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이나 기타사정으로 궁궐밖에 나가살게되는 궁녀들은 비록 민가에서 산다고해도,왕의 여자들이었던 까닭에 결혼하거나,남자와같이 살수가없었다.
형식상으로는 민간인 처녀들이었기에 법으로 궁녀의 신분이었다가,민간인이되었다고 결혼하지말라는 그러한법은 없었지만,
왕가의 입장에서 왕조의 여자였던 궁녀들을 신하가 데리고산다는것은 주.종의 신분관계가 엄격한 조선유교주의사상하에는 불충의 개념이 될수밖에없었기에,나서서 결혼하려는 사람들은 존재할수가없었다.
이러한 예외를 깬 특이한 경우가 있었는데,남치원이라는 사람이다.병으로 궁궐밖을 나간 궁녀을 첩으로 맞아들여서 살고도,무사했을뿐만아니라,벼슬까지도 할수있었는데,어떠한 사연이 있었길래 감히 왕의여자를 첩으로 두고도 살아남을수있었는지 살펴보자.
조선 성종의 슬하에는 배다른 형제자매가 많았다.성종의 첫째아들이 연산군이었고,배다른 둘째아들이 진성대군인 중종이었다.연산군과 진성대군의 나이차는 12살이었는데,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는 일찍죽었고 진성대군의 생모인 숙의윤씨(정현왕후)는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의원수를 갑는다고 일으킨 피바람속에서도 숨죽이며 살아남아 자신의 아들인 진성대군과 자신의 목숨을 유지할수있었다.
연산군과 진성대군의 배다른 형제자매중에 성종의 후궁인 숙의심씨의 맏딸인 경순옹주가 남치원에게 시집을갔기에 남치원은 성종의 부마이면서,연산과진성의 처남이기도했다.숙의 심씨와 훗날 중종의 어머니가되는 숙의 윤씨는 서로를 잘아는 사이의 친분을 가지고있었다.
연산군시대에도 남치원은 우대를 받았고,중종시대에도 배려를받았는데,중종은 연산군을 내쫓고 왕이된 임금이었기에,쫒겨난 왕의 측근들은 대부분 처단되기마련인데,남치원은 연산군의 배려를많이 받았는데도,중종대에 이르러도 특혜를 받는걸보면 평소처신을 잘하지 않았을까하겠지만,
남치원이라는 사람의 일상생활행동을 살펴보면,오늘날의 망나니나 조폭같은 인물이었기에,성종의 여러 부마들중 한사람인 부마라는 관점보다는 경순옹주의 어머니인 숙의심씨와 중종의 어머니인 숙의윤씨의 관계가 특별했다고 생각할수가있다.
남치원에대하여 기록된 행동들을보면,다른지방을 50명정도의 무리를 이루어 여행다니며,자신에게 잘못보이는 사람은 일부러 시비나꼬투리를 잡아 그자리에서 패거나 가둬둔다든지,승려들이 사냥하는데 방해가된다고 절간자체를 박살내버린다든지 일반사람같았으면,중한형벌을 받았을것인데,유야무야로 넘어가는 기록들뿐이다.
평소행실이 이모양이었던 남치원이 궁궐의 대비전에서 나인으로 일했던 궁녀가 병으로 민가에 나가살게되었는데,그 궁녀를 데려다 자신의 첩으로 만들어 버린일이 생기게된다.다른것은 그냥 넘어간다고해도,이것은 그냥넘어갈수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조정에서는 연일 궁녀를 데려다 첩을삼은 남치원은 불충이기에,잡아다 죽여야한다고 상소를하니,
처음에는 이복동생의 남편이였기에 생각해서 눈감아 줄려고해도 궁녀의 체계자체를 무너뜨릴수있는 행위였기에 형벌은 내려야겠고 잡아들이면,반드시 죽여야하는 불충에 해당했기에,처단해버릴까 하다가도,어제밤에 자신의 모후이면서 대비인 정현왕후가 한말이 귀가에 멤돌았다.
"성종시대,악독한 폐비윤씨의 피박속에서 그리고 연산군아래에서도 나와 숙의심씨는 서로를 도우며,이겨냈었는데 이번일은 불문하고 넘어갔으면 하네" 하지만 어머님,신하들의 상소가 너무강해서......."신하들의 말은 중요하고,내말은 암것두 아니라는 말이지,아이고 내가 지금까지 누굴믿고 모진 연산군의 핍박속에서도 살았는데,늙으면 빨리죽어야 할까보네 내말은 상관말고,신하들 말 잘듣고 잘사시게,그만 물러가게......." 어머님ㅡ.ㅡ
오늘도 어김없이 대간들이 남치원을 잡아들여 죽이라고 탄핵했지만,중종의 입에서 나오는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불허한다,불허한다,불허한다" 결국 남치원을 유배를 시키는가싶더니,유야무야되어지게된다,중종의 생몰년은 1488-1544 이고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는1462- 1530 이기에,남치원은 중종25년 1530년까지는 중종의 어머니의 보호를 받았을것같기는 한데,남치원의 공식적인 벼슬은 중종14년 1519년이후로 사라져,생몰년을 알수가없다.
병으로 민가에나가 사는 궁녀에대하여,사람들이 남치원처럼 행동했다가는 목숨이 열개라도 부족한 왕과신하의 관계가 엄격했던 불충하면 같은형제라도 죽임을 당하는 조선시대에서 부마로서 대놓고 꺼리김없이 행동하며 살다간 인물 1위를 고른다면 남치원이다.중종과 남치원의 기록을 살펴보다보니,왕이라고할지라도,자신의 어머니가 후원하는 사람에게는 어쩔수가 없었나보다^^
왕의여자
- 조선조 제1위 난봉꾼 부마 2008.12.27 3
- 잠자리상대가 신분을 만들었다 2008.12.17 20
조선조 제1위 난봉꾼 부마
잠자리상대가 신분을 만들었다
이제나,저제나 오직 한남자를 숙명처럼받아드리는 왕조시대의 궁녀들은 일반적인 혼인절차를통하여 남자의 아내로서 살아가는일반여자와는 궁녀가되어지는 목적과삶이 달랐다.
가난은 나라도 어찌할수없다라는 왕조시대아래에서는 한입이라도 덜수있는 길이 딸들을 궁녀로보내는것이었으며,
기득권신분층인 집안에서는 왕비나 후궁으로는 보낼지언정 일반궁녀로 보내려고 하지않았다.
오늘날 초등학교 입학연령쯤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여자들인 궁녀들은 오직 한남자인 왕의 성은을 입지않는한 늙어죽을때까지 처녀의 삶으로 생을 마감해야했다.
왕이 70먹은 할아버지이든,배볼딱한 못생긴눔이건 상관없이 궁녀의 남편이 될수있는 사람은 오직 한남자로 궁궐에 들어갈때부터 정해져있었기에 선택에 여지는 죽을때까지 존재하지않았다.
일반궁녀에서 임금과 하룻밤이라도 보내면 일반궁녀에서 하루아침에 후궁이라는 신분상승을 얻을수있었기에,궁녀는 남자와남편으로서 왕을대하는게아니라,어렵게살아가는 자신의 가족과삶의 편안함이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기에,왕의 눈에 띠려고 궁녀들사이에는 불꽃티는 암투가 벌어지곤했지만 왕이 남자나남성으로서 신체적인 매력이 있어서 그러한것은 아니었다.
일반궁녀에서 후궁이나 왕비가되었다고해도 왕을 남편이나 남자로 독점하려는경우에는 질투나 투기로몰아 최악에는 사약을받아 죽을수도있었기에,왕의 여자들은 왕의 사랑을받는시기에는 친정과 가문그리고 자신의 모든편의와혜택을 얻을수있었지만,관심이 멀어지면 명목상의 신분만을 유지할뿐 쓸쓸한 삶을 살다가 죽어야하는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오늘날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남편이라는 개념은 애시당초 존재할수가없었고.바람둥이 남자가 될수밖에없는 왕의 환경속에 놓여있던 왕비와후궁그리고 궁녀들의 사랑이란 왕의관심을 얼마나 오래 얻을수있는 기간을 가질수있느냐일 뿐이었다.
궁녀의 품계는 다음과같았다.정1품 : 빈,종1품 : 귀인 정2품 : 소의 종2품 : 숙의 정3품 : 소용 종3품 : 숙용 정4품 : 소원 종4품 : 숙원 정5품 : 상궁 종5품 : 상복 정6품 : 상침 종6품 : 상기 정7품 : 전빈 종7품 : 전설 정8품 : 전찬 종8품 : 전등 정9품 : 주궁 종9품 : 주치
우리가 흔히 티브에서 상궁이라는 부르는 사람은 정5품의 품계를가지고 종4품인 숙원과는 한단계 벼슬의차이였지만 종4품이상부터가 왕의 성은을입은 후궁의 신분이었기에 김상궁이나 안상궁이나로 불리는 궁녀들은 평생 왕의 성은을입지 못한 신분을가진 일반궁녀의 최상의 단계임을 알수가있다.
사극의 화면속에서는 궁녀들사이에 무수리라는 명칭도보이는데,무수리는 궁녀의 신분을가진 여자는아니었고,궁궐내에서 궁녀들의 잡다한일을 도와주는 오늘날의 파출부형식으로 궁궐내에 살지않으면서 궁궐로 출퇴근하여 일하는 여자들이었다.
무수리들도 궁궐로 왔다갔다할수있었기에 왕의 눈에띄어 왕의 잠자리상대되어 후궁의 신분을 얻을수도있었지만,극히드물고 무수리의 자식중에 왕이된경우는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있는데,영조의 어머니인 최무수리(종4품 최숙원)는 무수리라는 신분상의 제약으로인하여,왕의 신분을가진 영조조차도 자신의 어머니를 비로 높일수가없었다.무수리와 궁녀사이에도 신분질서차이가 존재하고있음을 알수었다.
영조는 늙어서도 자신과 60살차이넘는 여자를 신부로맞이해서 산걸보면 배볼딱나왔든,머리가 허연 할아버지이든 남자라고는 왕밖에 선택할수없는 운명적신분인 왕의 여자들인 궁녀들의 일생은 오늘날에 중요시하는 사랑.좋아함의 감정은 배부른 소리일수밖에없는 슬픈존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