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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는 궁녀처럼 벼슬인 품계를 받는 신분도 있었지만,궁궐을 드나들며,대비전,동궁전등에서 궁녀들이 담당하지않는 허드렛일을하는 노비신분의 천인들인 파지와 무수리가 있었다.


파지는 사내아이를 말하고,무수리는 소녀아이를 말했는데,이들의 신분은 천민이었다.


천출이기에 양인신분을 얻기도 쉽지않았는데,중전의 낳은 아이에게 젓을 먹이는 유모들의 신분또한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특별대우를 받는 신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민이었다.



간혹,아이를 잘 키워준 유모역할의 공으로,노비의 신분을 벗어나 양인의 신분을 얻는 경우도있긴 했지만 특별한 경우일뿐이었다.파지나 무수리들은 궁녀들보다 신분상으로 낮은 천민이었지만,궁녀들에게 메인 숙명적 한계인 오로지 왕이외의 남자는 업다라는 속박은 없었다.

궁녀들중에서 병이들어,간혹 궁궐을 나가서 사는 경우도 있었는데,이런경우도 죽을때까지 궁녀였던 굴레는 벗어날수가 없었다.궁녀의 신분이었다가,궁궐밖에 나가서 일반인으로 살아갈때,이들을 아내로 맞아드리려는 "간큰남자"도 드물었지만,있었다해도,그결과는 비극적이었는데,역사속에서 궁녀를 자신의 아내나첩으로 삼았던 "간큰남자"는 있었을까? 있었다.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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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광해군이 집권하던 시대인 1613년,궁녀중 영생이라는 여자가 병이들어,궁궐밖으로 나가서 살게되었는데 광해군의 옹립에 공을 세운 정인홍의 일파중에 임혁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신분질서가 하늘의 뜻이고,진리처럼,공자왈,맹자왈했던 시대에 왕의 여자였던 궁녀를 자신의 아내나 첩으로 맞아드리는것은 간이 배밖에 나오지 않고는 실행할수없는 일이었다,

간큰남자 임혁과 영생은,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영생왈:아무리 제가 병때문에 궁밖에 나와서 살게되었다해도,궁녀였는데,궁에 알려지면 나리에게 피해가 있을것인데 저를 버리시옵소서 임혁왈:영생아,사랑에 국경이 어디에 있겠느냐,너가 비록 궁녀였다고는해도,현재는 아니지않느냐,그리고 우리가문이 명문가인데,너하나 못지켜주겠느냐,내가 목숨을 잃을지언정,너를 버리지 않겠다.

이둘이 서로같이 살고있다는 소식이 급기야,궁궐에까지 들어가게되었는데,신하들이 들고일어나 임혁은 쳐줄일놈이고,위아래도없는 금수만도못한 강상의죄를 지었으니,참수형으로 다스려야한다고 연일 광해군에 상소를 하게된다.

광해군이 생각하기에,임혁의 잘못은 있으나,임금에대한 역신으로 참수형으로 처단하면,임혁뿐만아니라,가문자체가 멸문지화가 되기에,자신의 측근공신인 정인홍의 일파였던 임혁의 가문만은 살려주고자,사약을 내려 죽이는 형벌로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왕조시대에는 같은죽음일지라도,어떤형으로 죽느냐에따라 죄를 진 본인에게만 화가 미치기도하고,일가친족모두가 연좌로 걸려 효수가되기도했기에,tv속에서 임금이 신하에게 사약을 내렸는데 신하가 사약을 마시며,임금의 성은에 감사합니다라고 임금이 사는 궁궐을 향하여 절을하고 죽는 모습을 볼수있는데,이게 다 이유가 있는것이다.

부모,형제,자식등을 묶어서 목숨을 댕강시키지않겠다는 표시였기에,죽는 신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되었든,그렇지 않던간에,부모,형제,자식의 장래와 목숨의 안전은 보장해주겠다는것이기에 감사할수도 있는것이다.우리나라에서 사약을 내리는것이 선처였다면,이웃나라 일본에서는 할복이였다고 볼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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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은 연일 신하들의 상소에 항복한 광해군은 임혁을 참수형에 처하게되는데,같은날 영생도 죽음을 맞이하게되었지만,영생에게는 사약을 내렸다.같은장소에서 같은날,같은시각에 두사람은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게되는데,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묻자,임혁왈:사랑이 죄라면,떳떳이 죽겠다.영생왈:우린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인가봐요,마지막 죽는순간까지 눈물맺힌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무언가를 기원하듯 미소와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죽었는데.주위에 이모습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궤이하게 생각하며 말하길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구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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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죄수가 남자죄수들의 방으로 보내져 윤간당하는 형벌이,우리나라에도 있었는데,이러한 일이 왜 일어났었는지,그 배경부터 살펴보면

1596년 조선의 암군중 하나로 평가받는 선조, 재위29년 어느 추운 겨울날 발생했던 이사건은 그시기가 임진왜란시기,

선조는 의주까지 백성을 버리고 혼자 도망가,여차하면 중국으로 튀어서 도망갈 준비를하고 있었는데,마침 원조하러 중국의 군사들이 도착했기에,

그들의 비위를 잘맞춰서 일본군을 몰아내주기만을 학수고대했고,

백성들 또한 얼른 전란이 끝나 평화가 찾아오길 기원하는 마음이 강했지만,중국군사들과 일본군은 서로의 지도부 대가리들의 비위만을 맞추는 시늉만이 더 중요했기에 되도록 싸우기보단 ,서로 말을 맞춰서 자신들의 군사가 피해가 없는 방향을 지향했기에 주둥아리로만 싸우는것을 좋아하였다.

어느때고 마찬가지지만,나라에 전란이 일어나면 가장 피해를 보는것이 힘없는 어린아이와 여자들인데,툭하면 천자의 군사가 도와주러왔는데 그런편의도 못봐주냐하면서,마을에서 보이는 여자들은 족족 자신의 군영으로 잡아다가,중국군장교나 수하들이 첩이나 성적노리개감으로 삼는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현실을 보다못한 지방관리가 선조에게 상소를 하면 선조의 반응은 "그럼 어쩌라고?" 너가 직접가서 따져보던지,이러면,지방관리는 명나라군영을 찾아가서,이번에 잡아간 마을의 아무개는 이미 결혼한 여자이므로 돌려보내줄수 없느냐고,명분을 내세워 사정하고 데리고,오고하니,일반민가에서는 그래도 자신들의 여식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안볼수있지 않을까해서,조혼풍습이 유행하게되었는데,이러다보니 중국군의 성적노리개로 유린당하는 문제에대하여는 힘없고,가난한 백성들의 여식들이나,신분적처우가 미천한 여자들이 일순위가 될수밖에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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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 5년차에 접어들무렵인 1596년,중죄를 지어서,목에 나무칼을찬 여자죄수가 감옥으로 들어왔는데,고려와 조선시대에,정식관리가 아닌,지방의 잡다한 공무를 보는 향리들을 통틀어 색리(色吏)라고 불렀는데,감옥의 업무를 담당하던 색리가 으슥한 밤에 목에 칼을찬 여죄수에가 다가가서 말하길 "너는 어자피 죽을목숨이잖느냐,너도 알다시피  죄없는 마을의 여자들이 중국군사들에 의하여 강제로 잡혀가 성적노리감이 되고있는데,덜 피해를 볼수있게 너가 희생좀 해라"하고는 여자죄수의 목에 차던 나무칼을 풀어주고는 중국눔에게 넘겨 밤새도록 중국눔에게 시달리게했다.

이튼날 명색이 죄수신분이었기에,여자죄수가 초죽음인 상태 다시 옥으로 돌아오자,색리가 여자죄수에게 말하길" 너 혼자 옥에있으면 몸도 그런데,돌봐줄 사람도없고,무서울거같으니,남옥에서 같이 지내는게 좋겠다"

여자죄수왈 "안돌봐줘도 좋다, 이캐새퀴야!!!,혼자 있게해달라,그러나 여자죄수의 외침은 아무런 소용이없었고,여자죄수는 남자죄수들과 같은방에 집어 넣어져,급기야는 이러한 사실이 선조에게까지 이르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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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왈:그런 일이 있었냐? 어떻게 했음 좋을까? 신하들왈:"그날 감옥을 담당해던 색리를 파면하는 정도가 어떨지?" 선조왈: 그렇게 하도록해라,신하들왈: 알겠습니다.아,그런데 여죄수를 성적노리개로 이용한 하늘같은 중국인은 어떻게? 선조왈:"나보고 어쩌라고,내가 직접 창칼들고 싸우러 나가리? 알믄서,사람을 보내어,앞으로는 이런일이 되도록 없도록,넓으신 아량을 베풀어주십사하고 잘구슬려봐,명나라군사를 뿔나게해서 철군하게만들면,보낸사람 목이 달아날걸 각오는 잘하고,중국군사도움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되겠냐,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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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년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왕위를 차지하고자하는 사람들사이에 암투가 벌어졌다.



김우징과 김양은 김우징의 아버지인 균정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하였고,제륭의 어머니를 누이로둔 김명은 제륭을 왕위에 오르게하려고하였다.


이 두세력간에 궁중암투가 벌어지는데,먼저 왕궁을 접수하여 왕위에 오른것은 균정이었으나,이러한소식을 들은 제륭과김명의 군대가 적판궁을 포위하여 두세력간에 전투가 벌어지게된다.



이 두세력간의 군사를 지휘하는 실세인물은 김양과김명이었다.포위된 궁의 수비대장인 김양이 말하길"새 임금이 여기에 계시는데,어찌하여 반란을 일으키는가?"하고 반란군의 사기를 꺽으려고하였으나 김명의 부하였던 배훤백이 김양을 향하여 화살을 쏘아 맞추며 물러서지않는다면 죽이겠다는 표시를하자,


이에 균정이 거사가 실패했음을 알고 김양에게 말하길"적의 군사와 맞서싸우기에는 궁을지키는 우리의 군사가 숫적으로 너무적다,각자 포위를 돌파하여 훗날을 도모하자"하니,포위를 뚥고 김양은 나아갈수있었지만,균정은 도중에 잡혀 죽음을 당하게된다.


균정이 잡혀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양은 하늘을 두고 "균정의 한을 반드시 갚겠다"는 맹세를 한다.궁궐의 전투에서 승리한 제륭이 왕위에 오르니 이사람이 희강왕이었다.희강왕은 제위3년만인 838년에 자신의 매부였으면서,왕위계승을 도왔던 김명의 반란에의하여 스스로 자결을하게되는데,김명 희강왕의 뒤를이어,신라의 44대 민애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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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식을들은  김양은 자신의 맹세를 지킬때가 왔음을 알고,군사를 모아 장보고가 지휘하는 청해진으로가서 균정의 아들 김우징과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군사와 합류하여 막장 민애왕을 치러 경주로 진격하게된다.


이때 김양과장보고의 연합군사의 군세는 기병3,000명 보병 2,000명인 대략 5,000명의 군사였다.이러한 소식을 들은 민애왕은 838년 12월 광주에 군사를 집결하여 김민주로하였금 막게하였으나,대패하게된다.


839년 1월 김양의 군사가 대구에 이르렀을때 민애왕은 남은군사를 모두모아 직접나아가 결전하였으나 또다시 패하자 도망가다가 김양의 병사들에게 포로로잡혀 죽음을 맞이하게되는데,포로중에는 김양을 화살로 쏘아 맞추었던 배훤백도 있었다.민애왕을 처단한후,배훤백을 보고 김양이 말하길 "개는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주군을 위하여 나에게 화살을 쏘은것은 부하의 당연한 도리이다"하고 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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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년 4월 왕궁을 정비하여,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하니,이사람이 신라45대 신무왕이다.김양은 대중11년 8월13일(857년) 김우징의 아들인 문성왕19년에  50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문성왕은 김양의 장례를 김유신장군의 장례와 동급으로 행하였고,문성왕또한 김양이 죽은후 한달후에 연이어 죽게되는것을 보았을때 그당시 신라에있어 김양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있다.


김양은 균정,김우징(신무왕),문성왕 3대에걸친 인연을 가진 무인이었을뿐만아니라,그당시 신라에서 최대의 군사조직이라고 할수있는 청해진의 장보고와 맞설수있는 대등한 힘을가진 무장이아니었을까 생각해볼수가있고.역사의 이면속에 감춰진 장보고의 최대 라이벌이었을것같은 김양장군에대하여는 일반인들의 역사속에서는 잘알려져 있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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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나 기타사정으로 궁궐밖에 나가살게되는 궁녀들은 비록 민가에서 산다고해도,왕의 여자들이었던 까닭에 결혼하거나,남자와같이 살수가없었다.


형식상으로는 민간인 처녀들이었기에 법으로 궁녀의 신분이었다가,민간인이되었다고 결혼하지말라는 그러한법은 없었지만,


왕가의 입장에서 왕조의 여자였던 궁녀들을 신하가 데리고산다는것은 주.종의 신분관계가 엄격한 조선유교주의사상하에는 불충의 개념이 될수밖에없었기에,나서서 결혼하려는 사람들은 존재할수가없었다.


이러한 예외를 깬 특이한 경우가 있었는데,남치원이라는 사람이다.병으로 궁궐밖을 나간 궁녀을 첩으로 맞아들여서 살고도,무사했을뿐만아니라,벼슬까지도 할수있었는데,어떠한 사연이 있었길래 감히 왕의여자를 첩으로 두고도 살아남을수있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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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의 슬하에는 배다른 형제자매가 많았다.성종의 첫째아들이 연산군이었고,배다른 둘째아들이 진성대군인 중종이었다.연산군과 진성대군의 나이차는 12살이었는데,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는 일찍죽었고 진성대군의 생모인 숙의윤씨(정현왕후)는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의원수를 갑는다고 일으킨 피바람속에서도 숨죽이며 살아남아 자신의 아들인 진성대군과 자신의 목숨을 유지할수있었다.


연산군과 진성대군의 배다른 형제자매중에 성종의 후궁인 숙의심씨의 맏딸인 경순옹주가 남치원에게 시집을갔기에 남치원은 성종의 부마이면서,연산과진성의 처남이기도했다.숙의 심씨와 훗날 중종의 어머니가되는 숙의 윤씨는 서로를 잘아는 사이의 친분을 가지고있었다.


연산군시대에도 남치원은 우대를 받았고,중종시대에도 배려를받았는데,중종은 연산군을 내쫓고 왕이된 임금이었기에,쫒겨난 왕의 측근들은 대부분 처단되기마련인데,남치원은 연산군의 배려를많이 받았는데도,중종대에 이르러도 특혜를 받는걸보면 평소처신을 잘하지 않았을까하겠지만,


남치원이라는 사람의 일상생활행동을 살펴보면,오늘날의 망나니나 조폭같은 인물이었기에,성종의 여러 부마들중 한사람인 부마라는 관점보다는 경순옹주의 어머니인 숙의심씨와 중종의 어머니인 숙의윤씨의 관계가 특별했다고 생각할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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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치원에대하여 기록된 행동들을보면,다른지방을 50명정도의 무리를 이루어 여행다니며,자신에게 잘못보이는 사람은  일부러 시비나꼬투리를 잡아 그자리에서 패거나 가둬둔다든지,승려들이 사냥하는데 방해가된다고 절간자체를 박살내버린다든지 일반사람같았으면,중한형벌을 받았을것인데,유야무야로 넘어가는 기록들뿐이다.


평소행실이 이모양이었던 남치원이 궁궐의 대비전에서 나인으로 일했던 궁녀가 병으로 민가에 나가살게되었는데,그 궁녀를 데려다 자신의 첩으로 만들어 버린일이 생기게된다.다른것은 그냥 넘어간다고해도,이것은 그냥넘어갈수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조정에서는 연일 궁녀를 데려다 첩을삼은 남치원은 불충이기에,잡아다 죽여야한다고 상소를하니,


처음에는 이복동생의 남편이였기에 생각해서 눈감아 줄려고해도 궁녀의 체계자체를 무너뜨릴수있는 행위였기에 형벌은 내려야겠고 잡아들이면,반드시 죽여야하는 불충에 해당했기에,처단해버릴까 하다가도,어제밤에 자신의 모후이면서 대비인  정현왕후가 한말이 귀가에 멤돌았다.


"성종시대,악독한 폐비윤씨의 피박속에서 그리고 연산군아래에서도 나와 숙의심씨는 서로를 도우며,이겨냈었는데 이번일은 불문하고 넘어갔으면 하네" 하지만 어머님,신하들의 상소가 너무강해서......."신하들의 말은 중요하고,내말은 암것두 아니라는 말이지,아이고 내가 지금까지 누굴믿고 모진 연산군의 핍박속에서도 살았는데,늙으면 빨리죽어야 할까보네 내말은 상관말고,신하들 말 잘듣고 잘사시게,그만 물러가게......."  어머님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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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대간들이 남치원을 잡아들여 죽이라고 탄핵했지만,중종의 입에서 나오는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불허한다,불허한다,불허한다" 결국 남치원을 유배를 시키는가싶더니,유야무야되어지게된다,중종의 생몰년은 1488-1544 이고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는1462- 1530 이기에,남치원은 중종25년 1530년까지는 중종의 어머니의 보호를 받았을것같기는 한데,남치원의 공식적인 벼슬은 중종14년 1519년이후로 사라져,생몰년을 알수가없다.


병으로 민가에나가 사는 궁녀에대하여,사람들이 남치원처럼 행동했다가는 목숨이 열개라도 부족한 왕과신하의 관계가 엄격했던 불충하면 같은형제라도 죽임을 당하는 조선시대에서 부마로서 대놓고 꺼리김없이 행동하며 살다간 인물 1위를 고른다면  남치원이다.중종과 남치원의 기록을 살펴보다보니,왕이라고할지라도,자신의 어머니가 후원하는 사람에게는 어쩔수가 없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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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나는 조선의 국모이니라"라고 외쳤다는 고종의 왕비 민황후는 과연 그러한 말과 자세를 보여줬을까를 아무리 역사기록을 찾아보아도 보이지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로 궁녀의 복장을하여,구차하게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려고했을뿐이었다.


조선의 민황후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행동을했던 대비되는 왕비가 고려에 있었으니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14세기 후반에 머리에 빨간두건을쓴 도적의 무리였던 홍건적이 자주 고려를 침범하여,우리나의 백성들 괴롭히곤하였다.훗날 이 도적의 무리의 괴수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데,근본부터가 도적의 무리들이였기에 허약한 근본토대를가진 왕조일수밖에없었다.


1363년 고려 공민왕의 나이 33세가 되던해,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의 논공행상에 불만을품은 김용이라는자가,자객단을 이끌고 흥왕사의 행궁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나라일을 보던 공민왕을 암살하려고하였다.


김용의 자객단이 흥왕사로 급시에 습격을가하자,공민왕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는데,공민왕의 아내였던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공민왕을  어머니의 방에 왕을 숨기고,그문앞에 서서 자객단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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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단의 무리가 칼을 휘두르며 방문앞에 이르러 말하길 왕은 어디에있는가? 왕비가 홀로 나아가 외치길"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방안에 들어가려거든 먼저 나를치고 들어가라"하메,무리들이 두려워 태후의 방안에 들어갈수없었다.


김용의 자객단은 나중에 최영의 정예군에의하여 처단되어 반란은 진압되게되고 훗날 아내의 도움으로,자신의 목숨을 구한 공민왕은 흥왕사의 변이 일어난후 2년이 지난 35세되던해 눈이 소복히 많이 내린 2월 추운겨운날에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죽자,


훗날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남긴 조의문에 그때의 상황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는데 자신을 남기고 떠나버린 아내를향한 사랑과 비통한심정을 느낄수가있다."나에게있어 아내보다 중한것이 없었고,흥왕사의 변이 일어나메,나의 몸의 지척에서 적을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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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사후  공민왕은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은왕비를 살아있는사람처럼대하며,식사할때마다 자신의 음식과 왕비의음식을 같이차려  함께 대화를하며 음식을먹었고,일체의 고기를 먹지않았을뿐아니라,나라를 다스리는 일조차 관심을 끊어버려,국제정세에 밝아 요동을 정벌하며 호기롭고,영민했던 공민왕은 이후 360도 다른 무기력한 왕의 모습을 보이며,슬픔속에서 살아가다 결국 신하의 손에의하여 죽음을 당하게된다.


훗날 조선을 개국한 반역의무리들이 공민왕의 후손인 우왕과창왕의 씨를 가짜라고하며,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위하여 역사를 왜곡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보아도 공민왕은 35세에 이미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하여,아이를 낳다가 죽었던걸보면,공민왕의 남성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했음을 알수있고,공민왕 스스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했던 우왕을 훗날 반역의 무리가 "아니다"라고 기록것은 반역을 정당화하기위한 역사조작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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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역사에서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자객단앞에서도 당당히 홀로맞선 여인이었지만,궁중에서의 일상생활모습은 내성적이고,여린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전해지는데,사랑앞에서는 한발자국도 물러 서지않았다.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사랑을보면,남녀간의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라는 말이 사실인거같다.


드라마나 사극일지라도,역사를 조작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것은 반역의무리들이 늘행해왔던 목적을위하여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르지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반만년역사에 왕비로서,노국공주가 행하였던 행동은,실존하는 유일한 기록이며,"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라는 그러한 비장미와 당당함을 보여줬던 인물을 찾는다면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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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전 서울에서 발생했던 소녀가장 성폭행사건을 살펴보고,이러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형벌을 내려는지에 대하여 살펴보자.

1404년 조선태종시기에 조선의 문신관리였던 이자지의 슬하에는 딸3명만이 있었고

큰딸인 내은이가 16살이되었을때 부모가 모두 연이어 죽자,큰딸인 내은이는 자신의 두여동생과 여종인 연지와소노와함께 자신의 부모의 3년상을 행하려고하였다.

경기도 과천에 살면서 서울로 출퇴근하며 이자지집안을 도왔던 가외노비인 살구지형제가



하루는 찾아와서 말하길 "주인 어르신이모두 돌아가셨는데,과천에서 서울로 왔다갔다하며 저희형제가 모시는것보다,과천으로 내려와서 저희와 함께사시면,저희도 편리하고,더욱 잘모실수있을거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이자지의 큰딸인 내은이가 대답하길"비록 내가 여자이지만 부모님의 3년상을 집에서 모셔야하는데,이런때에 내가 어떻게 집을 떠날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실구지가 말하길"상전의 의식주가 우리형제에게 달려있는데,저희 형제의 청대로 하지않으면,저희는 도망가 돌보지않겠습니다"하니,내은이와두여동생과 여종2은 부득히 과천으로 내려갈수밖에 없었다.


과천으로 소녀가장인 내은이가 내려오자,살구지형제는 좋은음식을 대접하며 환심을샀는데,밤이 깊어졌을때,살구지형제가 처남인 박질을 건너방에 몰래들어가 숨어있게하고는 내은이를 그방으로 들어가 쉬게하였는데,방안에 들어간 내은이가 불숙 튀어나오는 박질을보고 놀라 큰소리치며 울었다.이에 밖에있던 내은이의 두동생과 여종들도 함께놀라 소리쳤는데,살구지형제가 그들을 붙잡아 위협하며 소리치지못하도록 붙잡고있었다.


방안에있던 내은이가 강간을 모면하기위하여 힘을 다하였으나,박질은 저항하는 내은이의 손과발을 묶어 기어이 욕심을 채웠다.어느날 감시가 소홀한 틈을타,내은이가 도망하여 서울의 한성부관아를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이에 한성부에서 살구지형제와 박질을 잡아다 심문하니,범죄사실이 밝혀지게되어 강간을한 박질뿐아니라,공범인 살구지형제 모두 능지처참형에 처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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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처참형은 죄를 범한 죄수에게 줄수있는 최극형으로 왼팔,오른팔,왼쪽다리,오른쪽다리,몸통,목으로 6등분하여 죽이는 형벌이었기에,소녀가장을 강간하는 범죄에대하여 얼마나 엄격한 처벌을했는지 알수있고,


오늘날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상관없이 강간범에대하여 사형이나,정상참착할 사유가있더라도 250년징역같은 형벌로 엄격하게 처하는데,우리나라의 오늘날 법의처벌은 선조들이 처벌했던 형량과비교해도 너무관대하고,기타나라들과 비교해도 처벌형량이 너무관대한 측면이있는데,과연 무슨생각으로 오늘날 우리나라의 법원이 강간범들에게 법적처벌을 관대하게하는지 알수가없다.


도덕률인 성경이나 경전에따르더라도,강간범은 돌로 쳐죽이는게 신의법률인데,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강간범들은 인간이 아닌 짐승들이기에,반드시 죽이도록하였던것이다.왜 선진국일수록 다른범죄의 형량에 비하여 강간범에대하여는 더욱 무거운형벌인 예외없는 극형의 형벌을 가하는지 생각해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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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9대왕 김춘추가 재위2년에 접어든 655년,백제,왜,고구려의 연합전선으로 연이은 공격을받은 신라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되었다.


이에 태종무열왕은 장수 김흠운이 전지,예파,적득,보용나등과함께 백제의 조천성을 공격하도록하였다.



김흠운은 어려서부터 나라가 어려움에빠졌을때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바쳐 나라를 지켜냈던 화랑들에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곤했다.





김흠운이 백제의 조천성아래 양산이라는곳에 진을치고있을때 백제의 대군이 야음을틈타 기습공격을해오자,신라군의 진중은 혼란에빠져 미쳐 전열을 가다듬고 싸워보기도전에 많은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수많은 화살이 날아오는중에서도 김흠운은 홀로 말위에서 창을 든채 맞서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어려운상황에 처하자,김흠운이 부하였던 전지가 김흠운을 구하기 위하여 다음과같이 말하였다.


" 적이 어둠속에서 지척을 분간할수없는 상태로 공격해오니,만일 장군께서 그들에게 죽더라도 아무도 아는사람이 없을것입니다.또한 장군께서는 신라의 명문가의 자제이고,대왕의 사위이므로 적의손에 죽게된다면 백제의 자랑거리가되겠지만,우리에게는 커다란 슬픔이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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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운이 말하길"대장부가 나라를 위하여 몸을바친이상,남이 알아줄 상황이든,그렇지않든 무슨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앞으로 나아가 힘이다하는 순간까지 적과싸우다 죽었다.이를지켜보던 예파와 적득도 적에게 달려나가 함께싸우다 전사하였다.


후군에서 지원 기마병대를 이끌었든 보기당주 보용나가 흠운이 죽었다는말을 전해듣고 말하길"흠운은 권세와영화가있어,사람들의 사랑과 아낌을 받을수있었는데도 스스로 절개를지켜 죽었다,나 보용나는 생이무익,사이무손호?"라고 말하며 적진으로 달려나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훗날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를듣고,슬퍼하며 그들을 추모하기위하여 양산가를 지어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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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진평왕때 설씨 성을 가진 처녀가 나이든 아버지와함께 살고 있었다.집은 가난해도 얼굴이 아름다워 관심을 가지고있는 남자들이 많았다.

어느날 설씨처녀의 아버지가  3년간의 군역의 의무를 해야했는데,몸이 병들어 그것을 할수없는 처지였다.

이러한 어려운 형편을 알고있던 설씨처녀를 짝사랑하던 남자중에 가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가실은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기회라고 생각하고,설씨처녀의 집으로 찾아가 아버지의 병역의무를 자신이 대신해 주겠다고 하였다.



설씨처녀는 별로 가실이 탐탁치않았으나,병든 아버지를 대신하여 준다니,그말에 혹하여,병역의 의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결혼해주겠다고 약속했다.그 말을 믿고,가실은 군인의 의무를 대신하기 위하여 타지로 떠나갔다.



3년이 지나도 가실이 돌아오지않자,설씨처녀의 아버지가 말하길"3년이 넘었는데,돌아오지 않는걸보니,죽어는가보다. 약속한 기한도 다 지났고,너도 별로였던 남자였으니,잘되었다.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것이 어떻겠느냐?"



설씨처녀가 말하길" 아버지가 편히 지낼수 있던것은,가실의 덕분입니다.처음에 아버지를 위하여,덜떨어진 가실이를 이용하려고 비록 마음에도 없는 약속을하였지만,가실은 저를 생각하며 생사를 알수없는 적과의 싸움을하면서도 오직 제가 해준 약속하나를 진실로 믿고,힘든것을 견뎌냈을 것입니다.가실의 그마음은 100년을 기다린다해도 제가 먼저 약속을 깰수없는 소중한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사기 열전에 인물이 기록된다는것은 그만한 가치가있기에 기록해 뒀을것이다.설씨처녀의 행적은 오늘날에도 시공간을 초월하여 약속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역사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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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사수대첩은 널리 알려져있지만,자세한내용은 전하지않는다.연개소문의 지략과용맹성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대첩이었는데도,여러가지 의문점을 남기는 기록을 보여주고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하여,사수대첩의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자.먼저 백제를 신라와연합하여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운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사수대첩이후로 죽음이 역사기록속에서 전혀 나타나지않고 있고,

살았다면  고구려 멸망당시에 70이넘은 이세적같은 늙은장수가 참가하는것을보았을때도 그러하고,또한 소정방이 고구려침략군에 직위만 바뀌고,항상 장수명단에 들어있었던 관례를보아도,


사수대첩이후에 행방이 묘연해지고,죽은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는걸보면 그의 죽음이 비참했음을 의미한다.사수대첩과 연관되어지는 또다른 당나라 장수가 당나라의 병부상서,오늘날에보면 국방부장관이라고 할수있는 임아상이라는 장수이다.이사람또한 사수대첩 기록이후로 전장에서 죽었다라고 짤막하게 기록되어있을뿐,어떤싸움에서 누구에게 죽음을 당했는지 기록되어있지않다.

소정방,방효태,임아상  3사람이 우연히 일치로,사수대첩이후로 역사속에서 사라져버린다.3사람에대한 기록을 찾아보고,사수대첩이 어떻게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는지 알아보고자한다.먼저,삼국사기에 나타난 연개소문,소정방,임아상,방효태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보장왕19년(660년)11월 패강도행군대총관 계필하력,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평양도행군대총관 유백영등으로 하여금,당나라는 여러갈래의 길을 따라 고구려를 침공하게했다.


 

보장왕20년(661년)4월 임아상 패강도행군대총관,계필하력 요동도행군대총관,소정방 평양도행군대총관등 35군을 수륙으로 나누어 고구려로 진군하게하였다.


 

보장왕20년(661년)8월 소정방이 대동강에서 고구려군사를 격파하고,평양성을 포위하였다.


 

보장왕20년(661년)9월 연개소문이 남생에게 군사를주어,압록강을 지키게하니,당나라의 군사가 넘어오지를 못했다.계필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했을때에는 강에 얼음이얼어있었고, 남생의 군사를 상대로 크게이겼으나,당나라에서 철수하라는 조서를 내려서,평양으로 진격하지않고 그냥 돌아갔다



 

보장왕21년(662년)1월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연개소문과 사수언덕에서 싸우다 군사가 전멸당했으며,함께참가했던 방효태의 아들 13명도 모조리 죽었다.이때 평양성을 포위하고있던 소정방의 군사는 폭설이 내려서,후퇴하여 돌아갔다.중국측기록에 662년 2월 전장에서 임아상이 죽었다라고 나온다



660년도의 당나라장수의 직책과 661년의 직책은 사라진 사람이보이구,기존직책을 살아남은 사람으로 재편되어 부여되고 있음을 알수가있다.평양도행군대총관 유백영은 11월에 고구려침략을 하는데,다음해 4월에는 소정방이 평양도행군대총관이 된것을보면,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11월에 고구려에 들어갔던 유백영은  전멸을 당했던지,대패를했기에, 5개월도 안되는 사이에 직책이 사라져버린다.이사람이 패전기록또한 기록되어있지않다.


소정방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킬 당시를 보더라도,바다를 건너 군사를 이동하였다는것이다.661년에 평양도행군대총관에 임명되어,고구려를 침략하는루트는 육로를따라 요동을거쳐 평양으로 진군한것이 아니라,바다를건너
수군을 이끌고 곧바로 대동강을따라,평양으로 들어갔음을 알수가있다.


임아상의 패강도행군대총관또한 소정방과함께 대동강을따라,곧바로 평양으로 진격했음을 알수가있다.나머지  요동도행군대총관 계필하력은 ,압록강을 통하여,육로로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했음은,연개소문이 계필하력군에 맞서기위하여,남생을 압록강수비로 보낸것을보면 알수가있다.


그렇다면,일반적인 고구려침공루트인 요동지역인 백암성,요동성,안시성등을 격파하고 내려온것이아니라,소정방,임아상,방효태,계필하력은,바다를 통하여,오늘날의 상륙전을 감행했음을 알수있고,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곧바로 진격했던 소정방과 임아상의 군대는 후방지원군의 식량의 도움없이는 완전히 고립되게됨을 의미한다.


그런데,고립된 소정방군과 임아상의 군대를 지원해줄 요동도행군을 이끄는 계필하력이 압록강에서 남생의 군대를 대파하고도,당나라의 철군조서를 받아서,돌아가버렸다라고 기록되는데,소정방군과 임아상군은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을상태라,멀리 떨어진 신라에게조차 식량도움을 요청하는 상태였는데,고구려의 남생군을 대파했다는  계필하력군이 진격을하지않고,이기고 돌아가버렸다는것은,앞뒤가 맞지않다.


육로를 통하여 요동을 거쳐 고구려로 들어올수있는 상태가 모두 막혀있었고,그나마 남아있는 압록강을 통한 당나라군의 진격또한,남생에의하여 저지되었다고 볼수있다.당나라군이 대승을한게아니라,남생군에게 대패를 했을 가망성이 많고,패배의 결과로 계필하력은 돌아갔을것이다.


그렇다면,왜 요동도행군총관인 계필하력은,소정방군을 지원하기위하여,곧바로 대동강으로 상륙한게아니라,압록강으로 움직였나하는 의문이생긴다.이것은 요동지역을 수비하고있던  고구려군사를,제압하면서 내려온게아니기에,계필하력군이 압록강에서 싸우지않았다면,평양성 깊숙이 들어간 소정방군은 요동지역의 고구려군사가 평양성을 응원하기위하여 남하 할수있기때문이라고 볼수있다.


그러나 계필하력군이 고구려의 남생에게 패하고 돌아가버리자,평양에서 고립되어진 소정방과 임아상군은 철수를 하지않으면,전멸당하게되는 상황에 빠졌다고 볼수있다.그렇기때문에,당나라에서는 이들을 구원하기위하여,긴급별동대인 20만명규모의 방효태군을 바다를 건너 배를 이용하여,직접 평양으로진격하여 들어가 도와주도록 했을것이다.


소정방군과 임아상군은 평양을 포위한상태라기보다는 꺼꾸로 고구려군에의하여 바다로 도망갈수도없는 퇴로가 완전히 차단된상태였다.이를 간파한 연개소문이,별동대인 방효태군이 배를타고 들어와서,사수언덕에 상륙하는 당나라군사를,전멸시켜버렸다고 볼수있다.1월에 연개소문의 사수대첩으로 긴급지원군인 방효태군이 전멸했고,2월에 임아상이 전장에서 죽었는데,임아상은 패강도행군총관이고,소정방은 평양도행군총관,계필하력은 요동도행군총관,그런데 이중에,계필하력은 압록강에서 남생에의하여,패전을했기때문에,계필하력은 고립되지않고 살아돌아갈수있었지만,소정방과 임아상은,이미 방효태군이 전멸당한 1월 이후에는,연개소문에 의하여 모두 전멸했을 것이다.


임아상은 662년 2월에 전장에서 죽었다라고 중국기록에 나오는데,패강도행군은 1월에 방효태별동대 군이 전멸당하자,고립되어있던 패강도행군또한 전멸당했을것이다.한달기간안에,임아상이 다른 전장에서 죽었다고는 볼수없겠고,사수대첩과 연결되어 패강도행군이 전멸당했다고 생각하는것이 이치에 맞다.


그리고 662년 1월 연개소문의 사수대첩과관련하여 소정방이 폭설인 자연재해때문에 철수한게아니라,사수대첩과연계되어,평양도행군또한 전멸해버렸을것이다.소정방이 죽음이 기록되지않은것은,그 죽음이 비참했기때문이고,고구려를 침략했던,소정방,임아상,방효태등 행군총관들이 연개소문에 의하여 모두전멸되어 죽어버렸다는 치욕적인 기록을 남기는게 창피했기때문에,직접적인 별동대인 방효태군의 전멸은 기록해두고,나머지 임아상과 소정방은  어떻게,어디서 죽었는지 역사속에 감춰 버린것이라고 볼수있다.


사수대첩은 완벽하게 당나라군대를 한사람 남김없이 전멸시킨 우리나라역사에있어,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스케일이 큰규모인 대첩이었음을 알수가있다.연개소문의 성격이나 지휘스타일상,고립되어 차단된 당나라군대를 온전히 돌아가도록할만큼,자비로운 장군이 아니었다.소정방이 역사속에서 사수대첩이후로 죽은기록이 사라져버린것은,사수대첩에서 그의군사들과함께 전멸해서 죽었거나,그에대한 책임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을가능성이 많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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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백제를 이길수있었던 이유는 김유신이라는 당대 세계최고의 명장이 있었기때문이기도 하지만,신라상류층이 위기상황에서 솔선수범하여,나아가 싸우는 싸울아비정신을 평소에 가지고있었기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나온 불영자의 기록을 토대로,신라의 싸울아비정신을 이해해보자.


진덕왕(647~654)=진덕여왕(왕의 이름 김승만)때에,백제의 정예 3만대군이 신라의 성을 빼앗기위하여,쳐들어온다.이때에 맞서싸운 신라의 장군이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신라 군사1만명을 이끌고 나아가,맞서싸우게되는데,백제의 군사들이 용맹할뿐아니라,정예화된군사들이었기에,신라의 군사들은 서로먼저 죽지않으려구,싸우기만하면 뒤로 도망가기가 바빴다.이때에 김유신은 땅에 떨어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위하여,특단의 전술이필요하였다.김유신은 위기상황을 역전시키기위하여,자신의 친구인 불영자를 막사로 불러 대화를 나누게된다.


김유신:추운 겨울이된후에야,소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것을 알게된다.죽음을 두려하지않고,나라를위하여 목숨바칠 정신을 보여줄때이다.나의 둘도없는 친구 영자여,술한잔을 받으라.


 

불영자:위급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오직 저를 선택하고  믿어주심이 ,진실한 친구입니다.그 믿음에 진실로 목숨을바쳐 보답하겠습니다.


두번 절하고 막사를 나와 그의 종 합절을 불러이르길,

불영자:내가 오늘 위로는 나라를 위하고,아래로는 친구를 위하여 죽을것이다.다만 걱정이있다면,나와함께 종군한 나의 아들 거진이 내가죽으면,나를 따라 죽으려할것인데,너는 그러한것을 막아,나의 시체를 수습하여,나의아들과함께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도록하여라.


 

합절:목숨을 바쳐 주인님의 명을 지키겠습니다.


말이끝나자마자,불영자는 말에채찍을가하여,창을들고 홀로,적진으로 들어가,목숨이 다할때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이것을 지켜보던 불영자의 아들 거진이,말을 몰고 홀로적진으로 나아가려하자 합절이 말고삐를 잡으며 말하였다.

합절:주인님께서 유언하시기를,도련님과함께 집으로 돌아가서,어머님의 슬픔을 위로하라구하셨습니다.이제 도련님이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어머니의 슬픔을 더하게하는것이 효도라고할수있겠습니까?


 

거진:아버지가 죽는것을보고도,구차하게 사는것이 그럼 효자이겠는가?


거진이 합절이 잡고있던 말고삐를 칼로 쳐내고,적진으로 들어가 싸우다 죽었다.이것을 바라보던 합절이
"내가 비록 미천한 종이나,대의를위하여 모두죽었는데,나만,구차하게 살아돌아가 무엇을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적진으로 홀로들어가 싸우다죽었다.


세사람의 죽음을보고,느끼는봐가있던 병사들이 앞다투어 진격하여 나아가 싸우니,백제의 군사들이 대패를하였다.대승을 하고난후,유신이 세사람의 시체를 거두어,자신의 옷을벗어 덮어주고,밤새 슬피울었다.


불영자의 이야기에서보듯이,신라에서는 나라가 위급한상황에서는 위에것들은 탱자탱자하면서,도망이나 가면서,졸따구들에게만  죽어도 막아라식이 아니라,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직접실천하는 모범을 보여,군사들의 사기를 높여다는것이다.


신라의 이러한 싸울아비정신은 자기가 아끼는 사람은,뒤에숨겨두고 도망가게하고,아래것들에게만 싸우게한것이아니라,자신이 가장사랑하는 사람부터,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 솔선수범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었기에,신라는 백제를 이길수가있었다.백제도 패망의 마지막순간에,걸출한 영웅 계백장군이 이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지만,상황이 너무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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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1767년)시대에 있었던,엽기적인사건에대한 황당무계한 판결내용대한 이야기이다.


산음현이라는곳에 7살 여자아이가 동정녀로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80살이었던 영조는,이사건이야기를 듣고,어찌된일인지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라구하였다.


영조와 신하들사이에있었던 문답을 종합하여,엽기사건의 내용과 판결에대하여 살펴보자.



영조:7살짜리 여자아이가 혼자 아이를 낳았다니,이게뭔 변고이냐?

신하:나라에 불길한일이니,잡아다 죽여합니다.

영조:남자없이 여자아이혼자 아이를 잉태해서,무럭무럭 잘자란다니.어떻게 된것인지,소상히
     살펴보고난후 처리해도늦지않다.


며칠후.......




산음어사 구상:산음현에서 일어난 일에대하여 자세히알아본봐,7살여자아이가 사내아이를 낳은것은 분명하고
그마을에 돌아다니는 소금장사가 자백하였는데,소금장사의 아들이 틀림없습니다.

영조:여자아이가 7살이 진짜맞아? 키는 어느정도하던데?

구상:7살이 맞습니다.몸은 이미 다자라 보였습니다.

영조:내나이 80이지만,괴물들이로구,괴물이야,이 잡것들을 처리하는것은 별거아닌데,알아보지두않구,여자아이혼자 잉태해서 무럭무럭 잘자라구있다구 요따구 글을 올리면 되겠냐? 성현들이 남녀7세부동석이라는 말을 괜히 한것이 아닌것이야,다 이유가있는것이다.

구상:이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영조:7살여자아이,여자아이의 엄마,임신시킨 남자와 여자아이에게서 태어난 사내아이  모두 잡아다가,따로따로 귀향보내어,노비로 삼도록하여라.



오늘날에서보면,대갈박이 제대로 되었다면,저런판결은 나올수가없다.그러나 조선시대는 연좌제로 인하여,집안의 한사람이 잘못하면,죄없는 부모형제,일가친족까지 3족을 잡아다 멸하는 시대상황이었기에,7살여자아이의 엄마에게두 그책임을 물었다구볼수있고.


오늘날같으면,7살여자아이는 피해자로서 보호받아 마땅할것인데,이또한 조선시대의 유교적 공자왈,맹자왈 꼬부랑헛소리나해되는 시대였기에,순결을 잃은여자는 보호의 대상이아니라 비난이나,매장을 시키는면이 더욱컸다.또한 신분제가존재했던 시대였기에,하찮은 신분의 7살여자아이에게는 보호해줘야한다는 그런측면보다 오히려,벌을받아야 사회풍습이 올바른윤리가 선다는 궤변적.이중적가치관이 지배하구있었기에,귀향을보내 노비로 만들어 버린것이다.


여자아이를 임신시킨 남자야 오늘날에 관점에서봐두,처벌받는것은 당연하겠지만,태어난 사내아이는 아무죄두없는데도,이또한 그시대상황에서는,비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보호해주는게아니라,들이나 야산에 버려서 굶어죽게하거나,처벌로 태어나자마자 노비신분으로 예속되었음을 알수가있다.


시간을 되돌려,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정상적인교육을 받은사람이,영조시대로 돌아가,영조임금을보구," 너 대갈박이 제대로 됬으면,이런판결이 내릴수있어"이런식으로 따진다면,그것은 오늘날의 가치관이구,그시대상황에서는 즉각 목이댕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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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반만년역사이래,지도자들이 남긴글이나 말들은 많이전해져 내려온다.

그중에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두 영원히 변치않구 남겨질 감동을주는 명문장을 찾아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의 지도자들이 말한것들은 잘알구,즐겨말하면서,진정 우리나라의 지도자가 말했던 후세에남길만한 어록에대하여,
잘알구있는경우가 드물다.

전체적인 의미와 글에있어서,역대왕이나,대통령을 총망라하여,찾아서살펴본봐
,최고의 글은 다음과같은 글이었다.


뒤돌아 찾아보니,이런글두 있었구나싶은데,
외국인에게 우리나라의 지도자가한 교훈되는 글을 소개할때 말해줘도 좋을것같다.


"우리 함께 꿈을 현실로 만들어 봅시다.
정직하구 성실하게사는 사람,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봅시다.불신과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개혁의시대,
통합의 시대로 갑시다.우리 아이들에게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물려줍시다."



위에 글에서 단한치두 꺼구로 가려는 대통령이라면,그 존재이유가없으며,국민을 두려워하지않구,지배의 대상으로 가르침을 받아야할 존재로 여기는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역사속에서 반복되어왔듯이,왕이 다스리는 봉건시대였을때두,우리나라국민들은 그왕을 폐위시켜버렸다.모든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부여되었으며,권력의 회수또한 국민에게서 나온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통령이 한말이든,그렇지않은 대통령이했든 상관없이 좋은어록은 기록하구,후세에남겨져야한다.두번,세번 읽어봐두 멋있다.대한민국 헌법조문서문에 기록되어두 좋을만한 의미를 가졌다구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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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두꺼비하면 떠오르는 모습이 개구리왕눈이에서 나오는 아로미의 아빠인 투투이다.중국에서 지진이 발생했을때 두꺼비들이 대이동이먼저 나타나,자연재해를 미리알려주기도하는 영물인 두꺼비

우리나라의 콩쥐와팥쥐에서 깨진독을 두꺼비가 나타나서 도와줬다는이야기처럼, 두꺼비는 여러가지 신비한 특징을 가지구있는 생물체이다


두꺼비의 피부에서 내뿜는독은 오랜옛날 화살촉에 붙여서사용하기두했구,한약의 약재로두 사용되었다.



이러한 두꺼비의 피부에 샘솟는 독을이용하여 미국의 일부젊은이들이,환각을 경험하는 환각제로 사용하기두한다구해서 문제가되구있다.두꺼비의 독인 부포톡신에는 부포탈린(bufotenine)이라는 환각성분이들어있다.


우리나라의 전래되는 한방의약인 민간요법에서,두꺼비를 잡아먹은 뱀을 잡아, 뱀술을 만들어먹으면,신경통에좋다는이야기가 전해지구있는것은,두꺼비의 독에포함된성분인  부포탈린영향이아닌가하는 생각이든다.


우리나라의 역사속에서두 두꺼비는 해악을끼치는 존재가아니라,도움을주는 영물로서 그려진다.개구리왕눈이에서 아로미의 아빠인 투투는 두꺼비모습을했으면서,항상 부하인 집게발을가진 가제를 시켜 왕눈이를 못살게구는 좀의외인 모습으로 그려지기두했지만,두꺼비는 대체적으로 영물로 역사자료속에 나타난다.


두꺼비를 역사기록속 영물로 인식하구있는 우리나라같았으면,평소와다르게 수십만마리가 3일간에걸쳐 도로와길을넘어 떼지어 이사,도망가는현상이 나타났다면,즉각조사를하구,불길한 징조로여겨서,사람들을 대피시켰을것인데,중국에서는,"별일아니네"하다가 대지진속에 커다란 인명피해를 입은걸보면,우리조상님들이 두꺼비를 영물로 기록하구,"두껍아,두껍아,헌집줄께,새집다오" 라는 지혜로운 구전동요를 전래하도록한것은 이유가다있었던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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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는 다양한 고분군들이있다.우리나라에서두,아직미발굴상태로 남아있는 많은고분군들이있는데,그중에서두,가야의고분군들이 대표적이다.박물관에서 보여지는 진귀한 우리나라의 보물들은 대부분이 고분에서 출토되어진 유물들이다.




정식으로 발굴하는게 아니라 고분속에 들어있는 보물들을 몰래 도굴하는 도굴꾼두 시대와상관없이 있어왔을것이다.이미 도굴된 고분들속에는 컵라면이나,음료수병이라든지 이런오늘날에 쓰여지는 물건들도 발견되어진다구한다.







고분유물들이 연대측정에서,저런물건들이함께있다면,참황당한일일것이다.도굴의 문제는 오늘날에의 문제만이아니라,고대로부터 존재했을것이기에,고분의 연대에있어,전혀 나라와시대배경이 안맞는 물품이 들어있다면,대갈박을 굴리며,이물건은 어찌된연고로 이곳에있는가? 정식으로 발굴하는 사람들을 미스테리에 빠지게한다.




어찌되었든,세계의 고분군들이,우리나라의 고분군들과 비슷해보이는것들두있지만,스케일이나 모양면에서
특이한고분들두 보인다.
세계의 고분들은 어떤모습들인지,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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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거대한 산전체가 하나의 고분,스케일이 웅장해보이는 고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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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맹이를 세워놓은 모양이 특이한 고분이다.무엇을 상징하는 고분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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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광개토태왕릉처럼,돌무더기루 쌓아올리것같긴한데,돌은 국가를불문하는 고분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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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가야시대의 무덤같은 모양인, 언덕같은 고분이,다른나라에두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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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분하면 둥근모양의 봉분이 생각하는데,피마미드처럼 삼각형이네요.







전체적으로보면 세계의 고분들의 모습이,우리나라의 고분들과는 조금씩다르게보여두,자신들의 역사유물인 고분들에대하여,보존하구,기리는정신은 어느나라나 똑같은것같습니다.우리나라의 영산강유역에있는 가야시대의 언덕처럼 큰고분의 봉문위에 올가가 사진찍구,앉아 김밥벅구,음료수먹는분들,봉분위에서 그러는거,몰상식한짓입니다.가야시대의 고분의 주체가 우리선조가아니라구해두,그래서는안되는것입니다.어떤주체가 뭍혀있든,그곳은 우리역사의 중요한 고분들이기에,후세에두 잘보존하여,가꾸어나가야할,우리역사의 일부분인 역사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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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전시해놓은곳이 국립박물관이라는것은 모두가 알구있다.우연히 인터넷을돌아다니다가,제주의 역사와문화를 사이버로한눈에 볼수있게 지원되는곳이있었다.

스페셜포스게임처럼 실제감이 느껴지게,역사나 유물에대한 설명이,3차원입체방식으로나오기에,우와멋있다라는 말이 저절로나왔다.

국립박물관하면,직접찾아가서,방문하여 구경하는것두좋지만,유물들을 3차원입체방식으로인터넷으로두 볼수있었기에,시간날때 틈틈히 역사와문화지식을 배울수있어서 좋았다.




방문자가 사이버박물관전시실을 돌아다니는데,키보드자판의 화살표키만 움직일줄만알면,누구나 쉽게
입체감있는 사이버관람이 가능하기에,역사지식과 역사공부에 관심이많은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잘활용하면,게임같은분위기속에 생생한 3차원유물과 역사를 볼수있기에,유익한정보가 될것으로 생각되어졌다.제주국립박물관사이버전시실은 누구나,무료루 인터넷으루관람이 가능했다.



어떤곳이며,어떻게보는지,왜 멋있다라는 말이 저절로나오는지 아래그림을 참조해보면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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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jeju.museum.go.kr/kr/에 방문하여 사이버박물관이라는 항목을찾아 들어가보면,위에 그림처럼
입장하기라는곳이 나온다.회원가입이나 기타절차가없으므로,관람할아이디명을 임으로적어주고,자신이
사용하는 이메일을 적어놓은후,확인하면 사이버박물관으로 입장이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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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그림에서처럼 입장하면,영상이 그냥나오는것이아니라,스페셜포스나 게임처럼,키보드자판의 화살표키를
이용하여,직접움직이며,박물관을 돌아다니기에
,실제국립박물관을방문하여 보는것과 똑같은 위치와 유물을
3차원입체방식으로 돌아다니며 구경할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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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관심이가거나,알구싶은 역사지식이나 유물앞에 멈춰서서,그유물이나 보여지는 자료를 마우스로선택하면 영상과는 별도로 오른쪽부분에,그유물이나 역사지식에대한 3d영상과 해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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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박물관의 개념이 어떤것인가,직접체험해보니,우와~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사이버박물관은 밑밑하게 그냥,유물사진과 그밑에 해설글을적어놓은곳이다라는 기존개념을 완전히 바뀌게
하는,
하나의 게임같은 입체감을 느낄수있게 잘만들어져있는,국립제주박물관사이버박물관이었다.



일반상식적으로 알아둬야할,역사지식과 유물을 공부두하구,관람두하구,여러모로 청소년들이 이용하면
도움이될만한곳으로 보인다.
어른들이라구할지라두,제주도의 역사와문화에 관심이있는분이라면 시간날때
틈틈히 방문하여 돌아보는것두 유익한배움이될것으로 생각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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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최대의 미스테리가,광개토태왕의 아들인,장수왕의 평양천도부분이다.


삼국사기 장수왕 15년에 적혀있는 "이도평양"이라는 단어로,평양은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를 했다는 데,과연 지금의 평양이,장수왕이 천도했다는 평양인지에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래서,삼국사기를 전체적으로 읽어보니,전혀앞뒤가 안맞는 구절이많기에,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어디인가에대하여 나름대로 생각해보았다.





광개토태왕은,고구려역사에서,북방민족을 제압하면서 정복군주로서 북방영토를 넓히며 광활한 영토를
만든왕이었다.그리구 그러한 막강한 권력을 이어받은 아들이,북방에는 눈을떼구,그렇다구,백제의
왕을 잡아죽이면서두,그나라를 영토로 편입할생각두 없었다는것은 장수왕의 행적을보면 알수있구,전혀
백제나 신라를 패망시켜 나라를 흡수할생각두 없었음을 알수있는데,어느날 갑자기,남진정책을
위하여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했다는것은,뭔가 평양이라는 위치가 지금이 평양이 아닐수있다는
생각이들었다
.



삼국사기 광개토태왕편을 보면,광개토태왕 16년 궁궐을 중축하고.18년에는 동쪽 지방에 독산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라구 나오는데,동쪽지방에 성을 쌓았는데
자신의 아들이 수도로 옮길, 평양의 사람을 이주시키구,얼마없으면 떠날 궁궐을 뭐하러 중축하구
있었겠는가,평양의 위치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는의미로 보여지구,평양은,지금의 간도라구부르는
동으로 토문강이라구하는곳,그곳어디엔가 위치한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장수왕 15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의미는,지금의 평양으로 장수왕이 천도했다는의미가
아니라,송화강근처,지금의 흑룡강성일대 토문강주변에있던 지역을 부르는말이 아닌가생각이든다.
삼국사기 고구려편에는 왕에 관련된 기사들중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이런 비슷한 구절들이 여러개보인다.



특이하게 생각되는것중하나가,평양이 장수왕이래루,고구려의 수도였다면,왕의 무덤들은 당연히
지금의 평양에 산재해있는게 당연할것인데,평양에는 고구려의 왕들의 무덤이라구 알려진게 하나두
없다는점이다
.죽기는 평양에서죽고,묻힌곳은 졸본에가서 뭍혀다구 이해할수도있겠지만,어째든
삼국사기 장수왕조에 기록된 네글자 "이도평양"을 근거로,장수왕때 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했다구
해석되어지는것은 잘못되어졌다구 생각되어진디.장수왕이 말한 평양은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어디인가,평양이라는곳이 별도로 존재하구있었다구보는것이 더 합리적이다.



지금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로 고구려의 왕들이 왕성이된것은 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보면, 지금의 평양은  장안성이라구 기록되어곳이라구 보는것이 더합당하다구 생각되어진다.
장안성=지금의 평양이라구본다면 장안성을 근거로 기록을 찾아보면



양원왕8년, 장안성을 쌓았다. 평원왕 (평원왕 양원왕의 맏아들이다)28년,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영양왕( 평원왕의 맏아들이다),영류왕은(영양왕의 이복 아우이다)보장왕 (영류왕 아우인 대양왕의 아들이다)



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 이렇게 5명의 왕만이 지금의 평양에 살았던 임금이라구
볼수가있다.장수왕이 도읍을 옮겼다는 평양이 지금이 평양이라면,그이후 오래세월이 지난
평원왕28년에 나오는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기록된,장안성은 그럼 어디란말인가?



현재의 평양에서 장수왕이후 쭈욱수도로 삼아왔다면,평원왕이 아버지 양원왕이 공들여 장안성을쌓구
그아들인 평원왕이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겨버렸는데,분명한것은 궁궐을 옮긴게아니라,도읍을 옮겼다구
기록되어져있는데
,장수왕조 15년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것만가지구,그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
이라구 단정하는것은,그이후의 왕인 평원왕이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구 기록되어지는것을보면
이상하다.



그러므로 지금의 평양은,양원왕,평원왕,영양왕,영류왕,보장왕이렇게 이어져온 장안성을 의미하구
광개토태왕조나 장수왕조에 나오는 평양은,지금이 평양이아니라,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수도가
있었던,상경용천부지역인,우리나라의 간도부르는곳,그곳에 고구려의 평양이있었다구볼수있다.



개인적인 생각이므로 신뢰성은 없다.그러나 삼국사기기록을 보더라두,장수왕조의 평양천도는
절대성립될수없는,그시대상황과 전혀맞지않는 이도평양이라는 네글자에 억메인 오류라구
생각한다.설령 평양으로 장수왕이 도읍을 바꿔다해두,지금의 평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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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우리나라의 들과산에는 표범이 살구있었다.표범이 들과야산에 돌다다녔던 조선시대에 표범과 그시대의 가치관에대하여 찾아보려구한다.


실용과 실사구시적 측면보다는 가식과 명분등의 것치레에 치중해서 싸우기를 좋아했던 조선시대의정치문화의 단면이,표범이라는 동물과 관련되어 나타나는데,오늘날에두,이런 공자왈,맹자왈하면서,쓸데없는 이념이나 체면에치후쳐,백성을 위한 실사구시적 정치보다는 당파적 이익에만 몰두하여 주댕아리싸움을 즐겨하는 그러한 뒤떨어진 정치문화의 관습이 이어져오구있다.




아나운서가 음주운전을하지말라구 방송에나와서 캠페인을 벌이면서,뒤로는 술처먹구 음주음전
으로 단속된다든지
,겉으로는 키스해본적두 없구,순결을 지켜야한다는 방송에나와 입바른 소리를
하면서
뒤로는 호빠를 가면서 이중적모습을 보이는 여자연예인 ,남에게는 엄격하구,자신에게는
너무나 관대한,그러면서두 주댕아리는 정의와자유를 외치구,실제행동은 개차반이구,
이미지로 단물을 빨아먹는 가식적인것들의 사고방식속에는 이러한 이중적 것치레를 중시했던
양반입네,쌍눔이네하는 그러한 유교적 명분주의의 영향이 크다.


조선시대에 있었던 표범과 관련되어진 황당한 시츄에이션속으로 들어가보자


때는 1428년 세종 10년의 일이다.

양주에사는 최종생이,표범을 잡아서 나라에 바치니,세종대왕이 면포7필을 표범을 잡아 받친
사람에게 내렸다.


그런데 도중에 그 명을 받들어 시행하는 관리인 최습이  상을 주라는 명을 시행할려고
상세한 내용을 확인해보니, 표범을 직접잡은 사람두있었지만,표범잡는데 몰이꾼으로 도움을준
사람두있었다는것을 알게되어서,시행과정에서 표범을 직접잡은 사람에게는 면포5필,조력하여
도운사람에게는 면포2필을 나누어지급했는데,이 일이 세종에게 알려지게되었는데.


세종:내가 표범잡은 사람에게 면포7필 주라구했어,안했어?
최습:제대로 명을 시행하여 면포를 주었습니다.
세종:똑바루 시행했는데,2필은 도움을준사람에게 줬다는 소리가 왜들리냐?
최습:표범을 잡는데,조력한사람두 공이있지 않겠습니까?
세종:표범잡은사람에게 주라구했어 안했어?
       여봐라 최습 저눔의 벼슬을 박탈하구,장80대를 치도록해라.
최습:억울하옵니다
세종:억울은 개뿔,너가 왕이냐? 누가 너맘대루 명을 시행하라구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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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 관점에서보면,최습의 일처리가 타당한면이 있는것같은데,조선시대의 당시 사회문화에서는
이것은,맞아죽을일이었다는것이다.조선시대는 호랑이를 잡은 공에대하여두 포상에 차이를두는 절차
까지두  문서로서 정해놓았는데,맨먼저 창이나 화살을 맞춘사람,두번째로 창이나 화살을 맞춘사람
세번째루.......
이런식으로 호랑이를 직접잡았더래두,선,후를 가려서 포상하는데,직접잡은것두아니구
그냥 옆에서 조력한사람에게 공이있다구하여 상을줬으니,가식적인 겉모습을 중시하던 시대상황에서는
통용될수없는 판단이며 행위였다.


오늘날에서보면,화려한 주연배우가있다면,그뒤에서 주연배우를 빛나게하는 조연두있구,말없이 도움을
주는 스텝두있을것인데,눈에보이는 주연배우 그자체만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볼수가있다.


눈에보이는것,직접적인행동을 한사람만 최고라는, 결과가아닌 것모습이나 보여지는 체면에 집중한 이러한,
덜떨어진 이중성이 표범의 상벌처리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구있다.


선진화된 사회일수록,썩어빠진 눈에보이는,주댕아리는 정의와명분 외치구 실제행동과결과는 개차반들이
이미지쇼댓가로 단물을 빨아먹는 그런 이중적인것을 멀리하는 사회적시스템이 가동된다는것이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두,실용과 실사구시적측면보다는,이념이나 주댕아리, 쇼맨쉽등 눈에 보여지는
이미지만을 추종하구 실제의 결과보다,보여지는 허상이나 겉치레를 더좋아하는 이중적가치관이
아직두 남아있구,
이러한 명분론적 공자왈,맹자왈하는것들은 타파되어야할,사회의 암적인
가치관이라는것이다.


실사구시와 실용의 이면은,당리당략적인 명분론적 싸움보다는 최우선으로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두고
그러한 관점에서 나라의 부강을 이루어낸다는것이다.아직까지두 표범의 일처리처럼,겉치레와 명분에 치후쳐,개소리나발을불며,백성들을 분열시키구,이간질시키며,결과가없는 빈깡통,이미지쇼에만 오,교주님, 오,교주님하는 덜떨어진 것치레의 이중성을 보여주는것들이 많다는것이다.


이미지정치는 단물은,묵묵히 가려진 삶속에 사는 백성들이 혜택을본게아니라,이미지정치를한 
당사자와패거리들에게 돌아갔구,그러한것들은 뭐한자리라두 챙겨먹었구,더  안도와줘두 나라세금으로
평생 잘처먹구 잘살게되었다는것이다.


오,교주님,오~ 교주님하기전에,자신의 삶을 살펴보자,과연 자신에게 무엇을 더낫구,좋게해주었는지
결과야 어떻든 허울데기가 감동만주면돼 이런식이라면,사기꾼의 말과 언변두 참으로 듣기에는
달콤하구,좋지만
결과는 언제는 그말을 믿은사람에게는 비참한 결과가 생기게된다는것이다.


허울데기의 명분이나 주댕아리가아닌,백성의 삶을 낫게하여 더욱부강한 나라,그것을 염원하는것이지,
달콤한 말이나 주댕아리들의 쇼와이중성에는 이젠 넌덜머리가 난다는것이다.


북한에대한 정책두마찬가지다,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의 삶두 제대루못챙겨,300만명이 넘게 죽였구
계속 헐벗은 동포들을 굶겨죽어나가게하는 것들은,아무리좋은 민족이구,이념이구,동질성어쩌구하기전에,
이미 인간말종의 정치인들이라는것이구 그러한 악독한정권지배층에대하여 굽신이 아니라,
매를 들어야한다는것이다.


또한 이런거지같은것들에게 협조하여,뒷돈까지주면서 굽신거린시기에
죽어나간 300만명이 넘는 우리동포들의 원혼을 위해서두 악독한정권지배자의 몰락과함께
역사에 단죄를 받아야한다는것이다.


악독한 지도체제가 붕괴되지않는한 해결될수없는 문제인데두
닝기리주사만 처방하여,암을 암이라구안하구,잘될거라구 거짓쇼를한 댓가는 반드시 심판받아야한다.
의사가,암에걸린사람은 암이라구 판정하구 말해줘야지,암은아니구,암은아니구여,닝기리만 주사만해주면
다 잘될거라구 환자를 속여,악독한정권만 더공고하게해준 돌팔이 의사는 더이상 나타나지않도록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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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함(1517-1578) 호는 토정



이지함은 충청도를 대표하는 문신으로 1573년 포천현감,1578년 아산현감 벼슬을 하셨다.

자신의 묘를 직접 선택하는등 풍수지리에두 능했으며,사람들의 길흉,화복에 대한 사주,
팔자를 적어놓은 토정비결이라는 책을 만드셨다.


토정님의 묘는 충남 보령시 주교면 보정리 산 27-3에 위치해 있으며 문화재 자료 유적으로 지정되었다.토정비결은 후세에 전해져,오늘날까지 서민들의 사랑을 받구있다.


아마두,우리나라에서 일반인에게 가장 역사가 깊구,실생활에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책을

꼽으라면 토정비결이라구 할수 있겠다.


토정비결이 출판된지 500년이 넘어갔어두,그속에 담긴 지혜와 사람의 길흉,화복에 관한

자연의 진리는 변치않구 오늘날에두 적용되구 있다.


가마득한 시간이 흘러어도  토정비결이라는 책이 그 생명이 유지되구,

오늘날의 가치관에서두 애용되는 것을 보면,시대를 초월하는 생명력이

책속에 포함되어 있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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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편에

예언에서 "백제는 보름달이요,신라는 초승달이다"

그후 백제멸망,신라번성



통일 신라시대 최치원


가을바람에 오직 괴로움을 읆나니.

세상에 나를 알이 적구나

창밖 삼경에 비는 내리는데

등앞에 외로움이 고향을 향하네.


국어책에 자주나오는 추야우중의

문필가로 이름을 날리신 분으로


부패한 통일신라말기에 

"계림은 누런 잎,개성은 소나무"

이런 예언을 하시구 가야산으로 들어가심

이후 신라망함,고려번성



부패한 고려말기 태조 이성계

목자득국이라는 단어가 민간에 퍼져는데

이후 고려멸망,조선개국


오늘날에는

정감록이라는 예언서두 전해지는데

이경우는 조씨,정씨,,왕씨,범씨등이

언급되어져있는것을 보았을때


목자득국에서 보듯이 예언서에

나타나는 표현은 직접적인것이

아닌 간접적인 표현이므로


정감록에 나타난 성씨들은 직접적인

성씨를 말하는것이 아니라 우회적인

표현인것으로 보았을때,정감록에서

말하는 왕은


趙,鄭,范,王


나라조,나라정,임금왕,풀이름 범



결국 해석해보면 나라의 임금은 풀과 관련된

사람이다. 이렇게 해석이 되어지네요.


정감록에서 말하는 왕은 나무나,풀등 환경과 관련된 사람이

왕이된다라는 뜻으로 풀이할수 있겠습니다.


그냥 역사자료를 살펴보다가 심심풀이 땅콩으로

한자의 의미대로 풀이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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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우리나라의 개국신화인 단군신화에

단군이 천제의 자손으로 하늘에서 내려온곳이

백두산으로서,그 기원은 우리나라의 역사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민족의 영산이다.



백두산의 높이는 2,744m이며,주봉(2,744)은 장군봉으로

북한이 소유하구 있기에,중국루트로 올라가는경우 백두산 정상을

등정했다구 볼수가 없다.


백두산 천지의 수심은 200-300m 깊이를 유지하는

산정상에 위치한 호수로서 그 깊이가 아득함을 알수가 있다.

이러한 깊은수심으로 인하여,천지의 괴물미스테리가

나타나구 있다.



단군시대부터 우리나라의 역사와 함께 존재한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모든 산의 기본산맥인 백두대간을 형성하여

금수강산의 모태의 산맥으로 위치해 있는 산이 백두산이다.

그러므로,백두산이 없는 대한민국은 존재할수 없으며

백두산을 잃어버리고는 한민족의 웅비의 기상또한 존재할수가 없다.



백두산의 절반은 북한이 임의로 조약을 맺어

포기하므로인하여, 중국의 땅으로 변해버린 현실에서

우리나라의 혼과 정신이 반을 빼아껴버린것이므로

단군왕검이래에 한민족의 개국신화의 신령한 산으로서

어떠한 상황에 직면한다구 하여두,반드시 찾아와야할

민족적 사명이 부여된 산이다.



백두산은 우리나라땅이라는 명제는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변치않구 지켜져야할 절대적 신념이며,백두산을 창바이산이라고

부른다던지,간도는 중화민족의 선조가 살았던 땅이라느니,이미 빼아겨버린거

포기하자느니 하는 개념을 가진 인간은 한민족의 얼과혼을 부정하는

것으로 을사오적보다  더한 매국노인 것이다.


단군이래 한민족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단군이래 백두산은 한민족의

영산이었으며,반만년 역사의 커다란 물의 흐름속에 백두산은 한민족의

가슴속에 도도히 흘러왔던것이다.이러한 산을 창바이산이라구 부르며

살자는 인간들을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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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 부터 600년전인 1,400년도에 살았던 남이장군두 백두산은

우리나라땅이라구 분명한 역사의식으로 표현했는데,,중국의 창바이산

이 뭐가 어쩌구 어째다구...에라이...............................................


조선후기뿐만아니라 조선전기에두 분명히,백두산,간도는

우리나라땅이라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던것이다.


白頭山石  磨刀盡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豆滿江水  飮馬無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男兒二十  未平國(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後世受稱  大丈夫 (누가후세에 대장부라 일커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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