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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족히 100년은 넘었을 것 같은 사진들중에서 눈에 뜨는 사진들을 골라봤다.조선시대의 기생들은 어떠한 옷을 입었는지,왕의 결혼식은 어떤 모습인지,제주도 해녀의 모습은 어떠 했는지, 이슬람의 여자들은 외출시 차도르를 착용했다면, 조선시대 양반집 여인들은 쓰개를 반드시 착용해야 했음을 알수있다.


"평양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이라는 속담에서 평양감사라는 직책이 뭐가 그리 좋길래,아주 좋은것으로 평양감사를 예을 들게한 이유의 한가지인 평양기생,그들의 모습은 어떻길래?


제주도의 해녀가 바다에 들어갈때,지금은 검은옷을 입지만 아주 오래전에는  흰색이었음을 알수있고,백의민족이라는 말이 바다에서도 해당이 되었음을 알수있다.


                              간도에 한민족의 마을 모습 이러했구나


              이중섭의 그림에서 보여지는 제주도 풍경,무슨 의미인지 해석불가



       조선시대의 한우모습은 오늘날과는 다르게 야생적인 뭔가 튼튼해보인다.


    순종의 결혼식 장면,뭔가 조선시대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아 보이는 왕의 결혼식


조선시대의 양반집여자들은 이슬람의 차도르처럼, 쓰개라는 치마 비슷한것으로 얼굴을 반드시 가려야 외출이 가능했음을 알수가 있고,사진을 통해서보면 여자아이들은 안써도 되었음을 알수있는데 왜, tv에서는 쪼메한 여자애들까지도 쓰개를 뒤집어써 외출하는 모습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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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오늘날처럼 길거리에서 몸을파는 여자들이 있었는지,창녀들에대한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여러가지 명칭기록으로 남아있음을 알수있다.


일반적인 형태의 창녀는 관가의 노비로예속되어 활동하는 관기,기생,운평으로 불려던 여자들로서 조선시대의 양반문화의 기득권을 가진 관리들의 노리개감으로 합법적으로 활동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일반 백성들의 삶속에서는 이러한 여자들이아닌 나라에서 인정하지않기에 불법적인,노는여자를 뜻하는 유녀의 역할을 무당이라는 호칭을가진 사람들이 하였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쓰여지는 신내림개념만을 가진 무당이아니라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사이에서 행하여지는 매춘,일탈행위를 기업적으로하는 포주의 개념으로 받아드려졌기에,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하는 조선시대에서는 무당은 온갖 나쁜것의 대표적상징으로 사용되어졌다.


무당은 아름다운 미모를가진 여자를 현수라고하여 데리고 다니면서 거문고를 타거나 노래를 부르게하였는데,무당의 눈치에의하여,현수와 일반백성간의 성매매가 은밀하게 이루어졌다.또한 무당은 남자무당인 박수를 데리고다니면서 일반백성들이나 양반집부녀자들과 사통하여 거래하기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남자무당을 화랑이나,양중으로 불리웠는데,삼국시대의 진취적 무예기상을 화랑이라는 개념이,유교문화 시대인 조선시대에는 오히려,똑같은 화랑이라는 단어가,오늘날의 호스트바종업원정도의 개념으로 사용되어졌다.이러한 호스트바의 영업방식이 중종(1513년)시대에 전라도관찰사 권홍이 왕에게 올린 장계에서 살펴볼수있는데.그내용은 이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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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굿을할때 젊은남자를 여자복장을하게하고,얼굴에는 분을바르고,여자무당과함께 방안에있다가,밤이 깊어지면,틈을 엿보아,여자무당이 젊은남자와 부녀자간의 매춘를 알선하고있습니다."



여자무당은 예쁜여자인 현수도 거느리고,젊은남자인 화랑도 거느리고하면서,마음껏마시고,노는 굿판이 벌어지면 틈을보아 굿판을 벌이는 집안의 남자나 부녀자와 매춘을 알선하는 포주역할을 조선시대에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엄격한 신분계급사회를 이상향으로한 유교문화인 입으로만 도덕,공자,맹자,열녀문,정조를 외친 조선시대조차도 일반백성을 상대로하는 무당의 매춘문제는 해결할수없었던 근본적이유는 유교적도덕을 주댕아리로만 외쳐던 기득권양반들이,관아의 노비신분으로 삼던 성노리개감인 여자들인 관기나 기생제도를 조선왕조가 패망할때까지,전혀 스스로 폐지할생각을 하지않았던 이중적도덕률을 가졌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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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두,오늘날의 국방의 의무처럼,징병제로 상시근무하는지역이 있었는데,경원,회령,경성등의 북쪽변방지역으로,2년간의 근무를하였다.


그당시 군인들은 대부분,결혼하여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변방을지켰는데,오늘날의 군대가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미혼이지만,조선시대에 그나이정도는 미혼일수가없는 나이대에 해당한다.


가정을 이룬 일반병사들에게는 관사라든지,군인아파트라는 그런제도가 아예없구,오로지,의무로서 가정과분리된채 변방지역에가서 군복무를하게했다.




조선시대에 가정을 남겨두고, 2년동안 홀로 변방지역으로가서 군복무 일을했던,의무군인들의
성적인문제에대하여,어떤관례를 가지구있었는지 살펴보자.


세종 18년(1436년)

세종과 함길도 감사에게내린 어명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져있다.

세종:자고로 변방에,아내없이 근무하는 병사들을위하여,창기를두어 위무하게하는것은 그유래가
      오래되었다
.병사들이 고생이많은데,창기나,기녀를두어 사졸들을 위하는것이 이치에 합당하다.



우리가 알구있는 세종대왕의 모습과는 일견다른모습으로 보일지두모르겠다.군인들이있는곳에
함께하는 창녀의 문제는,오늘날에만 존재하구있는 모습이아니라,6백년이넘는 세종대왕 당시의
조선시대상을 살펴보면,공자왈 맹자왈하며,남녀 7세부동석이라구할만큼,오늘날보다는 100배
더 엄격한 도덕룰을 강조했던 시대였음에두 세종이,저러한 전지를 내릴정도인것을보면,
이중적 도덕률이 엄격했던 조선시대조차두,도덕성을 눈감구 예외로해주는 지역이있었음을 알수있다.



조선시대에는,관리뿐만아니라,일반서민들의 삶속에서두,결혼하지않은이성간의 관계에대하여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였구,그것을 어겼을때의 처벌또한 아주엄했다.일반관청에 소속된 관기라구
할지라두,관리와 관기의 관계까지 간통으로 처벌받은 기록들이 많이있다.조선시대상황에서,배우자가있었다 하더라두, 변방의 사졸들에게,창녀나 기녀를두어,위무하도록하는것이 오래된유래구,그렇게하도록 왕명을 내리는걸보면,공자왈,맹자왈을 부르짓으며,엄격한 도덕사회를 강조했던 그러한 시대상황에서조차,군인과 창녀사이의 관계는 예외로해주었다는것은 특이한 도덕률이라구볼수있다.


오엑스퀴즈로, 조선시대에 간통죄를 예외로해주는신분과지역이 있었다,맞으면 0,틀리면 x
정답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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