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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백년전인 정조시대에 김만덕의 객주집을 재현하여 만들어진 곳으로 이곳에서 파는 몸국은 제주도 전통음식으로 "돗국물"이라는 별칭이 있는 것으로 3백전에 육지같으면 "주모 여기 뜬근한 국밥 한그릇 주시오"했다면 


제주도는 "돗국물 한사발 줍서"와 같은 개념인 아주 오래된 음식인데 김만덕의 생애에 대하여 궁금하여 흔적이 있는 사적지를 다 둘러보다가 여기도 의미있는 곳이에 방문해봤는데 3백년전의 제주도 몸국의 맛의 재현은 어떨까하고 먹어봤다.

  

한입먹는 순간에 자연의 봄나물같은 자연의 맛이 느껴졌는데 강한맛이 아닌데도 계속 먹고 싶어지게 하는 맛이었기에 한그릇 뚝딱 국물까지 다 먹었다. 제주도의 여러곳에서 몸국을 먹어봤지만 김만덕이 살았던 시대의 제주도 전통몸국의 맛은 여기가 최고의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국 한그릇먹고, 제주막걸리에 해물파전을 후식으로 먹었는데 그것 또한 맛이 좋았다. 관광지인 요지에 위치해 있는데도 음식 가격이 너무 싼것에 놀랐고 더불어 먹는것뿐아니라 초가집으로 지어진 객주터안에는 다양한 전통도구나 그시대 살림살이들이 아기자기하게 재현되어 있었기에 둘러보면서 눈요기도하고 음식도 먹을수 있는 사진찍기에도 좋은 추억을 남길수 있는 곳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제주도에가면 꼭한번 먹어봐야할 음식이 몸국과 파전에 제주막걸리라고 할수가 있다. 이러한 것을 경험할수 있는것도 복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제주의 전통음식과 시설이 어울어져있는 김만덕객주집을 방문하여 먹는 것과 둘러보는 행운을 가질수 있었던 것은  좋은 선택. 


가격은 일반음식점에서 점심한끼 먹는것하고 다르지 않는 착한가격이기에 부담없이 들려서 먹을수 있었다. 몸국과 해물파전 그리고 제주막걸리의 조합의 맛은 별로 표현하면 별이 5개인 매일 먹고싶은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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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무렵 푸른하늘을 바라다보았다.높은 하늘위로 시원하게 평행기류를 흐날리며 비행기가 구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객기처럼 보이지는 않는데,하늘위에 아주 급한 볼일이 있는듯 생생거리며 순식간에 하늘 이편에서 저편까지 직선으로 가르더니 휙 사라져 버렸다.

무엇을 하는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장쾌하게 창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구름이 시원하게 보였다.

오늘은 그동안 밀렸던 댓글들을 살펴보다가 나의 창작소설에 "재미있게 잘읽어네요"라는 댓글이 달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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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이 하나 달리때마다 한페이지씩 써나가다보니 현재 7-8페이지 정도밖에 쓰지 못했고,댓글 반응이 썰렁해서 멈추게된 소설이었는데 재미게 읽었다고 댓글까지 남겨준분이 있다니,만세^^;;(소설을 계속쓸 핑계가 생겼다)

이런분이 있기에 허접한 창작소설이지만 힘이 생기고,댓글이 달릴때마다 한페이지씩 계속 글을 적어보려고한다.오늘은 주말이면서 날씨가 정말 좋았는데,벌써 봄을 알리는 배추꽃이 활짝피어 있었다.보기가 좋아 몇장 찍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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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고 댓글을 남겨주시는분들의 마음에 감사함을 전한다.댓글의 행복이랄까,기분이 좋다.조금있으면 온가족이 시청할만한 좋은 드라마  거상 김만덕이 방송된다.이것또한 나에게있어 즐거움중에 하나이다.이런 좋은 드라마를 볼수있다니,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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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상 김만덕,역사드라마로 나온다니 관심을 가지고 1.2회를 시청해보았다.


대부분의 역사드라마가 그렇듯 무늬만 그럴듯하고 내용은 껍데기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드라마의 전개나 내용들을 보면서


대장금이나 기타 용의 눈물등의 사극보다 스토리나 내용면에서 오히려 더나은  재미가 있었다.

2회의 마지막 장면이 대치장면이었는데,뭔가 꼬마애와 포돌이가 상관이 있는거같은 느낌!!



TV를 거이보지않는데,티브이를 시청할만한 가치를 생기게해준,거상 김만덕,토,일요일 밤이 좋은이유는 나에게있어,거상 김만덕을 볼수있는 시간이라는 것이다.역사에대하여 관심있는 사람치고,은광연세의 주인공 김만덕을 모르겠는가,그만큼 이 여성분은 조선시대,아니 우리나라의 5,000년 역사에있어,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하여 신분과지역의 벽을 허문 입지전적인 희생정신을 보여준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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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나이팅게일이 있었다면,우리나라에 김만덕이 있었고,외국에 테레사수녀가 있었다면,우리나라에는 김만덕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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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충사 단어가 나타내주듯 나라와 관련된 인물을 기리는 곳인듯한데
누구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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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탑이 높이가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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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두 모충사에 글을 남기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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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식수 그아래를 보니 김대중단어두보이네,대통령 김대중인가
했더니, 총재 김대중이라는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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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충사안에 3001년 1월1일에 개봉될 타임갭슐이 뭍여있다는 안내판두
보이네,3001년에두 묘충사의 인물은 영원한 귀감이 될정도 훌륭한 인물이라는
자부심의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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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커다란 돌무더기 아래,590개에 이르는 품목이 들어있다.개봉시기는
3001년1월1일,사람은 유한하나,기록은 영원할것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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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선생님두 모충사의 이분을 기리기 위하여 은광연세라는 글을
남기셨다."은혜로운 빛이 세상에 널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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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동판조각으로 이분의 일대기가 그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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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임금님이 조선의 왕인 정조, 티브이 드라마 이산에 나오는 그분,
모충사의 이분이 누구시길래,정조대왕두 친히 불러 이분을 기려 후세에
모범이라구 하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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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충사의 이분, 바로 의녀반수 김만덕이라는 분이다.
조선시대 철저한 신분제사회하에서,여성으로 자신의 신분을 극복하구,
성공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던져,종교,신분을 넘어 인류공영과 박애정신을 실천하신분

유고슬라비아의 마더데레사수녀님이 있었다면,우리나라에는
의녀반수 김만덕님이 계셨습니다.

"은혜로운 빛이 세상에 널리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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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이웃사랑을 실천한 위인으로
후세에 받들어 추모하길 기원한분?

추사 김정희가 은혜로운빛을 온세상에 널리퍼지게
했다구 모범으로 삼아야한다구 분?

반상의 엄격한 신분제인 조선시대에서 신분제를
극복하여,이웃사랑과박애정신을 실천한 여자분은?


조선시대는 신분제약과 그리고 여자로 태어난경우는
아무리 자신이 능력이있구,재주가 있다한들 벼슬을
하거나 자신의 재능을 사용할수가 없던 시기였습니다.

고작 우리들에게 알려진 조선시대 여성을 말해보라면
신사임당,황진이등인데, 이분들두 뛰어난 문필가로서
명성을 날려지만,이러한 개념은 신분제사회인

유교덕목에 하나인 글,시를 잘쓰는것이 권장되었기에
어느정도 차별없이,여자이지만 인정해준것이고.

실제로 신분제를 극복하구,임금에게 벼슬을 하사받구
자신이 가진것을 전부나눠,이웃사랑을 실천하구,
당대의 여자로서,국법으로 여자에게 주어진 악법을
지혜로운 방법으로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던분


조선시대는 여자들이 하나의 인간대접을 받구
살아가기에는 ,반상의차이와 신분제, 그리고 여필종부
라는 유교적 관념속에서

가장 안좋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나셨구,여자에게 가장안좋은
여권의식이 존재하던 시대에 사셨구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제한되었던 국법을 지혜롭게 이겨내셨구,
자신의 모든것을 이웃사랑을 위해서 베푸신분


조선왕조실록에 여자이름으로 후세에 모범이 되는
여자이름으로 가장많이 언급되었던 분


그분이 바로,의녀반수  김만덕이라는 분입니다.


빈부,적서를 구별하지않았구,천민의 신분에 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신분제를 이겨내구,이웃의 배고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껴서 자신의 모든것을 던져 실천하셨던분

우리나라가 아니라 외국에서 태어나셨던분이라면
오히려,테레사수녀,나이팅게일보다 더 그나라에서
자랑할분이었을 텐데,

조선시대에 이웃사랑과 박애정신을
실천하신 여자분이 누구 있나요? 외국인이 물어보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는 현실....
나이팅게일,데레사
수녀는 잘알면서,자신의 나라에는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두
관심이 없는 개념은 무엇때문인가....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글자나 책은
위대하다구 하면서
,왜 그분들이 현실삶에서 모범으로 추앙해던
여성에 대하여는 별루 아는 사람들이 별루없는지,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어떤 여성상을 찾구있는가? 되새겨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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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의 의미


요즘은 봉사한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남을 위한 봉사의 의미가 무엇일가?


데레사수녀,나이팅게일,김만덕 이분들은
지위,신분,종교를 초월하여,이웃사랑를
실천했던 분들이었다.

kungmi는 이상하게 생각하는게,데레사수녀,나이팅게일
이런 외국의 이웃사랑을 실천했던분들은 다 잘아는데
조선시대에 신분의 제약과 여자라는 커다란 굴레앞에서두
박애정신과 이웃사랑을 실천한 우리나라의 커다란 자랑인
의녀반수 김만덕이라는분이 있었다는것두 모르는분이 많다는것이다.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 알려면,좋은걸줄게~사탕발림하구
우리종교믿어라가 아니라,
그에 합당한 선구자적 발자취를
남긴 사람의 일생을 교훈으로 배우는것이 제일좋은것이라구 본다.

진정한 이웃사랑의 봉사가 어떤것인가
알구싶다면 의녀반수 김만덕님을 배워야한다것이
오늘의 kungmi생각이었습니다.(ノ^O^)ノ  ☜(^O^ノ)  (ノ^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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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홈에 실려 있는 김만덕 이미지)

 

▲ 구좌읍 동복리(東福里), 그녀가 태어난 곳

 

 오늘날 제주 사람들에게 '김만덕(金萬德)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조선시대 지독한 흉년이 들었을 때 사재를 털어 제주 백성들을 배고픔으로부터 구한 여인'으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제주시 사라봉에 자리한 모충사에 그녀의 선행을 기리는 의인 묘탑과 만덕관, 그리고 탐라문화제 때 시상하는 '만덕봉사상' 등을 통하여 널리 알려지기도 했겠지만, 초·중학교 교실 향토학습관의 '내 고장을 빛낸 인물'에 어김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향토사학자 김찬흡(金粲洽) 선생의 <제주사인명사전>에 나오는 그녀의 출생지 구좌읍 동복리(東福里)를 찾은 것은 바람이 몹시 부는 초겨울이었다. 동복리는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22km 떨어진 구좌읍의 첫 마을로 속칭 '곳막(邊幕)'이라 불리는 해안부락이다. 이제는 골목길처럼 돼버린 일주도로로 들어서서 휴게소를 지나 마을회관을 찾았다. 노인회관으로 쓰는 1층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사무소로 쓰는 2층으로 올라가 마침 담소를 나누고 있던 이 마을의 두 어른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기록에 나온 대로 "만덕은 본관이 경주로 구좌읍 동복리에서 1739년(영조15)에 아버지 김응열(金應悅)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는 것과 "그녀의 나이 9살 때 부모와 사별하고 외숙댁에 머물렀으나 10살 때 제주성안 무근성의 퇴기(退妓) 월중선(月中仙)에 맡겨졌다."는 내용을 열거하면서 혹시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사실 방문하기 전 '구좌읍 동복리' 마을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마을 사람들' 난에 유일하게 김만덕이 올라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대로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비교할 바는 못되지만 전라북도 정읍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 가보면, 의기(義妓) 논개(論介)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수몰지역의 생가를 옮겨다 한 장소에 복원해 놓고 주변에 기념관과 비를 세워, 충효열의 산 교육장으로 또 관광지로 활용하는 것을 본 터라, 혹시나 해서 찾아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 동복리는 4·3때 마을이 전소되다시피 피해를 입었던 곳이어서 다시 복구할 때 원형이 많이 훼손됐을 것을 감안해서 그 터만이라도 확인할 수 없을까 하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었는데, 기대가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올 수 없어 마을을 돌아보았다. 골목을 들어서는 순간1970년대 초가를 걷어내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바꾼 집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해풍 때문에 팽나무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산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예로부터 농토가 빈약하여 대부분 바다에 의존해 살았던 이곳 사람들, 어린 만덕도 이곳 주민들처럼 아침 먹기 전에 해풍에 밀려온 감태나 모자반 같은 거름용 해조(海藻)를 한 짐 져 올렸을까? 지금 제주섬 어느 마을이 풍요롭기야 하랴마는 양파와 마늘, 콩 같은 농산물과 성게, 톳, 우뭇가사리를 지역 특산물로 삼고 있는 이곳은 어촌계에서 운영하는 식당이 마을의 상징처럼 돼버렸다.

 

 김만덕의 출생에 관하여는 두 가지 이견(異見)이 있다. 하나는 본관이 김해김씨냐 경주김씨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생지가 제주 성안이냐 구좌읍 동복리냐 하는 것이다. 이는 1971년 김태능(金泰能) 선생이 김만덕 기념사업회의 요청에 의해 제주신문에 12회에 걸쳐 연재했던 <의녀 김만덕전>에 의해 쉽게 그 의문이 풀린다. 물론 김만덕이 돌아갈 당시 세워져 지금도 남아 있는 묘비문에는 김해김씨로 되어 있다. 당시에는 수로왕 후손과 경순왕후손의 일부는 다같이 본관을 김해김씨로 썼고, 그를 구분하기 위하여 선김(先金)과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1846년(헌종12)에 국왕의 윤허를 받아 후김은 경주김씨로 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김만덕의 후손들을 추적한 결과 구좌읍 동복리에서 출생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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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봉 모충사에 있는 비석들. 제일 뒤 위가 둥근 것이 김만덕 묘탑)

 

▲ 수양어머니 때문에 본의 아니게 기녀(妓女) 노릇

 

 속칭 '무근성'은 지금 삼도2동의 일부 지역으로 목관아지 서쪽에 위치한 동네를 일컫는 말이다. 제주시가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652-6호인 이형상(李衡祥) 목사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중 '건포배은(巾浦拜恩)'을 보면, 관덕정 서쪽에서 서문에 이르는 부분에 민가가 조금 나타나 있고, 제주판관과 관련된 관청(官廳)과 목관(牧官), 작청(作廳) 건물 서쪽으로 제법 많은 민가가 나타난다. 바로 이 민가 중 어느 곳에 만덕의 몸을 의탁했던 퇴기 월중선(月中仙)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 하면 관에 소속된 기녀들이 쉽게 부름에 응하려면 가까운 곳에 기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탐라순력도> 그림 중 '승보시사(陞補詩士)'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목관아지 군기고와 과원(果園) 사이에 기생방(妓生房)이 있으며, '귤림풍악(橘林風樂)'에는 잘 익은 귤밭 가운데서 목사와 관리들이 기녀들과 함께 풍악을 즐기는 광경과 과원 옆에 음악을 익히던 교방(敎坊)이 나와 있다. 오갈 데 없던 만덕은 결국 수양어머니인 퇴기 월중선의 인도로 기녀가 되는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관기(官妓)는 주로 여악(女樂)과 의침(醫針)을 담당하게 했는데, 의녀(醫女)로 행세하는 약방기생, 상방(尙房)에서 바느질을 담당하는 상방기생도 있었으나, 주로 연회나 행사 때 노래와 춤을 맡기 때문에 거문고, 가야금 등의 악기도 능숙하게 다루어야 했다.

 

 김만덕의 기녀 생활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그녀의 기민 구휼의 자선을 강조하기 위하여 기녀 생활 부분을 거의 생략하거나 지조를 지키다 조용히 물러나는 식으로 그려져 있고, 다른 하나는 객주집을 차려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필요 이상으로 용모가 출중하고 재치가 있는 활달한 성품으로 그리고 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에 와서 증명해 줄 아무 근거도 남아 있지 않지만, 조선시대 제주여인으로서 혼자 힘으로 객주집을 차려 성공하고 그 재산을 내어 기민을 규휼한 점과 과감하게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을 유람하겠다는 생각까지 한 것으로 보아 통이 크고 외향적이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다.

 

 따라서, 관기에서 제적되는 과정을 기록한 부분도 이견이 있을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는 조상에 대한 죄스러움과 천한 기생이 되어 가문을 더럽힌 죄를 씻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탄원해서 결국 기적(妓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식이고, 후자인 경우는 행수기생까지 올라 목사나 판관과의 친분을 이용해서 '물러나게 되면 쓰러지는 친정을 일으키고 돈을 벌어 사회를 위해 쓰겠다'는 말로 설득하여 뜻을 이룬다는 식이다. 기적에서 벗어난 후 당시동헌(東軒)에 소속된 제주 출신 통인(通引)이었던 두 딸을 가진 홀아비 고선흠(高善欽)을 만나 부부생활을 했으나 얼마 후 병사해버렸다는 기록도 가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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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봉 모충사에 있는 옛 무덤에 세웠던 비석과 석물들) 




활동]
1794년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전 재산을 털어 곡식을 구입하여
십분의 일은 친족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관가에 보내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함
진휼이 끝나자 제주목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임금이 소원을 들어 시행하라 하니
김만덕은 '서울에 올라가서 임금님이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보고 금강산에 올라가
일만 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라고 소원하여 서울로 상경
김만덕을 만난 정조는 의녀반수를 제수하고 궁에서 살도록 하였으며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유람하도록 함
만덕이 궁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려 하자, 채제공이 만덕의 거룩한 뜻을 담은「만덕전」을 지어 건넸고
병조판서 이가환은 만덕의 선행을 시에 담아 전함
김만덕은 1812년 10월 12일 74세로 사망하였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제주 안이 한 눈에 보이는 '가운이마루' 길가에 안장
1840년 제주에 유배온 추사 김정희는 만덕의 진휼 행장에 감동하여 손수「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글씨를 지어
양손 김종주에게 전하기도 함
1960년경 김만덕 묘소의 위치에 공장시설이 들어서자 1977년 1월 3일 모충사로 이묘

[김만덕 기념관 : 金萬德記念館]
1794년(정조 18)에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죽게 되자 자신의 돈으로 쌀을 사들여 제주 사람들을 살려낸
의인 김만덕의 유품을 전시한 박물관으로 사라봉 기슭 남서쪽 모충사 오른쪽에 위치
1976년 설립되었으며 만덕관에는 만덕이 살았던 1739년부터 1812년까지의 각종 의상과 생활용구
영정등 180여점의 유물을 중요무형문화재 80호 자수장 한상수씨에게 임대하여 전시
2000년 6월 소장자의 요구에 의해 자료가 반환되고, 8월부터는 한국화가 강부언씨가 그린 작품 만덕의 일대기가 전시되고 있음
해마다 한라문화제 때 의녀 김만덕을 기리는 '만덕제'가 열리고있으며, 사회봉사에 공헌한
제주도 여성을 선정해 만덕봉사상을 수여

위치 : 제주 제주시 건입동 387-4
관람시간 : 06:00-18:00(동절기 17:00), 연중무휴
관람료 : 무료
가까운 곳에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민속박물관, 제주교육박물관 등이 있음

[병조판서 이가환이 지은 만덕의 선행을 담은 시]
만덕은 제주의 기특한 여인일세
예순 얼굴이 마흔쯤으로 보이는구려
천금 내어 쌀 사들이고 백성을 구제하였으니
한번 바다 건너 궁궐을 찾아 뵈었구려
다만 원하는 건 금강산을 한 번 유람하는 건데
산은 동북에 안개와 연기로 사이에 있도다
임금께서는 날랜 역마를 내도록 허락하시니
천리에 뻗힌 광휘는 관동을 떠들썩하게 했네
높이 올라 멀리 굽어보며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는
표현히 손을 저으며 바다굽이로 돌아가려나
탐라는 저 멀리 고량부 신인 때부터인데
여인네가 이제야 나라 임금 뵐 수 있었다네
칭찬 소리 우뢰 같으며 고니 노닐 듯 빼어나니
높은 기풍 오래 머물러 세상을 맑게 하겠구려
사람이 나서 이름을 세움에 이 같음이 더러 있겠지만
여회청대로 기림은 어찌 족히 몇이나 되리요




김만덕(1739∼1812)은 1794년 제주도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자 전 재산을 털어 곡식을 구입해 십분의 일은 친족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관가에 보내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했다.
진휼이 끝나자 제주목사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니 임금이 소원을 들어 시행하라고 했다. 김만덕은 "소원하는 바가 없으나 서울에 올라가서 임금님 계시는 궁궐을 우러러보고 금강산에 올라가 일만 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소원해 서울로 올라갔다. 김만덕을 만난 정조 임금은 의녀반수를 제수하고 궁에서 살도록 했다. 만덕은 또 소원에 따라 금강산 일만 이천봉을 유람했다. 만덕이 궁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려 하자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만덕의 거룩한 뜻을 담은 「만덕전」을 지어 건넸고, 병조판서 이가환(1742∼1801)은 만덕의 선행을 시에 담아 주었다. 헌종 6년(1840) 제주에 유배온 추사 김정희는 만덕의 진휼 행장에 감동하여 손수 '恩光衍世' 찬양한 글을 지어 양손 김종주에게 주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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