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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동안 미제사건으로 남은 두다리가 잘린 여자아이의 실화속으로 들어가보고,

오늘날에 법관점에서는 어떠한 법의 심판이 내려졌을까을 살펴보고자한다.


1533년 중종임금때인  2월 눈내리던 어느날, 서울에 두다리가 잘려진채 버려진 5세여아가 발견되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여,이러한일이 중종임금의 귀에 들어가게된다.

중종은 천인공노할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자를 잡아드리도록 어명을내리고 철저한 조사를 하도록했다.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잡혀서 문초를 받게되는데,5세여아의 이름은 옥가이였는데,옥가이는 처음부터,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일관되게 한사람을 지목하여,구체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진술하게되는데 그사람은 맨처음 길가에 울고있던 옥가이를 데려다가,수양딸로 삼으려던 한덕이라는 여자였다.

비천한 여아의 신분이었기에 형조에서 처리해야했지만 특별히 중종임금의 관심사였기에 의금부에서 사건을 담당하게되는데,피해자인 5세여아인 옥가이의 증언에따라 한덕을 잡아다 문초를 했으나,

한덕이 말하길" 올해 1월 10일경에 길에서 울고있는 아이를 데려다 기르려고 했지만,자신의 상전인 주인이 반대하므로,그다음날 길에 다시 버렸고 아이의 두발을 짜른적이 전혀없다"라고 하면서,자신이 길에 여아를 버렸을때,다른사람이 데려갔는데,데려간 사람들이 두발이 없는채 되려간건지,그렇지 않은지 확인해보면 될것이라 주장하였다.그래서 다시 그아이를 데려간 사람들을 모두 잡아다 문초를해도,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람들마다,자신이 데려갔을때는 아이의 두발은 멀쩡했었다라고 일관되게 진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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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임금이 개인적으로 생각하길,어린아이이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의 발이 칼로 짤렸을때 손을 묶고 입에 솜뭉치를 물리게하고는 칼로 자신의 두다리를 한덕이 짤랐다고 상황을 일관되게 진술하는 옥가이의 말에 신뢰가갔기에,혹시 한덕이 나중에 몰래 다시 옥가이를 찾아가서 두다리를 짤라버렸지않나 의심하고,더욱 엄중하게 관련자들을 문초하도록 지시한다.

여러번 길가에 버려진 옥가이를 마지막으로 데려간 사람이 귀덕이라는 무당이였는데,귀덕을 잡아다 문초하니 귀덕이 말하길"옥가이를 길가에서 1월27일경 데려왔을때 두다리가 동상에 걸려있었지만,다리는 멀쩡해었는데,시간이 지나면서 동상으로인하여,두다리가 저절로 뭉개 빠져서,자신에게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어서 다시 길가에 버렸다"라고 진술하였다.

중종임금이 생각하길 두다리가 짤린 5세된 옥가이가 일관되게 한덕을 가르키며 자신의 두발을 칼로 잘랐다라고 진술하기에,옥가이를 데려갔던 관련자중에 누군가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있다고 생각했기에,의원을 시켜서 동상으로 자연적으로 두다리가 잘려나간것인지,아니면 칼로 일부러 짤라버린것인지 자문을 구하게되는데 의원은 여아의 잘려진 두다리 부분을보고는 칼에의하여 절단된것이 분명하다고 진술하였다.

이에 중종임금은 더욱 엄하게 관련자들을 문초하여 진상을 밝혀내도록 지시하였다.문초를 담당했던 신하들이 아무리 생각하여도,한덕이 여자아이를 버렸을때는 분명히 여아의 두다리가 멀쩡했고,나중에 최종적으로 옥가이를 데려갔던 무당인 귀덕이 옥가이의 두다리는 동상에의하여 자동적으로 사라진것이라고 주장하기에,5세된 여아의 진술만을 가지고 지목한 한덕을 범인으로 단정하여 죄를 줄수가있는가에대하여 논란이 분분하게된다.

중종임금은 어찌되었든 5세된 여아인 옥가이의 진술을 더 신뢰하여,한덕을 벌주려고했지만,신하들이 반대하길"조선의 법률은 80세이상과 10세이하의 진술은 증언으로 채택할수가 없다라는 법규정을 들며",아무리 5세된 여아인 옥가이가 일관되게 증언한다고해도,가치가없고,그증언만을 가지고,처벌하게되면 억울한 죽음이 생길수도있기에,그냥 결론을 내리지않고 유야무야 내버리는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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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초를직접담당했던 신하들뿐만아니라,정승들까지 같은의견을 주장하므로,중종임금또한 어쩔수없이 미제사건으로 아무도 처벌받지않는 사건으로 남겨지게된다.오늘날에 다시 두다리가 칼로짤린 옥가이의 사건을 재심하게된다면,관련자들인 한덕이나 귀덕등은 무죄가 될것인가 살펴보면,오늘날에는 5세된 여아의 진술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있게 진술한다면,다른증거가 없다고해도 오직 옥가이의 진술자체만으로도,한덕은 유죄로 처벌을 받을것이고,상충되는 진술을한 무당인 귀덕은 위증죄내지,공범으로 처벌을 받을것이다.5세된 여아의 유일한 증언만으로 유죄의 증거로삼아 처벌을 할수있는가가 요점인데,조선시대에서는 무죄,오늘날에는 유죄가된다.400년전에 관련자들이 무죄로 끝난 다리가 절단된 5세여아의 미제사건은 오늘날 재심을한다면 한덕은 유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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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점을치는 사람이었던 지화라는 사람의 관계를 통하여,세종이 풍수나 점같은것에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수가있다.


지화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때부터 국가의 점치는 일과,혼례에대한 궁합을 보는일을 맡아서했다.

지화의 운명은 태종과 세종에대한 "말한마디"인과응보에의하여  극과극인 운명을 살게된다.


태종은 세종처럼 남녀관계에는 금슬이 좋아서 왕비뿐아니라 많은 궁녀들에게서 아이를 낳았다.




태종은 궁녀에게서 나은 자신의 딸들이 혼례할 나이가 차자,궁합을 잘보는  판수인 지화를 시켜,알맞은 사위감을 찾도록한다.지화는 장성한 아들이 있는사대부집들을 돌아다니며 생년월일을 알아보러다니던중,이속이라는 관리의집에가서 그 집의 아들의 생년월일을 묻자,


이속이 지화에게 말할길 "명문가의 비빈의 딸이아닌,일반궁녀에게서 난 딸의 혼례를 위하여 우리아들의 생년월일을 묻는거라면,우리아들은 죽을걸로 가서 말해주게" 지화는 자신의 들은 말을 그대로 태종에게 해버렸다.


태종이 누구인가? 자신을 거스리는것은 외척이고,형제이고 박살내버리는 조선조 최대의 터프가이 왕이 태종이었다,대노한 태종은 이속을 잡아오게하고는 말할길" 근본이 틀려먹은 가문인걸 내 익히 알고있었기에,나도 혼인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그러나 네놈의 말투는 용서할수가없다"하고는 이속을 감옥에 가두어 말에대한 댓가를 치루도록한다.


지화의 입장에서는 꼭 이속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궁합을 맞춰볼 사대부집의 아들들이 많이있었기에,이속이 한말을 사적인 대화로알고 뭍어주고 태종에게 말하지않을수도 있는 문제였다.지화는 평소 이속을 좋게보지않았거나,태종이 자신에대한 신임을 널리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훗날 이러한 말실수에대한 연은 결국 지화 자신도 범하여 자신의 운명이 박살나버리걸보면 연에의한 인과응보라는 말을 되새겨보게된다.


세월이 흘러 태종이 죽고,세종이 왕위에 올랐다.지화는 선대부터 국가의 점과 혼례에대한 일을 잘한 공이있었기에 세종은 신하들이 "점쟁이에게 벼슬을 내리는것은 가당치 않습니다"라는 상소를 물리치고 지화에게 사옹원사직이라는 3품에 해당하는 꽤 높은 벼슬을 내린다.


1444년 겨울 어느날에 부련듯 나라의 일에대한것을 점쳐보려는 생각이 들었던 세종이 신하를 시켜 지화를 보고싶다고 하였다.신하가 지화의 집을 찾아가보니,지화는 없고,그대로 돌아갈수없어 여러곳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지화를  찾아냈는데 다른사람의 집에서 술을 먹고있었다.


신하가 말하길 "전하께서,나라의 일에대하여 점을 칠일이 있다고 부르십니다" 술을 먹어서인지 눈에 뵈는게 없던 지화가 말하길 (오늘~꺼억,노새,노새 젊어서 놀아~ 아 좋다~ )"술을 많이 먹어,오늘은 점을 칠수가 없으니 잘말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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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가 세종에게가서 그대로 말하길 "술을 많이 먹어 오늘은 점보는 일을 못하겠답니다" 이말을 들은 세종이 대노하여 "이눔이 운명보는것을 좀 안다고 음흉하고 간교하기 짝이 없는눔이구나,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그 말뽄새에대하여 문초하도록하여라"하고는 결국 세종은 지화를 남도땅 외딴섬인 진도로 귀향보내버려,지화의 운명도 한순간에 막장인생으로 변해버리게된다.


세종이 풍수지리나 점치는것에대하여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진 왕인지는 1449년 4월의 조선왕조기록으로 분명하게 알수가있는데 세종이 말할길 "장님인 지화가 운명에 대하여 점친것들이 모두 맞은것은 아니지만,예로부터 성현들이 풍수지리등인 복서를 중히여겼는데,인간세상일로는 알수없는 일들이 생겼을때 무엇으로 의지할수있겠는가,그렇기에 운명에 관한책은 널리 구하여 올리도록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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