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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죄수가 남자죄수들의 방으로 보내져 윤간당하는 형벌이,우리나라에도 있었는데,이러한 일이 왜 일어났었는지,그 배경부터 살펴보면

1596년 조선의 암군중 하나로 평가받는 선조, 재위29년 어느 추운 겨울날 발생했던 이사건은 그시기가 임진왜란시기,

선조는 의주까지 백성을 버리고 혼자 도망가,여차하면 중국으로 튀어서 도망갈 준비를하고 있었는데,마침 원조하러 중국의 군사들이 도착했기에,

그들의 비위를 잘맞춰서 일본군을 몰아내주기만을 학수고대했고,

백성들 또한 얼른 전란이 끝나 평화가 찾아오길 기원하는 마음이 강했지만,중국군사들과 일본군은 서로의 지도부 대가리들의 비위만을 맞추는 시늉만이 더 중요했기에 되도록 싸우기보단 ,서로 말을 맞춰서 자신들의 군사가 피해가 없는 방향을 지향했기에 주둥아리로만 싸우는것을 좋아하였다.

어느때고 마찬가지지만,나라에 전란이 일어나면 가장 피해를 보는것이 힘없는 어린아이와 여자들인데,툭하면 천자의 군사가 도와주러왔는데 그런편의도 못봐주냐하면서,마을에서 보이는 여자들은 족족 자신의 군영으로 잡아다가,중국군장교나 수하들이 첩이나 성적노리개감으로 삼는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실을 보다못한 지방관리가 선조에게 상소를 하면 선조의 반응은 "그럼 어쩌라고?" 너가 직접가서 따져보던지,이러면,지방관리는 명나라군영을 찾아가서,이번에 잡아간 마을의 아무개는 이미 결혼한 여자이므로 돌려보내줄수 없느냐고,명분을 내세워 사정하고 데리고,오고하니,일반민가에서는 그래도 자신들의 여식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안볼수있지 않을까해서,조혼풍습이 유행하게되었는데,이러다보니 중국군의 성적노리개로 유린당하는 문제에대하여는 힘없고,가난한 백성들의 여식들이나,신분적처우가 미천한 여자들이 일순위가 될수밖에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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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 5년차에 접어들무렵인 1596년,중죄를 지어서,목에 나무칼을찬 여자죄수가 감옥으로 들어왔는데,고려와 조선시대에,정식관리가 아닌,지방의 잡다한 공무를 보는 향리들을 통틀어 색리(色吏)라고 불렀는데,감옥의 업무를 담당하던 색리가 으슥한 밤에 목에 칼을찬 여죄수에가 다가가서 말하길 "너는 어자피 죽을목숨이잖느냐,너도 알다시피  죄없는 마을의 여자들이 중국군사들에 의하여 강제로 잡혀가 성적노리감이 되고있는데,덜 피해를 볼수있게 너가 희생좀 해라"하고는 여자죄수의 목에 차던 나무칼을 풀어주고는 중국눔에게 넘겨 밤새도록 중국눔에게 시달리게했다.

이튼날 명색이 죄수신분이었기에,여자죄수가 초죽음인 상태 다시 옥으로 돌아오자,색리가 여자죄수에게 말하길" 너 혼자 옥에있으면 몸도 그런데,돌봐줄 사람도없고,무서울거같으니,남옥에서 같이 지내는게 좋겠다"

여자죄수왈 "안돌봐줘도 좋다, 이캐새퀴야!!!,혼자 있게해달라,그러나 여자죄수의 외침은 아무런 소용이없었고,여자죄수는 남자죄수들과 같은방에 집어 넣어져,급기야는 이러한 사실이 선조에게까지 이르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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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왈:그런 일이 있었냐? 어떻게 했음 좋을까? 신하들왈:"그날 감옥을 담당해던 색리를 파면하는 정도가 어떨지?" 선조왈: 그렇게 하도록해라,신하들왈: 알겠습니다.아,그런데 여죄수를 성적노리개로 이용한 하늘같은 중국인은 어떻게? 선조왈:"나보고 어쩌라고,내가 직접 창칼들고 싸우러 나가리? 알믄서,사람을 보내어,앞으로는 이런일이 되도록 없도록,넓으신 아량을 베풀어주십사하고 잘구슬려봐,명나라군사를 뿔나게해서 철군하게만들면,보낸사람 목이 달아날걸 각오는 잘하고,중국군사도움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되겠냐,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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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칭기스칸과 연개소문를 비교해보았다.단재 신채호선생이 우리나라의 오천년역사의 제일의 인물이라고했던 연개소문,뭔가 두 영웅에는 닮은꼴과 차이점이있을것이다.

역사에서 왜 칭기스칸은 위대한 인물로 전해내려오고,연개소문이 그렇지못했는지 무엇이 닮았고,무엇이 달라는지,만약 두사람이 세계의 판도를 놓고 일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칭기스칸과 연개소문의 공통점 1.두 영웅의 아버지는 신분자체가 높은지위를 가지고있었으나,그 신분를 대를 이어 얻는과정이 순탄치 못했고,스스로의 힘과능력으로 쟁취하였다.


2.칭기스칸과 연개소문은 어릴적부터 활과 칼에 뛰어난능력을 가지고있었다.3,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있어 존재자체가 카리스마였다.4.결단성에있어서 상식을 뛰어넘었다.5.종교자체에 관대했으며 특정종교가아닌 일종의 샤머니즘같은 자신만의 종교를 믿었다.6.외적과 싸울때는 저항했던 적은 하나도 남기지않고 죽였다.7.전장에서 싸우다 말위에서 죽는것을 신념으로 삼았다.


연개소문이 칭기스칸처럼 위대한 인물로 전해지지않는것은 첫째가 스스로가 황제가 되려고하지않았고,둘째가 자식간의 우애를 만들어 내지못했기때문이다.연개소문이 스스로 고구려의 지존으로 나아갔다면,자식들이 불화도 생기지 않았을것이다.칭기스칸의 아들들또한 권력에있어 화합하지 못했다.그러나 아들대에서 나라가 더욱번창한것은,각자가 다스릴나라를 생전에 정해줬기때문이다.하지만 연개소문은 말로는 자식간의 우애를 강조했으나,스스로가 황제가 아니었기에,각 아들들에게 물려줄 나라가 없었다.


칭기스칸이 가장혐오했던 인간상은 자신의 주인을 배신하는 인간이었으며,아무리 자신에게 이득되는 배신을 한사람일지라도,자신이 모시던 주인을 배신한 부하는 상을주는게아니라 모조리 죽였다.그러나 반대로 적이라고할지라도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끝까지 저항했던 사람은 후하게대하고,신하로 삼았다.


만약에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있은후 500년지난후 생겨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과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세계의 판도를 놓고 싸우게되었다면,전력상으로 몽골기병은 최대 20만이 넘지않았고,연개소문의 사수대첩에서 당나라 30만군대를 전멸시켰을때 고구려의 기병은 20만명정도로 볼수가있다.


연개소문의 군사력은 국력이나 기병수에있어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보다 못하지않았다.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지휘하던 고구려기병은 당시 중원을 통일하여 적수가없었던 당나라의 기보병을 맞아 이긴것이고,칭기스칸의 몽골기병또한 자신보다 훨씬 전력상으로 많은군사를 가진 당시 최대의 세력을 이루었던 금나라의 40만대군을 전멸시킨것을 보았을때 연개소문과 칭기스칸은 지휘력에있어 탁월했음을 알수있지만,중원통일제국을 상대하여 이겼던 연개소문이,고려,송나라,금나라의 삼국균형을 유지한 판도에서 하나씩 상대했던 칭기스칸보다는 좀 더강한 지휘력을 가졌다는 생각이든다.


만약에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과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금나라와 몽골의 결전의 분기점이되었던 야호령전투와같은 상황으로 일대결전을 벌인다고 가정한다면,승패는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전멸이었을것이다.연개소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군사를 지휘하는 전술,전략에있어 신적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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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제국 당나라는 연개소문이라는 존재가 살아있는 그자체에도 상당한 공포를 느꼈음을 역사기록들은 말해주고있다.연개소문이나 칭기스칸은 일반 황제나 왕처럼 싸우는 군사들의 뒤에서 양산을쓰고 말로만 지켜보는 그런 스타일을 가진사람들이 아니라,직접 선두에서 군사들과함께 적과싸우는 스타일이었다.


전투지휘 스타일로봤을때 연개소문과칭기스칸이 전장에서 만났다면,선두에서 서로 맞짱을 떳을것이고,그 주위를 호위하며 주군을 보호하려는 군사의 사기가 승패를 결정지었을것인데,연개소문은 왕조차도 직접 단칼에 두동강내버릴정도로 과감한 기를 가지고있었고,전장에서는 항상 병사들이 자는것과 먹는음식을 똑같이하여 한몸을 이루어지냈기에,연개소문이 나아가서 싸운싸움은 생애에있어 단한번도 패한기록이없는  불패의신화를 가졌다.


그에반해 칭기스칸을 따르는 몽골기병은 패한적없는 기병같지만,칭기스칸의 생애있어 패하여 도망다니는일도 많았다.고구려 불패신화를 이끌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 20만,그리고 세계를 제패했던 칭기스칸의 몽골기병 20만이 결전하게된다면,선방은 연개소문이 "나를 따르라"하고 치고 나갔을것이고,마찬가지로 칭기스칸또한 선두에서서 돌격하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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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의 주특기는 직접 적의 기병이나보병과 일대일로 싸우는게아니라 말위에서 적을 옆면이나 사면을 회전하며 적이 나아가는 속도에 맞춰서 화살를 쏘며 빠지는 전술이었기에,뭉쳐서 일대일로 육탄전으로 싸우는 전술과전략을 가진 중원이나 유럽의군대들은 적과 싸워보기도전에 토끼몰이처럼 희생만당하다 전멸하게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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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에게있어 고구려벽화고분에서도 볼수있듯이 달리는 말위에서 뒤를 돌아보며 화살을 쏘는 모습이 낮설거나,신기한것이 아니었다.중원이나 유럽에서나 통할 그러한 칭기스칸의 전술과전략은 고구려기병들에게는 통하지않는다.몽골기병이 가졌던 장점은 고구려기병또한 다 가지고있는것이고,승부의 분기점은 군사를 지휘하는 전술과전략이었을것인데,이점에있어서 연개소문의 능력은 중원통일제국 당나라도 전패를하고 돌아갈만큼 뛰어났다는점이다.


아무리 몽골초원을 통일한 칭기스칸이라고해도,연개소문에게는 패했을것이다.역사에서 가정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칭기스칸의 몽골기병vs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의 승패를 걸라고한다면,나는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에 걸겠다.그만큼 연개소문의 전술과전략은 신묘그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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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기병이 패전한 상대방에게 냉혹하게했다고하지만,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관용을 주는 기병은아니었다.우리나라 역사기록에서 외국의 침략군에대한 대승의 기록을 남기게했던,수나라와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도 전멸은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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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성격과기록을 보았을때 사수대첩에서 당나라의 30만명의 병사중에 단1명도 살려보내주지않았고,외국사료나 우리나라사료 모두에 전멸이라고 기록되어진 대첩은 연개소문의 사수대첩이 유일하다.그만큼 극강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 12세기 다른나라들이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온다는 공포보다,


통일제국 당나라를 더 무서움에 떨게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전술과전략,용맹성,기마능력에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보다 한수위에 군사집단이었다고 생각한다.결과적으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vs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맞짱을 떴다면,몽골기병이 전멸했을것이고.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12c에 존재했다면,고려와 강화하는정도가아니라,칭기스칸의 몽골제국자체가 탄생하지 못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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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나는 조선의 국모이니라"라고 외쳤다는 고종의 왕비 민황후는 과연 그러한 말과 자세를 보여줬을까를 아무리 역사기록을 찾아보아도 보이지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로 궁녀의 복장을하여,구차하게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려고했을뿐이었다.


조선의 민황후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행동을했던 대비되는 왕비가 고려에 있었으니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14세기 후반에 머리에 빨간두건을쓴 도적의 무리였던 홍건적이 자주 고려를 침범하여,우리나의 백성들 괴롭히곤하였다.훗날 이 도적의 무리의 괴수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데,근본부터가 도적의 무리들이였기에 허약한 근본토대를가진 왕조일수밖에없었다.


1363년 고려 공민왕의 나이 33세가 되던해,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의 논공행상에 불만을품은 김용이라는자가,자객단을 이끌고 흥왕사의 행궁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나라일을 보던 공민왕을 암살하려고하였다.


김용의 자객단이 흥왕사로 급시에 습격을가하자,공민왕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는데,공민왕의 아내였던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공민왕을  어머니의 방에 왕을 숨기고,그문앞에 서서 자객단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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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단의 무리가 칼을 휘두르며 방문앞에 이르러 말하길 왕은 어디에있는가? 왕비가 홀로 나아가 외치길"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방안에 들어가려거든 먼저 나를치고 들어가라"하메,무리들이 두려워 태후의 방안에 들어갈수없었다.


김용의 자객단은 나중에 최영의 정예군에의하여 처단되어 반란은 진압되게되고 훗날 아내의 도움으로,자신의 목숨을 구한 공민왕은 흥왕사의 변이 일어난후 2년이 지난 35세되던해 눈이 소복히 많이 내린 2월 추운겨운날에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죽자,


훗날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남긴 조의문에 그때의 상황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는데 자신을 남기고 떠나버린 아내를향한 사랑과 비통한심정을 느낄수가있다."나에게있어 아내보다 중한것이 없었고,흥왕사의 변이 일어나메,나의 몸의 지척에서 적을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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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사후  공민왕은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은왕비를 살아있는사람처럼대하며,식사할때마다 자신의 음식과 왕비의음식을 같이차려  함께 대화를하며 음식을먹었고,일체의 고기를 먹지않았을뿐아니라,나라를 다스리는 일조차 관심을 끊어버려,국제정세에 밝아 요동을 정벌하며 호기롭고,영민했던 공민왕은 이후 360도 다른 무기력한 왕의 모습을 보이며,슬픔속에서 살아가다 결국 신하의 손에의하여 죽음을 당하게된다.


훗날 조선을 개국한 반역의무리들이 공민왕의 후손인 우왕과창왕의 씨를 가짜라고하며,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위하여 역사를 왜곡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보아도 공민왕은 35세에 이미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하여,아이를 낳다가 죽었던걸보면,공민왕의 남성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했음을 알수있고,공민왕 스스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했던 우왕을 훗날 반역의 무리가 "아니다"라고 기록것은 반역을 정당화하기위한 역사조작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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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역사에서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자객단앞에서도 당당히 홀로맞선 여인이었지만,궁중에서의 일상생활모습은 내성적이고,여린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전해지는데,사랑앞에서는 한발자국도 물러 서지않았다.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사랑을보면,남녀간의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라는 말이 사실인거같다.


드라마나 사극일지라도,역사를 조작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것은 반역의무리들이 늘행해왔던 목적을위하여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르지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반만년역사에 왕비로서,노국공주가 행하였던 행동은,실존하는 유일한 기록이며,"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라는 그러한 비장미와 당당함을 보여줬던 인물을 찾는다면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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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에있어,주댕아리로는 명분과 대의 그리고,백성과나라를 위한다고외치면서 행동은 그와는 정반대로 자신의 자리보전과 탐욕만을 추구했던 조선왕조 최대의 망조왕이 바로 인조이다.


인조의 사람됨을 역관 정명수의 인생기록을 통하여 살펴보자.역관정명수는 우리나라사람이었지만,청나라의 주구가된 인물이다.


역사속에 훌륭한 인물에 대한기록도,조선왕조실록에는 몇줄 기록이없는경우도 많은데,이자는 인조실록에만 151건의 기록이 남아있는걸보면,



역관이라는 중인계급의 신분으로,우리나라 역사상 가장많은 역사기록을 남긴인물이다.얼마나 악행을 많이 했는지 미루어짐작할수있다.여진족인 금나라에 굽신거리며,눈치보는것은 배은망덕이고,명나라에대한 부모의은혜를 져버린것이라고 외치면서,광해군을 폐위시켜,왕위에 오른 인물이 인조이기에,과연 주댕아리만큼 행동도 언행일치가 된 왕이었는지,역사기록을 들여다보면알수있다.


1639년,심양에 볼모로잡혀가서 살고있던,소현세자를 모시는 신하중에,정뇌경이라는 사람이 있었다.역관 정명수가 우리나라에 청나라황제의 칙사로와서는 뇌물을 받는일이 많았다.이러한것을 보다못한 정뇌경이 뇌물을 받아쳐먹는 정명수를 처벌해야한다는것에 동참하다가,오히려 역관 정명수의 반격으로,청나라황제가,인조에게 정명수가 실제로 뇌물을 받아처먹었는지 아닌지 인조의 생각을 말해보도록하라고하였다.이미 청나라황제가 정명수의 편으로 기운것을 안 인조는,대갈박을 굴린다.신하들을 모아두고 대화를 나누는데,

인조:정뇌경이 무고의 죄가 없다것을 알겠는데,잘못하면,황제의 화가 나에게까지 미칠것같은데 어떻게들 생각하느냐?


 

우의정 심열:정명수를 처단하는게 무슨 큰일이라고,청나라황제가 나서게까지 일을 만들었는지모르겠습니다.동궁을 모시는 정뇌경이 남의 나라에가서,입을 가벼이 열어,화가 조정에 미치게까지 되었는데,어찌죄가 없겠습니까?


 

인조:그렇겠지? 황제의 진노가 나에게 미치기전에,무사 이응징을 심양으로 보내,정뇌경을 죽여버리도록해라. 내가 누구냐? 살기위해 대갈박을 3번이나 바닥에 박으면서,살아난사람인데,뇌물을 주는게 되수냐? 입주댕아리 잘못놀려,나에게까지 화가 미치게되었구나.정명수는 뇌물받은 적이 전혀없다고 가서 황제에게 잘 말하도록해라.



이러한일이있고부터,정명수가 요구하는것이나 바라는일은,앞장서서 인조는 다들어준다.

정명수:내 처의 동생이 벼슬이없는데.......
인조:아이고,그러셨세요? 벼슬을 내려야죠.

정명수:매부가 군대생활이 쪼메 힘들다구하는데요.......
인조:진작에 애길하지~ 군역을 면제시키도록하여라

정명수:황제의 일을하느라,바빠서 부모님 묘소관리가 힘든데 조카가 그일을 하고있다는데.......
인조:효자시구려,그런생각까지,조카에게 군수벼슬을줘 타의 모범이되게하라

정명수:나를위해 일하는 사람을 병조좌랑이 기분나쁘게해서 내가,몽둥이로 병조좌랑을 좀 패습니다.
인조:감히 황제의 칙사를 기분나쁘게하다니,맞아도 싸죠.잘하셨구려.패시느나 힘드셔쬬, 여봐라 역관 정명수에게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리도록하여라.



역사기록에서 인조와 그의 유신들이 광해군을 폐위시키며,가슴을 뜨겁게하는,명분과대의,그리고 북벌론을
외치며,민족의 자긍심을 보여주는가 싶더니,권력을 잡자마자,주댕아리는 잘놀렸지만,실제로 행동은 무지렁뱅이보다못한 비열하고,자신의 권력만을 탐하며,나라의 기상을 망조들게하여,이중적인간들이 출세하게하고,백성을 위하여 바른말하는 사람들은 아예,싹이자라지도 못하도록 밟아죽여버리는 패악한 나라기상을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반복되어,우리가 정권을잡으면,서민을 위하고,나라를 위한다고 주댕아리로는 어느정권이라도 외치지만,실제행동의 결과가 그러했는지는 인조처럼 역사가 재평가할것이다.조선시대 자신의 안위와 탐욕만을위하여 온갖악행을 저지른 가장 사악한 임금은 인조였다.역적 정명수가 날뛸수있었던것도,인조라는 나라를 망조로들게한 매국노왕이 있었기때문이다.유유상종인것이다.


오늘날에도 되새겨봐야할 교훈이있다.인조처럼,자신의 자리보전과 탐욕을위하여 관직을 내리는것이 얼마나 나라를 망조들게하는지 보여준다.관직을 내림에있어 사람의 애증의 강도에따라 내리는것이아니라,그 사람의 능력에따라,맞는 지위를 주어야한다,


너는 나하고친하니,능력이 모자라도,높은자리해라,너는 나에게 밑보였으니 죽을줄알라식으로는 안된다.나라의 지도자는,애증에따라 사람을 쓰면안된다.오직 능력에따라 그에 맞게 사람을 써야한다.역사기록속에서 나라가 망조가 든경우는,그 근본이 인사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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