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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어떠한 여자였을까,그리고 왜 신라의 성골은 선덕과 진덕인 덕만그리고 승만에 이르러 사라져버렸는지 성골의 정의에대하여도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선덕여왕의 뒤를이은 진덕여왕까지 2여자의 왕위시대는 신라자체에서도 특이 할뿐만아니라,우리나라역사에서도  여왕끼리 왕위가 연이어 계승된 전래가 전후후무하다.


고대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일이면서 여왕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면서 동시에 선라의 신분제에서 성골이라는 임금또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선덕과 진덕여왕은 사촌지간인 여자인데 삼국사기에는 이들의 용모에대하여 언급한곳이 있는데,"키는 칠척이고,얼굴이 매우 아름답고,팔길이가 아주 길었다"  척이라는 길이단위는 센티미터로 환산했을때 30cm이기에, 모두가 다 알수있다는 의미를 이르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라고했을때 동자의 키는 90cm이기에 삼척동자는 키작은 아이라는것을 알수가있다.

덕만의 사촌자매인 승만이  키가 칠척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칠척이면 2미터 10cm이기에  여자의 키가 이정도라면 몸매나 키가 서양녀에 가까운 글래머스타일의 미인이었음을 알수가있다.삼국사기를 편찬한 신라정통론을 세운 김부식조차도 신라의 여왕인 선덕과진덕등에대하여는 암닭이울면 집안이 망한다든지,암퇘지가 촐랑거린다든지 여왕이 지배하던 신라는 망조의 시기일수밖에 없었다고 아주 강하게 여왕이 왕위가 계승된것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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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견해는 삼국사기가 편찬될 고려시기뿐만아니라,신라의 여왕이 다스리던 그당시 당나라 황제가 다음과 같은구절로 분위기를 알수가있는데,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로부터 늘상 얻어터지는것은 여자를 왕으로 삼았기에 주위에서 업신여김을 당하는것이고,그렇게 나라에 왕이될 인물이 없느냐,하면서 비꼬는것을 보아도,선덕과 진덕이 재위시절인 그당시 주변국가의 분위기가 여왕제에대하여 호의적이 아니었음을 알수가있다.

이렇게 노골적인 주위의 시선들에도 신라가 굿굿하게 여왕제를 이어간것은 왕위의 계승에있어 특정신분계층을 의미하는 성골에 더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수가있다.선덕과 진덕은  신체조건이나 묘사된 얼굴형태 그리고,그이후로 여왕의 왕위계승이 사라지면서  성골이 전멸이 되어버렸다는것은 성골에서 나타나는 여자는 특정민족의 여인을 의미했을것이고 이들의 정체는 아시아계통의 여자보다 서양의 모습을한 여자들이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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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이 씨족이나 특정가문을 의미하는것이라면,오늘날에 성씨제도를 보면 알수있지만,어떤 일부성씨 사람이 자손이 업어서 가문이 없어지더라도,전체적인 성씨를 가진 가문은 계속이어지고 존재하기에 성골은 고착화된 개념이아니라 특정형식으로 부가적으로 연결되어지는 체계였을 것이다.

선덕여왕이 그림에 그려진 꽃을보고 나비가 안그려졌기에 그림의 꽃은 향기가 없는 꽃이라고했고,실제로 그림의 꽃을 심을보니 향기가 없는 꽃이었다라는 기록은 미래의 선견지명을 가지는 지혜가있었다기보다는 기록을 골똘이 보면,이구절은  여자는 얼굴이 아름다우면 저절로 남자들이 몰려든다라는 선덕여왕의 자심감을 표현하고있고,얼굴이 이쁜 자신의 경험상의 이야기를 하고있음을 알수있고,그 경험에대한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있는것을 표현하고있다.

신라시대에 여왕이 존재할수 있었던 이유는 주변국가나 사회문화전반에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거나 여성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신라사회에 존재했기에 나타난것이 아니라,전적으로 성골이라는 피의 순수성을 유지하는것이 왕위계승에있어 더 중요한 국체라는 생각이 신라인들사이에는 존재했음을 알수가있다.

선덕과 진덕까지의 여자혈통은 어딘가에서 시집온 여자들로 구성된 씨족집단을 의미했고.선덕과 진덕까지의 부모에게서는 그러한 도래한 시집결혼풍습이 존재했지만,그이후로는 완전히 신라사회에 그러한 풍습은 끊겼다고 볼수가있다.쉽게 생각하면 고려시대에 몽골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고려국왕은 같은 왕이라도 높은신분대우를 받은것처럼,

성골이라는 의미는 이목구비나 몸매,키등에있어 우리나라의 토착부족출신의 여자가 아닌 서양녀같은 몸매를 가지는 특정국가나 부족출신이 정기적으로 신라의 왕의 왕비로 맞아드려지는 전통이 이어지다가,선덕과 진덕여왕의 부모대에서 그러한 결혼전통이 사라져버렸기에.갑자기 여왕이 사라짐과 동시에 성골이 사라진것을 이해할수가 있다.그렇지 않다면 이미 많은 기존의 씨족이나 혈연집단이 존재하는데,갑자기  그일부의 핏줄인 여왕이 사라졌다고 성골출신 왕이 멸종되어 버렸다는것은 미스테리일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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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들의 성씨의 미스테리,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에서 왕조의 성씨를 찾아보면,

생각외로 많지가 않다.고구려의 고씨,신라의 박.석,김씨 고려의 왕씨,조선의 이씨 그러나 백제왕가의 성씨는?에 도달하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고씨,박씨,석씨,김씨,이씨인 5대성을 왕조의 성씨라고한다면,왜 600년이상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백제왕가의 성씨는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하는 점이다.

고구려,신라와 함께 삼국시대의 동시대의 문화를 살았던,백제가,신라나 고구려의 왕족 성씨는 모두 기록되어있는데,


같은 민족이라는 백제의 왕가는 왜 성씨가 미스테리로 되어있느냐하는 점에대한 글이다.백제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가야와 함께 수백년간 이어진 왕조에 비하여 주류를 이루지못하는 너무나도 빈약한 역사의 기록만이 남겨져있다.

이러한 이유의 근본적인 원인에는 일본과 백제와 가야의 관계때문이다.일본의 천황이 자신은 "백제왕가 자손의 피가 흐르고있다"라고 하였고,우리나라에서도 구지 일본 천황가가 백제왕가의 피가 흐른다고,공공연이 말하는것에대하여 자부심인냥하는 경향이 있는데,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일본의 천황가도 성씨가 없다.우리나라의 역사에 존재하는 고대국가중 유일하게 백제왕가의 성씨만이 전해지지 않는다.역사에서 논란이 되고있는부분이 백제와 왜의 관계가 어느쪽이 주종관계였나인데,우리나라에서는 백제가 주고,왜가 종이었다는 입장이고,일본의 입장은 왜가 주고,백제가 종이었다는 태도인데,상식적으로 왕의 자식이나,친족을 인질로 다른나라에 보내는경우,고구려와 신라의 경우나,

세계사적인 국가인 몽골과 기타국가등의 관계를 보았을때,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왕가의 자손이나 친척을 상대방의 나라에 보내는것은 보내는쪽이 주종관계에서 우월한 입장인경우는 전혀없었다.

백제는 특이하게도 일본에 왕의 장남이나 자손들을 인질로 왜에 보내어 생활하게하다가,일정시간이되면 일본에서 돌아와 왕위를 계승하곤했던 기록을 쉽게 찾아볼수가 있다.주목해야할 점은,우리나라의 최강의 군주였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시절에도 이미,신라는 왜의 공격으로부터 힘겨운 방어를하고있었고,직접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여 침입한 왜를 섬멸하였다는 기록을 볼수있는데,

왜의 세력은 오늘날 우리나라가 생각하는 일본이 통일국가를 이루기전에,일부의 허접한 세력이아니라,광개토대왕 당시에도,신라를 극도로 위협할정도로 강성한 군사력이었음을 알수가 있는데 신라는 왜의 공격으로 나라가 흥망의 위기에 처할 그시대상에서 백제를 살펴보면,이것들은 어찌된것인지 왜의 공격으로부터 예외였을뿐아니라,오히려 왜와 백제는 서로 연합하여,주변국을 점차 점령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의 천황가는 백제왕가와 통하다라는 일본천황의 말에는 혈연적으로 하나였다일뿐인데,백제왕들이 성씨가 없는것이나,일본의 천황가가 성씨가 없는것이나,일맥상통한다.우리나라의 국민에게 백제왕가의 성씨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제대로 답할수있는 사람이 없다.

수많은 왕의계보를 가진 백제왕들이 단 한명도,우리왕조의 성씨는 무엇입니다라고 말하거나 기록한적이 없기때문이다.그 당시에 성씨의 개념이 없었느냐하면,고구려나 신라에는 이미 왕족의 성씨개념은 존재하고 있었기에,변명할꺼리가 없다.왜 백제는 왕가의 성씨를 기록하지않았느냐,이것은 너무깊게생각하면 어려운것이지만,상식적으로 간단히 생각해보면 백제왕가는 왜라는 나라의 천황가와 뿌리를 같이하며,서로 상부상조하며 나라가 발전했기에 일본의 천황가가 성씨가 존재하지않는것처럼,백제왕가또한 그러한 전통에 참여하다가 망했기에 역사의 기록에서 백제왕가의 성씨가 존재하지 않게되었다는 것이다.

백제와 왜의 관계는 문화적인 입장에서는 백제가 우월했고,군사력에있어서는 왜가 우월했다의 관점으로 볼수있는데,고대 동아시아의 국가들의 흥망성쇠를보면,문화가 우월했다고 주종관계에서 주가되는게아니라,몽골의 징스칸이 몽골 문화가 우수해서,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한것도아니고,비록 몽골의 전체군사력은 20만에 미치지 못했지만,훈련되어진 몽골기병의 군사력이 강하기때문이었다.

백제왕가를 호위하고,받쳐주었던 군사력의 힘은 왜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할수밖에없다.백제는 문화적으로 왜보다 월등했지만,일정시기동안 군사력에있어서 왜의 보호를 받는 그러한 형태의 연합관계를 왜와 공통으로 가졌음을 알수있고,그 뿌리가 백제왕가와 일본천황가의 혈연적 일치관계에 기반했음을 알수가 있다.

백제 왕가의 시조는 분명히 고구려의 한분파로 세워진 국가였지만,그이후 고구려처럼,해씨를 원조로하는 고씨인 왕의 성씨를 이어간게아니라,고씨라는 성씨와 결별하고,그당시 군사력에있어서 우월했던 왜국의 천황가와 혈연적뿌리를 공유한다는 백제왕가의 명분으로 백제와왜는 연합하는 군사동맹관계였음을 알수있고,근본적으로보면 백제왕가는,우리나라의 일반백성과 동떨어진 태생들이었지 않나 그런생각을 해볼수가있다.

우리나라역사에서 백제왕을 드높이는 경우는 거이 볼수없고,또한 조금 뛰어난 백제왕이었다고해도,그사람을 추적해보면 알수없는 미스테리기간동안 사라졌다가,불연듯 나타나 왕위에 오르는데 그밑바닥에는  왜왕가와 밀접한 관련이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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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가와 일본천왕가의 관계는,몽골과 고려의 부마국과의 관계정도로 이해하면 역사적진실에 가깝다고 볼수있지않나라는 생각이든다.우리나라의 역사에있어 백제와 왜의 관계를 어느쪽이 주종관계냐에 대갈박 골머리를 굴리고 일본과 서로대립하는데,그럴필요가 전혀없는문제고 주변국가나 우리나라 역사에 남겨진 기록들을 있는그대로 해석하여 받아드리면 될뿐이다,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해서,고려의 역사가 자랑스러운 우리역사가 아닌것은 아니듯이,백제왕가가,일본의 천황가에 예속되어 일정시기,군사적동맹의 도움을 받았다고해도 있는그대로 받아드리면되는것이지,대갈박굴리며 왜 이딴기록이 역사에 존재하는지 그에반한 학설을 만들어내는데 골머리를 쓸필요가 전혀없다.

백제왕가는 전체시기가아니라 일정시기동안,"왜에 종속된 왕의계승을 했었다"이렇게 보면 주변국가에 남겨진 기록들을 "왜곡"할 엉터리학설을 만들어낼 필요가없는것이다.역사는 교훈을 얻기위한것이지,자존심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그자체가 더 부끄러운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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