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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말에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고 하였는데 사도세자가 그러했으니 그의 행실과 성품이 개새끼였기에 조선왕족중에 유일하게 개새끼그림을 그리길 좋아해 작품이라고 후세에 남겨놓은 인물이다. 오늘날의 기준에서도 왜 이 개새끼인 사도세자가 죽어 마땅한지 잘알려져 있지 않아 드라마등을 통하여 미화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 적어 놓으려고한다.

 

 

 

 

사도세자는 절대권력자인 후계자였기에 왕조국가에서 아랫사람들을 죽인 것에대한 책임에서는 그리 큰흠은 아니었다.그러나 죽임에는 나름이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이 개새끼에게 죽임을 당한 무수한 사람들은 단지 옷이 좀 이상합니다라든지 같은 사소한 말에도 네까짓 게 뭔데 나에게 지적 질이라며 분기탱천하여 그 자리에서 즉시 모가지를 댕강 댕강 시켰다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왜 뒤주속에서 9일을 굶어서 죽는 형벌을 당했을가 거슬러 올라가보면 사도세자가 개새끼였기 때문이 그 근원임을 알수가 있다. 사도세자의 배다른 여자형제가 있었는데 사도세자보다 나이는 15살이 위였기에 누나뻘보다 이모뻘에 가까울정도의 나이차였고 이복누나인 이분이 13살에 시집을 갔는데 남편되는분도 13살이었다.

 

이 두분은 오늘날에서 보면 초등생나이에 만나 알콩달콩 자식도없이 서로만을 의지하여 살아갔는데 이복누나가 38세인 어느날 23세인 사도세자가 38살인 매형을 만나 시와 개새끼 그림을 그리며 풍월을 읖조리던중에 매형이 태도가 마음에 안드다고 먹물인 담긴 벼루를 잡아 대가리를 쳐서 죽여버렸는데, 영조의 딸이면서 사도세자에겐 이복누나였던 화순옹주는 38살이 되도록 아이가 안생겨서 오로지 남편만을 의지하며살다가 하루아침에 별거도 아닌 일에 남편이 죽임을 당하자

 

그 억울함을 아버지인 영조에게 아무리 호소해도 영조의 말은 아무리 개새끼같은 짓을 했어도 사위보다야 형제가 우선이 아니겠느냐 너가 인내하라였다. 왕조시대였기에 여자로서 항거할 방법은 소심하게 보름동안을 곡기를 끊고 굶어죽어버렸는데 영조는 이때에도 그래도 딸보다는 아들이라는 생각으로 사도세자에게 제발 정신차리라고 인내한게 그러한 일이있고 4년을 더 기다려 줬지만,

 

자신의 딸인 화순옹주가 굶어죽는 것을 본 영조의 인내기간인 4년동안에 오히려 100여명 더 넘는 사람의 목가지를 댕강시키는 것도 모자라 자신의 아들을 낳은 후궁을 때려죽였을뿐만 아니라 잘린 머리를 들고 자신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에게도 자랑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사도세자의 친어머니와 사도세자를 양자로 입적한 영조의 정비조차도 그 개새끼를 살려 후계자로 물려주면 결단코 나라가 망조가 들것이라는 강력한 호소에 그래도 아들인데라는 마음에 영조의 고민은 깊어갔고

 

 

 

여름날 홀로 달빛을 멍하니 보며 며칠간 고민에 고민을 하던 영조가 신하들에게 말하길 내가 아니면, 내가 아니면 과연 누가 저 개새끼를 처리할 수가 있을것인가? 개새끼를 개새끼라고 말하지 않고 나에게 개새끼의 비리를 아랜사람을 무고라고 참수시켜 모른척한 신하들이 모두 역적이다.” 일갈하고는

 

저 개새끼의 합당한 형벌은 인과응보로 자신의 딸인 화순옹주가 굶어죽는 상황에서도 모른척한 것에 대한 회한과 뉘우침에 기인하여 결단에 이르게되어 그 즉시 실행하게하여 결국 사도세자가 굶어 죽게 된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했지만 동시에

 

화순옹주에게 열녀문을 내려 할아버지인 영조가 사위나 딸보다는 그래도 아들이 먼저이지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굶어죽은 딸에게 내려주길 거부한 것을 바로잡아 조선왕족의 여자중에 유일하게 열녀가 되게한것도 정조였음을 보면 정조의 스타일은 좌우에 치우지지 않는 있는 그대로 보고 평가하고 실행하려던 실사구시의 실용성을 갖춘 왕의 자질을 가지고 있음을 알수가 있고

 

열녀문을 받은 화순옹주의 양자로 입적한 사람의 후손에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세한도를 그린 추사 김정희가 나온 것을 보면 세한도에 들어있는 것은 불의에 항거하여 굶어 죽을지라도 자신의 소신을 나타내 보이는 절개와 지조의 상징인 열녀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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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상 김만덕,역사드라마로 나온다니 관심을 가지고 1.2회를 시청해보았다.


대부분의 역사드라마가 그렇듯 무늬만 그럴듯하고 내용은 껍데기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드라마의 전개나 내용들을 보면서


대장금이나 기타 용의 눈물등의 사극보다 스토리나 내용면에서 오히려 더나은  재미가 있었다.

2회의 마지막 장면이 대치장면이었는데,뭔가 꼬마애와 포돌이가 상관이 있는거같은 느낌!!



TV를 거이보지않는데,티브이를 시청할만한 가치를 생기게해준,거상 김만덕,토,일요일 밤이 좋은이유는 나에게있어,거상 김만덕을 볼수있는 시간이라는 것이다.역사에대하여 관심있는 사람치고,은광연세의 주인공 김만덕을 모르겠는가,그만큼 이 여성분은 조선시대,아니 우리나라의 5,000년 역사에있어,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여 신분과지역의 벽을 허문 입지전적인 희생정신을 보여준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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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나이팅게일이 있었다면,우리나라에 김만덕이 있었고,외국에 테레사수녀가 있었다면,우리나라에는 김만덕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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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나는 조선의 국모이니라"라고 외쳤다는 고종의 왕비 민황후는 과연 그러한 말과 자세를 보여줬을까를 아무리 역사기록을 찾아보아도 보이지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로 궁녀의 복장을하여,구차하게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려고했을뿐이었다.


조선의 민황후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행동을했던 대비되는 왕비가 고려에 있었으니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14세기 후반에 머리에 빨간두건을쓴 도적의 무리였던 홍건적이 자주 고려를 침범하여,우리나의 백성들 괴롭히곤하였다.훗날 이 도적의 무리의 괴수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데,근본부터가 도적의 무리들이였기에 허약한 근본토대를가진 왕조일수밖에없었다.


1363년 고려 공민왕의 나이 33세가 되던해,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의 논공행상에 불만을품은 김용이라는자가,자객단을 이끌고 흥왕사의 행궁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나라일을 보던 공민왕을 암살하려고하였다.


김용의 자객단이 흥왕사로 급시에 습격을가하자,공민왕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는데,공민왕의 아내였던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공민왕을  어머니의 방에 왕을 숨기고,그문앞에 서서 자객단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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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단의 무리가 칼을 휘두르며 방문앞에 이르러 말하길 왕은 어디에있는가? 왕비가 홀로 나아가 외치길"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방안에 들어가려거든 먼저 나를치고 들어가라"하메,무리들이 두려워 태후의 방안에 들어갈수없었다.


김용의 자객단은 나중에 최영의 정예군에의하여 처단되어 반란은 진압되게되고 훗날 아내의 도움으로,자신의 목숨을 구한 공민왕은 흥왕사의 변이 일어난후 2년이 지난 35세되던해 눈이 소복히 많이 내린 2월 추운겨운날에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죽자,


훗날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남긴 조의문에 그때의 상황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는데 자신을 남기고 떠나버린 아내를향한 사랑과 비통한심정을 느낄수가있다."나에게있어 아내보다 중한것이 없었고,흥왕사의 변이 일어나메,나의 몸의 지척에서 적을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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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사후  공민왕은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은왕비를 살아있는사람처럼대하며,식사할때마다 자신의 음식과 왕비의음식을 같이차려  함께 대화를하며 음식을먹었고,일체의 고기를 먹지않았을뿐아니라,나라를 다스리는 일조차 관심을 끊어버려,국제정세에 밝아 요동을 정벌하며 호기롭고,영민했던 공민왕은 이후 360도 다른 무기력한 왕의 모습을 보이며,슬픔속에서 살아가다 결국 신하의 손에의하여 죽음을 당하게된다.


훗날 조선을 개국한 반역의무리들이 공민왕의 후손인 우왕과창왕의 씨를 가짜라고하며,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위하여 역사를 왜곡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보아도 공민왕은 35세에 이미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하여,아이를 낳다가 죽었던걸보면,공민왕의 남성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했음을 알수있고,공민왕 스스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했던 우왕을 훗날 반역의 무리가 "아니다"라고 기록것은 반역을 정당화하기위한 역사조작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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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역사에서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자객단앞에서도 당당히 홀로맞선 여인이었지만,궁중에서의 일상생활모습은 내성적이고,여린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전해지는데,사랑앞에서는 한발자국도 물러 서지않았다.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사랑을보면,남녀간의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라는 말이 사실인거같다.


드라마나 사극일지라도,역사를 조작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것은 반역의무리들이 늘행해왔던 목적을위하여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르지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반만년역사에 왕비로서,노국공주가 행하였던 행동은,실존하는 유일한 기록이며,"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라는 그러한 비장미와 당당함을 보여줬던 인물을 찾는다면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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