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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서 인간으로서 최악의 왕을 뽑으라면 조선시대 왕인 인조이다.

인조는 왜 말년에 거이 자멸에 가까운 미친짓을하고 죽게 되었을까?
 
그 배경을 살펴보면 조소원이라는 후궁이 있음을 알수가 있는데,

태생적으로 역사의 반역정권이었던 인조의 즉위도 문제였지만 늙어서도 여색에 미친결과였다.

인조는 54살에 죽었는데 죽기4년전부터 후궁인 조소원이라는 여자에 미쳐


밤마다 "베게"사이로 나누는 대화를 통한 결과는 인간으로서는 생각할수없는 짐승의 행동만을 행하다가 죽었다.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선해지는 경우가 많은데,인조는 죽을때까지 여자에 미쳐서 폐악을 저지르다 죽었기에 인조라는 왕은  왕의대접을 해줄 가치가 전혀없는 인간이라고 볼수가있다.

인조와 조소원사이에도 딸이있었지만,인조의 후궁인 조소원이 스스로 왕위를 이을수도 없었는데,왜 소현세자일가를 저주했는지는 의문인데,그결과는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에의하여 처리가 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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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먼저 그당시 국제적인 안목을 가진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소현세자가 비록 아들이었지만 늘 불안했다.이것은 인조정권이 태생적으로 주둥아리로만 외치는 반청의 기치로 탄생되었기에,국제정세를 잘파악했던 소현세자의 행동과처신은 눈에 가시거리였을 뿐이었다.

인조는 국내의 사대부들에게 인기를 얻고 왕권을 유지할수있는 길이,주댕아리만일지라도,부모의 나라 명나라 어쩌구하는 허울데기 행동을해야함을 잘알고있었다.이것밖에는 광해군을 몰아내어 반역정권을 만들어낸 명분우위가 없었다.

이미 국제정세를 잘 파악했던 소현세자는 이러한 허울데기명분에 연연하지않았기에,인조의 마음속에는 소현세자는 아들이기 이전에,자신의 허울데기 처신을 비웃는것같고,청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갈수있는 흉악한눔으로 여겨졌다.

이러한때에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소원은 인조의 마음을 가장 잘파악할수있는 총애받는 후궁이었지만,소현세자빈이었던 강씨와는 아주안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는데,이 근본에는 강씨의 일족과 조씨의 일족간에 외척들의 국가에 참여의 대립이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기에,조소원의 입장에서는 자신과 자신의 일족이 정치참여를 탐탁치않게 생각했던 소현세자빈에대하여 안좋은 감정을 가지게되는데,조소원과 인조는 그모양새는 달랐으나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부귀영화의 지속측면에서는 서로의 대갈박이 맞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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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죽음은 인조가 독살했다,아니다가 아니라,인조가 소현세자 죽음뒤에 벌인 행동을보면 독살인지 아닌지 미루어 짐작해볼수가 있다.소현세자가 죽기전에 이미 조소원과 소현세자빈 강씨사이에는 암투가 벌어지고있었고,인조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애첩이며,후궁이었던 조소원을 편애했고,세자빈강씨가 하는일은 사사건건 미워했다.결국 인조<->소현세자,조소원<->세자빈 강씨의 대립관계에서 자신의 국제정세관을 븅신취급하는 아들인 소현세자보다 밤마다 귀에 좋은소리를하는 자신의 애첩인 조소원을 더신뢰하게되는데,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인조와 조소원은 뒷날의 문제가 발생하지않도록,철처하게 소현세자의 일가를 말살하게된다.

조소원의 계략을 받아드린 인조는 먼저,홀로 3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키우던 세자빈 강씨를 모시던 나인을 역모라는 누명을 씌워서 궁녀인 계환과 계옥을 잡아다 옥에서 죽여,소현세자의 죽음에대한 세자빈 강씨가 하고싶은말이나 유언등을 전혀 밖으로 새나가지 못하도록 고립시킨후,허울데기 명분을 붙이고는 세자빈 강씨의 두 오라버니를 잡아다가,곤장을쳐 죽인다.그리고 사관과 신하의 무수한 상소를 모두 배척하고,기어이 세자빈 강씨를 사약을 먹여 죽였다.

인조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아들인 소현세자가 애통하고,슬프게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라고 진실로 생각했다면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인조의 친손자들이기에 원손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인조는 어찌된것인지 세자빈 강씨를 죽일때 붙인 허울데기 명분을 손자들에게도 붙여서 모두 섬으로 귀향을 보낸다.

아비가 병으로 죽으면,손자들이 불쌍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주는게 인간의 도리이며,역사상 왕권문제로 자신의 아들을 스스로 죽인 영조조차도 그 손자를 원손으로삼아 돌봤는데,인조는 전혀 엉뚱한 행동을 계속하기에 사관들이 얼마나 황당했으면,엄한 왕조의 기록물에 의문스럽다는 표현을 적어놓았는지 알수가있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행할수없는 짓을 스스럼없이 행하는 인조를 그당시 신하들과 사관뿐아니라 이상하게 생각했던 청에서는 용골대를 보내어 소현세자의 아들들이 어디있는가 묻고,소현세자의 큰아들을 청으로 데려가 양육 하겠다고한다.이러한 제의가있은후 갑자기 섬에 귀향가서 살던 소현세자의 큰아들의 죽음으로 대답이 돌아왔다.뒤이어 둘째도 죽고,뒤이어 마지막남은 아들도 남해어딘가에 유배되었다가,왕의 친손자였음에도 역사속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마지막 세째도 왕의 친손자가 살아서 일가를 이루어 살았다면,당연히 역사속에 기록되어있을것인데.아무런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는것은 어릴때 이미 죽음을 당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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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자신의 친아들,며느리,손자등 모두를 죽이는데 이러한것이 51살에서 54살까지의 3년사이에 모두 이루어졌다는것이다.인조는 자신의 인생에있어 마지막 남은 3년의 삶의 기간속에 들어있던 왕권,부귀영화,후궁의 미색을 취하기 위하여 이러한짓을 태연하게 벌였다는것이다.

조소원의 종말은 인조가 54살의 나이로 죽자,뒤를 이은 효종3년 1652년에  조소원이 세자빈 강씨에게 씌웠던 역모혐의처럼 효종에의하여 역모사건의 주범으로 잡혀 죽임을 당했을뿐만아니라,조소원의 일가친척등이 모두 잡혀죽여 패가망신 하게된다.

인조는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손자들을 모두 죽여놓고 단지 3년을 더 살았고,조소원은 스스로가 지은 악업에따라,세자빈 강씨가 죽은지 6년만에,자신뿐아니라 일가친족 모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인과응보의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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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에 관해 잘못알려진상식이,내시는 남성을 상징하는것이없어서,여자와 성관계를 못하는존재루알려져있다.그러나 내시들은 성기를 절단했던게아니라,고환(동그란것)이라는부분만을 없앴으므로,정자를 생산할수없었을뿐,남성의 성기는가지구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내시들두 여자와 결혼해서 살수있었구 아내를가지구있었구 성관계두 할수있었다.그러므로 내시가 아내이외의 여자와 관계를 하여 처벌받는 사례두 조선왕조실록에는 많이기록되어있다.







여기서,조선왕조실록에 재미난 사례를 찾아보면,내시 이만과 태조의 아들인 세자의 세자빈인 현빈유씨에대한이야기가 기록되어져있다.

세자의 나이는 11살이었구,현빈유씨는 18살이넘었으므로,남편이라구해봐야 남녀간의 정을 나눌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으며 나눈다해두 세자빈의 입장에서는 외로웠을것이라구 볼수가있다.
그리하여,궁궐일을 맡아보는 이만이라는 내시를 유혹하게되는데,

세자빈 유씨: 밤이 외로굽나,이만아,이리오거라 ㅎㅎ
이만:마마,이러시면 저는 죽겠됩니다.미천한 제가죽는것은 괞잖지만,마마두 죽게됩니다.고정하소서
세자빈 유씨:너는 죽는것이 그렇게 두려우냐,사랑을 위해선 차라리 난 죽을란다 ㅎㅎ
이만:마마,,,,,

이후 두사람은 남모르게 사랑의 불을 지피다가,태조에게 그사실이 알려지게된다.
태조2년 1393년 6월19일
내시 이만을 목베고,세자 현빈유씨를 사가로 내쫓다
.

보통의 조선시대의 가부장적인 율법으로는,여자를 죽이구,남자에게는 여자보다 약한벌을 내렸는데
왕실의 여자는 대역죄에 관련된죄를 짓지않구는,어떠한죄루두 처벌받지않는 특권을 가졌음을
볼수있다
.일반 궁녀나,일반백성의 여자였으면,교수형을 당했을것인데,친정으로 돌려보내는것으로
처벌을 마무리했음을 알수가있다.세자빈 유씨의 유혹을받은 이만은 참형을 당하여 목이 댕강된것과
비교해보면,조선시대에는 신분의차이에따라 법의처벌두 다름을 알수가있다.

여기서 더웃긴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져있는데,내시 이만을 태조가 목베어죽이자,
눈치없는 신하가,어쩐일루 이만이 목베어 죽게되었는지 알수있게해주소서.

태조:진정그이유가 뭔지알구싶으냐?
홍보:사람을 죽였으면,뭔이유인지 알아야 할게 아니겠습니까?
태조:대갈머리없는것,감옥에들어가서 곰곰히 생각해봐,너가 뭘 잘못한거지
       여봐라,홍보 저눔을 옥에 가두어라,앞으로 세자빈유씨 어쩌구,고따구로 말하는것들은
      다 집어넣을것이니 그리알라.

조선시대에는 아무리합당한 말이라구해두,때와장소를 잘못선택하여 말한마디 잘못하면
그날부로,자신은 물론 일가친족까지 화가미쳐 길바닥에 나았는것이다.오늘날에두 어쩌면
자신의 가족이 잘못한것이있다해두,그것을 뭐라말을하는 사람에게,좋은말을 해주어서,고맙구려
하는것보다,
태조처럼,가족일을 이렇쿵저러쿵이야기하는건 곧 나에대한 도전이야 콱~ 
가족과관계된것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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