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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와 첩의 차이에대하여,한자로 처(妻)는 어려움이나 좋은일등을 모두 함께처리한다는 뜻을 가지고있고,

첩(妾)은 의미그대로 시중들기위해서 서있는 여자를 의미한다.

시중하기위해서 상시대기한다는 의미는 분명한 의미가 첩은 단지 성교의 대상일뿐이고 집안일이나 가족관계상에서 배제됨을 의미하는 한자단어이다.


이와같은 단어상의 구별뿐아니라 처와첩의 자손은 구별하여 조선시대에서 엄격한 적서의 차별을 법률로써 규정하여 불이익을 받게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보통은 첩이었다가 처가 될수있는 경우가 전혀 없었지만 간혹 예외적인 경우가 존재하여 첩도 처가 될수가있었는데,그길은 바로 처가 자식이없고 첩만이 아들을 낳았을 경우이다.신분제사회에서 사대부집안 여자들에게 적용된 차별이 처첩관계라면 왕의 여자에게있어 적용된차별은 왕비와 후궁의 관계이다.후궁도 후비가 될수가있는경우가 있는데,왕비가  아들이없고  후궁이 아들을 낳았을 경우이다.후처나 후비는 정식처로 첩의 신분이아니기에 그의미는 첩과는 달랐다.

신분제 사회상에서 첩이 처가 될수있는 유일한 가망성이 있는 신분의 로또는 아들을 낳는것이었다.예를 들어살펴보면 1466년 세조임금시절,중추원부사 김형은 자식을 낳지못하는 민씨와 두아들을 낳은 도씨 두여인을 함께 데리고 살았었는데 김형이죽자,도씨의 아들중 김견이 자신의 어머니는 첩이아니라 처의 신분임을 확인해달라고 세조에게 상소를 하였다.

이에 세조가 신하들의 서로다른 의견을 취합하여 내린결론은 도씨는 먼저 결혼한 민씨와 같이 살았기에 나중에 들어온 도씨는 첩이 분명하나,민씨가 자손이 없으므로, 아들을 낳은 도씨가 후처로서의 지위를 갖는것이 합당하다하였다.이러한 결론은 아들의 의미가 중요했음을 알수가있다.

오늘날에는 처의 아들이든 첩이 아들이든 상관없이 상속이나 신분에있어 똑같은 대우를 법률에의하여 받지만,신분제사회인 조선시대에서는 첩의 자식은 아예 인간의 구실을 할수없도록  법제화하였기에 처인지 첩인지의 구별은 조선시대에서는 아주중요했다.오늘날에도 처가 아닌 첩을가지는 사람들은 어떤계층의 사람들일가하고 궁금해서 포탈검색창에 첩이라고 검색해봤더니 아래와 같은 관련검색어가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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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는 입으로는 공자왈 맹자왈하면서 도덕군자인척하며 힘깨나 쓰는 사대부양반가문층의 도덕적 이중성을 가장 잘나타내는 단어가 첩이라는 단어였다.일반백성들은 처이외에 다른여자에게 관심을가지면 부인이외에 여자를 간음하였다고하여 교수형에 처했으나,왕이나 특권계급층들은 첩이나 후궁제도를 활용하여 도덕적,법률적처벌에서 예외의 특권을 향유하는 그들만은 예외였다.

오늘날에 포탈에서 첩이라고 검색했을때 관련검색어로 제시되어지는 단어들을보니,첩이라는것은 아무나 관련검색어로 붙어서 제시되는 명칭은 아닌거같고 능력있는 남자(?)를 대표하는 관련검색어인거같다는 생각이 들정도이다.실제로 그러해서 관련검색어가 된것인지,첩은 부유함을 상징해야하는것으로 규정되어서 관련검색어로 제시된것인지는 알수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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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서 인간으로서 최악의 왕을 뽑으라면 조선시대 왕인 인조이다.

인조는 왜 말년에 거이 자멸에 가까운 미친짓을하고 죽게 되었을까?
 
그 배경을 살펴보면 조소원이라는 후궁이 있음을 알수가 있는데,

태생적으로 역사의 반역정권이었던 인조의 즉위도 문제였지만 늙어서도 여색에 미친결과였다.

인조는 54살에 죽었는데 죽기4년전부터 후궁인 조소원이라는 여자에 미쳐


밤마다 "베게"사이로 나누는 대화를 통한 결과는 인간으로서는 생각할수없는 짐승의 행동만을 행하다가 죽었다.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선해지는 경우가 많은데,인조는 죽을때까지 여자에 미쳐서 폐악을 저지르다 죽었기에 인조라는 왕은  왕의대접을 해줄 가치가 전혀없는 인간이라고 볼수가있다.

인조와 조소원사이에도 딸이있었지만,인조의 후궁인 조소원이 스스로 왕위를 이을수도 없었는데,왜 소현세자일가를 저주했는지는 의문인데,그결과는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에의하여 처리가 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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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먼저 그당시 국제적인 안목을 가진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소현세자가 비록 아들이었지만 늘 불안했다.이것은 인조정권이 태생적으로 주둥아리로만 외치는 반청의 기치로 탄생되었기에,국제정세를 잘파악했던 소현세자의 행동과처신은 눈에 가시거리였을 뿐이었다.

인조는 국내의 사대부들에게 인기를 얻고 왕권을 유지할수있는 길이,주댕아리만일지라도,부모의 나라 명나라 어쩌구하는 허울데기 행동을해야함을 잘알고있었다.이것밖에는 광해군을 몰아내어 반역정권을 만들어낸 명분우위가 없었다.

이미 국제정세를 잘 파악했던 소현세자는 이러한 허울데기명분에 연연하지않았기에,인조의 마음속에는 소현세자는 아들이기 이전에,자신의 허울데기 처신을 비웃는것같고,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갈수있는 흉악한눔으로 여겨졌다.

이러한때에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소원은 인조의 마음을 가장 잘파악할수있는 총애받는 후궁이었지만,소현세자빈이었던 강씨와는 아주안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는데,이 근본에는 강씨의 일족과 조씨의 일족간에 외척들의 국가에 참여의 대립이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기에,조소원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자신의 일족이 정치참여를 탐탁치않게 생각했던 소현세자빈에대하여 안좋은 감정을 가지게되는데,조소원과 인조는 그모양새는 달랐으나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부귀영화의 지속측면에서는 서로의 대갈박이 맞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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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죽음은 인조가 독살했다,아니다가 아니라,인조가 소현세자 죽음뒤에 벌인 행동을보면 독살인지 아닌지 미루어 짐작해볼수가 있다.소현세자가 죽기전에 이미 조소원과 소현세자빈 강씨사이에는 암투가 벌어지고있었고,인조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애첩이며,후궁이었던 조소원을 편애했고,세자빈강씨가 하는일은 사사건건 미워했다.결국 인조<->소현세자,조소원<->세자빈 강씨의 대립관계에서 자신의 국제정세관을 븅신취급하는 아들인 소현세자보다 밤마다 귀에 좋은소리를하는 자신의 애첩인 조소원을 더신뢰하게되는데,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인조와 조소원은 뒷날의 문제가 발생하지않도록,철처하게 소현세자의 일가를 말살하게된다.

조소원의 계략을 받아드린 인조는 먼저,홀로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키우던 세자빈 강씨를 모시던 나인을 역모라는 누명을 씌워서 궁녀인 계환과 계옥을 잡아다 옥에서 죽여,소현세자의 죽음에대한 세자빈 강씨가 하고싶은말이나 유언등을 전혀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고립시킨후,허울데기 명분을 붙이고는 세자빈 강씨의 두 오라버니를 잡아다가,곤장을쳐 죽인다.그리고 사관과 신하의 무수한 상소를 모두 배척하고,기어이 세자빈 강씨를 사약을 먹여 죽였다.

인조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애통하고,슬프게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라고 진실로 생각했다면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인조의 친손자들이기에 원손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인조는 어찌된것인지 세자빈 강씨를 죽일때 붙인 허울데기 명분을 손자들에게도 붙여서 모두 섬으로 귀향을 보낸다.

아비가 병으로 죽으면,손자들이 불쌍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주는게 인간의 도리이며,역사상 왕권문제로 자신의 아들을 스스로 죽인 영조조차도 그 손자를 원손으로삼아 돌봤는데,인조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계속하기에 사관들이 얼마나 황당했으면,엄한 왕조의 기록물에 의문스럽다는 표현을 적어놓았는지 알수가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수없는 짓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인조를 그당시 신하들과 사관뿐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했던 청에서는 용골대를 보내어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어디있는가 묻고,소현세자의 큰아들을 청으로 데려가 양육 하겠다고한다.이러한 제의가있은후 갑자기 섬에 귀향가서 살던 소현세자의 큰아들의 죽음으로 대답이 돌아왔다.뒤이어 둘째도 죽고,뒤이어 마지막남은 아들도 남해어딘가에 유배되었다가,왕의 친손자였음에도 역사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마지막 세째도 왕의 친손자가 살아서 일가를 이루어 살았다면,당연히 역사속에 기록되어있을것인데.아무런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는것은 어릴때 이미 죽음을 당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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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자신의 친아들,며느리,손자등 모두를 죽이는데 이러한것이 51살에서 54살까지의 3년사이에 모두 이루어졌다는것이다.인조는 자신의 인생에있어 마지막 남은 3년의 삶의 기간속에 들어있던 왕권,부귀영화,후궁의 미색을 취하기 위하여 이러한짓을 태연하게 벌였다는것이다.

조소원의 종말은 인조가 54살의 나이로 죽자,뒤를 이은 효종3년 1652년에  조소원이 세자빈 강씨에게 씌웠던 역모혐의처럼 효종에의하여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잡혀 죽임을 당했을뿐만아니라,조소원의 일가친척등이 모두 잡혀죽여 패가망신 하게된다.

인조는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손자들을 모두 죽여놓고 단지 3년을 더 살았고,조소원은 스스로가 지은 악업에따라,세자빈 강씨가 죽은지 6년만에,자신뿐아니라 일가친족 모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인과응보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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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나 기타사정으로 궁궐밖에 나가살게되는 궁녀들은 비록 민가에서 산다고해도,왕의 여자들이었던 까닭에 결혼하거나,남자와같이 살수가없었다.


형식상으로는 민간인 처녀들이었기에 법으로 궁녀의 신분이었다가,민간인이되었다고 결혼하지말라는 그러한법은 없었지만,


왕가의 입장에서 왕조의 여자였던 궁녀들을 신하가 데리고산다는것은 주.종의 신분관계가 엄격한 조선유교주의사상하에는 불충의 개념이 될수밖에없었기에,나서서 결혼하려는 사람들은 존재할수가없었다.


이러한 예외를 깬 특이한 경우가 있었는데,남치원이라는 사람이다.병으로 궁궐밖을 나간 궁녀을 첩으로 맞아들여서 살고도,무사했을뿐만아니라,벼슬까지도 할수있었는데,어떠한 사연이 있었길래 감히 왕의여자를 첩으로 두고도 살아남을수있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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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의 슬하에는 배다른 형제자매가 많았다.성종의 첫째아들이 연산군이었고,배다른 둘째아들이 진성대군인 중종이었다.연산군과 진성대군의 나이차는 12살이었는데,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는 일찍죽었고 진성대군의 생모인 숙의윤씨(정현왕후)는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의원수를 갑는다고 일으킨 피바람속에서도 숨죽이며 살아남아 자신의 아들인 진성대군과 자신의 목숨을 유지할수있었다.


연산군과 진성대군의 배다른 형제자매중에 성종의 후궁인 숙의심씨의 맏딸인 경순옹주가 남치원에게 시집을갔기에 남치원은 성종의 부마이면서,연산과진성의 처남이기도했다.숙의 심씨와 훗날 중종의 어머니가되는 숙의 윤씨는 서로를 잘아는 사이의 친분을 가지고있었다.


연산군시대에도 남치원은 우대를 받았고,중종시대에도 배려를받았는데,중종은 연산군을 내쫓고 왕이된 임금이었기에,쫒겨난 왕의 측근들은 대부분 처단되기마련인데,남치원은 연산군의 배려를많이 받았는데도,중종대에 이르러도 특혜를 받는걸보면 평소처신을 잘하지 않았을까하겠지만,


남치원이라는 사람의 일상생활행동을 살펴보면,오늘날의 망나니나 조폭같은 인물이었기에,성종의 여러 부마들중 한사람인 부마라는 관점보다는 경순옹주의 어머니인 숙의심씨와 중종의 어머니인 숙의윤씨의 관계가 특별했다고 생각할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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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치원에대하여 기록된 행동들을보면,다른지방을 50명정도의 무리를 이루어 여행다니며,자신에게 잘못보이는 사람은  일부러 시비나꼬투리를 잡아 그자리에서 패거나 가둬둔다든지,승려들이 사냥하는데 방해가된다고 절간자체를 박살내버린다든지 일반사람같았으면,중한형벌을 받았을것인데,유야무야로 넘어가는 기록들뿐이다.


평소행실이 이모양이었던 남치원이 궁궐의 대비전에서 나인으로 일했던 궁녀가 병으로 민가에 나가살게되었는데,그 궁녀를 데려다 자신의 첩으로 만들어 버린일이 생기게된다.다른것은 그냥 넘어간다고해도,이것은 그냥넘어갈수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조정에서는 연일 궁녀를 데려다 첩을삼은 남치원은 불충이기에,잡아다 죽여야한다고 상소를하니,


처음에는 이복동생의 남편이였기에 생각해서 눈감아 줄려고해도 궁녀의 체계자체를 무너뜨릴수있는 행위였기에 형벌은 내려야겠고 잡아들이면,반드시 죽여야하는 불충에 해당했기에,처단해버릴까 하다가도,어제밤에 자신의 모후이면서 대비인  정현왕후가 한말이 귀가에 멤돌았다.


"성종시대,악독한 폐비윤씨의 피박속에서 그리고 연산군아래에서도 나와 숙의심씨는 서로를 도우며,이겨냈었는데 이번일은 불문하고 넘어갔으면 하네" 하지만 어머님,신하들의 상소가 너무강해서......."신하들의 말은 중요하고,내말은 암것두 아니라는 말이지,아이고 내가 지금까지 누굴믿고 모진 연산군의 핍박속에서도 살았는데,늙으면 빨리죽어야 할까보네 내말은 상관말고,신하들 말 잘듣고 잘사시게,그만 물러가게......."  어머님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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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대간들이 남치원을 잡아들여 죽이라고 탄핵했지만,중종의 입에서 나오는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불허한다,불허한다,불허한다" 결국 남치원을 유배를 시키는가싶더니,유야무야되어지게된다,중종의 생몰년은 1488-1544 이고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는1462- 1530 이기에,남치원은 중종25년 1530년까지는 중종의 어머니의 보호를 받았을것같기는 한데,남치원의 공식적인 벼슬은 중종14년 1519년이후로 사라져,생몰년을 알수가없다.


병으로 민가에나가 사는 궁녀에대하여,사람들이 남치원처럼 행동했다가는 목숨이 열개라도 부족한 왕과신하의 관계가 엄격했던 불충하면 같은형제라도 죽임을 당하는 조선시대에서 부마로서 대놓고 꺼리김없이 행동하며 살다간 인물 1위를 고른다면  남치원이다.중종과 남치원의 기록을 살펴보다보니,왕이라고할지라도,자신의 어머니가 후원하는 사람에게는 어쩔수가 없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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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을 살펴보다보면,잘알려지지않은 풍습이나,이야기들이 많다.그중에서 세종21년(1439)의 기록을보면 고구려라는 나라를 함께 구성했던,여진족의 결혼풍습에 대한기록이 보인다.


고구려시대의 결혼풍습을 배울때,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는 풍습이있다는것을 학교의 역사교육시간에 배운다.


형사취수제라는것이,형이죽으면 그아내를 동생이 아내로 맞아드리는 결혼풍습이라는것은,일반적상식으로 대부분 알고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망하구 700여년이 지난후인 세종대왕시기에,여진족의 결혼풍습에대한 조선왕조실록의기록을보니,더확장된 내용이 보였다.원문구절을 보면,"父死娶其妾, 兄亡娶其妻" 여기에 보이는 취자는 "娶=장가들 취"이기에,형이죽으면 그아내에게 장가를들고라는 의미가되는데,이풍습은 고구려시대의 형사취수제라는 말과 동의어라고볼수있다.


여진족또한 고구려라는 나라의 한백성을 이룬 구성원이기에,그들의 풍습이 고구려의 풍습이라구해도 이상할것은없다.그런데 앞구절인 "부사취기처"라는 단어이다.이풍습은 고구려의 역사를 배울때,결혼풍습으로 배운적이
없는 단어다.의미는" 아버지가 죽었을때,그첩에게 장가를들고" ,궁금증이 생기는이유가,고구려가 망한이후,700년이지난 세종조에까지도,여진족이 이러한풍습을 가지구있었다면,고구려시대에서도 이러한 결혼풍습이 행해져을거라는것은 미루어 짐작할수있다.


형사취수제는 고구려의 결혼풍습으로 기록하구,부사취기처라는 결혼풍습이있었다는것은,뭍혀버린것이아닌가 라는 생각이든다.이러한 결혼풍습은 고구려시대를 아룰러함께했던 중국의 당나라 왕조에두,그사례가 남아있다.당태종의 아들인 당고종이 아내인 측천무후는,당태종의 후궁 즉,첩이기에, 아들이 아버지의 첩에게 장가든경우이다.부사취기처라는 여진족의 결혼풍습은,고구려시대상을 고려해봤을때,고구려시대의 결혼풍습으로 존재했다구 미루어짐작해두,이상할게 전혀없다.알송달송 역사기록찾아보기는 이정도로하구,믿어서는 안될 남자의 거짓말 7가지에대하여,적구 글의 포스팅을 마무리하려구한다.


                                          믿어서는 안될 남자의 거짓말 7가지

첫번째:일이 바빠서,전화를 못받았어:숨쉴 힘만있어두 전화는 받을수있어
두번째:오빠믿지? MT가서 이야기만하자:7살만도 못한이해력을 가지구있다는것이다.
세번째:내가 다책임질게,걱정마:상대방이 허수아비를 벗어나면,보복할남자이다.
네번째:한번만용서해줘,다시는 절대 안그럴께:맹세하는 사람은,뒤통수를 꼭친다.
다섯번째:돈빌려줘,나중에 꼭갚을께:좋아하는여자에게 돈꿔달라는 남자는,인생이 마이너스이다.
여섯번째:우린 속궁합이 잘맞는것같애: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일곱번째:지금은 못해줘도,나중에 다해줄께:오늘 못해주는사람은 평생 내일이면 잘해줄께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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