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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입경로를 살펴보다보니 김정은 비명횡사라는 검색어로 들어온 경우가 보였다. 김정은의 비명횡사에 대한 글을 쓴 것은 없는데 검색어가 이런 것을 궁금해 하는 분들도 있겠구나 해서 언제 비명횡사할 지에대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합한 귀납적 결과테이터를 근거로 이에 대한 글을 적어 봐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로부터 남남북녀라는 말이 존재하는 이유는 누구나 알 것이다. 이것의 역사변혁에서 숨겨진 의미는 결정적인 순간에 역사의 획을 긋는 주체는 남쪽은 남자가 듬직하고, 북쪽은 여자가 더 낫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관습적인 실제 경험으로 인하여 내려온 속담들에는 경험론적 지혜를 내포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이 독재와 민주의 갈림길에서 김재규의 결단으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그 행위에 대한 공과의 가치판단을 어떻게 내리든 상관없이 대전환을 이룬 것은 진실이다. 북한의 김정은의 비명횡사는 역사적인 귀결상 남자에 의한 것이 아닌 북한 여자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민족적 남녀속성상 부합한다.

 

김재규는 총을 사용했으나, 앞으로 북한의 김정은의 비명횡사에 나올 무기는 칼이라는 것이다. 김정은의 죽음은 여자의 손에 죽으며 그의 몸을 찌르는 칼에 의하여 생을 마감하게 될 운명 이라는 점이다. 그 시기는 2016년 여름을 넘기지 못할 팔자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김정은의 비명횡사의 운명을 바꿔 피하려면 여자와 단 둘이만 있는 상황을 절대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데, 접견을 하든, 하물며 개인적인 섹스를 하는 상황하에서도 경호원이 지켜보는 상황 하에서 해야만 여자의 칼에 맞아 비명횡사하는 운명을 피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것을 일평생 지켜 목숨을 보존하기는 쉽지가 않을 것이다.

 

김정은 스스로가 비명횡사를 벗어나는 가장 쉬운 길은 2016년 이전에 신라의 마지막왕인 김부처럼 평화적인 방법으로 왕의 역할에 대한 개인적 역사적 결단을 통한 귀부를 통하여 남북한의 통일에 기여한 공로로 일평생을 살아남는 방법만이 비명횡사를 당하지 않는 가장 현명한 대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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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나는 조선의 국모이니라"라고 외쳤다는 고종의 왕비 민황후는 과연 그러한 말과 자세를 보여줬을까를 아무리 역사기록을 찾아보아도 보이지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로 궁녀의 복장을하여,구차하게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려고했을뿐이었다.


조선의 민황후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행동을했던 대비되는 왕비가 고려에 있었으니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14세기 후반에 머리에 빨간두건을쓴 도적의 무리였던 홍건적이 자주 고려를 침범하여,우리나의 백성들 괴롭히곤하였다.훗날 이 도적의 무리의 괴수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데,근본부터가 도적의 무리들이였기에 허약한 근본토대를가진 왕조일수밖에없었다.


1363년 고려 공민왕의 나이 33세가 되던해,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의 논공행상에 불만을품은 김용이라는자가,자객단을 이끌고 흥왕사의 행궁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나라일을 보던 공민왕을 암살하려고하였다.


김용의 자객단이 흥왕사로 급시에 습격을가하자,공민왕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는데,공민왕의 아내였던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공민왕을  어머니의 방에 왕을 숨기고,그문앞에 서서 자객단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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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단의 무리가 칼을 휘두르며 방문앞에 이르러 말하길 왕은 어디에있는가? 왕비가 홀로 나아가 외치길"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방안에 들어가려거든 먼저 나를치고 들어가라"하메,무리들이 두려워 태후의 방안에 들어갈수없었다.


김용의 자객단은 나중에 최영의 정예군에의하여 처단되어 반란은 진압되게되고 훗날 아내의 도움으로,자신의 목숨을 구한 공민왕은 흥왕사의 변이 일어난후 2년이 지난 35세되던해 눈이 소복히 많이 내린 2월 추운겨운날에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죽자,


훗날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남긴 조의문에 그때의 상황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는데 자신을 남기고 떠나버린 아내를향한 사랑과 비통한심정을 느낄수가있다."나에게있어 아내보다 중한것이 없었고,흥왕사의 변이 일어나메,나의 몸의 지척에서 적을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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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사후  공민왕은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은왕비를 살아있는사람처럼대하며,식사할때마다 자신의 음식과 왕비의음식을 같이차려  함께 대화를하며 음식을먹었고,일체의 고기를 먹지않았을뿐아니라,나라를 다스리는 일조차 관심을 끊어버려,국제정세에 밝아 요동을 정벌하며 호기롭고,영민했던 공민왕은 이후 360도 다른 무기력한 왕의 모습을 보이며,슬픔속에서 살아가다 결국 신하의 손에의하여 죽음을 당하게된다.


훗날 조선을 개국한 반역의무리들이 공민왕의 후손인 우왕과창왕의 씨를 가짜라고하며,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위하여 역사를 왜곡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보아도 공민왕은 35세에 이미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하여,아이를 낳다가 죽었던걸보면,공민왕의 남성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했음을 알수있고,공민왕 스스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했던 우왕을 훗날 반역의 무리가 "아니다"라고 기록것은 반역을 정당화하기위한 역사조작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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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역사에서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자객단앞에서도 당당히 홀로맞선 여인이었지만,궁중에서의 일상생활모습은 내성적이고,여린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전해지는데,사랑앞에서는 한발자국도 물러 서지않았다.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사랑을보면,남녀간의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라는 말이 사실인거같다.


드라마나 사극일지라도,역사를 조작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것은 반역의무리들이 늘행해왔던 목적을위하여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르지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반만년역사에 왕비로서,노국공주가 행하였던 행동은,실존하는 유일한 기록이며,"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라는 그러한 비장미와 당당함을 보여줬던 인물을 찾는다면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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