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극을 보다보면 교지를 들고  "어명이요"라고 말하면,사람들이 다른의견이나 논쟁꺼리로 다투다가도 각자의 의견이 어떠했든 상관없이

명를 따르는 장면을 자주 볼수가있다.이러한 어명속에는 재미난 법률규정이 들어있는데

만약에 교지로 어명을 받았는데 "어명이고,뭐고간에 따르지 않겠소"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어명을 거부하거나 따르지 않았을 경우 어떠한 처벌규정이 조선시대의 법률에는 규정되어있고,어느정도의 형벌을 받았을까?



임금이나 세자가 교지로 내린 어명을 따르지 않았을경우에  제서유위률이라는 조문으로 규정했는데,이런 조문을 어겼을때는 장 100대를 때리도록 처벌형량이 규정되었다.

엉덩이에 긴몽둥이로 100대를 맞는것이 뭐 별거이겠는가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깔짝,깔짝때리는 그러한 강도가아니라,몽둥이를 치는 사람이 두손으로 몽둥이를 잡고,180각도로 힘껏 때리는것이기에,왼만한 강인한 체력이 아니고서는,겉으로는 엉덩이가 터지고,부어오르는정도로 보이지만,며칠안되서 장독으로 대부분이 죽을만큼의 처벌강도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명에관한 제서유위률 법률규정은 왕이나 세자가 교지로 내릴수가 있었는데,왕과 세자가 내린 교지의 어명이 서로 경합되었을경우,밑에서사람은 누구의 말을 따르는것이 일신상에 좋을까?라는 문제가 생길수도 있는데

군대같은경우도,자신의 바로위 선임병과,몇단계 거친 선임병의 지시가 서로 다를경우,"누구와 더 오래생활 할건지 잘생각해보라"라는 무언의 압력의 선택을 받게되고,

일반직장에서도 자신의 직속상관이나 타부서의 직속상관보다 높은사람의 지시가 상충되었을때 밑에서 사람은 누구의 말을 따르는것이 좋은가?등과같이 현실생활에서 어떤것이 현명한 처신인가 생각해봐야 할경우가 종종 생긴다.

이런경우들의 현명한 처신은 상황에따라 예외가 있을수도 있겠지만,불법한 지시나 명령이 아니라면,일단은 직속상관의 지시나 명령을 따르는것이 현명한 처신이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극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나는 조선의 국모이니라"라고 외쳤다는 고종의 왕비 민황후는 과연 그러한 말과 자세를 보여줬을까를 아무리 역사기록을 찾아보아도 보이지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로 궁녀의 복장을하여,구차하게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려고했을뿐이었다.


조선의 민황후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행동을했던 대비되는 왕비가 고려에 있었으니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14세기 후반에 머리에 빨간두건을쓴 도적의 무리였던 홍건적이 자주 고려를 침범하여,우리나의 백성들 괴롭히곤하였다.훗날 이 도적의 무리의 괴수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데,근본부터가 도적의 무리들이였기에 허약한 근본토대를가진 왕조일수밖에없었다.


1363년 고려 공민왕의 나이 33세가 되던해,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의 논공행상에 불만을품은 김용이라는자가,자객단을 이끌고 흥왕사의 행궁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나라일을 보던 공민왕을 암살하려고하였다.


김용의 자객단이 흥왕사로 급시에 습격을가하자,공민왕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는데,공민왕의 아내였던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공민왕을  어머니의 방에 왕을 숨기고,그문앞에 서서 자객단을 맞이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객단의 무리가 칼을 휘두르며 방문앞에 이르러 말하길 왕은 어디에있는가? 왕비가 홀로 나아가 외치길"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방안에 들어가려거든 먼저 나를치고 들어가라"하메,무리들이 두려워 태후의 방안에 들어갈수없었다.


김용의 자객단은 나중에 최영의 정예군에의하여 처단되어 반란은 진압되게되고 훗날 아내의 도움으로,자신의 목숨을 구한 공민왕은 흥왕사의 변이 일어난후 2년이 지난 35세되던해 눈이 소복히 많이 내린 2월 추운겨운날에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죽자,


훗날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남긴 조의문에 그때의 상황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는데 자신을 남기고 떠나버린 아내를향한 사랑과 비통한심정을 느낄수가있다."나에게있어 아내보다 중한것이 없었고,흥왕사의 변이 일어나메,나의 몸의 지척에서 적을 몸으로 막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왕비의 사후  공민왕은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은왕비를 살아있는사람처럼대하며,식사할때마다 자신의 음식과 왕비의음식을 같이차려  함께 대화를하며 음식을먹었고,일체의 고기를 먹지않았을뿐아니라,나라를 다스리는 일조차 관심을 끊어버려,국제정세에 밝아 요동을 정벌하며 호기롭고,영민했던 공민왕은 이후 360도 다른 무기력한 왕의 모습을 보이며,슬픔속에서 살아가다 결국 신하의 손에의하여 죽음을 당하게된다.


훗날 조선을 개국한 반역의무리들이 공민왕의 후손인 우왕과창왕의 씨를 가짜라고하며,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위하여 역사를 왜곡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보아도 공민왕은 35세에 이미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하여,아이를 낳다가 죽었던걸보면,공민왕의 남성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했음을 알수있고,공민왕 스스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했던 우왕을 훗날 반역의 무리가 "아니다"라고 기록것은 반역을 정당화하기위한 역사조작일뿐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나라역사에서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자객단앞에서도 당당히 홀로맞선 여인이었지만,궁중에서의 일상생활모습은 내성적이고,여린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전해지는데,사랑앞에서는 한발자국도 물러 서지않았다.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사랑을보면,남녀간의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라는 말이 사실인거같다.


드라마나 사극일지라도,역사를 조작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것은 반역의무리들이 늘행해왔던 목적을위하여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르지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반만년역사에 왕비로서,노국공주가 행하였던 행동은,실존하는 유일한 기록이며,"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라는 그러한 비장미와 당당함을 보여줬던 인물을 찾는다면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