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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요동정벌에대하여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국시로 하여 탄생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명나라는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의 역할이 어떠했었냐하는 가에 대한 역사적 시각에 대한 글이다.

 

 

조선이 그토록 사대했던 명나라의 패망은 임진왜란을 통한 조선의 지원이 그 영향이라는 주객을 전도한 원인론도 주장되어진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명나라의 국력은 중원대륙을 통일한 왕조들중 가장 약한 나라였고, 고려시대의 중국의 송나라와의 관계처럼 우리나라의 역할은 충분히 자주적이며, 강대한 위치를 보여줄 수 있었다.

명나라는 한족으로 하여 이루어진 정권이라는 자체가 이미 동북아 주변국들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의 국가였음을 알 수가 있다.

명나라는 기본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사대가 없었다면,270여 년간이 아니라 50년도 못가서 망해버릴 국제정세였음을 알 수가 있다.

명나라의 주원장이 태조 이성계가 보낸 조선의 사신들을 참수했을 때 요동을 정벌했다면 명의 존속기간은 훨씬 짧아졌을 것인데 4대불가론을 외치며 고려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킨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소국이 대국을 치는 입장을 주장 할 수는 없었다.

명나라의 주변에는 원나라를 이어받은 북원이 명나라 멸망 때까지 강성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이러한 몽골에 명나라는 가장 강성했다는 영락제때조차도 북원과 싸워서 대패를 당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으며, 명나라 공주를 몽고의 부족에게 공물로 바치는 입장은 명의 멸망 시까지 이어졌다.

명나라의 멸망과 몽골에서 칭기즈 칸의 칸의 칭호가 동시에 사라지는데, 이것은 명나라의 탄생과 북원의 탄생과 멸망은 같은 운명을 가졌다는 것이고, 명나라 집권시기내내 명나라는 몽골의 위협에서 안정적이었던 때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있어 문화적으로, 국력으로 최전성기라는 세종대왕이라는 시기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와 몽골의 전쟁 상황과 일치한다. 명나라의 주원장의 생각은 애당초 조선이라는 나라를 가만히 나두려는 생각이 없었고, 북원이라는 몽골이 존재만 평정된다면 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케 할 생각이었다. 이것을 실행하지 못한 것은 북원의 몽골은 명나라의 멸망 시까지 끝까지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사에 있어 조선의 역사를 기술할 때 크게 왜곡하는 부분이 국제정세를 활용하거나 이용할 줄 모르는 집권왕조에대한 비판보다는 침략을 받은 상황 하에서의 침략한 국가에게 그 책임을 모두 덮어씌우는 기술을 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것이 임진왜란에 조선을 도와줬기에 명나라의 국력이 낭비되어서 여진족이 흥기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된 한 원인이라고 버젓이 중국에서조차 인정하지 않는 원인을 우리나라는 그럴듯하게 역사인식인냥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술의 원인은 임진왜란의 주체가 일본이라는 것에도 영향이 있는데,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바라본 국제정세는 일본이 명나라를 치던, 그렇지 않던 명나라가 멸망할 시기라는 관점은 정확했고, 그것을 바라보지 못했던 나라는 오직 조선뿐이었다.

몽골의 북원이나 여진은 동북아세력중 고구려인 한민족만이 명나라에 대한 국제정세를 거꾸로 해석하고 밀고나간 청개구리 국제정세관을 가졌었다는 점이다.

명나라의 최전성기 황제인 영락제를 보더라도 그가 몽골의 북원을 치기위하여 모집한 군사의 최대 수는 50만 대군이었고 이러한 원정군을 동원했더라도 몽골을 명나라의 지배 상태로 둘 수 없었고 겨우 호각지세를 이룰 정도 였는데, 이 이후의 명나라 황제들은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상황에 명나라 멸망 시까지 이어졌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문화적으로 국력 적으로 부흥기를 맞이한 세종대왕시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이 명나라에 사대를 하여 명나라가 시비를 걸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종대왕시기에 명나라 황제인 영종이 이끄는 몽골에 대한 원정군 50만이 몽골의 2만기병에 전부 몰살되고 명나라가 황제 포로가 되는 토목의 변이 나타난 시기였다는 점이다.

몽골의 군사령관인 에센태사의 용병술이 뛰어난 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북원의 몽골에 대하여 군사력의 싸움으로는 명나라가 몽골을 제압할 수 없었음을 의미하고, 이러한 관계는 명나라 멸망 시까지 이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명나라의 상태는 이미 명목상의 명나라가 존재할 뿐 민심이반이 심각하여 언제 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 하에 놓여 있었다.

몽골이 중원을 재집권하던, 여진족이 중원을 정복하든, 고구려인 한민족인 조선이 정벌을 실행하든 누가 먼저 명나라를 치느냐에 따라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민족이 될수 있었다. 그러나 오직 조선만이 국제정세에는 눈감고 오로지 이씨왕조집단의 안위와 부귀영화만을 우선으로 쇄국의 국제정세만을 주장하고 이어갔다.

북원의 몽골과 명나라의 멸망의 시기가 일치하는 점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 청나라의 태종인 홍타시인 황태극이다. 우리나라의 인조에게 삼전도의 치욕을 안겨준 인물인 청태종이 북원이라는 몽골의 칸이라는 지위를 마지막으로 받아 북원의 몽골은 사라지게 되는데 몽골에서 여러 부족이 있다해도 칭기즈 칸의 직계가 칸이라는 직위를 받을 수가 없는데 이민족인 여진족인 청태종이 칸이라는 직위를 받아 몽골이 항복한 이유는 청나라는 몽골과 여진이 연합정권으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끈 3대황제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혈통은 여진과 몽골의 결합으로 칭키스칸계의 성씨를 쓰는 몽골여인들이 황제들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청나라도 초기에 붕괴되었을 것이고, 오래세월 중원지배세력이 될 수도 없었다.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원나라 황실의 공주가 고려의 왕의 부인으로 정례적으로 혼인을 했듯이 몽골의 공주가 여진인 청나라의 황제의 부인으로 맺어진 것은 같은 역할로 존재하는 것인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고구려를 이루어 하나의 나라를 이룩했던 여진인과 몽골인과의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연을 안면몰수하고 모른 척 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명나라와 호응하며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몰염치함을 보여주었다.

명나라를 이룩한 주원장의 시각으로는 처음부터 북원을 정복했다면,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 조선이라는 나라도 정복의 대상일 뿐이었는데 명나라의 멸망 시까지 북원의 몽골이 정복되지 않았기에 조선을 침략하지 못했다.

고구려를 이루어 한 나라였던 몽골은 명나라의 50만 대군을 이겼던 민족이었고, 여진족 또한 그와 상응한 수의 명군을 격파한 민족이었는데 고구려를 이루었던 민족 중에 한민족이 제일 갑으로 중국의 정규 113만대군, 지원참모부대를 포함하면 300만 대군과 싸워이겼는데 이러한 전승은 중국역사에있어 이전이나 이후로 300만 대군을 이긴 민족은 고구려인 한민족이 유일하다.

고구려의 지존이며 주체는 한민족이었고, 그와 연합했던 여진,거란,몽골,선비족등은 그 기상을 높이 하여 싸워나갔는데 그중에서 명나라시기에 조선이라는 한민족처럼 국제정세를 꺼구로 가는 민족혼을 보여준 여타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북원이 존재했던 17세기 중반까지, 그렇지 않다면 여진족이 몽골과 연합하여 부마국의 지위로 청을 건설하여 명나라와 싸울 때, 그때까지라도 단 한번이라도 주위의 세력들과 연합하는 국제정세를 활용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했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의 영역보다 더 큰 고토를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술할 때 특히 조선사를 기술할 때 외국의 침략에 대하여 외국 탓만을하며,왜 얻어터질 수밖에, 왜 복장이 터질 수밖에 국제정세에 눈감고 국가를 이끌어간 집권세력에대한 비판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일제에 의한 지배를 당한 역사의 서술에 있어서도 분명하게 전제되어야 할 것이, 국제정세에있어 쇄국만을 고집하고, 끝까지 이씨왕조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백성들을 외국군을 끌어들여 학살하고, 결국에는 망국의 상황에서도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집권세력에대한 비판과 처단에는 눈감고 오로지 일본의 침략탓이다라는 짓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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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구가하기위해서는 지도층을 상시적으로 도륙내어야한다는 운명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아버지를 보며 두려움에 떨던 맏아들이 “아버지를 도운 지도층인 공신이나 고위관료들을 더 감싸고 보호해줘야지 왜 공신이나 고위관료들을 개미목숨보다 더 하찮게 공포가 사무치도록 상시 도륙을 하십니까?”물으니 주원장이 말했다.

내가 엄하게 도륙하는 사람은 성 밖의 없이살고, 힘없는 백성들 중에서 그리하는 것을 보았느냐? 지도층을 대대적으로 상시 도륙했더니, 결과는 백성들이 못살고, 굶주리는게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있어왔던 어떤 왕조들보다 백성들이 삶의 지표들이 나아지고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원장의 이러한 운명의식은 부패한 사회지도층에의한 탄압으로 부모가 모두 굶어죽었을 정도로 피폐한 삶을 어릴 적부터 살았던 주원장은 그 자신이 인생이 제일 밑바닥부터 최고의 지존인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동안 터득한 경험에서 나왔음을 알 수가 있다.

 

 

이방원: 이씨왕조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서 그것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외가이든 친가이든 상관없이 모조리 도륙했는데 이러한 골육상쟁의 모습을 지켜보던 맏아들이 “ 혈육의 정은 천륜인데 어찌하여 골육을 도륙하면서 국가의 충효를 논하십니까? 물으니 이방원이 말했다.

내가 엄하게 외척이나 형제들을 살육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이씨왕조의 탄탄한 초석을 만들어 만대에 이어지길 기원하기 때문이다.

이방원의 이러한 운명의식은 근본에 있어 열등의식이 존재하였기 때문인데, 조선을 건국한 이씨왕조의 피의 근본이 고려의 풍습을 간직하고는 있었으나 여진의 풍습과 혼인관계를 바탕으로 성장한 성씨였기에 국가도 백성도 그런 것보다는 더 우선적으로 이 씨라는 성씨의 왕가의 전통이 이어짐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였기에, 국가가 어떻게 되던, 백성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이 씨 왕가가 우두머리로 남을 수만 있다면 어떤 짓을 하든 상관없이 그것을 지키고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왕위를 계승하여 이어가는 것이 운명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아버지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러한 질문을 했던 맏아들은 공통적으로 모두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다.

 

 

주원장과 이방원은 동시대의 사람으로 서로의 운명관을 가지고 만나게 되는데, 한사람은 중국을 통일한 황제의 신분과 이러한 명과 일전을 벌일 것인지를 놓고 탐색하는 요동정벌론을 주장하는 정치 상황을 맞이한 조선의 왕자신분으로 만나게 된다.

농민에서 황제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중국을 통일하여 황제가 된 주원장조차도 조선을 침공하여 정복하는 것도, 그렇다고 가만히 나두는것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지리적 위치였다. 중국을 통일하였다해도 몽골지역에는 여전히 원나라의 조정인 북원이 남아있었고, 요동지역에는 여진이라는 야인들의 세력이 강했기에 잘못 판단했다가는 수나라처럼 통일 중원제국이 하루아침에 조선이라는 나라 때문에 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비상했던 주원장은 조선이 명나라를 칠 용기도, 패기도 없는 왕조라는 것을 간파하고는 조선을 침공하여 국가의 흥망성쇠의 도박을하는것보다는 주둥아리로만 위협하여 여진과 몽골을 적대시 할 정도의 상태만 만들어 놓으면 좋다고 생각했기에, 조선사신이 오면,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서 억류하거나, 참수를 하여 분하면 쳐들어 오던가라고 패기 없는 조선이라는 왕조를 조롱하며, 조선이 스스로 비굴하게 굽혀서 엎드리도록 길들였다.

이방원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원장을 만났을 때 주원장은 이방원을 환대하고, 이방원은 주원장을 받들어 사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굳히게 되는데, 주원장이 이방원을 환대한 이유는 주원장의 의도를 간파한 이방원이 조선의 개국에 일조했던 여진을 적대시하고, 요동의 권리를 명나라가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개념 밥말아먹은 사대의 자세를 취하겠다는 의도를 확고히 했기 때문이고.

이방원이 주원장을 받들어 사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굳힌 이유는 주원장의 명나라는 조선에 있어 이씨왕조를 이어가는데 침략하여 정복하고자하는 생각이 없음을 간파했기 때문에 나라의 땅이 어떻게 되던, 백성이 어떻게 되든 이씨왕조인 조선이 대대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에 부합한 인물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대선이 다가오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시대적 정신이 주원장 같은 사람의 운명관이 필요한것인지,아니면 이방원의 운명관이 필요한것인지 생각해볼만하다. 주원장은 명분이나 체면을 위하여 억지가 아닌 스스로가 원나라를 승계한 왕조임을 천명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방원의 조선은 명분과 체면을 위하여 고려의 왕으로부터 선양을 받는 형태로 왕조를 바꾸면서, 실제적으로는 고려왕조의 왕 씨들을 남김없이 한데모아 수장시켜 도륙해버리는 태생부터 겉모습과 속모습이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러함에 주원장은 조선을 보는 것과 이씨왕조를 보는 것을 구별하여, 조선이라는 국가는 함부로 할 수 없지만, 이씨왕조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배역왕조이다라는 관점을 명나라의 후대 황제들이 가지도록 역사를 기록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조선왕조 600년 동안 이어져온 겉 다르고 속다른 이중적형태의 뒤통수들이 잘먹고 잘살면서 정의인냥하는 부정적 인물상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하나의 나라의 우두머리의 운명관을 선택할것인지  아니면, 세계의 중심 코리아의 운명관을 선택할것인지는 역사속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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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검색엔진을 통하여,중국국민의 실생활에 통일된 의미를 제공하는 온라인백과사전에 이어도에대하여 어떤형태로 백과사전에 등록해놓았는지 궁금해서,중국 바이두를 통하여 이어도에대한 중국백과사전을 들여다봤더니,


우리나라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것보다 중국이 이어도에대한 야욕이 노골적임을 알수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대표적 검색엔진인 네이버에 이어도를 검색하여 비교해본것과,뭔가 개념상에 차이를 보이고있었다.




먼저 바이두의 이어도에대한 백과사전내용을 살펴보니,중국은 이어도를 쑤엔짜오(蘇岩礁)라고 규정하면서,확고하게 중국영토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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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도에대한 바이두의 백과사전설명내용을 번역해보니,"쑤엔자오는 중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인 중국 영토에 위치해 있다.쑤엔자오는 장수성해안의 대륙붕의 연장이며,양쯔강삼각주의 해저구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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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분쟁이라고 규정하면서,옆에다가는 이어도에대한 중국함선의 정상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설명사진을 붙여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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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이어도의 위치를 표시하며,중국쑤엔짜오는 중국영토라는 지도표시와,역사적 근원까지 나열하며
수당,송나라,명나라,청나라이래부터 쑤엔짜오는 중국의 영토였습니다.라며함께 부가하여 설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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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하여,우리나라의 대표적 검색엔진인 네이버의 사전에는 이어도는 바다속 암초라는 개념만을 강조하고,상상속의 전설이 섬이 어쩌구하면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영토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를 꺼려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는데,중국 바이두의 백과사전에 이어도는 중국영토라고 분명하게 규정해놓은것에 비하면,암초라고만 주장하는 우리나라와,역사적 기록까지 나열하며 영토개념으로 보려는 중국과 분명한 시각차이가 존재함을 알수있고.중국의 용어백과사전에서는 이어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국민들에게 강조하는데,우리나라의 사전에는,뭔이유인지,암초라는 바다의 경제수역측면에서만 강조하려고 하고있음을 느낄수가 있었다


이어도가 존재하는 동중국해는 츈사오가스전처럼,석유와천연가스가 대량으로 대륙붕속에 매장되어 존재하는 곳으로,우리나라의 유일한 동해-1가스전보다 석유와 천연가스가 가채매장량이 상상을 초월할정도의 규모로 매장되어있을 가망성이 아주높은 광구에 해당한다.베트남은 중국과 석유와천연가스 매장가능성이 높은 남사군도의 분쟁이생겨 비록 중국에비하여 국력이 약하지만,전격적으로 베트남군을 남사군도에 진주시켜 섬을 지키며남사군도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중국과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자세로 베트남군이 섬을지키고 있다.

일본또한 동중국해의 츈사오가스전에대한 권리에있어 중국이 일방적권한행사에는 단호하게 함선을 파견하면서까지 자국의 권리에대하여는 절대 양보하지 않고있다.

우리나라에있어,이어도는 수중에있는 암초덩어리일뿐인가,아니면 최후의 경우 일전을 불사해서라도 꼭 지켜야할 대상인가에대한 분명한 개념이 필요한때라고 생각한다.

중국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것처럼,배타적경제수역의 논리로 쑤엔짜오를 보는게아니라,자신들의 대륙붕이며,영토의 연장선이라는 개념으로 백과사전에 규정하여,국민들을 이용하게 하고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검색엔진에서 이어도에대한 백과사전규정을 분명하게 대한민국의 영토라고규정하고,독도와 마찬가지로 나라의 운명을 걸고서라도 끝까지 수호해야할 곳으로 정의했으면하고,지금처럼 경제수역획정에따라 달라질 그저그런 물속 암초덩어리다라는 개념으로는 이어도를 지킬수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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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서 인간으로서 최악의 왕을 뽑으라면 조선시대 왕인 인조이다.

인조는 왜 말년에 거이 자멸에 가까운 미친짓을하고 죽게 되었을까?
 
그 배경을 살펴보면 조소원이라는 후궁이 있음을 알수가 있는데,

태생적으로 역사의 반역정권이었던 인조의 즉위도 문제였지만 늙어서도 여색에 미친결과였다.

인조는 54살에 죽었는데 죽기4년전부터 후궁인 조소원이라는 여자에 미쳐


밤마다 "베게"사이로 나누는 대화를 통한 결과는 인간으로서는 생각할수없는 짐승의 행동만을 행하다가 죽었다.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선해지는 경우가 많은데,인조는 죽을때까지 여자에 미쳐서 폐악을 저지르다 죽었기에 인조라는 왕은  왕의대접을 해줄 가치가 전혀없는 인간이라고 볼수가있다.

인조와 조소원사이에도 딸이있었지만,인조의 후궁인 조소원이 스스로 왕위를 이을수도 없었는데,왜 소현세자일가를 저주했는지는 의문인데,그결과는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에의하여 처리가 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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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먼저 그당시 국제적인 안목을 가진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소현세자가 비록 아들이었지만 늘 불안했다.이것은 인조정권이 태생적으로 주둥아리로만 외치는 반청의 기치로 탄생되었기에,국제정세를 잘파악했던 소현세자의 행동과처신은 눈에 가시거리였을 뿐이었다.

인조는 국내의 사대부들에게 인기를 얻고 왕권을 유지할수있는 길이,주댕아리만일지라도,부모의 나라 명나라 어쩌구하는 허울데기 행동을해야함을 잘알고있었다.이것밖에는 광해군을 몰아내어 반역정권을 만들어낸 명분우위가 없었다.

이미 국제정세를 잘 파악했던 소현세자는 이러한 허울데기명분에 연연하지않았기에,인조의 마음속에는 소현세자는 아들이기 이전에,자신의 허울데기 처신을 비웃는것같고,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갈수있는 흉악한눔으로 여겨졌다.

이러한때에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소원은 인조의 마음을 가장 잘파악할수있는 총애받는 후궁이었지만,소현세자빈이었던 강씨와는 아주안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는데,이 근본에는 강씨의 일족과 조씨의 일족간에 외척들의 국가에 참여의 대립이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기에,조소원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자신의 일족이 정치참여를 탐탁치않게 생각했던 소현세자빈에대하여 안좋은 감정을 가지게되는데,조소원과 인조는 그모양새는 달랐으나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부귀영화의 지속측면에서는 서로의 대갈박이 맞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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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죽음은 인조가 독살했다,아니다가 아니라,인조가 소현세자 죽음뒤에 벌인 행동을보면 독살인지 아닌지 미루어 짐작해볼수가 있다.소현세자가 죽기전에 이미 조소원과 소현세자빈 강씨사이에는 암투가 벌어지고있었고,인조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애첩이며,후궁이었던 조소원을 편애했고,세자빈강씨가 하는일은 사사건건 미워했다.결국 인조<->소현세자,조소원<->세자빈 강씨의 대립관계에서 자신의 국제정세관을 븅신취급하는 아들인 소현세자보다 밤마다 귀에 좋은소리를하는 자신의 애첩인 조소원을 더신뢰하게되는데,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인조와 조소원은 뒷날의 문제가 발생하지않도록,철처하게 소현세자의 일가를 말살하게된다.

조소원의 계략을 받아드린 인조는 먼저,홀로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키우던 세자빈 강씨를 모시던 나인을 역모라는 누명을 씌워서 궁녀인 계환과 계옥을 잡아다 옥에서 죽여,소현세자의 죽음에대한 세자빈 강씨가 하고싶은말이나 유언등을 전혀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고립시킨후,허울데기 명분을 붙이고는 세자빈 강씨의 두 오라버니를 잡아다가,곤장을쳐 죽인다.그리고 사관과 신하의 무수한 상소를 모두 배척하고,기어이 세자빈 강씨를 사약을 먹여 죽였다.

인조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애통하고,슬프게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라고 진실로 생각했다면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인조의 친손자들이기에 원손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인조는 어찌된것인지 세자빈 강씨를 죽일때 붙인 허울데기 명분을 손자들에게도 붙여서 모두 섬으로 귀향을 보낸다.

아비가 병으로 죽으면,손자들이 불쌍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주는게 인간의 도리이며,역사상 왕권문제로 자신의 아들을 스스로 죽인 영조조차도 그 손자를 원손으로삼아 돌봤는데,인조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계속하기에 사관들이 얼마나 황당했으면,엄한 왕조의 기록물에 의문스럽다는 표현을 적어놓았는지 알수가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수없는 짓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인조를 그당시 신하들과 사관뿐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했던 청에서는 용골대를 보내어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어디있는가 묻고,소현세자의 큰아들을 청으로 데려가 양육 하겠다고한다.이러한 제의가있은후 갑자기 섬에 귀향가서 살던 소현세자의 큰아들의 죽음으로 대답이 돌아왔다.뒤이어 둘째도 죽고,뒤이어 마지막남은 아들도 남해어딘가에 유배되었다가,왕의 친손자였음에도 역사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마지막 세째도 왕의 친손자가 살아서 일가를 이루어 살았다면,당연히 역사속에 기록되어있을것인데.아무런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는것은 어릴때 이미 죽음을 당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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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자신의 친아들,며느리,손자등 모두를 죽이는데 이러한것이 51살에서 54살까지의 3년사이에 모두 이루어졌다는것이다.인조는 자신의 인생에있어 마지막 남은 3년의 삶의 기간속에 들어있던 왕권,부귀영화,후궁의 미색을 취하기 위하여 이러한짓을 태연하게 벌였다는것이다.

조소원의 종말은 인조가 54살의 나이로 죽자,뒤를 이은 효종3년 1652년에  조소원이 세자빈 강씨에게 씌웠던 역모혐의처럼 효종에의하여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잡혀 죽임을 당했을뿐만아니라,조소원의 일가친척등이 모두 잡혀죽여 패가망신 하게된다.

인조는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손자들을 모두 죽여놓고 단지 3년을 더 살았고,조소원은 스스로가 지은 악업에따라,세자빈 강씨가 죽은지 6년만에,자신뿐아니라 일가친족 모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인과응보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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