선조왈:단정적으로 말하는데 해적선아니고 표류한선박이다.신하왈:.......

선조왈:임진왜란때에 의지할곳없는 이몸,백성들이 구해줬냐,신하들이 구해줬냐,구원해준게 누구겠느냐,차마 중국이 나를 버릴지언정,내가 중국을 버릴수는 없다.내가 현장에서 안봤어도 단번에 알수있다.표류가 확실하다.눈치없게 일도 제대로 처리못한 해주판관이 문제야,사헌부에서 잡아다 벌을 주도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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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년 9월 가을 고구려 양원왕때,투르크 기마병인 골촐싹이 이끄는 3만의 돌궐군이 고구려을 침략하여,신성을 공략하고 백암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고흘:대왕마마,돌궐이 우리나라의 백암성을 포위하여 공격중입니다.


양원왕:돌궐이? 우리나라에 무슨 원한이있다고 돌궐이 쳐들어왔다는 말이냐


고흘:중국의 남북조상황과 관련되어 쳐들어온것 같습니다.



양원왕:장군 고흘은 지금즉시 고구려 정예기병 1만을 이끌고가서 백암성을 원조하고,돌궐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온 이유를 들어보고,대처하도록 하시오.고흘:알겠습니다.

고흘은 신속하게 백암성으로 진군하여 백암성의 들판에서 돌궐의 적장 골촐싹을 마주하게된다.

고흘:돌궐과 우리나라는 원수진일이 없는데,어찌하여 우리나라를 공격하는가?

골촐싹:우리 돌궐은 요즘 서위의 공격에 시달려서,배가고프다,우리 돌궐도 먹고살기위해서는 고구려를 공격할수밖에 없다,얼른 항복해라

고흘:서위는 무섭고,고구려는 만만하다 이거구나,오늘 고구려가 어떤지 직접 경험해보거라,한놈도 살려두지않겠다.

골촐싹:짖는 개치고,무는개는 못봤다,이리하여 돌궐기마병과 고구려정예기병이 백암성 들판에서 일대전투가 벌어졌는데 결과는 돌궐군이 대패했고,고구려의 고흘장군은 싸움에서 사로잡힌 돌궐군 1천명또한 모두 수급을 베어,한놈도 살려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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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국제상황를 살펴보면,중국은 분열되어 강남을 근거지로하는 남조화북을 근거지로하는 북조의 왕조가 나뉘어 대립되어왔는데,고구려는 북조와 우호친선관계를 유지하여 북조의 왕조인 북위와 동맹관계를 맺었고 북위는 다시 서위동위로 나뉘어 존재하다가 북주북제로 이어지게된다.

백제는 이와는 정반대로 남조의 왕조(송,제,양,진)와 우호친선관계를 맺으며 고구려의 외교전략에 맞써고있었다.고구려는 북위와 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했는데,북위가 분열하여 서위와 동위왕조로 갈라지자,동위와는 친선을 맺고,서위와는 대립관계를 유지했는데,훗날 동위는 북제왕조로 이어지고,서위왕조는 북주왕조이어졌는데 북주가 훗날 중국을 통일하여 수나라가되게된다.

같은 북위의 갈래에서 나온 왕조였지만 동위와 북제와는 우호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서위와 북주와는 대립했기에 고구려에대하여 서위-북주를 모태국가로하는 수나라로서는 눈에 가시거리 일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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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년 고구려에게 얻어터진 돌궐은 그이후,세력이 수.당의 견제와 공격에의하여 급속히 약화되어가다가,657년에 망하게된다.돌궐이 망한후 11년이지난 668년,돌궐은 또다시 당나라의 고구려공격의 선봉에서서 고구려를 패망시키는데 앞장서게되어,고구려가 망하게된다,

돌궐은 고구려에게 이처럼 병도 주었지만 약도 주는 역할을 하게되는데,돌궐인 골출록이 당나라에 대항하여 7세기말 돌궐국가를 재건시키는데,이러한 국제질서환경이 고구려가 망한지 30년이 채되지않은,698년 대조영이 고구려를 이어받은 국가인 발해를 세울수있도록 유리한 환경를 제공하는 역할을 돌궐이 조성해주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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