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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등의 정사에 나오는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서 왜곡된 부분들이 있는데 왜이러한 잘못된 전쟁사를 정사에 기록하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먼저 고려 목종에 관련된 기록에있어 목종은 효자인것은 분명하나 그의 모후 천추태후의 신분은 고려건국 태조인 왕건의 손녀라는 것인데 여기서 천추태후의 집안은 고려의 호족정치에있어 태조왕건이 왕권을 강화하게해주는 근본토대를 만든 집안이라는 것이다.

고려의 4대 광종까지 왕건의 아들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5대부터 왕건의 손자들이 왕위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역사적으로 희귀한 사례가 발생하는데 5대  경종의 아내들로 천추태후의 자매가 연이어 왕비에 오르게된다.

천추태후는 경종의 장남인 목종을 낳았고 여동생인 헌정황후는 경종의 사후 왕씨 종친과 불륜으로 사통하여 훗날 대량원군 왕손으로 불리는 현종을 낳았는데 5대 경종이 죽으면 당연히 천추태후의 장남이 왕위를 이어야하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천추태후와 헌정황후의 친오빠가 6대 성종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려초기 왕씨의 왕권강화에 있어 천추태후와 헌정황후 그리고 성종은 같은 형제자매로 고려 왕족이 500년을 집권하게하는 궁극의 토대인 집안을 만들었다고 할수가 있다.

한국 왕조역사에 이러한 자매의 아들들이 차례로 연이어 왕위로 올라간 사례가 없고 고려의 목종과 현종이 유일한 사례였기에 희귀한 왕위계승이었다고 할수가 있었다.

고려사등 정사의 기록에등으로 오늘날에는 고려의 7대인 목종에 이어 등극한  8대인 현종을 세종대왕에 비교하는데 현종이 군주로써 명군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거란과의 전쟁사에있어서는 왜곡되어 기록되어지는 구절들이 있음을 살펴볼수가 있다.

천추태후는 자신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인 현종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인데, 천추태후 입장에서는 여동생이 낳은 현종은 경종의 아내였던 자신과 자신의 여동생의 정통성에 있어 자신의 아들인 목종이 후사가 없다면 오히려 불륜으로 낳은 여동생의 아들인 현종보다 자신도  김치양과의 사이에 불륜으로 낳았지만 자신의 아들이 오히려 목종이 후사로 맞다고 생각한게 틀렸다고 볼수가 없었다.

왕조시대에 선대왕의 아내였던 왕비들이 불륜으로 천추태후와 헌정황후 자매가 둘다 아들을 낳았는데 헌정황후는 같은 왕씨와 불륜을 해서 낳았다는 것이고 천추태후는 김씨와 불륜을 해서 낳았다는 성씨 차이일뿐 서열상으로 천추태후가 당대 목종의 어머니이고 여동생보다는 그 위치가 높았기에 자신의 아들인 목종의 후사가 없다면 불륜일지라도 자신이 낳은 또다른 아들을 올리려고 했던 것은 통일신라대 여왕의 전통인 모계가 강하게 이어진 고려초기에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신라가 여왕이 등극하고 후대에 왕위가 이어진다면 여왕의 남편이 조씨이든 윤씨이든 김씨왕조로 여겨져 이어졌는데 신라와 마찬가지로 고려초기인 모계영향력이 강했던 시기에 천추태후의 생각은 오늘날에서  이해가 안될지 모르지만 이상할것도 없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강조가 왜 목종은 죽이고 그의 모후인 천추태후는 죽이지 않고 목종사후 21년을 친정인 황보씨가에서  장수하다 편하게 자연사하게 나두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있는데  

천추태후는 왕건의 친손녀이고 고려의 왕씨의 토대인 강건한 호족의 군사력을 보유한 집안의 장녀로 친할아버지가 태조왕건, 친오빠가 성종이었고 ,당대 목종의 어머니였고, 후대 현종의 큰이모였는데 왕씨 왕족을 절멸하여 역성혁명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여자를 죽여서는 고려가 유지될수가 없는 어마어마한 왕씨왕족을 대표하는 기둥이기에 누가 그것을 뽑을수 있는가 말이다.

어째든 배경은 이러한 시대였는데 현종대에 거란과의 전쟁이 발생하게되는 여기서 서희의 강동6주니 강감찬의 귀주대첩등이 고려사의 정사기록등에 나오게 되는데 문제는 그러한 기록들을 읽다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있기에 이부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의문점으로 들어가보면 귀주대첩에 있어 승리의 결정적 요인중 하나로 기록된 병마판관이 이끌고 거란의 후방을 공격한 고려의 기병 1만의 존재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다. 

도대체 이해가 할수없는게 고려라면 대장군,장군도 아니고 조선이라면 관찰사 도절제사가아닌 판관이라는 오늘날의 공무원 급수로보면 4급에 해당하는 판관벼슬이 오늘날의 군대로보면 대위나 소령쯤에 해당하는 중대장벼슬을 가진 사람이 고려의 기병 1만명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었다는데 이게 말이 안된다.

오늘날의 군대의 직제를 보더라도 1만명의 직속군을 지휘하려는 최소한 별을단 장성급이지 중대장급이 그러한 부대를 이끌고 거란의 후방을 쳤다는게 개소리라는 것이다. 더욱더 믿을수 없는 부분이 우리나라가 제주도에 말의 방목장을 두어 대량의 말을 기를수 있었던 시기가 몽골의 원나라시기이기에 그보다 한참 앞선 거란과의 전투시에 1만의 넘는 말을 구하기 힘들었을뿐아니라 그렇게 귀한 말을 타고 이끄는 부대의 지휘관을 대장군도 아니고 현종이 판관벼슬에게 맡겨서 출전시킨게 맞는냐 하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적 기술이 문제점을 풀려면 거란의 침입루트나 후에 병자호란,임진왜란등의 전투에서 실마리를 얻을수가 있다. 먼저 왜 북방이민족들의 공격루트는 항상 예외없이 압록강지경만으로 한반도로 진입했느냐이다.

우리나라는 압록강이 아니라 백두산의 두만강지경도 있는데 왜 왜 왜 두만강 지경으로는 한반도의 진입공격루트로 거란은 한번도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는가 하는점이다.

여기에 고려사의 정사에 기록된 귀주대첩의 왜곡된 거란과의 전쟁사를 풀열쇠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귀주대첩이 한반도를 지킨 결사의 전투이고 한민족의 자랑인 역사적 대첩은 분명하다. 다만 이과정에 있어 승리의 결정적 요인중 하나로 지목된 고려기병 1만의 정체이다.

소배압의 10만 거란군은 조선의 병자호란시 청나라의 신속기병군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만들었던  방식의 당대최강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전부가 기병대였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전투사는 공성전에 특화되어 물리치는 전투민족이지 드넓은 평야에서 대규모 전투에서 이기는 고대전쟁사는 단한번도 존재하지 않았고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유일하다. 유일하다면 뭔가 기존과는 전혀다른 것이 작동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거란기병대의 후방을 때렸다는 고려 기병의 존재였다.

실제 역사속에 있었던 그 기병대의 비밀을 풀어보면 거란과 고려의 귀주대첩시 거란의 후방을 공격한 기병대의 정체는 고구려왕조를 함께 이루었던 숙신또는 말갈로 불리던 백두산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쫄따구 벼슬인 병마판관이 아닌 흑수말갈족 기병이었다는 것이다.

강감찬장군의 이끌었던 보병 20만이 거란의 소배압의 10만 기병대에 넓은 평야에서 그대로 전투가 지속되었다면 우리나라가 수적으로 2배인 전력이고 말의 진로를 방해하는 검차같은 다양한 장비가 준비되어서 그랬다는 잠꼬대같은 소리해봐야 고려의 군대는 거란 기병대에 전멸을 했을것이다.

전멸하지 못하게 거란의 기병의 후방을 친 기병대의 정체는 어디서 왔는가하면 그당시 흑수말갈의 기병인 5만의 병력이 거란의 후방을 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흑수말갈 오늘날에는 여진족이라고 불리는 세력이 고려와 호흥하여 귀주대첩에서 거란을 쳤나는 것이다.

태조왕건의 반거란 정책을 시행한 중요한 요인중 하나가 거란이 고구려의 계승자인 형제국인 발해를 무도하게 멸망시켰다는 것이었는데 이때 발해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우리 한민족과 말갈에 해당하는 여진족이 민족구성으로 이루어진 국가라는 점이다.

거란과의 전쟁시 고려의 적이 거란이었지만 말갈족의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나라를 멸한 원수이기에 공통적인 적으로 대적하는데 이상할것이 전혀없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의 선조가 의주에서 조금만 더 잡으러 오면 중국으로 도망갈거같아 왜군이 더이상 진군하지 않았다고 엉터리 논리를 펴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은 

그때당시 말갈족인 여진족이 차지한 백두산주변지역은 중원을 삼킨 청나라를 세울 부족들이 막강한 기병군사력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었고 이때 일시적으로 동원가능한 말갈의 기병을 5만으로 임진왜란시 기록에 남아있는데 이들이 참전할수도 있는 상황이 될수도 있었는데 왜군은 이들과의 확전은 막대한 피해만 예상되어 더이상의 전진이 없이 후퇴하고 정유재란시에도 여진족인 만주족이 기병대가 있는 지역으로는 아예 더 북진할 생각을 하지 않게하는 요인이 되었다.

거란과의 평야에서 전투인 귀주대첩에서 거란의 후방을 격파한 기병대는 흑수말갈기병으로 이들이 역사기록에 지휘관급으로 기록되어진 성씨중에는 특이하게도 고씨인 성씨들이 많은데 이들의 정체성은 두가지부류로 자신들을 고구려의 국적으로 생각하는 말갈족과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순수 말갈족으로 구분이 되었는데 고씨들은 아마도 고구려후손들로 생각하는 말갈족계통으로 생각할수가 있는대 발해를 세운 대씨들도 비슷한 성씨들이라 할수가 있다.

거란이후 금나라가 강성해지는데 바로 이들이 고려초기 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의 막강한 기병대를 가지게하는 후원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말갈족이 우리나라와 연합하여 중원세력과 싸운 기록은 고구려와 당태종 이세민의 전투사에도 이들이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군을 공격하여 당태종이 고구려와의 전투시 포로로 잡힌 수만명의 말갈족을 생매장하거나 다죽였다라는 기록이 정사에 남아있을 정도이기에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고려나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던 발해나 말갈족은 우리나라와 외적들의 전투시에 함께싸우는 주요부족이었음 알수가 있다.

뼈아픈점은 이러한 말갈족인 만주족이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상국이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상하우위가 바뀌어 청나라가되어 우리나라와 군신의 관계를 맺게하는 삼전도의 치욕을 만들게했기에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는 국제사회의 논리를 잘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와 거란의 귀주대첩당시 거란을 전멸의 상황을 만들수있는 대적가능한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강한 기병은 판관나부랭 중대장급이 이끈것이 아니라 그당시 유일한 가능성은

백두산지역에 부족을 이루어 생활하던 말갈족인 5만 정도의 기병이 그당시 즉각적으로 응대가 가능한 병력이었다는 것이다. 거란를 멸망시키는것도 백두산지역의 말갈족인 금나라였던 것만 보아도 그당시 고대사 우리나라와 북방세력이 전투시 단골처럼 함께했던 말갈족이 귀주대첩에서는 아무런 기술이 없다는것은 누가봐도 이상한 점이고, 

고려의 태조왕건이 후백제와의 통일을 위한 일리천에서 벌어진 최대의 전투에서도 최대한 끌어모은 병력이 정사에서 8만정도라고 기술한 경우도 있는데 실제로는 최대한 끌어모은 추정치가  3만정도였는데 그중에 고려왕건이 후백제를 쳐부술때 흑수말갈의 기병대 참가병력을 1만명정도로 기록하고 있는데 

내전에도 고려초기 흑수말갈이 기병을 1만을 지원해줄 정도면 국제전이 발생했을때 백두산지역에 비산해서 살아가던 흑수말갈부족의 기병대가 얼마나 더 지원이 가능한 상태였는지는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수가 있고 고려가 부족한 실제로 강한 기병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하는것이 틀리지 않다.

좀더 정확하게 살펴보면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에서 거란의 10만기병대를 후방에서 기습할수있고 맞설수있는 그당시 유일한 기병대는 백두산지역의 흑수말갈이 보유한 기병대이고 이들이 고씨성을 가진 예가라는 지휘관에의하여 참가하여 고려군과함께 거란기병대를 후방을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렇게 역사의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것이 엉터리 정사기록보다 더 맞고 왜 이부분을 역사에서는 흑수말갈의 지원을 숨기고 밥풀때기 3개를 단 중대장급인 병마판관이 1만의 기병을 지휘하여 쳤다는 황당무계한 기록을 남겨나는 것이고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이 고대나 현대의 군대계급체나 지휘체계만보더라도 뭔가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는것도 더 희귀하다 할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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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훈요 10조에는 전라도지역은 배역의 땅이니 인재라도 등용하지 말라는 조항이 들어있다.

이러한 훈요 10조에대하여 위조설이나 첨삭했다는 의견등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지만,이러한 구절은 우리나라의 역사, 일부의 미스테리를 숨겨 놓았기때문이고,훈요십조의 내용은 위조나 첨삭된 구절이 아니라 진실한 구절이었으며,


그당시 동족인 발해를 멸하는 거란에대하여 극한 분노를 표현했고 배척했던 고려인의 모습을보면 왜 이러한 구절이 훈요10조로 후대에 널리 전하라고했는지 충분히 이해할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로 축소하여 삼국의 시대로 이해하고 은폐하려했던되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오늘날의 전라도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다스리던 백제지역이 아니었고,백제의 주류문화는 충청도이고,전라도는 우리민족이 입장에서 볼때는 이민족이 한민족을 협박하고 멸하려는 세력의 주거점지역이었다.

역사속에서는 이들에관한 기록이 역사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충청도와 아울러 백제의 나라였다고 두리뭉실 역사를 만들었기때문에,이웃나라의 역사기록이나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속에 틈틈이 전라도지역에 존재했던 주체세력에대한 삼국시대와는 동떨어진 비상식적인 기록들이 나타나고있다.

이러한 전라도지역에 지배 주체세력이 이룬 국가가 백제가 아니라면 누구였는가가 문제인데,결론적으로보면 이민족중에 유물이나 유골등으로 봤을때 북방계통의 민족이아니라,일본계통의 민족이었음을 알수가 있다.전라도지역에 살았던 주체세력이나 주민들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입장에서 봤을때 멸해야할 대상이고,정복해야할 대상이었다.이러한 역사적사실을 후삼국을 통일했던 고려의 왕건이나 그당시 사람들은 잘알고있었고,민중의 밑바탕에 그러한 역사의식이 존재하고있었기에,전라도지역의 사람은 정부관리로 중용하지말라는 훈요10조구절이 들어있게 되었고 역사속에서 전해졌다고 할수가있다.

백제와 전라도의 관계는 정복과 멸해야할 대상으로 규정했는데,역사적으로보면,백제는 점차적으로 전라도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정복하고 멸하면서 확장되어갔는데,이러한 전라도지역은 백제만 정복전쟁을 한것이 아니라,고구려나 신라또한 이지역에대한 정복을 꾸준히 진행하였다.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왜라는 세력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국경과 인접했음을 알수가있는데,이러한 구절은 왜라는 세력이 일본열도에있는 왜라는 나라와 혼동하기때문에 생기는것이고,한반도내에 고구려,백제,신라와 국경을 맞대는 왜라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세력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에있어 멸하고 정복해야할 대상이었으며,오늘날 그지역이 어디였는가하면 전라도지역이다.오늘날 고구려의 지배지역을 경상도는 신라이고,전라도는 백제가 지배했던 지역이라는식으로 뚜렷하게 구별하여 표시하는데,사실은 지금의 전라도지방에는 고구려가 정복하고 지배했던 고구려지역도 존재하고있었고.마찬가지로 신라지역이라고 표시된곳 또한 고구려가 정복하고 지배했던 고구려지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영향을 미치던 지역은 한강이북지역만이 아니라,남으로는 제주도까지 그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삼국사기 문자명왕 13년 4월의 기록에는
특이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고구려 사신이 위나라에 가서 나누는 대화가 기록되어있다.

고구려 문자명왕 13년은 서기 504년이기에 그시기에 涉羅爲百濟所幷:섭라를 백제가 병합하였는데,이것때문에 섭라에서 생산되는 옥이라는 특산품을 바칠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섭라는 제주도를 말하고,섭라가 백제에 복속되었을때는 동성왕 20년 서기 498년이었는데

복속이라는 말은 공납과 조세를 바친다는 의미였고,이말은 그전까지는 섭라는 고구려에 공납과 조세를 바치고있었는데,중간에 백제가 가로채서 지금은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전복껍데기속에 들어있는 옥이라는 제품을 바칠수가 없다고 생각할수가 있다.

이런의미가 아니라면,고구려,백제,신라등 모든 국가는 서로 국가간의 교역을 하였는데,그전에는 구했는데 섭라가 백제에 복속되어 제품을 구할수가 없어서 바칠수가 없다는것은 비상식적이다.이러한것을 보았을때,충청도지역을 제외한 남쪽지역은 무주공산이었고 상황에따라 고구려,신라,백제에의하여 정복되거나 멸하게되었다고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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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고양이를 표현한 그림중에 갠적인 생각으로 가장높은 최고가를 기록한 그림이다.



초등생도 그릴수 있을것같은 그림,희미하게 보이지만 자세히보면 돼지와 고양이임을 알수가있다.


이러한 허접한 그림이 어째서 나에게 최고가를 기록하게되었는지는 미스테리일 것이다.


그림을 보고 무슨 느낌이 드는가?


옛날 백제의 근초고왕의 아들이 고구려의 성을 치러 나아갔을때 대승하여 고구려의 내지에 깊숙이 들어가게되자,

부하가 고하길 "만족함을 멈출줄 알면 욕을 당하지않고,진퇴를 분명하게함에는 위태로움이 없습니다."라고하자,

근초고왕의 아들이 말하길 "나이후로 고구려의 이곳까지 누가 다시 올수있겠는가?"라고 한탄하며 뒤로 물러 되돌아갔다.

삼국사기에서 해답을 얻다.어떻게 할까 결정을 못하는 그대에게
백제장수 막고해 왈 "知足不辱, 知止不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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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어떠한 여자였을까,그리고 왜 신라의 성골은 선덕과 진덕인 덕만그리고 승만에 이르러 사라져버렸는지 성골의 정의에대하여도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선덕여왕의 뒤를이은 진덕여왕까지 2여자의 왕위시대는 신라자체에서도 특이 할뿐만아니라,우리나라역사에서도  여왕끼리 왕위가 연이어 계승된 전래가 전후후무하다.


고대 역사에서 기념비적인 일이면서 여왕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면서 동시에 선라의 신분제에서 성골이라는 임금또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선덕과 진덕여왕은 사촌지간인 여자인데 삼국사기에는 이들의 용모에대하여 언급한곳이 있는데,"키는 칠척이고,얼굴이 매우 아름답고,팔길이가 아주 길었다"  척이라는 길이단위는 센티미터로 환산했을때 30cm이기에, 모두가 다 알수있다는 의미를 이르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라고했을때 동자의 키는 90cm이기에 삼척동자는 키작은 아이라는것을 알수가있다.

덕만의 사촌자매인 승만이  키가 칠척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칠척이면 2미터 10cm이기에  여자의 키가 이정도라면 몸매나 키가 서양녀에 가까운 글래머스타일의 미인이었음을 알수가있다.삼국사기를 편찬한 신라정통론을 세운 김부식조차도 신라의 여왕인 선덕과진덕등에대하여는 암닭이울면 집안이 망한다든지,암퇘지가 촐랑거린다든지 여왕이 지배하던 신라는 망조의 시기일수밖에 없었다고 아주 강하게 여왕이 왕위가 계승된것을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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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견해는 삼국사기가 편찬될 고려시기뿐만아니라,신라의 여왕이 다스리던 그당시 당나라 황제가 다음과 같은구절로 분위기를 알수가있는데,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로부터 늘상 얻어터지는것은 여자를 왕으로 삼았기에 주위에서 업신여김을 당하는것이고,그렇게 나라에 왕이될 인물이 없느냐,하면서 비꼬는것을 보아도,선덕과 진덕이 재위시절인 그당시 주변국가의 분위기가 여왕제에대하여 호의적이 아니었음을 알수가있다.

이렇게 노골적인 주위의 시선들에도 신라가 굿굿하게 여왕제를 이어간것은 왕위의 계승에있어 특정신분계층을 의미하는 성골에 더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수가있다.선덕과 진덕은  신체조건이나 묘사된 얼굴형태 그리고,그이후로 여왕의 왕위계승이 사라지면서  성골이 전멸이 되어버렸다는것은 성골에서 나타나는 여자는 특정민족의 여인을 의미했을것이고 이들의 정체는 아시아계통의 여자보다 서양의 모습을한 여자들이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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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이 씨족이나 특정가문을 의미하는것이라면,오늘날에 성씨제도를 보면 알수있지만,어떤 일부성씨 사람이 자손이 업어서 가문이 없어지더라도,전체적인 성씨를 가진 가문은 계속이어지고 존재하기에 성골은 고착화된 개념이아니라 특정형식으로 부가적으로 연결되어지는 체계였을 것이다.

선덕여왕이 그림에 그려진 꽃을보고 나비가 안그려졌기에 그림의 꽃은 향기가 없는 꽃이라고했고,실제로 그림의 꽃을 심을보니 향기가 없는 꽃이었다라는 기록은 미래의 선견지명을 가지는 지혜가있었다기보다는 기록을 골똘이 보면,이구절은  여자는 얼굴이 아름다우면 저절로 남자들이 몰려든다라는 선덕여왕의 자심감을 표현하고있고,얼굴이 이쁜 자신의 경험상의 이야기를 하고있음을 알수있고,그 경험에대한 확고한 신뢰를 가지고있는것을 표현하고있다.

신라시대에 여왕이 존재할수 있었던 이유는 주변국가나 사회문화전반에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거나 여성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신라사회에 존재했기에 나타난것이 아니라,전적으로 성골이라는 피의 순수성을 유지하는것이 왕위계승에있어 더 중요한 국체라는 생각이 신라인들사이에는 존재했음을 알수가있다.

선덕과 진덕까지의 여자혈통은 어딘가에서 시집온 여자들로 구성된 씨족집단을 의미했고.선덕과 진덕까지의 부모에게서는 그러한 도래한 시집결혼풍습이 존재했지만,그이후로는 완전히 신라사회에 그러한 풍습은 끊겼다고 볼수가있다.쉽게 생각하면 고려시대에 몽골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고려국왕은 같은 왕이라도 높은신분대우를 받은것처럼,

성골이라는 의미는 이목구비나 몸매,키등에있어 우리나라의 토착부족출신의 여자가 아닌 서양녀같은 몸매를 가지는 특정국가나 부족출신이 정기적으로 신라의 왕의 왕비로 맞아드려지는 전통이 이어지다가,선덕과 진덕여왕의 부모대에서 그러한 결혼전통이 사라져버렸기에.갑자기 여왕이 사라짐과 동시에 성골이 사라진것을 이해할수가 있다.그렇지 않다면 이미 많은 기존의 씨족이나 혈연집단이 존재하는데,갑자기  그일부의 핏줄인 여왕이 사라졌다고 성골출신 왕이 멸종되어 버렸다는것은 미스테리일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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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공통적인 기록중에 하나가 중요한 인물인 왕이 돌아가기전에
 

미리 자연현상적인 기이한 징조들이 나타남을 예고하는데,어떠한 징조들이 나타나고,


왕의 죽음을 미리 알려주는 베스트 1위에 해당하는 기괴한 자연현상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글이다.

왕이 죽음에 앞서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현상들중에 대표적인 것들이 다음과 같았다



"궁궐이 있는 성문의 문짝이 부셔진다.궁궐안에있는 우물안속에서부터 구름이나 안개같은 현상속에 용같은 괴물체가 튀어나와 사라진다,궁궐이 있는 산위에서 개가 사흘 밤낮으로 운다.염전이있는 소금창고에서 소울음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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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를 지키는 성문의 문짝이 무너지거나 부서지는 일이 발생하는것은,역사서에서 아주 불길한 징조를 의미하는데,일반적인 개인들의 사생활에서도 실제로 자연현상에 의하여 집에 문짝이 날아거나,꿈속에서 집의 대문이나 방문이 부서지는 꿈은 집안에 중요한 인물이 하늘나라로 올라가게됨을 의미하는 흉조인 꿈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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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우물안에서 구름과 안개속에 용같은 괴물이 홀연히 나와서 사라진다,이런경우 왕이 하늘나라로 올라가기전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기록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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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을 둘러싼 산위에서 개가 사흘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들린다.이런 경우 일반 개인들의 사생활에서도,개가 밤에 우는 현상은(개가 우는것과 짓는것은 그 소리가 다르다) 민간에서도 길조가 아니라 집안에 우환이 생기는 흉조로 여겨졌기에,밤에 우는개는 집안에서 기르지 말아야한다고 선조들의 경험의 산물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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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전이있는 소금을 모아두는 창고안에 소가 없는데 소금창고에서 소울음소리가 들린다.이런경우 소금이 모여져있는 창고안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나오면 왜 흉조라고 여겨졌는지는 요즘의 일반사회생활에서 흔히 볼수없는 모습이기에 알수는 없으나,미루어 짐작해보면 일상생활에 안좋은 일이나,재수없는 사람이 다녀가면  "에이,소금뿌려라"하는것처럼,소금과 소울음이소리가 결합되는 소리는,액운과 곡소리를 의미하지않나 생각할수가있다.

어찌되었든 대표적인 현상중에,삼국사기에 기록된 왕의 죽음을 예고하는 베스트 자연현상 1위는 궁궐의 성문이나 문짝이 무너지거나 부서지는 현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왕조체제가 없기에,이러한 현상으로 알수있는 왕의 죽음은없다고 생각했는데,가만히 생각해보니,족벌왕조체제가 아직 존재하는 미수복된지역이 아직 존재하기에,역사기록대로라면 자연현상으로 평양의 성문이나 문짝이 무너져내렸다는 언론기사가 나온다면,조만간에 생명운이 다한 인간이 소식이 들려오겠구나라고 생각해볼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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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씨라.......우리나라 성씨중에 설씨는 삼국사기 열전에도 기록되어있을만큼,그 유래가 깊어 관심을 가지고있었는데,


해직교사에관한 기사들을 찾아서 읽어보다보니 설은주라는분이 이름이보이길래,뭐때문에 해직교사가되었고,어떤생각을 가지신분인가 관련뉴스기사를 엠파스검색창에서 찾아보았다.


뉴스기사로 검색해볼수있는 숫자 마지막까지 다 넘겨봤는데 그분의 생각이 옳다.그르다판단이전에,이건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이드는 점이있었다.



설은주로 뉴스기사를 검색해봤더니,한겨례,프레시안,오마이뉴스,경향신문의 뉴스기사들은 많이보이는데,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로 검색되어진 뉴스기사는 마지막까지 한개도 보이지않았다.다음포탈에서야 조.중.동의 뉴스기사를 볼수없기에 그런가보다 생각했을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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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란게 무엇인가? 어떤것에대하여 옳다.그르다의 판단이전에 언론이라면 이슈화되고있는 문제에,눈에 띌만큼 보도기사들이 없다는것은 이해할수가없다.자신의 신문취향에맞는 문제라서 한겨례,프레시안,오마이뉴스등이 지면을 더 할애하여 기사를 만들어내고있다고해도,정론직필을 외치며,객관적시각을 유지해야할 조중동이 보여주는 뉴스기사의 취사선택량의 모습과태도에는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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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전라도이다"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보았을때 틀린생각이다.백제는 고구려의 일파이고,주활동무대는 오늘의 서울.경기지역과 그리고 충정도지역이다.

백제는 처음과 쇠퇴하여 망할때까지 단 한번도 전라도지역에 수도를 정한적이없다.서울.경기지역에있던 백제가 고구려에밀려 부여나 사비로 수도를 옮겨지만,그곳또한 충정도 지역이었다.

역사적으로보면 고구려,백제,신라 3국을 삼국시대라고 기술하는데,묘하게 사라진부분이 지금의 전라도지역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역사부분이 미스테리로 남아있다는점이다.



전라도지역에 생활했던 지배자나 지역민들이 고구려,백제,신라의 협공을 받으며 점차 세력을 잃고 역사속으로 사라져버린곳이  전라도지역이기에 전라도는 백제이다라는 개념은 잘못된 역사적시각이다.


눈여겨 봐야할지역이 영산강유역에 남겨진 대형고분들과 유적들이다.전라도지역에는 고구려,백제,신라와 다른 지배계급과지역민들의 연합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것이다.우리나라역사에서 오늘날의 신라의 지역이라고 불리는 김해,부산지역에있던 가야라는 나라의 개념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있지만,고구려,백제,신라의 협공을 받았던 전라도지역에 존재하던 나라에대한 기록은 역사속에서 미스테리하게도 모두 사라졌다.


역사적지식이 부족한 일반인들중에 전라도지역은 백제다라고 우기는분들이 있는데,전라도지역은 백제가 아니다.백제와 관련된 국립박물관이나 유물전시관이 모두 충정도지역에 오늘날에 존재하는지 생각해본적있는가? 백제의 근간은 서울,경기,충정지역의 지역민과 지배계층이 백제라고 볼수있고 오늘날의 전라도지역에 지배계급과지역민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협공을 받으면서,그곳에 살고 집단지배세력을 이루었던 사람들이 차츰 백제나 신라로 강제편입되었다라고 이해하는것이 상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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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부끄러운 역사일지모르지만,역사속에서 모두 지워져 미스테리로 남길게아니라,오늘날의 전라도지역에서 수백년간 존재했던 나라에대하여 엉뚱한 백제나 신라의 역사로 두리뭉실포장하려니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사기가 묘해지게되버렸다. 전라도지역은 후기에  백제에의하여 강제병합되었지,그곳이 백제의 본류가 아니다.


백제는 충청도이고 전라도지역에는 백제와는 다른 무엇인지 정의할수없는 지역민들이 살고있었다.오늘날에와서 전라도지역은 백제의역사입니다라고 생각한다면,그것만큼 무식한개념도없다.단지 삼국사기에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역사만을 다루었기에,오늘날 전라도지역에있던 지배계층이나 지역민이 이루어었던 국가는 역사의 미스테리로 사라져버린것이다.전라도지역에 존재했던 지배계층이나 사람들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협공에의하여 분해되버렸다라는 개념이 맞는것이다.백제에게 전라도지역이 강제병합되었다라면 모르지만,전라도지역이 백제였다라는 개념은 웃기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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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농담한마디했다가 자신도죽고 나라끼리의 전쟁을 일으킨 석우로라는 사람에대한 기록이 전해진다.


석우로의 이러한 행동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하기위해서는 먼저 석우로처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석우로는 신라의 10대왕 내해왕의 아들로서 태자였는데,내해왕의 딸이 신라의 11대왕이되는 조분왕의 왕비였다.결과적으로 왕위가 내해왕의 아들이아닌,딸의 사위가 되었던것이다.




조분왕의 입장에서는 석우로가 왕위를 이어야했었는데 그렇지못함에대한 미안함과,석우로가 매형인입장이였기에,석우로를 중히여겨 나라의 중요한일들을 맡겼다.석우로는 무예에는 능하였기에,백제와 왜와의 싸움에서 공적이 많아 승승장구하여 신라의 대장군의 직위까지 올랐다.


시간이 흘러,조분왕의 딸이 석우로의 아내가 되었는데,석우로와 조분왕의 딸 명원부인사이에 흘해라는 아이가 태어나는데,이 아이는 어머니의 공적과배경때문에 훗날 최고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석우로의 농담으로 인하여,나라간의 전쟁이 발생한 상황은 이러했다.조분왕이죽고,조분왕이 동생인 신라12대 첨해왕시기인 249년에 석우로의 집안이나 세력이 신라에서는 제일이라고 할수있을만큼 튼튼한 백그라운드를
가지고있었기에,대갈박이 좀 무식하더라도 첨해왕도 석우로의 위치를 무시할수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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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년에 왜국의 사신인 갈나고가 신라에 왔을때,왜국사신이 머무는곳에 석우로가 찾아가,자신의 신라사회에서의 위치와 용맹성을 자랑할겸,갈나고에게 이렇게 말하였다."조만간에 너희 왜왕을 잡아다가 염전일을시키고,그왕비는 잡아다 식모살이를 시키겠다.하하하" 갈나고는 이말을 듣자마자,사신의 임무고,뭐고간에 왜국으로 돌아가 왜왕에게 듣은바를 그대로 전하자,뿔이난 왜왕이 대병을 보내 신라를 치도록하여,왜의 대병이 신라를 침략하여,왜와 신라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이렇게되자,뭔 이유인지 잘알수없던 침해왕에게 석우로가 앞에나아가 말하였다."제가 말을 조심하지않아서 이러한 결과가 생겼습니다.제가 적진에게가서 상황을 잘설득해 보겠습니다"하고는 왜의 대병이 진을치고있는곳으로 가서 왜의 장군들에게 말하길"저번에,말한것은 농담이었는데,진짜로 군사를 이끌고와서 전쟁을하자면 어떻게합니까?"이에 왜인들이 얼빵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대답도하지않고,석우로를 잡아다가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에태워죽이고는 돌아갔다.


시간이 흘러,신라13대왕 미추왕(262-284년)때에 다시 왜국사신이 신라에왔는데,자신의 남편인 석우로가 농담한마디로 인하여 원통하게 죽은것을 분하게여겨,이를갈던 석우로의 아내 명원부인은 미추왕에게 나아가,자신이 왜국사신을 극진하게 대접하겠다고 청하여,허락을 얻은후 상다리가 부러질만큼 맛있는음식과 술을준비하여,왜국사신이 흠뻑취하고 마시고 놀게하던중,술을 마시면,농담도하게되었을것인데,이것을 빌미로 왜국사신을 뜰에 잡아다가 자신의 남편이 죽게되었던 방법그대로 왜국사신을 불에 태워죽였다.이러한 소식을들은 왜국에서는 다시 대병을 거느리고 복수를하려 침략하였지만,신라를 이길수가 없었다.


명원부인의 이러한 "눈에는 눈,이에는 이"의 복수는,훗날 자신의 아들이 흘해가 신라 16대왕인 흘해왕(310-356년)이되는 바탕이 되었다.흘해의 아버지인 석우로또한 자신의 대에서는 정상적인 왕위를 얻지못했지만,자신의 자식은 왕위에 오를수있었다.어찌되었든 석우로는 농담한마디 잘못했다가,나라간의 전쟁을 만들고,그책임으로 죽은 불쌍한 위인으로 삼국사기열전에 전해져온다.역사의 교훈은 말해주고있다.사람을 유쾌하게하고, 웃기게하는 농담도,때와장소에 맞지않으면,죽을만큼 된다는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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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열전에는 다양하고 재미있는 인물들의 생애가 나온다.그중에 머리에 사마귀가 뿔처럼 달려서 태어난 기이한 인물에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천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이야기속에 포함된 교훈은 오늘날에도 의미가있다.

신라의 중원경(충청북도 충주)에,아버지의 이름이 석체라는 사람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다.아이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머리에 뿔난사람을 봤는데,


태어난 아이의 뒷머리에는 사마귀처럼 생긴뿔이 튀어 나와있었다.



아버지 석체는 기이한 형상을하여 태어난 아들의 모습을 보구,역술가를 찾아가,아이의 운명을 물어봤는데,역술가는 사람의 얼굴에 난 사마귀는 불행이지만,머리에 난 사마귀는 길하니,큰 인물이 될것입니다라고 하였다.아들의 이름을 강수로 짓고,애지중지하며 키웠다.아버지인 석체와 아들인 강수의 대화를 통하여,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의미를주는 교훈을 살펴보자.


석체:너는 불교를 배워 국사가 되고싶으냐,아니면 학문을 배우고싶으냐?


 

강수:저는 세상학문을 배워 나라와백성을 위하여 일하고 싶습니다.



 

석체:네뜻대로하되,열심히 공부하여 나라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거라.




강수는 열심히 학문을 배워,20살이 되기도 전에,벼슬길에 나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되었다.강수의 나이가 20살이되자,강수의 아버지는 마을의 처녀들 가운데 얼굴이 곱고,집안이 좋은여자를 골라 장가를 들게하려고 하였다.그러나 강수는 어렸을적부터,천민집단이 모여사는 부곡에 대장장이의 딸과 마음이 통하여,정분을 가지고 사귀어왔기에,아버지의 중매에 대하여 간곡하게 거절을하였다.아버지 석체가 노하여 말하되


석체:너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귀한신분을 얻었는데,빈천한 아내를 얻는다면 내 꼴이
      뭐가 되고,부끄럽지도 않느냐?


강수:(아버지에게 공손히 절하며)가난하고 천함이 부끄러운것이 아니라,학문을 배우고 행하지
      않음이 더 부끄럽습니다.배움에서 이르기를,조강지처는 버리지아니하고,빈천할때의 친구는
      잊지 말아야한다고 하였습니다.이제 제가 귀하게 되었다고하여,천한 아내라고 버릴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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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사수대첩은 널리 알려져있지만,자세한내용은 전하지않는다.연개소문의 지략과용맹성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대첩이었는데도,여러가지 의문점을 남기는 기록을 보여주고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하여,사수대첩의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자.먼저 백제를 신라와연합하여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운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사수대첩이후로 죽음이 역사기록속에서 전혀 나타나지않고 있고,

살았다면  고구려 멸망당시에 70이넘은 이세적같은 늙은장수가 참가하는것을보았을때도 그러하고,또한 소정방이 고구려침략군에 직위만 바뀌고,항상 장수명단에 들어있었던 관례를보아도,


사수대첩이후에 행방이 묘연해지고,죽은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는걸보면 그의 죽음이 비참했음을 의미한다.사수대첩과 연관되어지는 또다른 당나라 장수가 당나라의 병부상서,오늘날에보면 국방부장관이라고 할수있는 임아상이라는 장수이다.이사람또한 사수대첩 기록이후로 전장에서 죽었다라고 짤막하게 기록되어있을뿐,어떤싸움에서 누구에게 죽음을 당했는지 기록되어있지않다.

소정방,방효태,임아상  3사람이 우연히 일치로,사수대첩이후로 역사속에서 사라져버린다.3사람에대한 기록을 찾아보고,사수대첩이 어떻게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는지 알아보고자한다.먼저,삼국사기에 나타난 연개소문,소정방,임아상,방효태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보장왕19년(660년)11월 패강도행군대총관 계필하력,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평양도행군대총관 유백영등으로 하여금,당나라는 여러갈래의 길을 따라 고구려를 침공하게했다.


 

보장왕20년(661년)4월 임아상 패강도행군대총관,계필하력 요동도행군대총관,소정방 평양도행군대총관등 35군을 수륙으로 나누어 고구려로 진군하게하였다.


 

보장왕20년(661년)8월 소정방이 대동강에서 고구려군사를 격파하고,평양성을 포위하였다.


 

보장왕20년(661년)9월 연개소문이 남생에게 군사를주어,압록강을 지키게하니,당나라의 군사가 넘어오지를 못했다.계필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했을때에는 강에 얼음이얼어있었고, 남생의 군사를 상대로 크게이겼으나,당나라에서 철수하라는 조서를 내려서,평양으로 진격하지않고 그냥 돌아갔다



 

보장왕21년(662년)1월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연개소문과 사수언덕에서 싸우다 군사가 전멸당했으며,함께참가했던 방효태의 아들 13명도 모조리 죽었다.이때 평양성을 포위하고있던 소정방의 군사는 폭설이 내려서,후퇴하여 돌아갔다.중국측기록에 662년 2월 전장에서 임아상이 죽었다라고 나온다



660년도의 당나라장수의 직책과 661년의 직책은 사라진 사람이보이구,기존직책을 살아남은 사람으로 재편되어 부여되고 있음을 알수가있다.평양도행군대총관 유백영은 11월에 고구려침략을 하는데,다음해 4월에는 소정방이 평양도행군대총관이 된것을보면,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11월에 고구려에 들어갔던 유백영은  전멸을 당했던지,대패를했기에, 5개월도 안되는 사이에 직책이 사라져버린다.이사람이 패전기록또한 기록되어있지않다.


소정방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킬 당시를 보더라도,바다를 건너 군사를 이동하였다는것이다.661년에 평양도행군대총관에 임명되어,고구려를 침략하는루트는 육로를따라 요동을거쳐 평양으로 진군한것이 아니라,바다를건너
수군을 이끌고 곧바로 대동강을따라,평양으로 들어갔음을 알수가있다.


임아상의 패강도행군대총관또한 소정방과함께 대동강을따라,곧바로 평양으로 진격했음을 알수가있다.나머지  요동도행군대총관 계필하력은 ,압록강을 통하여,육로로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했음은,연개소문이 계필하력군에 맞서기위하여,남생을 압록강수비로 보낸것을보면 알수가있다.


그렇다면,일반적인 고구려침공루트인 요동지역인 백암성,요동성,안시성등을 격파하고 내려온것이아니라,소정방,임아상,방효태,계필하력은,바다를 통하여,오늘날의 상륙전을 감행했음을 알수있고,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곧바로 진격했던 소정방과 임아상의 군대는 후방지원군의 식량의 도움없이는 완전히 고립되게됨을 의미한다.


그런데,고립된 소정방군과 임아상의 군대를 지원해줄 요동도행군을 이끄는 계필하력이 압록강에서 남생의 군대를 대파하고도,당나라의 철군조서를 받아서,돌아가버렸다라고 기록되는데,소정방군과 임아상군은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을상태라,멀리 떨어진 신라에게조차 식량도움을 요청하는 상태였는데,고구려의 남생군을 대파했다는  계필하력군이 진격을하지않고,이기고 돌아가버렸다는것은,앞뒤가 맞지않다.


육로를 통하여 요동을 거쳐 고구려로 들어올수있는 상태가 모두 막혀있었고,그나마 남아있는 압록강을 통한 당나라군의 진격또한,남생에의하여 저지되었다고 볼수있다.당나라군이 대승을한게아니라,남생군에게 대패를 했을 가망성이 많고,패배의 결과로 계필하력은 돌아갔을것이다.


그렇다면,왜 요동도행군총관인 계필하력은,소정방군을 지원하기위하여,곧바로 대동강으로 상륙한게아니라,압록강으로 움직였나하는 의문이생긴다.이것은 요동지역을 수비하고있던  고구려군사를,제압하면서 내려온게아니기에,계필하력군이 압록강에서 싸우지않았다면,평양성 깊숙이 들어간 소정방군은 요동지역의 고구려군사가 평양성을 응원하기위하여 남하 할수있기때문이라고 볼수있다.


그러나 계필하력군이 고구려의 남생에게 패하고 돌아가버리자,평양에서 고립되어진 소정방과 임아상군은 철수를 하지않으면,전멸당하게되는 상황에 빠졌다고 볼수있다.그렇기때문에,당나라에서는 이들을 구원하기위하여,긴급별동대인 20만명규모의 방효태군을 바다를 건너 배를 이용하여,직접 평양으로진격하여 들어가 도와주도록 했을것이다.


소정방군과 임아상군은 평양을 포위한상태라기보다는 꺼꾸로 고구려군에의하여 바다로 도망갈수도없는 퇴로가 완전히 차단된상태였다.이를 간파한 연개소문이,별동대인 방효태군이 배를타고 들어와서,사수언덕에 상륙하는 당나라군사를,전멸시켜버렸다고 볼수있다.1월에 연개소문의 사수대첩으로 긴급지원군인 방효태군이 전멸했고,2월에 임아상이 전장에서 죽었는데,임아상은 패강도행군총관이고,소정방은 평양도행군총관,계필하력은 요동도행군총관,그런데 이중에,계필하력은 압록강에서 남생에의하여,패전을했기때문에,계필하력은 고립되지않고 살아돌아갈수있었지만,소정방과 임아상은,이미 방효태군이 전멸당한 1월 이후에는,연개소문에 의하여 모두 전멸했을 것이다.


임아상은 662년 2월에 전장에서 죽었다라고 중국기록에 나오는데,패강도행군은 1월에 방효태별동대 군이 전멸당하자,고립되어있던 패강도행군또한 전멸당했을것이다.한달기간안에,임아상이 다른 전장에서 죽었다고는 볼수없겠고,사수대첩과 연결되어 패강도행군이 전멸당했다고 생각하는것이 이치에 맞다.


그리고 662년 1월 연개소문의 사수대첩과관련하여 소정방이 폭설인 자연재해때문에 철수한게아니라,사수대첩과연계되어,평양도행군또한 전멸해버렸을것이다.소정방이 죽음이 기록되지않은것은,그 죽음이 비참했기때문이고,고구려를 침략했던,소정방,임아상,방효태등 행군총관들이 연개소문에 의하여 모두전멸되어 죽어버렸다는 치욕적인 기록을 남기는게 창피했기때문에,직접적인 별동대인 방효태군의 전멸은 기록해두고,나머지 임아상과 소정방은  어떻게,어디서 죽었는지 역사속에 감춰 버린것이라고 볼수있다.


사수대첩은 완벽하게 당나라군대를 한사람 남김없이 전멸시킨 우리나라역사에있어,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스케일이 큰규모인 대첩이었음을 알수가있다.연개소문의 성격이나 지휘스타일상,고립되어 차단된 당나라군대를 온전히 돌아가도록할만큼,자비로운 장군이 아니었다.소정방이 역사속에서 사수대첩이후로 죽은기록이 사라져버린것은,사수대첩에서 그의군사들과함께 전멸해서 죽었거나,그에대한 책임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을가능성이 많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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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백제를 이길수있었던 이유는 김유신이라는 당대 세계최고의 명장이 있었기때문이기도 하지만,신라상류층이 위기상황에서 솔선수범하여,나아가 싸우는 싸울아비정신을 평소에 가지고있었기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나온 불영자의 기록을 토대로,신라의 싸울아비정신을 이해해보자.


진덕왕(647~654)=진덕여왕(왕의 이름 김승만)때에,백제의 정예 3만대군이 신라의 성을 빼앗기위하여,쳐들어온다.이때에 맞서싸운 신라의 장군이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신라 군사1만명을 이끌고 나아가,맞서싸우게되는데,백제의 군사들이 용맹할뿐아니라,정예화된군사들이었기에,신라의 군사들은 서로먼저 죽지않으려구,싸우기만하면 뒤로 도망가기가 바빴다.이때에 김유신은 땅에 떨어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위하여,특단의 전술이필요하였다.김유신은 위기상황을 역전시키기위하여,자신의 친구인 불영자를 막사로 불러 대화를 나누게된다.


김유신:추운 겨울이된후에야,소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것을 알게된다.죽음을 두려하지않고,나라를위하여 목숨바칠 정신을 보여줄때이다.나의 둘도없는 친구 영자여,술한잔을 받으라.


 

불영자:위급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음에도,오직 저를 선택하고  믿어주심이 ,진실한 친구입니다.그 믿음에 진실로 목숨을바쳐 보답하겠습니다.


두번 절하고 막사를 나와 그의 종 합절을 불러이르길,

불영자:내가 오늘 위로는 나라를 위하고,아래로는 친구를 위하여 죽을것이다.다만 걱정이있다면,나와함께 종군한 나의 아들 거진이 내가죽으면,나를 따라 죽으려할것인데,너는 그러한것을 막아,나의 시체를 수습하여,나의아들과함께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도록하여라.


 

합절:목숨을 바쳐 주인님의 명을 지키겠습니다.


말이끝나자마자,불영자는 말에채찍을가하여,창을들고 홀로,적진으로 들어가,목숨이 다할때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이것을 지켜보던 불영자의 아들 거진이,말을 몰고 홀로적진으로 나아가려하자 합절이 말고삐를 잡으며 말하였다.

합절:주인님께서 유언하시기를,도련님과함께 집으로 돌아가서,어머님의 슬픔을 위로하라구하셨습니다.이제 도련님이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어머니의 슬픔을 더하게하는것이 효도라고할수있겠습니까?


 

거진:아버지가 죽는것을보고도,구차하게 사는것이 그럼 효자이겠는가?


거진이 합절이 잡고있던 말고삐를 칼로 쳐내고,적진으로 들어가 싸우다 죽었다.이것을 바라보던 합절이
"내가 비록 미천한 종이나,대의를위하여 모두죽었는데,나만,구차하게 살아돌아가 무엇을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적진으로 홀로들어가 싸우다죽었다.


세사람의 죽음을보고,느끼는봐가있던 병사들이 앞다투어 진격하여 나아가 싸우니,백제의 군사들이 대패를하였다.대승을 하고난후,유신이 세사람의 시체를 거두어,자신의 옷을벗어 덮어주고,밤새 슬피울었다.


불영자의 이야기에서보듯이,신라에서는 나라가 위급한상황에서는 위에것들은 탱자탱자하면서,도망이나 가면서,졸따구들에게만  죽어도 막아라식이 아니라,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직접실천하는 모범을 보여,군사들의 사기를 높여다는것이다.


신라의 이러한 싸울아비정신은 자기가 아끼는 사람은,뒤에숨겨두고 도망가게하고,아래것들에게만 싸우게한것이아니라,자신이 가장사랑하는 사람부터,나라를 위하여 희생하는 솔선수범의 정신을 함축하고 있었기에,신라는 백제를 이길수가있었다.백제도 패망의 마지막순간에,걸출한 영웅 계백장군이 이러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지만,상황이 너무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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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봉상왕때의 창조리라는 사람에대한 기록이있다.

고구려에 흉년이들어,식량은부족하구,백성들은초근목피로 연명하며,정처없이 유량하는 백성들이많았다.


그러나 봉상왕은,황실의 위엄을보이기위해서는 궁궐을 크게지어야한다구 생각하여,전국에 15세이상의 장정들을 강제루 데려다 궁궐짓는 노역을하게하였다.


이에,고구려의 재상이었던 창조리가 봉상왕에게 충언을하였다.



창조리:폐하,백성이 곤궁하구,유리걸식을하며,노인과어린아이들이 굶어죽어가는 현실입니다.지금은 하늘을 두려워하구,백성을 불쌍히여겨,스스로를 경계하여야할때입니다.폐하께서,이러한현실을 외면하시구,궁궐짓는일에 백성들을 동원하는것은 올바르지않다구 생각합니다.



 

봉상왕:황제가 사는궁궐이 허접하면,지나가던 개두 나무랄것이아닌가,궁궐이 화려하지않으면,위엄없게된다.그대는 나를 비난함으로서,백성들에게 인기를얻으려는것이 아닌가?



 

창조리:폐하가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않는것은,어질지않음이옵니다.이러함에두,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않는것은 불충이라구 생각합니다.



 

봉상왕:으하하하,네가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기전에, 내가 너를 죽일수있다는걸 모르느냐? 더이상말하지말라.




이후 창조리는 봉상왕이  백성들의 곤궁함을 살피기보다,일신의안위와 잘먹구,배터지는길만추구하므로 ,신하들과 모의하여 거사를 일으켜,봉상왕을 패위시킨다.거사날 봉상왕은 주위의 모든사람에게,자신을 도와달라구 구원을 요청해지만 아무도 봉상왕을위하여,나서는사람이없었다.이에 모든것이끝날걸 안 봉상왕은 스스로,나무에 목메어죽었다.



우리나라는,신분의차이가 엄격한,봉건왕조시대라구해두,임금이 어질지못하면,신하와백성들에의하여,폐위를 당하였다.그런데 북한의 뽀그리는,봉상왕보다 더 악한일을 많이했음에두,창조리같이 충언을하는 인간이 단1명두없는 체제라는것은,사상이나 문화나 사회적의식의 문제가아니라,근본적인 무엇인가,우리나라의 민족성과는 다른 괴상한 짱개의피가 그속에 흐르구있다구봐야한다.바꿔말하면,북한의체제는 사람의영혼을 말살해버렸다구 볼수가있다.북한을 6글자로 요약하면,"로보트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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