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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이 충청도의 대표 충신인 계백을 맞아 싸우느라 나당연합군의 집합장소일보다 2일이 늦게 약속장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에 당나라의 대장군 소정방은 신라군의 사기를 꺾어 당나라군에 굴종시키려고 김유신장군의 휘하 장군을 군율을 어겼다는 명분으로 참수하려고 할 때  

김유신장군이 신라군의 최고원수를 상징하는 도끼를 들고 일어나 누구라도 계백과 같은 장수를 만나 그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그러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누가 그 자리에 있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

“ 만약에 내 휘하 장수를 참하려 한다면 내가 먼저 당나라군과 일전을 벌이고 백제를 공략하겠다." 이에 소정방의 머릿속에서 백제원정군을 보낼 때 은밀히 당나라 황제 고종이 한 말이 떠올랐다. “ 상황에 따라 백제를 무너뜨린 다음에 신라도 멸망시켜라.” 당나라 황제의 밀명과 빽으로 지시하는 것을 저것이 무시하는 것을 보니

저놈은 보통 놈이 아니다. 유신을 잡다가 오히려 내가 죽을 수도 있구나. 라는 느낌에 모골이 송연해 자신이 말한 참수하라는 명령을 거두어 김유신이 있는 한 신라를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게 되고,

훗날 소정방이 귀국했을 때 당 황제가 왜 신라를 치라했는데 그러하지 않았는가. 라고 당 고종이 힐난을 받게 될 때 둘러 될 핑계인 “상관은 아랫사람을 정의로써 다스리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친부모처럼 믿고 따르며 하나로 단결하는데 아무리 소국이라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명분이 되었다.

김유신장군에게 있어 그 당시 세계 제일의 통일국가였던 당나라 황제의 명령에 반기를 드는 두려움보다는, 자신을 믿고 따른 죄밖에 없는 부하를 죽게 나두는 것이 오히려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 드렸으며 자신이 죽게 될지라도 용서치 않겠음을 행동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소정방이 김유신의 부하장수를 죽이려 했다면 소정방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장성택이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은 “선처를 바랍니다.”라는 자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김정은이 오직 김일성의 후광인 빽을 가지고 명령을 할 때 장성택이 선처를 바랍니다라는 자세를 보이자 김정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놈은 자신에게 반항을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놈이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정은의 지략은 소정방보다 미달함을 알 수가 있는데 소정방은 상대방이 반항을 했을 때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임을 알고 물러서는 현명함을 가졌으나, 김정은은 상대방이 처음부터 아예 대항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알면서도 휘하부하를 핑계되며 장성택을 죽였다는 점이다. 장성택은 김정은의 대갈박수준이 소정방보다 못함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 큰 오류다.  

장성택이 김유신처럼 김일성 할애비 빽이라도 상관없이 나를 치려한다면 너의 목숨을 위협할것이다라는 정신자세를 평소에 가졌다면 김정은이 장성택을 죽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범부와 영웅의 차이점이 생긴다는 것이다.

역사적 영웅들은 혼돈 속에 절대적 판단을 요할 때는 그 어떤 신분이나 빽이나 후광 ,사회에서 강요된 가치관 등에 절대성을 부여하지 않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지극히 올바른 인간의 순리”에 따라 판단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는 점이다.

김유신장군이 만약에 소정방에게 일반 대다수 범부처럼 극한 상황에서 선처를 바랍니다. 라고 행동했더라면 오늘날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존재치 못했을 것이며 중국의 소수민족인 형태로 남아 존재했을 지도 모른다.  

김유신의 정신은 당나라황제보다 자신의 조국의 운명이 더 중요하고, 자신의 부귀와 앞날의 영화보다는 전장에서 함께 싸우는 부하의 목숨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세를 평소에 가졌다는 점이다.

장성택에게 있어 조국의 운명보다는 백두혈통이 안위가 더 중요하고 죄 없는 부하의 목숨보다는“선처를 바랍니다.”평소의 신념과 자세 때문에 무참히 비극적 죽임을 당했기에 동정할 여지가 없다.  

장성택이 백두혈통의 안위보다 한민족인 조국의 운명을 더 생각하고 어려움과 고난을 함께한 부하를 자신의 목숨과 부귀보다 먼저 평소에 생각하는 자세를 가졌다면 그의 위치상 한민족의 영웅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죽으면서까지 “김정은이나 김경희를 만나게 해달라하고 선처를 바랍니다.”라는 추태를 보여주며 죽은 걸보면

백두혈통의 안위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통일한반도 한민족의 조국의 운명에는 악영향만 죽을 때 까지 보여 줄 인물상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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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나 역사서등을 살펴보면 나라에 안좋은일이 생기거나 왕이 죽는 해에 반드시 나타나는 징조가 열거되는데 겨울에 오얏꽃이 피었다든지 하는 봄에 피어나는 꽃들이 계절과 맞지 않게 피어나는 기이한 자연현상이 선행한다.

 

 

요즘에 주변을 보면 봄에 피어서 열매를 맺어야할 뽕나무에서 열매가 열린다던지, 배추꽃등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흉조의 자연현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나라가 망하던지 지도자등이 죽을것이라는것을 나타낸다.

 

현실적으로 예상해 볼수있는것이 올해 안에 북한의 갑자스러운 붕괴나 김정은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첫 번째로 예상해 볼 수가 있는데, 현재 김정은이 현대의학으로 치료 불가능한 불치병에 걸려있거나,하극상으로인한 군사쿠테타의 발생으로인 한 부하에 의한 죽음으로 인한 비상사태가 발생하는 전조로 해석할 수가 있다.

김정은이 활동이 활발하다가 사라졌다 뜸해진 것은 북한주민들의 동태때문이 아니라 주변 환경과 신변에 이상이 생기는 조짐 때문으로 추측할 수가 있다.

 

순리에 맞지 않는 자연현상이 나타나는 경우에 나라의 지도자급 신체에 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는 전혀 없고, 흉조가 나타남을 역사기록들은 보여준다.

 

첫 번째가 아니라면 이러한 현상이 남한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북풍에의한 순리에 역행하여 시대를 거스르려는 행위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므로 지도자나 지도자급의 대선주자들의 신체에 안 좋은 일이 생길수도 있다는 자연현상의 징조로 볼수있기에 미리 신경써 예방하여 경계함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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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무현,그분의 유서전문을 나름대로 영어번역을 해보았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려니,의미나,단어,어감에있어 모호한부분에대하여는 개인적인 주석을 ※괄호속에 첨가했습니다.개인적인 주석이므로 그러한 의미가 아닐수도 있겠습니다.


저도 정확한 영문번역을 보고싶지만,저의 영어실력 한계로인하여,그렇게하지 못하는것이 아쉽습니다.어찌되었든


우리나라 반만녁역사에 나라를 이끌었던  최고통수권자중에 마지막심정을 유서전문으로 남긴분도 처음이었고,전례에없던 유일한 기록이기에 역사자료에 기록해둡니다.

영국 bbc뉴스의 사이트에 2009년 5월29일 해드라인은 노무현 전대통령에 관한 기사가 해드라인 탑뉴스로 나왔습니다.우리나라뿐아니라 전세계의 공정한 언론방송들이 노무현 전대통령을 기억하고 추모하고있었습니다.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중에 체재와이념을 넘어 세계가 추모하며 기린분은 노무현 전대통령이 유일한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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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y people helped me, so.

Many people are suffering because of me.

Harassment to prepare is too many for me.

The remaining time of life will be a burden to others.

I can not do anything because health is not good(※they torment me).

Can not read a book,moreover can not write.

Do not be sad.

both life and death is one of nature.

Do not be sorry.

Do not blame anyone.

It is fate(※Roh Moo-hyun analects Reference "Chosun Dynasty 600 years")

Do cremate.

Do leave a small memorial stone near my home.

It is my belief.

Republic of Korea President Roh Moo-hyun,16,the whereases in the w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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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들의 성씨의 미스테리,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에서 왕조의 성씨를 찾아보면,

생각외로 많지가 않다.고구려의 고씨,신라의 박.석,김씨 고려의 왕씨,조선의 이씨 그러나 백제왕가의 성씨는?에 도달하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고씨,박씨,석씨,김씨,이씨인 5대성을 왕조의 성씨라고한다면,왜 600년이상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백제왕가의 성씨는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하는 점이다.

고구려,신라와 함께 삼국시대의 동시대의 문화를 살았던,백제가,신라나 고구려의 왕족 성씨는 모두 기록되어있는데,


같은 민족이라는 백제의 왕가는 왜 성씨가 미스테리로 되어있느냐하는 점에대한 글이다.백제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가야와 함께 수백년간 이어진 왕조에 비하여 주류를 이루지못하는 너무나도 빈약한 역사의 기록만이 남겨져있다.

이러한 이유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일본과 백제와 가야의 관계때문이다.일본의 천황이 자신은 "백제왕가 자손의 피가 흐르고있다"라고 하였고,우리나라에서도 구지 일본 천황가가 백제왕가의 피가 흐른다고,공공연이 말하는것에대하여 자부심인냥하는 경향이 있는데,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일본의 천황가도 성씨가 없다.우리나라의 역사에 존재하는 고대국가중 유일하게 백제왕가의 성씨만이 전해지지 않는다.역사에서 논란이 되고있는부분이 백제와 왜의 관계가 어느쪽이 주종관계였나인데,우리나라에서는 백제가 주고,왜가 종이었다는 입장이고,일본의 입장은 왜가 주고,백제가 종이었다는 태도인데,상식적으로 왕의 자식이나,친족을 인질로 다른나라에 보내는경우,고구려와 신라의 경우나,

세계사적인 국가인 몽골과 기타국가등의 관계를 보았을때,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왕가의 자손이나 친척을 상대방의 나라에 보내는것은 보내는쪽이 주종관계에서 우월한 입장인경우는 전혀없었다.

백제는 특이하게도 일본에 왕의 장남이나 자손들을 인질로 왜에 보내어 생활하게하다가,일정시간이되면 일본에서 돌아와 왕위를 계승하곤했던 기록을 쉽게 찾아볼수가 있다.주목해야할 점은,우리나라의 최강의 군주였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시절에도 이미,신라는 왜의 공격으로부터 힘겨운 방어를하고있었고,직접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여 침입한 왜를 섬멸하였다는 기록을 볼수있는데,

왜의 세력은 오늘날 우리나라가 생각하는 일본이 통일국가를 이루기전에,일부의 허접한 세력이아니라,광개토대왕 당시에도,신라를 극도로 위협할정도로 강성한 군사력이었음을 알수가 있는데 신라는 왜의 공격으로 나라가 흥망의 위기에 처할 그시대상에서 백제를 살펴보면,이것들은 어찌된것인지 왜의 공격으로부터 예외였을뿐아니라,오히려 왜와 백제는 서로 연합하여,주변국을 점차 점령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의 천황가는 백제왕가와 통하다라는 일본천황의 말에는 혈연적으로 하나였다일뿐인데,백제왕들이 성씨가 없는것이나,일본의 천황가가 성씨가 없는것이나,일맥상통한다.우리나라의 국민에게 백제왕가의 성씨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제대로 답할수있는 사람이 없다.

수많은 왕의계보를 가진 백제왕들이 단 한명도,우리왕조의 성씨는 무엇입니다라고 말하거나 기록한적이 없기때문이다.그 당시에 성씨의 개념이 없었느냐하면,고구려나 신라에는 이미 왕족의 성씨개념은 존재하고 있었기에,변명할꺼리가 없다.왜 백제는 왕가의 성씨를 기록하지않았느냐,이것은 너무깊게생각하면 어려운것이지만,상식적으로 간단히 생각해보면 백제왕가는 왜라는 나라의 천황가와 뿌리를 같이하며,서로 상부상조하며 나라가 발전했기에 일본의 천황가가 성씨가 존재하지않는것처럼,백제왕가또한 그러한 전통에 참여하다가 망했기에 역사의 기록에서 백제왕가의 성씨가 존재하지 않게되었다는 것이다.

백제와 왜의 관계는 문화적인 입장에서는 백제가 우월했고,군사력에있어서는 왜가 우월했다의 관점으로 볼수있는데,고대 동아시아의 국가들의 흥망성쇠를보면,문화가 우월했다고 주종관계에서 주가되는게아니라,몽골의 징스칸이 몽골 문화가 우수해서,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한것도아니고,비록 몽골의 전체군사력은 20만에 미치지 못했지만,훈련되어진 몽골기병의 군사력이 강하기때문이었다.

백제왕가를 호위하고,받쳐주었던 군사력의 힘은 왜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할수밖에없다.백제는 문화적으로 왜보다 월등했지만,일정시기동안 군사력에있어서 왜의 보호를 받는 그러한 형태의 연합관계를 왜와 공통으로 가졌음을 알수있고,그 뿌리가 백제왕가와 일본천황가의 혈연적 일치관계에 기반했음을 알수가 있다.

백제 왕가의 시조는 분명히 고구려의 한분파로 세워진 국가였지만,그이후 고구려처럼,해씨를 원조로하는 고씨인 왕의 성씨를 이어간게아니라,고씨라는 성씨와 결별하고,그당시 군사력에있어서 우월했던 왜국의 천황가와 혈연적뿌리를 공유한다는 백제왕가의 명분으로 백제와왜는 연합하는 군사동맹관계였음을 알수있고,근본적으로보면 백제왕가는,우리나라의 일반백성과 동떨어진 태생들이었지 않나 그런생각을 해볼수가있다.

우리나라역사에서 백제왕을 드높이는 경우는 거이 볼수없고,또한 조금 뛰어난 백제왕이었다고해도,그사람을 추적해보면 알수없는 미스테리기간동안 사라졌다가,불연듯 나타나 왕위에 오르는데 그밑바닥에는  왜왕가와 밀접한 관련이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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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가와 일본천왕가의 관계는,몽골과 고려의 부마국과의 관계정도로 이해하면 역사적진실에 가깝다고 볼수있지않나라는 생각이든다.우리나라의 역사에있어 백제와 왜의 관계를 어느쪽이 주종관계냐에 대갈박 골머리를 굴리고 일본과 서로대립하는데,그럴필요가 전혀없는문제고 주변국가나 우리나라 역사에 남겨진 기록들을 있는그대로 해석하여 받아드리면 될뿐이다,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해서,고려의 역사가 자랑스러운 우리역사가 아닌것은 아니듯이,백제왕가가,일본의 천황가에 예속되어 일정시기,군사적동맹의 도움을 받았다고해도 있는그대로 받아드리면되는것이지,대갈박굴리며 왜 이딴기록이 역사에 존재하는지 그에반한 학설을 만들어내는데 골머리를 쓸필요가 전혀없다.

백제왕가는 전체시기가아니라 일정시기동안,"왜에 종속된 왕의계승을 했었다"이렇게 보면 주변국가에 남겨진 기록들을 "왜곡"할 엉터리학설을 만들어낼 필요가없는것이다.역사는 교훈을 얻기위한것이지,자존심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그자체가 더 부끄러운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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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서 인간으로서 최악의 왕을 뽑으라면 조선시대 왕인 인조이다.

인조는 왜 말년에 거이 자멸에 가까운 미친짓을하고 죽게 되었을까?
 
그 배경을 살펴보면 조소원이라는 후궁이 있음을 알수가 있는데,

태생적으로 역사의 반역정권이었던 인조의 즉위도 문제였지만 늙어서도 여색에 미친결과였다.

인조는 54살에 죽었는데 죽기4년전부터 후궁인 조소원이라는 여자에 미쳐


밤마다 "베게"사이로 나누는 대화를 통한 결과는 인간으로서는 생각할수없는 짐승의 행동만을 행하다가 죽었다.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선해지는 경우가 많은데,인조는 죽을때까지 여자에 미쳐서 폐악을 저지르다 죽었기에 인조라는 왕은  왕의대접을 해줄 가치가 전혀없는 인간이라고 볼수가있다.

인조와 조소원사이에도 딸이있었지만,인조의 후궁인 조소원이 스스로 왕위를 이을수도 없었는데,왜 소현세자일가를 저주했는지는 의문인데,그결과는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에의하여 처리가 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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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먼저 그당시 국제적인 안목을 가진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소현세자가 비록 아들이었지만 늘 불안했다.이것은 인조정권이 태생적으로 주둥아리로만 외치는 반청의 기치로 탄생되었기에,국제정세를 잘파악했던 소현세자의 행동과처신은 눈에 가시거리였을 뿐이었다.

인조는 국내의 사대부들에게 인기를 얻고 왕권을 유지할수있는 길이,주댕아리만일지라도,부모의 나라 명나라 어쩌구하는 허울데기 행동을해야함을 잘알고있었다.이것밖에는 광해군을 몰아내어 반역정권을 만들어낸 명분우위가 없었다.

이미 국제정세를 잘 파악했던 소현세자는 이러한 허울데기명분에 연연하지않았기에,인조의 마음속에는 소현세자는 아들이기 이전에,자신의 허울데기 처신을 비웃는것같고,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갈수있는 흉악한눔으로 여겨졌다.

이러한때에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소원은 인조의 마음을 가장 잘파악할수있는 총애받는 후궁이었지만,소현세자빈이었던 강씨와는 아주안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는데,이 근본에는 강씨의 일족과 조씨의 일족간에 외척들의 국가에 참여의 대립이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기에,조소원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자신의 일족이 정치참여를 탐탁치않게 생각했던 소현세자빈에대하여 안좋은 감정을 가지게되는데,조소원과 인조는 그모양새는 달랐으나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부귀영화의 지속측면에서는 서로의 대갈박이 맞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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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죽음은 인조가 독살했다,아니다가 아니라,인조가 소현세자 죽음뒤에 벌인 행동을보면 독살인지 아닌지 미루어 짐작해볼수가 있다.소현세자가 죽기전에 이미 조소원과 소현세자빈 강씨사이에는 암투가 벌어지고있었고,인조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애첩이며,후궁이었던 조소원을 편애했고,세자빈강씨가 하는일은 사사건건 미워했다.결국 인조<->소현세자,조소원<->세자빈 강씨의 대립관계에서 자신의 국제정세관을 븅신취급하는 아들인 소현세자보다 밤마다 귀에 좋은소리를하는 자신의 애첩인 조소원을 더신뢰하게되는데,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인조와 조소원은 뒷날의 문제가 발생하지않도록,철처하게 소현세자의 일가를 말살하게된다.

조소원의 계략을 받아드린 인조는 먼저,홀로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키우던 세자빈 강씨를 모시던 나인을 역모라는 누명을 씌워서 궁녀인 계환과 계옥을 잡아다 옥에서 죽여,소현세자의 죽음에대한 세자빈 강씨가 하고싶은말이나 유언등을 전혀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고립시킨후,허울데기 명분을 붙이고는 세자빈 강씨의 두 오라버니를 잡아다가,곤장을쳐 죽인다.그리고 사관과 신하의 무수한 상소를 모두 배척하고,기어이 세자빈 강씨를 사약을 먹여 죽였다.

인조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애통하고,슬프게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라고 진실로 생각했다면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인조의 친손자들이기에 원손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인조는 어찌된것인지 세자빈 강씨를 죽일때 붙인 허울데기 명분을 손자들에게도 붙여서 모두 섬으로 귀향을 보낸다.

아비가 병으로 죽으면,손자들이 불쌍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주는게 인간의 도리이며,역사상 왕권문제로 자신의 아들을 스스로 죽인 영조조차도 그 손자를 원손으로삼아 돌봤는데,인조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계속하기에 사관들이 얼마나 황당했으면,엄한 왕조의 기록물에 의문스럽다는 표현을 적어놓았는지 알수가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수없는 짓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인조를 그당시 신하들과 사관뿐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했던 청에서는 용골대를 보내어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어디있는가 묻고,소현세자의 큰아들을 청으로 데려가 양육 하겠다고한다.이러한 제의가있은후 갑자기 섬에 귀향가서 살던 소현세자의 큰아들의 죽음으로 대답이 돌아왔다.뒤이어 둘째도 죽고,뒤이어 마지막남은 아들도 남해어딘가에 유배되었다가,왕의 친손자였음에도 역사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마지막 세째도 왕의 친손자가 살아서 일가를 이루어 살았다면,당연히 역사속에 기록되어있을것인데.아무런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는것은 어릴때 이미 죽음을 당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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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자신의 친아들,며느리,손자등 모두를 죽이는데 이러한것이 51살에서 54살까지의 3년사이에 모두 이루어졌다는것이다.인조는 자신의 인생에있어 마지막 남은 3년의 삶의 기간속에 들어있던 왕권,부귀영화,후궁의 미색을 취하기 위하여 이러한짓을 태연하게 벌였다는것이다.

조소원의 종말은 인조가 54살의 나이로 죽자,뒤를 이은 효종3년 1652년에  조소원이 세자빈 강씨에게 씌웠던 역모혐의처럼 효종에의하여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잡혀 죽임을 당했을뿐만아니라,조소원의 일가친척등이 모두 잡혀죽여 패가망신 하게된다.

인조는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손자들을 모두 죽여놓고 단지 3년을 더 살았고,조소원은 스스로가 지은 악업에따라,세자빈 강씨가 죽은지 6년만에,자신뿐아니라 일가친족 모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인과응보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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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의 바위는 칼을갈아 다없애고,두만강 푸른물은 말에게 다먹이리라"는 활달한 기상을 가졌던 조선시대에 보기드문 용장으로

20대의 젊은나이임에도 이룬공적이 높아 오늘날로보면 20대에 정부부처의 장관을지낼정도로 능력과업적이 탁월했던 남이인데

왜 재평가를 받지못하고 역사속에 미스테리로 뭍혀져있을수 밖에없는지 그까닭을 생각해보게되었다.

단지 유자광의 모함에의하여 역적으로 몰려 젊은나이에 억울하게 죽었다라는 정도로는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역사속기록을 통하여 남이장군의 숨겨진 미스테리를 파헤쳐보자.1468년 5월 세조임금이 집권하던시절,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있던 남이에 관한기록에서 의외의 구절을 발견할수있는데,


남이가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말하길" 저의 처는 어머니에게 불효하고,첩들을 시기하니 이혼하게해주십시요" 세조왈"칠거지악에 해당하니,너의 생각대로 하도록하여라"하였다.이러한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은 특이한 사항들에대하여는 자신의 판단을 가끔씩 적어놓기도하는데 사관이 판단하여 기록하길"남이의 어머니는 며느리와 아들이 동침하는것을 좋아하지않았는데,왜 그런지 이유를 알수가없었다"


4개월이지나 1468년 9월에 세조가죽고 그의 둘째아들인 예종이 왕위에올랐는데,한달이 채지나지않은 10월에 유자광의 밀고로 남이가 역적모의로 잡혀서 국문을 받게된다.남이의 친적들도 역적연루혐의로 심문을 받게되는데 그중에 남희라는 사람이 예종과 나눈 대화도 괴이한데 이러했다.


예종이 말하길 "너도 남이하고 역적모의를 같이했지 않느냐?" 남희가 말하길 "남이의 장인이 저에게 이야기하길 (남이는 권남의 딸을 아내로 맞았고,권남은 세조의 등극을 도운 주요공신중에 한명인데 남이와 권남의 딸사이에는 남구을금이라는 딸이있었는데,권남은 남이의 역모가 일어나기 3년전에 이미죽었다) 남이와 그 어미사이에는 천지간에 용납할수없는 죄를 저지르고있는데,그눔이 인간이냐,짐승이냐라는 소리를 들은후,그이후로 남이와 단교하여 지낸지 오래입니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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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들에서 더 이상한점은 남이의 어머니에대한 형벌이다.남이는 역적의 죄를 지었으므로 당시 법률에따라 죽는것은 이해가되지만,그당시 법률에 따라 연좌제를 행했다하더라도 역적집안의 남자들은 죽인다해도,여자들은 노비나 관비로 만드는게 당시 법률이었다.그러나 어찌되어진건지 남이의 어머니는 극형인 소달구지를 이용한 환열형에 처해진것도모자라,여자인데도 3일동안 사람들이 오고가는곳에 메달아 두었다는점이다.남이장군을 재평가하여 좋게 만들고자해도 그렇게하지못하고 미스테리속에 뭍여 남길수밖에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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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나는 조선의 국모이니라"라고 외쳤다는 고종의 왕비 민황후는 과연 그러한 말과 자세를 보여줬을까를 아무리 역사기록을 찾아보아도 보이지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로 궁녀의 복장을하여,구차하게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려고했을뿐이었다.


조선의 민황후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행동을했던 대비되는 왕비가 고려에 있었으니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14세기 후반에 머리에 빨간두건을쓴 도적의 무리였던 홍건적이 자주 고려를 침범하여,우리나의 백성들 괴롭히곤하였다.훗날 이 도적의 무리의 괴수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데,근본부터가 도적의 무리들이였기에 허약한 근본토대를가진 왕조일수밖에없었다.


1363년 고려 공민왕의 나이 33세가 되던해,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의 논공행상에 불만을품은 김용이라는자가,자객단을 이끌고 흥왕사의 행궁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나라일을 보던 공민왕을 암살하려고하였다.


김용의 자객단이 흥왕사로 급시에 습격을가하자,공민왕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는데,공민왕의 아내였던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공민왕을  어머니의 방에 왕을 숨기고,그문앞에 서서 자객단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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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단의 무리가 칼을 휘두르며 방문앞에 이르러 말하길 왕은 어디에있는가? 왕비가 홀로 나아가 외치길"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방안에 들어가려거든 먼저 나를치고 들어가라"하메,무리들이 두려워 태후의 방안에 들어갈수없었다.


김용의 자객단은 나중에 최영의 정예군에의하여 처단되어 반란은 진압되게되고 훗날 아내의 도움으로,자신의 목숨을 구한 공민왕은 흥왕사의 변이 일어난후 2년이 지난 35세되던해 눈이 소복히 많이 내린 2월 추운겨운날에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죽자,


훗날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남긴 조의문에 그때의 상황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는데 자신을 남기고 떠나버린 아내를향한 사랑과 비통한심정을 느낄수가있다."나에게있어 아내보다 중한것이 없었고,흥왕사의 변이 일어나메,나의 몸의 지척에서 적을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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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사후  공민왕은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은왕비를 살아있는사람처럼대하며,식사할때마다 자신의 음식과 왕비의음식을 같이차려  함께 대화를하며 음식을먹었고,일체의 고기를 먹지않았을뿐아니라,나라를 다스리는 일조차 관심을 끊어버려,국제정세에 밝아 요동을 정벌하며 호기롭고,영민했던 공민왕은 이후 360도 다른 무기력한 왕의 모습을 보이며,슬픔속에서 살아가다 결국 신하의 손에의하여 죽음을 당하게된다.


훗날 조선을 개국한 반역의무리들이 공민왕의 후손인 우왕과창왕의 씨를 가짜라고하며,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위하여 역사를 왜곡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보아도 공민왕은 35세에 이미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하여,아이를 낳다가 죽었던걸보면,공민왕의 남성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했음을 알수있고,공민왕 스스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했던 우왕을 훗날 반역의 무리가 "아니다"라고 기록것은 반역을 정당화하기위한 역사조작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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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역사에서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자객단앞에서도 당당히 홀로맞선 여인이었지만,궁중에서의 일상생활모습은 내성적이고,여린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전해지는데,사랑앞에서는 한발자국도 물러 서지않았다.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사랑을보면,남녀간의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라는 말이 사실인거같다.


드라마나 사극일지라도,역사를 조작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것은 반역의무리들이 늘행해왔던 목적을위하여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르지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반만년역사에 왕비로서,노국공주가 행하였던 행동은,실존하는 유일한 기록이며,"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라는 그러한 비장미와 당당함을 보여줬던 인물을 찾는다면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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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9대왕 김춘추가 재위2년에 접어든 655년,백제,왜,고구려의 연합전선으로 연이은 공격을받은 신라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되었다.


이에 태종무열왕은 장수 김흠운이 전지,예파,적득,보용나등과함께 백제의 조천성을 공격하도록하였다.



김흠운은 어려서부터 나라가 어려움에빠졌을때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바쳐 나라를 지켜냈던 화랑들에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곤했다.





김흠운이 백제의 조천성아래 양산이라는곳에 진을치고있을때 백제의 대군이 야음을틈타 기습공격을해오자,신라군의 진중은 혼란에빠져 미쳐 전열을 가다듬고 싸워보기도전에 많은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수많은 화살이 날아오는중에서도 김흠운은 홀로 말위에서 창을 든채 맞서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어려운상황에 처하자,김흠운이 부하였던 전지가 김흠운을 구하기 위하여 다음과같이 말하였다.


" 적이 어둠속에서 지척을 분간할수없는 상태로 공격해오니,만일 장군께서 그들에게 죽더라도 아무도 아는사람이 없을것입니다.또한 장군께서는 신라의 명문가의 자제이고,대왕의 사위이므로 적의손에 죽게된다면 백제의 자랑거리가되겠지만,우리에게는 커다란 슬픔이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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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운이 말하길"대장부가 나라를 위하여 몸을바친이상,남이 알아줄 상황이든,그렇지않든 무슨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앞으로 나아가 힘이다하는 순간까지 적과싸우다 죽었다.이를지켜보던 예파와 적득도 적에게 달려나가 함께싸우다 전사하였다.


후군에서 지원 기마병대를 이끌었든 보기당주 보용나가 흠운이 죽었다는말을 전해듣고 말하길"흠운은 권세와영화가있어,사람들의 사랑과 아낌을 받을수있었는데도 스스로 절개를지켜 죽었다,나 보용나는 생이무익,사이무손호?"라고 말하며 적진으로 달려나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훗날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를듣고,슬퍼하며 그들을 추모하기위하여 양산가를 지어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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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점을치는 사람이었던 지화라는 사람의 관계를 통하여,세종이 풍수나 점같은것에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수가있다.


지화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때부터 국가의 점치는 일과,혼례에대한 궁합을 보는일을 맡아서했다.

지화의 운명은 태종과 세종에대한 "말한마디"인과응보에의하여  극과극인 운명을 살게된다.


태종은 세종처럼 남녀관계에는 금슬이 좋아서 왕비뿐아니라 많은 궁녀들에게서 아이를 낳았다.




태종은 궁녀에게서 나은 자신의 딸들이 혼례할 나이가 차자,궁합을 잘보는  판수인 지화를 시켜,알맞은 사위감을 찾도록한다.지화는 장성한 아들이 있는사대부집들을 돌아다니며 생년월일을 알아보러다니던중,이속이라는 관리의집에가서 그 집의 아들의 생년월일을 묻자,


이속이 지화에게 말할길 "명문가의 비빈의 딸이아닌,일반궁녀에게서 난 딸의 혼례를 위하여 우리아들의 생년월일을 묻는거라면,우리아들은 죽을걸로 가서 말해주게" 지화는 자신의 들은 말을 그대로 태종에게 해버렸다.


태종이 누구인가? 자신을 거스리는것은 외척이고,형제이고 박살내버리는 조선조 최대의 터프가이 왕이 태종이었다,대노한 태종은 이속을 잡아오게하고는 말할길" 근본이 틀려먹은 가문인걸 내 익히 알고있었기에,나도 혼인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그러나 네놈의 말투는 용서할수가없다"하고는 이속을 감옥에 가두어 말에대한 댓가를 치루도록한다.


지화의 입장에서는 꼭 이속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궁합을 맞춰볼 사대부집의 아들들이 많이있었기에,이속이 한말을 사적인 대화로알고 뭍어주고 태종에게 말하지않을수도 있는 문제였다.지화는 평소 이속을 좋게보지않았거나,태종이 자신에대한 신임을 널리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훗날 이러한 말실수에대한 연은 결국 지화 자신도 범하여 자신의 운명이 박살나버리걸보면 연에의한 인과응보라는 말을 되새겨보게된다.


세월이 흘러 태종이 죽고,세종이 왕위에 올랐다.지화는 선대부터 국가의 점과 혼례에대한 일을 잘한 공이있었기에 세종은 신하들이 "점쟁이에게 벼슬을 내리는것은 가당치 않습니다"라는 상소를 물리치고 지화에게 사옹원사직이라는 3품에 해당하는 꽤 높은 벼슬을 내린다.


1444년 겨울 어느날에 부련듯 나라의 일에대한것을 점쳐보려는 생각이 들었던 세종이 신하를 시켜 지화를 보고싶다고 하였다.신하가 지화의 집을 찾아가보니,지화는 없고,그대로 돌아갈수없어 여러곳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지화를  찾아냈는데 다른사람의 집에서 술을 먹고있었다.


신하가 말하길 "전하께서,나라의 일에대하여 점을 칠일이 있다고 부르십니다" 술을 먹어서인지 눈에 뵈는게 없던 지화가 말하길 (오늘~꺼억,노새,노새 젊어서 놀아~ 아 좋다~ )"술을 많이 먹어,오늘은 점을 칠수가 없으니 잘말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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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가 세종에게가서 그대로 말하길 "술을 많이 먹어 오늘은 점보는 일을 못하겠답니다" 이말을 들은 세종이 대노하여 "이눔이 운명보는것을 좀 안다고 음흉하고 간교하기 짝이 없는눔이구나,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그 말뽄새에대하여 문초하도록하여라"하고는 결국 세종은 지화를 남도땅 외딴섬인 진도로 귀향보내버려,지화의 운명도 한순간에 막장인생으로 변해버리게된다.


세종이 풍수지리나 점치는것에대하여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진 왕인지는 1449년 4월의 조선왕조기록으로 분명하게 알수가있는데 세종이 말할길 "장님인 지화가 운명에 대하여 점친것들이 모두 맞은것은 아니지만,예로부터 성현들이 풍수지리등인 복서를 중히여겼는데,인간세상일로는 알수없는 일들이 생겼을때 무엇으로 의지할수있겠는가,그렇기에 운명에 관한책은 널리 구하여 올리도록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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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2대왕인 남해왕이죽자,3대 왕위를 누가 물려받을지에대하여 정해지지않았다.남해왕에게는 아들인 유리와 사위인 탈해가 왕권의 후보였다.



먼저 유리가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는 마음으로 탈해에게 말하길 '백성들의 추앙을받는 자네가 왕위를 잇는것이좋겠네"


탈해가 말할길" 왕의 자리는 그 그릇에 맡는 어질고,현명한 사람이 맡아야하는것으로 아무나 감당할수있는것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현명한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알고있습니다(석탈해는 자신보다 유리가 더많은 치아를가지고있는것을 알고 있었던듯하다)그리고는 떡을가져다 한입씩 물고 떡에난 이빨자국을보니 유리가 많았기에 신라의 3대왕은 유리왕이되었다.


이후로 신라의 왕을 이사금이라고 불렀는데,이사금이란 "이의 자국"이라는 기원을가지게되었다.신라3대 유리왕은 과부,고아,자식없는 노인등의 처지가 불우한 백성들에게 더많은 관심을가지고 정치를하였기에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하고,복되었다.


유리왕시대에 신라의 6부에게 성씨를 하사하였는데 양상부는 이씨,고허부는 최씨,대수부는 손씨,간진부는 정씨,가리부는 배씨,명활부는 설씨라는 성을 내렸다.이,최,손,정,배,설씨 6가지 성씨는 신라의 6부족과 관련이 있는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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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신라의 설씨 성을가진 처녀는 얼굴이곱고,심성이 지조가있었기에.삼국사기열전에 설씨처녀에대하여 따로 부가하여 기록할정도였다.유리가 죽을때 유언을 남기길 자신의 뒤를이을 왕은 자신의 아들들이 아니라,탈해에게 왕위를 잇도록 엄명하고는 죽었기에 신라의 4대왕은 석탈해가 되었다.유리와 탈해의 관계는 이처럼 서로를 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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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사진은 티스토리달력 사진공모전의 출품작입니다.사진제목은 "바위섬"입니다.바위섬~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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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장 관대한처벌을 받는것이 고위공직자등 정치권활동을하면서 뇌물쳐먹는 인간들에게대한 법의 처벌이아닐까 생각한다.

부패가 만연한 중국조차도,빽이나 끊이 떨어진 정치인이라서인지는 모르지만, 백성들을위한 안정책으로 고위정치인들을 공개처형하는 기사를 접할수있다.


쇼라도좋으니,우리나라도 제발 조선왕조 500년동안 쭈욱이어져,오늘날까지도 너무도 뇌물이나 부정부패에대한 처벌이 관대한 법적정의를 제대로 시행했으면 좋겠다.




일반서민은 사이다1병 훔쳤다고,실형을선고하면서 뇌물쳐받아먹고,부정부패한 정치인들은 뭔 빽이 그렇게좋길래,툭하면 집행유예로 관대한처벌을 하는지 이해할수없다.말로만 엄중이 처벌한다,엄벌하겠다 주둥아리만 놀리지말고,형량과판결로써 엄벌에 처하는 전통을 만들어줬음 좋겠다.뇌물과부정부패에 관련된 정치인이나공직자들은 평생 정치인나공직에서 활동할수없도록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잠시지나면 무슨로비를했는지,사면받아 정치인이나 공직으로 복귀하는 이런 작태는 없어져야한다.그러기위해서는 법의 정의가 제대로되야된다.이런 뇌물이나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정치인이나공직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더라도,그 처벌이 무겁지 않다.이들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은 일반 살인범죄자의 피해보다 더심하고,악영향을 미친다.


정치가 3류에서 계속머무는 이유가 뇌물처먹거나 부정부패한 이런 공직자나정치인들이 너무나 쉽게 정치인나공직자로 복귀시키는 저주받은 조선왕조 500년의 부패한 정치문화가 아직까지도 남아있기때문이다.역사로부터 배워보자.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불렸던 고부군수였던 조병갑의 처벌과 복귀과정을 역사기록을 통하여 살펴보고,뇌물과부정부패한 정치인이 얼마나 쉽게 다시 공직자로 복귀해서 호의호식을하는지 아울러 썩은대가리가밑에서는 탐관오리들은 어떻게 오뚜기처럼 부활하는지도 알수있다.


1894년 고부민란일어나자 고종은 근엄한 얼굴로 정색한채 조병갑에대하여 백성들에게 보여주기위한 모습에서는 이렇게 명령한다" 이놈은 단지 국고를 횡령만한게아니라,백성들을 학대까지한 자이니,엄중히 조사하여 처벌하도록 하여라"이렇게 말해놓고는 고종은 단지 조병갑을 고금도에 유배시키는것으로 마무리해버린다.


그리고 유배한지 채 1년이되지도않는 1895년 여름에,법부에서 "조병갑을 풀어주는게 어떻겠습니까?"하고 물으니 고종은 "좋아"라고 말하며,사면해버린다.그당시 조씨집안이 정치권에 힘있는세도가였기에 여기저기 로비가 고종에게 들어갔을거니,짝짝쿵손발이 맞아 사바사바 잘했을것은 미루어짐작할수있다.


그런데 더 기가막힌것은 고부군수로있으면 백성들에게 뇌물과 부정부패를저질러,고부민란이생기게했던 어떻게보면 오늘날이아니라 그당시에도 엄청난사건이었는데,2년이 조금지난 1898년 1월2일 조선왕조실록을보면,고종이 조병갑에 공직을 부여하는 기록이나온다.기록은 짤막하다 "4품 조병갑 법무민사국장에 임명한다" 이게 뭥미?


고부민란으로 백성들이 어육이되고,전봉준또한 참수되는 큰사건이었는데,고작 2년도 안돼서,탐관오리의 대명사 조병갑은 오뚜기처럼 부활하여 정치인으로 복귀하도록 고종이 도와준다.오늘날에도 뇌물이나부정부패에 연루되었던 정치인이나공직자들이,빽이나 줄을타고,오뚜기처럼 복귀하는것들이 있다.이런것을 집행유예해버리고 사면해버리고하니,2-3년만에도 다시 얼굴을 내미는것이다.엄벌이 집행유예고 사면이냐?


어째든 다시 돌아가서 탐관오리 조병갑은 오뚜기처럼부활해서 다시 공직자로 임명된다.여기서 4품이라고 나오는걸보면,조선시대의 관리의 품계상 관찰사 종2품,목사 정3품,군수 종3품이 임명되는데,고부군수를 지냈다면 종3품이었을것인데,그래도 공직에 재임용하면서 백성들에게 눈치는보였던지 한단계 강등된 4품품계로 공직을 임명했음을 알수가있다.


탐관오리 대명사인 조병갑을 것도 정의를 심판해야할 사법부에 공직자로 등용시킨 고종의 대갈박은 도대체 어디서 나올수있었을까? 2년새에 조병갑일가가 얼마나 로비를 잘했던지,아니면 서슬퍼렇게 "이눔은 횡령만한게아니고 백성을 학대 어쩌구하면서 했던말이" 기억이 안날정도로 치매에 걸린건지 그 대가리밑에 그놈이다.


우리가 만화영화에서보면 흔히 나오는 악인은 패하고,선인은 승리하는 해피엔딩이아니라,슬플게도 그당시 현실은 탐관오리 조병갑은 68세까지 장수하며,죽을때까지 호의호식하며 잘먹고 잘사다가 죽었다.


제발 오늘날 선진국으로 가려는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어떠한 범죄보다,유영철아니 그어떤 살인범보다 더 나쁜놈이 뇌물이나부정부패를 저지른 정치인이나공직자라는 일반공유적 가치관이 있어야하고,사법부또한 지난세월 정치인,공직자로 나라에 이바지한 공로가있어 이따구 볼따구맞을 명분을 갇다붙이고 처벌에관대할게아니라,다시는 정치인이나공직자로 부활하여 오뚜기처럼 악인이 해피엔딩하지못하도록 중한형벌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조선왕조 500년도 모자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탐관오리들의 부활오뚜기 정치문화를 이대로 계속이어갈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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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속의 역사드라마나 사극들을보면,기껏해야 궁궐밖에서 문을 지키는 병졸들이나 포도대장정도만이 칼을차고 있는 모습이고,

왕들앞에서는 모두 유약하게보이는 유교문신들만이 대가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인다.

문치의 시대라는 조선시대,그중에서 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던 세종조의 기록을 통하여 오늘날 tv속의 역사드라마처럼 왕의주변에 칼을차고 서있는 사람들이 없었는지 살펴보자.

세종14년(1432년) 세종과 신하인 권맹손과 나눈 대화는 이러했다.



세종:중국은 무신만이 칼을차고 시위하는게아니라,일반신료들도 칼을차지 않는사람이 없다하고,아버지인 태종때에도 중국에 사신으로갔던 정역이 아래기를,중국의 신료들은 모두 칼을 차고있습니다라고 했는데 그러지 아니한가?



 

권맹손:중국에서는 그렇게하고 있사옵니다.



 

세종:그런데 왜,우리나라에서는 무반재상들조차 칼을차고 다니는것을 부끄럽게여기고,들고다녀야할 칼을 시종에게 들고다니게하니,이게 뭔꼬라지냐,왕앞에서 신하들이 시위할때 칼을 차는 문제에대하여 격식을 정하여 아래도록하여라.



세종대왕의 분부에의하여 세종14년(1432년)10.29일 병조에서 신하들이 궁궐에 들어올때나 시위할때 칼을차는 문제에대하여 격식을 정하여,왕에게 아래었다.


"중국의 대소무관은 모두 칼을차고 다니는데,오직 우리나라 무관만이 입직과 시위할때 칼을 차고있지않고 2품이상의 무관이 되어도,별운검이외는 칼을 들고다니지 않으니 잘못된것으로 생각합니다.앞으로는 품계와 상관없이 무관은 칼을차고 시위하도록하고 유신이라도 무관직을 겸하는경우는 칼을차도록 제도화하는것이 좋겠습니다하니,세종이 이르기를 제도화하여 지키도록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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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이러한 혜안은 뒷날의 엄청난사건의 성공과실패의 단서가되는데,세종의 아들문종 그리고 문종의 아들 단종대에 이르러,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제거하기위한 사육신사건이 일어났다.이때 무관으로 칼을차고 왕을 시위하던 사육신중의 한명이 유응부였는데,명나라 사신을위한 연회를 창덕궁에서  베풀고있을때 재수없게도 한명회의 충고를받은 수양대군이 그날따라 칼을찬 무관이 시위하는것을 하지말라고하여,결국 사육신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게된다.


세종이 좀더 엄격하게 제도화시켰다면,손자가 불행하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수양대군에게 죽게되는일을 막을수도 있었을것이다.어찌되었든 역사드라마에서 유약한 신하들만이 기립하여 서있는 모습은 그당시 실제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점이다.조선시대의 왕앞에서 칼을차고 서있는 무관신하들도 있는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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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동안 죽어있었다가 살아난 사람에대한 기록이 우리나라의 삼국역사서에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은 사흘동안 죽어있다가 살아나셨는데,무려...무려....무려....한달....우리나라의 정사인 역사서에 기록된것이기에,허튼소리보다는
진실일 가망성이 많다.


또한 위대한 왕이나,인물을 높이기위한 기록이아니라,일반백성에게서 일어난 기이한 현상을 기록해둔것이기 때문이다.




때는 서기 222년 신라 10대왕 내해왕때였다.경주 남쪽지역에 있는 남신현이라는곳에 사람이 죽어,장례까지 다치루었는데,죽은지 한달뒤에 살아서 무덤에서 관뚜껑을 열고 나왔다.사람들이 이를보고 기이하게여겨 나라에 고하니,그에관한 기록이 역사서에 기록되게 되었다.


사람의 부활이라는것이 부활은 사전적의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이다.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에대한 기록은 현대화된 오늘날에도 언론기사로 때때로 전해진다.


의사에게 사망진단서를 받고,냉동실에 안치되었다가 살았났다든지,죽은사람의 장기이식을 위하여 수술하다가,아픔때문에 죽은사람이 살아났다든지하는 기사들이 전해진다.


현실적으로도 바다의 물고기인 복어의 독을 이용하여,의학적인 사망선고를 받게하고,매장해서는 며칠이 지나 무덤의 관에서 사람을 살려내어,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그러한 부류의 집단도 존재하고있다.사람의 부활이라는 개념이 종교에서만 일어날수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흘만에 죽었다가 부활한것을 믿습니까,안믿습니까?라는 단순한 종교의 선택이아니라,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현상은 공상이아니라,현실적으로 그러한 많은 사례들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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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삼국시대의 일이다.백제는 틈만나면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는 나라의 위기상황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덕왕때,김유신은 백제와의 국경에서 큰공을 세우고,돌아와 승전을 고하자마자,다시 백제의 침략으로 신라 국경의 상황이 위급해졌다는 급보를 받게된다.



이에 선덕여왕이 다시 유신에게 나아가 맞서싸워 나라를 지키도록 명령한다.





큰공을 이미 세운 장수이기에,오늘날 같으면 포상휴가라도주고,다른 장군을 보내도 될것같은데 전장에서 돌아오자 다시 나아가 싸우라고 명하니,유신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다시 갑옷과 무기를 챙기고 집에 들림이 없이 전장으로 나아간다.



유신의 집에서는 장군이 이미 큰공을 세워 서울인 경주로 돌아온것은 알았지만,집에 들리지 않았기에,혹시라도 중간에  만나 볼수있을까하여 유신의 집안가족 사람들이 모두 집밖으로나와 길에서나마 기다려,전장으로 떠나는 유신을 만나보려고한다.



유신이 자신이 집앞 거리를 지나갈때,집안가족이 모두 나와 있었음에도 눈낄 한번주지않고 뒤를 돌아봄도없이 묵묵히 길을 나아갔다.어느 정도 말을타고 지나쳐가던 유신이 무슨 애달픈 마음이 들었는지,갑자기 말을 멈추고 아래사람을 불러 이르길 "나의 집으로가서 물한사발을 부탁하여 가져오도록해라" 부하가 가져온 물한사발을 마시고,집앞에 나와있는 가족들이 들릴만한 거리에서 뒤돌아 봄없이 말할길" 집안의 물맛이 예전과 다르지 않구나"하고는 묵묵히 길을따라 병사들과함께 전장으로 나아갔다.


티스토리 초대장을 받기 원하는분은 이메일을 댓글로 남겨주세요.마음껏(?)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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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왕중에 전투의 신으로 불리우는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은 주몽의 손자이다.대무신왕은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이름은 고무휼이었고,서기 4년에서-44년까지 살아 이른 나이인 40세에 죽었지만,그의 재위기간은 27년으로 짧지는 않았다.

11세에 태자가되고 15세에 아버지인 유리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특이한점은 대무신왕의 두번째 왕비의 아들중에 호동왕자가 있었고,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첫번째 왕비의 모함으로 ,스스로 자결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게되는데,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있다.



역사기록에 나타난 대무신왕의 행적을 살펴보면, 대무신왕 3년 봄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그해 겨울 10월에 부여왕 대소가 몸은 두개이고 붉은머리가 하나인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왔다.고구려가 부여에 병합되는것이 마땅하다는 의미로 보낸것이었다.


이에 대무신왕은 붉은 까마귀에 대하여 해석하길,두나라가 합쳐지는 의미를 가진것은 맞으나,그 새가 나에게로 보내줬으므로,나에게 길한징조이다 라고하였다.


대무신왕 5년 2월에 부여국의 왕인 대소를 잡아 죽였다.대무신왕 9년 10월에 개마국을 쳐서 멸망시키고,스스로 항복한 구다국을 병합시켰다.


대무신왕 15년 11월에 둘째왕비의 아들인 왕자 호동이 스스로 칼을 세워 엎드려 자결하였다.대무신왕 20년 낙랑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대무신왕 27년 10월 고무휼이 죽자,대수촌언덕에 장사를 지내고,시호를 대무신왕이라고 하였다.대무신왕의 뒤를 이어 동생인 민중왕이 고구려 4대왕이 되었으나 재위 5년만에 죽었다,


고구려 5대왕은 대무신왕의 맏아들이 왕위를 이었다.이왕을 모본왕이라고하는데,오늘날로 보면 개망나니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서,아버지인 대무신왕은 나라의 부강과 번영을 위하여 온힘을 기울여 싸웠다면,그 아들인 모본왕은 자신의 백성과 신하를 잡아죽이는데 온힘을 기울이다,신하인 두노의 칼을 맞고 재위 6년만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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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올림픽 양궁경기에서 히트치신 텐텐소녀,9점에 화살이 맞아도 텐~ 8점이라도 텐텐!! 7점과녁에 맞춰는데도,텐텐텐!!!
 

어떤선수가 저렇게 엉터리점수를 외치구 자빠졌나하고,중국 여자양궁선수중에 찾아보았다.



곽단(郭丹) 베이징올림픽 중국양궁대표선수,관중들이야 자국의 선수가 텐에 맞추기를 기원하는건 이해가가는데,





과녁을 보는 망원경과 점수전광판까지 다볼수있는,경기중인 선수가 버젓이 7점인데도 텐이라고 외치는걸보면,엉터리로 우기는 그근성,우리나라의 선조 주몽님이 비웃고계신다,날조하여,텐텐이라고 외친다고 진실이 바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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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도 1점차이 상황에서 우리나라선수가 마지막 한발 쏘아야할 상황에서,경기중인데 중국선수가 춤을 추고 있지를 않나,중국선수분들 왜 그러셨쎄요.경기중인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텐텐외치면 그걸 믿어주니?,노란과녁에 비스무리하게라도 맞으면 모를까,색깔을 완전히 벗어난 7점에도 텐이라구 외치는 곽단(郭丹), 베이징올림픽 중국양궁마스코트 텐텐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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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을 살펴보다보면,잘알려지지않은 풍습이나,이야기들이 많다.그중에서 세종21년(1439)의 기록을보면 고구려라는 나라를 함께 구성했던,여진족의 결혼풍습에 대한기록이 보인다.


고구려시대의 결혼풍습을 배울때,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는 풍습이있다는것을 학교의 역사교육시간에 배운다.


형사취수제라는것이,형이죽으면 그아내를 동생이 아내로 맞아드리는 결혼풍습이라는것은,일반적상식으로 대부분 알고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망하구 700여년이 지난후인 세종대왕시기에,여진족의 결혼풍습에대한 조선왕조실록의기록을보니,더확장된 내용이 보였다.원문구절을 보면,"父死娶其妾, 兄亡娶其妻" 여기에 보이는 취자는 "娶=장가들 취"이기에,형이죽으면 그아내에게 장가를들고라는 의미가되는데,이풍습은 고구려시대의 형사취수제라는 말과 동의어라고볼수있다.


여진족또한 고구려라는 나라의 한백성을 이룬 구성원이기에,그들의 풍습이 고구려의 풍습이라구해도 이상할것은없다.그런데 앞구절인 "부사취기처"라는 단어이다.이풍습은 고구려의 역사를 배울때,결혼풍습으로 배운적이
없는 단어다.의미는" 아버지가 죽었을때,그첩에게 장가를들고" ,궁금증이 생기는이유가,고구려가 망한이후,700년이지난 세종조에까지도,여진족이 이러한풍습을 가지구있었다면,고구려시대에서도 이러한 결혼풍습이 행해져을거라는것은 미루어 짐작할수있다.


형사취수제는 고구려의 결혼풍습으로 기록하구,부사취기처라는 결혼풍습이있었다는것은,뭍혀버린것이아닌가 라는 생각이든다.이러한 결혼풍습은 고구려시대를 아룰러함께했던 중국의 당나라 왕조에두,그사례가 남아있다.당태종의 아들인 당고종이 아내인 측천무후는,당태종의 후궁 즉,첩이기에, 아들이 아버지의 첩에게 장가든경우이다.부사취기처라는 여진족의 결혼풍습은,고구려시대상을 고려해봤을때,고구려시대의 결혼풍습으로 존재했다구 미루어짐작해두,이상할게 전혀없다.알송달송 역사기록찾아보기는 이정도로하구,믿어서는 안될 남자의 거짓말 7가지에대하여,적구 글의 포스팅을 마무리하려구한다.


                                          믿어서는 안될 남자의 거짓말 7가지

첫번째:일이 바빠서,전화를 못받았어:숨쉴 힘만있어두 전화는 받을수있어
두번째:오빠믿지? MT가서 이야기만하자:7살만도 못한이해력을 가지구있다는것이다.
세번째:내가 다책임질게,걱정마:상대방이 허수아비를 벗어나면,보복할남자이다.
네번째:한번만용서해줘,다시는 절대 안그럴께:맹세하는 사람은,뒤통수를 꼭친다.
다섯번째:돈빌려줘,나중에 꼭갚을께:좋아하는여자에게 돈꿔달라는 남자는,인생이 마이너스이다.
여섯번째:우린 속궁합이 잘맞는것같애: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일곱번째:지금은 못해줘도,나중에 다해줄께:오늘 못해주는사람은 평생 내일이면 잘해줄께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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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기록들을보면,하늘위로 소원을적어서 날린 풍선이 몇개월있다,지구반대편의 나라에 도달했다느니,소원을적어 바다에 띄운 종이가 몇십년이지난후,살아있는 물고기에달려있었다는 그러한기사들을 봤을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보면,이미 200년전에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예보다,더극적인스토리가기록되어있다.



때는 정조18년(1794년),망망대해인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되어 죽게될상황에서,




박계곤이라는사람이 배안에있던 널빤지에다가 간절한염원을 담아 부모님에게남기는 글을적구 죽었는데,그널빤지가 부모가 사는 마을에 밀려와 부모가 그것을보구,아들이 사고가난것을알구,배를빌려 바다를 수색하여,죽은아들의 시체을 찾을수있었는데,이것은 하늘이 아들의 효성에감동하여 나타난 징조라하여,나라에서 정문을내려줬다는 기록이보인다.



집앞이나 마을입구에 세우는 정문(열녀문포함)은,효부나,열녀뿐아니라,남자두 받을수있는것이었다.이기록을 보면서,분명히 있었던 실화이니,기록되었을것인데,배가 난파되기직전에,언제먹을갈구,언제붓으로 글을쓸시간이있었을까 하는의문두 들지만,오늘날에두,비행기사고로추락하는 그짧은 순간에두,수첩이나 여권등을꺼내 가족들에게 당부와기록을 남기는예가있는것을보면,불가능한상황인거같지는않다.



어찌되었든,사람이 진정 간절히 기원하는 소원이나 바램은 속담에" 지성이면 감천이다"말처럼,비록사람이
죽을상황에서두 이루어짐을알수가있다.무엇인가 진정바란다면,이루어짐을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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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국민은 인류보편적인 자유와인권를 외칠권리가있다구봅니다.중국의 강제지배를받구있다구할지라두 티베트국민이 자유와독립을외치다구하여,학살할권리가 중국에게없음두 분명합니다.


약하구,힘없구 무지한나라의 국민들이라구,강제루합병하구 탄합하구 학살하는 중국의 행위는 규탄받아마땅합니다
.

티베트사태를보며,분명히 알아야할 교훈이 우리나라에두있습니다.우리가 힘없구,약하면 언제든지 티베트처럼,무자비한 탄압과학살로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구 자신의나라영토라구 주장할것이기때문입니다.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이러한 인류보편적가치에반하는 행위를한다구해두,자신의 나라에 이익을쫓아
모르는척하는 국가들이있는 현실을보면서,우리나라국민들두 똑똑히 알아야한다는것입니다.인류보편적가치에대한 이성에 따라 외치는게아니라 자신들의 나라의 유불리에따라 인류보편적가치가 말살되구있는데두,침묵한다는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경제적,군사적으로 강하기에,저런꼴을 안당하구있을뿐,우리가 원하는 자유와인권이있는 국가의 논리는 우리나라가 힘이없으면,조선후기 우리나라가 힘이없어 도와달라구 모든나라에 외쳐두,모든국가가 침묵하였던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아무리 우리나라의 이익을위한다구해두,지난날 우리나라가 껵었던 나라잃은 설움을 당한
기억과 반성을가지구있기에,강제지배당하는 티베트의 국민에대한 중국의 학살에 모든나라가 침묵한다구해두,우리나라는 그러면 안돼는것입니다.



티베트의 역사를 자국의 지방정권의 역사라구날조하구,강제침략하여합병하구,티베트인들을 학살하는 중국을 강력히 규탄합니다.우리나라가 티베트에대한 중국의 학살을 우리나라의 유,불리만을따져,침묵하구 모른척
한다는것은,지난날 우리나라가 당했던,그리구 지금도 진행되구있는 우리나라역사에대한 중국의 역사날조에대한 침묵이며,인류공통인 3.1독립선언정신을 팽개치는것이며,우리나라의 존재이유로서 부끄러운일입니다



우리나라정부가 목소리를내지않는다면,언론이나국민이 정부로하여금 움직이도록,인류보편적가치를 말살하구 티베트인을 학살하는 중국을 규탄하는 분명한 목소리를 우리나라가 내도록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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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의하여 무자비하게 학살당하구있는 티베인들의 영혼과 그들의 피와 눈물에대하여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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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행적과 이미지는 다양한해석이 가능하지만,그사람의 공이나 전술등의 면에있어서는 제대로 알려져있지않다.

연개소문에대한 공에대한 기록은 달랑 2줄밖에없다.
삼국사기의 보장왕21년(662)에 기록되어있다.


"21년 봄 정월, 좌효위 장군 백주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개소문과 사수 언덕에서 싸우다가 그의 군사가 전멸하였다. 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소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다. 그 때 마침 폭설이 내렸으므로 그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역사란 문장구절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그당시 시대적상황을 고려하여 전체적인 문맥을 이해하구
풀이해야한다.세계3대해전의 한사람인 도고헤이아치로 제독두 실전사령관은,수도나 궁성에 머물러
지휘하는게아니라,직접 현장에서 지휘했다는것이다.또한 당나라 장군 이세적을 보더라두,
옛날의 장군들은 80살먹었더라두,현장에서 싸우지,수도에 머물며,현장의 군을 지휘하지않는다는것이다.


그런데,유독 연개소문은은 실전사령관이었는데,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에서 연개소문이 위치는
언제나  평양성에서 지휘했을것이라는 어리석은추정에서 사수대첩의 의미가 축소되구있다.


사수는 평양성근처에 위치해있지않았으며,연개소문은 고,당전쟁시 수도평양에서 머물면서
지휘했다는 이런엉터리해석은 기본적으로  상충되는구절을 만들어내는 허구의 가설일뿐이다.


연개소문은 왕이아니었구,실전사령관이었다.적국과 싸울때 누구보다 먼저,앞장서서 나아가
싸웠을것이다.
연개소문은,평양성에서 지휘하다가,방효태군의 별동대가 온다는것을알구,
소정방에게 포위되어진 평양성을 빠져나가,평양성근처에서 방효태군을 기다리다가 싸워서 이겼다라는
이러한 논리는 전혀 엉터리가설일뿐이다.


좌효위대장군 방효태가 이끄는 군은 별동대가 아니라,핵심적 지원군으로,그병력규모는
기존에 평양성을 에워싼 당군사보다 더많았을것이며,군사의 수는 못해두 30만명은 넘었을것이다.


방효태가 이끄는 군사는 수군이아니라,육로로 행군해서 들어왔다.이미 평양성이 포위된상태에서
지원부대가 오구있다는걸 알았다면,연개소문이 위치는 원래부터,평양성에있지않았구,최전선에
위치해있었다구 보는것이 타당하다
.요동성이나 안시성등 지금의 동북3성근처의 사수라는 강
어디에서인가 퇴로를 끊구,연개소문이 기다리구있었다구 볼수있다.


이때 주목해봐야할 기록이 사수대첩이 일어난 당고조때가 아닌 당태종이 이전에 고구려를 침입하여,
도종이라는 사람하구 나눈대화의 요점이,어째서 자신이 고구려공략에 실패하였는가라구 물었을때
안시성에 집착하지말구,평양에 먼저 별동대를 보내서 혼란케해어야 하지않았나 대답하는기록이다.


연개소문은,최전선에서 싸웠을것이며,싸움에 승리는,오히려 당나라영역으로 꺼구로 진격하는
전술로 맞대응했다구볼수있다.당태종이,늪지를 급하게 도망갔던 이유도,후방이 연개소문에게
차단되었구,오히려 당의 영역에 연개소문이 진격하였기때문이었을것이다.


연개소문이 평양성에 머물러 지휘했다면,어느세월에 평양성에서 연개소문이나와  당태종이 그렇게 겁을
먹구 살기급급하여  급히퇴각하구 도망갔는지 그해답이 나오지않는다.


사수대첩에서두,연개소문의 위치는 평양성이 아니라,최선에위치해서 싸웠을것이구
평양성에 밀구올라간게아니라,최선에서 오히려 당나라영역쪽으로 밀구올라갔다구 볼수가있다.


후방이 퇴로가 막혀있던,소정방군대뿐만이아니라,지원군으로  넘어왔던 모든 행군도총관들두,
요동지역에서 현장지휘를했던,연개소문에 의하여,다 궤멸되었다구볼수있다.


그러므로 사수대첩에서 죽은 당군의 숫자는 최소한 30만명이상이었으며,연개소문의 성격상
단1사람두 남김없이 죽였을것이다.전멸이 뜻하는것은,포로가 없다라는의미로 해석하는것이
타당하다.


어찌되었든,고.당전쟁에서 연개소문의 지휘위치는 평양성이아니라,최전선이었으며,안시성전투,
사수대첩등 모든전투에서 연개소문이었을것이다. 안시성성주 양만춘이라는 인물두 허구일
가망성이 100%라구 생각한다.안시성이 포위되었을때 고구려에서 지원군을 10-20만을 보냈다는것은,
안시성을 구하기위하여 우리나라는 전력을 기울였다구 볼수있으며,그렇게한 가장중요한이유는,
그러한 병력을 동원할수있구 지원할수밖에 없는 중요한인물이 안시성에 포위되어 지휘하구
있었다구볼수있다.


즉,당태종의 눈까리를 맞춘화살이나,당태종이 늪을따라 목숨을 구걸하면서 도망가게한,당나라영토
깊숙히 추격할수있는 권한이나 배포를가진것은,그당시 상황하에서는 일개성주가 그렇게했을리는없구,
현장지휘자가 연개소문이었다면,가능한 이론이라구볼수있다.


안시성전투나,사수대첩 이모든 일련의 전투는 연개소문이 직접지휘했구,당태종이 눈까리에 화살을
맞구,안시성성주를 기특하게여겨,비단과 의복을 내렸다는데,그대상은 허구인 양만춘이아니라,
연개소문을 역적이라구 기술한 삼국사기의 잘못된평가기록때문이었다구 볼수있으며,역적에게는
공이 있었두,작게하거나,없게기술하는게 역적기술에 더합당하기에,누구인지는 모르는 안시성성주라는
두리뭉실한기록으로 넘어가버렸다구 볼수있다.


이런한 시대적기록이 조선후기에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로기록돼지만,조선시대는 고구려역사의
암흑기였기에,제대로된 개념을가지구 고구려역사를 논할수있는 사관이나 역사가는 애시당초 존재하지않구
멸종되었던시대였기에,조선시대에 기록된 고구려역사기록은 가장신뢰할수없는 기록이라구 볼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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