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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조선의 최악의 임금중 하나로 뽑히는 인물입니다.인조는 반역을 통하여 정권을 획득하였기에,그를 지지하는 사대부들의 모토인 소중화를 자처하며,대중화인 부모의 나라로 섬기고 받드는것에 인조의 생각이 어떻했든,

자신의 왕권과 부귀영화를 누리고 지키기위해서는 그런척 행세를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결과 백성들은 2번의 전란으로 삶은 피폐해지고 어육이되어갔습니다.이러함에도 인조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위하여 공덕비를 세우며,대갈박을 땅바닥에 박으면서 살려달라고 구걸하며,자신의 영달을 이어가고,자신의 큰아들이 자신을 대신하여


볼모로 청나라에가서 고생했음에도 냉담하다못해,인간으로서는 저지르지 말아야할 큰아들일가전체를 멸해버리는 비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인조는 믿었습니다.자신이 사대부들의 대의명분에따라 부모의 나라 어쩌구하면,자신을 지지해주는 집단들이 전란중에도 자신을 구하고 도와줄것을,그러나 현실에 그렇게 외치며 명분논리주장을 했던 사람들이,인조가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촌각을 다투며 죽을둥,말둥했을때 청나라의 세력이 너무크다고,아무도 자신을 구원을하러 남한산성에 오지를 않게됩니다.

인조는 생각하길,자신을 왕위에 올려주고,자신의 부귀영화를 보장해주던 사대부 집단세력들이 얼마나 전란에서는 나약한지를 깨닫게됩니다.남한산성에서의 마지막상황에 이르러서는 성안의 백성들과 군사들은,이러한 사대부들에게 대놓고 말합니다."너희가 입으로만 나불대지말고 직접 창과칼을 들고,엄동설한에서 먹을것이 없어서 추위와 배고픔으로 굶어죽으면서 직접 싸워봐라"하며 신분질서가 엄했던 그당시 시대상이었지만 사대부들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르자 인조는 사대부들을 버리고,자신의 목숨을 구할방도를 찾아서,대갈박을 땅에 박으며,자신의 아들들을 볼모로 보내어 고생시키는것으로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게됩니다.

한국의 지롤댓글 네티즌문화는 그사람 속이 어떠했든지 상관없이 자신이 보고싶은것,듣고싶은것만을 말하는 사람에게 솔깃하며 열열이 반응하는 막장 사대부같은 한국네티즌들입니다.이런류의 네티즌들은 그 사람이 어떠한 생각이나 가치관을 가지고있든 그 진실이 중요한게아니라 겉으로 보여지는 말과행동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말과행동이냐 아니냐가 중요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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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덜떨어진 자신이 보고싶은것,듣고싶은것만 들으려는 막장 사대부같은 네티즌문화가 잘표현된게 어느 연예인의 학원광고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그분은 이러한 네티즌들을 향하여 "엿먹어라"라는 표시의 사진으로 대응했는데 모습은 다소 거칠었지만,속이 어떤지 제대로 알지도못하면 겉으로만 환호하는 비정상적인 무뇌아수준의 욕설댓글문화의 네티즌들을 가장잘 파악하고 느끼고 있었기에,그렇게 대처할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인조는 전란이 지나고난후,사대부들이 얼마나 위급상황에서는 제일먼저 도망가버리고,나약해지는지 그 교훈을 잊어버리고 앵무새 사대부들을 향하여 "뻑큐"를 외친게아니라 자신의 왕권과 부귀영화를 지키려면 자신의생각이나 가치관의 진실에 상관없이 사대부들이 보고싶은것,듣고싶은것만을 말하고 행동하는것이 제일 편한길임을 알기에,그런척을 하며 일생을 살아갑니다.만약에 인조가 전란후라도 자신의 왕권과 부귀영화의 위험을 무릎쓰고 나라를 위하여 사대부들을 향하여"뻑큐"라는 행동을 보여줬다면,조선후기의 모습은 좀더 다른 모습의 우리역사를 가지게 되었을것입니다.

자신의 가치관이나 생각이 어떻했든 자신을 지지해주는 네티즌들이 듣기원하고 보길원하는 포장되어진 모습과 행동만을 원하는 막장수준의 네티즌들에게는 과감히 "퍽큐"를 표시해주는것이 가장 통렬한 진실이라고 생각됩니다.인조가 븅신육갑질을 하게한 요인들중에 가장큰 요인중 하나가 사대부들이었음도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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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서 인간으로서 최악의 왕을 뽑으라면 조선시대 왕인 인조이다.

인조는 왜 말년에 거이 자멸에 가까운 미친짓을하고 죽게 되었을까?
 
그 배경을 살펴보면 조소원이라는 후궁이 있음을 알수가 있는데,

태생적으로 역사의 반역정권이었던 인조의 즉위도 문제였지만 늙어서도 여색에 미친결과였다.

인조는 54살에 죽었는데 죽기4년전부터 후궁인 조소원이라는 여자에 미쳐


밤마다 "베게"사이로 나누는 대화를 통한 결과는 인간으로서는 생각할수없는 짐승의 행동만을 행하다가 죽었다.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선해지는 경우가 많은데,인조는 죽을때까지 여자에 미쳐서 폐악을 저지르다 죽었기에 인조라는 왕은  왕의대접을 해줄 가치가 전혀없는 인간이라고 볼수가있다.

인조와 조소원사이에도 딸이있었지만,인조의 후궁인 조소원이 스스로 왕위를 이을수도 없었는데,왜 소현세자일가를 저주했는지는 의문인데,그결과는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에의하여 처리가 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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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먼저 그당시 국제적인 안목을 가진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소현세자가 비록 아들이었지만 늘 불안했다.이것은 인조정권이 태생적으로 주둥아리로만 외치는 반청의 기치로 탄생되었기에,국제정세를 잘파악했던 소현세자의 행동과처신은 눈에 가시거리였을 뿐이었다.

인조는 국내의 사대부들에게 인기를 얻고 왕권을 유지할수있는 길이,주댕아리만일지라도,부모의 나라 명나라 어쩌구하는 허울데기 행동을해야함을 잘알고있었다.이것밖에는 광해군을 몰아내어 반역정권을 만들어낸 명분우위가 없었다.

이미 국제정세를 잘 파악했던 소현세자는 이러한 허울데기명분에 연연하지않았기에,인조의 마음속에는 소현세자는 아들이기 이전에,자신의 허울데기 처신을 비웃는것같고,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갈수있는 흉악한눔으로 여겨졌다.

이러한때에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소원은 인조의 마음을 가장 잘파악할수있는 총애받는 후궁이었지만,소현세자빈이었던 강씨와는 아주안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는데,이 근본에는 강씨의 일족과 조씨의 일족간에 외척들의 국가에 참여의 대립이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기에,조소원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자신의 일족이 정치참여를 탐탁치않게 생각했던 소현세자빈에대하여 안좋은 감정을 가지게되는데,조소원과 인조는 그모양새는 달랐으나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부귀영화의 지속측면에서는 서로의 대갈박이 맞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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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죽음은 인조가 독살했다,아니다가 아니라,인조가 소현세자 죽음뒤에 벌인 행동을보면 독살인지 아닌지 미루어 짐작해볼수가 있다.소현세자가 죽기전에 이미 조소원과 소현세자빈 강씨사이에는 암투가 벌어지고있었고,인조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애첩이며,후궁이었던 조소원을 편애했고,세자빈강씨가 하는일은 사사건건 미워했다.결국 인조<->소현세자,조소원<->세자빈 강씨의 대립관계에서 자신의 국제정세관을 븅신취급하는 아들인 소현세자보다 밤마다 귀에 좋은소리를하는 자신의 애첩인 조소원을 더신뢰하게되는데,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인조와 조소원은 뒷날의 문제가 발생하지않도록,철처하게 소현세자의 일가를 말살하게된다.

조소원의 계략을 받아드린 인조는 먼저,홀로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키우던 세자빈 강씨를 모시던 나인을 역모라는 누명을 씌워서 궁녀인 계환과 계옥을 잡아다 옥에서 죽여,소현세자의 죽음에대한 세자빈 강씨가 하고싶은말이나 유언등을 전혀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고립시킨후,허울데기 명분을 붙이고는 세자빈 강씨의 두 오라버니를 잡아다가,곤장을쳐 죽인다.그리고 사관과 신하의 무수한 상소를 모두 배척하고,기어이 세자빈 강씨를 사약을 먹여 죽였다.

인조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애통하고,슬프게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라고 진실로 생각했다면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인조의 친손자들이기에 원손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인조는 어찌된것인지 세자빈 강씨를 죽일때 붙인 허울데기 명분을 손자들에게도 붙여서 모두 섬으로 귀향을 보낸다.

아비가 병으로 죽으면,손자들이 불쌍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주는게 인간의 도리이며,역사상 왕권문제로 자신의 아들을 스스로 죽인 영조조차도 그 손자를 원손으로삼아 돌봤는데,인조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계속하기에 사관들이 얼마나 황당했으면,엄한 왕조의 기록물에 의문스럽다는 표현을 적어놓았는지 알수가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수없는 짓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인조를 그당시 신하들과 사관뿐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했던 청에서는 용골대를 보내어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어디있는가 묻고,소현세자의 큰아들을 청으로 데려가 양육 하겠다고한다.이러한 제의가있은후 갑자기 섬에 귀향가서 살던 소현세자의 큰아들의 죽음으로 대답이 돌아왔다.뒤이어 둘째도 죽고,뒤이어 마지막남은 아들도 남해어딘가에 유배되었다가,왕의 친손자였음에도 역사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마지막 세째도 왕의 친손자가 살아서 일가를 이루어 살았다면,당연히 역사속에 기록되어있을것인데.아무런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는것은 어릴때 이미 죽음을 당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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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자신의 친아들,며느리,손자등 모두를 죽이는데 이러한것이 51살에서 54살까지의 3년사이에 모두 이루어졌다는것이다.인조는 자신의 인생에있어 마지막 남은 3년의 삶의 기간속에 들어있던 왕권,부귀영화,후궁의 미색을 취하기 위하여 이러한짓을 태연하게 벌였다는것이다.

조소원의 종말은 인조가 54살의 나이로 죽자,뒤를 이은 효종3년 1652년에  조소원이 세자빈 강씨에게 씌웠던 역모혐의처럼 효종에의하여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잡혀 죽임을 당했을뿐만아니라,조소원의 일가친척등이 모두 잡혀죽여 패가망신 하게된다.

인조는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손자들을 모두 죽여놓고 단지 3년을 더 살았고,조소원은 스스로가 지은 악업에따라,세자빈 강씨가 죽은지 6년만에,자신뿐아니라 일가친족 모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인과응보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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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2대왕인 남해왕이죽자,3대 왕위를 누가 물려받을지에대하여 정해지지않았다.남해왕에게는 아들인 유리와 사위인 탈해가 왕권의 후보였다.



먼저 유리가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는 마음으로 탈해에게 말하길 '백성들의 추앙을받는 자네가 왕위를 잇는것이좋겠네"


탈해가 말할길" 왕의 자리는 그 그릇에 맡는 어질고,현명한 사람이 맡아야하는것으로 아무나 감당할수있는것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현명한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알고있습니다(석탈해는 자신보다 유리가 더많은 치아를가지고있는것을 알고 있었던듯하다)그리고는 떡을가져다 한입씩 물고 떡에난 이빨자국을보니 유리가 많았기에 신라의 3대왕은 유리왕이되었다.


이후로 신라의 왕을 이사금이라고 불렀는데,이사금이란 "이의 자국"이라는 기원을가지게되었다.신라3대 유리왕은 과부,고아,자식없는 노인등의 처지가 불우한 백성들에게 더많은 관심을가지고 정치를하였기에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하고,복되었다.


유리왕시대에 신라의 6부에게 성씨를 하사하였는데 양상부는 이씨,고허부는 최씨,대수부는 손씨,간진부는 정씨,가리부는 배씨,명활부는 설씨라는 성을 내렸다.이,최,손,정,배,설씨 6가지 성씨는 신라의 6부족과 관련이 있는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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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신라의 설씨 성을가진 처녀는 얼굴이곱고,심성이 지조가있었기에.삼국사기열전에 설씨처녀에대하여 따로 부가하여 기록할정도였다.유리가 죽을때 유언을 남기길 자신의 뒤를이을 왕은 자신의 아들들이 아니라,탈해에게 왕위를 잇도록 엄명하고는 죽었기에 신라의 4대왕은 석탈해가 되었다.유리와 탈해의 관계는 이처럼 서로를 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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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사진은 티스토리달력 사진공모전의 출품작입니다.사진제목은 "바위섬"입니다.바위섬~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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