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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이 추진한 요동정벌이 승산이 있었을까요?




충분히 승산이 있었습니다.명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는 여진족이라는 야인부족들이 만주전역에 살고있어서 완충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그러나 이들 여진족은 우리나라의 고구려를 이루어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살았던 민족이었습니다.

몽골은 전체인구가 200만명이 안되었고,군인수가 10-20만명 정도였지만,세계를 제패했고,여진족또한 문화나 인구수에서 월등이 미개하고 뒤쳐졌음에도,중국을 정복할 수가 있었습니다.여진족이나 몽고족에 비하면,그당시 국제상황은 조선이라는 나라는 여진족이나 몽고족이 처한 현실보다,나으면 나앗지 못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여진족이나 몽고족등이 중원을 차지하기 전에,부모의 나라입네,어쩌구,공자왈맹자왈 매일 잠꼬대하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먼저 친이유를 알아야합니다.그만큼 조선이라는 나라는 스스로 대국을 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는 유교적 사대주의 골수꼴통 현실이었기에.덕택에 이민족의 침략을 일본,몽고,여진등의 수많은 침입을 받아야 했습니다.

만약에 생각을 바꿔,여진이나 몽골등과 연합하여,중원을 쳤다면 충분히 명나라를 제압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요동지역은 예로부터,여진족과 우리나라가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살았던 조상들의 땅이었기에,그곳에 환경은 우리나라에서 유리했지,결코 명나라에 유리한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요동정벌을 했다면,분명하게 명나라와 일전을 벌였을 것이고,중원까지 지배할수 있었을 것입니다.그러나 부모 어쩌구하는 꼴통유교주의 때문에,요동을 차지할 수는 있었더라도,중원까지 차지할 배포도,기상도 없었기에
스스로 좌절되어 버린 것 입니다.


만약 요동정벌을 단행 했다면,역사는 바뀌었을 것 이고,고구려라는 나라가 여진족과조선족이 하나가되어 부활하여,결국 청나라가 아닌,코리아라는 나라가 중국대륙을 지배하게 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주댕아리로만 평화를 외치면서,현실적으로 힘을기르지 않는 공자왈 맹자왈하는 꼴통들이 사회곳곳에 있습니다.이런 꼴통들의 주댕아리들은,우리나라의 역사를 이전이나 이후로도 식민지배 시킬 일등공신들 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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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라는 명칭을 처음만들어 사용한 진시황의 전설과,실제 역사속에 원나라 징기스칸의 마지막 왕이 일생을 마친곳이 우리나라에 존재하는데,이러한 기원때문인지 모르지만

징기스칸처럼 다시 세계를 제패할 인물이 반드시 나올 영산으로 지목 되어진곳으로,백두산은 예로부터 황제와 왕이 탄생할 영산으로 추앙받아 왔고 백두산을 기원으로하여 누르하치는 중원의 패자가 되어 청나라의 기원 황제가 되므로 이러한 전설은 현실이 되어 완성이 되었고,

징기스칸이 사라진이후로 그와같은 천년에 한번 나올 만한 대 인물이 다시 생겨날곳으로 한라산이라고 전해지며,역사의 전설속에서 이어져 왔다.

한반도와 동북삼성을 통합하여 대륙으로 뻗어나갈 한민족의 기상을 만들어낼 인물이 태어날곳으로 제주도의 한라산임을 알수가있는데,2012년은 우리나라 통일국운뿐아니라 한민족이 대륙으로 뻗어나갈 장대한꿈을 실현시킬 시기에 지도자를 뽑는 대선이 예정 되어져 있다.

현재까지 살펴보면 예로부터 전해져온 세계를 이끌어갈 인물이 탄생할곳으로 예상되어진 한라산의 영기를 받은 인물이 대선주자로 나타나지 않고 있는것이 이상해보인다.아직 우리나라의 운이 안된것인지,역사의 전설이 맞다면,시기와 국운을 봤을때 이번 대선에 나타나는것이 시대의 시류에 맞는것 같은데,영산인 한라산의 인물이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어진다라는 장구하게 이어져 내려온 역사속의 전설을 볼때 조만간 그 인물이 실체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해 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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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에게는 무예에가 뛰어난 광개토태왕를 닮은 아들들이 있었으니 발해2대왕이되는 무왕 대무예와 그의 친동생 대문예다.

대조영이죽고 2대 황제로 즉위한 대무예(676-737)는 국가의 튼튼한 기틀을 마련한 조선의 태종처럼,국내외의 상황들을 정리해야할 임무가 주어질수밖에 없었다.

당나라의 현종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로 영속되는것을 마땅치않게 생각했으며,신라의 성덕왕또한 고구려의 영토의 주인을 자처하면 발해와 대립하며 영토를 확장하는데 노력하고있었다.


726년 당나라는 백두산과 연해주부근에 근거를삶아 세력권을 형성했던 흑수말갈족을 이용하여 발해의 세력이 팽창되는것을 견제하고,아울러 옛고구려영토의 일부라도 간접적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였다.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발해의 무왕은 자신의 대에서 고구려 패망의 원흉이며,한민족의 천년원수인 당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계획한다.




먼저 내정의 안정을위하여 당나라와 손을 잡은 흑수말갈을 제압하기위하여,황제의 군령권을 발령하여 동생인 대문예를 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정예기병 5만의 군사로 흑수말갈을  제압하라고 하였다.이에 대문예가 상소하여 말하길"소신이 당나라에 숙위하며 당나라의 국력과 나날이 발전되는 정세를 그동안 보아왔는데,흑수말갈과의 전초전으로 당나라와 대립하여 전쟁를하려는것은 발해의 국체를 어렵게 할수있기에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이에

인안황제인 무제가 꾸짓어 가로대"너는 당나라의 강함만을 두려워하고,고구려의 혼은 잊었으냐?,평화는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가 있을때 지킬수 있는것이다.여기서 굴복하기 시작한다면 후대의 기틀을 기약할수없음을 알고 출전하라."대문예는 내키지않는 심정으로 흑수말갈의 제압을위하여 백두산쪽으로 나아갔다.



오늘날에 보았을때 이 흑수말갈은 중국대륙을 삼킨 건주여진이 일족으로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갈래이며 조선 인조임금의 대갈박을 땅에 두드리게했던 삼전도의 주인공 청태종의 속한 갈래이기도 하다.

흑수말갈의 경계선에 다달을쯤에 다시 대문예는 전령을 통하여 상소를 올리며 회군하기를 청한다.이에 분노한 무제는 즉시 군사령관을 대일하로 바꾸고 임지로 나아가게하고,대문예는 궁성으로 돌아오라는 소환명령을 하게된다.이에 대문예는 돌아가면 황제의 군령을 어긴죄를 지게될까 두려워 당나라로 투항하여 도망을갔다.

나라를 끝까지 지켜야할 지도층 장수가 먼저 당나라에 투항해버리는 어이없는 상황에서 흑수말갈과의 싸움은 싸워보기도전에 무너져내리게된다.패전을 접한 무제는 당나라에대하여 친동생인 대문예의 소환을 요구하였으나,당나라현종은 오히려 대문예에 당나라 대장군의 벼슬을주며 우대하였다.

이에 발해황제 대무예는 신하들을 모아두고,발해국 국체의 안위를 모두걸고,당나라와일전을 할 뜻을 비추며"우리선조의 나라 고구려가 망할때 형제들의 대립을 이용하였듯이,오늘날에 와서도 똑같은 정책으로 우리발해를 망하게하려는 의도를 숨지지 않고 있소,이에 이후로 당나라가 발해를 건드릴 생각조차하지 못하도록 전멸적 보복을 가하도록 하려고 하며,이싸움에 유불리논하면 개전을 머뭇거리는 신하들은 짐에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겠으며,2년내에 정벌준비를 완료하도록 하시오"

발해국의 문무신하들은 당나라의 정세염탐과 주변국들과 전략적 선택을 추진하게된다.이때당시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하여 굴종의 평화를 얻으려는 세력과 투쟁하려는 세력간의 타툼속에있었는데 발해는 강경파의 우두머리인 가돌한을 적극지원하여 당나라의 복속을 받아드리려는 온건파 이소고를 처단하게한다(730),


거란과 돌궐세력들을 발해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만들기에 2여년을 공을드린 732년 9월,무제는 장문휴(693-749)장군을 수군원수로 삼아  발해정예수군 2만명과 함께,당나라 동북아 수륙합동군기지인 등주(산동성 봉래현=중국 칭다오=청도)을 선제공격하도록 명령하고,아울러 동시에 무제는 직접 수륙합동연합총사령관의 직책을 가지고,발해 고구려기병 5만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진격해 드러간다.

먼저 선제공격 별동임무를 맡은 장문휴장군이 이끄는 발해수군은 압록강하구를 출발하여 등주에 도착하여
상륙작전을 개시하자,등주에는 당나라군 10여만명이 지키고있었으나,기습적인 공격에 당나라군은 사분오열 흩어져 도망가기에 바빴고,등주자사 위준또한 대적하여 전열을 정비하여 싸워보지도못하고,목이 달아났다.

등주를 점령한 장문휴장군이하 병사들은 등주에 살아있는 모든것과 건물들을 완전히 전멸시켜 이후 등주가 복구되는데 당나라의 국고의 대부분이 소비될 정도로 참혹했다.당나라 현종은 이러한 전황를 전했듣고 즉시 장군 개복신으로하여금 지원군을 이끌고 등주로 내려보냈지만,개복신이 도착했을때에는 상황이 종료되고 모든것이 폐허가 된 이후였다.

육로쪽으로는 대무예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북경쪽으로 진격해 들어온다는 전령을 들은 현종은 대문예를 사령관으로여 2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가서 대적하도록하고,급히 신라의 성덕왕에게 도움을 청하여,발해의 남쪽방향을 공격해주도록 요청하자,성덕왕은 이기회를 이용하여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에대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달라는 요구조건을 선행하자,당나라현종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요구조건을 들어주었다.



이에 성덕왕은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에게 3만의 군사를 주며 밀명하길"발해국의 무왕은 선조인 광개토태왕의 환생이라고 할만큼 군신으로 불리는 인물이고,서로말이 통하는 백성들인 발해와 우리는 같은 뿌리이기에,싸울일이 생기면 피하고,피할수없는 상황이면 후퇴하여 도망해도 가하니 공격하는 척만하도록 하라."

대문예와 출전하는 당나라군사들은 발해국의 무제가 직접 친정하여 공격한다는 소리를 듣고,싸우기도전에 이미 사기가 땅에 떨어져,발해국의 군사들을 만나기도전에 80-90%가 추위에 죽거나,도망을 가버려,대문예는 싸워보기전에 철군할수 밖에 없었다.

김윤중의 이끄는 신라군또한 당나라군의 전세를 이제나 저제나 지켜만보다가,후퇴했다는 전황을 듣자마자,행군방향을 바꿔 신라로 돌아가 버렸다.발해황제 대무예가 이끄는 육로군은 북경근방까지 진격하여 정복한후,이후로 발해가 멸당할때까지 발해영토로 지배하였고,당나라는 이후로는 발해에대하여,군사적공격을 할생각을 전혀 하지못했음을 보았을대,이때 무제의 공격의 얼마나 공포스럽고 참혹했는지 미루어 짐작할수있고,

춘추필법으로 유명한 중국의 사서들이 발해 대무예의 공격과 당나라의 패전에대하여 숨김없이 기록해놓은것을보면 그당시 당나라역사에있어 반드시 기록되어져야할 정도로 충격이었음을 알수가 있다.당나라 역사서들이 패전했을때 승전한 상대국 장수의 이름을 기록치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발해의 수군원수였던 장문휴장군에대하여는 정확하게 이름을 전하는것을 봤을때,우리선조인 장문휴장군에대한 연구와 관심이 더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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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이세민의 눈을 파서 눈물을 머금게했던 고구려의 유명한 안시성전투에서의 장군의 이름은 역사기록속에서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않다.

안시성전투는 실제했으나,양만춘은 실제하지않는 가공의 인물이라는것이다.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살펴보면,설혹 이것이 의미가있다고 조금이라도 가정해보더라도 이것은 이름이아니라

당나라와 고구려의 전투가 벌어졌던 계절을 의미할뿐,장군의 이름은 아니다.


안시성싸움이 벌어진 고당전쟁의 계절은 이른봄부터 초가을까지인데,양만춘을 문자그대로 풀이하면 "버드나무가 만발한 계절인 봄"이라는 의미일뿐이다.고구려시대에대한 정확한 기록들은 고려시대에 작성된 역사서들이 그나마 사실적이고,조선시대에 기록되어지는 고구려역사들에대한 기록은 거이가 창작이거나 사실과 동떨어진 경우가많고,그 일례가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야사에다가 기록했다는것이다.

안시성 성주와 연개소문은 동시대 사람이기에 안시성 성주가 누구였느냐를 이해하려면 먼저 연개소문의 생몰년을 살펴봐야한다.연개소문이 죽을때 나이가 백전노장의 흰수염을 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진 전투도가 보이긴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고 연개소문은 광개토태왕처럼 이른 나이에 죽었는데,

생몰년은 616-665년이 역사적 기록과 부합하고,오늘날의 나이로보면 49세정도에 죽었기에 그당시 사회상에서는 노인이라고 주장할지모르지만 오늘날의 나이로는 이른나이에 죽었음을 알수가 있다.안시성 성주가 누구냐를 유추해보기 위해서는 안시성성주와 연개소문은 서로 상명하복의 관계가 아니였음에 주목해야한다.

이러한 의미는 안시성 성주나 연개소문은 독자적인 세력과부족을 가지는 지위에있는 우두머리였음을 알수
가있고,연개소문은 기록에보아도 서부대인의 부족장의 위치에 있음을 알수있고,영류왕을 단칼에 내리칠때에 동원된 부하들은 서부에 소속된 부족군 집단이었기에 왕의 말보다,직속 우두머리의 말에 더 충성했음을 알수가 있다.

안시성 성주가 연개소문에 맞서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고 맞설수 있었던것도 자신또한 하나의 부족의 우두머리였기에 가능했고,그에따른 부족민들의 절대적 신임이있었기에 가능했다.연개소문과 안시성성주의 관계를 알아봤다면,역사에 기록되어지지않은 안시성 성주의 부족은 무엇이냐라는 의문이 들어야 정상일것이다.



이사람의 부족을 알려면 현재 중국에 속해있는 동북삼성의 위치에 어떠한 부족들이 강했는지 살펴보면 알수가있는데,러시아쪽 국경으로는 흑수말갈,요동과요서를 구분하는 중국과 맞따은 쪽은 속말말갈,그리고 두만강이나 백두산쪽으로 위치한 말갈이 존재했는데,안시성이 위치했던곳에는 속말말갈부족이 강했던곳이다.

오늘날에 와서야 말갈은 다른나라로 민족으로 구분되어졌지,고구려라는 나라에서는 여러부족들속에 하나로 뭉쳐진 통합 고구려의 나라였기에,중원에서 보기에는 말갈부족은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기록하여도 이상할게 전혀없다.

말갈은 우리나라역사속에서는 물길,여진,만주족등의 여러이름으로 불려졌는데 공통적으로 강이나 물하고 깊은 의미를 가지는 부족이름을 가지고있다는것이다.물길이나 말갈의 의미는 호수나 강물과 관련되어 불려진다는것이다.안시성 성주는 정체는 어느정도 파악이되었다.



연개소문처럼 하나의 부족의 우두머리라는 것인데,그휘하에 속한 안시성의 부족민이 기록상 10만명 정도되었음을 알수가있는데 이정도의 일가를 이루는 부족은 안시성근처에서는 속말말갈뿐이었다.오늘날에 중국의
동북삼성은 러시아쪽에있는곳은 흑룡강성,중원쪽 경계에있는곳은 요녕성,중앙인 조선족이 살고있는 연변이있는 길림성으로 구분되어지는데,

여기서 흑룡강성은 흑수말갈지역이니 검은 흑이 붙어있고,중간에 위치한 길림성은 조선족의 자치구이니 의미를 알수가있는데 요녕성쪽에 존재했던 속말말갈의 존재는 지리명으로는 알수가 없다.속요녕성 이랬으면 쉽게 알수도있었겠는데,그러지않은 이유는 더 큰 위대한 나라가 그곳을 기반으로 세워졌기때문이다.

고구려의 장수이면서 역사기록속에 연개소문과 동시대에 살았고,안시성을 근거지로했고,망한 고구려를 대신하여,끝까지 저항하고 결국에는 고구려의 후예라고 선언한 나라의 아버지였던 대걸중상이라는 사람을 역사속에서는 기록하고있다.

대걸중상은 연개소문보다 8년이 늦게 태어난 생몰년이 622-698 이다.대걸중상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이고 대조영은 중국사서에" 고구려의 별종"으로 기록되어져있는데 별종이라는 의미는 고구려의 사람이나 부족이 다르다는 의미로 받아드려도 이상할것이 없다.

안시성은 고구려가 망한후에도 끝까지 저항한 성에 속하는데 이러한 저항정신의 밑바탕은 자신들의 부족이 속한 토착 지역이었기에 안시성이 함락되는 670년대까지 항전했다고 볼수있고 성이 함락되면서 당나라에 끌려가지만,결국은 당군을 격파하고 고구려가 망한지 30년도 넘지않아서 발해라는 고구려의 계승국이 탄생한것이다.

대걸중상은 그의 아들 대조영이 발해를 세우기이전부터 이미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왕이라는 칭호를 내려줬어도,그런칭호 필요없다라고 할만큼 독자적 군사력과 세력을 갖추고 이끌수있는 힘을 가진 장군이었음을 알수가있고,대조영의 아버지 대걸중상이 안시성 성주였다라는 것은 역사에 기록을 살펴보면 양만춘이라는 허울데기 거짓말 가공의 인물보다는 더 사실적인 역사에 부합될수 있음을 알수가있다.

양만춘이라는 이름의 장군은 애시당초 고구려에는 존재하지않았다.대걸중상은 역사속에 확실하게 기록되어진 안시성의 위치했던 지역의 이름난 장군이었고,연개소문도 힘으로 해서 국력을 낭비할만큼의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안시성성주와 싸울필요가 없다고 느겼을 만큼 당대의 영웅이었고,당태종을 격파할정도의 담력과 베짱이 있었기에 고구려의 기상을 계승하여 발해를 세울 수있었던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발해를 우리나라의 역사로 보지 않는다면 안시성전투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아니라는 부정이 되어버리기에,고구려역사왜곡만 관심을 가지고 발해를 내버려두는것은 황당한 논리이고,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낸 조선후기 인물이 적은 다른내용을 보면,광개토태왕비를 아예 말갈황제인 금나라의 왕의 비석이라고 전한다고 기록할만큼 역사인식이 미천했던 사람이 안시성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전한다고 적었놨다고 맞는 이름이라고 한다면 지나가던 소대가리가 웃을 일이다.

역사기록에서 유명한 사람은 후손들이 중시조이든 어떤형식이든지 자신의 성씨의 시조로 숭상하는것이 우리나라의 풍습이었는데 양만춘은 누구의 시조라는 말을 들은적이 전혀없다.애초부터 가공의 양씨 성을 가진 만춘을 날조했기 때문이다.엉터리 야사의 인물을 사실인냥 이름을 전하는것 또한 역사왜곡이며,연개소문과 맞짱을 뜨고,당태종 이세민을 격파할정도의 담력을 가진 동시대의 인물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대걸중상인 고구려의 대중상 장군뿐이다.

안시성 성주는 대걸중상인데 왜 역사에 기록되어져있지 않았는가 하는것은,역사의 기록이 되어있지 않은게아니라 역사기록의 행간에 의문을 갖지 않기때문이다.고구려를 망하게한 측천무후가 왜 별볼일없던 아무 전공이 기록되어지지않은 대걸중상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내리겠다고 애걸했는지,그만한 무력과 전공을 고구려 장군이었을때부터 보여줬기에 인정받은것이고,고구려가 망하자 그러한 칭호를 주려고했다는 것이다.역사교과서에 안시성전투의 장군은 양만춘이라고 기록하는것은 광개토대왕이 말갈황제라고 전한다고 기록한것을 믿는것과 다르지않을 정도로 코메디임을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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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훈요 10조에는 전라도지역은 배역의 땅이니 인재라도 등용하지 말라는 조항이 들어있다.

이러한 훈요 10조에대하여 위조설이나 첨삭했다는 의견등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지만,이러한 구절은 우리나라의 역사, 일부의 미스테리를 숨겨 놓았기때문이고,훈요십조의 내용은 위조나 첨삭된 구절이 아니라 진실한 구절이었으며,


그당시 동족인 발해를 멸하는 거란에대하여 극한 분노를 표현했고 배척했던 고려인의 모습을보면 왜 이러한 구절이 훈요10조로 후대에 널리 전하라고했는지 충분히 이해할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로 축소하여 삼국의 시대로 이해하고 은폐하려했던되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오늘날의 전라도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다스리던 백제지역이 아니었고,백제의 주류문화는 충청도이고,전라도는 우리민족이 입장에서 볼때는 이민족이 한민족을 협박하고 멸하려는 세력의 주거점지역이었다.

역사속에서는 이들에관한 기록이 역사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충청도와 아울러 백제의 나라였다고 두리뭉실 역사를 만들었기때문에,이웃나라의 역사기록이나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속에 틈틈이 전라도지역에 존재했던 주체세력에대한 삼국시대와는 동떨어진 비상식적인 기록들이 나타나고있다.

이러한 전라도지역에 지배 주체세력이 이룬 국가가 백제가 아니라면 누구였는가가 문제인데,결론적으로보면 이민족중에 유물이나 유골등으로 봤을때 북방계통의 민족이아니라,일본계통의 민족이었음을 알수가 있다.전라도지역에 살았던 주체세력이나 주민들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입장에서 봤을때 멸해야할 대상이고,정복해야할 대상이었다.이러한 역사적사실을 후삼국을 통일했던 고려의 왕건이나 그당시 사람들은 잘알고있었고,민중의 밑바탕에 그러한 역사의식이 존재하고있었기에,전라도지역의 사람은 정부관리로 중용하지말라는 훈요10조구절이 들어있게 되었고 역사속에서 전해졌다고 할수가있다.

백제와 전라도의 관계는 정복과 멸해야할 대상으로 규정했는데,역사적으로보면,백제는 점차적으로 전라도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정복하고 멸하면서 확장되어갔는데,이러한 전라도지역은 백제만 정복전쟁을 한것이 아니라,고구려나 신라또한 이지역에대한 정복을 꾸준히 진행하였다.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왜라는 세력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국경과 인접했음을 알수가있는데,이러한 구절은 왜라는 세력이 일본열도에있는 왜라는 나라와 혼동하기때문에 생기는것이고,한반도내에 고구려,백제,신라와 국경을 맞대는 왜라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세력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에있어 멸하고 정복해야할 대상이었으며,오늘날 그지역이 어디였는가하면 전라도지역이다.오늘날 고구려의 지배지역을 경상도는 신라이고,전라도는 백제가 지배했던 지역이라는식으로 뚜렷하게 구별하여 표시하는데,사실은 지금의 전라도지방에는 고구려가 정복하고 지배했던 고구려지역도 존재하고있었고.마찬가지로 신라지역이라고 표시된곳 또한 고구려가 정복하고 지배했던 고구려지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영향을 미치던 지역은 한강이북지역만이 아니라,남으로는 제주도까지 그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삼국사기 문자명왕 13년 4월의 기록에는
특이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고구려 사신이 위나라에 가서 나누는 대화가 기록되어있다.

고구려 문자명왕 13년은 서기 504년이기에 그시기에 涉羅爲百濟所幷:섭라를 백제가 병합하였는데,이것때문에 섭라에서 생산되는 옥이라는 특산품을 바칠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섭라는 제주도를 말하고,섭라가 백제에 복속되었을때는 동성왕 20년 서기 498년이었는데

복속이라는 말은 공납과 조세를 바친다는 의미였고,이말은 그전까지는 섭라는 고구려에 공납과 조세를 바치고있었는데,중간에 백제가 가로채서 지금은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전복껍데기속에 들어있는 옥이라는 제품을 바칠수가 없다고 생각할수가 있다.

이런의미가 아니라면,고구려,백제,신라등 모든 국가는 서로 국가간의 교역을 하였는데,그전에는 구했는데 섭라가 백제에 복속되어 제품을 구할수가 없어서 바칠수가 없다는것은 비상식적이다.이러한것을 보았을때,충청도지역을 제외한 남쪽지역은 무주공산이었고 상황에따라 고구려,신라,백제에의하여 정복되거나 멸하게되었다고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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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의 고구려를 칠때 내세웠던 4대가능론과  고려가 명나라를 치려고할때 조선의 태조가 내세운 4대불가론을 비교하여,왜 조선이라는 나라는 우리나라역사에 있어서 한민족의 민족성을 저열하게 만들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당태종의 4대가능론  당태종왈:큰것으로 작은것을 치는것은 가하다. 이성계왈:작은것으로 큰것을 치는것은 불가하다.당태종왈:자연의 이치로 반역을 토벌하는것은 순리이다.이성계왈:농사철에 군사를 동원하는것은 순리가 아니라 불가하다.당태종왈:평안한 나라가 어지러운 나라를치는것은 가하다.이성계왈:적국을 치러갔을때,다른나라가 침입할수있으니 불가하다.


당태종왈:사기있는 군사로 군기가빠진 군사들을 치는것은 가하다.이성계왈:군사들의 무기가 여름철에 형편없기에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니 치는것은 불가하다.당태종의 가능론의 정신을 물려받은 당나라는 이후,태평성대를 구가하며 중원을 제패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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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4대불가론으로 만들어지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후,600년동안 한민족의 기상을 갈가먹고 명분과 논리에 치우친 이중적문화와 태도를 만들어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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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역사에있어 가장부끄러운 역사이며,민족사적으로 봤을때,생겨나지 말았어야할 왕조였다.반역의 왕조가 바로 조선이며,뒤통수를 치고도 잘먹고 잘살수있다는 저급하고 비열한 민족성과 사회문화에 예속되도록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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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와 첩의 차이에대하여,한자로 처(妻)는 어려움이나 좋은일등을 모두 함께처리한다는 뜻을 가지고있고,

첩(妾)은 의미그대로 시중들기위해서 서있는 여자를 의미한다.

시중하기위해서 상시대기한다는 의미는 분명한 의미가 첩은 단지 성교의 대상일뿐이고 집안일이나 가족관계상에서 배제됨을 의미하는 한자단어이다.


이와같은 단어상의 구별뿐아니라 처와첩의 자손은 구별하여 조선시대에서 엄격한 적서의 차별을 법률로써 규정하여 불이익을 받게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보통은 첩이었다가 처가 될수있는 경우가 전혀 없었지만 간혹 예외적인 경우가 존재하여 첩도 처가 될수가있었는데,그길은 바로 처가 자식이없고 첩만이 아들을 낳았을 경우이다.신분제사회에서 사대부집안 여자들에게 적용된 차별이 처첩관계라면 왕의 여자에게있어 적용된차별은 왕비와 후궁의 관계이다.후궁도 후비가 될수가있는경우가 있는데,왕비가  아들이없고  후궁이 아들을 낳았을 경우이다.후처나 후비는 정식처로 첩의 신분이아니기에 그의미는 첩과는 달랐다.

신분제 사회상에서 첩이 처가 될수있는 유일한 가망성이 있는 신분의 로또는 아들을 낳는것이었다.예를 들어살펴보면 1466년 세조임금시절,중추원부사 김형은 자식을 낳지못하는 민씨와 두아들을 낳은 도씨 두여인을 함께 데리고 살았었는데 김형이죽자,도씨의 아들중 김견이 자신의 어머니는 첩이아니라 처의 신분임을 확인해달라고 세조에게 상소를 하였다.

이에 세조가 신하들의 서로다른 의견을 취합하여 내린결론은 도씨는 먼저 결혼한 민씨와 같이 살았기에 나중에 들어온 도씨는 첩이 분명하나,민씨가 자손이 없으므로, 아들을 낳은 도씨가 후처로서의 지위를 갖는것이 합당하다하였다.이러한 결론은 아들의 의미가 중요했음을 알수가있다.

오늘날에는 처의 아들이든 첩이 아들이든 상관없이 상속이나 신분에있어 똑같은 대우를 법률에의하여 받지만,신분제사회인 조선시대에서는 첩의 자식은 아예 인간의 구실을 할수없도록  법제화하였기에 처인지 첩인지의 구별은 조선시대에서는 아주중요했다.오늘날에도 처가 아닌 첩을가지는 사람들은 어떤계층의 사람들일가하고 궁금해서 포탈검색창에 첩이라고 검색해봤더니 아래와 같은 관련검색어가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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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는 입으로는 공자왈 맹자왈하면서 도덕군자인척하며 힘깨나 쓰는 사대부양반가문층의 도덕적 이중성을 가장 잘나타내는 단어가 첩이라는 단어였다.일반백성들은 처이외에 다른여자에게 관심을가지면 부인이외에 여자를 간음하였다고하여 교수형에 처했으나,왕이나 특권계급층들은 첩이나 후궁제도를 활용하여 도덕적,법률적처벌에서 예외의 특권을 향유하는 그들만은 예외였다.

오늘날에 포탈에서 첩이라고 검색했을때 관련검색어로 제시되어지는 단어들을보니,첩이라는것은 아무나 관련검색어로 붙어서 제시되는 명칭은 아닌거같고 능력있는 남자(?)를 대표하는 관련검색어인거같다는 생각이 들정도이다.실제로 그러해서 관련검색어가 된것인지,첩은 부유함을 상징해야하는것으로 규정되어서 관련검색어로 제시된것인지는 알수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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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동안 미제사건으로 남은 두다리가 잘린 여자아이의 실화속으로 들어가보고,

오늘날에 법관점에서는 어떠한 법의 심판이 내려졌을까을 살펴보고자한다.


1533년 중종임금때인  2월 눈내리던 어느날, 서울에 두다리가 잘려진채 버려진 5세여아가 발견되는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여,이러한일이 중종임금의 귀에 들어가게된다.

중종은 천인공노할 이러한 범죄를 저지른 자를 잡아드리도록 어명을내리고 철저한 조사를 하도록했다.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하나둘씩 잡혀서 문초를 받게되는데,5세여아의 이름은 옥가이였는데,옥가이는 처음부터,사건이 마무리되기까지 일관되게 한사람을 지목하여,구체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진술하게되는데 그사람은 맨처음 길가에 울고있던 옥가이를 데려다가,수양딸로 삼으려던 한덕이라는 여자였다.

비천한 여아의 신분이었기에 형조에서 처리해야했지만 특별히 중종임금의 관심사였기에 의금부에서 사건을 담당하게되는데,피해자인 5세여아인 옥가이의 증언에따라 한덕을 잡아다 문초를 했으나,

한덕이 말하길" 올해 1월 10일경에 길에서 울고있는 아이를 데려다 기르려고 했지만,자신의 상전인 주인이 반대하므로,그다음날 길에 다시 버렸고 아이의 두발을 짜른적이 전혀없다"라고 하면서,자신이 길에 여아를 버렸을때,다른사람이 데려갔는데,데려간 사람들이 두발이 없는채 되려간건지,그렇지 않은지 확인해보면 될것이라 주장하였다.그래서 다시 그아이를 데려간 사람들을 모두 잡아다 문초를해도,일시적으로 보호했던 사람들마다,자신이 데려갔을때는 아이의 두발은 멀쩡했었다라고 일관되게 진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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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임금이 개인적으로 생각하길,어린아이이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의 발이 칼로 짤렸을때 손을 묶고 입에 솜뭉치를 물리게하고는 칼로 자신의 두다리를 한덕이 짤랐다고 상황을 일관되게 진술하는 옥가이의 말에 신뢰가갔기에,혹시 한덕이 나중에 몰래 다시 옥가이를 찾아가서 두다리를 짤라버렸지않나 의심하고,더욱 엄중하게 관련자들을 문초하도록 지시한다.

여러번 길가에 버려진 옥가이를 마지막으로 데려간 사람이 귀덕이라는 무당이였는데,귀덕을 잡아다 문초하니 귀덕이 말하길"옥가이를 길가에서 1월27일경 데려왔을때 두다리가 동상에 걸려있었지만,다리는 멀쩡해었는데,시간이 지나면서 동상으로인하여,두다리가 저절로 뭉개 빠져서,자신에게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어서 다시 길가에 버렸다"라고 진술하였다.

중종임금이 생각하길 두다리가 짤린 5세된 옥가이가 일관되게 한덕을 가르키며 자신의 두발을 칼로 잘랐다라고 진술하기에,옥가이를 데려갔던 관련자중에 누군가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있다고 생각했기에,의원을 시켜서 동상으로 자연적으로 두다리가 잘려나간것인지,아니면 칼로 일부러 짤라버린것인지 자문을 구하게되는데 의원은 여아의 잘려진 두다리 부분을보고는 칼에의하여 절단된것이 분명하다고 진술하였다.

이에 중종임금은 더욱 엄하게 관련자들을 문초하여 진상을 밝혀내도록 지시하였다.문초를 담당했던 신하들이 아무리 생각하여도,한덕이 여자아이를 버렸을때는 분명히 여아의 두다리가 멀쩡했고,나중에 최종적으로 옥가이를 데려갔던 무당인 귀덕이 옥가이의 두다리는 동상에의하여 자동적으로 사라진것이라고 주장하기에,5세된 여아의 진술만을 가지고 지목한 한덕을 범인으로 단정하여 죄를 줄수가있는가에대하여 논란이 분분하게된다.

중종임금은 어찌되었든 5세된 여아인 옥가이의 진술을 더 신뢰하여,한덕을 벌주려고했지만,신하들이 반대하길"조선의 법률은 80세이상과 10세이하의 진술은 증언으로 채택할수가 없다라는 법규정을 들며",아무리 5세된 여아인 옥가이가 일관되게 증언한다고해도,가치가없고,그증언만을 가지고,처벌하게되면 억울한 죽음이 생길수도있기에,그냥 결론을 내리지않고 유야무야 내버리는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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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초를직접담당했던 신하들뿐만아니라,정승들까지 같은의견을 주장하므로,중종임금또한 어쩔수없이 미제사건으로 아무도 처벌받지않는 사건으로 남겨지게된다.오늘날에 다시 두다리가 칼로짤린 옥가이의 사건을 재심하게된다면,관련자들인 한덕이나 귀덕등은 무죄가 될것인가 살펴보면,오늘날에는 5세된 여아의 진술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성있게 진술한다면,다른증거가 없다고해도 오직 옥가이의 진술자체만으로도,한덕은 유죄로 처벌을 받을것이고,상충되는 진술을한 무당인 귀덕은 위증죄내지,공범으로 처벌을 받을것이다.5세된 여아의 유일한 증언만으로 유죄의 증거로삼아 처벌을 할수있는가가 요점인데,조선시대에서는 무죄,오늘날에는 유죄가된다.400년전에 관련자들이 무죄로 끝난 다리가 절단된 5세여아의 미제사건은 오늘날 재심을한다면 한덕은 유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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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을 보다보면 교지를 들고  "어명이요"라고 말하면,사람들이 다른의견이나 논쟁꺼리로 다투다가도 각자의 의견이 어떠했든 상관없이

명를 따르는 장면을 자주 볼수가있다.이러한 어명속에는 재미난 법률규정이 들어있는데

만약에 교지로 어명을 받았는데 "어명이고,뭐고간에 따르지 않겠소"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어명을 거부하거나 따르지 않았을 경우 어떠한 처벌규정이 조선시대의 법률에는 규정되어있고,어느정도의 형벌을 받았을까?



임금이나 세자가 교지로 내린 어명을 따르지 않았을경우에  제서유위률이라는 조문으로 규정했는데,이런 조문을 어겼을때는 장 100대를 때리도록 처벌형량이 규정되었다.

엉덩이에 긴몽둥이로 100대를 맞는것이 뭐 별거이겠는가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깔짝,깔짝때리는 그러한 강도가아니라,몽둥이를 치는 사람이 두손으로 몽둥이를 잡고,180각도로 힘껏 때리는것이기에,왼만한 강인한 체력이 아니고서는,겉으로는 엉덩이가 터지고,부어오르는정도로 보이지만,며칠안되서 장독으로 대부분이 죽을만큼의 처벌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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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명에관한 제서유위률 법률규정은 왕이나 세자가 교지로 내릴수가 있었는데,왕과 세자가 내린 교지의 어명이 서로 경합되었을경우,밑에서사람은 누구의 말을 따르는것이 일신상에 좋을까?라는 문제가 생길수도 있는데

군대같은경우도,자신의 바로위 선임병과,몇단계 거친 선임병의 지시가 서로 다를경우,"누구와 더 오래생활 할건지 잘생각해보라"라는 무언의 압력의 선택을 받게되고,

일반직장에서도 자신의 직속상관이나 타부서의 직속상관보다 높은사람의 지시가 상충되었을때 밑에서 사람은 누구의 말을 따르는것이 좋은가?등과같이 현실생활에서 어떤것이 현명한 처신인가 생각해봐야 할경우가 종종 생긴다.

이런경우들의 현명한 처신은 상황에따라 예외가 있을수도 있겠지만,불법한 지시나 명령이 아니라면,일단은 직속상관의 지시나 명령을 따르는것이 현명한 처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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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한민국의 대통령 노무현,그분의 유서전문을 나름대로 영어번역을 해보았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려니,의미나,단어,어감에있어 모호한부분에대하여는 개인적인 주석을 ※괄호속에 첨가했습니다.개인적인 주석이므로 그러한 의미가 아닐수도 있겠습니다.


저도 정확한 영문번역을 보고싶지만,저의 영어실력 한계로인하여,그렇게하지 못하는것이 아쉽습니다.어찌되었든


우리나라 반만녁역사에 나라를 이끌었던  최고통수권자중에 마지막심정을 유서전문으로 남긴분도 처음이었고,전례에없던 유일한 기록이기에 역사자료에 기록해둡니다.

영국 bbc뉴스의 사이트에 2009년 5월29일 해드라인은 노무현 전대통령에 관한 기사가 해드라인 탑뉴스로 나왔습니다.우리나라뿐아니라 전세계의 공정한 언론방송들이 노무현 전대통령을 기억하고 추모하고있었습니다.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중에 체재와이념을 넘어 세계가 추모하며 기린분은 노무현 전대통령이 유일한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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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y people helped me, so.

Many people are suffering because of me.

Harassment to prepare is too many for me.

The remaining time of life will be a burden to others.

I can not do anything because health is not good(※they torment me).

Can not read a book,moreover can not write.

Do not be sad.

both life and death is one of nature.

Do not be sorry.

Do not blame anyone.

It is fate(※Roh Moo-hyun analects Reference "Chosun Dynasty 600 years")

Do cremate.

Do leave a small memorial stone near my home.

It is my belief.

Republic of Korea President Roh Moo-hyun,16,the whereases in the w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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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이래로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번도 바꿔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서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다. 패가망신했다.


600년 동안 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권력에 줄을 서서 손바닥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있어도,어떤 불의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숙이고 외면했어야 했다.눈감고 귀를 막고 비굴한 삶을 사는 사람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밥이라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우리 600년의 역사,제 어머니가 제게 남겨주었던 제 가훈은



'야 이놈아 모난 돌이 정맞는다,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 보면서 살아라,80년대 시위하다가 감옥간 우리의 정의롭고 혈기넘치는 우리의 젊은 아이들에게 어머니들이 간곡히 간곡히 타일렀던 그들의 가훈역시 '야 이놈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그만둬라.너는 뒤로 빠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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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이 역사를 청산해야 합니다.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노무현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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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르다.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땀흘리리라,깨우치리라,거칠은 들판에 솔잎되리라-상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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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꿈과희망을 끝까지 지키려했던 그분의 마지막 슬픈눈망울을 기억합니다.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어록,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한 역사의 교훈과 지향점,


진정한 국민의 대통령이었으며,세계의 위대한 지도자들과 비교하여 한치이 꿀릴것없는 자유와정의 그리고 민주주의에있어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대통령으로 기록될 노무현대통령을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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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병사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고구려의 군인들은 평상시에는 자신의 주업을 영위하다가 나라가 위급해지면,군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평상시에 일반평민들의 모습이라고해도 몸에는 칼을 5자루를 차고다니며 사냥이나,일들을 하였다.

고구려병사의 완전한 모습은 알수가없지만,남겨진 기록으로 살펴보면 고구려병사들은 머리에는 2갈래의 깃이달린 모자를썼고,좌우옆구리와 등뒤로 4개의 칼을차고있었고,긴칼인 대도를 손에 들고 다녔다.

왜 고구려백성들이 평상시에도 칼을 5자루를 차고다녔을까 생각해보면


고구려의 마을들은 산이나 계곡같은 농사를 짓기에는 알맞지않는 주거환경속에,사냥이나 목축을 대다수가 영위하며 살았기에,여러종류의 칼이 필요했을수 있음을 알수가있다.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기거나,요리,기타 싸울때 사용하는 칼등을 일률적으로 몸에 차고다녔다는 점이고,이러한 모습의 고구려백성은 언제,어디서든지 싸울수있는 상무의 상태를 유지했다.

고구려의 상무전통에는 신분상의 제약이없고,높은신분이든,미천한신분이든 누구나 무예와 무술을 교육받을수있었다.기록을 토대로 고구려 병사의 모습은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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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과 모자의 위치를 참고해 초고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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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고그림에 색깔을 넣어본 고구려병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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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직여본 고구려병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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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병사의 모습은 뿔난투구를 쓰는 모습은 맞지않고,머리에는 쇠로된 투구같은것을 쓴게아니라,천이나 면으로 만든 건이나 모자를 썼음을 알수가있고,오늘날에는 불편하게 보일지모르지만,다수의 칼을 일상생활에서 차고 다녔고,이러한 무기들은 나라가 위급할때,그자체가 고구려병사의 무기가되었다.

이민족이 침략했을때 고구려병사들이 강할수있었던것은 깊숙히 들어올수록,쳐들어온 적군이 되돌아 나갈수있는 안전한 길이 없었기때문이다.자체적으로 모든 고구려의 남성들은 자신이 사는지역에서,삶을 영위하는 성을근거로,자체무장이 생활화되어있었기에,한번에 붙어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면 이길수있는게아니라,오늘날의 지역적 게릴라전술을 사용했기에,

한번 이긴곳을 지나가더라도 다시 되돌아 그곳을 지나갈려면,자체적으로 생활화된 상무전통을 유지한 고구려 일반백성이 군사로 변신하여 다시 싸웠기에 전지역의 활로를 확보한 상태가 아닌한 침략한 적군은 살아서 돌아갈 확률이 극히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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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독재자의 공통점,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윤씨 사건때문에 폭군이되어진것으로 인식되어지고있지만,사실은 그렇지않다.


역사속에 남겨진 기록들을 살펴보면 연산군 그자체가 독재자 유형의 길을 즐겨하고,좋아하는 왕이었을뿐이었다.


연산군의 모델을 통하여,인류역사가 시작된이래 시간과공간에 상관없이 독재자가 되어가는 과정상에 공통점들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연산군은 집권을하자,제일 처음 한일이,백성과 자신과의 관계설정의 신비주의였다.자신이 사는 궁궐의 성벽을 높이,높이 쌓아올리도록하는것도 모자라,아예 자신의 사는곳에서 자신이 무슨짓을하든 아무도 볼수없도록,궁궐주위 사방 40km주변을 누구도 살수없는 지역이라고 "금표"를 부착하여 자신이하고 싶은행동을 꺼리낌없이 할수있는 장소를 만들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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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행동하는것들이 백성들이나 외국에 전파되지못하도록 외국으로가는 사신들에게는 미리 예상문답내용을 암기시켜보내고,자신이하는 행동들에대하여 누설하는 신하를 가장큰 죄로 다스렸으며,궁궐안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잘알수있는 내시들의 결혼상대 배우자까지도 법으로 규정하여,사대부나 국민들속에 자신의 행동들이 새어나가는것을 금했다.이렇게 연산군은 자신의 행동들에대하여 비밀이 유지될수있게 철저하게 주변환경을 만든후,오로지 신하와 백성들에게는 충성과 도리에대한 이야기들 강조하였다.

중종반정인 군사쿠테타로인하여 힘없이 연산군이 강제퇴위 당하는것을보면 연산군이 자신을 지켜줄 군사의 양성이나 무에대하여  연약한 왕이었지 않나 생각할수있지만,연산군은 자신의 부모들의 제사에도 군복을입고 참여할정도였고,개성이나 주요도시를 순시를 할때는 3만명에 이르는 기병과보병을 완전무장시킨채 이끌고 행차할만큼 자신을 보위하는 친위군을 많이두었으며,그자신이 말위에서 활을쏘고 말달리는것을 즐겨하던 힘이나 무에있어 강성한 체력을 가지고있었다.

이런 평상시 강대한 군사수로 자신을 호위하고,만일의 사태에 대비를 철저했는데도 왜 연산군이 박원종이 이끄는 소수의 임시규합적인 군사들이 궁궐을 포위하던 그날밤에 한번 대항도 못해보고,친위군들이 무너졌냐하면 궁궐을 지키는 친위군들이 반란군이 궁궐로 쳐들어오고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마자,단 한사람도 우리의 왕을 지키자하는 군사들이 없었고,평소에는 아양과 아첨을떨며 연산군에게 잘보이려던 장교들과 군사들이었지만,막상 연산군을 지켜야할때에는 평소봐왔던 연산군의 모습을 잘알고있었기에 이런왕을 보호해,자신들의 목숨을 바칠 필요가 뭐있냐는 생각으로 궁궐의 개구멍을 통하여 모두다 도망가버려,반란군이 궁궐로 진입했을때는 연산군을 지키던 군사들은 하나도 보이지많고,연산군만이 궁안에 덩그러니 남아있게 되었다.

연산군은 먼저 자신과 백성과의 간격과 거리를 벌리게하고는 두번째로 한일은 여자들에 관한것이었다.여자의 신분이나 유부녀인지 처녀인지 상관없이,이쁘거나 반반한 몸매를 가진 여자들을 전국에서 불러들였을뿐만아니라,거사라하는 이동할수있는 임시가옥을 만들어,그곳이 길가이든,산이든,민가한복판이든, 밤이든,낮이든 반반한 여자가 보이면 불러들여 그것이 놓인곳은 그자체로 침실이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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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로 한일은 백성들의 송사나 분쟁,경제적어려움등 사사로운일들이나,천재지변같은 현상들은 자신에게 절대 상소하지 못하도록하여,애시당초 자신을 향한 불평 여론근원이 자신에게 도달되지 않도록 한반면에,자신의 보위와 관련되는 문제는 형제자매나 일가친족이라고해도,아예 호적을 파버리거나,서슴없이 죽여버리며 "가엽게 생갈할 가치도없다"라는 말로 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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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로 한일은 자신보다 힘이큰 나라였던 중국에게는 잘보이려고 갖은 아양을 다떨었는데,중국사신이 오면,"내가 어찌 황제의 어명을 갖고온 사신과 마주보고 앉을수있겠습니까"하며,중국사신보다 아래좌석에 앉으며 자신보다 강자인 사람이 존재하는 나라에게는 철저하게 비굴했다.

다섯번째는 신기한 동물들에 관심이 많고 음악과시같은 예술적분야게 관심이 많은척,후원하는척하며,예술적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으레 시를 짓거나,음악을들으며, 나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지?라는 칭찬을 항상듣고 싶어했고,술을 좋아라했다.술을 좋아한 나머지,법률로 업무시간이라도  술을먹고 비틀거리거나,헤롱헤롱한다고,아랫사람이 그러한것을 흉보는 투서를한다면,그 투서를한 아랫사람을 세상의 도를 모르는것들이라하여 잡아다 벌주도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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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소말리아의 해적선에대한 이야기들이 많다.조선시대의 역사속에서도 해적선이 출몰했다는 기록들이 많이 나타나는데,그중에는 중국해적선에대한 기록도 나타난다.

때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9년이지난 어느봄날,해주앞바다에서 우리나라의 무역선을 추격하던 해적선을 잡았는데,그 배안에는 우리나라의 물건들이 많이 들어있었다.


중국해적선에는 호유충을 우두머리로하여 19명이 타고있었고,배에는 대포같은 무기등이 장착되어있었는데,이들은 자신들은 중국군사들이고,



중국지방관리가 발행한 정체불명의 공문서를 보여주며 표류했던것이라고 주장하였다.지방관리는 법대로 처결하고자 했으나,중국군사라고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황제폐하의 성은에 망극하옵니다라는 임금인 선조의 자세였기에 중국해적선을 잡은 지방관리는 장계를올려 그처리에 대하여 선조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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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왈:해주에서 우리나라의 무역선을 추격하던 중국배를 잡았는데,자신들은 표류한것이지 해적질을 한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있습니다.

선조왈:표류가 맞다.

신하왈:우리나라의 무역선을 추격하고,배안에 우리나라의 물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선조왈:어허,표류가 맞다니까,우리나라 무역선을 추격하였다고 말하는것은,우리나라 지방관리가 해적선으로 둔갑시켜 공을 챙기려고하는거야,그리고 중국배에 문서가 있었다며? 해적선이 그런것을 가지고다닐 이유가 뭬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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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왈:저들 배의 소행과 물건들을보면 해적선으로 의심될만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선조왈:단정적으로 말하는데 해적선아니고 표류한선박이다.신하왈:.......

선조왈:임진왜란때에 의지할곳없는 이몸,백성들이 구해줬냐,신하들이 구해줬냐,구원해준게 누구겠느냐,차마 중국이 나를 버릴지언정,내가 중국을 버릴수는 없다.내가 현장에서 안봤어도 단번에 알수있다.표류가 확실하다.눈치없게 일도 제대로 처리못한 해주판관이 문제야,사헌부에서 잡아다 벌을 주도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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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년 9월 가을 고구려 양원왕때,투르크 기마병인 골촐싹이 이끄는 3만의 돌궐군이 고구려을 침략하여,신성을 공략하고 백암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고흘:대왕마마,돌궐이 우리나라의 백암성을 포위하여 공격중입니다.


양원왕:돌궐이? 우리나라에 무슨 원한이있다고 돌궐이 쳐들어왔다는 말이냐


고흘:중국의 남북조상황과 관련되어 쳐들어온것 같습니다.



양원왕:장군 고흘은 지금즉시 고구려 정예기병 1만을 이끌고가서 백암성을 원조하고,돌궐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온 이유를 들어보고,대처하도록 하시오.고흘:알겠습니다.

고흘은 신속하게 백암성으로 진군하여 백암성의 들판에서 돌궐의 적장 골촐싹을 마주하게된다.

고흘:돌궐과 우리나라는 원수진일이 없는데,어찌하여 우리나라를 공격하는가?

골촐싹:우리 돌궐은 요즘 서위의 공격에 시달려서,배가고프다,우리 돌궐도 먹고살기위해서는 고구려를 공격할수밖에 없다,얼른 항복해라

고흘:서위는 무섭고,고구려는 만만하다 이거구나,오늘 고구려가 어떤지 직접 경험해보거라,한놈도 살려두지않겠다.

골촐싹:짖는 개치고,무는개는 못봤다,이리하여 돌궐기마병과 고구려정예기병이 백암성 들판에서 일대전투가 벌어졌는데 결과는 돌궐군이 대패했고,고구려의 고흘장군은 싸움에서 사로잡힌 돌궐군 1천명또한 모두 수급을 베어,한놈도 살려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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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국제상황를 살펴보면,중국은 분열되어 강남을 근거지로하는 남조화북을 근거지로하는 북조의 왕조가 나뉘어 대립되어왔는데,고구려는 북조와 우호친선관계를 유지하여 북조의 왕조인 북위와 동맹관계를 맺었고 북위는 다시 서위동위로 나뉘어 존재하다가 북주북제로 이어지게된다.

백제는 이와는 정반대로 남조의 왕조(송,제,양,진)와 우호친선관계를 맺으며 고구려의 외교전략에 맞써고있었다.고구려는 북위와 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했는데,북위가 분열하여 서위와 동위왕조로 갈라지자,동위와는 친선을 맺고,서위와는 대립관계를 유지했는데,훗날 동위는 북제왕조로 이어지고,서위왕조는 북주왕조이어졌는데 북주가 훗날 중국을 통일하여 수나라가되게된다.

같은 북위의 갈래에서 나온 왕조였지만 동위와 북제와는 우호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서위와 북주와는 대립했기에 고구려에대하여 서위-북주를 모태국가로하는 수나라로서는 눈에 가시거리 일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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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년 고구려에게 얻어터진 돌궐은 그이후,세력이 수.당의 견제와 공격에의하여 급속히 약화되어가다가,657년에 망하게된다.돌궐이 망한후 11년이지난 668년,돌궐은 또다시 당나라의 고구려공격의 선봉에서서 고구려를 패망시키는데 앞장서게되어,고구려가 망하게된다,

돌궐은 고구려에게 이처럼 병도 주었지만 약도 주는 역할을 하게되는데,돌궐인 골출록이 당나라에 대항하여 7세기말 돌궐국가를 재건시키는데,이러한 국제질서환경이 고구려가 망한지 30년이 채되지않은,698년 대조영이 고구려를 이어받은 국가인 발해를 세울수있도록 유리한 환경를 제공하는 역할을 돌궐이 조성해주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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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나 기타사정으로 궁궐밖에 나가살게되는 궁녀들은 비록 민가에서 산다고해도,왕의 여자들이었던 까닭에 결혼하거나,남자와같이 살수가없었다.


형식상으로는 민간인 처녀들이었기에 법으로 궁녀의 신분이었다가,민간인이되었다고 결혼하지말라는 그러한법은 없었지만,


왕가의 입장에서 왕조의 여자였던 궁녀들을 신하가 데리고산다는것은 주.종의 신분관계가 엄격한 조선유교주의사상하에는 불충의 개념이 될수밖에없었기에,나서서 결혼하려는 사람들은 존재할수가없었다.


이러한 예외를 깬 특이한 경우가 있었는데,남치원이라는 사람이다.병으로 궁궐밖을 나간 궁녀을 첩으로 맞아들여서 살고도,무사했을뿐만아니라,벼슬까지도 할수있었는데,어떠한 사연이 있었길래 감히 왕의여자를 첩으로 두고도 살아남을수있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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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의 슬하에는 배다른 형제자매가 많았다.성종의 첫째아들이 연산군이었고,배다른 둘째아들이 진성대군인 중종이었다.연산군과 진성대군의 나이차는 12살이었는데,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는 일찍죽었고 진성대군의 생모인 숙의윤씨(정현왕후)는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의원수를 갑는다고 일으킨 피바람속에서도 숨죽이며 살아남아 자신의 아들인 진성대군과 자신의 목숨을 유지할수있었다.


연산군과 진성대군의 배다른 형제자매중에 성종의 후궁인 숙의심씨의 맏딸인 경순옹주가 남치원에게 시집을갔기에 남치원은 성종의 부마이면서,연산과진성의 처남이기도했다.숙의 심씨와 훗날 중종의 어머니가되는 숙의 윤씨는 서로를 잘아는 사이의 친분을 가지고있었다.


연산군시대에도 남치원은 우대를 받았고,중종시대에도 배려를받았는데,중종은 연산군을 내쫓고 왕이된 임금이었기에,쫒겨난 왕의 측근들은 대부분 처단되기마련인데,남치원은 연산군의 배려를많이 받았는데도,중종대에 이르러도 특혜를 받는걸보면 평소처신을 잘하지 않았을까하겠지만,


남치원이라는 사람의 일상생활행동을 살펴보면,오늘날의 망나니나 조폭같은 인물이었기에,성종의 여러 부마들중 한사람인 부마라는 관점보다는 경순옹주의 어머니인 숙의심씨와 중종의 어머니인 숙의윤씨의 관계가 특별했다고 생각할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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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치원에대하여 기록된 행동들을보면,다른지방을 50명정도의 무리를 이루어 여행다니며,자신에게 잘못보이는 사람은  일부러 시비나꼬투리를 잡아 그자리에서 패거나 가둬둔다든지,승려들이 사냥하는데 방해가된다고 절간자체를 박살내버린다든지 일반사람같았으면,중한형벌을 받았을것인데,유야무야로 넘어가는 기록들뿐이다.


평소행실이 이모양이었던 남치원이 궁궐의 대비전에서 나인으로 일했던 궁녀가 병으로 민가에 나가살게되었는데,그 궁녀를 데려다 자신의 첩으로 만들어 버린일이 생기게된다.다른것은 그냥 넘어간다고해도,이것은 그냥넘어갈수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조정에서는 연일 궁녀를 데려다 첩을삼은 남치원은 불충이기에,잡아다 죽여야한다고 상소를하니,


처음에는 이복동생의 남편이였기에 생각해서 눈감아 줄려고해도 궁녀의 체계자체를 무너뜨릴수있는 행위였기에 형벌은 내려야겠고 잡아들이면,반드시 죽여야하는 불충에 해당했기에,처단해버릴까 하다가도,어제밤에 자신의 모후이면서 대비인  정현왕후가 한말이 귀가에 멤돌았다.


"성종시대,악독한 폐비윤씨의 피박속에서 그리고 연산군아래에서도 나와 숙의심씨는 서로를 도우며,이겨냈었는데 이번일은 불문하고 넘어갔으면 하네" 하지만 어머님,신하들의 상소가 너무강해서......."신하들의 말은 중요하고,내말은 암것두 아니라는 말이지,아이고 내가 지금까지 누굴믿고 모진 연산군의 핍박속에서도 살았는데,늙으면 빨리죽어야 할까보네 내말은 상관말고,신하들 말 잘듣고 잘사시게,그만 물러가게......."  어머님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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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대간들이 남치원을 잡아들여 죽이라고 탄핵했지만,중종의 입에서 나오는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불허한다,불허한다,불허한다" 결국 남치원을 유배를 시키는가싶더니,유야무야되어지게된다,중종의 생몰년은 1488-1544 이고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는1462- 1530 이기에,남치원은 중종25년 1530년까지는 중종의 어머니의 보호를 받았을것같기는 한데,남치원의 공식적인 벼슬은 중종14년 1519년이후로 사라져,생몰년을 알수가없다.


병으로 민가에나가 사는 궁녀에대하여,사람들이 남치원처럼 행동했다가는 목숨이 열개라도 부족한 왕과신하의 관계가 엄격했던 불충하면 같은형제라도 죽임을 당하는 조선시대에서 부마로서 대놓고 꺼리김없이 행동하며 살다간 인물 1위를 고른다면  남치원이다.중종과 남치원의 기록을 살펴보다보니,왕이라고할지라도,자신의 어머니가 후원하는 사람에게는 어쩔수가 없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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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2대왕인 남해왕이죽자,3대 왕위를 누가 물려받을지에대하여 정해지지않았다.남해왕에게는 아들인 유리와 사위인 탈해가 왕권의 후보였다.



먼저 유리가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는 마음으로 탈해에게 말하길 '백성들의 추앙을받는 자네가 왕위를 잇는것이좋겠네"


탈해가 말할길" 왕의 자리는 그 그릇에 맡는 어질고,현명한 사람이 맡아야하는것으로 아무나 감당할수있는것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현명한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알고있습니다(석탈해는 자신보다 유리가 더많은 치아를가지고있는것을 알고 있었던듯하다)그리고는 떡을가져다 한입씩 물고 떡에난 이빨자국을보니 유리가 많았기에 신라의 3대왕은 유리왕이되었다.


이후로 신라의 왕을 이사금이라고 불렀는데,이사금이란 "이의 자국"이라는 기원을가지게되었다.신라3대 유리왕은 과부,고아,자식없는 노인등의 처지가 불우한 백성들에게 더많은 관심을가지고 정치를하였기에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하고,복되었다.


유리왕시대에 신라의 6부에게 성씨를 하사하였는데 양상부는 이씨,고허부는 최씨,대수부는 손씨,간진부는 정씨,가리부는 배씨,명활부는 설씨라는 성을 내렸다.이,최,손,정,배,설씨 6가지 성씨는 신라의 6부족과 관련이 있는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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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신라의 설씨 성을가진 처녀는 얼굴이곱고,심성이 지조가있었기에.삼국사기열전에 설씨처녀에대하여 따로 부가하여 기록할정도였다.유리가 죽을때 유언을 남기길 자신의 뒤를이을 왕은 자신의 아들들이 아니라,탈해에게 왕위를 잇도록 엄명하고는 죽었기에 신라의 4대왕은 석탈해가 되었다.유리와 탈해의 관계는 이처럼 서로를 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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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사진은 티스토리달력 사진공모전의 출품작입니다.사진제목은 "바위섬"입니다.바위섬~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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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칭기스칸이 몽골을 통일하여 칸이된지 6년이지난 1211년에 이르러 칭기스칸은 금나라를 이기지못하고는 몽골의 나라를 건설할수없음을알고,금나라와의 사생결단의 전쟁을하기로 결심하여,금나라 원정을 떠나게된다.


이때 몽골의 병력은 3군으로 나눠,우익군 4만명은 자신의 장남인 주치가 이끌도록하고,좌익군은 3만명을 제베가 이끌도록하고,중군 5만은 칭기스칸이 직접친정하여 총 12만명의 몽골기병군단을 구성하였다.

몽골에게 12만명의 군사는 몽골이라는 나라가 모을수있는 최대치의 군사였기에,



만약에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진다면,몽골자체가 패망해버리는 몽골의 모든 국운을 걸고 벌이는 일전이었다.몽골12만의 기병이 금나라로 침공한다는 소식을들은 금나라 7대 황제인 위소는 여진의 최고의 명장 완안승유를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여 40만의 최정예 기,보병군대로 몽골의 칭기스칸군대에 맞서도록하였다.


칭기스칸과 완안승유의 결전이 야호령지역에서 이루어졌다.야호령에서 이루어졌던 몽골과 금나라의 전투의 승패는,몽골인들에게 있어서는몽골인들도 할수있다라라는 자신감과 몽골족이 단합하는 자부심의 바탕으로,대제국 몽골을 건설할수있는 토대가 되었지만,금나라에게있어서는 야호령의 전투에서 패배로,100여년가까이 중원을 제패했던 여진족의 쇠망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야호령에서의 전투의 발단은 오사보지역에서 처음이루어졌는데 제베가 이끄는 좌익군이 오사보에 주둔하던 금나라군 우회하여 뒤를 돌아쳐서 무너뜨리자,금나라군은 퇴각하여 야호령에 진지를 마련하였고,이들을 지원하는 금나라 장군 완안승유의 40만군대가 야호령에서 이르자,몽골군또한 야호령에 도착하여 각자의 나라의 운명을건 일전을 벌이게되었다.


칭기스칸은 일전에 앞서 다음과같이 말하였다."몽골의 흥망이 이 일전에 달려있다."말하고는 휘하의 군사중에 몽골을 위하여 몽골군사의 혼을 보여줄 선발대 3,000명을 뽑았다.이들 선발대의 임무는 숫적으로 4배이상의 우위를보이는 금나라군사와의 일전에앞서 40만의 적군속으로 돌격하여 적의 사기를 꺽으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선발대는 살기위한 돌격을 하는것이아니라,죽는것을 영광으로 삼는목표를 가진 몽골군사들이었다.선발대가 금나라 대군의 진중으로 돌결하여 오자,금나라군대는 숫적우위를 이용하여,이들을 전멸시킨다.그러나 전멸당하면서 보여준 몽골군사의 모습이 금나라군사의 사기를 꺽어버리게 된다.


금나라 군사의 화살을 한쪽눈에 맞은 몽골기병은,비명을 지르며 아픈척 하는게아니라 아니라 오히려 화살에 박힌 눈알을 뽑아서 싸웠고 오른쪽손이 잘려나가면,왼손으로 칼을 잡고싸웠으며,머리를 도끼로 맞았서도,숨이 붙어있는 마지막힘이 남아있는순간까지 칼을 휘둘다 죽었다.


금나라가 군사들이 기름을 부어,몽골군사의 말과몸에 불을 지르더라도,말과함께 뼈와살이 다 타들어가는 순간까지,싸우면서 악귀처럼 웃으며 죽어가는 선발대 몽골군사들을보니,금나라군사들은 이들을 제압하고는 있었지만,마음속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뒤로 도망가려고하였다.이때 몽골기병본대가 돌진하자,사기가 떨어진 금나라군대의 진중에는 도망가려는 군사들로인하여 우왕좌왕하다가 금나라는 대부분의 군사를 잃고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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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령에서 패전한 완안승유는 군사를 후퇴.재정비하여 회화보에 집결시킨후 마지막남은 자신의 군사에게 말한다." 고향으로 가고싶은자 돌아가도좋다.이미 이길수없음을 안다.그러나 나는 여기서 최후까지 몽골군과 싸우다 죽어 금나라장수의 혼을 보여주고싶다."이에 야인의 본성을 가졌던 여진족군사들이 사기가 깨어났지만,이미 한발늦은 결과였고 금나라군사는 최후의 1인까지,몽골군과 맞서싸워 전원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러한 금나라군사들의 마지막 자세는,칭기스칸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가볍게 볼수없는 정신을가진 군사들이라는 생각이 들게하였으며,칭기스칸 자신의 생전에는 금나라의 패망을 볼수없었다.어찌되었든 금나라의 명장과 칭기스칸의 야호령의 결전은,몽골족에게는 자신들도 할수있다는 자신감을,패배한 완안승유와금나라군사의 마지막 정신과자세는,비록 몽골군에게 패했지만 훗날 청이라는 제국을 세워 중원을 지배할수있는 부활의 혼을 여진족에게 남겨주었다.


역사속에서도 보듯이,승자와패자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승패를 받아드리는  마지막자세가  어떻했는지도 중요하다는것이다.사회분야를보더라도,경쟁하다가 진사람은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하고,승자를 축하해주는 모습보다는,뒷다리걸기,뒤다마까기등,자신의 부족했던것을 뒤돌아보기보다는 패배를 인정하지않는것이,자신을 더 돋보위게하는양,이런 비겁한 모습을하는 사람이나 부류들이 있다.


사람의 일에있어 승패는 이길수도 질수도있다.모든것을 다 이기는 사람도없고,영원히 승리만하는 삶도없다.중요한것은 승패가 결정되었을때 보여주는 마지막모습에따라,훗날 패자가 승자가될수있고,승자도 패자가 될수있는 요인을 가지고있다고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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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농담한마디했다가 자신도죽고 나라끼리의 전쟁을 일으킨 석우로라는 사람에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석우로의 이러한 행동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하기위해서는 먼저 석우로처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석우로는 신라의 10대왕 내해왕의 아들로서 태자였는데,내해왕의 딸이 신라의 11대왕이되는 조분왕의 왕비였다.결과적으로 왕위가 내해왕의 아들이아닌,딸의 사위가 되었던것이다.




조분왕의 입장에서는 석우로가 왕위를 이어야했었는데 그렇지못함에대한 미안함과,석우로가 매형인입장이였기에,석우로를 중히여겨 나라의 중요한일들을 맡겼다.석우로는 무예에는 능하였기에,백제와 왜와의 싸움에서 공적이 많아 승승장구하여 신라의 대장군의 직위까지 올랐다.


시간이 흘러,조분왕의 딸이 석우로의 아내가 되었는데,석우로와 조분왕의 딸 명원부인사이에 흘해라는 아이가 태어나는데,이 아이는 어머니의 공적과배경때문에 훗날 최고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석우로의 농담으로 인하여,나라간의 전쟁이 발생한 상황은 이러했다.조분왕이죽고,조분왕이 동생인 신라12대 첨해왕시기인 249년에 석우로의 집안이나 세력이 신라에서는 제일이라고 할수있을만큼 튼튼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있었기에,대갈박이 좀 무식하더라도 첨해왕도 석우로의 위치를 무시할수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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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년에 왜국의 사신인 갈나고가 신라에 왔을때,왜국사신이 머무는곳에 석우로가 찾아가,자신의 신라사회에서의 위치와 용맹성을 자랑할겸,갈나고에게 이렇게 말하였다."조만간에 너희 왜왕을 잡아다가 염전일을시키고,그왕비는 잡아다 식모살이를 시키겠다.하하하" 갈나고는 이말을 듣자마자,사신의 임무고,뭐고간에 왜국으로 돌아가 왜왕에게 듣은바를 그대로 전하자,뿔이난 왜왕이 대병을 보내 신라를 치도록하여,왜의 대병이 신라를 침략하여,왜와 신라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렇게되자,뭔 이유인지 잘알수없던 침해왕에게 석우로가 앞에나아가 말하였다."제가 말을 조심하지않아서 이러한 결과가 생겼습니다.제가 적진에게가서 상황을 잘설득해 보겠습니다"하고는 왜의 대병이 진을치고있는곳으로 가서 왜의 장군들에게 말하길"저번에,말한것은 농담이었는데,진짜로 군사를 이끌고와서 전쟁을하자면 어떻게합니까?"이에 왜인들이 얼빵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대답도하지않고,석우로를 잡아다가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에태워죽이고는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신라13대왕 미추왕(262-284년)때에 다시 왜국사신이 신라에왔는데,자신의 남편인 석우로가 농담한마디로 인하여 원통하게 죽은것을 분하게여겨,이를갈던 석우로의 아내 명원부인은 미추왕에게 나아가,자신이 왜국사신을 극진하게 대접하겠다고 청하여,허락을 얻은후 상다리가 부러질만큼 맛있는음식과 술을준비하여,왜국사신이 흠뻑취하고 마시고 놀게하던중,술을 마시면,농담도하게되었을것인데,이것을 빌미로 왜국사신을 뜰에 잡아다가 자신의 남편이 죽게되었던 방법그대로 왜국사신을 불에 태워죽였다.이러한 소식을들은 왜국에서는 다시 대병을 거느리고 복수를하려 침략하였지만,신라를 이길수가 없었다.


명원부인의 이러한 "눈에는 눈,이에는 이"의 복수는,훗날 자신의 아들이 흘해가 신라 16대왕인 흘해왕(310-356년)이되는 바탕이 되었다.흘해의 아버지인 석우로또한 자신의 대에서는 정상적인 왕위를 얻지못했지만,자신의 자식은 왕위에 오를수있었다.어찌되었든 석우로는 농담한마디 잘못했다가,나라간의 전쟁을 만들고,그책임으로 죽은 불쌍한 위인으로 삼국사기열전에 전해져온다.역사의 교훈은 말해주고있다.사람을 유쾌하게하고, 웃기게하는 농담도,때와장소에 맞지않으면,죽을만큼 된다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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