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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이 통일제국을 이루면 연례적으로 행해졌던 일이 여자를 바치는 일이었다. 이러한 폐해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유독 더 심하고 많이 행해졌는데 극단적인 사대주의를 행했던 조선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공녀는 양반이라는 사대부 집에서는 차출되어 지지 않았고 대부분 일반백성들의 여식이 주 타깃이 되었는데 공녀로 선발되는 것은 어떠한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강제적인 징집이었다. 힘없는 백성들이 여식들이 성의 도구로 끌려가더라도 집권층이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허울뿐인 공맹을 입으로 외치는데 그칠 뿐 누구도 그러한 악역에 자발적으로 여식을 내 놓는 양반집은 조선역사 전체를 통틀어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중원제국에서 공녀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향리출신인 아전들이 마을에 할당된 공녀의 수를 채우기 위하여 제일 힘없고 항의가 없을 것 같은 집안을 찾아가 강제로 끌고 가 숫자를 맞추는 것이 일상이었고 이러한 점고과정에 벼슬아치들에게 성을 유린당하고 보내어지는 것 또한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공녀로 강제로 징집되어 끌려간 여자들은 열에 아홉은 성매매도구나 중원제국의 관리들의 첩으로 팔려나가 성적학대를 받는 삶을 살다가 이름 없이 사라져 갔다.

혹여 공녀를 좋게 표현하고자 출세를 한 여인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하늘에 별 따기만큼 희귀한 경우이고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얼굴과 나이에 따라 돈으로 팔려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조선에서 보내진 공녀가 황제의 궁궐 같은 곳에 들어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고려시대에도 공녀의 개념은 있었으나 원과 고려의 관계는 부마국인 관계로 이때의 공녀의 개념은 황제의 궁궐이나 고관대작들의 부인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조선시대처럼 애초부터 성적도구로 매매하기위하여 보내진 경우와 개념이 달랐다.

조선시대의 공녀는 조선의 집권층이 지속적 영화를 위하여 힘없는 백성들의 여식을 강제로 잡아다 중국에서 성매매여성으로 매매되도록 바쳤을 뿐이었다.

조선왕조 600년 역사의 집권세력의 모습은 겉으로는 도덕과 공맹을 외치면서 뒤로는 집권층의 부귀영화의 지속을 위해서는 그 어떠한 악행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것이 집권층의 일상화된 행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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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요동정벌에대하여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국시로 하여 탄생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명나라는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의 역할이 어떠했었냐하는 가에 대한 역사적 시각에 대한 글이다.

 

 

조선이 그토록 사대했던 명나라의 패망은 임진왜란을 통한 조선의 지원이 그 영향이라는 주객을 전도한 원인론도 주장되어진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명나라의 국력은 중원대륙을 통일한 왕조들중 가장 약한 나라였고, 고려시대의 중국의 송나라와의 관계처럼 우리나라의 역할은 충분히 자주적이며, 강대한 위치를 보여줄 수 있었다.

명나라는 한족으로 하여 이루어진 정권이라는 자체가 이미 동북아 주변국들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의 국가였음을 알 수가 있다.

명나라는 기본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사대가 없었다면,270여 년간이 아니라 50년도 못가서 망해버릴 국제정세였음을 알 수가 있다.

명나라의 주원장이 태조 이성계가 보낸 조선의 사신들을 참수했을 때 요동을 정벌했다면 명의 존속기간은 훨씬 짧아졌을 것인데 4대불가론을 외치며 고려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킨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소국이 대국을 치는 입장을 주장 할 수는 없었다.

명나라의 주변에는 원나라를 이어받은 북원이 명나라 멸망 때까지 강성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이러한 몽골에 명나라는 가장 강성했다는 영락제때조차도 북원과 싸워서 대패를 당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으며, 명나라 공주를 몽고의 부족에게 공물로 바치는 입장은 명의 멸망 시까지 이어졌다.

명나라의 멸망과 몽골에서 칭기즈 칸의 칸의 칭호가 동시에 사라지는데, 이것은 명나라의 탄생과 북원의 탄생과 멸망은 같은 운명을 가졌다는 것이고, 명나라 집권시기내내 명나라는 몽골의 위협에서 안정적이었던 때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있어 문화적으로, 국력으로 최전성기라는 세종대왕이라는 시기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와 몽골의 전쟁 상황과 일치한다. 명나라의 주원장의 생각은 애당초 조선이라는 나라를 가만히 나두려는 생각이 없었고, 북원이라는 몽골이 존재만 평정된다면 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케 할 생각이었다. 이것을 실행하지 못한 것은 북원의 몽골은 명나라의 멸망 시까지 끝까지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사에 있어 조선의 역사를 기술할 때 크게 왜곡하는 부분이 국제정세를 활용하거나 이용할 줄 모르는 집권왕조에대한 비판보다는 침략을 받은 상황 하에서의 침략한 국가에게 그 책임을 모두 덮어씌우는 기술을 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것이 임진왜란에 조선을 도와줬기에 명나라의 국력이 낭비되어서 여진족이 흥기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된 한 원인이라고 버젓이 중국에서조차 인정하지 않는 원인을 우리나라는 그럴듯하게 역사인식인냥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술의 원인은 임진왜란의 주체가 일본이라는 것에도 영향이 있는데,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바라본 국제정세는 일본이 명나라를 치던, 그렇지 않던 명나라가 멸망할 시기라는 관점은 정확했고, 그것을 바라보지 못했던 나라는 오직 조선뿐이었다.

몽골의 북원이나 여진은 동북아세력중 고구려인 한민족만이 명나라에 대한 국제정세를 거꾸로 해석하고 밀고나간 청개구리 국제정세관을 가졌었다는 점이다.

명나라의 최전성기 황제인 영락제를 보더라도 그가 몽골의 북원을 치기위하여 모집한 군사의 최대 수는 50만 대군이었고 이러한 원정군을 동원했더라도 몽골을 명나라의 지배 상태로 둘 수 없었고 겨우 호각지세를 이룰 정도 였는데, 이 이후의 명나라 황제들은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상황에 명나라 멸망 시까지 이어졌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문화적으로 국력 적으로 부흥기를 맞이한 세종대왕시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이 명나라에 사대를 하여 명나라가 시비를 걸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종대왕시기에 명나라 황제인 영종이 이끄는 몽골에 대한 원정군 50만이 몽골의 2만기병에 전부 몰살되고 명나라가 황제 포로가 되는 토목의 변이 나타난 시기였다는 점이다.

몽골의 군사령관인 에센태사의 용병술이 뛰어난 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북원의 몽골에 대하여 군사력의 싸움으로는 명나라가 몽골을 제압할 수 없었음을 의미하고, 이러한 관계는 명나라 멸망 시까지 이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명나라의 상태는 이미 명목상의 명나라가 존재할 뿐 민심이반이 심각하여 언제 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 하에 놓여 있었다.

몽골이 중원을 재집권하던, 여진족이 중원을 정복하든, 고구려인 한민족인 조선이 정벌을 실행하든 누가 먼저 명나라를 치느냐에 따라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민족이 될수 있었다. 그러나 오직 조선만이 국제정세에는 눈감고 오로지 이씨왕조집단의 안위와 부귀영화만을 우선으로 쇄국의 국제정세만을 주장하고 이어갔다.

북원의 몽골과 명나라의 멸망의 시기가 일치하는 점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 청나라의 태종인 홍타시인 황태극이다. 우리나라의 인조에게 삼전도의 치욕을 안겨준 인물인 청태종이 북원이라는 몽골의 칸이라는 지위를 마지막으로 받아 북원의 몽골은 사라지게 되는데 몽골에서 여러 부족이 있다해도 칭기즈 칸의 직계가 칸이라는 직위를 받을 수가 없는데 이민족인 여진족인 청태종이 칸이라는 직위를 받아 몽골이 항복한 이유는 청나라는 몽골과 여진이 연합정권으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끈 3대황제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혈통은 여진과 몽골의 결합으로 칭키스칸계의 성씨를 쓰는 몽골여인들이 황제들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청나라도 초기에 붕괴되었을 것이고, 오래세월 중원지배세력이 될 수도 없었다.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원나라 황실의 공주가 고려의 왕의 부인으로 정례적으로 혼인을 했듯이 몽골의 공주가 여진인 청나라의 황제의 부인으로 맺어진 것은 같은 역할로 존재하는 것인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고구려를 이루어 하나의 나라를 이룩했던 여진인과 몽골인과의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연을 안면몰수하고 모른 척 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명나라와 호응하며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몰염치함을 보여주었다.

명나라를 이룩한 주원장의 시각으로는 처음부터 북원을 정복했다면,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 조선이라는 나라도 정복의 대상일 뿐이었는데 명나라의 멸망 시까지 북원의 몽골이 정복되지 않았기에 조선을 침략하지 못했다.

고구려를 이루어 한 나라였던 몽골은 명나라의 50만 대군을 이겼던 민족이었고, 여진족 또한 그와 상응한 수의 명군을 격파한 민족이었는데 고구려를 이루었던 민족 중에 한민족이 제일 갑으로 중국의 정규 113만대군, 지원참모부대를 포함하면 300만 대군과 싸워이겼는데 이러한 전승은 중국역사에있어 이전이나 이후로 300만 대군을 이긴 민족은 고구려인 한민족이 유일하다.

고구려의 지존이며 주체는 한민족이었고, 그와 연합했던 여진,거란,몽골,선비족등은 그 기상을 높이 하여 싸워나갔는데 그중에서 명나라시기에 조선이라는 한민족처럼 국제정세를 꺼구로 가는 민족혼을 보여준 여타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북원이 존재했던 17세기 중반까지, 그렇지 않다면 여진족이 몽골과 연합하여 부마국의 지위로 청을 건설하여 명나라와 싸울 때, 그때까지라도 단 한번이라도 주위의 세력들과 연합하는 국제정세를 활용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했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의 영역보다 더 큰 고토를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술할 때 특히 조선사를 기술할 때 외국의 침략에 대하여 외국 탓만을하며,왜 얻어터질 수밖에, 왜 복장이 터질 수밖에 국제정세에 눈감고 국가를 이끌어간 집권세력에대한 비판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일제에 의한 지배를 당한 역사의 서술에 있어서도 분명하게 전제되어야 할 것이, 국제정세에있어 쇄국만을 고집하고, 끝까지 이씨왕조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백성들을 외국군을 끌어들여 학살하고, 결국에는 망국의 상황에서도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집권세력에대한 비판과 처단에는 눈감고 오로지 일본의 침략탓이다라는 짓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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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구가하기위해서는 지도층을 상시적으로 도륙내어야한다는 운명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아버지를 보며 두려움에 떨던 맏아들이 “아버지를 도운 지도층인 공신이나 고위관료들을 더 감싸고 보호해줘야지 왜 공신이나 고위관료들을 개미목숨보다 더 하찮게 공포가 사무치도록 상시 도륙을 하십니까?”물으니 주원장이 말했다.

내가 엄하게 도륙하는 사람은 성 밖의 없이살고, 힘없는 백성들 중에서 그리하는 것을 보았느냐? 지도층을 대대적으로 상시 도륙했더니, 결과는 백성들이 못살고, 굶주리는게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있어왔던 어떤 왕조들보다 백성들이 삶의 지표들이 나아지고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원장의 이러한 운명의식은 부패한 사회지도층에의한 탄압으로 부모가 모두 굶어죽었을 정도로 피폐한 삶을 어릴 적부터 살았던 주원장은 그 자신이 인생이 제일 밑바닥부터 최고의 지존인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동안 터득한 경험에서 나왔음을 알 수가 있다.

 

 

이방원: 이씨왕조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서 그것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외가이든 친가이든 상관없이 모조리 도륙했는데 이러한 골육상쟁의 모습을 지켜보던 맏아들이 “ 혈육의 정은 천륜인데 어찌하여 골육을 도륙하면서 국가의 충효를 논하십니까? 물으니 이방원이 말했다.

내가 엄하게 외척이나 형제들을 살육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이씨왕조의 탄탄한 초석을 만들어 만대에 이어지길 기원하기 때문이다.

이방원의 이러한 운명의식은 근본에 있어 열등의식이 존재하였기 때문인데, 조선을 건국한 이씨왕조의 피의 근본이 고려의 풍습을 간직하고는 있었으나 여진의 풍습과 혼인관계를 바탕으로 성장한 성씨였기에 국가도 백성도 그런 것보다는 더 우선적으로 이 씨라는 성씨의 왕가의 전통이 이어짐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였기에, 국가가 어떻게 되던, 백성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이 씨 왕가가 우두머리로 남을 수만 있다면 어떤 짓을 하든 상관없이 그것을 지키고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왕위를 계승하여 이어가는 것이 운명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아버지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러한 질문을 했던 맏아들은 공통적으로 모두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다.

 

 

주원장과 이방원은 동시대의 사람으로 서로의 운명관을 가지고 만나게 되는데, 한사람은 중국을 통일한 황제의 신분과 이러한 명과 일전을 벌일 것인지를 놓고 탐색하는 요동정벌론을 주장하는 정치 상황을 맞이한 조선의 왕자신분으로 만나게 된다.

농민에서 황제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중국을 통일하여 황제가 된 주원장조차도 조선을 침공하여 정복하는 것도, 그렇다고 가만히 나두는것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지리적 위치였다. 중국을 통일하였다해도 몽골지역에는 여전히 원나라의 조정인 북원이 남아있었고, 요동지역에는 여진이라는 야인들의 세력이 강했기에 잘못 판단했다가는 수나라처럼 통일 중원제국이 하루아침에 조선이라는 나라 때문에 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비상했던 주원장은 조선이 명나라를 칠 용기도, 패기도 없는 왕조라는 것을 간파하고는 조선을 침공하여 국가의 흥망성쇠의 도박을하는것보다는 주둥아리로만 위협하여 여진과 몽골을 적대시 할 정도의 상태만 만들어 놓으면 좋다고 생각했기에, 조선사신이 오면,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서 억류하거나, 참수를 하여 분하면 쳐들어 오던가라고 패기 없는 조선이라는 왕조를 조롱하며, 조선이 스스로 비굴하게 굽혀서 엎드리도록 길들였다.

이방원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원장을 만났을 때 주원장은 이방원을 환대하고, 이방원은 주원장을 받들어 사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굳히게 되는데, 주원장이 이방원을 환대한 이유는 주원장의 의도를 간파한 이방원이 조선의 개국에 일조했던 여진을 적대시하고, 요동의 권리를 명나라가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개념 밥말아먹은 사대의 자세를 취하겠다는 의도를 확고히 했기 때문이고.

이방원이 주원장을 받들어 사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굳힌 이유는 주원장의 명나라는 조선에 있어 이씨왕조를 이어가는데 침략하여 정복하고자하는 생각이 없음을 간파했기 때문에 나라의 땅이 어떻게 되던, 백성이 어떻게 되든 이씨왕조인 조선이 대대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에 부합한 인물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대선이 다가오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시대적 정신이 주원장 같은 사람의 운명관이 필요한것인지,아니면 이방원의 운명관이 필요한것인지 생각해볼만하다. 주원장은 명분이나 체면을 위하여 억지가 아닌 스스로가 원나라를 승계한 왕조임을 천명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방원의 조선은 명분과 체면을 위하여 고려의 왕으로부터 선양을 받는 형태로 왕조를 바꾸면서, 실제적으로는 고려왕조의 왕 씨들을 남김없이 한데모아 수장시켜 도륙해버리는 태생부터 겉모습과 속모습이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러함에 주원장은 조선을 보는 것과 이씨왕조를 보는 것을 구별하여, 조선이라는 국가는 함부로 할 수 없지만, 이씨왕조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배역왕조이다라는 관점을 명나라의 후대 황제들이 가지도록 역사를 기록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조선왕조 600년 동안 이어져온 겉 다르고 속다른 이중적형태의 뒤통수들이 잘먹고 잘살면서 정의인냥하는 부정적 인물상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하나의 나라의 우두머리의 운명관을 선택할것인지  아니면, 세계의 중심 코리아의 운명관을 선택할것인지는 역사속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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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의 바위는 칼을갈아 다없애고,두만강 푸른물은 말에게 다먹이리라"는 활달한 기상을 가졌던 조선시대에 보기드문 용장으로

20대의 젊은나이임에도 이룬공적이 높아 오늘날로보면 20대에 정부부처의 장관을지낼정도로 능력과업적이 탁월했던 남이인데

왜 재평가를 받지못하고 역사속에 미스테리로 뭍혀져있을수 밖에없는지 그까닭을 생각해보게되었다.

단지 유자광의 모함에의하여 역적으로 몰려 젊은나이에 억울하게 죽었다라는 정도로는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역사속기록을 통하여 남이장군의 숨겨진 미스테리를 파헤쳐보자.1468년 5월 세조임금이 집권하던시절,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있던 남이에 관한기록에서 의외의 구절을 발견할수있는데,


남이가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말하길" 저의 처는 어머니에게 불효하고,첩들을 시기하니 이혼하게해주십시요" 세조왈"칠거지악에 해당하니,너의 생각대로 하도록하여라"하였다.이러한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은 특이한 사항들에대하여는 자신의 판단을 가끔씩 적어놓기도하는데 사관이 판단하여 기록하길"남이의 어머니는 며느리와 아들이 동침하는것을 좋아하지않았는데,왜 그런지 이유를 알수가없었다"


4개월이지나 1468년 9월에 세조가죽고 그의 둘째아들인 예종이 왕위에올랐는데,한달이 채지나지않은 10월에 유자광의 밀고로 남이가 역적모의로 잡혀서 국문을 받게된다.남이의 친적들도 역적연루혐의로 심문을 받게되는데 그중에 남희라는 사람이 예종과 나눈 대화도 괴이한데 이러했다.


예종이 말하길 "너도 남이하고 역적모의를 같이했지 않느냐?" 남희가 말하길 "남이의 장인이 저에게 이야기하길 (남이는 권남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권남은 세조의 등극을 도운 주요공신중에 한명인데 남이와 권남의 딸사이에는 남구을금이라는 딸이있었는데,권남은 남이의 역모가 일어나기 3년전에 이미죽었다) 남이와 그 어미사이에는 천지간에 용납할수없는 죄를 저지르고있는데,그눔이 인간이냐,짐승이냐라는 소리를 들은후,그이후로 남이와 단교하여 지낸지 오래입니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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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들에서 더 이상한점은 남이의 어머니에대한 형벌이다.남이는 역적의 죄를 지었으므로 당시 법률에따라 죽는것은 이해가되지만,그당시 법률에 따라 연좌제를 행했다하더라도 역적집안의 남자들은 죽인다해도,여자들은 노비나 관비로 만드는게 당시 법률이었다.그러나 어찌되어진건지 남이의 어머니는 극형인 소달구지를 이용한 환열형에 처해진것도모자라,여자인데도 3일동안 사람들이 오고가는곳에 메달아 두었다는점이다.남이장군을 재평가하여 좋게 만들고자해도 그렇게하지못하고 미스테리속에 뭍여 남길수밖에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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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앙,동아뉴스기사의 다음공급중단이후,개인적으로 다음메인의 트래픽영향력이 조금두아니구,완전히 죽어버렸다구 개인적으로 느껴진다.

전체적인 통계분석을할수있지않기에 어떻게 돌아가구있는지 객관적자료통계를 알수없지만 확실하게 개인적으로 체감되는것은 다음메인의 트래픽이 올블로그수준에두 미치지못하는 황당한 트래픽영향력을 보았다.

물론 개인적인 나혼자의 사례이기에,그것이 전체적일수는없지만,뉴스공급이전과 이후에 나타났던 다음메인의 영향력을 비교해보면,황당무계그자체로 평가되어진다.


다음이 조중동과 대척점에 선것이 과연 올바른선택이었는지 의문이든다.결과는 더두고봐야하겠지만,메이져뉴스를 포기해버린 다음의자세는 향후전망에서 부정적인결과가 도출되어질것같은 예측이든다.다음뿐아니라 네이버,엠파스등 기존포탈들이 메이져뉴스를 블로그에 스크랩한경우가 많다.


티스토리같은경우는 저작권이나 기타 어떠한상황에서두 독창성과 주체성이 흔들리지않겠지만,지금의 포탈내의 블로그들은 대부분 저작권과 관련되어지는 스크랩비율이 상당히 높다.다음블로그또한 예외가 아닐것이다.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메이저뉴스기사들을 다음내의 블로그에 무단복사.전재하구있는경우도 많다.뉴스중단이 문제가아니라,지금까지 생성되어진 정보가치가있는 조중동의 뉴스기사들에대한 포탈내의 블로그에서 모두삭제조치대응단계로 앞으루 나아간다면,그 첫번째 타켓은 다음블로그가 될것이다.


오늘날의 블로그는 정보검색의 한출처로서 다양한정보를 블로그내에서 얻구있다.만약에 스크랩이 대부분인 포탈블로그들에게 뉴스저작권관련대응이 음악파일이상으로 강력하게 시작된다면,아마 다음블로그 생존능력에 의문이든다.물론 다음은 티스토리라는 개인들 자체가 대부분 저작권을가지구있는 티스토리가있기에,타 포탈보다는 경쟁력에서는 앞서구있다구 볼수있지만,그러나 다음블로그는 다른포탈들과 마찬가지루,저작권에걸리는 스크랩블로그들이 비율이 상당히 높을것이기에,메이져뉴스공급중단이후에,한단계씩 높아질 대응에대하여 고려하구있는지 의문이다.


광고라는것은 효과가없으면,점점외면되어지는것이고,보수든 진보든 어느한쪽편향으로 치우친 기사들만 나오는 포탈이 광고효과가 좋을리는 없을것이다라구 생각한다.개인적인 느낌인지는 모르지만,뭔가 트래픽면에서 다음이 달라지구있는건 확실하다는 느낌이든다.허상이나 이론만을 추구하다가,초가삼간을 다태워먹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메이져뉴스공급중단이후의 다음을 보면서 체감하며 느껴지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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