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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니하라는 마을에 한 노인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청이, 황이, 희야라는 3명의 여식이 있었다. 어느 날 마을에 역병이 돌아 큰딸인 청이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살릴 수 없음을 알게 된 노인이 슬피 울며 하늘을 원망할 때 청이가 말하였다. “아빠, 제가 죽는 것을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저와 함께 했던 추억을 간직하면서 힘내고 살아가세요.”라고 말하고 죽었다.

 

어느날 둘째딸인 황이를 비가 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밭에 나가 김을 매다가 하늘에서 내리친 벼락을 맞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삶의 힘겨움이 딸의 생명을 앗아 가게 한 것 같은 자책감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노인을 보며 황이가 말했다. “아빠, 하늘의 운명을 어찌할 수 있겠어요.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제가 죽으면 매년 저희 기일에 정화수를 올리고 저를 기억하고 명복을 빌어주세요”라고 말하고 죽었다.

 

노인은 마지막 남은 셋째인 희야는 어떻게 해서든 잘키워보려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마침내 남자를 만나 시집을 보내어 정상적인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였는데, 시집간 지 얼마안있어 남편에게 매를 맞고 지내는 일상을 보낸다는 소식을 접하는가 했더니 몇 년이 흘러 아들 하나를 얻은 딸이 난봉꾼인 남편에게 몰매를 맞다가 희야가 생사를 해매고 있다는 전갈을 받게 된다. 마지막 임종에 다가선 딸을 바라보며 어찌도 이리 삶의 운명은 가혹한가라는 생각을 할 때 희야가 말하였다.“아빠. 제가 죽으면 제 아들인 부를 저와 같이 생각하고 잘 길러 주세요”라고 말하고 죽었다.

 

모든 희망을 잃은 노인은 자신의 삶보다 더 부를 소중히 여겨 지극정성을 기울여 키워내게 되는데 이 아이는 훗날 고구려의 백성을 아사와 도탄에 빠뜨린 패악군주인 국왕을 단칼에 베어내고

고구려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는 군권과 행정권을 동시에 쥔 국상이 된다. 이후로 고구려는 청색, 황색, 노란색을 상징하는 삼색인 삼이라는 숫자를 고구려의 중심으로 삼았는데 정치체계인 삼부나 삼성뿐 아니라 민간사상인 삼대나 삼족오등 모든 새로운 시작과 지향점을 삼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이 만들어 졌으며 오늘날 태극기의 원형인 삼태극또한 우리나라의 고유의 삼의 전통에서 유래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과거를 상징하는 색인 청색과 현재를 상징하는 노란색 그리고 미래를 상징하는 회색은 각각의 연을 나타내는데 삶에 있어 하나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연을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하는지는 보여주는 기록이라 하겠다.

과거를 추억하고, 현재를 되새겨 반성하고, 미래를 위하여 자신의 정성을 잿빛인 회색처럼 불살라 노력할 때 하나의 완전한 결과를 이루어 낼수 있다는 것으로 이것을 사자성어로 正緣正結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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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하며 공부하던 고나을나는 방학이되면 관심분야가 같다는 기회로,으레 함께 역사유적지 탐방여행을 떠나곤 하였다,방학을 맞아 백두산에 존재하는 고구려유적탐사를 가게 되면서,그곳에서 우연히 그동안 비밀에 쌓여 뭍여있든 천년의 고구려역사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백두산의 등산로를 올라가는 한무리의 사람들을 따라 올라가던 고나와을나는 서로,역사이야기를 하면서 가다보니,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무리와 떨어져있음을 알게되었고,주위에는 등산객들이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한낮이고,등산로의 흔적이 이어져 있기에 괞잖겠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등산하는 무리의 사람들의 모습을 빨리 발견하려고,높은 언덕쪽의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 살펴보려 던 중에,100여미터쯤 떨어진곳에서 한마리의 사슴이 마치 자신을 따라오면,길을 찾을수 있다는듯이 큰눈망울로 쳐다보고 있었다.뭔가에 홀리듯,두사람은 원래가려던 언덕쪽이 아닌,사슴이 보이는쪽의 산등성이의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는 비탈진 등산로의 흔적을 따라가게 되었다.

미끄러울지 모르니까 천천히 조심해!!

나걱정은 말고,잘따라 오기나해~

사슴이 보이는쪽으로 5분여쯤 좁은 비탈진 능선길을 따라 다가가자,사슴은 언제 그곳에 있었냐는듯 순식간에 눈앞의 산등성이를 넘어 시야밖으로 사라져 버렸다.그순간 낙엽의 흑더미로 뒤덮여 있던 경사로의 흑벽이 무너져 내리며,고나와을나의 몸을 산등성의 아래로 구르게 만들었다.

으아아악악,비명소리와 함께 굴러내려가던 두사람은 낙엽과 잔나무가지들 그리고 칡넝쿨이 얼키고,설켜 겉을 막고있던 바위 구멍속으로 떨어지며 정신을 잃게 되었다.

보이는것라고는 구멍속으로 들어오는 한줄기 빛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희미한 빛속에서 정신을 차린 고을과 을나의 옆부근에는 낙엽과 흙에 뒤덮여 일부분이 튀어나온 녹슨 철제장식 일부가 보였고,앞에는 60센티가량의 검은 비석이 하늘을 향하여 누워있었다.

 

이게 뭐지? 앞에 있는것은 지석같고,뭍여 있는거는 뭔지는 파봐야 알겠는데,랜턴을 꺼내서 살펴보자.고을과 을나의 등산배낭에는 비상시를 대비하여 랜턴을 가지고 다녔다.

고을아,기분이 별로 안좋아,저것들을 그대로 두고,그냥 밖으로 나가 길먼저 찾자,응? 그래도 뭔지는 확인해봐야지,저것이 고구려역사 유물일수도 있는데,잠시 기다려봐.

고을이 랜턴을 켜고,비석위에 덮여있는 흑과 낙엽들을 손으로 쓸어 내려가자,글자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중...정...어...사...대...부...이문진지묘? 이문진,이문진 낮익은 이름같은데.......뭐,이문진? 고구려역사서를 저술한 고구려 영양태왕시절의 태학박사 이문진 말이야? 말도안돼,그분의 묘지가 왜 백두산의 이런 산속에 있는데? 아,잠깐 혹시...저기 뭍여있는 철제장식이?

고을과 을나는 누가 먼저랄것도 없이 철제장식의 주위를 손으로 파기 시작했다.꺼내진것은 예상대로 녹슨 철제상자였다.만약,우리두리 생각이 맞다면.......서로의 얼굴에는 역사학도로서 일생에 전혀 없을수도 있는 그러한 가슴 떨리는 발견을 했을수도 있다는 흥분됨이 느껴졌다.

철제장식의 열쇠고리는 이미 녹슬때로 녹아 쉽게 떨어져 나갔다.상자안으로 랜턴의 불빛을 조심스럽게 비추자마자,두사람의 입에서는 동시에 비명같은 떨리는 목소리로 불빛에 비쳐지는 글자를 읽어나가는데“신...집...”책의 개수는 5권이 들어 있었는데 그 떨리는 읽음과 동시에 바위구멍의 입구가 굉음과함께 흙더미와 바위들로 메꿔져 버렸다.

이제 어떻해? 내가 뭐랬어,먼저 나가서 길을찾자고 했잖아!

이왕 이렇게된거,어쩔수없잖아.미안해.하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발견된것도,저렇게 입구가 막힌것도 어쩌면 우리가 해야할 어떤 운명인지도 몰라,

고을은 철제상자안의 맨위에 올려져 있는 신집1권을 꺼내 랜턴불빛에 의지해 한장의 책장을 넘기는데,서문이라는 글자와 함께 글이 시작되고 있었다.

“1400년이 지나,이곳을 들어오는 이들을 위하여 준비하여 글을 적나니,들어온이에게 해암을 주고자 함이 아니라,후세에도 천년 고구려의 역사기록이 살아나 이어지게 함에 있다.두사람은 이 역사서를 세상에 이어지게 전하고,그에대한 대가로 내가 생전에 기원하며,철제상자안에 2방울의 약을 두었다,이것을 먹고,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고구려의 역사인물을 기원하면,그 사람의 생으로 태어나고,죽는순간까지의 삶을 환영을 통하여 체험하게되어,살길이 열릴 것이다.아,위대하구나 하백의 어머니여,시초에 뜻을 정하여,훗날에 두 젊은이에게 이어지게 하셨도다”

고을아,어떻게 했음 좋겠냐? 이글을 믿고 정말 약을 먹을 생각은 아니겠지?

글을 신뢰하고 이 약을 먹든,안먹든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여,이곳을 바쪄나갈 방법을 우리힘으로 스스로 찾기도 어렵다고 생각해,어자피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곳으로 이끌려졌고.......

알았어,정해진 운명이라면 어쩔수 없겠지,그럼 이약을 먹어서 죽어도 후회없을 만큼,알고 싶은 고구려 역사인물로 넌 누구를 선택할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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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고양이를 표현한 그림중에 갠적인 생각으로 가장높은 최고가를 기록한 그림이다.



초등생도 그릴수 있을것같은 그림,희미하게 보이지만 자세히보면 돼지와 고양이임을 알수가있다.


이러한 허접한 그림이 어째서 나에게 최고가를 기록하게되었는지는 미스테리일 것이다.


그림을 보고 무슨 느낌이 드는가?


옛날 백제의 근초고왕의 아들이 고구려의 성을 치러 나아갔을때 대승하여 고구려의 내지에 깊숙이 들어가게되자,

부하가 고하길 "만족함을 멈출줄 알면 욕을 당하지않고,진퇴를 분명하게함에는 위태로움이 없습니다."라고하자,

근초고왕의 아들이 말하길 "나이후로 고구려의 이곳까지 누가 다시 올수있겠는가?"라고 한탄하며 뒤로 물러 되돌아갔다.

삼국사기에서 해답을 얻다.어떻게 할까 결정을 못하는 그대에게
백제장수 막고해 왈 "知足不辱, 知止不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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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평양에서는 어떠한 일이 벌어질것인지,고구려역사의 교훈을 참고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012년 6월28일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유고상황이 발생한다.
이에 김정운을 미는 현철해대장의 주도하는 북한군부의  일부세력은 이러한 유고상황을 비밀에 부쳐놓고 중국에있던 김정남을 김정일이 위독하다고하여 북한으로 들어오게하여,입국하는 즉시 잡아죽일 계획을 진행하고,


김정남의 실질적 후원자인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와 장성택도 아울러 숙청하여 처단하려고 한다.



이러한 계획은 김정일의 유고상황을 가장 빨리 파악한 김경희에게 먼저알려져 ,김정남이 북한에 들어오지 말도록 알려주게된다.김정일의 식물인간의 유고상황에서 북한내에서는 김정운일파에의하여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고,세습 독재권력의 속성상 김경희와 장성택은 잡혀서 비밀리에 처형되게된다.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은 자신또한 숙청당할것을 알고 폴란드 현지에서 가족을 이끌고 망명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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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있던 김정남은 자신을 죽이려고할뿐아니라 자신의 우호세력인 김경희와 장성택이 비밀리에 처형된것을 알고,중국과 한국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김정운.현철해대장의 군부세력을 없애버리고자 한다.한국과중국의 도움을받은 김정남이 북한으로 들어가자,북한군부에 김정남계열과 김정운계열간에 암투가 벌어지게되는데 결과적으로 김정운일파가 괴멸되고 김정남일파가 북한의 권력을 쟁취하게된다.이후로 30년간 더 북한의 체제는 지속되다가,남북한은 평화적으로 통일이 되게된다.

사주로 보았을때 김정남의 사주는 30년의 제왕의 운이 있지만,김정운은 부하에의하여 암살된 운명의 사주를 가지고 있다.2012년 6월 28일이후,김정운이 북한의 권력을 세습하게 된다면 1년이내에 부하에의하여 암살되겠고 용케 암살되지 않는다면 통제되지 않는 북한군부에의하여 남북한간의 무력전쟁이 발생할 가망성이 높기에 남한과북한의 미래운명을 보았을때 최악이라고 볼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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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3아들중 한국과 북한이 평화적으로 통일할수있는 대갈박을 가지고있는 사람은 김정남이고,그것을 가능하게 카리스마를 발휘할수있는 사람도 북한내에서는 김정남이 유일하다고 볼수가있다.

살아있는 신 대접을 받는 김정일에대하여 공개적으로 쓴소리를 하는 김삿갓같은 김정남의 기질을 봤을때 북한내에서 김정남만큼 간큰 카리스마를 가진 운명도 없겠고.이러한것은 운명적으로 주어진것이다.북한을 개혁.개방시키고 자유민주주의체제하에 남북한간의 평화적통일의 희망을 볼수있을지,없을지는  김정남의 역할이 아주 중요할수밖에  없다.

고구려의 패망시 죽으면서까지 연개소문은 아들들을 모아놓고,회초리의 교훈을 누누히 강조하며 형제들사이에똘똘뭉쳐 단합하도록 맹세를 일일이 받았지만 막상 연개소문이 죽자,부귀영화의 권력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형제라는걸 알게되었을때는 서로가 괴멸될때까지 싸웠다.

북한의 독재세습권력에 있어서는 더욱 더 민주적 권력도 아니고 지멋대로 할수있는 제왕적 독재권력의 세습이기에 이를 향유하려는 사람의 특성은 권력에 위협이 되는것은 형제도 가족도 눈에보이지 않게되어 가차없이 처단하려고 하게된다.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폐악적인 독재권력을 정상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놓을수있는 사람은 권력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권력잡아 실천하여 양여,양도했을 때인데 그 키를 김정남이 가지고 있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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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병사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고구려의 군인들은 평상시에는 자신의 주업을 영위하다가 나라가 위급해지면,군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평상시에 일반평민들의 모습이라고해도 몸에는 칼을 5자루를 차고다니며 사냥이나,일들을 하였다.

고구려병사의 완전한 모습은 알수가없지만,남겨진 기록으로 살펴보면 고구려병사들은 머리에는 2갈래의 깃이달린 모자를썼고,좌우옆구리와 등뒤로 4개의 칼을차고있었고,긴칼인 대도를 손에 들고 다녔다.

왜 고구려백성들이 평상시에도 칼을 5자루를 차고다녔을까 생각해보면


고구려의 마을들은 산이나 계곡같은 농사를 짓기에는 알맞지않는 주거환경속에,사냥이나 목축을 대다수가 영위하며 살았기에,여러종류의 칼이 필요했을수 있음을 알수가있다.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기거나,요리,기타 싸울때 사용하는 칼등을 일률적으로 몸에 차고다녔다는 점이고,이러한 모습의 고구려백성은 언제,어디서든지 싸울수있는 상무의 상태를 유지했다.

고구려의 상무전통에는 신분상의 제약이없고,높은신분이든,미천한신분이든 누구나 무예와 무술을 교육받을수있었다.기록을 토대로 고구려 병사의 모습은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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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과 모자의 위치를 참고해 초고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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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고그림에 색깔을 넣어본 고구려병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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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직여본 고구려병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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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병사의 모습은 뿔난투구를 쓰는 모습은 맞지않고,머리에는 쇠로된 투구같은것을 쓴게아니라,천이나 면으로 만든 건이나 모자를 썼음을 알수가있고,오늘날에는 불편하게 보일지모르지만,다수의 칼을 일상생활에서 차고 다녔고,이러한 무기들은 나라가 위급할때,그자체가 고구려병사의 무기가되었다.

이민족이 침략했을때 고구려병사들이 강할수있었던것은 깊숙히 들어올수록,쳐들어온 적군이 되돌아 나갈수있는 안전한 길이 없었기때문이다.자체적으로 모든 고구려의 남성들은 자신이 사는지역에서,삶을 영위하는 성을근거로,자체무장이 생활화되어있었기에,한번에 붙어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면 이길수있는게아니라,오늘날의 지역적 게릴라전술을 사용했기에,

한번 이긴곳을 지나가더라도 다시 되돌아 그곳을 지나갈려면,자체적으로 생활화된 상무전통을 유지한 고구려 일반백성이 군사로 변신하여 다시 싸웠기에 전지역의 활로를 확보한 상태가 아닌한 침략한 적군은 살아서 돌아갈 확률이 극히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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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년 9월 가을 고구려 양원왕때,투르크 기마병인 골촐싹이 이끄는 3만의 돌궐군이 고구려을 침략하여,신성을 공략하고 백암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고흘:대왕마마,돌궐이 우리나라의 백암성을 포위하여 공격중입니다.


양원왕:돌궐이? 우리나라에 무슨 원한이있다고 돌궐이 쳐들어왔다는 말이냐


고흘:중국의 남북조상황과 관련되어 쳐들어온것 같습니다.



양원왕:장군 고흘은 지금즉시 고구려 정예기병 1만을 이끌고가서 백암성을 원조하고,돌궐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온 이유를 들어보고,대처하도록 하시오.고흘:알겠습니다.

고흘은 신속하게 백암성으로 진군하여 백암성의 들판에서 돌궐의 적장 골촐싹을 마주하게된다.

고흘:돌궐과 우리나라는 원수진일이 없는데,어찌하여 우리나라를 공격하는가?

골촐싹:우리 돌궐은 요즘 서위의 공격에 시달려서,배가고프다,우리 돌궐도 먹고살기위해서는 고구려를 공격할수밖에 없다,얼른 항복해라

고흘:서위는 무섭고,고구려는 만만하다 이거구나,오늘 고구려가 어떤지 직접 경험해보거라,한놈도 살려두지않겠다.

골촐싹:짖는 개치고,무는개는 못봤다,이리하여 돌궐기마병과 고구려정예기병이 백암성 들판에서 일대전투가 벌어졌는데 결과는 돌궐군이 대패했고,고구려의 고흘장군은 싸움에서 사로잡힌 돌궐군 1천명또한 모두 수급을 베어,한놈도 살려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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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국제상황를 살펴보면,중국은 분열되어 강남을 근거지로하는 남조화북을 근거지로하는 북조의 왕조가 나뉘어 대립되어왔는데,고구려는 북조와 우호친선관계를 유지하여 북조의 왕조인 북위와 동맹관계를 맺었고 북위는 다시 서위동위로 나뉘어 존재하다가 북주북제로 이어지게된다.

백제는 이와는 정반대로 남조의 왕조(송,제,양,진)와 우호친선관계를 맺으며 고구려의 외교전략에 맞써고있었다.고구려는 북위와 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했는데,북위가 분열하여 서위와 동위왕조로 갈라지자,동위와는 친선을 맺고,서위와는 대립관계를 유지했는데,훗날 동위는 북제왕조로 이어지고,서위왕조는 북주왕조이어졌는데 북주가 훗날 중국을 통일하여 수나라가되게된다.

같은 북위의 갈래에서 나온 왕조였지만 동위와 북제와는 우호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서위와 북주와는 대립했기에 고구려에대하여 서위-북주를 모태국가로하는 수나라로서는 눈에 가시거리 일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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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년 고구려에게 얻어터진 돌궐은 그이후,세력이 수.당의 견제와 공격에의하여 급속히 약화되어가다가,657년에 망하게된다.돌궐이 망한후 11년이지난 668년,돌궐은 또다시 당나라의 고구려공격의 선봉에서서 고구려를 패망시키는데 앞장서게되어,고구려가 망하게된다,

돌궐은 고구려에게 이처럼 병도 주었지만 약도 주는 역할을 하게되는데,돌궐인 골출록이 당나라에 대항하여 7세기말 돌궐국가를 재건시키는데,이러한 국제질서환경이 고구려가 망한지 30년이 채되지않은,698년 대조영이 고구려를 이어받은 국가인 발해를 세울수있도록 유리한 환경를 제공하는 역할을 돌궐이 조성해주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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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들의 성씨의 미스테리,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에서 왕조의 성씨를 찾아보면,

생각외로 많지가 않다.고구려의 고씨,신라의 박.석,김씨 고려의 왕씨,조선의 이씨 그러나 백제왕가의 성씨는?에 도달하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고씨,박씨,석씨,김씨,이씨인 5대성을 왕조의 성씨라고한다면,왜 600년이상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백제왕가의 성씨는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하는 점이다.

고구려,신라와 함께 삼국시대의 동시대의 문화를 살았던,백제가,신라나 고구려의 왕족 성씨는 모두 기록되어있는데,


같은 민족이라는 백제의 왕가는 왜 성씨가 미스테리로 되어있느냐하는 점에대한 글이다.백제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가야와 함께 수백년간 이어진 왕조에 비하여 주류를 이루지못하는 너무나도 빈약한 역사의 기록만이 남겨져있다.

이러한 이유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일본과 백제와 가야의 관계때문이다.일본의 천황이 자신은 "백제왕가 자손의 피가 흐르고있다"라고 하였고,우리나라에서도 구지 일본 천황가가 백제왕가의 피가 흐른다고,공공연이 말하는것에대하여 자부심인냥하는 경향이 있는데,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일본의 천황가도 성씨가 없다.우리나라의 역사에 존재하는 고대국가중 유일하게 백제왕가의 성씨만이 전해지지 않는다.역사에서 논란이 되고있는부분이 백제와 왜의 관계가 어느쪽이 주종관계였나인데,우리나라에서는 백제가 주고,왜가 종이었다는 입장이고,일본의 입장은 왜가 주고,백제가 종이었다는 태도인데,상식적으로 왕의 자식이나,친족을 인질로 다른나라에 보내는경우,고구려와 신라의 경우나,

세계사적인 국가인 몽골과 기타국가등의 관계를 보았을때,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왕가의 자손이나 친척을 상대방의 나라에 보내는것은 보내는쪽이 주종관계에서 우월한 입장인경우는 전혀없었다.

백제는 특이하게도 일본에 왕의 장남이나 자손들을 인질로 왜에 보내어 생활하게하다가,일정시간이되면 일본에서 돌아와 왕위를 계승하곤했던 기록을 쉽게 찾아볼수가 있다.주목해야할 점은,우리나라의 최강의 군주였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시절에도 이미,신라는 왜의 공격으로부터 힘겨운 방어를하고있었고,직접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여 침입한 왜를 섬멸하였다는 기록을 볼수있는데,

왜의 세력은 오늘날 우리나라가 생각하는 일본이 통일국가를 이루기전에,일부의 허접한 세력이아니라,광개토대왕 당시에도,신라를 극도로 위협할정도로 강성한 군사력이었음을 알수가 있는데 신라는 왜의 공격으로 나라가 흥망의 위기에 처할 그시대상에서 백제를 살펴보면,이것들은 어찌된것인지 왜의 공격으로부터 예외였을뿐아니라,오히려 왜와 백제는 서로 연합하여,주변국을 점차 점령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의 천황가는 백제왕가와 통하다라는 일본천황의 말에는 혈연적으로 하나였다일뿐인데,백제왕들이 성씨가 없는것이나,일본의 천황가가 성씨가 없는것이나,일맥상통한다.우리나라의 국민에게 백제왕가의 성씨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제대로 답할수있는 사람이 없다.

수많은 왕의계보를 가진 백제왕들이 단 한명도,우리왕조의 성씨는 무엇입니다라고 말하거나 기록한적이 없기때문이다.그 당시에 성씨의 개념이 없었느냐하면,고구려나 신라에는 이미 왕족의 성씨개념은 존재하고 있었기에,변명할꺼리가 없다.왜 백제는 왕가의 성씨를 기록하지않았느냐,이것은 너무깊게생각하면 어려운것이지만,상식적으로 간단히 생각해보면 백제왕가는 왜라는 나라의 천황가와 뿌리를 같이하며,서로 상부상조하며 나라가 발전했기에 일본의 천황가가 성씨가 존재하지않는것처럼,백제왕가또한 그러한 전통에 참여하다가 망했기에 역사의 기록에서 백제왕가의 성씨가 존재하지 않게되었다는 것이다.

백제와 왜의 관계는 문화적인 입장에서는 백제가 우월했고,군사력에있어서는 왜가 우월했다의 관점으로 볼수있는데,고대 동아시아의 국가들의 흥망성쇠를보면,문화가 우월했다고 주종관계에서 주가되는게아니라,몽골의 징스칸이 몽골 문화가 우수해서,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한것도아니고,비록 몽골의 전체군사력은 20만에 미치지 못했지만,훈련되어진 몽골기병의 군사력이 강하기때문이었다.

백제왕가를 호위하고,받쳐주었던 군사력의 힘은 왜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할수밖에없다.백제는 문화적으로 왜보다 월등했지만,일정시기동안 군사력에있어서 왜의 보호를 받는 그러한 형태의 연합관계를 왜와 공통으로 가졌음을 알수있고,그 뿌리가 백제왕가와 일본천황가의 혈연적 일치관계에 기반했음을 알수가 있다.

백제 왕가의 시조는 분명히 고구려의 한분파로 세워진 국가였지만,그이후 고구려처럼,해씨를 원조로하는 고씨인 왕의 성씨를 이어간게아니라,고씨라는 성씨와 결별하고,그당시 군사력에있어서 우월했던 왜국의 천황가와 혈연적뿌리를 공유한다는 백제왕가의 명분으로 백제와왜는 연합하는 군사동맹관계였음을 알수있고,근본적으로보면 백제왕가는,우리나라의 일반백성과 동떨어진 태생들이었지 않나 그런생각을 해볼수가있다.

우리나라역사에서 백제왕을 드높이는 경우는 거이 볼수없고,또한 조금 뛰어난 백제왕이었다고해도,그사람을 추적해보면 알수없는 미스테리기간동안 사라졌다가,불연듯 나타나 왕위에 오르는데 그밑바닥에는  왜왕가와 밀접한 관련이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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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가와 일본천왕가의 관계는,몽골과 고려의 부마국과의 관계정도로 이해하면 역사적진실에 가깝다고 볼수있지않나라는 생각이든다.우리나라의 역사에있어 백제와 왜의 관계를 어느쪽이 주종관계냐에 대갈박 골머리를 굴리고 일본과 서로대립하는데,그럴필요가 전혀없는문제고 주변국가나 우리나라 역사에 남겨진 기록들을 있는그대로 해석하여 받아드리면 될뿐이다,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해서,고려의 역사가 자랑스러운 우리역사가 아닌것은 아니듯이,백제왕가가,일본의 천황가에 예속되어 일정시기,군사적동맹의 도움을 받았다고해도 있는그대로 받아드리면되는것이지,대갈박굴리며 왜 이딴기록이 역사에 존재하는지 그에반한 학설을 만들어내는데 골머리를 쓸필요가 전혀없다.

백제왕가는 전체시기가아니라 일정시기동안,"왜에 종속된 왕의계승을 했었다"이렇게 보면 주변국가에 남겨진 기록들을 "왜곡"할 엉터리학설을 만들어낼 필요가없는것이다.역사는 교훈을 얻기위한것이지,자존심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그자체가 더 부끄러운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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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회군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물줄기를 꺼꾸로 돌려버린 우리나라 반만년역사에있어 최악의 판단이었다.

위화도회군의 진행과정과 그당시 국제정세를 통하여,위화도회군은 어쩔수없는 시대적운명이었는지에 알아보고자한다.

1388년에 신흥나라였던 명은 고려령에 속했던 철령이북지역에대하여 자신의 영토로 편입하려고하였다.

그러나 한족이 세운 명나라는 고래부터나 그당시까지도 요동지역에대하여 지배권을 행사할 아무런근거도없는 나라였고


그곳은 대대로 고구려와 한백성을 이루었던 고려와 여진족의 터전으로 지배하려고해도 지배할수가없는 형식적인 통제만이 가능한지역이었다.

원.명교체기에서 명나라는 원나라황실을 북쪽으로 내몰아냈을뿐 몽골을 완전히 제패했던것도아니었기에 고려가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지가 중요한때였다.원황실이 북부초원지역으로 물러났기에,요동지역은 무주공산으로 지배국가가 없는 상태였다.

위화도회군을하여 조선을 개국하고 만주벌판에대한 고토회복이 중단되었지만,그렇다고 그이후 명나라가 만주지역에대한 지배력을 행사할수있었느냐하면 그렇지도못했다.

명나라는 허울뿐인 명목상의 지배력만을 가졌을뿐,실제적으로 만주지역에 흩어져살던 여진족,거란,몽골,조선등의 영향력아래있었다.

1392년에 조선이개국하고,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는데,조선이 개국한지 200년도 안된상태에서 이미 만주지역은 명나라의 지배하에 놓인게아니라,누르하치라는 여진족의 영웅의 지배하에 놓이게된상태였다.

누르하치(1559-1626)가 요동지역을 통일하여 지배할때의 군사력은 5만정도의 군사였다.명나라는 임진왜란때문에 국력이 약화된게아니라,요동지역에는 조선개국당시부터 여진족의 여러부족이 지배하고있었고 명나라는 여진부족간의 싸움을 부추겨 간접적인 통치형태만을 행사할수있었을뿐인 허약한상태였다.

임진왜란당시에도 명나라의 원군과 누르하치의 여진족의 원군 모두가 조선을 지원해주겠다고했지만 위화도회군의 원죄로인하여 명나라에대한 소중화를 자처했던 조선의 역대왕들의 태도처럼 대갈박 빈 선조에의하여 명나라원군만을 받아드리고 고구려의 백성으로 함께 나라를 이루었던 누르하치의 원군은 믿지못하고 색안경을끼고 의심하여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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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 3월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고려에게 통보하자,1388년 5월 고려는 역사적으로나,또한 원나라황실과고려의 관계를보더라도 원나라가 몽골초원지역으로 물러나면,권리가있다면 고려에게있는것이지,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요동지역에대한 권리를 주장할  이유가없다고 생각했기에 고려의 우왕과 최영장군은 이성계로하여금 우리나라의 요동지역에대한 고토회복을 명령하였다.

본격적인 요동수복전쟁을위하여 고려는 국가의 운명을걸고 총동원령을 가동했다.고려가 동원한 군사는 5만명으로 누르하치가 요동지역의 여진을 통일하여,중원대륙을 정복할때 동원되었던 순수여진족 군사수가 5만내외였기에 고려가 명나라와의 일전을위하여 동원했던 순수 고려인으로 구성된 5만의 군사는 적다고 볼수없는 군사였고,또한 이성계에게 주어진 고려병사들은 고려에서 동원될수있는 3만필에 이르는 말을 총동원하여 만들어진 기동력이 빠른 기마병단으로 구성되었다.

칭기스칸의 몽골군대와 고려가 싸웠을때 고려의 국토를 최북단에서 최단남까지 전격적으로 몽골군대가 휘젓고다닐수있던것은 몽골의 군대가 기마병으로 구성되었기에 가능했고,또한 그러한 몽골기병들은 몇십만이아니라 기껏해야 5만내외의 몽골기병이었고,

칭기스칸의 몽골군대가 광활한 유럽과 러시아를 원정하여 정복했을때도 몽골기병의 수는 8만에 미치지못했다.또한 고구려 최전성기인 광개토태왕이 왜적에의하여 침략당한 신라를 구원하거나 기타 정복전쟁을할때 동원하여 이끌었던 최강 고구려기마군대는 5만에 미치지못했다.

이성계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동원한 고려의 정예군으로 이루어진 고려기마 5만명은 활동력에따라 요동뿐만아니라,정신력에따라서는 중원대륙을 삼켜버릴수도있는 군사로도 모자람이없었다.이러한 고려의 운명을건 우리역사에서 광개토태왕이 이끌었던 군사와 맞멎는 가장큰 원정군을 이끌었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요동지역으로 진격한게아니라,

꺼구로 조국인 개성으로 진격해버리는순간 이들을 막을수있는 고려의 군사는없었다.고려의 염원과힘을 모아 선조들의 고토회복과 고려의 흥망성쇠가걸린 막중한 책임을 맡기고 진군하게했던 이성계의 고려기마원정군이 조국에 칼을 겨누는 상황을 맞이했을때 고려의 심정은 통탄정도가 아니라 피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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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시 요동지역에 상주해서 살았던 여진족은 한족인 명나라의 지배를 받아드릴수없었기에 고구려의 한백성이었던 고려는 망조의 길로갔지만,굴하지않고 백여년도 지나지않아 자주적정신을 바탕으로 명나라에 반기를들고 요동지역에서 명나라세력을 몰아냈을뿐만아니라,오히려 200여년채안되서 명나라자체를 패망시키고 중원대륙에 청을 건국하였다.


고구려의 백성을 이루었던 여진족이 누르하치-청태종-순치제에이른 1644년 중국정복이 완성했을시기에 시대를 꺼구로가게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조선은 고토회복은 고사하고,돌아가는 국제정세와 전혀 딴판인 임진왜란,병자호란등 한족인 명나라만이 위대합니다라는  앵무새같은 소리만 외치다 얻어터지는 상황에 직면하게되었다.


자주적으로 동아시아지역의 패권을 이끌어갈수있는 천우신조인 상황을 피동적,수동적,사대적 역사로 나아가게한 우리나라 반만년역사에있어 가장 잘못된판단이 위화도회군이다.위화도회군같은 반역의 무리들이 기득권을 차지한순간부터,역사는 반복되어 자신과가문이 영달을위해서는 나라도팔아먹는 매국노들이 기득권층으로 남아 단죄받지않는 역사가 반복되어지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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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전라도이다"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보았을때 틀린생각이다.백제는 고구려의 일파이고,주활동무대는 오늘의 서울.경기지역과 그리고 충정도지역이다.

백제는 처음과 쇠퇴하여 망할때까지 단 한번도 전라도지역에 수도를 정한적이없다.서울.경기지역에있던 백제가 고구려에밀려 부여나 사비로 수도를 옮겨지만,그곳또한 충정도 지역이었다.

역사적으로보면 고구려,백제,신라 3국을 삼국시대라고 기술하는데,묘하게 사라진부분이 지금의 전라도지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역사부분이 미스테리로 남아있다는점이다.



전라도지역에 생활했던 지배자나 지역민들이 고구려,백제,신라의 협공을 받으며 점차 세력을 잃고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린곳이  전라도지역이기에 전라도는 백제이다라는 개념은 잘못된 역사적시각이다.


눈여겨 봐야할지역이 영산강유역에 남겨진 대형고분들과 유적들이다.전라도지역에는 고구려,백제,신라와 다른 지배계급과지역민들의 연합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것이다.우리나라역사에서 오늘날의 신라의 지역이라고 불리는 김해,부산지역에있던 가야라는 나라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있지만,고구려,백제,신라의 협공을 받았던 전라도지역에 존재하던 나라에대한 기록은 역사속에서 미스테리하게도 모두 사라졌다.


역사적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중에 전라도지역은 백제다라고 우기는분들이 있는데,전라도지역은 백제가 아니다.백제와 관련된 국립박물관이나 유물전시관이 모두 충정도지역에 오늘날에 존재하는지 생각해본적있는가? 백제의 근간은 서울,경기,충정지역의 지역민과 지배계층이 백제라고 볼수있고 오늘날의 전라도지역에 지배계급과지역민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협공을 받으면서,그곳에 살고 집단지배세력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차츰 백제나 신라로 강제편입되었다라고 이해하는것이 상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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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부끄러운 역사일지모르지만,역사속에서 모두 지워져 미스테리로 남길게아니라,오늘날의 전라도지역에서 수백년간 존재했던 나라에대하여 엉뚱한 백제나 신라의 역사로 두리뭉실포장하려니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사기가 묘해지게되버렸다. 전라도지역은 후기에  백제에의하여 강제병합되었지,그곳이 백제의 본류가 아니다.


백제는 충청도이고 전라도지역에는 백제와는 다른 무엇인지 정의할수없는 지역민들이 살고있었다.오늘날에와서 전라도지역은 백제의역사입니다라고 생각한다면,그것만큼 무식한개념도없다.단지 삼국사기에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역사만을 다루었기에,오늘날 전라도지역에있던 지배계층이나 지역민이 이루어었던 국가는 역사의 미스테리로 사라져버린것이다.전라도지역에 존재했던 지배계층이나 사람들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협공에의하여 분해되버렸다라는 개념이 맞는것이다.백제에게 전라도지역이 강제병합되었다라면 모르지만,전라도지역이 백제였다라는 개념은 웃기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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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올림픽 양궁경기에서 히트치신 텐텐소녀,9점에 화살이 맞아도 텐~ 8점이라도 텐텐!! 7점과녁에 맞춰는데도,텐텐텐!!!
 

어떤선수가 저렇게 엉터리점수를 외치구 자빠졌나하고,중국 여자양궁선수중에 찾아보았다.



곽단(郭丹) 베이징올림픽 중국양궁대표선수,관중들이야 자국의 선수가 텐에 맞추기를 기원하는건 이해가가는데,





과녁을 보는 망원경과 점수전광판까지 다볼수있는,경기중인 선수가 버젓이 7점인데도 텐이라고 외치는걸보면,엉터리로 우기는 그근성,우리나라의 선조 주몽님이 비웃고계신다,날조하여,텐텐이라고 외친다고 진실이 바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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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도 1점차이 상황에서 우리나라선수가 마지막 한발 쏘아야할 상황에서,경기중인데 중국선수가 춤을 추고 있지를 않나,중국선수분들 왜 그러셨쎄요.경기중인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텐텐외치면 그걸 믿어주니?,노란과녁에 비스무리하게라도 맞으면 모를까,색깔을 완전히 벗어난 7점에도 텐이라구 외치는 곽단(郭丹), 베이징올림픽 중국양궁마스코트 텐텐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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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을 살펴보다보면,잘알려지지않은 풍습이나,이야기들이 많다.그중에서 세종21년(1439)의 기록을보면 고구려라는 나라를 함께 구성했던,여진족의 결혼풍습에 대한기록이 보인다.


고구려시대의 결혼풍습을 배울때,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는 풍습이있다는것을 학교의 역사교육시간에 배운다.


형사취수제라는것이,형이죽으면 그아내를 동생이 아내로 맞아드리는 결혼풍습이라는것은,일반적상식으로 대부분 알고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망하구 700여년이 지난후인 세종대왕시기에,여진족의 결혼풍습에대한 조선왕조실록의기록을보니,더확장된 내용이 보였다.원문구절을 보면,"父死娶其妾, 兄亡娶其妻" 여기에 보이는 취자는 "娶=장가들 취"이기에,형이죽으면 그아내에게 장가를들고라는 의미가되는데,이풍습은 고구려시대의 형사취수제라는 말과 동의어라고볼수있다.


여진족또한 고구려라는 나라의 한백성을 이룬 구성원이기에,그들의 풍습이 고구려의 풍습이라구해도 이상할것은없다.그런데 앞구절인 "부사취기처"라는 단어이다.이풍습은 고구려의 역사를 배울때,결혼풍습으로 배운적이
없는 단어다.의미는" 아버지가 죽었을때,그첩에게 장가를들고" ,궁금증이 생기는이유가,고구려가 망한이후,700년이지난 세종조에까지도,여진족이 이러한풍습을 가지구있었다면,고구려시대에서도 이러한 결혼풍습이 행해져을거라는것은 미루어 짐작할수있다.


형사취수제는 고구려의 결혼풍습으로 기록하구,부사취기처라는 결혼풍습이있었다는것은,뭍혀버린것이아닌가 라는 생각이든다.이러한 결혼풍습은 고구려시대를 아룰러함께했던 중국의 당나라 왕조에두,그사례가 남아있다.당태종의 아들인 당고종이 아내인 측천무후는,당태종의 후궁 즉,첩이기에, 아들이 아버지의 첩에게 장가든경우이다.부사취기처라는 여진족의 결혼풍습은,고구려시대상을 고려해봤을때,고구려시대의 결혼풍습으로 존재했다구 미루어짐작해두,이상할게 전혀없다.알송달송 역사기록찾아보기는 이정도로하구,믿어서는 안될 남자의 거짓말 7가지에대하여,적구 글의 포스팅을 마무리하려구한다.


                                          믿어서는 안될 남자의 거짓말 7가지

첫번째:일이 바빠서,전화를 못받았어:숨쉴 힘만있어두 전화는 받을수있어
두번째:오빠믿지? MT가서 이야기만하자:7살만도 못한이해력을 가지구있다는것이다.
세번째:내가 다책임질게,걱정마:상대방이 허수아비를 벗어나면,보복할남자이다.
네번째:한번만용서해줘,다시는 절대 안그럴께:맹세하는 사람은,뒤통수를 꼭친다.
다섯번째:돈빌려줘,나중에 꼭갚을께:좋아하는여자에게 돈꿔달라는 남자는,인생이 마이너스이다.
여섯번째:우린 속궁합이 잘맞는것같애: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일곱번째:지금은 못해줘도,나중에 다해줄께:오늘 못해주는사람은 평생 내일이면 잘해줄께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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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한반도의 위치를 생각해보면,6자회담을통하여 북한에게 핵무기를 폐기하도록하는것은 자가당착이 문제로보인다.중국은 끊임없는 국경분쟁을 만들었고,중국과 국경을 맞댄국가중 국경선때문에 전쟁을하지않은 국가가없었다.


인도와두 전쟁을했구,베트남하구두 전쟁을했구,러시아와두 국경충돌이있었다.중국과 국경을맞댄국가중, 못살든,잘사든 상관없이 핵무기를 개발하여 보유하구있음을 알수가있다.왜 이렇게 됬을까?

아시아국가중에 중국과의 국경선을 맞댄국가중 핵무기를 보유하지않은 국가는 베트남정도인데,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을치룬경험이있기에,중국과의 국경선전쟁에서두,승리할수있었기에 예외로본다면,통일한반도가 핵무기를 가지구있는것은,선택이아니라 필수적이라구 볼수가있다.객관적 전력에서 우리나라가 중국과 일전을한다면,국민성이나 군인수준등에있어서 하나두 밀리게없으며,힘으로 싸워두 이길수있다
.

예외적인게 중국이 가진 핵무기인데,
이또한 어찌되었던 북한은 우리나라이기에,통일한반도의 간도지역에대한 국경선분쟁시,중국이 재래식군사대결이 아니라 핵으로 위협시 우리나라또한,중국의 베이징을비롯하여,중국의 거점도시 7개정도는 완전히초토화 시켜버릴수있는 핵무기를 가지구있는것이좋다구본다.

핵무기라는것이,개발기술과 핵실험 2가지의 경험이중요하지,나머지는 중요하지않다.어찌보면 우리나라역사상,핵실험을 완벽하게하여,핵무기를 보유한것은 단기적으로 남북의 대결상황하에서는  위협이될지모르지만,장기적으로보면 통일한국에있어서는 귀중한 가치를가지게된다는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선도적으로 북한에대하여 개발한 핵무기를 폐기하도록할 필요가 전혀없다구 생각한다.물론 우리나라 수준에서두 현재 자체로 핵개발을 하려구한다면,인도나 네팔같은 나라들이 핵무기를 개발하여 보유하는것을보면,충분히 핵무기를 만들어 보유할 기술수준은된다.그러나 막상 우리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하구,핵실험까지해보려면,여러가지 난관이 앞에 부닥치게된다.그러나 북한의 보유한핵무기는,그자체로 이미 핵실험까지 성공하여 보유한 핵무기이기에 더이상,왈가불가한 단계가 이미지나버렸다.

우리민족은 역사이래루 다른나라를 침략하여 강제루 남의 나라를 빼앗는 그러한 일을한적이없는 민족이다.그렇기에 우리나라가 핵무기를 가진다해두,오늘날 핵무기를 가지구있는,그 어떠한 나라와 비교해두
월등하게,평화를 추구하는국가이다.

독일이나 일본,이탈리아등은,2차대전을 일으킨 원죄가 있기에,핵을보유못하지만,우리나라는 역사이래루 원죄가없는 국가이다.우리나라의 지정학적위치가,일반적인곳이라면,보복적핵무기보유가 필요없겠지만,통일한국의 주변에는,만만한 국가가없구,특히 통일한국은,중국과 국경선을 맞데야하며,핵을가진 중국의 부당한압력에는 핵무기로 맞서는수밖에없다.

우리나라는 6자회담에서 발을 빼야한다.북한이 중국군이나 중국민간인이 잘못하면,그자리에서 사살해버릴수있는 자존심은 어디서 나오는걸가?,통일한국이,조선시대처럼,짱개를 부모나라 어쩌구하는 그런염븅할 사대짓을하는 그런모습이라면,차라리 통일안되는게좋다.중국이 요즘 동북공정및 티베트,남사군도,이어도등에서 패권주의적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중국이 우리나라보다 국민성이좋나,단결성이좋나,국가수준이 우리나라 높기나하나,모든분야에서 뒤쳐진,땅덩어리만크구,인구만 많은국가이지,핵무기를 보유한 통일한국은 중국에비하여 모든분야에서 뒤질게없다.

중국과 국경선을 맞데야하는 필연적인 우리나라로서는 ,핵무기보유는 선택이아닌 필수적일수밖에없다.중국과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고토인 간도지역에대한 국경선이 확정되지않는 상태이다.언젠가는 부디칠수밖에없는 필연성을가지구있으며,국제사회의 특성상,국경선분쟁은 누가 개입해서 도와주지않으며,힘으로 부딪칠수밖에없다.

우리나라두 중국의 베이징을비롯하여 최소한 7개거점도시를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릴수있는 핵무기는 보유하구있어야한다구생각한다.처음부터 우리나라가  북한이 핵을개발하구,핵실험을하지못하게 했으면 모를까,이미 핵을만들수있는기술과 보유한 핵무기는 통일한반도의 자산으로 남겨두는게좋다구본다.우리나라두,중국을 완전히 날려버릴수있는 핵무기보유는 필요하다.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라는것이 북한에게가서 잘봐달랄구, 허리조아리며,아부를떠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북한의 핵실험을하여,핵보유를 선언했을때,중국유엔대사가 북한을 비난하자,북한의 외무상이라는 사람이 중국외교부장을 만났을때했던 말에대한 기사가 생각난다."너가 뭔데,이래,저래라 지롤이냐,너가 뭔 형님이여,핵무기문제는 중국 너희가 이래라,저래라해서,따라갈 우리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중국에대하여 필요한자세는,저러한 모습이다.

다른나라와의 처지와는 다르게 통일한반도는 중국과국경선을 맞데야하는것은 필연인데,그런면에있어서는 북한이 중국을 완전히 날려버릴수있는 핵무기를보유한것은,폐기할필요가 전혀없다구본다.어차피 통일한반도는 ,남의나라에 좌지우지되는 모습이되어서는안된다.군사력이나 경제력이나,중국이 건들면 중국도 초토화 시켜버릴수있는,군사력과 경제력 모두 자주적으로 가지구있어야 한다구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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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카구열도에대한 분쟁으로인하여,중국과대만의 관계정상화의 흐름속에서,대만이 일본과 교전을할수있다는식의 대만정부관리의 주장이나오구있다.

어찌되었든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보면,아주 좋은기회가 될것이다.우리나라는베트남전쟁으로인하여,자주국방의 토대를마련할수있었으며,그곳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경제발전의 밑바탕이되었다.

현실적으로보면,우리나라의 고구려의 영토인 간도지역을 되찾아오는방법은,우리나라의 자체힘만으로는 힘든측면이있고,주변정세가 어떠한식으로든 변화되는 기회가 생겨야,그틈을 이용하여 고토를 회복할수가있다.


중국은 겉으로보기에는 통제가잘되구,중앙집권화가 잘되어보이지만,실제로는 타국과의교전이 발생하면,가장쉽게 괴멸되어지는 정치체제를 가지구있다구볼수있다.티베트뿐만아니라,내몽고,신장,조선족기타 수많은 소수민족간의 단합면에서 취약한구성이기때문이다.


만약에 중국과일본의 센카구열도분쟁으로인하여,교전한다면,국제사회의 도움없이는 3주안에 중국전체가 일본에 점령당할수있다구볼수있다.태평양전쟁당시에보면,중국군 3개사단이,일본군 1개소대의 돌격에,싸워보기두전에 다 도망가버려 괴멸되어버릴정도로,당나라군대가 얼마나 허접했는지 보여주는 중국군의 수준이었다.현재라구 별반다르지않다.


중국이 쥐라면,일본은 사나운발톱을 숨긴 고양이라구볼수있다.청일전쟁이 시작은,청국군함과 일본군함사이에 함포발사로 순식간에 개전이되었다.나라간의 군함과군함과의 함포공격은,그자체가 선전포고에해당하여,자동교전이 된다는것을 알수가있다.


일본은 센카구열도에대하여,자국의 영토라구 주장하므로,자국의 영토가공격당하면,그것에대한 방어와공격은 현재의 일본평화헌법내에서두 가능한것이다.고양이와 쥐는 싸우도록내버려두고,우리나라는 고슴도치처럼,어느쪽이든 건들면 찌르겠다는자세로,강대국의 틈바구니속에서,이득의 되는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


강자에게는 약하구,약자에게는 큰소리치는 중국의 외교행태가 센카구열도가 자국영토라는주장과는 다르게 동중국해의 가스전에대한 일본에대한 협력으로 나타나구있다.우리나라의 이어도또한 동중국해에 위치하구있는데,이어도의 가스전과 석유에대한 채취및탐사권리는 우리나라의 주권안에들어있는데,우리나라가 중국의 눈치만보는 헛질거리를 너무잘해서인지,중국은 동중국해의 이어도해역에대하여 외국회사와 계약을하구,가스와석유탐사를 마음대로하면서,우리나라가 이어도해역에대한 가스및석유탐사를 하려구하면,외교적압력을가하여,못하게하구있다.이게 슬픈현실이다.


이어도라두 제대로 지켜라.일본을보라,일본영토에서 그렇게 멀리떨어진 바다에대하여두,대만의 배를 침몰시키면서 자국의 권리를 지키기위하여 강하게행동하여,중국을 굴복시키는것을,중국이라는 나라는 원래그렇다.강하게 나오는국가앞에서는,쥐새끼처럼 숨는다.약하게 나오는 티베트같은민족에게는 몽둥이루 내려친다.


북한을보면,중국에대하여 빌어먹더라두,중국군이나 중국인이 잘못하면그것과는 별개루,모조리 사살해버리는것을보면,참 마음에든다.북한이 강하게 나가면,쥐새끼처럼 숨어서,중국외교부도 숨죽인다.우리나라에서 한국인이 중국인을 폭행한것두아니구,꺼구로 중국인한테 얻어터져는데두,중국외교부는 큰소리친다.우리나라의 대처방식에 문제가있다는것이다.


이어도에대한 문제는,중국배를 침몰시켜버릴려는 단호한태도가 필요한것이지,주댕아리로,아무리 우리나라가 합리적으로 떠들어봐야,되질않는다.대처방식을 확실하게해라.얼렁뚱땅식으로는 중국의 이중성을 격파시킬수는없다.일본보다 우리나라가 힘이없다구해두,영토나 법률에 대하여는 확고한실행이 있어야,그것이 korea,즉 고구려의 기상을가진 대한민국에 부끄럽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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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최대의 미스테리가,광개토태왕의 아들인,장수왕의 평양천도부분이다.


삼국사기 장수왕 15년에 적혀있는 "이도평양"이라는 단어로,평양은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를 했다는 데,과연 지금의 평양이,장수왕이 천도했다는 평양인지에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삼국사기를 전체적으로 읽어보니,전혀앞뒤가 안맞는 구절이많기에,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어디인가에대하여 나름대로 생각해보았다.





광개토태왕은,고구려역사에서,북방민족을 제압하면서 정복군주로서 북방영토를 넓히며 광활한 영토를
만든왕이었다.그리구 그러한 막강한 권력을 이어받은 아들이,북방에는 눈을떼구,그렇다구,백제의
왕을 잡아죽이면서두,그나라를 영토로 편입할생각두 없었다는것은 장수왕의 행적을보면 알수있구,전혀
백제나 신라를 패망시켜 나라를 흡수할생각두 없었음을 알수있는데,어느날 갑자기,남진정책을
위하여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했다는것은,뭔가 평양이라는 위치가 지금이 평양이 아닐수있다는
생각이들었다
.



삼국사기 광개토태왕편을 보면,광개토태왕 16년 궁궐을 중축하고.18년에는 동쪽 지방에 독산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라구 나오는데,동쪽지방에 성을 쌓았는데
자신의 아들이 수도로 옮길, 평양의 사람을 이주시키구,얼마없으면 떠날 궁궐을 뭐하러 중축하구
있었겠는가,평양의 위치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는의미로 보여지구,평양은,지금의 간도라구부르는
동으로 토문강이라구하는곳,그곳어디엔가 위치한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의미는,지금의 평양으로 장수왕이 천도했다는의미가
아니라,송화강근처,지금의 흑룡강성일대 토문강주변에있던 지역을 부르는말이 아닌가생각이든다.
삼국사기 고구려편에는 왕에 관련된 기사들중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이런 비슷한 구절들이 여러개보인다.



특이하게 생각되는것중하나가,평양이 장수왕이래루,고구려의 수도였다면,왕의 무덤들은 당연히
지금의 평양에 산재해있는게 당연할것인데,평양에는 고구려의 왕들의 무덤이라구 알려진게 하나두
없다는점이다
.죽기는 평양에서죽고,묻힌곳은 졸본에가서 뭍혀다구 이해할수도있겠지만,어째든
삼국사기 장수왕조에 기록된 네글자 "이도평양"을 근거로,장수왕때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했다구
해석되어지는것은 잘못되어졌다구 생각되어진디.장수왕이 말한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어디인가,평양이라는곳이 별도로 존재하구있었다구보는것이 더 합리적이다.



지금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로 고구려의 왕들이 왕성이된것은 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보면, 지금의 평양은  장안성이라구 기록되어곳이라구 보는것이 더합당하다구 생각되어진다.
장안성=지금의 평양이라구본다면 장안성을 근거로 기록을 찾아보면



양원왕8년, 장안성을 쌓았다. 평원왕 (평원왕 양원왕의 맏아들이다)28년,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영양왕( 평원왕의 맏아들이다),영류왕은(영양왕의 이복 아우이다)보장왕 (영류왕 아우인 대양왕의 아들이다)



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이렇게 5명의 왕만이 지금의 평양에 살았던 임금이라구
볼수가있다.장수왕이 도읍을 옮겼다는 평양이 지금이 평양이라면,그이후 오래세월이 지난
평원왕28년에 나오는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기록된,장안성은 그럼 어디란말인가?



현재의 평양에서 장수왕이후 쭈욱수도로 삼아왔다면,평원왕이 아버지 양원왕이 공들여 장안성을쌓구
그아들인 평원왕이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겨버렸는데,분명한것은 궁궐을 옮긴게아니라,도읍을 옮겼다구
기록되어져있는데
,장수왕조 15년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것만가지구,그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
이라구 단정하는것은,그이후의 왕인 평원왕이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구 기록되어지는것을보면
이상하다.



그러므로 지금의 평양은,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이렇게 이어져온 장안성을 의미하구
광개토태왕조나 장수왕조에 나오는 평양은,지금이 평양이아니라,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수도가
있었던,상경용천부지역인,우리나라의 간도부르는곳,그곳에 고구려의 평양이있었다구볼수있다.



개인적인 생각이므로 신뢰성은 없다.그러나 삼국사기기록을 보더라두,장수왕조의 평양천도는
절대성립될수없는,그시대상황과 전혀맞지않는 이도평양이라는 네글자에 억메인 오류라구
생각한다.설령 평양으로 장수왕이 도읍을 바꿔다해두,지금의 평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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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속에 면면히 흘러왔던 국민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한다.

우리나라 백성들의 불의한 외세에대하여
맞써싸우는 정신은 세계에서 그유래를 찾기어려울 정도로 강인하다.

고구려가 망해두,끝까지,성에 남아 항전했었다.이러한 민족성은,세계를 재패한
몽고군에대하여두,세계전사에 유일무일한 30년이상을 맞서싸워 나라의 국체를
지키는 밑바탕이 되었다.

몽고와의 항전당시두,지도층들은 자신의영달과 안녕을위하여,화친을 주장할때두
우리나라의 왕과조정관료가 나서서 성을버리구 항복을 하라구,어명이 내렸다해

두,끝까지,항복하지않구 저항했으며,아무리 대국이라할지라두,싸워보지않구,민족의 자존을 버리지않았던
강한 정신력을 가지구있었다.비록 국제정세와 동떨어져,대의명분을 고집하여,백성들의 도탄에 빠진적두
있었지만,이러한 기상은 이민족의 침략에 끝까지 맞서서 국체를 유지할수있는 원동력두 되었다.

몽고나,수당,청태종등 세계를 제패했던 국가들조차도,이러한 특이한 민족성을 전투중에 깨달았기에
힘으로 일시적으로 굴복시킬수는 있어도,지배할수는없는 나라라는 인식을하게되었다.

왕을 사로잡거나,죽이면 이기는게 옛날의 전쟁이었으나,우리나라는 정반대루,나라의 위급상황에서는
왕을 죽였다해두,오히려 백성들이 더강한 항전의식으로 저항했으며,하물며,항복하라구 지도층이 나서서
권해두,끝까지 항전하였던것이다.우리나라의 국체는 왕의것이아니라,백성의 것이었다.

우리나라만큼,북한또한 우리나라의 일부이기에,세계를 제패한 국가들과 다 싸워본 국가는 우리나라가
유일무일하다.과거역사나 현대사나 우리나라는 작지만,굴하지 않았으며,국체를 유지하는데는,혼연일체가
되는 민족성을 가지구있다.

통일한국은,우리선조들이 살았던 간도에대한 권리는 역사이래,한민족의 터전이었다.2,000년전에 자신의
선조가 살던땅이라구,2,000년후에 그곳에 나라를 세운 이스라엘민족보다못하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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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는 우리나라땅이다,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이 신라의 경주에 내려온것두아니며,고구려의 기원인 고조선
이전부터,간도는 우리선조들의 삶의 터전이었다.대한민국을 지구에서 지우지않는한,간도는 반드시 찾아와야할
대의명분을 가진곳이다.광개토태왕,을지문덕,장수왕,그리고 수많은 선조들의 무덤들이있는 땅이 어째서 중국
의 권리가 있단말인가,지구에서 한민족이 사라지지않는한,언젠가는 반드시 고토를 회복할것이다.

동북공정이다 뭐다하지만,북한의 혼란한틈을 타 북한지역을 중국이 지배할수있다는 생각은,아주 얼빠진
망상일뿐이며,그러한 시도가있는순간 공중분해되는것은 중국이다.강이식장군이 말한,무례한 국서에는
답서가 아니라 칼로 화답해야한다는 정신이 우리나라이다.중국이세계의 강대국 어쩌구 폼잡지만,역사이래루
우리나라는 세계를 다지배한 어떤국가가 위협한다해두,국체에 관한문제는 혼연일체가 되어 싸웠다.

진실은 하나다.티벳은 티벳인의 땅이며,내몽고는 몽골의 땅이며,간도는 대한민국의 땅이다,
아무리 무슨공정이다하면서 역사를 날조한다구해두,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온 민족이
사라지지않는한 바꿀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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