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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독재자의 공통점,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윤씨 사건때문에 폭군이되어진것으로 인식되어지고있지만,사실은 그렇지않다.


역사속에 남겨진 기록들을 살펴보면 연산군 그자체가 독재자 유형의 길을 즐겨하고,좋아하는 왕이었을뿐이었다.


연산군의 모델을 통하여,인류역사가 시작된이래 시간과공간에 상관없이 독재자가 되어가는 과정상에 공통점들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연산군은 집권을하자,제일 처음 한일이,백성과 자신과의 관계설정의 신비주의였다.자신이 사는 궁궐의 성벽을 높이,높이 쌓아올리도록하는것도 모자라,아예 자신의 사는곳에서 자신이 무슨짓을하든 아무도 볼수없도록,궁궐주위 사방 40km주변을 누구도 살수없는 지역이라고 "금표"를 부착하여 자신이하고 싶은행동을 꺼리낌없이 할수있는 장소를 만들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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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행동하는것들이 백성들이나 외국에 전파되지못하도록 외국으로가는 사신들에게는 미리 예상문답내용을 암기시켜보내고,자신이하는 행동들에대하여 누설하는 신하를 가장큰 죄로 다스렸으며,궁궐안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잘알수있는 내시들의 결혼상대 배우자까지도 법으로 규정하여,사대부나 국민들속에 자신의 행동들이 새어나가는것을 금했다.이렇게 연산군은 자신의 행동들에대하여 비밀이 유지될수있게 철저하게 주변환경을 만든후,오로지 신하와 백성들에게는 충성과 도리에대한 이야기들 강조하였다.

중종반정인 군사쿠테타로인하여 힘없이 연산군이 강제퇴위 당하는것을보면 연산군이 자신을 지켜줄 군사의 양성이나 무에대하여  연약한 왕이었지 않나 생각할수있지만,연산군은 자신의 부모들의 제사에도 군복을입고 참여할정도였고,개성이나 주요도시를 순시를 할때는 3만명에 이르는 기병과보병을 완전무장시킨채 이끌고 행차할만큼 자신을 보위하는 친위군을 많이두었으며,그자신이 말위에서 활을쏘고 말달리는것을 즐겨하던 힘이나 무에있어 강성한 체력을 가지고있었다.

이런 평상시 강대한 군사수로 자신을 호위하고,만일의 사태에 대비를 철저했는데도 왜 연산군이 박원종이 이끄는 소수의 임시규합적인 군사들이 궁궐을 포위하던 그날밤에 한번 대항도 못해보고,친위군들이 무너졌냐하면 궁궐을 지키는 친위군들이 반란군이 궁궐로 쳐들어오고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마자,단 한사람도 우리의 왕을 지키자하는 군사들이 없었고,평소에는 아양과 아첨을떨며 연산군에게 잘보이려던 장교들과 군사들이었지만,막상 연산군을 지켜야할때에는 평소봐왔던 연산군의 모습을 잘알고있었기에 이런왕을 보호해,자신들의 목숨을 바칠 필요가 뭐있냐는 생각으로 궁궐의 개구멍을 통하여 모두다 도망가버려,반란군이 궁궐로 진입했을때는 연산군을 지키던 군사들은 하나도 보이지많고,연산군만이 궁안에 덩그러니 남아있게 되었다.

연산군은 먼저 자신과 백성과의 간격과 거리를 벌리게하고는 두번째로 한일은 여자들에 관한것이었다.여자의 신분이나 유부녀인지 처녀인지 상관없이,이쁘거나 반반한 몸매를 가진 여자들을 전국에서 불러들였을뿐만아니라,거사라하는 이동할수있는 임시가옥을 만들어,그곳이 길가이든,산이든,민가한복판이든, 밤이든,낮이든 반반한 여자가 보이면 불러들여 그것이 놓인곳은 그자체로 침실이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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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로 한일은 백성들의 송사나 분쟁,경제적어려움등 사사로운일들이나,천재지변같은 현상들은 자신에게 절대 상소하지 못하도록하여,애시당초 자신을 향한 불평 여론근원이 자신에게 도달되지 않도록 한반면에,자신의 보위와 관련되는 문제는 형제자매나 일가친족이라고해도,아예 호적을 파버리거나,서슴없이 죽여버리며 "가엽게 생갈할 가치도없다"라는 말로 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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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로 한일은 자신보다 힘이큰 나라였던 중국에게는 잘보이려고 갖은 아양을 다떨었는데,중국사신이 오면,"내가 어찌 황제의 어명을 갖고온 사신과 마주보고 앉을수있겠습니까"하며,중국사신보다 아래좌석에 앉으며 자신보다 강자인 사람이 존재하는 나라에게는 철저하게 비굴했다.

다섯번째는 신기한 동물들에 관심이 많고 음악과시같은 예술적분야게 관심이 많은척,후원하는척하며,예술적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으레 시를 짓거나,음악을들으며, 나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지?라는 칭찬을 항상듣고 싶어했고,술을 좋아라했다.술을 좋아한 나머지,법률로 업무시간이라도  술을먹고 비틀거리거나,헤롱헤롱한다고,아랫사람이 그러한것을 흉보는 투서를한다면,그 투서를한 아랫사람을 세상의 도를 모르는것들이라하여 잡아다 벌주도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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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칭기스칸과 연개소문를 비교해보았다.단재 신채호선생이 우리나라의 오천년역사의 제일의 인물이라고했던 연개소문,뭔가 두 영웅에는 닮은꼴과 차이점이있을것이다.

역사에서 왜 칭기스칸은 위대한 인물로 전해내려오고,연개소문이 그렇지못했는지 무엇이 닮았고,무엇이 달라는지,만약 두사람이 세계의 판도를 놓고 일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칭기스칸과 연개소문의 공통점 1.두 영웅의 아버지는 신분자체가 높은지위를 가지고있었으나,그 신분를 대를 이어 얻는과정이 순탄치 못했고,스스로의 힘과능력으로 쟁취하였다.


2.칭기스칸과 연개소문은 어릴적부터 활과 칼에 뛰어난능력을 가지고있었다.3,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있어 존재자체가 카리스마였다.4.결단성에있어서 상식을 뛰어넘었다.5.종교자체에 관대했으며 특정종교가아닌 일종의 샤머니즘같은 자신만의 종교를 믿었다.6.외적과 싸울때는 저항했던 적은 하나도 남기지않고 죽였다.7.전장에서 싸우다 말위에서 죽는것을 신념으로 삼았다.


연개소문이 칭기스칸처럼 위대한 인물로 전해지지않는것은 첫째가 스스로가 황제가 되려고하지않았고,둘째가 자식간의 우애를 만들어 내지못했기때문이다.연개소문이 스스로 고구려의 지존으로 나아갔다면,자식들이 불화도 생기지 않았을것이다.칭기스칸의 아들들또한 권력에있어 화합하지 못했다.그러나 아들대에서 나라가 더욱번창한것은,각자가 다스릴나라를 생전에 정해줬기때문이다.하지만 연개소문은 말로는 자식간의 우애를 강조했으나,스스로가 황제가 아니었기에,각 아들들에게 물려줄 나라가 없었다.


칭기스칸이 가장혐오했던 인간상은 자신의 주인을 배신하는 인간이었으며,아무리 자신에게 이득되는 배신을 한사람일지라도,자신이 모시던 주인을 배신한 부하는 상을주는게아니라 모조리 죽였다.그러나 반대로 적이라고할지라도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끝까지 저항했던 사람은 후하게대하고,신하로 삼았다.


만약에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있은후 500년지난후 생겨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과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세계의 판도를 놓고 싸우게되었다면,전력상으로 몽골기병은 최대 20만이 넘지않았고,연개소문의 사수대첩에서 당나라 30만군대를 전멸시켰을때 고구려의 기병은 20만명정도로 볼수가있다.


연개소문의 군사력은 국력이나 기병수에있어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보다 못하지않았다.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지휘하던 고구려기병은 당시 중원을 통일하여 적수가없었던 당나라의 기보병을 맞아 이긴것이고,칭기스칸의 몽골기병또한 자신보다 훨씬 전력상으로 많은군사를 가진 당시 최대의 세력을 이루었던 금나라의 40만대군을 전멸시킨것을 보았을때 연개소문과 칭기스칸은 지휘력에있어 탁월했음을 알수있지만,중원통일제국을 상대하여 이겼던 연개소문이,고려,송나라,금나라의 삼국균형을 유지한 판도에서 하나씩 상대했던 칭기스칸보다는 좀 더강한 지휘력을 가졌다는 생각이든다.


만약에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과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금나라와 몽골의 결전의 분기점이되었던 야호령전투와같은 상황으로 일대결전을 벌인다고 가정한다면,승패는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전멸이었을것이다.연개소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군사를 지휘하는 전술,전략에있어 신적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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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제국 당나라는 연개소문이라는 존재가 살아있는 그자체에도 상당한 공포를 느꼈음을 역사기록들은 말해주고있다.연개소문이나 칭기스칸은 일반 황제나 왕처럼 싸우는 군사들의 뒤에서 양산을쓰고 말로만 지켜보는 그런 스타일을 가진사람들이 아니라,직접 선두에서 군사들과함께 적과싸우는 스타일이었다.


전투지휘 스타일로봤을때 연개소문과칭기스칸이 전장에서 만났다면,선두에서 서로 맞짱을 떳을것이고,그 주위를 호위하며 주군을 보호하려는 군사의 사기가 승패를 결정지었을것인데,연개소문은 왕조차도 직접 단칼에 두동강내버릴정도로 과감한 기를 가지고있었고,전장에서는 항상 병사들이 자는것과 먹는음식을 똑같이하여 한몸을 이루어지냈기에,연개소문이 나아가서 싸운싸움은 생애에있어 단한번도 패한기록이없는  불패의신화를 가졌다.


그에반해 칭기스칸을 따르는 몽골기병은 패한적없는 기병같지만,칭기스칸의 생애있어 패하여 도망다니는일도 많았다.고구려 불패신화를 이끌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 20만,그리고 세계를 제패했던 칭기스칸의 몽골기병 20만이 결전하게된다면,선방은 연개소문이 "나를 따르라"하고 치고 나갔을것이고,마찬가지로 칭기스칸또한 선두에서서 돌격하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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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의 주특기는 직접 적의 기병이나보병과 일대일로 싸우는게아니라 말위에서 적을 옆면이나 사면을 회전하며 적이 나아가는 속도에 맞춰서 화살를 쏘며 빠지는 전술이었기에,뭉쳐서 일대일로 육탄전으로 싸우는 전술과전략을 가진 중원이나 유럽의군대들은 적과 싸워보기도전에 토끼몰이처럼 희생만당하다 전멸하게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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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에게있어 고구려벽화고분에서도 볼수있듯이 달리는 말위에서 뒤를 돌아보며 화살을 쏘는 모습이 낮설거나,신기한것이 아니었다.중원이나 유럽에서나 통할 그러한 칭기스칸의 전술과전략은 고구려기병들에게는 통하지않는다.몽골기병이 가졌던 장점은 고구려기병또한 다 가지고있는것이고,승부의 분기점은 군사를 지휘하는 전술과전략이었을것인데,이점에있어서 연개소문의 능력은 중원통일제국 당나라도 전패를하고 돌아갈만큼 뛰어났다는점이다.


아무리 몽골초원을 통일한 칭기스칸이라고해도,연개소문에게는 패했을것이다.역사에서 가정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칭기스칸의 몽골기병vs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의 승패를 걸라고한다면,나는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에 걸겠다.그만큼 연개소문의 전술과전략은 신묘그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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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기병이 패전한 상대방에게 냉혹하게했다고하지만,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관용을 주는 기병은아니었다.우리나라 역사기록에서 외국의 침략군에대한 대승의 기록을 남기게했던,수나라와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도 전멸은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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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성격과기록을 보았을때 사수대첩에서 당나라의 30만명의 병사중에 단1명도 살려보내주지않았고,외국사료나 우리나라사료 모두에 전멸이라고 기록되어진 대첩은 연개소문의 사수대첩이 유일하다.그만큼 극강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 12세기 다른나라들이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온다는 공포보다,


통일제국 당나라를 더 무서움에 떨게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전술과전략,용맹성,기마능력에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보다 한수위에 군사집단이었다고 생각한다.결과적으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vs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맞짱을 떴다면,몽골기병이 전멸했을것이고.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12c에 존재했다면,고려와 강화하는정도가아니라,칭기스칸의 몽골제국자체가 탄생하지 못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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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에있어,주댕아리로는 명분과 대의 그리고,백성과나라를 위한다고외치면서 행동은 그와는 정반대로 자신의 자리보전과 탐욕만을 추구했던 조선왕조 최대의 망조왕이 바로 인조이다.


인조의 사람됨을 역관 정명수의 인생기록을 통하여 살펴보자.역관정명수는 우리나라사람이었지만,청나라의 주구가된 인물이다.


역사속에 훌륭한 인물에 대한기록도,조선왕조실록에는 몇줄 기록이없는경우도 많은데,이자는 인조실록에만 151건의 기록이 남아있는걸보면,



역관이라는 중인계급의 신분으로,우리나라 역사상 가장많은 역사기록을 남긴인물이다.얼마나 악행을 많이 했는지 미루어짐작할수있다.여진족인 금나라에 굽신거리며,눈치보는것은 배은망덕이고,명나라에대한 부모의은혜를 져버린것이라고 외치면서,광해군을 폐위시켜,왕위에 오른 인물이 인조이기에,과연 주댕아리만큼 행동도 언행일치가 된 왕이었는지,역사기록을 들여다보면알수있다.


1639년,심양에 볼모로잡혀가서 살고있던,소현세자를 모시는 신하중에,정뇌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역관 정명수가 우리나라에 청나라황제의 칙사로와서는 뇌물을 받는일이 많았다.이러한것을 보다못한 정뇌경이 뇌물을 받아쳐먹는 정명수를 처벌해야한다는것에 동참하다가,오히려 역관 정명수의 반격으로,청나라황제가,인조에게 정명수가 실제로 뇌물을 받아처먹었는지 아닌지 인조의 생각을 말해보도록하라고하였다.이미 청나라황제가 정명수의 편으로 기운것을 안 인조는,대갈박을 굴린다.신하들을 모아두고 대화를 나누는데,

인조:정뇌경이 무고의 죄가 없다것을 알겠는데,잘못하면,황제의 화가 나에게까지 미칠것같은데 어떻게들 생각하느냐?


 

우의정 심열:정명수를 처단하는게 무슨 큰일이라고,청나라황제가 나서게까지 일을 만들었는지모르겠습니다.동궁을 모시는 정뇌경이 남의 나라에가서,입을 가벼이 열어,화가 조정에 미치게까지 되었는데,어찌죄가 없겠습니까?


 

인조:그렇겠지? 황제의 진노가 나에게 미치기전에,무사 이응징을 심양으로 보내,정뇌경을 죽여버리도록해라. 내가 누구냐? 살기위해 대갈박을 3번이나 바닥에 박으면서,살아난사람인데,뇌물을 주는게 되수냐? 입주댕아리 잘못놀려,나에게까지 화가 미치게되었구나.정명수는 뇌물받은 적이 전혀없다고 가서 황제에게 잘 말하도록해라.



이러한일이있고부터,정명수가 요구하는것이나 바라는일은,앞장서서 인조는 다들어준다.

정명수:내 처의 동생이 벼슬이없는데.......
인조:아이고,그러셨세요? 벼슬을 내려야죠.

정명수:매부가 군대생활이 쪼메 힘들다구하는데요.......
인조:진작에 애길하지~ 군역을 면제시키도록하여라

정명수:황제의 일을하느라,바빠서 부모님 묘소관리가 힘든데 조카가 그일을 하고있다는데.......
인조:효자시구려,그런생각까지,조카에게 군수벼슬을줘 타의 모범이되게하라

정명수:나를위해 일하는 사람을 병조좌랑이 기분나쁘게해서 내가,몽둥이로 병조좌랑을 좀 패습니다.
인조:감히 황제의 칙사를 기분나쁘게하다니,맞아도 싸죠.잘하셨구려.패시느나 힘드셔쬬, 여봐라 역관 정명수에게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리도록하여라.



역사기록에서 인조와 그의 유신들이 광해군을 폐위시키며,가슴을 뜨겁게하는,명분과대의,그리고 북벌론을
외치며,민족의 자긍심을 보여주는가 싶더니,권력을 잡자마자,주댕아리는 잘놀렸지만,실제로 행동은 무지렁뱅이보다못한 비열하고,자신의 권력만을 탐하며,나라의 기상을 망조들게하여,이중적인간들이 출세하게하고,백성을 위하여 바른말하는 사람들은 아예,싹이자라지도 못하도록 밟아죽여버리는 패악한 나라기상을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반복되어,우리가 정권을잡으면,서민을 위하고,나라를 위한다고 주댕아리로는 어느정권이라도 외치지만,실제행동의 결과가 그러했는지는 인조처럼 역사가 재평가할것이다.조선시대 자신의 안위와 탐욕만을위하여 온갖악행을 저지른 가장 사악한 임금은 인조였다.역적 정명수가 날뛸수있었던것도,인조라는 나라를 망조로들게한 매국노왕이 있었기때문이다.유유상종인것이다.


오늘날에도 되새겨봐야할 교훈이있다.인조처럼,자신의 자리보전과 탐욕을위하여 관직을 내리는것이 얼마나 나라를 망조들게하는지 보여준다.관직을 내림에있어 사람의 애증의 강도에따라 내리는것이아니라,그 사람의 능력에따라,맞는 지위를 주어야한다,


너는 나하고친하니,능력이 모자라도,높은자리해라,너는 나에게 밑보였으니 죽을줄알라식으로는 안된다.나라의 지도자는,애증에따라 사람을 쓰면안된다.오직 능력에따라 그에 맞게 사람을 써야한다.역사기록속에서 나라가 망조가 든경우는,그 근본이 인사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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