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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글자인 한글은 한자어와의 구분을 위하여 쓸데기없고 불필요한 규정들을 어거지로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잘못된 한글맞춤법 규정들은 지양 되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현상을 자연스럽게 맞춤법규정을 만들어가야지,억지로 한자어의 의미를 강조하거나 구별하기위해서 만들어내는 규정들은 폐기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상생활의 표기와 동떨어지게 일부러만들어가는 한글맞춤법규정은 그렇게 만들어 규정해놓은 참여학자나 인간들만 사용하게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새배와 세베,세배,새배돈,세벳돈,세뱃돈,하나의 한글로 쉽게 통일되어 표현되어질 새배라는 단어를 한자를 의식하다보니 여러가지 혼란한 일상생활의 표현이 어려움을 만들어낸다.

새해,새배 이렇게 한글로 쉽게 설정한다면 될것을 한자어를 구별하기위해서 새해,세배이렇게 표현하는것은 잘못되었고,이러한 규정을 따를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마찬가지로 새배돈인지,새뱃돈이지하는 사이시옷의 규정또한 한글의 쓰임과는 무관한 잘못된 규정이다.한자어를 생각해서 사이시옷을 사용한다는 규정,지나가는 소대가리가웃을 규정이고,이러한 규정을 만들어낸 몇몇 사람들,그들만 그렇게 쓰도록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한글의 새라는 말은 한단어로 한자어의 다양한 의미를 하나로 표현할수있기에 새해,새배라고 규정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세배라고 특별히 구별할 필요가 없다.

순수한글을 사랑하는 입장이라면,새배라고해야하며,사이시옷규정도 폐기시켜야한다.한글사용에있어 북한의 엄격한 한글맞춤법 규정도 융통성이 없어 보이지만,우리나라의 한자를 의식한 누더기 한글맞춤법규정안도 일상생활의 표기를 혼동스럽게 유도하고있다.

한자어와 고유어가 결합되었을때 의식적으로 사이시옷을 넣는 규정은 폐기시켜야하고,본래의 한글의 쓰임새에서 보더라도 부자유스럽고,한자어를 의식한 잡다한 누더기 규정들은 새 맞춤법규정에서는 삭제시켜야한다고 생각한다.

새해,새배,새배돈 이처럼 통일시키는게 일상생활에서 혼동을 시키지않고 순수국어의 쓰임새에 잘맞는다.억지로 한자어의 의미와 쓰임새를 구별한다고 세배라고 표시한다든지,새뱃돈으로 소리음과 다르게 사이시옷을 첨가하는 규정들은 한글을 망조로 만드는 악의 축적인 사용법규정이기에 폐지시켜야하고,이러한 쓸데기없는 실생활과는 동떨어진 혼동만 주는 규정은 언론이나 방송등에서도 따라서 사용할 필요가 전혀없다고 생각한다.새해,새배,새배돈 이렇게 사용하도록하는것이 한글창제의 의미에 맞는 한글사랑이라고 할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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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목대비는 선조의 정비인데,광해군과는 악연을가진 여인이었다.자신의 아들뿐만아니라,부모형제,일가
친척모두를 광해군에게 죽임을당하구,대비의 명칭마저 폐위되어 10년동안을 골방에 갇혀지냈기에
광해군에대한 원한은 짐작하구두 남는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구난후,인목대비의 글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는데,
“ 부모의 원수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고 형제의 원수는 한 나라에 같이 살수 없다. 역괴가 스스로 모자의 도리를 끊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이 있고 용서해야 할 도리는 없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두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에 딱어울리는 구절이 아닐수없다.

이런구절때문에 인목대비를 주목한게아니라,한글과 관련된 선구자적인 여인이라는 측면에서 인목대비를
살펴보고자하는것이다. 인목대비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선구자적인 획기적일을 했는데,교서를 한글로
내린 전후후무한 여인이라는것이다
.

세종대왕시대에 한글이 만들어졌지만,조선시대내내 한글은 왕가의 교서로 사용된적이 없었다.
그런데,쇼킹하게두,인목대비는 당당하게 한글로 교서를 내린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다.

실제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을지는몰라두,한글사랑을 실생활에서 사용하여 사랑한 임금이라구는
전혀볼수가 없다.역대 조선시대의 문무관리나 왕들은 한글을 천시했으며,신분이 낮은 일반백성들이나 ,
여인들이 실질적인 한글사랑을 실천했던 대상들이었다는 점이다.

인목대비의 선구자적 한글사랑이 얼마나 조선시대의 관료들에게는 쇼킹그자체였으면, 사간원에서
상소올리게 된것인지 조선왕조실록의 구절을 살펴보자

1623년 인조1년  12월7일
"지금 공주를 시집보내는 예(禮)를 보건대 의복과 기물의 사치가 보통 때보다 배나 되고 있으니, 이미 조종조에서 절약하고 검소하였던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언서(諺書)로 하교하신 사실을 보고 듣기에
더욱 놀랍습니다.

"옛날 성인이 훈계하신 뜻과 뭇 신하들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로써 조용히 아뢰어, 이미 내리신 명을 도로 거두고 언서로 하교하는 일이 앞으로 없도록 하심으로써 조종조의 가법(家法)을 밝혀 후손에게 남겨주는 법으로 삼으소서.”

조선시대의 관리들은,한글을 무시하는것은 당연하구,오히려 한문을 안쓰구,한글을 쓴건 불법한짓을 했다는 투로말하구있음을 알수가있다.

오늘날같으면,대갈박깨지는건 둘째치구,사회에서 매장될인간들이 조선시대 신하라는것들의 가치관이었음
을알수가있다.이런 덜떨어진 신하들에게,통쾌한 일격을 가한 선구자적 여인이 인목대비였다는것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구,반정에 성공한 집권초기인 인조로서는,인목대비라는 백그라운드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기에,인목대비의 교서에대하여 문제삼지말라구 신하들에게 명령한다.

만약에,인목대비라는 대담무쌍한 여인이아니구, 일반 선비나,신하가 한글로 상소를 올리던지,
공문서를 올렸다면,한글을 썼다는 그이유하나로 접수불가는 물론이구,임금을 모독했다구 죽임을
당할수도있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현실로는 이해할수없는 그러한일들이 공자왈 맹자왈하는 신분제사회하에서는,상소를 한글로 올린다는 그자체, 양반이라는 껍데기인 자신의 속한신분에서 왕따나 사회적매장을 당할충분한 이유가될수도있는 사회체제였다는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후기 신분제사회가 종말을 기할때까지두 이어졌으면,이가 득실대는 상투머리에
상투를 짜르느니,차라리 목을 짜르는게 더현명하다는 가치관이 조선후기까지 이어졌기에,
한마디루 말해서,오늘날에 사람이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살게되면 복장터져죽을 일이 다반사였을것이다.

한글을 사랑하구싶어두,사랑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시대가 조선시대였다는것이다.그이면에는
썩어빠진 공자왈 맹자왈이 그런 사회적가치관과 문화를 만드는데 아주지대한 역할을 해다는점이다.

인목대비는 이러한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속에 빠져들었던사회에,혁신적 한글사랑을 몸소실천한 선구자
라구 볼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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