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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사용하다보면 98이든,xp이든 컴퓨터가 종료가 안되는경우가있다.이럴경우에 2가지방법을
사용하여 컴퓨터의 종료오류를 해결할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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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그림에의 절차처럼 바탕화면 내컴퓨터-마우스오른쪽버튼-속성-하드웨어-장치관리자-보기
-숨김장치표시
-nt apm에 x표시로 되어있는데 이곳을 선택한후 사용을 선택해주면 위에 그림에서
처럼 nt apm 레거시 지원이라는 표시로 변하게된다.

위와 같이했는데두,xp종료가 정상적으로 되지않는경우는,아래그림의 다음단계를 겸해서 해줘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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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그림에서처럼,제어판-전원옵션-최대절전모드-최대절전모드사용에 체크표시를 해준후,
적용-확인을 해줍니다.

보통은 레거시지원만 해주면 해결되지만,그래두 정상적인 컴퓨터의 종류가 안되는경우는 최대절전모드
사용에 체크표시까지를
해주면 컴퓨터의 종료오류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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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종이위에 그려진 그림이,인터넷에서 글을적는것처럼 움직이는 영상효과를 낼수가 있을까?잡지를 우연히보다,책속에 책갈피기능처럼생긴것으로,잡지종이위에 움직이는 영상효과같은걸만들어낸걸 보았다.잡지책을 핸드폰카메라루,찰칵~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일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냥 하여 잠못 들어 하노라
이조년(고려문신1269-1343)의 다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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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맘대로 의역-


배꽃잎은 달빛아래환하구,은하수의 별빛은밤을 비추는데,정인을 그리는마음을 두견새가 알라먀는,그리움이 병이되었는지 잠이안오는구나
이조년(고려문신1269-1343)의 다정가
800년전의 사람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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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조"

자신의 꿈을위하여 노력하는경우가 아닌 사랑두그렇구,일상의 선택두 그렇구
자신의 꿈과 관련된것이아닌경우는 무엇인가를 되돌리려구하는것만큼 어리석은
것두없다.이미 지나간것을 꺼구로 되돌려 다시아무리 노력하구 잘해보겠다한들
그결과는 다시조의 꺼꾸로가 필연적으로 예정되어있다.

한번판단하여 스스로 결정한것에 미련을 두는것만큼,얼빠진것두 없기에
결정내리전에 심사숙고하는 버릇을가져야하며,결정을했으면,그자체가 하나의 운명이다.
꺼구로 되돌려,결정이전의 상태로 다시한번 기회를 가져으면하거나,되돌려 노력해보자는
 이런 얼빠짐은 결과의 행복과불행을 떠나 "다시조"의 꺼꾸로의 결말이 예비된
삶을 살아가는 부류들이라구볼수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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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의 바이러스로인한 키보드와 마우스 먹통과 부팅불능인경우.키보드와 마우스가
바탕화면에서 먹통이되는경우는,포멧이나 기타방법으로 치료를할수가있습니다.그러나 부팅순간부터
키보드와 마우스가 동작하지않는경우,포멧이나 운영체제재설치조차할수가없기에,키보드의 단자나
포트이상으로 착각하여,쓸데기없는 키보드나 마우스를 재구입하는경우가 없게하기위한 일반상식
입니다.

컴퓨터가 부팅시 아예 키보드와 마우스가 동작하지않아,어떠한 진행두하지못하는경우는,키보드가
동작하지않으므로,f2나 del키를 누른다해두 화면진행이 당연히안된다.이런현상은 변종
바이러스로인한,키보드와 마우스의 드라이버가 손상되었거나,삭제가 되었다는것이다.

이경우 컴퓨터의 하드에는  이러한 키보드와 마우스의 잘못된 드라이버정보가 들어있게된다.
하드에 저장된 바이러스현상으로인하여 발생하므로,컴퓨터의 본체의 하드의 전원선을 빼버리면
키보드와 마우스조작을 정삭적으로 할수있으며, 바이오스화면으로 들어갈수가있다.

하드에 바이러스가 있는경우에 키보드와 마우스의 먹통으로인한 자판키가 전혀반응하지
않는경우,바이오스화면조차 들어갈수가없는데,하드자체를 전원이 들어가지않게
해버리면
,기본적으로 바이오스화면상에 저장되어진 키보드와 마우스정보가 작동되므로
하드에 저장되어 오류현상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영향을 차단할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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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스화면상에서,로드 옵티미즈 디폴트라는 영어로쓰여진 항목을 선택하여,바이오스를 초기화
시킨후,부팅순서를 일반적인 절차대로 시디롬으로 정해준후,종료한다음,조금간격을 두었다가
하드의 전원선을,다시연결한후,컴퓨터를 재시작하면,일정시간정도 키보드와 마우스는 바이오스
상의 정보로 작동하기에,재빨리 포멧을하든지,운영체제재설치의 단계로 들어가면된다.

요점은 키보드와 마우스의 자판키가 아예 부팅시작부터 움직이지않는다면,하드에 연결된 전원선을
빼어놓구,부팅하면,바이오스정보화면으로 들어갈수있다는것이구,엉뚱하게 키보드나 마우스또는
컴퓨터의 단자나 포트이상으로 생각하여 새키보드나 마우스를 사거나,단자를 교체하는 엉뚱한
손실을 추구하지말라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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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여러가지 재미있는 gif파일로 만들어진 움직이는 그림들을 볼수가있다.
이런 gif파일로만들어진것들은,쉽게 분해하여,그안에 들어간 하나,하나의 사진을 살펴볼수있을뿐만
아니라,특정다른사진을 끼어넣어,다른모습의 패러디를 만들어낼수가있다.

플래시인경우,원본 fla파일을 가지구있지않는한,확장자가 swf를가진 플래시는 원천적으로 gif파일처럼
누구나 수정하여,사용할수가 없다.그러나 웹셔핑을 하다가 재미난 패러디 gif파일들이 있다면,
자신만의 gif파일로 쉽게수정하여 사용할수가있다.

 


곽현화라는 개그맨이 춤추면서 가슴이 너무강조되어보여서,뉴스거리가 된적이 있었는데,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니,위와같은 재미있는 gif파일이 보였다.출처가 없는걸 봤을때,일본이나
이런곳에서,캡쳐해와서 gif파일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해본다.플래시툴로 분해해보니,18장의
사진으로 만들어진 gif파일이었다.플래시를 배운사람은,위에 gif파일을 가지구두
다양한 페러디를 쉽게만들어낼수있구,더많은 특정부분의 확대정보(?)를 알수있다.

플래시를 배우면,기본적으로 gif파일처럼 간단한것은 1-2분두 안걸려,쉽게만들어낼수가있구,
플래시는 gif파일에 들어간 각각의 사진들을 다 분해하여 자동으로 라이브러리에 보여주며,
또한 플래시의 도구툴에 돋보기는 특정부분을 20배까지 확대하여 볼수도있다.
단순히 보여지는 움직이는 gif파일모습만이 아닌 그내부를 들여다볼수있다는것이다.

아울러,프레임복사기능을 이용하면,장면들의 반복이나,역반복,화면변경등이 다양한 효과를
더붙일수있구,원본gif파일에서 필요한부분은 간추려내어,필요한장면만을 사용할수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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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재미있게 패러디
해서 만들어낸 gif파일들이 많이있다.옆에 파일또한
출처가 어디인지 불분명하게 떠돌아다니는 파일이다

영화의 한장면을 가져다 패러디를 만든거같은데,
타이타닉을 정반대루 패러디한것인지,암튼 여자친구
보다 배에서 자신이 먼저살려구 뛰어든게 하필이면,
상어의 입속이라는,한마디루,위급상황에서는 레이디
포스트라는 순리를 따르는게 좋다.그런개념을
말해주는것이 아닌가 생각해보지만,뭔 영화의
장면인지는
알수가 없다.




위에 패러디인 gif파일에서,자신이 원하는부분이 상어가 입을 벌리구 닷는장면을 자신이
사용하고싶은경우는,gif파일을 불러오면,플래시툴에서는 자동적으로,사용되어진 사진장면들이
분해되어 라이브러리에 표시가된다.이러한 장면들중에,자신이 사용하고픈 장면만을 골라서
플래시의 타임라인상에 나열해주면,쉽게,자신이 원하는부분의 장면을가진 gif파일을 만들어
낼수가있다.

플래시만 배운다면,gif속에 들어있는 눈으로 보여지지않는 다양한 정보활용할수있을뿐만아니라,
그어떠한 툴보다두 쉽게,여러가지 패러디를 만들어낼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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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gif파일은 다른장면의 사진과,상어의 장면을
결합하여,사람이 상어입속으로 들어가는것처럼
만들어졌지만,분해해보면,상어는 그냥 입을 벌리구
나와다 들어갔을뿐이다.

이처럼,재미난 패러디는,다시 자신만의 재미난
패러디루 특정장면만을 추출하여,자신만의 패러
디에 써먹을수가있다.

플래시를 배우면,자동적으로 포토샵을 할수있으며
각종 블로그운영을 풍성하게하는 다양한 에니메이션
과그림,다른사람의 만든 패러디파일들을 쉽게 활용
할수가있다.



포토샵이나,gif파일다루는 그런툴보다,플래시를 배우는것이 더좋구,도움이된다는것을 알수가있다.
블러그운영자라면,플래시정도는 기본적으로 배워두는것이 스스로의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웹2.0의
정신과두 부합되며,블로그운영에두 요모조모 쓸모가 많다.

글만 댕그러니 있는 글보다,요즘은,사진이나 다양한 시각매체와 어울어진 글이나 기사들이
더 관심을가지구 본다는것이다.블로그의 강점은 지면상으로 볼수없는 다양한 시각매체를 활용하여
글을 적을수있다는것인데,그러한 강점을 외면할 필요는 없다구보구,그활용의 중심에  플래시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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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쓰면 저절로 그림문자로 표현되어 나타나게해준다면,상대방이 편지를 받았을경우,그림같은문자가보여진다구해두,해석할수는 방법만알면 해석할수가있을것이다.


그림처럼보일지라두,이것은 그림이아니라 한글을
그림에 맞쳐 나열하여 적는것이다.

아래의 부분을 참조하여 보면이해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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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운영체제에 기본적으로 내장된 수많은 글꼴들이 존재하는데 그중에 WingDings 글꼴이있다.
이글꼴을 태그명령어를 사용하면,한글을 적더라두,자동적으로 그림문자로 표현해준다.
<font face="WingDings" size="6" color="red"> 이부분에 한글을 적어넣는다</font>

위에 태그그림에서,size는 글자크기부분이며,color는 글자색깔을 바꿔줄수가있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WingDings글꼴그림을,방명록이나 댓글에 붙여넣어보면 자동으로 한글로 번역되어
보여지며,일반글쓰기페이지에서두,edit모드가아닌,html모드로 바꿔보면,그림글꼴내용이
한글로 표현되어지기에 무슨내용인지 알수가있다
.

WingDings글꼴과 태그를 이용하여,이부분에 한글을 적어넣는다 곳에다른 한글을 적어
넣어 html모드에서 작성한후 저장해보면 아래와 같은 그림문자가 표시되게된다.
무슨 내용을 적을거냐면,"편지맞냐,좋아한다는말이냐,싫어한다는말이냐 이눔아" 이글자를
WingDings글꼴의 그림문자로 바꿔볼것이다.태그는 일반 에디터모드에서는 아무런변화가없기에,태그를
직접사용할 경우는 반드시 html모드상태에서 글을적구 저장해야 태그가 정상적으로 표현되게 되어진다.

편지맞냐,좋아한다는말이냐,싫어한다는말이냐 이눔아




위에 모습처럼,무슨말인지 알수없는 그림문자로 변해지만,저것이 의미는,"편지맞냐,좋아한다는 말이냐,
싫어한다는 말이냐,이눔아"
.를가지는 의미이다.확인방법은 위에 설명했음으로 생략한다.
기본적으로,WingDings글꼴로 변환하여 이메일을 보내거나,프린트해서 편지로 보낸다해두,컴퓨터운영체제
는 기본적글꼴로 내장되어있다.시작-모든프로그램-보조프로그램-시스템도구-문자표에는 기본적글꼴
로 WingDings가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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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재위기간은 12년이었다.그런데 이 연산군의 사주팔자와 김정일의 사주팔자는 아주 운명적으로딱맞아떨어진다.두사람의 본성이나 행실모두가 비슷한면이있다.

연산군은 시와음악등의 예술을 좋아했구,전국에서 얼굴이 반반한  처녀는 청녀라는 명칭을으루궁중으로 불러서 놀았구,김정일또한 예술을 사랑하는기질과 반반한여자들을 기쁨조라구 불러서노는것은 아주 똑같이 닮았다.

연산군은 특히 파티나연회같은것을 자주열구,아주좋아라했는데,이같은 성격두 김정일하구똑같이 닮았다.

연산군은 툭하면 자신이 지은시라구,신하들에게 어떤가하구 의견을 묻기를
좋아했는데,말한번 잘못하면,죽임을 당하니,전하의 예술은 최고입니다라구 아니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나 멋진시를 자주써는지,조선왕조실록 연산군에기록된 수많은 연산군의 시중 그 하나를 살펴보자

"비 개이고 바람 맑아 풍경 걷은 듯
 
금전에 아지랑이 둘러 떠 있네
 
잔치를 자주 여니 우애 좋은데
 
넌지시 사람 끄는 홍분 얼마뇨"

도성주위에 가뭄과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시체가 길바닥에 널려 쌓여있는데두,연산군은 파티가
얼마나 인간사이의 정을 돈독히해주는지,너희는 아느냐란식의 시를 적어 짜빠져있음을 알수가잇다.
연산군은 더 나아가,길가에 배고픔에 쓰러져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너무많아,치우는사람이 없자
길가에 시체가 그대로있으면,고을이나 이웃사람을 잡아다 책임을 물어 옥에가두게하는 법률을
만들기까지했다.

이러한것은,주위사람이 잘못하면,친지와 일가족및 이웃에게 책임을 물어,하루아침에 집안전체가
쥐도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지게하는 김정일의 통치방법과 다르지않다.


연산군은 또한 특이하게,남의 아내를 잡아다 음욕을 채우는것을 좋아했는데,이러한 성품은 김정일이
자신의 아내들을보면,남의 아내를 빼았아 자신의 아내로 만든것두 두사람이 공통점이다.

연산군은,잔치나 파티라는 명목으로,관리들의 부인들을 궁중으로 불러,가슴에는 남편이름을
붙여넣게하여
,옷을 똑바루 입혀준다는 구실을되게하여,자신의 욕심을 채우고,하루두 좋구,
일주일두좋구 놀데까지놀다,밖으로 내어보냈다.

인권을 탄압하구 백성을 도륙하는 김정일정권이 아무리 강력한 독재를한다구해두,우리나라의 백성들의
기상을 살펴보면,엄격한 신분제사회의 왕조시대인 연산군시대에두,패악한 왕이라면,패망시키구
내쫒았던걸보면

김정일 자신은 호의호식으로 파티나열며,온갖 악독한짓은 다하면서두,백성들은 옥수수죽두 제대로 못
먹구, 300만명이 넘는 국민을 굶어죽게만든죄는 하늘에 다았다.

또한 이러한 현실을 비난하는 백성들을 잡아다 어육을 뜨구,공개총살하며,수용소에 가두어둔사람만해두
수십만이넘었구,현재까지두 배고픔에 떨면 죽어가는 백성들이 널부러져있다.국민을 자신의 호의호식
도구로 이용한 연산군보다,더하면 더했지 덜하지않은 악독한 지도자이며,둘의 기록을 살펴보면,
성품이나,행동거지,태어난 배경등이 하나두 틀림이없이 똑같다는 점이다.

또한 이 두명이 사주팔자는 기이하게두 재위 12년을 넘기지못하여,권좌에서 쫒껴나게되며,권좌에
서 쪼겨나더라두,그즉시 죽임을 당하거나 암살당하지는않구,유배지나 교도소에 생을 마감하게되는
사주또한 똑같이 나옴을 알수가있다.

백성을 도탄에빠뜨리구,어육이되게한 연산과 김정일은 같은운명과 사주를 가지구
태어났기에,재위 12년을 넘기지못하구,백성과부하들에게 돌팔매를 당하여,정권이 마감될 운명을
가지구있음을 알수가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통일은,멀리있는것이아니라,길어두 2년내에 긴급사태가 발생한 가망성이
많기에,우리나라의 동맹외교를 굳건히하여,우리나라의 통일을 방해하여 침략하는 적(구체적으로
보면 동북공정을 의도하는 나라라구볼수있다.)에게는 강력한 대응작전계획을 미리세워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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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목대비는 선조의 정비인데,광해군과는 악연을가진 여인이었다.자신의 아들뿐만아니라,부모형제,일가
친척모두를 광해군에게 죽임을당하구,대비의 명칭마저 폐위되어 10년동안을 골방에 갇혀지냈기에
광해군에대한 원한은 짐작하구두 남는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구난후,인목대비의 글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는데,
“ 부모의 원수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는 한 나라에 같이 살수 없다. 역괴가 스스로 모자의 도리를 끊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이 있고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두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에 딱어울리는 구절이 아닐수없다.

이런구절때문에 인목대비를 주목한게아니라,한글과 관련된 선구자적인 여인이라는 측면에서 인목대비를
살펴보고자하는것이다. 인목대비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선구자적인 획기적일을 했는데,교서를 한글로
내린 전후후무한 여인이라는것이다
.

세종대왕시대에 한글이 만들어졌지만,조선시대내내 한글은 왕가의 교서로 사용된적이 없었다.
그런데,쇼킹하게두,인목대비는 당당하게 한글로 교서를 내린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실제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을지는몰라두,한글사랑을 실생활에서 사용하여 사랑한 임금이라구는
전혀볼수가 없다.역대 조선시대의 문무관리나 왕들은 한글을 천시했으며,신분이 낮은 일반백성들이나 ,
여인들이 실질적인 한글사랑을 실천했던 대상들이었다는 점이다.

인목대비의 선구자적 한글사랑이 얼마나 조선시대의 관료들에게는 쇼킹그자체였으면, 사간원에서
상소올리게 된것인지 조선왕조실록의 구절을 살펴보자

1623년 인조1년  12월7일
"지금 공주를 시집보내는 예(禮)를 보건대 의복과 기물의 사치가 보통 때보다 배나 되고 있으니, 이미 조종조에서 절약하고 검소하였던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언서(諺書)로 하교하신 사실을 보고 듣기에
더욱 놀랍습니다.

"옛날 성인이 훈계하신 뜻과 뭇 신하들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로써 조용히 아뢰어, 이미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고 언서로 하교하는 일이 앞으로 없도록 하심으로써 조종조의 가법(家法)을 밝혀 후손에게 남겨주는 법으로 삼으소서.”

조선시대의 관리들은,한글을 무시하는것은 당연하구,오히려 한문을 안쓰구,한글을 쓴건 불법한짓을 했다는 투로말하구있음을 알수가있다.

오늘날같으면,대갈박깨지는건 둘째치구,사회에서 매장될인간들이 조선시대 신하라는것들의 가치관이었음
을알수가있다.이런 덜떨어진 신하들에게,통쾌한 일격을 가한 선구자적 여인이 인목대비였다는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구,반정에 성공한 집권초기인 인조로서는,인목대비라는 백그라운드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에,인목대비의 교서에대하여 문제삼지말라구 신하들에게 명령한다.

만약에,인목대비라는 대담무쌍한 여인이아니구, 일반 선비나,신하가 한글로 상소를 올리던지,
공문서를 올렸다면,한글을 썼다는 그이유하나로 접수불가는 물론이구,임금을 모독했다구 죽임을
당할수도있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현실로는 이해할수없는 그러한일들이 공자왈 맹자왈하는 신분제사회하에서는,상소를 한글로 올린다는 그자체, 양반이라는 껍데기인 자신의 속한신분에서 왕따나 사회적매장을 당할충분한 이유가될수도있는 사회체제였다는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후기 신분제사회가 종말을 기할때까지두 이어졌으면,이가 득실대는 상투머리에
상투를 짜르느니,차라리 목을 짜르는게 더현명하다는 가치관이 조선후기까지 이어졌기에,
한마디루 말해서,오늘날에 사람이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살게되면 복장터져죽을 일이 다반사였을것이다.

한글을 사랑하구싶어두,사랑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시대가 조선시대였다는것이다.그이면에는
썩어빠진 공자왈 맹자왈이 그런 사회적가치관과 문화를 만드는데 아주지대한 역할을 해다는점이다.

인목대비는 이러한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속에 빠져들었던사회에,혁신적 한글사랑을 몸소실천한 선구자
라구 볼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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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숙종 38) 조선과 청국 사이에 백두산 일대의 국경선을 표시하기 위해 세운 비석. 당시 청나라의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과 조선 관원들의 현지 답사로 세워졌다.

이보다 앞서 압록강·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청나라 두 나라 사이에는 자주 분쟁 사건이 일어났다. 즉 거의 빈땅으로 되어 있던 이 지역에 인삼을 캐는 사람, 사냥하는 사람들이 자주 내왕하며 때로 충돌을 일으켜서 말썽이 되었다.

1685년(숙종 11)에는 백두산 부근을 답사하던 청나라 관원들이 압록강 건너 삼도구(三道溝)에서 조선 채삼인(採蔘人)들의 습격을 받아 크게 외교 문제가 발생하였다. 1690년과 1704년, 1710년에도 두만강·압록강 건너에서 중국인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살해된 일이 생겨 청나라 정부의 항의가 있었다.

그런데 이듬해에는 청나라에서 이러한 범법 월경 사건들을 문제삼아, 백두산에 올라가 국경을 정하려는 계획이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청나라 왕실의 발상지로 인정하는 백두산을 청나라의 영역 안에 넣으려는 저의도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에서는 그 해 2월, 목극등을 장백산(長白山 : 백두산)에 보내 변경을 사정(査定)하려 하니 협조해 달라는 공문을 조선 정부에 보냈다. 이어 4월에는 목극등 일행이 두도구(頭道溝)에서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와 후주(厚州)에 도착하였다.

청국의 공문을 받은 조선 정부에서는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을 보내 함경감사 이선부(李善溥)와 함께 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혜산진에서부터 산간 험지를 10일간이나 강행군해 5월 15일 백두산 천지(天池)가에 이르게 되었다. 일행은 거기서 내려와 동남쪽으로 4㎞ 지점인 2,200m고지 분수령에 정계비를 세웠다.

애초 국경 사정(査定)문제가 일어날 때, 조선 정부의 의견은 백두산 정상을 경계로 하여 남북으로 갈라 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경을 사정하는 임무를 띠고 나아갔던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는 늙고 허약한 몸으로 험한 길을 갈 수 없다고 하여 중간에서 뒤떨어졌다.

결국 목극등이 애초 의도한 대로,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와서 두 물이 ‘人’자 모양으로 흐르는 분수령 위의 호랑이가 엎드린 모양 같은 바위를 그대로 비석의 귀부(龜趺)로 삼고 높이 약67㎝, 폭 약45㎝ 정도의 정계비를 세우게 되었다.

그 비에는 ‘대청(大淸)’이라는 두 글자를 머리에 크게 쓰고, 그 아래에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답사해 이곳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 되고 동쪽은 토문(土門)이 되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

강희오십오년오월오일(烏喇摠管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五日).”라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어 청국인 수행원으로 필첩식(筆貼式) 소이창(蘇爾昌), 통관(通官) 이가(二哥)를 적고 아래에 조선 관원 6인의 이름도 함께 새겼다.

비를 세운 후 일행은 다시 지세를 살피며 무산으로 내려가서 각기 헤어졌다. 이 때 목극등은 다시 조선관원들에게 토문강의 수원이 되는 물길이 중간에 땅속으로 들어가서 경계를 확인할 수 없는 곳에는 여기저기에 돌 또는 흙으로 돈대(墩臺)를 쌓아 아래쪽 강물에까지 연결해 범법 월경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부탁하였다. 한·중 두 나라의 경계선이 비로소 그어진 셈이다.

그 뒤 1881년(고종 18) 청나라에서 길림장군(吉林將軍) 명안(銘安), 흠차대신(欽差大臣) 오대징(吳大徵)을 보내어 간도의 개척에 착수하였다. 그러자 1883년 조선 측은 어윤중(魚允中)·김우식(金禹軾)을 보내어 정계비를 조사하게 하고 9월에 안변부사 이중하(李重夏), 종사관 조창식(趙昌植)을 보내어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했으나 아무런 해결을 보지 못하였다.

그 뒤 1909년 일제는 남만철도의 안봉선(安奉線) 개축 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해 남만주에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 지방을 넘겨주고 말았다.

------------------------------------- empas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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