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등의 정사에 나오는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서 왜곡된 부분들이 있는데 왜이러한 잘못된 전쟁사를 정사에 기록하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먼저 고려 목종에 관련된 기록에있어 목종은 효자인것은 분명하나 그의 모후 천추태후의 신분은 고려건국 태조인 왕건의 손녀라는 것인데 여기서 천추태후의 집안은 고려의 호족정치에있어 태조왕건이 왕권을 강화하게해주는 근본토대를 만든 집안이라는 것이다.

고려의 4대 광종까지 왕건의 아들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5대부터 왕건의 손자들이 왕위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역사적으로 희귀한 사례가 발생하는데 5대  경종의 아내들로 천추태후의 자매가 연이어 왕비에 오르게된다.

천추태후는 경종의 장남인 목종을 낳았고 여동생인 헌정황후는 경종의 사후 왕씨 종친과 불륜으로 사통하여 훗날 대량원군 왕손으로 불리는 현종을 낳았는데 5대 경종이 죽으면 당연히 천추태후의 장남이 왕위를 이어야하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천추태후와 헌정황후의 친오빠가 6대 성종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려초기 왕씨의 왕권강화에 있어 천추태후와 헌정황후 그리고 성종은 같은 형제자매로 고려 왕족이 500년을 집권하게하는 궁극의 토대인 집안을 만들었다고 할수가 있다.

한국 왕조역사에 이러한 자매의 아들들이 차례로 연이어 왕위로 올라간 사례가 없고 고려의 목종과 현종이 유일한 사례였기에 희귀한 왕위계승이었다고 할수가 있었다.

고려사등 정사의 기록에등으로 오늘날에는 고려의 7대인 목종에 이어 등극한  8대인 현종을 세종대왕에 비교하는데 현종이 군주로써 명군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거란과의 전쟁사에있어서는 왜곡되어 기록되어지는 구절들이 있음을 살펴볼수가 있다.

천추태후는 자신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인 현종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인데, 천추태후 입장에서는 여동생이 낳은 현종은 경종의 아내였던 자신과 자신의 여동생의 정통성에 있어 자신의 아들인 목종이 후사가 없다면 오히려 불륜으로 낳은 여동생의 아들인 현종보다 자신도  김치양과의 사이에 불륜으로 낳았지만 자신의 아들이 오히려 목종이 후사로 맞다고 생각한게 틀렸다고 볼수가 없었다.

왕조시대에 선대왕의 아내였던 왕비들이 불륜으로 천추태후와 헌정황후 자매가 둘다 아들을 낳았는데 헌정황후는 같은 왕씨와 불륜을 해서 낳았다는 것이고 천추태후는 김씨와 불륜을 해서 낳았다는 성씨 차이일뿐 서열상으로 천추태후가 당대 목종의 어머니이고 여동생보다는 그 위치가 높았기에 자신의 아들인 목종의 후사가 없다면 불륜일지라도 자신이 낳은 또다른 아들을 올리려고 했던 것은 통일신라대 여왕의 전통인 모계가 강하게 이어진 고려초기에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신라가 여왕이 등극하고 후대에 왕위가 이어진다면 여왕의 남편이 조씨이든 윤씨이든 김씨왕조로 여겨져 이어졌는데 신라와 마찬가지로 고려초기인 모계영향력이 강했던 시기에 천추태후의 생각은 오늘날에서  이해가 안될지 모르지만 이상할것도 없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강조가 왜 목종은 죽이고 그의 모후인 천추태후는 죽이지 않고 목종사후 21년을 친정인 황보씨가에서  장수하다 편하게 자연사하게 나두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있는데  

천추태후는 왕건의 친손녀이고 고려의 왕씨의 토대인 강건한 호족의 군사력을 보유한 집안의 장녀로 친할아버지가 태조왕건, 친오빠가 성종이었고 ,당대 목종의 어머니였고, 후대 현종의 큰이모였는데 왕씨 왕족을 절멸하여 역성혁명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여자를 죽여서는 고려가 유지될수가 없는 어마어마한 왕씨왕족을 대표하는 기둥이기에 누가 그것을 뽑을수 있는가 말이다.

어째든 배경은 이러한 시대였는데 현종대에 거란과의 전쟁이 발생하게되는 여기서 서희의 강동6주니 강감찬의 귀주대첩등이 고려사의 정사기록등에 나오게 되는데 문제는 그러한 기록들을 읽다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있기에 이부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의문점으로 들어가보면 귀주대첩에 있어 승리의 결정적 요인중 하나로 기록된 병마판관이 이끌고 거란의 후방을 공격한 고려의 기병 1만의 존재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다. 

도대체 이해가 할수없는게 고려라면 대장군,장군도 아니고 조선이라면 관찰사 도절제사가아닌 판관이라는 오늘날의 공무원 급수로보면 4급에 해당하는 판관벼슬이 오늘날의 군대로보면 대위나 소령쯤에 해당하는 중대장벼슬을 가진 사람이 고려의 기병 1만명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었다는데 이게 말이 안된다.

오늘날의 군대의 직제를 보더라도 1만명의 직속군을 지휘하려는 최소한 별을단 장성급이지 중대장급이 그러한 부대를 이끌고 거란의 후방을 쳤다는게 개소리라는 것이다. 더욱더 믿을수 없는 부분이 우리나라가 제주도에 말의 방목장을 두어 대량의 말을 기를수 있었던 시기가 몽골의 원나라시기이기에 그보다 한참 앞선 거란과의 전투시에 1만의 넘는 말을 구하기 힘들었을뿐아니라 그렇게 귀한 말을 타고 이끄는 부대의 지휘관을 대장군도 아니고 현종이 판관벼슬에게 맡겨서 출전시킨게 맞는냐 하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적 기술이 문제점을 풀려면 거란의 침입루트나 후에 병자호란,임진왜란등의 전투에서 실마리를 얻을수가 있다. 먼저 왜 북방이민족들의 공격루트는 항상 예외없이 압록강지경만으로 한반도로 진입했느냐이다.

우리나라는 압록강이 아니라 백두산의 두만강지경도 있는데 왜 왜 왜 두만강 지경으로는 한반도의 진입공격루트로 거란은 한번도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는가 하는점이다.

여기에 고려사의 정사에 기록된 귀주대첩의 왜곡된 거란과의 전쟁사를 풀열쇠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귀주대첩이 한반도를 지킨 결사의 전투이고 한민족의 자랑인 역사적 대첩은 분명하다. 다만 이과정에 있어 승리의 결정적 요인중 하나로 지목된 고려기병 1만의 정체이다.

소배압의 10만 거란군은 조선의 병자호란시 청나라의 신속기병군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만들었던  방식의 당대최강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전부가 기병대였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전투사는 공성전에 특화되어 물리치는 전투민족이지 드넓은 평야에서 대규모 전투에서 이기는 고대전쟁사는 단한번도 존재하지 않았고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유일하다. 유일하다면 뭔가 기존과는 전혀다른 것이 작동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거란기병대의 후방을 때렸다는 고려 기병의 존재였다.

실제 역사속에 있었던 그 기병대의 비밀을 풀어보면 거란과 고려의 귀주대첩시 거란의 후방을 공격한 기병대의 정체는 고구려왕조를 함께 이루었던 숙신또는 말갈로 불리던 백두산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쫄따구 벼슬인 병마판관이 아닌 흑수말갈족 기병이었다는 것이다.

강감찬장군의 이끌었던 보병 20만이 거란의 소배압의 10만 기병대에 넓은 평야에서 그대로 전투가 지속되었다면 우리나라가 수적으로 2배인 전력이고 말의 진로를 방해하는 검차같은 다양한 장비가 준비되어서 그랬다는 잠꼬대같은 소리해봐야 고려의 군대는 거란 기병대에 전멸을 했을것이다.

전멸하지 못하게 거란의 기병의 후방을 친 기병대의 정체는 어디서 왔는가하면 그당시 흑수말갈의 기병인 5만의 병력이 거란의 후방을 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흑수말갈 오늘날에는 여진족이라고 불리는 세력이 고려와 호흥하여 귀주대첩에서 거란을 쳤나는 것이다.

태조왕건의 반거란 정책을 시행한 중요한 요인중 하나가 거란이 고구려의 계승자인 형제국인 발해를 무도하게 멸망시켰다는 것이었는데 이때 발해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우리 한민족과 말갈에 해당하는 여진족이 민족구성으로 이루어진 국가라는 점이다.

거란과의 전쟁시 고려의 적이 거란이었지만 말갈족의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나라를 멸한 원수이기에 공통적인 적으로 대적하는데 이상할것이 전혀없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의 선조가 의주에서 조금만 더 잡으러 오면 중국으로 도망갈거같아 왜군이 더이상 진군하지 않았다고 엉터리 논리를 펴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은 

그때당시 말갈족인 여진족이 차지한 백두산주변지역은 중원을 삼킨 청나라를 세울 부족들이 막강한 기병군사력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었고 이때 일시적으로 동원가능한 말갈의 기병을 5만으로 임진왜란시 기록에 남아있는데 이들이 참전할수도 있는 상황이 될수도 있었는데 왜군은 이들과의 확전은 막대한 피해만 예상되어 더이상의 전진이 없이 후퇴하고 정유재란시에도 여진족인 만주족이 기병대가 있는 지역으로는 아예 더 북진할 생각을 하지 않게하는 요인이 되었다.

거란과의 평야에서 전투인 귀주대첩에서 거란의 후방을 격파한 기병대는 흑수말갈기병으로 이들이 역사기록에 지휘관급으로 기록되어진 성씨중에는 특이하게도 고씨인 성씨들이 많은데 이들의 정체성은 두가지부류로 자신들을 고구려의 국적으로 생각하는 말갈족과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순수 말갈족으로 구분이 되었는데 고씨들은 아마도 고구려후손들로 생각하는 말갈족계통으로 생각할수가 있는대 발해를 세운 대씨들도 비슷한 성씨들이라 할수가 있다.

거란이후 금나라가 강성해지는데 바로 이들이 고려초기 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의 막강한 기병대를 가지게하는 후원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말갈족이 우리나라와 연합하여 중원세력과 싸운 기록은 고구려와 당태종 이세민의 전투사에도 이들이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군을 공격하여 당태종이 고구려와의 전투시 포로로 잡힌 수만명의 말갈족을 생매장하거나 다죽였다라는 기록이 정사에 남아있을 정도이기에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고려나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던 발해나 말갈족은 우리나라와 외적들의 전투시에 함께싸우는 주요부족이었음 알수가 있다.

뼈아픈점은 이러한 말갈족인 만주족이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상국이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상하우위가 바뀌어 청나라가되어 우리나라와 군신의 관계를 맺게하는 삼전도의 치욕을 만들게했기에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는 국제사회의 논리를 잘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와 거란의 귀주대첩당시 거란을 전멸의 상황을 만들수있는 대적가능한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강한 기병은 판관나부랭 중대장급이 이끈것이 아니라 그당시 유일한 가능성은

백두산지역에 부족을 이루어 생활하던 말갈족인 5만 정도의 기병이 그당시 즉각적으로 응대가 가능한 병력이었다는 것이다. 거란를 멸망시키는것도 백두산지역의 말갈족인 금나라였던 것만 보아도 그당시 고대사 우리나라와 북방세력이 전투시 단골처럼 함께했던 말갈족이 귀주대첩에서는 아무런 기술이 없다는것은 누가봐도 이상한 점이고, 

고려의 태조왕건이 후백제와의 통일을 위한 일리천에서 벌어진 최대의 전투에서도 최대한 끌어모은 병력이 정사에서 8만정도라고 기술한 경우도 있는데 실제로는 최대한 끌어모은 추정치가  3만정도였는데 그중에 고려왕건이 후백제를 쳐부술때 흑수말갈의 기병대 참가병력을 1만명정도로 기록하고 있는데 

내전에도 고려초기 흑수말갈이 기병을 1만을 지원해줄 정도면 국제전이 발생했을때 백두산지역에 비산해서 살아가던 흑수말갈부족의 기병대가 얼마나 더 지원이 가능한 상태였는지는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수가 있고 고려가 부족한 실제로 강한 기병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하는것이 틀리지 않다.

좀더 정확하게 살펴보면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에서 거란의 10만기병대를 후방에서 기습할수있고 맞설수있는 그당시 유일한 기병대는 백두산지역의 흑수말갈이 보유한 기병대이고 이들이 고씨성을 가진 예가라는 지휘관에의하여 참가하여 고려군과함께 거란기병대를 후방을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렇게 역사의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것이 엉터리 정사기록보다 더 맞고 왜 이부분을 역사에서는 흑수말갈의 지원을 숨기고 밥풀때기 3개를 단 중대장급인 병마판관이 1만의 기병을 지휘하여 쳤다는 황당무계한 기록을 남겨나는 것이고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이 고대나 현대의 군대계급체나 지휘체계만보더라도 뭔가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는것도 더 희귀하다 할수가 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발해가 갑자기 무너진 이유를 백두산화산의 영향이었다든지 하는 황당무계한 논리들이 등장하지만,발해의 멸망은 내부의 쿠테타로 발생하였기에,밖으로의 외적영향을

찾을래야 찾을수없고,외적인 영향을 설명할길이 없자 갑자기 멸망되어진 이유를 자연재해로 인한것이다라는 비논리적 개념을 주장하기도한다.


발해를 이해하기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고구려를 이해해야하고,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이해하기위해서는 발해에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한다.


동이족의 기원이되는 고조선의 영역은 오늘날의 한반도내에 한정 되어진것이 아니라 영토의 크기가 한반도와 대륙의 벌판에 이어져 있었기에 그곳에 사는 부족들이 모두 한민족이지는 않았고,광대한 영토크기상 여러부족이 존재 할수밖에 없었다.

고조선.고구려라는 나라의 주류는 한민족이고,그속에 포함되어진 부족들이 거란(몽골),말갈(여진)이 있었다.
가족으로보면 주체적 권리는 한민족인 고구려인이고,나라의 구성에서 서자쯤되는 부족이 거란과 말갈이었다.

고구려인과 거란,말갈인은 서로 같지 않은 민족이지만,국가구성에있어서는 주류냐 비주류로 나뉘어진 구성원들에 속했다.발해는 스스로의 내분에의하여 망했다는것은 거란과 고려의 역사기록을 통하여 알수가있는데,

고려태조 왕건이 거란에대한 정책과 기록,거란에대한 중국의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거란은 "발해의 풍습과 제도를 따랐다"라고 되어있고,고려태조 왕건이 거란의 사신 30명을 섬으로 유배시켜 죽게하고,선물로 바친 낙타 50마리를 아사시켰던 이유를 말하는데,



"발해와 거란은 서로가 연합하여 한마음이었는데 이제 갑자기 배신을 때리고,발해를 멸했으니 무도하다"라고 하였다.이말을 이해하려면 훗날 거란이 고려를 침공했을때,서희의 담판에서 거란은 고구려를 발해가 계승했고,그것을 자신들이 다시 계승했으니 그영토에 속한 땅은 자신들이 땅이다고 하였는데,

고려는 자신들이 오히려 고구려의 계승국이다라고 하였는데,거란이 이러한 주장에대하여 고려가 고구려인의 적장자라는데 부정을 하지않고 물러갔다는 점이다.

고려왕건은 고구려인의 적장자를 고구려인의 나라인 발해와 고려로 보았고,방계로서 거란과 말갈이 존재하는데,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고구려가 할아버지라면,발해와 고려는 아들,거란과 말갈은 손자쯤되는 상속서열을 가지고 있었는데,손자가 자신의 부모를 친것을 무도한짓이라고 꾸짓고있는것이다.



거란은 발해의 부여부에 위치하고있음을 보거나,거란이 세운 요나라 태조가 발해의 풍습과제도를 그대로 따라했다는 역사기록을 봤을때 거란은 오늘날에보면 몽골족의 한부류였지만,고구려인들이 대륙벌판에 근거하여 나라를 세울당시,고조선을 이루던 동이족의 한갈래였고,그중에서 부여족과 관련이 되어져있다는것이고,

고구려의 뿌리와 오늘날 한민족이 뿌리가 부여족에서 나왔음을 보았을때,부여라는 갈래는 거란,고구려인,말갈을 다포함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것을 알수가 있다.발해의 지방제도중에 부여부는 거란을 말하는 의미와 동격인데,거란이 부여와 관계가 없다면 통솔부락을 부여부로 명칭을 하지 않았을것이다.

발해와 거란에있어 공통적으로 주목해야할 단어가 迭(질)이라는 단어인데,발해관리들의 품계를 나누는 단위기도했지만,거란의 8부족의 명칭중에 하나의 부족에도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한민족의 뿌리인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묘비를 세우거나 기록할때 부여라는 단어는 빠지면 안될 신성시되는 계승자가 될려면 부여라는 말은 꼭 집어넣어야할 명칭이었음을 보았을때,발해의 제도에서 거란이 부여부의 중심이라면,거란도 고구려인들과 마찬가지로 부여에대한 일정지분을 계승한다는 의식이 분명하게 존재했음을 알수가있다.

결론을 내자면,고려가 고구려의 적장자라고했을때,거란도 부정하지 못했고,발해의땅이 적장자는 고구려인이었기에,발해를 내부적으로 평정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세운 요나라도 자신들도 고구려의 계승자를 주장했지만,정확하게 말하면 발해의 계승자임을 주장했지만,그보다 앞선 적장자인 고구려인들이 세운국가인 고려에게있어서 마땅히 부정할 명분이 존재할수 없었다.

몽골이나 여진이 훗날 중국대륙을 집어삼키지만,부여족 고구려인의 본류인 한민족의 국가에 대하여는 왕을 잡아 국가를 패망시킬수 있는 최후의 순간에서도 그렇게하지 않은것은 뭔지모를 동질감,형제감등 오늘날 일본천황의 가계를 막부장군들이 없애버리지않고 형식적으로라도 유지시키려 했던 관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한민족의 고구려인들은 마지막까지 지켜져야할 그 무엇인가였다.그만큼 동아시아의 동이족에있어서 천년왕국 고구려가 차지하고있던 개념은 동이족의 관념속에 뿌리 깊었다는 점이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에게는 무예에가 뛰어난 광개토태왕를 닮은 아들들이 있었으니 발해2대왕이되는 무왕 대무예와 그의 친동생 대문예다.

대조영이죽고 2대 황제로 즉위한 대무예(676-737)는 국가의 튼튼한 기틀을 마련한 조선의 태종처럼,국내외의 상황들을 정리해야할 임무가 주어질수밖에 없었다.

당나라의 현종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로 영속되는것을 마땅치않게 생각했으며,신라의 성덕왕또한 고구려의 영토의 주인을 자처하면 발해와 대립하며 영토를 확장하는데 노력하고있었다.


726년 당나라는 백두산과 연해주부근에 근거를삶아 세력권을 형성했던 흑수말갈족을 이용하여 발해의 세력이 팽창되는것을 견제하고,아울러 옛고구려영토의 일부라도 간접적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였다.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발해의 무왕은 자신의 대에서 고구려 패망의 원흉이며,한민족의 천년원수인 당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계획한다.




먼저 내정의 안정을위하여 당나라와 손을 잡은 흑수말갈을 제압하기위하여,황제의 군령권을 발령하여 동생인 대문예를 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정예기병 5만의 군사로 흑수말갈을  제압하라고 하였다.이에 대문예가 상소하여 말하길"소신이 당나라에 숙위하며 당나라의 국력과 나날이 발전되는 정세를 그동안 보아왔는데,흑수말갈과의 전초전으로 당나라와 대립하여 전쟁를하려는것은 발해의 국체를 어렵게 할수있기에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이에

인안황제인 무제가 꾸짓어 가로대"너는 당나라의 강함만을 두려워하고,고구려의 혼은 잊었으냐?,평화는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가 있을때 지킬수 있는것이다.여기서 굴복하기 시작한다면 후대의 기틀을 기약할수없음을 알고 출전하라."대문예는 내키지않는 심정으로 흑수말갈의 제압을위하여 백두산쪽으로 나아갔다.



오늘날에 보았을때 이 흑수말갈은 중국대륙을 삼킨 건주여진이 일족으로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갈래이며 조선 인조임금의 대갈박을 땅에 두드리게했던 삼전도의 주인공 청태종의 속한 갈래이기도 하다.

흑수말갈의 경계선에 다달을쯤에 다시 대문예는 전령을 통하여 상소를 올리며 회군하기를 청한다.이에 분노한 무제는 즉시 군사령관을 대일하로 바꾸고 임지로 나아가게하고,대문예는 궁성으로 돌아오라는 소환명령을 하게된다.이에 대문예는 돌아가면 황제의 군령을 어긴죄를 지게될까 두려워 당나라로 투항하여 도망을갔다.

나라를 끝까지 지켜야할 지도층 장수가 먼저 당나라에 투항해버리는 어이없는 상황에서 흑수말갈과의 싸움은 싸워보기도전에 무너져내리게된다.패전을 접한 무제는 당나라에대하여 친동생인 대문예의 소환을 요구하였으나,당나라현종은 오히려 대문예에 당나라 대장군의 벼슬을주며 우대하였다.

이에 발해황제 대무예는 신하들을 모아두고,발해국 국체의 안위를 모두걸고,당나라와일전을 할 뜻을 비추며"우리선조의 나라 고구려가 망할때 형제들의 대립을 이용하였듯이,오늘날에 와서도 똑같은 정책으로 우리발해를 망하게하려는 의도를 숨지지 않고 있소,이에 이후로 당나라가 발해를 건드릴 생각조차하지 못하도록 전멸적 보복을 가하도록 하려고 하며,이싸움에 유불리논하면 개전을 머뭇거리는 신하들은 짐에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겠으며,2년내에 정벌준비를 완료하도록 하시오"

발해국의 문무신하들은 당나라의 정세염탐과 주변국들과 전략적 선택을 추진하게된다.이때당시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하여 굴종의 평화를 얻으려는 세력과 투쟁하려는 세력간의 타툼속에있었는데 발해는 강경파의 우두머리인 가돌한을 적극지원하여 당나라의 복속을 받아드리려는 온건파 이소고를 처단하게한다(730),


거란과 돌궐세력들을 발해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만들기에 2여년을 공을드린 732년 9월,무제는 장문휴(693-749)장군을 수군원수로 삼아  발해정예수군 2만명과 함께,당나라 동북아 수륙합동군기지인 등주(산동성 봉래현=중국 칭다오=청도)을 선제공격하도록 명령하고,아울러 동시에 무제는 직접 수륙합동연합총사령관의 직책을 가지고,발해 고구려기병 5만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진격해 드러간다.

먼저 선제공격 별동임무를 맡은 장문휴장군이 이끄는 발해수군은 압록강하구를 출발하여 등주에 도착하여
상륙작전을 개시하자,등주에는 당나라군 10여만명이 지키고있었으나,기습적인 공격에 당나라군은 사분오열 흩어져 도망가기에 바빴고,등주자사 위준또한 대적하여 전열을 정비하여 싸워보지도못하고,목이 달아났다.

등주를 점령한 장문휴장군이하 병사들은 등주에 살아있는 모든것과 건물들을 완전히 전멸시켜 이후 등주가 복구되는데 당나라의 국고의 대부분이 소비될 정도로 참혹했다.당나라 현종은 이러한 전황를 전했듣고 즉시 장군 개복신으로하여금 지원군을 이끌고 등주로 내려보냈지만,개복신이 도착했을때에는 상황이 종료되고 모든것이 폐허가 된 이후였다.

육로쪽으로는 대무예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북경쪽으로 진격해 들어온다는 전령을 들은 현종은 대문예를 사령관으로여 2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가서 대적하도록하고,급히 신라의 성덕왕에게 도움을 청하여,발해의 남쪽방향을 공격해주도록 요청하자,성덕왕은 이기회를 이용하여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에대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달라는 요구조건을 선행하자,당나라현종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요구조건을 들어주었다.



이에 성덕왕은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에게 3만의 군사를 주며 밀명하길"발해국의 무왕은 선조인 광개토태왕의 환생이라고 할만큼 군신으로 불리는 인물이고,서로말이 통하는 백성들인 발해와 우리는 같은 뿌리이기에,싸울일이 생기면 피하고,피할수없는 상황이면 후퇴하여 도망해도 가하니 공격하는 척만하도록 하라."

대문예와 출전하는 당나라군사들은 발해국의 무제가 직접 친정하여 공격한다는 소리를 듣고,싸우기도전에 이미 사기가 땅에 떨어져,발해국의 군사들을 만나기도전에 80-90%가 추위에 죽거나,도망을 가버려,대문예는 싸워보기전에 철군할수 밖에 없었다.

김윤중의 이끄는 신라군또한 당나라군의 전세를 이제나 저제나 지켜만보다가,후퇴했다는 전황을 듣자마자,행군방향을 바꿔 신라로 돌아가 버렸다.발해황제 대무예가 이끄는 육로군은 북경근방까지 진격하여 정복한후,이후로 발해가 멸당할때까지 발해영토로 지배하였고,당나라는 이후로는 발해에대하여,군사적공격을 할생각을 전혀 하지못했음을 보았을대,이때 무제의 공격의 얼마나 공포스럽고 참혹했는지 미루어 짐작할수있고,

춘추필법으로 유명한 중국의 사서들이 발해 대무예의 공격과 당나라의 패전에대하여 숨김없이 기록해놓은것을보면 그당시 당나라역사에있어 반드시 기록되어져야할 정도로 충격이었음을 알수가 있다.당나라 역사서들이 패전했을때 승전한 상대국 장수의 이름을 기록치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발해의 수군원수였던 장문휴장군에대하여는 정확하게 이름을 전하는것을 봤을때,우리선조인 장문휴장군에대한 연구와 관심이 더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왕건의 훈요 10조에는 전라도지역은 배역의 땅이니 인재라도 등용하지 말라는 조항이 들어있다.

이러한 훈요 10조에대하여 위조설이나 첨삭했다는 의견등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지만,이러한 구절은 우리나라의 역사, 일부의 미스테리를 숨겨 놓았기때문이고,훈요십조의 내용은 위조나 첨삭된 구절이 아니라 진실한 구절이었으며,


그당시 동족인 발해를 멸하는 거란에대하여 극한 분노를 표현했고 배척했던 고려인의 모습을보면 왜 이러한 구절이 훈요10조로 후대에 널리 전하라고했는지 충분히 이해할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로 축소하여 삼국의 시대로 이해하고 은폐하려했던되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오늘날의 전라도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다스리던 백제지역이 아니었고,백제의 주류문화는 충청도이고,전라도는 우리민족이 입장에서 볼때는 이민족이 한민족을 협박하고 멸하려는 세력의 주거점지역이었다.

역사속에서는 이들에관한 기록이 역사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충청도와 아울러 백제의 나라였다고 두리뭉실 역사를 만들었기때문에,이웃나라의 역사기록이나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속에 틈틈이 전라도지역에 존재했던 주체세력에대한 삼국시대와는 동떨어진 비상식적인 기록들이 나타나고있다.

이러한 전라도지역에 지배 주체세력이 이룬 국가가 백제가 아니라면 누구였는가가 문제인데,결론적으로보면 이민족중에 유물이나 유골등으로 봤을때 북방계통의 민족이아니라,일본계통의 민족이었음을 알수가 있다.전라도지역에 살았던 주체세력이나 주민들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입장에서 봤을때 멸해야할 대상이고,정복해야할 대상이었다.이러한 역사적사실을 후삼국을 통일했던 고려의 왕건이나 그당시 사람들은 잘알고있었고,민중의 밑바탕에 그러한 역사의식이 존재하고있었기에,전라도지역의 사람은 정부관리로 중용하지말라는 훈요10조구절이 들어있게 되었고 역사속에서 전해졌다고 할수가있다.

백제와 전라도의 관계는 정복과 멸해야할 대상으로 규정했는데,역사적으로보면,백제는 점차적으로 전라도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정복하고 멸하면서 확장되어갔는데,이러한 전라도지역은 백제만 정복전쟁을 한것이 아니라,고구려나 신라또한 이지역에대한 정복을 꾸준히 진행하였다.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왜라는 세력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국경과 인접했음을 알수가있는데,이러한 구절은 왜라는 세력이 일본열도에있는 왜라는 나라와 혼동하기때문에 생기는것이고,한반도내에 고구려,백제,신라와 국경을 맞대는 왜라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세력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에있어 멸하고 정복해야할 대상이었으며,오늘날 그지역이 어디였는가하면 전라도지역이다.오늘날 고구려의 지배지역을 경상도는 신라이고,전라도는 백제가 지배했던 지역이라는식으로 뚜렷하게 구별하여 표시하는데,사실은 지금의 전라도지방에는 고구려가 정복하고 지배했던 고구려지역도 존재하고있었고.마찬가지로 신라지역이라고 표시된곳 또한 고구려가 정복하고 지배했던 고구려지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영향을 미치던 지역은 한강이북지역만이 아니라,남으로는 제주도까지 그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삼국사기 문자명왕 13년 4월의 기록에는
특이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고구려 사신이 위나라에 가서 나누는 대화가 기록되어있다.

고구려 문자명왕 13년은 서기 504년이기에 그시기에 涉羅爲百濟所幷:섭라를 백제가 병합하였는데,이것때문에 섭라에서 생산되는 옥이라는 특산품을 바칠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섭라는 제주도를 말하고,섭라가 백제에 복속되었을때는 동성왕 20년 서기 498년이었는데

복속이라는 말은 공납과 조세를 바친다는 의미였고,이말은 그전까지는 섭라는 고구려에 공납과 조세를 바치고있었는데,중간에 백제가 가로채서 지금은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전복껍데기속에 들어있는 옥이라는 제품을 바칠수가 없다고 생각할수가 있다.

이런의미가 아니라면,고구려,백제,신라등 모든 국가는 서로 국가간의 교역을 하였는데,그전에는 구했는데 섭라가 백제에 복속되어 제품을 구할수가 없어서 바칠수가 없다는것은 비상식적이다.이러한것을 보았을때,충청도지역을 제외한 남쪽지역은 무주공산이었고 상황에따라 고구려,신라,백제에의하여 정복되거나 멸하게되었다고 볼수있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