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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개개인의 인생에 있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는 식으로 충고하기를 좋아하는 부류의 인간들도 있다. 이런 부류의 거의 대부분은 충고의 의미의 결과에 대하여 전혀 책임감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주둥아리로만 가르치길 좋아하는 군상들이다.

예전에 봤던 일드에서 충고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금슬이 매우 좋은 부부가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도 아기가 생기지 않는 것이 유일한 걱정거리일 정도였는데 어느 날 남편이 외지에 일하러 간 사이에 마을 주변의 미군기지에 근무하는 흑인병사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그 이후 임신증상이 나타나서 그러한 이야기를 할 때가 없어서 고민하던 여자가 마을의 해변을 서성이며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 할 때 마을에 유일한 의사였던 사람이 그러한 모습을 보고 그 여자를 구해주고 난후 그 여자의 고민을 듣고 충고해주었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 몇 년 동안 아이가 없었는데 임신한 아이가 남편의 아이 일지도 모르는데, 낙태해 버리면 외지에 나간 남편이 얼마나 상심이 크게냐고.......” 그 이후 의사는 이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는데 이 여자는 의사의 충고대로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고 남편에게는 미군병사에게 강간당했던 일을 말하지 않았고 아이가 안 생겨 늘 걱정이었던 남편에게는 아내의 임신소식에 온갖 정성과 관심을 쏟으며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출산 끼가 있어 충고를 해준 의사의 병원에 가서 산통 끝에 아이를 낳았는데 온몸이 새까만 아이가 태어났고 그 모습을 본 남편은 화를 심하게 내더니 아내와 자식을 버려 버리고 집은 나간 후 소식이 끊어져 버린다.

아이를 낳은 여자도 애증의 대상으로 아이를 기르다가 어느 날 의사에게 간난아이를 맡기고는 미군기지가 있는 담벼락에 자신에게 충고해준 의사에게 어떠한 원망이나 저주를 남기지 않은 채 목을 매어 죽어버린다. 결국 강간으로 인하여 생긴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게 더 좋겠다고 충고한 의사는 그 흑인아기가 스스로 집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집에서 키우게 된다.

집을 떠난 후 십 수 년이 흐른 후 흑인아이였던 아이가 중년의 사람이 되어 한 가정을 이루고 자신을 키워준 의사를 찾아왔는데 의사가 혹시 자신의 충고와 선택이 잘못이었지 않는지 그런 느낌의 얼굴 표정일때 그 흑인남성이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태어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이 한마디에 의사는 기나긴 그 충고에 대한 결과에 책임을 다했다는 미소를 띤다.

충고라는 것은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그 말에 대한 결과의 책임까지 질수 있을 때 하는 것이지, 결과는 나 몰라요, 주둥아리로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는 것은 충고가 아니라 주접떠주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충고라는 것은 진심이 담긴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눠주겠다는 마음이 없다면 그 어떤 사람에게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무거운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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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나는 조선의 국모이니라"라고 외쳤다는 고종의 왕비 민황후는 과연 그러한 말과 자세를 보여줬을까를 아무리 역사기록을 찾아보아도 보이지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로 궁녀의 복장을하여,구차하게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려고했을뿐이었다.


조선의 민황후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행동을했던 대비되는 왕비가 고려에 있었으니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14세기 후반에 머리에 빨간두건을쓴 도적의 무리였던 홍건적이 자주 고려를 침범하여,우리나의 백성들 괴롭히곤하였다.훗날 이 도적의 무리의 괴수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데,근본부터가 도적의 무리들이였기에 허약한 근본토대를가진 왕조일수밖에없었다.


1363년 고려 공민왕의 나이 33세가 되던해,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의 논공행상에 불만을품은 김용이라는자가,자객단을 이끌고 흥왕사의 행궁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나라일을 보던 공민왕을 암살하려고하였다.


김용의 자객단이 흥왕사로 급시에 습격을가하자,공민왕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는데,공민왕의 아내였던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공민왕을  어머니의 방에 왕을 숨기고,그문앞에 서서 자객단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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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단의 무리가 칼을 휘두르며 방문앞에 이르러 말하길 왕은 어디에있는가? 왕비가 홀로 나아가 외치길"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방안에 들어가려거든 먼저 나를치고 들어가라"하메,무리들이 두려워 태후의 방안에 들어갈수없었다.


김용의 자객단은 나중에 최영의 정예군에의하여 처단되어 반란은 진압되게되고 훗날 아내의 도움으로,자신의 목숨을 구한 공민왕은 흥왕사의 변이 일어난후 2년이 지난 35세되던해 눈이 소복히 많이 내린 2월 추운겨운날에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죽자,


훗날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남긴 조의문에 그때의 상황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는데 자신을 남기고 떠나버린 아내를향한 사랑과 비통한심정을 느낄수가있다."나에게있어 아내보다 중한것이 없었고,흥왕사의 변이 일어나메,나의 몸의 지척에서 적을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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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사후  공민왕은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은왕비를 살아있는사람처럼대하며,식사할때마다 자신의 음식과 왕비의음식을 같이차려  함께 대화를하며 음식을먹었고,일체의 고기를 먹지않았을뿐아니라,나라를 다스리는 일조차 관심을 끊어버려,국제정세에 밝아 요동을 정벌하며 호기롭고,영민했던 공민왕은 이후 360도 다른 무기력한 왕의 모습을 보이며,슬픔속에서 살아가다 결국 신하의 손에의하여 죽음을 당하게된다.


훗날 조선을 개국한 반역의무리들이 공민왕의 후손인 우왕과창왕의 씨를 가짜라고하며,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위하여 역사를 왜곡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보아도 공민왕은 35세에 이미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하여,아이를 낳다가 죽었던걸보면,공민왕의 남성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했음을 알수있고,공민왕 스스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했던 우왕을 훗날 반역의 무리가 "아니다"라고 기록것은 반역을 정당화하기위한 역사조작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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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역사에서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자객단앞에서도 당당히 홀로맞선 여인이었지만,궁중에서의 일상생활모습은 내성적이고,여린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전해지는데,사랑앞에서는 한발자국도 물러 서지않았다.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사랑을보면,남녀간의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라는 말이 사실인거같다.


드라마나 사극일지라도,역사를 조작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것은 반역의무리들이 늘행해왔던 목적을위하여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르지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반만년역사에 왕비로서,노국공주가 행하였던 행동은,실존하는 유일한 기록이며,"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라는 그러한 비장미와 당당함을 보여줬던 인물을 찾는다면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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