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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훈요 10조에는 전라도지역은 배역의 땅이니 인재라도 등용하지 말라는 조항이 들어있다.

이러한 훈요 10조에대하여 위조설이나 첨삭했다는 의견등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지만,이러한 구절은 우리나라의 역사, 일부의 미스테리를 숨겨 놓았기때문이고,훈요십조의 내용은 위조나 첨삭된 구절이 아니라 진실한 구절이었으며,


그당시 동족인 발해를 멸하는 거란에대하여 극한 분노를 표현했고 배척했던 고려인의 모습을보면 왜 이러한 구절이 훈요10조로 후대에 널리 전하라고했는지 충분히 이해할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로 축소하여 삼국의 시대로 이해하고 은폐하려했던되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오늘날의 전라도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다스리던 백제지역이 아니었고,백제의 주류문화는 충청도이고,전라도는 우리민족이 입장에서 볼때는 이민족이 한민족을 협박하고 멸하려는 세력의 주거점지역이었다.

역사속에서는 이들에관한 기록이 역사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충청도와 아울러 백제의 나라였다고 두리뭉실 역사를 만들었기때문에,이웃나라의 역사기록이나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속에 틈틈이 전라도지역에 존재했던 주체세력에대한 삼국시대와는 동떨어진 비상식적인 기록들이 나타나고있다.

이러한 전라도지역에 지배 주체세력이 이룬 국가가 백제가 아니라면 누구였는가가 문제인데,결론적으로보면 이민족중에 유물이나 유골등으로 봤을때 북방계통의 민족이아니라,일본계통의 민족이었음을 알수가 있다.전라도지역에 살았던 주체세력이나 주민들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입장에서 봤을때 멸해야할 대상이고,정복해야할 대상이었다.이러한 역사적사실을 후삼국을 통일했던 고려의 왕건이나 그당시 사람들은 잘알고있었고,민중의 밑바탕에 그러한 역사의식이 존재하고있었기에,전라도지역의 사람은 정부관리로 중용하지말라는 훈요10조구절이 들어있게 되었고 역사속에서 전해졌다고 할수가있다.

백제와 전라도의 관계는 정복과 멸해야할 대상으로 규정했는데,역사적으로보면,백제는 점차적으로 전라도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정복하고 멸하면서 확장되어갔는데,이러한 전라도지역은 백제만 정복전쟁을 한것이 아니라,고구려나 신라또한 이지역에대한 정복을 꾸준히 진행하였다.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왜라는 세력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국경과 인접했음을 알수가있는데,이러한 구절은 왜라는 세력이 일본열도에있는 왜라는 나라와 혼동하기때문에 생기는것이고,한반도내에 고구려,백제,신라와 국경을 맞대는 왜라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세력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에있어 멸하고 정복해야할 대상이었으며,오늘날 그지역이 어디였는가하면 전라도지역이다.오늘날 고구려의 지배지역을 경상도는 신라이고,전라도는 백제가 지배했던 지역이라는식으로 뚜렷하게 구별하여 표시하는데,사실은 지금의 전라도지방에는 고구려가 정복하고 지배했던 고구려지역도 존재하고있었고.마찬가지로 신라지역이라고 표시된곳 또한 고구려가 정복하고 지배했던 고구려지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영향을 미치던 지역은 한강이북지역만이 아니라,남으로는 제주도까지 그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삼국사기 문자명왕 13년 4월의 기록에는
특이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고구려 사신이 위나라에 가서 나누는 대화가 기록되어있다.

고구려 문자명왕 13년은 서기 504년이기에 그시기에 涉羅爲百濟所幷:섭라를 백제가 병합하였는데,이것때문에 섭라에서 생산되는 옥이라는 특산품을 바칠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섭라는 제주도를 말하고,섭라가 백제에 복속되었을때는 동성왕 20년 서기 498년이었는데

복속이라는 말은 공납과 조세를 바친다는 의미였고,이말은 그전까지는 섭라는 고구려에 공납과 조세를 바치고있었는데,중간에 백제가 가로채서 지금은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전복껍데기속에 들어있는 옥이라는 제품을 바칠수가 없다고 생각할수가 있다.

이런의미가 아니라면,고구려,백제,신라등 모든 국가는 서로 국가간의 교역을 하였는데,그전에는 구했는데 섭라가 백제에 복속되어 제품을 구할수가 없어서 바칠수가 없다는것은 비상식적이다.이러한것을 보았을때,충청도지역을 제외한 남쪽지역은 무주공산이었고 상황에따라 고구려,신라,백제에의하여 정복되거나 멸하게되었다고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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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성희가 그렸다는 240여년전의 그림은 어디로 사라졌고,왜 영조임금은 전복을 언급하며 캐기어렵다고 했을까?

심성희(1684-1747)는 청송심씨로 이조참판,탐라어사,도승지,대사헌등의 벼슬을 했던 문관으로 그림에도 능했음을 알수있는데,

영조 45년 1769년의 기록에 영조가 말하길"심성희가 전복캐는 그림을 그려서 바쳐는데,그것을보고 전복캐는것이 힘든일임을 알았다"라고했는데,

그림이 얼마나 세세하게 잘 그려져 있었길래,그림만보고도 영조는 알수있다고했겠는가


오늘날에 심성희가 그렸다는 "전복캐는 그림"이 발견된다면 보물이겠는데,이 그림의 존재유무는 아직까지 발견되지않았다.오늘날에도 자연산 전복은 오래전방식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바다에서 여자들이 직접 채취하기에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전복캐는 모습은 비슷할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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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전복을 어떻게 채취하는지는 본적이 없기에,영조가 그림을보고 알았다는 전복캐는 고난함과 어려움이 어떤모습을 말하는것인지 알수는없다.


그러나 상식선으로 생각해봤을때,여자들이 깊은바다속의 바위에 딱붙어있는 전복을 숨을 참으며 딴다는것은,수영장에서 물속에 잠겨있는 물건을 숨을 참으며 들고 나오는것도 힘든데,살아있는 전복이 바위에서 쉽게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을것이기에,인간의 짧은숨으로는 수십번은 물속을 왔다갔다해야 겨우 캘수있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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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통하여 오래전부터 전복은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인 귀한 음식재료였음을 알수있고,몇백년전에도 전복을 캐어바치는 해녀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자연산 전복을 먹을때는 왜 가격이 이렇게 비싼가?이런 볼따구 맞을 말을하지말고,영조임금조차도 캐기어려워,힘들겠다고 생각했던 자연산 전복을 캐주는 해녀분들이 있어서,몸에 좋은 전복을 먹을수 있는것이구나라는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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