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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왕조시대에서 왕보다 높은 신분은 존재하지 않는 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왕을 폐위시키거나 왕의 계승권 자를 정하거나 왕의 정무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대비였다. 왕이라는 신분은 종신적이기에 왕이 죽은 후에야 다음 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기에 왕의 사후부재는 일반적이고 이러한 때에 대비가 있고 없음은 천양지차의 양상을 띠게 된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일하게 폐위된 2명의 왕인 연산군과 광해군이 강제 폐위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대비에게 불효했다는 이유였다. 위에 열거한 왕이 아무리 잘못된 정사를 펼쳤다해도 대비와 맞서지 않고 효를 행했다면 조선왕조의 특성상 폐위될 수가 없었다.

조선왕조는 충과 효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 국가였는데 인륜을 져버린 불효를 행하는 왕은 마찬가지로 신하로부터 충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규정되어졌고 폐위가 사필규정으로 여겨졌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왕과 자신의 모친이 죽을 경우 신하는 어떠한 것이 먼저이고 앞서 참여하여 행하는 것이 올바른 신하의 도리라고 여겨졌을 생각해볼 때 공과사라는 개념으로 왕의 국상을 먼저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조선왕조에서는 절대 그러하지 않았다. 왕의 국상과 자신의 모친의 상이 겹쳤을 때는 모친의 상을 우선하여 효를 행하도록 규정하고 철저하게 지켜졌다.

이러한 사례는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의 죽음과 유자광의 모친의 죽음에 있어, 모친상을 먼저 행하도록 조야의 의견이 일치하여 시행한 것을 보아도 잘 알 수가 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허울 데기이지만 광해군이나 연산군이 대비에게 불효를 행하지 않았다면 오랑캐에게 사대를 했든 폭군이었든 절대 폐위되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연산군은 대비에게 불효를 행하였을 때 자신이 폐위 될 것을 짐작하지 못했을 까라는 점에서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자신의 아버지인 성종은 어려서부터 인수대비의 지도와 가르침에 충실히 따라 정사를 행하였고 슬하에 30여명에 이르는 자식을 뒀고 그중에서 왕자들만 해도 십여 명이 넘었는데 연산군이 그러한 상황에서 다른 왕자들을 이겨내고 끝내 왕위를 이어받을 것을 보면 머리나 처신에 있어 빈틈이 없었음을 능히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러한 처세의 달인인 연산군이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를 핍박하고 불효를 행할 때에 스스로가 폐위가 될 수 있겠다고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러면 왜 연산군은 막장으로 치달아 끝내는 스스로를 폐군이 되는 길을 선택했을까 하는 점이다.

실록에 기록된 연산군의 기질을 자세히 살펴보면 연산은 스스로를 천하에서 제일로 뛰어난 호남아로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명나라 사신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한다하여 중국 사신을 박대하고 병을 핑계를 이러한 의식을 다른 사람에게 시켜 며 거부하는 모습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성종이나 연산군의 모후인 폐비윤씨는 오늘날로 보면 꽃미남과 절세가인의 만남의 얼굴을 한 사람들임을 역사기록으로 알 수가 있는데 그러한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연산군은 몸과 얼굴이 아주 잘생긴 왕이었다. 인물도 잘났고, 성격도 호방하고 영웅기질이 있었고, 자존감도 스스로 삼한 제일로 굳게 믿었던 왕이었기에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에는 한 치도 결단을 머뭇거리지 않는 오늘날의 강남스타일 왕이었다.

연산군이 폐위로 간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러한 자존감의 폭주에 의한 궁극적 파멸이었다. 사약을 받아 죽은 폐비윤씨 때문에 정신이 돌아서 파멸되었다는 연속극의 상투적 연관성은 전혀 사실과 일치하지 않고 연산군이 폐위된 것은 나르시시즘에 해당하는 일종의 정신병의 궁극적 결과였다. 폐비윤씨의 사건은 자신의 나르시즘을 극대화시키려는 좋은 구실로 활용했을 뿐이다. 이러한 성향이 너무 지나쳐 조선왕조에서는 건들지 말아야할 역린을 건드리는데 인수대비를 핍박하여 죽게 하는 지경에 이르는데, 이것에도 자신이 최고다라는 개념으로 조선왕조체계에서 마지막 최후의 절대 지존인 대비와 겨루다 결국 스스로 파멸하게 된다.

왕이 살아있든지 죽었던지 왕을 폐위나 등극 시킬 수 있는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권능을 가진 존재가 조선왕조시대하의 대비의 계급이었다. 충효를 나라의 근본이념으로 하는 조선시대 하에서는 왕이 얼마나 뛰어나서 잘났든 못났든 왕이 건드리지 말아야할 최후의 궁극적 존재가 대비라는 사람인데, 연산군과 광해군은 이것을 건드렸다는 공통점을 가진 존재였다는 점이다. 이것이외에 나머지 반정과정이라든 반정주체나 상황 등은 부차적인 곁가지들에 불과하고 궁극적인 것이 이러한 왕과 대비의 관계의 서열관계를 거꾸로 돌려 행한 불효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는 부모가 잘못했을 때 자식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가치관으로 변화되었지만 조선시대 하에서 아무리 대역죄나 도덕이 무너지는 후안무치한 범죄를 저지른 부모라해도 그러한 죄를 경찰에 자식이 신고했을 때에는 오히려 신고한 자식을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몽둥이로 패는 것이 조선시대의 법이며 현실이었다. 일반서민들에게도 이러한 엄한 효의 실천과 인내를 강제했는데 하물며 왕이 어떠한 이유나 명분을 같다 붙이든 대비에게 불효하는 것은 역린에 해당하였다. 오늘날의 법에도 이러한 친분상의 잔재가 남아 부모의 죄를 자식이 안 다고해도 신고하지 않거나 보호해줘도 처벌받지 않게 법률로 규정되어 이어져 오고 있다.

결론적으로 보면 조선시대나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아버지에게 불효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불효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핵심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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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ung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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