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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끼리 물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하되 벼슬의 높고 낮음에 의지하여 서로를 대하려 말라.” 연개소문의 일생의 철학을 표현하여 아들들에게 한 이 말의 의미는 형제끼리 화합하라는 의미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는 연개소문은 자신보다 지위와 혈통이 높은 왕이라 할지라도 단칼에 베어버리는 주관을 가졌기에, 세상에 절대적인 지위나 벼슬은 없다는 경험을 이야기 하고 세상사의 일을 함에 있어 오직 혈통과 벼슬에만 의지하여 맹종하는 인간은 반드시 단칼에 목이 베어지는 망조에 이르게 된다는 인생 경험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물고기와 물은 서로에게 절대적인 존재이며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고, 형제 관계의 바탕은 서로의 지위나 세속적 부귀의 서열로 만들어 지지 않는 운명적인 핏줄을 바탕으로 하기에 서로를 대할 때 지위와 부귀로 다퉈 우열을 가리려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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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사수대첩은 널리 알려져있지만,자세한내용은 전하지않는다.연개소문의 지략과용맹성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대첩이었는데도,여러가지 의문점을 남기는 기록을 보여주고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하여,사수대첩의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자.먼저 백제를 신라와연합하여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운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사수대첩이후로 죽음이 역사기록속에서 전혀 나타나지않고 있고,


살았다면  고구려 멸망당시에 70이넘은 이세적같은 늙은장수가 참가하는것을보았을때도 그러하고,또한 소정방이 고구려침략군에 직위만 바뀌고,



항상 장수명단에 들어있었던 관례를보아도,
사수대첩이후에 행방이 묘연해지고,죽은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는걸보면 그의 죽음이 비참했음을 의미한다.사수대첩과 연관되어지는 또다른 당나라 장수가 당나라의 병부상서,오늘날에보면 국방부장관이라고 할수있는 임아상이라는 장수이다.이사람또한 사수대첩 기록이후로 전장에서 죽었다라고 짤막하게 기록되어있을뿐,어떤싸움에서 누구에게 죽음을 당했는지 기록되어있지않다.

소정방,방효태,임아상  3사람이 우연히 일치로,사수대첩이후로 역사속에서 사라져버린다.3사람에대한 기록을 찾아보고,사수대첩이 어떻게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는지 알아보고자한다.먼저,삼국사기에 나타난 연개소문,소정방,임아상,방효태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보장왕19년(660년)11월 패강도행군대총관 계필하력,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평양도행군대총관 유백영등으로 하여금,당나라는 여러갈래의 길을 따라 고구려를 침공하게했다.

 

보장왕20년(661년)4월 임아상 패강도행군대총관,계필하력 요동도행군대총관,소정방 평양도행군대총관등 35군을 수륙으로 나누어 고구려로 진군하게하였다.

 

보장왕20년(661년)8월 소정방이 대동강에서 고구려군사를 격파하고,평양성을 포위하였다.

 

보장왕20년(661년)9월 연개소문이 남생에게 군사를주어,압록강을 지키게하니,당나라의 군사가 넘어오지를 못했다.계필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했을때에는 강에 얼음이 얼어있었고,남생의 군사를 상대로 크게이겼으나,당나라에서 철수하라는 조서를 내려서,평양으로 진격하지않고 그냥 돌아갔다.

 

보장왕21년(662년)1월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연개소문과 사수언덕에서 싸우다 군사가
전멸당했으며,함께참가했던 방효태의 아들 13명도 모조리 죽었다.이때 평양성을 포위하고있던
소정방의 군사는 폭설이 내려서,후퇴하여 돌아갔다.중국측기록에 662년 2월 전장에서 임아상이
죽었다라고 나온다.


660년도의 당나라장수의 직책과 661년의 직책은 사라진 사람이보이구,기존직책을 살아남은 사람으로 재편되어 부여되고 있음을 알수가있다.평양도행군대총관 유백영은 11월에 고구려침략을 하는데,다음해 4월에는 소정방이 평양도행군대총관이 된것을보면,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11월에 고구려에 들어갔던 유백영은  전멸을 당했던지,대패를했기에, 5개월도 안되는 사이에 직책이 사라져버린다.이사람이 패전기록또한 기록되어있지않다.


소정방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킬 당시를 보더라도,바다를 건너 군사를 이동하였다는것이다.661년에 평양도행군대총관에 임명되어,고구려를 침략하는루트는 육로를따라 요동을거쳐 평양으로 진군한것이 아니라,바다를건너 수군을 이끌고 곧바로 대동강을따라,평양으로 들어갔음을 알수가있다.


임아상의 패강도행군대총관또한 소정방과함께 대동강을따라,곧바로 평양으로 진격했음을 알수가있다.나머지  요동도행군대총관 계필하력은 ,압록강을 통하여,육로로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했음은,연개소문이 계필하력군에 맞서기위하여,남생을 압록강수비로 보낸것을보면 알수가있다.


그렇다면,일반적인 고구려침공루트인 요동지역인 백암성,요동성,안시성등을 격파하고 내려온것이아니라,소정방,임아상,방효태,계필하력은,바다를 통하여,오늘날의 상륙전을 감행했음을 알수있고,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곧바로 진격했던 소정방과 임아상의 군대는 후방지원군의 식량의 도움없이는 완전히 고립되게됨을 의미한다.


그런데,고립된 소정방군과 임아상의 군대를 지원해줄 요동도행군을 이끄는 계필하력이 압록강에서 남생의 군대를 대파하고도,당나라의 철군조서를 받아서,돌아가버렸다라고 기록되는데,소정방군과 임아상군은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을상태라,멀리 떨어진 신라에게조차 식량도움을 요청하는 상태였는데,고구려의 남생군을 대파했다는 계필하력군이 진격을하지않고,이기고 돌아가버렸다는것은,앞뒤가 맞지않다.


육로를 통하여 요동을 거쳐 고구려로 들어올수있는 길이 모두 막혀있었고,그나마 남아있는 압록강을 통한 당나라군의 진격또한,남생에의하여 저지되었다고 볼수있다.당나라군이 대승을한게아니라,남생군에게 대패를 했을 가망성이 많고,패배의 결과로 계필하력은 돌아갔을것이다.


그렇다면,왜 요동도행군총관인 계필하력은,소정방군을 지원하기위하여,곧바로 대동강으로 상륙한게아니라,압록강으로 움직였나하는 의문이생긴다.이것은 요동지역을 수비하고있던  고구려군사를,제압하면서 내려온게아니기에,계필하력군이 압록강에서 싸우지않았다면,평양성 깊숙이 들어간 소정방군은 요동지역의 고구려군사가 평양성을 응원하기위하여 남하 할수있기때문이라고 볼수있다.


그러나 계필하력군이 고구려의 남생에게 패하고 돌아가버리자,평양에서 고립되어진 소정방과 임아상군은 철수를 하지않으면,전멸당하게되는 상황에 빠졌다고 볼수있다.그렇기때문에,당나라에서는 이들을 구원하기위하여,긴급별동대인 20만명규모의 방효태군을 바다를 건너 배를 이용하여,직접 평양으로 진격하여 들어가 도와주도록 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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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군과 임아상군은 평양을 포위한상태라기보다는 꺼꾸로 고구려군에의하여 바다로 도망갈수도없는 퇴로가 완전히 차단된상태였다.이를 간파한 연개소문이,별동대인 방효태군이 배를타고 들어와서,사수언덕에 상륙하는 당나라군사를,전멸시켜버렸다고 볼수있다.1월에 연개소문의 사수대첩으로 긴급지원군인 방효태군이 전멸했고,2월에 임아상이 전장에서 죽었는데,임아상은 패강도행군총관이고,소정방은 평양도행군총관,계필하력은 요동도행군총관,그런데 이중에,계필하력은 압록강에서 남생에의하여,패전을했기때문에,계필하력은 고립되지않고 살아돌아갈수있었지만,소정방과 임아상은,이미 방효태군이 전멸당한 1월 이후에는,연개소문에 의하여 모두 전멸했을 것이다.


임아상은 662년 2월에 전장에서 죽었다라고 중국기록에 나오는데,패강도행군은 1월에 방효태별동대 20만군사가 전멸당하자,고립되어있던 패강도행군또한 전멸당했을것이다.한달기간안에,임아상이 다른 전장에서 죽었다고는 볼수없겠고,사수대첩과 연결되어 패강도행군또한 전멸당했다고 생각하는것이 이치에 맞다.


그리고 662년 1월 연개소문의 사수대첩과관련하여 소정방이 폭설인 자연재해때문에 철수한게아니라,사수대첩과연계되어,평양도행군또한 전멸해버렸을것이다.소정방이 죽음이 기록되지않은것은,그 죽음이 비참했기때문이고,고구려를 침략했던,소정방,임아상,방효태등 행군총관들이 연개소문에 의하여 모두전멸되어 죽어버렸다는 치욕적인 기록을 남기는게 창피했기때문에,직접적인 별동대인 방효태군의 전멸은 기록해두고,나머지 임아상과 소정방은  어떻게,어디서 죽었는지 역사속에 감춰 버린것이라고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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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대첩은 완벽하게 당나라군대를 한사람 남김없이 전멸시킨 우리나라역사에있어,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스케일이 큰규모인 대첩이었음을 알수가있다.연개소문의 성격이나 지휘스타일상,고립되어 차단된 당나라군대를 온전히 돌아가도록할만큼,자비로운 장군이 아니었다.소정방이 역사속에서 사수대첩이후로 죽은기록이 사라져버린것은,사수대첩에서 그의군사들과함께 전멸해서 죽었거나,그에대한 책임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을가능성이 많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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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칭기스칸과 연개소문를 비교해보았다.단재 신채호선생이 우리나라의 오천년역사의 제일의 인물이라고했던 연개소문,뭔가 두 영웅에는 닮은꼴과 차이점이있을것이다.

역사에서 왜 칭기스칸은 위대한 인물로 전해내려오고,연개소문이 그렇지못했는지 무엇이 닮았고,무엇이 달라는지,만약 두사람이 세계의 판도를 놓고 일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칭기스칸과 연개소문의 공통점 1.두 영웅의 아버지는 신분자체가 높은지위를 가지고있었으나,그 신분를 대를 이어 얻는과정이 순탄치 못했고,스스로의 힘과능력으로 쟁취하였다.


2.칭기스칸과 연개소문은 어릴적부터 활과 칼에 뛰어난능력을 가지고있었다.3,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있어 존재자체가 카리스마였다.4.결단성에있어서 상식을 뛰어넘었다.5.종교자체에 관대했으며 특정종교가아닌 일종의 샤머니즘같은 자신만의 종교를 믿었다.6.외적과 싸울때는 저항했던 적은 하나도 남기지않고 죽였다.7.전장에서 싸우다 말위에서 죽는것을 신념으로 삼았다.


연개소문이 칭기스칸처럼 위대한 인물로 전해지지않는것은 첫째가 스스로가 황제가 되려고하지않았고,둘째가 자식간의 우애를 만들어 내지못했기때문이다.연개소문이 스스로 고구려의 지존으로 나아갔다면,자식들이 불화도 생기지 않았을것이다.칭기스칸의 아들들또한 권력에있어 화합하지 못했다.그러나 아들대에서 나라가 더욱번창한것은,각자가 다스릴나라를 생전에 정해줬기때문이다.하지만 연개소문은 말로는 자식간의 우애를 강조했으나,스스로가 황제가 아니었기에,각 아들들에게 물려줄 나라가 없었다.


칭기스칸이 가장혐오했던 인간상은 자신의 주인을 배신하는 인간이었으며,아무리 자신에게 이득되는 배신을 한사람일지라도,자신이 모시던 주인을 배신한 부하는 상을주는게아니라 모조리 죽였다.그러나 반대로 적이라고할지라도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끝까지 저항했던 사람은 후하게대하고,신하로 삼았다.


만약에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있은후 500년지난후 생겨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과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세계의 판도를 놓고 싸우게되었다면,전력상으로 몽골기병은 최대 20만이 넘지않았고,연개소문의 사수대첩에서 당나라 30만군대를 전멸시켰을때 고구려의 기병은 20만명정도로 볼수가있다.


연개소문의 군사력은 국력이나 기병수에있어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보다 못하지않았다.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지휘하던 고구려기병은 당시 중원을 통일하여 적수가없었던 당나라의 기보병을 맞아 이긴것이고,칭기스칸의 몽골기병또한 자신보다 훨씬 전력상으로 많은군사를 가진 당시 최대의 세력을 이루었던 금나라의 40만대군을 전멸시킨것을 보았을때 연개소문과 칭기스칸은 지휘력에있어 탁월했음을 알수있지만,중원통일제국을 상대하여 이겼던 연개소문이,고려,송나라,금나라의 삼국균형을 유지한 판도에서 하나씩 상대했던 칭기스칸보다는 좀 더강한 지휘력을 가졌다는 생각이든다.


만약에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과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금나라와 몽골의 결전의 분기점이되었던 야호령전투와같은 상황으로 일대결전을 벌인다고 가정한다면,승패는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전멸이었을것이다.연개소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군사를 지휘하는 전술,전략에있어 신적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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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제국 당나라는 연개소문이라는 존재가 살아있는 그자체에도 상당한 공포를 느꼈음을 역사기록들은 말해주고있다.연개소문이나 칭기스칸은 일반 황제나 왕처럼 싸우는 군사들의 뒤에서 양산을쓰고 말로만 지켜보는 그런 스타일을 가진사람들이 아니라,직접 선두에서 군사들과함께 적과싸우는 스타일이었다.


전투지휘 스타일로봤을때 연개소문과칭기스칸이 전장에서 만났다면,선두에서 서로 맞짱을 떳을것이고,그 주위를 호위하며 주군을 보호하려는 군사의 사기가 승패를 결정지었을것인데,연개소문은 왕조차도 직접 단칼에 두동강내버릴정도로 과감한 기를 가지고있었고,전장에서는 항상 병사들이 자는것과 먹는음식을 똑같이하여 한몸을 이루어지냈기에,연개소문이 나아가서 싸운싸움은 생애에있어 단한번도 패한기록이없는  불패의신화를 가졌다.


그에반해 칭기스칸을 따르는 몽골기병은 패한적없는 기병같지만,칭기스칸의 생애있어 패하여 도망다니는일도 많았다.고구려 불패신화를 이끌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 20만,그리고 세계를 제패했던 칭기스칸의 몽골기병 20만이 결전하게된다면,선방은 연개소문이 "나를 따르라"하고 치고 나갔을것이고,마찬가지로 칭기스칸또한 선두에서서 돌격하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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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의 주특기는 직접 적의 기병이나보병과 일대일로 싸우는게아니라 말위에서 적을 옆면이나 사면을 회전하며 적이 나아가는 속도에 맞춰서 화살를 쏘며 빠지는 전술이었기에,뭉쳐서 일대일로 육탄전으로 싸우는 전술과전략을 가진 중원이나 유럽의군대들은 적과 싸워보기도전에 토끼몰이처럼 희생만당하다 전멸하게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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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에게있어 고구려벽화고분에서도 볼수있듯이 달리는 말위에서 뒤를 돌아보며 화살을 쏘는 모습이 낮설거나,신기한것이 아니었다.중원이나 유럽에서나 통할 그러한 칭기스칸의 전술과전략은 고구려기병들에게는 통하지않는다.몽골기병이 가졌던 장점은 고구려기병또한 다 가지고있는것이고,승부의 분기점은 군사를 지휘하는 전술과전략이었을것인데,이점에있어서 연개소문의 능력은 중원통일제국 당나라도 전패를하고 돌아갈만큼 뛰어났다는점이다.


아무리 몽골초원을 통일한 칭기스칸이라고해도,연개소문에게는 패했을것이다.역사에서 가정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칭기스칸의 몽골기병vs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의 승패를 걸라고한다면,나는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에 걸겠다.그만큼 연개소문의 전술과전략은 신묘그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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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기병이 패전한 상대방에게 냉혹하게했다고하지만,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관용을 주는 기병은아니었다.우리나라 역사기록에서 외국의 침략군에대한 대승의 기록을 남기게했던,수나라와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도 전멸은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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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성격과기록을 보았을때 사수대첩에서 당나라의 30만명의 병사중에 단1명도 살려보내주지않았고,외국사료나 우리나라사료 모두에 전멸이라고 기록되어진 대첩은 연개소문의 사수대첩이 유일하다.그만큼 극강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 12세기 다른나라들이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온다는 공포보다,


통일제국 당나라를 더 무서움에 떨게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전술과전략,용맹성,기마능력에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보다 한수위에 군사집단이었다고 생각한다.결과적으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vs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맞짱을 떴다면,몽골기병이 전멸했을것이고.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12c에 존재했다면,고려와 강화하는정도가아니라,칭기스칸의 몽골제국자체가 탄생하지 못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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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사수대첩은 널리 알려져있지만,자세한내용은 전하지않는다.연개소문의 지략과용맹성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대첩이었는데도,여러가지 의문점을 남기는 기록을 보여주고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하여,사수대첩의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자.먼저 백제를 신라와연합하여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운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사수대첩이후로 죽음이 역사기록속에서 전혀 나타나지않고 있고,

살았다면  고구려 멸망당시에 70이넘은 이세적같은 늙은장수가 참가하는것을보았을때도 그러하고,또한 소정방이 고구려침략군에 직위만 바뀌고,항상 장수명단에 들어있었던 관례를보아도,


사수대첩이후에 행방이 묘연해지고,죽은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는걸보면 그의 죽음이 비참했음을 의미한다.사수대첩과 연관되어지는 또다른 당나라 장수가 당나라의 병부상서,오늘날에보면 국방부장관이라고 할수있는 임아상이라는 장수이다.이사람또한 사수대첩 기록이후로 전장에서 죽었다라고 짤막하게 기록되어있을뿐,어떤싸움에서 누구에게 죽음을 당했는지 기록되어있지않다.

소정방,방효태,임아상  3사람이 우연히 일치로,사수대첩이후로 역사속에서 사라져버린다.3사람에대한 기록을 찾아보고,사수대첩이 어떻게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는지 알아보고자한다.먼저,삼국사기에 나타난 연개소문,소정방,임아상,방효태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보장왕19년(660년)11월 패강도행군대총관 계필하력,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평양도행군대총관 유백영등으로 하여금,당나라는 여러갈래의 길을 따라 고구려를 침공하게했다.


 

보장왕20년(661년)4월 임아상 패강도행군대총관,계필하력 요동도행군대총관,소정방 평양도행군대총관등 35군을 수륙으로 나누어 고구려로 진군하게하였다.


 

보장왕20년(661년)8월 소정방이 대동강에서 고구려군사를 격파하고,평양성을 포위하였다.


 

보장왕20년(661년)9월 연개소문이 남생에게 군사를주어,압록강을 지키게하니,당나라의 군사가 넘어오지를 못했다.계필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했을때에는 강에 얼음이얼어있었고, 남생의 군사를 상대로 크게이겼으나,당나라에서 철수하라는 조서를 내려서,평양으로 진격하지않고 그냥 돌아갔다



 

보장왕21년(662년)1월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연개소문과 사수언덕에서 싸우다 군사가 전멸당했으며,함께참가했던 방효태의 아들 13명도 모조리 죽었다.이때 평양성을 포위하고있던 소정방의 군사는 폭설이 내려서,후퇴하여 돌아갔다.중국측기록에 662년 2월 전장에서 임아상이 죽었다라고 나온다



660년도의 당나라장수의 직책과 661년의 직책은 사라진 사람이보이구,기존직책을 살아남은 사람으로 재편되어 부여되고 있음을 알수가있다.평양도행군대총관 유백영은 11월에 고구려침략을 하는데,다음해 4월에는 소정방이 평양도행군대총관이 된것을보면,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11월에 고구려에 들어갔던 유백영은  전멸을 당했던지,대패를했기에, 5개월도 안되는 사이에 직책이 사라져버린다.이사람이 패전기록또한 기록되어있지않다.


소정방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킬 당시를 보더라도,바다를 건너 군사를 이동하였다는것이다.661년에 평양도행군대총관에 임명되어,고구려를 침략하는루트는 육로를따라 요동을거쳐 평양으로 진군한것이 아니라,바다를건너
수군을 이끌고 곧바로 대동강을따라,평양으로 들어갔음을 알수가있다.


임아상의 패강도행군대총관또한 소정방과함께 대동강을따라,곧바로 평양으로 진격했음을 알수가있다.나머지  요동도행군대총관 계필하력은 ,압록강을 통하여,육로로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했음은,연개소문이 계필하력군에 맞서기위하여,남생을 압록강수비로 보낸것을보면 알수가있다.


그렇다면,일반적인 고구려침공루트인 요동지역인 백암성,요동성,안시성등을 격파하고 내려온것이아니라,소정방,임아상,방효태,계필하력은,바다를 통하여,오늘날의 상륙전을 감행했음을 알수있고,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곧바로 진격했던 소정방과 임아상의 군대는 후방지원군의 식량의 도움없이는 완전히 고립되게됨을 의미한다.


그런데,고립된 소정방군과 임아상의 군대를 지원해줄 요동도행군을 이끄는 계필하력이 압록강에서 남생의 군대를 대파하고도,당나라의 철군조서를 받아서,돌아가버렸다라고 기록되는데,소정방군과 임아상군은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을상태라,멀리 떨어진 신라에게조차 식량도움을 요청하는 상태였는데,고구려의 남생군을 대파했다는  계필하력군이 진격을하지않고,이기고 돌아가버렸다는것은,앞뒤가 맞지않다.


육로를 통하여 요동을 거쳐 고구려로 들어올수있는 상태가 모두 막혀있었고,그나마 남아있는 압록강을 통한 당나라군의 진격또한,남생에의하여 저지되었다고 볼수있다.당나라군이 대승을한게아니라,남생군에게 대패를 했을 가망성이 많고,패배의 결과로 계필하력은 돌아갔을것이다.


그렇다면,왜 요동도행군총관인 계필하력은,소정방군을 지원하기위하여,곧바로 대동강으로 상륙한게아니라,압록강으로 움직였나하는 의문이생긴다.이것은 요동지역을 수비하고있던  고구려군사를,제압하면서 내려온게아니기에,계필하력군이 압록강에서 싸우지않았다면,평양성 깊숙이 들어간 소정방군은 요동지역의 고구려군사가 평양성을 응원하기위하여 남하 할수있기때문이라고 볼수있다.


그러나 계필하력군이 고구려의 남생에게 패하고 돌아가버리자,평양에서 고립되어진 소정방과 임아상군은 철수를 하지않으면,전멸당하게되는 상황에 빠졌다고 볼수있다.그렇기때문에,당나라에서는 이들을 구원하기위하여,긴급별동대인 20만명규모의 방효태군을 바다를 건너 배를 이용하여,직접 평양으로진격하여 들어가 도와주도록 했을것이다.


소정방군과 임아상군은 평양을 포위한상태라기보다는 꺼꾸로 고구려군에의하여 바다로 도망갈수도없는 퇴로가 완전히 차단된상태였다.이를 간파한 연개소문이,별동대인 방효태군이 배를타고 들어와서,사수언덕에 상륙하는 당나라군사를,전멸시켜버렸다고 볼수있다.1월에 연개소문의 사수대첩으로 긴급지원군인 방효태군이 전멸했고,2월에 임아상이 전장에서 죽었는데,임아상은 패강도행군총관이고,소정방은 평양도행군총관,계필하력은 요동도행군총관,그런데 이중에,계필하력은 압록강에서 남생에의하여,패전을했기때문에,계필하력은 고립되지않고 살아돌아갈수있었지만,소정방과 임아상은,이미 방효태군이 전멸당한 1월 이후에는,연개소문에 의하여 모두 전멸했을 것이다.


임아상은 662년 2월에 전장에서 죽었다라고 중국기록에 나오는데,패강도행군은 1월에 방효태별동대 군이 전멸당하자,고립되어있던 패강도행군또한 전멸당했을것이다.한달기간안에,임아상이 다른 전장에서 죽었다고는 볼수없겠고,사수대첩과 연결되어 패강도행군이 전멸당했다고 생각하는것이 이치에 맞다.


그리고 662년 1월 연개소문의 사수대첩과관련하여 소정방이 폭설인 자연재해때문에 철수한게아니라,사수대첩과연계되어,평양도행군또한 전멸해버렸을것이다.소정방이 죽음이 기록되지않은것은,그 죽음이 비참했기때문이고,고구려를 침략했던,소정방,임아상,방효태등 행군총관들이 연개소문에 의하여 모두전멸되어 죽어버렸다는 치욕적인 기록을 남기는게 창피했기때문에,직접적인 별동대인 방효태군의 전멸은 기록해두고,나머지 임아상과 소정방은  어떻게,어디서 죽었는지 역사속에 감춰 버린것이라고 볼수있다.


사수대첩은 완벽하게 당나라군대를 한사람 남김없이 전멸시킨 우리나라역사에있어,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스케일이 큰규모인 대첩이었음을 알수가있다.연개소문의 성격이나 지휘스타일상,고립되어 차단된 당나라군대를 온전히 돌아가도록할만큼,자비로운 장군이 아니었다.소정방이 역사속에서 사수대첩이후로 죽은기록이 사라져버린것은,사수대첩에서 그의군사들과함께 전멸해서 죽었거나,그에대한 책임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을가능성이 많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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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행적과 이미지는 다양한해석이 가능하지만,그사람의 공이나 전술등의 면에있어서는 제대로 알려져있지않다.

연개소문에대한 공에대한 기록은 달랑 2줄밖에없다.
삼국사기의 보장왕21년(662)에 기록되어있다.


"21년 봄 정월, 좌효위 장군 백주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개소문과 사수 언덕에서 싸우다가 그의 군사가 전멸하였다. 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소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다. 그 때 마침 폭설이 내렸으므로 그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역사란 문장구절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그당시 시대적상황을 고려하여 전체적인 문맥을 이해하구
풀이해야한다.세계3대해전의 한사람인 도고헤이아치로 제독두 실전사령관은,수도나 궁성에 머물러
지휘하는게아니라,직접 현장에서 지휘했다는것이다.또한 당나라 장군 이세적을 보더라두,
옛날의 장군들은 80살먹었더라두,현장에서 싸우지,수도에 머물며,현장의 군을 지휘하지않는다는것이다.


그런데,유독 연개소문은은 실전사령관이었는데,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에서 연개소문이 위치는
언제나  평양성에서 지휘했을것이라는 어리석은추정에서 사수대첩의 의미가 축소되구있다.


사수는 평양성근처에 위치해있지않았으며,연개소문은 고,당전쟁시 수도평양에서 머물면서
지휘했다는 이런엉터리해석은 기본적으로  상충되는구절을 만들어내는 허구의 가설일뿐이다.


연개소문은 왕이아니었구,실전사령관이었다.적국과 싸울때 누구보다 먼저,앞장서서 나아가
싸웠을것이다.
연개소문은,평양성에서 지휘하다가,방효태군의 별동대가 온다는것을알구,
소정방에게 포위되어진 평양성을 빠져나가,평양성근처에서 방효태군을 기다리다가 싸워서 이겼다라는
이러한 논리는 전혀 엉터리가설일뿐이다.


좌효위대장군 방효태가 이끄는 군은 별동대가 아니라,핵심적 지원군으로,그병력규모는
기존에 평양성을 에워싼 당군사보다 더많았을것이며,군사의 수는 못해두 30만명은 넘었을것이다.


방효태가 이끄는 군사는 수군이아니라,육로로 행군해서 들어왔다.이미 평양성이 포위된상태에서
지원부대가 오구있다는걸 알았다면,연개소문이 위치는 원래부터,평양성에있지않았구,최전선에
위치해있었다구 보는것이 타당하다
.요동성이나 안시성등 지금의 동북3성근처의 사수라는 강
어디에서인가 퇴로를 끊구,연개소문이 기다리구있었다구 볼수있다.


이때 주목해봐야할 기록이 사수대첩이 일어난 당고조때가 아닌 당태종이 이전에 고구려를 침입하여,
도종이라는 사람하구 나눈대화의 요점이,어째서 자신이 고구려공략에 실패하였는가라구 물었을때
안시성에 집착하지말구,평양에 먼저 별동대를 보내서 혼란케해어야 하지않았나 대답하는기록이다.


연개소문은,최전선에서 싸웠을것이며,싸움에 승리는,오히려 당나라영역으로 꺼구로 진격하는
전술로 맞대응했다구볼수있다.당태종이,늪지를 급하게 도망갔던 이유도,후방이 연개소문에게
차단되었구,오히려 당의 영역에 연개소문이 진격하였기때문이었을것이다.


연개소문이 평양성에 머물러 지휘했다면,어느세월에 평양성에서 연개소문이나와  당태종이 그렇게 겁을
먹구 살기급급하여  급히퇴각하구 도망갔는지 그해답이 나오지않는다.


사수대첩에서두,연개소문의 위치는 평양성이 아니라,최선에위치해서 싸웠을것이구
평양성에 밀구올라간게아니라,최선에서 오히려 당나라영역쪽으로 밀구올라갔다구 볼수가있다.


후방이 퇴로가 막혀있던,소정방군대뿐만이아니라,지원군으로  넘어왔던 모든 행군도총관들두,
요동지역에서 현장지휘를했던,연개소문에 의하여,다 궤멸되었다구볼수있다.


그러므로 사수대첩에서 죽은 당군의 숫자는 최소한 30만명이상이었으며,연개소문의 성격상
단1사람두 남김없이 죽였을것이다.전멸이 뜻하는것은,포로가 없다라는의미로 해석하는것이
타당하다.


어찌되었든,고.당전쟁에서 연개소문의 지휘위치는 평양성이아니라,최전선이었으며,안시성전투,
사수대첩등 모든전투에서 연개소문이었을것이다. 안시성성주 양만춘이라는 인물두 허구일
가망성이 100%라구 생각한다.안시성이 포위되었을때 고구려에서 지원군을 10-20만을 보냈다는것은,
안시성을 구하기위하여 우리나라는 전력을 기울였다구 볼수있으며,그렇게한 가장중요한이유는,
그러한 병력을 동원할수있구 지원할수밖에 없는 중요한인물이 안시성에 포위되어 지휘하구
있었다구볼수있다.


즉,당태종의 눈까리를 맞춘화살이나,당태종이 늪을따라 목숨을 구걸하면서 도망가게한,당나라영토
깊숙히 추격할수있는 권한이나 배포를가진것은,그당시 상황하에서는 일개성주가 그렇게했을리는없구,
현장지휘자가 연개소문이었다면,가능한 이론이라구볼수있다.


안시성전투나,사수대첩 이모든 일련의 전투는 연개소문이 직접지휘했구,당태종이 눈까리에 화살을
맞구,안시성성주를 기특하게여겨,비단과 의복을 내렸다는데,그대상은 허구인 양만춘이아니라,
연개소문을 역적이라구 기술한 삼국사기의 잘못된평가기록때문이었다구 볼수있으며,역적에게는
공이 있었두,작게하거나,없게기술하는게 역적기술에 더합당하기에,누구인지는 모르는 안시성성주라는
두리뭉실한기록으로 넘어가버렸다구 볼수있다.


이런한 시대적기록이 조선후기에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로기록돼지만,조선시대는 고구려역사의
암흑기였기에,제대로된 개념을가지구 고구려역사를 논할수있는 사관이나 역사가는 애시당초 존재하지않구
멸종되었던시대였기에,조선시대에 기록된 고구려역사기록은 가장신뢰할수없는 기록이라구 볼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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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주님 찬양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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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참진리가 넘쳐나는 교주님,경배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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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주님 찬양단의 한분인 오찬양님과 면담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
교주님의 다스리는 나라가 자유와 서민을 위한 삶을 외치셨었는데,어째서,현실은 정반대루
법을 잘 지키는사람은 븅신이구,사기치는 사람,말만잘하는 주댕이가진사람,뒤통수를 때리는사람
,그런분들이 잘처먹고,배터지는 인간들이 더많아지는, 주댕아리와는 정반대의 사회현실이
되었다구 보시나요?

오찬양
역사가 평가할것입니다.

사회자
훗날 역사가 평가해줄거라는 항의를 하신 전임교주들두 그런 비슷한 말들을 많이 하셨는데요
역사가 평가하는데,광해나,연개소문은 아주나쁜눔이구,쥐새끼같은 인조나 선조들은 좋은평가로
실록에 기록되어졌는데,이런건 그럼 왜 그렇다구 보십니가?

오찬양
기록자가 노망이 나서그런것입니다.

사회자
좋은사회정의를 외쳤는데,현실은 정반대루 도덕과 사회수준은 뒤걸음치는 인간들이 활개를치구,
사기꾼과 말잘하는 주댕아리만 가지면 된다는 극단적사회현실이 된것에 대하여 오찬양님을
비롯하여,교주님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말인가요?

오찬양
우리에게 뭔힘이 있었다구,그런거까지 책임져야하나요.
사심없이,신도들을 위해서 노력했습니다.안따라준 무지몽매한것들이 문제라구 볼수가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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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
오늘 대담에 응해주셔셔 감사합니다만,누가 교주님이나 오찬양님등에게 등떠밀며,
교주해달라구한적없으며,하겠다구,별쇼를 다하면서 선출해달라구,신자들을 잘인도하신다구해서,
뽑아줘던것이지,그러한 기회를 준 신자핑계는 되지마시길 바랍니다.

오찬양
한번더,기회를 주세요.진짜 이번에는 찬양두잘하구,맨날 신자들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진짜입니다.

사회자
그렇게 고생스럽다면서  찬양단을 뭐하러 더하실려구요? 전에 뽑아주고,이번에 안뽑아줬더니
신자들이 덜떨어졌다느니,도덕성개념이없다느니,이따구로 교만하시면서,그게 뽑아준 신자들에 대한
도리인가요? 찬양단하면 뭐,좋은게 많나봐요?고생만하구 힘들다는 찬양단,푹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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