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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이 추진한 요동정벌이 승산이 있었을까요?




충분히 승산이 있었습니다.명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는 여진족이라는 야인부족들이 만주전역에 살고있어서 완충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이들 여진족은 우리나라의 고구려를 이루어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살았던 민족이었습니다.

몽골은 전체인구가 200만명이 안되었고,군인수가 10-20만명 정도였지만,세계를 제패했고,여진족또한 문화나 인구수에서 월등이 미개하고 뒤쳐졌음에도,중국을 정복할 수가 있었습니다.여진족이나 몽고족에 비하면,그당시 국제상황은 조선이라는 나라는 여진족이나 몽고족이 처한 현실보다,나으면 나앗지 못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여진족이나 몽고족등이 중원을 차지하기 전에,부모의 나라입네,어쩌구,공자왈맹자왈 매일 잠꼬대하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먼저 친이유를 알아야합니다.그만큼 조선이라는 나라는 스스로 대국을 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는 유교적 사대주의 골수꼴통 현실이었기에.덕택에 이민족의 침략을 일본,몽고,여진등의 수많은 침입을 받아야 했습니다.

만약에 생각을 바꿔,여진이나 몽골등과 연합하여,중원을 쳤다면 충분히 명나라를 제압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요동지역은 예로부터,여진족과 우리나라가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살았던 조상들의 땅이었기에,그곳에 환경은 우리나라에서 유리했지,결코 명나라에 유리한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요동정벌을 했다면,분명하게 명나라와 일전을 벌였을 것이고,중원까지 지배할수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부모 어쩌구하는 꼴통유교주의 때문에,요동을 차지할 수는 있었더라도,중원까지 차지할 배포도,기상도 없었기에
스스로 좌절되어 버린 것 입니다.


만약 요동정벌을 단행 했다면,역사는 바뀌었을 것 이고,고구려라는 나라가 여진족과조선족이 하나가되어 부활하여,결국 청나라가 아닌,코리아라는 나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주댕아리로만 평화를 외치면서,현실적으로 힘을기르지 않는 공자왈 맹자왈하는 꼴통들이 사회곳곳에 있습니다.이런 꼴통들의 주댕아리들은,우리나라의 역사를 이전이나 이후로도 식민지배 시킬 일등공신들 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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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회군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물줄기를 꺼꾸로 돌려버린 우리나라 반만년역사에있어 최악의 판단이었다.

위화도회군의 진행과정과 그당시 국제정세를 통하여,위화도회군은 어쩔수없는 시대적운명이었는지에 알아보고자한다.

1388년에 신흥나라였던 명은 고려령에 속했던 철령이북지역에대하여 자신의 영토로 편입하려고하였다.

그러나 한족이 세운 명나라는 고래부터나 그당시까지도 요동지역에대하여 지배권을 행사할 아무런근거도없는 나라였고


그곳은 대대로 고구려와 한백성을 이루었던 고려와 여진족의 터전으로 지배하려고해도 지배할수가없는 형식적인 통제만이 가능한지역이었다.

원.명교체기에서 명나라는 원나라황실을 북쪽으로 내몰아냈을뿐 몽골을 완전히 제패했던것도아니었기에 고려가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지가 중요한때였다.원황실이 북부초원지역으로 물러났기에,요동지역은 무주공산으로 지배국가가 없는 상태였다.

위화도회군을하여 조선을 개국하고 만주벌판에대한 고토회복이 중단되었지만,그렇다고 그이후 명나라가 만주지역에대한 지배력을 행사할수있었느냐하면 그렇지도못했다.

명나라는 허울뿐인 명목상의 지배력만을 가졌을뿐,실제적으로 만주지역에 흩어져살던 여진족,거란,몽골,조선등의 영향력아래있었다.

1392년에 조선이개국하고,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는데,조선이 개국한지 200년도 안된상태에서 이미 만주지역은 명나라의 지배하에 놓인게아니라,누르하치라는 여진족의 영웅의 지배하에 놓이게된상태였다.

누르하치(1559-1626)가 요동지역을 통일하여 지배할때의 군사력은 5만정도의 군사였다.명나라는 임진왜란때문에 국력이 약화된게아니라,요동지역에는 조선개국당시부터 여진족의 여러부족이 지배하고있었고 명나라는 여진부족간의 싸움을 부추겨 간접적인 통치형태만을 행사할수있었을뿐인 허약한상태였다.

임진왜란당시에도 명나라의 원군과 누르하치의 여진족의 원군 모두가 조선을 지원해주겠다고했지만 위화도회군의 원죄로인하여 명나라에대한 소중화를 자처했던 조선의 역대왕들의 태도처럼 대갈박 빈 선조에의하여 명나라원군만을 받아드리고 고구려의 백성으로 함께 나라를 이루었던 누르하치의 원군은 믿지못하고 색안경을끼고 의심하여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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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8년 3월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고려에게 통보하자,1388년 5월 고려는 역사적으로나,또한 원나라황실과고려의 관계를보더라도 원나라가 몽골초원지역으로 물러나면,권리가있다면 고려에게있는것이지,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요동지역에대한 권리를 주장할  이유가없다고 생각했기에 고려의 우왕과 최영장군은 이성계로하여금 우리나라의 요동지역에대한 고토회복을 명령하였다.

본격적인 요동수복전쟁을위하여 고려는 국가의 운명을걸고 총동원령을 가동했다.고려가 동원한 군사는 5만명으로 누르하치가 요동지역의 여진을 통일하여,중원대륙을 정복할때 동원되었던 순수여진족 군사수가 5만내외였기에 고려가 명나라와의 일전을위하여 동원했던 순수 고려인으로 구성된 5만의 군사는 적다고 볼수없는 군사였고,또한 이성계에게 주어진 고려병사들은 고려에서 동원될수있는 3만필에 이르는 말을 총동원하여 만들어진 기동력이 빠른 기마병단으로 구성되었다.

칭기스칸의 몽골군대와 고려가 싸웠을때 고려의 국토를 최북단에서 최단남까지 전격적으로 몽골군대가 휘젓고다닐수있던것은 몽골의 군대가 기마병으로 구성되었기에 가능했고,또한 그러한 몽골기병들은 몇십만이아니라 기껏해야 5만내외의 몽골기병이었고,

칭기스칸의 몽골군대가 광활한 유럽과 러시아를 원정하여 정복했을때도 몽골기병의 수는 8만에 미치지못했다.또한 고구려 최전성기인 광개토태왕이 왜적에의하여 침략당한 신라를 구원하거나 기타 정복전쟁을할때 동원하여 이끌었던 최강 고구려기마군대는 5만에 미치지못했다.

이성계에게 나라의 운명을 맡기고 동원한 고려의 정예군으로 이루어진 고려기마 5만명은 활동력에따라 요동뿐만아니라,정신력에따라서는 중원대륙을 삼켜버릴수도있는 군사로도 모자람이없었다.이러한 고려의 운명을건 우리역사에서 광개토태왕이 이끌었던 군사와 맞멎는 가장큰 원정군을 이끌었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요동지역으로 진격한게아니라,

꺼구로 조국인 개성으로 진격해버리는순간 이들을 막을수있는 고려의 군사는없었다.고려의 염원과힘을 모아 선조들의 고토회복과 고려의 흥망성쇠가걸린 막중한 책임을 맡기고 진군하게했던 이성계의 고려기마원정군이 조국에 칼을 겨누는 상황을 맞이했을때 고려의 심정은 통탄정도가 아니라 피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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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당시 요동지역에 상주해서 살았던 여진족은 한족인 명나라의 지배를 받아드릴수없었기에 고구려의 한백성이었던 고려는 망조의 길로갔지만,굴하지않고 백여년도 지나지않아 자주적정신을 바탕으로 명나라에 반기를들고 요동지역에서 명나라세력을 몰아냈을뿐만아니라,오히려 200여년채안되서 명나라자체를 패망시키고 중원대륙에 청을 건국하였다.


고구려의 백성을 이루었던 여진족이 누르하치-청태종-순치제에이른 1644년 중국정복이 완성했을시기에 시대를 꺼구로가게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조선은 고토회복은 고사하고,돌아가는 국제정세와 전혀 딴판인 임진왜란,병자호란등 한족인 명나라만이 위대합니다라는  앵무새같은 소리만 외치다 얻어터지는 상황에 직면하게되었다.


자주적으로 동아시아지역의 패권을 이끌어갈수있는 천우신조인 상황을 피동적,수동적,사대적 역사로 나아가게한 우리나라 반만년역사에있어 가장 잘못된판단이 위화도회군이다.위화도회군같은 반역의 무리들이 기득권을 차지한순간부터,역사는 반복되어 자신과가문이 영달을위해서는 나라도팔아먹는 매국노들이 기득권층으로 남아 단죄받지않는 역사가 반복되어지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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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칭기스칸이 몽골을 통일하여 칸이된지 6년이지난 1211년에 이르러 칭기스칸은 금나라를 이기지못하고는 몽골의 나라를 건설할수없음을알고,금나라와의 사생결단의 전쟁을하기로 결심하여,금나라 원정을 떠나게된다.


이때 몽골의 병력은 3군으로 나눠,우익군 4만명은 자신의 장남인 주치가 이끌도록하고,좌익군은 3만명을 제베가 이끌도록하고,중군 5만은 칭기스칸이 직접친정하여 총 12만명의 몽골기병군단을 구성하였다.

몽골에게 12만명의 군사는 몽골이라는 나라가 모을수있는 최대치의 군사였기에,



만약에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진다면,몽골자체가 패망해버리는 몽골의 모든 국운을 걸고 벌이는 일전이었다.몽골12만의 기병이 금나라로 침공한다는 소식을들은 금나라 7대 황제인 위소는 여진의 최고의 명장 완안승유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여 40만의 최정예 기,보병군대로 몽골의 칭기스칸군대에 맞서도록하였다.


칭기스칸과 완안승유의 결전이 야호령지역에서 이루어졌다.야호령에서 이루어졌던 몽골과 금나라의 전투의 승패는,몽골인들에게 있어서는몽골인들도 할수있다라라는 자신감과 몽골족이 단합하는 자부심의 바탕으로,대제국 몽골을 건설할수있는 토대가 되었지만,금나라에게있어서는 야호령의 전투에서 패배로,100여년가까이 중원을 제패했던 여진족의 쇠망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야호령에서의 전투의 발단은 오사보지역에서 처음이루어졌는데 제베가 이끄는 좌익군이 오사보에 주둔하던 금나라군 우회하여 뒤를 돌아쳐서 무너뜨리자,금나라군은 퇴각하여 야호령에 진지를 마련하였고,이들을 지원하는 금나라 장군 완안승유의 40만군대가 야호령에서 이르자,몽골군또한 야호령에 도착하여 각자의 나라의 운명을건 일전을 벌이게되었다.


칭기스칸은 일전에 앞서 다음과같이 말하였다."몽골의 흥망이 이 일전에 달려있다."말하고는 휘하의 군사중에 몽골을 위하여 몽골군사의 혼을 보여줄 선발대 3,000명을 뽑았다.이들 선발대의 임무는 숫적으로 4배이상의 우위를보이는 금나라군사와의 일전에앞서 40만의 적군속으로 돌격하여 적의 사기를 꺽으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선발대는 살기위한 돌격을 하는것이아니라,죽는것을 영광으로 삼는목표를 가진 몽골군사들이었다.선발대가 금나라 대군의 진중으로 돌결하여 오자,금나라군대는 숫적우위를 이용하여,이들을 전멸시킨다.그러나 전멸당하면서 보여준 몽골군사의 모습이 금나라군사의 사기를 꺽어버리게 된다.


금나라 군사의 화살을 한쪽눈에 맞은 몽골기병은,비명을 지르며 아픈척 하는게아니라 아니라 오히려 화살에 박힌 눈알을 뽑아서 싸웠고 오른쪽손이 잘려나가면,왼손으로 칼을 잡고싸웠으며,머리를 도끼로 맞았서도,숨이 붙어있는 마지막힘이 남아있는순간까지 칼을 휘둘다 죽었다.


금나라가 군사들이 기름을 부어,몽골군사의 말과몸에 불을 지르더라도,말과함께 뼈와살이 다 타들어가는 순간까지,싸우면서 악귀처럼 웃으며 죽어가는 선발대 몽골군사들을보니,금나라군사들은 이들을 제압하고는 있었지만,마음속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뒤로 도망가려고하였다.이때 몽골기병본대가 돌진하자,사기가 떨어진 금나라군대의 진중에는 도망가려는 군사들로인하여 우왕좌왕하다가 금나라는 대부분의 군사를 잃고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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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령에서 패전한 완안승유는 군사를 후퇴.재정비하여 회화보에 집결시킨후 마지막남은 자신의 군사에게 말한다." 고향으로 가고싶은자 돌아가도좋다.이미 이길수없음을 안다.그러나 나는 여기서 최후까지 몽골군과 싸우다 죽어 금나라장수의 혼을 보여주고싶다."이에 야인의 본성을 가졌던 여진족군사들이 사기가 깨어났지만,이미 한발늦은 결과였고 금나라군사는 최후의 1인까지,몽골군과 맞서싸워 전원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러한 금나라군사들의 마지막 자세는,칭기스칸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가볍게 볼수없는 정신을가진 군사들이라는 생각이 들게하였으며,칭기스칸 자신의 생전에는 금나라의 패망을 볼수없었다.어찌되었든 금나라의 명장과 칭기스칸의 야호령의 결전은,몽골족에게는 자신들도 할수있다는 자신감을,패배한 완안승유와금나라군사의 마지막 정신과자세는,비록 몽골군에게 패했지만 훗날 청이라는 제국을 세워 중원을 지배할수있는 부활의 혼을 여진족에게 남겨주었다.


역사속에서도 보듯이,승자와패자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승패를 받아드리는  마지막자세가  어떻했는지도 중요하다는것이다.사회분야를보더라도,경쟁하다가 진사람은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하고,승자를 축하해주는 모습보다는,뒷다리걸기,뒤다마까기등,자신의 부족했던것을 뒤돌아보기보다는 패배를 인정하지않는것이,자신을 더 돋보위게하는양,이런 비겁한 모습을하는 사람이나 부류들이 있다.


사람의 일에있어 승패는 이길수도 질수도있다.모든것을 다 이기는 사람도없고,영원히 승리만하는 삶도없다.중요한것은 승패가 결정되었을때 보여주는 마지막모습에따라,훗날 패자가 승자가될수있고,승자도 패자가 될수있는 요인을 가지고있다고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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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을 살펴보다보면,잘알려지지않은 풍습이나,이야기들이 많다.그중에서 세종21년(1439)의 기록을보면 고구려라는 나라를 함께 구성했던,여진족의 결혼풍습에 대한기록이 보인다.


고구려시대의 결혼풍습을 배울때,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는 풍습이있다는것을 학교의 역사교육시간에 배운다.


형사취수제라는것이,형이죽으면 그아내를 동생이 아내로 맞아드리는 결혼풍습이라는것은,일반적상식으로 대부분 알고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망하구 700여년이 지난후인 세종대왕시기에,여진족의 결혼풍습에대한 조선왕조실록의기록을보니,더확장된 내용이 보였다.원문구절을 보면,"父死娶其妾, 兄亡娶其妻" 여기에 보이는 취자는 "娶=장가들 취"이기에,형이죽으면 그아내에게 장가를들고라는 의미가되는데,이풍습은 고구려시대의 형사취수제라는 말과 동의어라고볼수있다.


여진족또한 고구려라는 나라의 한백성을 이룬 구성원이기에,그들의 풍습이 고구려의 풍습이라구해도 이상할것은없다.그런데 앞구절인 "부사취기처"라는 단어이다.이풍습은 고구려의 역사를 배울때,결혼풍습으로 배운적이
없는 단어다.의미는" 아버지가 죽었을때,그첩에게 장가를들고" ,궁금증이 생기는이유가,고구려가 망한이후,700년이지난 세종조에까지도,여진족이 이러한풍습을 가지구있었다면,고구려시대에서도 이러한 결혼풍습이 행해져을거라는것은 미루어 짐작할수있다.


형사취수제는 고구려의 결혼풍습으로 기록하구,부사취기처라는 결혼풍습이있었다는것은,뭍혀버린것이아닌가 라는 생각이든다.이러한 결혼풍습은 고구려시대를 아룰러함께했던 중국의 당나라 왕조에두,그사례가 남아있다.당태종의 아들인 당고종이 아내인 측천무후는,당태종의 후궁 즉,첩이기에, 아들이 아버지의 첩에게 장가든경우이다.부사취기처라는 여진족의 결혼풍습은,고구려시대상을 고려해봤을때,고구려시대의 결혼풍습으로 존재했다구 미루어짐작해두,이상할게 전혀없다.알송달송 역사기록찾아보기는 이정도로하구,믿어서는 안될 남자의 거짓말 7가지에대하여,적구 글의 포스팅을 마무리하려구한다.


                                          믿어서는 안될 남자의 거짓말 7가지

첫번째:일이 바빠서,전화를 못받았어:숨쉴 힘만있어두 전화는 받을수있어
두번째:오빠믿지? MT가서 이야기만하자:7살만도 못한이해력을 가지구있다는것이다.
세번째:내가 다책임질게,걱정마:상대방이 허수아비를 벗어나면,보복할남자이다.
네번째:한번만용서해줘,다시는 절대 안그럴께:맹세하는 사람은,뒤통수를 꼭친다.
다섯번째:돈빌려줘,나중에 꼭갚을께:좋아하는여자에게 돈꿔달라는 남자는,인생이 마이너스이다.
여섯번째:우린 속궁합이 잘맞는것같애: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일곱번째:지금은 못해줘도,나중에 다해줄께:오늘 못해주는사람은 평생 내일이면 잘해줄께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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