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kungmi
2009. 2. 27. 14:38
2009. 2. 27. 14:38
우리나라 역사에서 인간으로서 최악의 왕을 뽑으라면 조선시대 왕인 인조이다.
인조는 왜 말년에 거이 자멸에 가까운 미친짓을하고 죽게 되었을까?
그 배경을 살펴보면 조소원이라는 후궁이 있음을 알수가 있는데,
태생적으로 역사의 반역정권이었던 인조의 즉위도 문제였지만 늙어서도 여색에 미친결과였다.
인조는 54살에 죽었는데 죽기4년전부터 후궁인 조소원이라는 여자에 미쳐
밤마다 "베게"사이로 나누는 대화를 통한 결과는 인간으로서는 생각할수없는 짐승의 행동만을 행하다가 죽었다.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선해지는 경우가 많은데,인조는 죽을때까지 여자에 미쳐서 폐악을 저지르다 죽었기에 인조라는 왕은 왕의대접을 해줄 가치가 전혀없는 인간이라고 볼수가있다.
인조와 조소원사이에도 딸이있었지만,인조의 후궁인 조소원이 스스로 왕위를 이을수도 없었는데,왜 소현세자일가를 저주했는지는 의문인데,그결과는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에의하여 처리가 되게된다.
인조는 먼저 그당시 국제적인 안목을 가진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소현세자가 비록 아들이었지만 늘 불안했다.이것은 인조정권이 태생적으로 주둥아리로만 외치는 반청의 기치로 탄생되었기에,국제정세를 잘파악했던 소현세자의 행동과처신은 눈에 가시거리였을 뿐이었다.
인조는 국내의 사대부들에게 인기를 얻고 왕권을 유지할수있는 길이,주댕아리만일지라도,부모의 나라 명나라 어쩌구하는 허울데기 행동을해야함을 잘알고있었다.이것밖에는 광해군을 몰아내어 반역정권을 만들어낸 명분우위가 없었다.
이미 국제정세를 잘 파악했던 소현세자는 이러한 허울데기명분에 연연하지않았기에,인조의 마음속에는 소현세자는 아들이기 이전에,자신의 허울데기 처신을 비웃는것같고,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갈수있는 흉악한눔으로 여겨졌다.
이러한때에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소원은 인조의 마음을 가장 잘파악할수있는 총애받는 후궁이었지만,소현세자빈이었던 강씨와는 아주안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는데,이 근본에는 강씨의 일족과 조씨의 일족간에 외척들의 국가에 참여의 대립이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기에,조소원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자신의 일족이 정치참여를 탐탁치않게 생각했던 소현세자빈에대하여 안좋은 감정을 가지게되는데,조소원과 인조는 그모양새는 달랐으나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부귀영화의 지속측면에서는 서로의 대갈박이 맞아떨어졌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인조가 독살했다,아니다가 아니라,인조가 소현세자 죽음뒤에 벌인 행동을보면 독살인지 아닌지 미루어 짐작해볼수가 있다.소현세자가 죽기전에 이미 조소원과 소현세자빈 강씨사이에는 암투가 벌어지고있었고,인조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애첩이며,후궁이었던 조소원을 편애했고,세자빈강씨가 하는일은 사사건건 미워했다.결국 인조<->소현세자,조소원<->세자빈 강씨의 대립관계에서 자신의 국제정세관을 븅신취급하는 아들인 소현세자보다 밤마다 귀에 좋은소리를하는 자신의 애첩인 조소원을 더신뢰하게되는데,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인조와 조소원은 뒷날의 문제가 발생하지않도록,철처하게 소현세자의 일가를 말살하게된다.
조소원의 계략을 받아드린 인조는 먼저,홀로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키우던 세자빈 강씨를 모시던 나인을 역모라는 누명을 씌워서 궁녀인 계환과 계옥을 잡아다 옥에서 죽여,소현세자의 죽음에대한 세자빈 강씨가 하고싶은말이나 유언등을 전혀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고립시킨후,허울데기 명분을 붙이고는 세자빈 강씨의 두 오라버니를 잡아다가,곤장을쳐 죽인다.그리고 사관과 신하의 무수한 상소를 모두 배척하고,기어이 세자빈 강씨를 사약을 먹여 죽였다.
인조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애통하고,슬프게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라고 진실로 생각했다면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인조의 친손자들이기에 원손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인조는 어찌된것인지 세자빈 강씨를 죽일때 붙인 허울데기 명분을 손자들에게도 붙여서 모두 섬으로 귀향을 보낸다.
아비가 병으로 죽으면,손자들이 불쌍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주는게 인간의 도리이며,역사상 왕권문제로 자신의 아들을 스스로 죽인 영조조차도 그 손자를 원손으로삼아 돌봤는데,인조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계속하기에 사관들이 얼마나 황당했으면,엄한 왕조의 기록물에 의문스럽다는 표현을 적어놓았는지 알수가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수없는 짓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인조를 그당시 신하들과 사관뿐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했던 청에서는 용골대를 보내어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어디있는가 묻고,소현세자의 큰아들을 청으로 데려가 양육 하겠다고한다.이러한 제의가있은후 갑자기 섬에 귀향가서 살던 소현세자의 큰아들의 죽음으로 대답이 돌아왔다.뒤이어 둘째도 죽고,뒤이어 마지막남은 아들도 남해어딘가에 유배되었다가,왕의 친손자였음에도 역사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마지막 세째도 왕의 친손자가 살아서 일가를 이루어 살았다면,당연히 역사속에 기록되어있을것인데.아무런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는것은 어릴때 이미 죽음을 당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가 있다.
인조는 자신의 친아들,며느리,손자등 모두를 죽이는데 이러한것이 51살에서 54살까지의 3년사이에 모두 이루어졌다는것이다.인조는 자신의 인생에있어 마지막 남은 3년의 삶의 기간속에 들어있던 왕권,부귀영화,후궁의 미색을 취하기 위하여 이러한짓을 태연하게 벌였다는것이다.
조소원의 종말은 인조가 54살의 나이로 죽자,뒤를 이은 효종3년 1652년에 조소원이 세자빈 강씨에게 씌웠던 역모혐의처럼 효종에의하여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잡혀 죽임을 당했을뿐만아니라,조소원의 일가친척등이 모두 잡혀죽여 패가망신 하게된다.
인조는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손자들을 모두 죽여놓고 단지 3년을 더 살았고,조소원은 스스로가 지은 악업에따라,세자빈 강씨가 죽은지 6년만에,자신뿐아니라 일가친족 모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인과응보의 원인이 된다.
kungmi
2009. 1. 12. 21:04
2009. 1. 12. 21:04
심성희가 그렸다는 240여년전의 그림은 어디로 사라졌고,왜 영조임금은 전복을 언급하며 캐기어렵다고 했을까?
심성희(1684-1747)는 청송심씨로 이조참판,탐라어사,도승지,대사헌등의 벼슬을 했던 문관으로 그림에도 능했음을 알수있는데,
영조 45년 1769년의 기록에 영조가 말하길"심성희가 전복캐는 그림을 그려서 바쳐는데,그것을보고 전복캐는것이 힘든일임을 알았다"라고했는데,
그림이 얼마나 세세하게 잘 그려져 있었길래,그림만보고도 영조는 알수있다고했겠는가
오늘날에 심성희가 그렸다는 "전복캐는 그림"이 발견된다면 보물이겠는데,이 그림의 존재유무는 아직까지 발견되지않았다.오늘날에도 자연산 전복은 오래전방식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바다에서 여자들이 직접 채취하기에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전복캐는 모습은 비슷할것인데,
실제로 전복을 어떻게 채취하는지는 본적이 없기에,영조가 그림을보고 알았다는 전복캐는 고난함과 어려움이 어떤모습을 말하는것인지 알수는없다.
그러나 상식선으로 생각해봤을때,여자들이 깊은바다속의 바위에 딱붙어있는 전복을 숨을 참으며 딴다는것은,수영장에서 물속에 잠겨있는 물건을 숨을 참으며 들고 나오는것도 힘든데,살아있는 전복이 바위에서 쉽게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을것이기에,인간의 짧은숨으로는 수십번은 물속을 왔다갔다해야 겨우 캘수있었을것이다.
기록을 통하여 오래전부터 전복은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품인 귀한 음식재료였음을 알수있고,몇백년전에도 전복을 캐어바치는 해녀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자연산 전복을 먹을때는 왜 가격이 이렇게 비싼가?이런 볼따구 맞을 말을하지말고,영조임금조차도 캐기어려워,힘들겠다고 생각했던 자연산 전복을 캐주는 해녀분들이 있어서,몸에 좋은 전복을 먹을수 있는것이구나라는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겠다.
kungmi
2009. 1. 4. 17:54
2009. 1. 4. 17:54
역사속에서 칭기스칸과 연개소문를 비교해보았다.단재 신채호선생이 우리나라의 오천년역사의 제일의 인물이라고했던 연개소문,뭔가 두 영웅에는 닮은꼴과 차이점이있을것이다.
역사에서 왜 칭기스칸은 위대한 인물로 전해내려오고,연개소문이 그렇지못했는지 무엇이 닮았고,무엇이 달라는지,만약 두사람이 세계의 판도를 놓고 일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칭기스칸과 연개소문의 공통점 1.두 영웅의 아버지는 신분자체가 높은지위를 가지고있었으나,그 신분를 대를 이어 얻는과정이 순탄치 못했고,스스로의 힘과능력으로 쟁취하였다.
2.칭기스칸과 연개소문은 어릴적부터 활과 칼에 뛰어난능력을 가지고있었다.3,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있어 존재자체가 카리스마였다.4.결단성에있어서 상식을 뛰어넘었다.5.종교자체에 관대했으며 특정종교가아닌 일종의 샤머니즘같은 자신만의 종교를 믿었다.6.외적과 싸울때는 저항했던 적은 하나도 남기지않고 죽였다.7.전장에서 싸우다 말위에서 죽는것을 신념으로 삼았다.
연개소문이 칭기스칸처럼 위대한 인물로 전해지지않는것은 첫째가 스스로가 황제가 되려고하지않았고,둘째가 자식간의 우애를 만들어 내지못했기때문이다.연개소문이 스스로 고구려의 지존으로 나아갔다면,자식들이 불화도 생기지 않았을것이다.칭기스칸의 아들들또한 권력에있어 화합하지 못했다.그러나 아들대에서 나라가 더욱번창한것은,각자가 다스릴나라를 생전에 정해줬기때문이다.하지만 연개소문은 말로는 자식간의 우애를 강조했으나,스스로가 황제가 아니었기에,각 아들들에게 물려줄 나라가 없었다.
칭기스칸이 가장혐오했던 인간상은 자신의 주인을 배신하는 인간이었으며,아무리 자신에게 이득되는 배신을 한사람일지라도,자신이 모시던 주인을 배신한 부하는 상을주는게아니라 모조리 죽였다.그러나 반대로 적이라고할지라도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끝까지 저항했던 사람은 후하게대하고,신하로 삼았다.
만약에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있은후 500년지난후 생겨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과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세계의 판도를 놓고 싸우게되었다면,전력상으로 몽골기병은 최대 20만이 넘지않았고,연개소문의 사수대첩에서 당나라 30만군대를 전멸시켰을때 고구려의 기병은 20만명정도로 볼수가있다.
연개소문의 군사력은 국력이나 기병수에있어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보다 못하지않았다.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지휘하던 고구려기병은 당시 중원을 통일하여 적수가없었던 당나라의 기보병을 맞아 이긴것이고,칭기스칸의 몽골기병또한 자신보다 훨씬 전력상으로 많은군사를 가진 당시 최대의 세력을 이루었던 금나라의 40만대군을 전멸시킨것을 보았을때 연개소문과 칭기스칸은 지휘력에있어 탁월했음을 알수있지만,중원통일제국을 상대하여 이겼던 연개소문이,고려,송나라,금나라의 삼국균형을 유지한 판도에서 하나씩 상대했던 칭기스칸보다는 좀 더강한 지휘력을 가졌다는 생각이든다.
만약에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과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금나라와 몽골의 결전의 분기점이되었던 야호령전투와같은 상황으로 일대결전을 벌인다고 가정한다면,승패는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전멸이었을것이다.연개소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군사를 지휘하는 전술,전략에있어 신적존재였다.
통일제국 당나라는 연개소문이라는 존재가 살아있는 그자체에도 상당한 공포를 느꼈음을 역사기록들은 말해주고있다.연개소문이나 칭기스칸은 일반 황제나 왕처럼 싸우는 군사들의 뒤에서 양산을쓰고 말로만 지켜보는 그런 스타일을 가진사람들이 아니라,직접 선두에서 군사들과함께 적과싸우는 스타일이었다.
전투지휘 스타일로봤을때 연개소문과칭기스칸이 전장에서 만났다면,선두에서 서로 맞짱을 떳을것이고,그 주위를 호위하며 주군을 보호하려는 군사의 사기가 승패를 결정지었을것인데,연개소문은 왕조차도 직접 단칼에 두동강내버릴정도로 과감한 기를 가지고있었고,전장에서는 항상 병사들이 자는것과 먹는음식을 똑같이하여 한몸을 이루어지냈기에,연개소문이 나아가서 싸운싸움은 생애에있어 단한번도 패한기록이없는 불패의신화를 가졌다.
그에반해 칭기스칸을 따르는 몽골기병은 패한적없는 기병같지만,칭기스칸의 생애있어 패하여 도망다니는일도 많았다.고구려 불패신화를 이끌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 20만,그리고 세계를 제패했던 칭기스칸의 몽골기병 20만이 결전하게된다면,선방은 연개소문이 "나를 따르라"하고 치고 나갔을것이고,마찬가지로 칭기스칸또한 선두에서서 돌격하였을것이다.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의 주특기는 직접 적의 기병이나보병과 일대일로 싸우는게아니라 말위에서 적을 옆면이나 사면을 회전하며 적이 나아가는 속도에 맞춰서 화살를 쏘며 빠지는 전술이었기에,뭉쳐서 일대일로 육탄전으로 싸우는 전술과전략을 가진 중원이나 유럽의군대들은 적과 싸워보기도전에 토끼몰이처럼 희생만당하다 전멸하게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에게있어 고구려벽화고분에서도 볼수있듯이 달리는 말위에서 뒤를 돌아보며 화살을 쏘는 모습이 낮설거나,신기한것이 아니었다.중원이나 유럽에서나 통할 그러한 칭기스칸의 전술과전략은 고구려기병들에게는 통하지않는다.몽골기병이 가졌던 장점은 고구려기병또한 다 가지고있는것이고,승부의 분기점은 군사를 지휘하는 전술과전략이었을것인데,이점에있어서 연개소문의 능력은 중원통일제국 당나라도 전패를하고 돌아갈만큼 뛰어났다는점이다.
아무리 몽골초원을 통일한 칭기스칸이라고해도,연개소문에게는 패했을것이다.역사에서 가정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칭기스칸의 몽골기병vs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의 승패를 걸라고한다면,나는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에 걸겠다.그만큼 연개소문의 전술과전략은 신묘그자체였다.
몽골기병이 패전한 상대방에게 냉혹하게했다고하지만,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관용을 주는 기병은아니었다.우리나라 역사기록에서 외국의 침략군에대한 대승의 기록을 남기게했던,수나라와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도 전멸은아니었다.
연개소문의 성격과기록을 보았을때 사수대첩에서 당나라의 30만명의 병사중에 단1명도 살려보내주지않았고,외국사료나 우리나라사료 모두에 전멸이라고 기록되어진 대첩은 연개소문의 사수대첩이 유일하다.그만큼 극강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 12세기 다른나라들이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온다는 공포보다,
통일제국 당나라를 더 무서움에 떨게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전술과전략,용맹성,기마능력에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보다 한수위에 군사집단이었다고 생각한다.결과적으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vs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맞짱을 떴다면,몽골기병이 전멸했을것이고.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12c에 존재했다면,고려와 강화하는정도가아니라,칭기스칸의 몽골제국자체가 탄생하지 못했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