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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년 9월 가을 고구려 양원왕때,투르크 기마병인 골촐싹이 이끄는 3만의 돌궐군이 고구려을 침략하여,신성을 공략하고 백암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고흘:대왕마마,돌궐이 우리나라의 백암성을 포위하여 공격중입니다.


양원왕:돌궐이? 우리나라에 무슨 원한이있다고 돌궐이 쳐들어왔다는 말이냐


고흘:중국의 남북조상황과 관련되어 쳐들어온것 같습니다.



양원왕:장군 고흘은 지금즉시 고구려 정예기병 1만을 이끌고가서 백암성을 원조하고,돌궐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온 이유를 들어보고,대처하도록 하시오.고흘:알겠습니다.

고흘은 신속하게 백암성으로 진군하여 백암성의 들판에서 돌궐의 적장 골촐싹을 마주하게된다.

고흘:돌궐과 우리나라는 원수진일이 없는데,어찌하여 우리나라를 공격하는가?

골촐싹:우리 돌궐은 요즘 서위의 공격에 시달려서,배가고프다,우리 돌궐도 먹고살기위해서는 고구려를 공격할수밖에 없다,얼른 항복해라

고흘:서위는 무섭고,고구려는 만만하다 이거구나,오늘 고구려가 어떤지 직접 경험해보거라,한놈도 살려두지않겠다.

골촐싹:짖는 개치고,무는개는 못봤다,이리하여 돌궐기마병과 고구려정예기병이 백암성 들판에서 일대전투가 벌어졌는데 결과는 돌궐군이 대패했고,고구려의 고흘장군은 싸움에서 사로잡힌 돌궐군 1천명또한 모두 수급을 베어,한놈도 살려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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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국제상황를 살펴보면,중국은 분열되어 강남을 근거지로하는 남조화북을 근거지로하는 북조의 왕조가 나뉘어 대립되어왔는데,고구려는 북조와 우호친선관계를 유지하여 북조의 왕조인 북위와 동맹관계를 맺었고 북위는 다시 서위동위로 나뉘어 존재하다가 북주북제로 이어지게된다.

백제는 이와는 정반대로 남조의 왕조(송,제,양,진)와 우호친선관계를 맺으며 고구려의 외교전략에 맞써고있었다.고구려는 북위와 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했는데,북위가 분열하여 서위와 동위왕조로 갈라지자,동위와는 친선을 맺고,서위와는 대립관계를 유지했는데,훗날 동위는 북제왕조로 이어지고,서위왕조는 북주왕조이어졌는데 북주가 훗날 중국을 통일하여 수나라가되게된다.

같은 북위의 갈래에서 나온 왕조였지만 동위와 북제와는 우호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서위와 북주와는 대립했기에 고구려에대하여 서위-북주를 모태국가로하는 수나라로서는 눈에 가시거리 일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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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년 고구려에게 얻어터진 돌궐은 그이후,세력이 수.당의 견제와 공격에의하여 급속히 약화되어가다가,657년에 망하게된다.돌궐이 망한후 11년이지난 668년,돌궐은 또다시 당나라의 고구려공격의 선봉에서서 고구려를 패망시키는데 앞장서게되어,고구려가 망하게된다,

돌궐은 고구려에게 이처럼 병도 주었지만 약도 주는 역할을 하게되는데,돌궐인 골출록이 당나라에 대항하여 7세기말 돌궐국가를 재건시키는데,이러한 국제질서환경이 고구려가 망한지 30년이 채되지않은,698년 대조영이 고구려를 이어받은 국가인 발해를 세울수있도록 유리한 환경를 제공하는 역할을 돌궐이 조성해주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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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나는 조선의 국모이니라"라고 외쳤다는 고종의 왕비 민황후는 과연 그러한 말과 자세를 보여줬을까를 아무리 역사기록을 찾아보아도 보이지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로 궁녀의 복장을하여,구차하게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려고했을뿐이었다.


조선의 민황후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행동을했던 대비되는 왕비가 고려에 있었으니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14세기 후반에 머리에 빨간두건을쓴 도적의 무리였던 홍건적이 자주 고려를 침범하여,우리나의 백성들 괴롭히곤하였다.훗날 이 도적의 무리의 괴수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데,근본부터가 도적의 무리들이였기에 허약한 근본토대를가진 왕조일수밖에없었다.


1363년 고려 공민왕의 나이 33세가 되던해,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의 논공행상에 불만을품은 김용이라는자가,자객단을 이끌고 흥왕사의 행궁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나라일을 보던 공민왕을 암살하려고하였다.


김용의 자객단이 흥왕사로 급시에 습격을가하자,공민왕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는데,공민왕의 아내였던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공민왕을  어머니의 방에 왕을 숨기고,그문앞에 서서 자객단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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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단의 무리가 칼을 휘두르며 방문앞에 이르러 말하길 왕은 어디에있는가? 왕비가 홀로 나아가 외치길"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방안에 들어가려거든 먼저 나를치고 들어가라"하메,무리들이 두려워 태후의 방안에 들어갈수없었다.


김용의 자객단은 나중에 최영의 정예군에의하여 처단되어 반란은 진압되게되고 훗날 아내의 도움으로,자신의 목숨을 구한 공민왕은 흥왕사의 변이 일어난후 2년이 지난 35세되던해 눈이 소복히 많이 내린 2월 추운겨운날에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죽자,


훗날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남긴 조의문에 그때의 상황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는데 자신을 남기고 떠나버린 아내를향한 사랑과 비통한심정을 느낄수가있다."나에게있어 아내보다 중한것이 없었고,흥왕사의 변이 일어나메,나의 몸의 지척에서 적을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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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사후  공민왕은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은왕비를 살아있는사람처럼대하며,식사할때마다 자신의 음식과 왕비의음식을 같이차려  함께 대화를하며 음식을먹었고,일체의 고기를 먹지않았을뿐아니라,나라를 다스리는 일조차 관심을 끊어버려,국제정세에 밝아 요동을 정벌하며 호기롭고,영민했던 공민왕은 이후 360도 다른 무기력한 왕의 모습을 보이며,슬픔속에서 살아가다 결국 신하의 손에의하여 죽음을 당하게된다.


훗날 조선을 개국한 반역의무리들이 공민왕의 후손인 우왕과창왕의 씨를 가짜라고하며,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위하여 역사를 왜곡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보아도 공민왕은 35세에 이미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하여,아이를 낳다가 죽었던걸보면,공민왕의 남성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했음을 알수있고,공민왕 스스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했던 우왕을 훗날 반역의 무리가 "아니다"라고 기록것은 반역을 정당화하기위한 역사조작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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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역사에서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자객단앞에서도 당당히 홀로맞선 여인이었지만,궁중에서의 일상생활모습은 내성적이고,여린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전해지는데,사랑앞에서는 한발자국도 물러 서지않았다.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사랑을보면,남녀간의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라는 말이 사실인거같다.


드라마나 사극일지라도,역사를 조작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것은 반역의무리들이 늘행해왔던 목적을위하여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르지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반만년역사에 왕비로서,노국공주가 행하였던 행동은,실존하는 유일한 기록이며,"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라는 그러한 비장미와 당당함을 보여줬던 인물을 찾는다면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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