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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구가하기위해서는 지도층을 상시적으로 도륙내어야한다는 운명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아버지를 보며 두려움에 떨던 맏아들이 “아버지를 도운 지도층인 공신이나 고위관료들을 더 감싸고 보호해줘야지 왜 공신이나 고위관료들을 개미목숨보다 더 하찮게 공포가 사무치도록 상시 도륙을 하십니까?”물으니 주원장이 말했다.

내가 엄하게 도륙하는 사람은 성 밖의 없이살고, 힘없는 백성들 중에서 그리하는 것을 보았느냐? 지도층을 대대적으로 상시 도륙했더니, 결과는 백성들이 못살고, 굶주리는게 아니라, 오히려 지금까지 있어왔던 어떤 왕조들보다 백성들이 삶의 지표들이 나아지고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원장의 이러한 운명의식은 부패한 사회지도층에의한 탄압으로 부모가 모두 굶어죽었을 정도로 피폐한 삶을 어릴 적부터 살았던 주원장은 그 자신이 인생이 제일 밑바닥부터 최고의 지존인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동안 터득한 경험에서 나왔음을 알 수가 있다.

 

 

이방원: 이씨왕조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서 그것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외가이든 친가이든 상관없이 모조리 도륙했는데 이러한 골육상쟁의 모습을 지켜보던 맏아들이 “ 혈육의 정은 천륜인데 어찌하여 골육을 도륙하면서 국가의 충효를 논하십니까? 물으니 이방원이 말했다.

내가 엄하게 외척이나 형제들을 살육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이씨왕조의 탄탄한 초석을 만들어 만대에 이어지길 기원하기 때문이다.

이방원의 이러한 운명의식은 근본에 있어 열등의식이 존재하였기 때문인데, 조선을 건국한 이씨왕조의 피의 근본이 고려의 풍습을 간직하고는 있었으나 여진의 풍습과 혼인관계를 바탕으로 성장한 성씨였기에 국가도 백성도 그런 것보다는 더 우선적으로 이 씨라는 성씨의 왕가의 전통이 이어짐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였기에, 국가가 어떻게 되던, 백성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이 씨 왕가가 우두머리로 남을 수만 있다면 어떤 짓을 하든 상관없이 그것을 지키고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왕위를 계승하여 이어가는 것이 운명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아버지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러한 질문을 했던 맏아들은 공통적으로 모두 왕위를 이어받지 못했다.

 

 

주원장과 이방원은 동시대의 사람으로 서로의 운명관을 가지고 만나게 되는데, 한사람은 중국을 통일한 황제의 신분과 이러한 명과 일전을 벌일 것인지를 놓고 탐색하는 요동정벌론을 주장하는 정치 상황을 맞이한 조선의 왕자신분으로 만나게 된다.

농민에서 황제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중국을 통일하여 황제가 된 주원장조차도 조선을 침공하여 정복하는 것도, 그렇다고 가만히 나두는것도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지리적 위치였다. 중국을 통일하였다해도 몽골지역에는 여전히 원나라의 조정인 북원이 남아있었고, 요동지역에는 여진이라는 야인들의 세력이 강했기에 잘못 판단했다가는 수나라처럼 통일 중원제국이 하루아침에 조선이라는 나라 때문에 사라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비상했던 주원장은 조선이 명나라를 칠 용기도, 패기도 없는 왕조라는 것을 간파하고는 조선을 침공하여 국가의 흥망성쇠의 도박을하는것보다는 주둥아리로만 위협하여 여진과 몽골을 적대시 할 정도의 상태만 만들어 놓으면 좋다고 생각했기에, 조선사신이 오면,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서 억류하거나, 참수를 하여 분하면 쳐들어 오던가라고 패기 없는 조선이라는 왕조를 조롱하며, 조선이 스스로 비굴하게 굽혀서 엎드리도록 길들였다.

이방원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원장을 만났을 때 주원장은 이방원을 환대하고, 이방원은 주원장을 받들어 사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굳히게 되는데, 주원장이 이방원을 환대한 이유는 주원장의 의도를 간파한 이방원이 조선의 개국에 일조했던 여진을 적대시하고, 요동의 권리를 명나라가 관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의 개념 밥말아먹은 사대의 자세를 취하겠다는 의도를 확고히 했기 때문이고.

이방원이 주원장을 받들어 사대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굳힌 이유는 주원장의 명나라는 조선에 있어 이씨왕조를 이어가는데 침략하여 정복하고자하는 생각이 없음을 간파했기 때문에 나라의 땅이 어떻게 되던, 백성이 어떻게 되든 이씨왕조인 조선이 대대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에 부합한 인물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대선이 다가오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시대적 정신이 주원장 같은 사람의 운명관이 필요한것인지,아니면 이방원의 운명관이 필요한것인지 생각해볼만하다. 주원장은 명분이나 체면을 위하여 억지가 아닌 스스로가 원나라를 승계한 왕조임을 천명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방원의 조선은 명분과 체면을 위하여 고려의 왕으로부터 선양을 받는 형태로 왕조를 바꾸면서, 실제적으로는 고려왕조의 왕 씨들을 남김없이 한데모아 수장시켜 도륙해버리는 태생부터 겉모습과 속모습이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이러함에 주원장은 조선을 보는 것과 이씨왕조를 보는 것을 구별하여, 조선이라는 국가는 함부로 할 수 없지만, 이씨왕조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배역왕조이다라는 관점을 명나라의 후대 황제들이 가지도록 역사를 기록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조선왕조 600년 동안 이어져온 겉 다르고 속다른 이중적형태의 뒤통수들이 잘먹고 잘살면서 정의인냥하는 부정적 인물상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하나의 나라의 우두머리의 운명관을 선택할것인지  아니면, 세계의 중심 코리아의 운명관을 선택할것인지는 역사속에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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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대왕 유리왕은 주몽의 아들로 예씨부인의 소생이었다.


주몽에게는 많은 부인이 있었으나,부여에 있을때 결혼하여 태어난 맏아들인 유리가 자신을 찾아오자,여러 왕비들과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리를 태자로삼아 고구려 2번째왕이 되게하였다.


역사속에서 유리왕의 발자취는 고구려의 옛시조인 황조가라는 시조가 전해 내려오고있는데 유리왕은 남녀의 운우지정에는 관심이 많은 왕이었으나,자식과 나라일에 관해서는 망조의 왕이었다.



유리왕의 첫번째 아들이며 태자인 도절의 죽음은 유리왕때문이었다.고구려가 아직 나라의 깃틀이 잡히않아,부여가 더 강할때였기에,부여의 왕은 고구려의 태자를 볼모로 보내기를 원했고,유리왕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태자 도절을 볼모로 부여국에 보내려고했으나,도절은 죽어도 볼모로 가기싫다고 거절했기에,아버지인 유리왕의 미움을 샀고,그일이 있은후 6년만에 세상을 떠난다.

다시 두번째 아들인 해명을 태자로 삼았으나,해명또한 아버지인 유리왕의 미움을 사 스스로 달리는 말위에서 창을 땅에박은후 자결하였는데 그 이유또한 이웃나라의 왕에게 자신의 아들이 밉보여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태롭게하였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하였다.이처럼 유리왕은 자신의 두아들을 이웃나라와의 관계에 도움이 되지않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게하였는데,

유리왕의 이러한 처사는 자신의 아버지인 주몽의 호방하고 ,주위나라에 당당하게 맞써 싸웠고,주위에 신하와 왕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속을 천금같이 여겨 유리를 태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어준 고주몽이 이룩한 고구려제국의 기상과는 전혀 딴판인 모습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아들들을 쳐죽이면서,그와반대로 여자들 문제에있어서는 "훨훨나는 저꾀고리 암수 서로 정겹구나......."이따구 희희낙낙하여,역사에 전해지는것을 보았을때 유리왕은 애시당초 고구려제국을 건국한 고주몽과는 전혀다른 기질을 가진 별종의 아이였거나,돌연변이가 아니라면 고주몽의 핏줄이 아닐가망성이 매우 높다.

두명의 형이 이웃나라와의 관계때문에 처참하게 죽어가는것을 보았던 유리왕의 세번째 아들이 있었으니 이사람이 고구려의 전후후무한 전략과 지략의 군신으로 추앙받게되는 대무신왕이다.후에 대무신왕이되는 무휼은 아버지인 유리왕에게 자신의 주장을 해보지도 못하고 어처구니없게 죽어가는 형들의 모습을 봐왔기에 형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게된다.

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고구려의 유리왕을 찾아와서 꾸지고,가르치기에 또다시 유리왕은 굴복하여,부여의 요구대로 잘따르는것이 만복이 근원이될것이다라고 말하자,무휼은 부여의 사신을 따로 불러내어 말하데,"고구려를 무시하는 너희 부여왕 대소가 문제이다.칼에는 칼로써 맞써겠다"고 꾸짓고 사신을 돌려보내자,이를 들은 유리왕은 전철의 태자들처럼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망치다는 명목으로 벌을준게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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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휼의 기상에 놀라 잠자코 따르게되는데 이후로 부여와의 전투는 무휼이 직접나아가 싸우게되고,무휼이 고구려의 3대왕에 오르고나서도 이웃나라의 칼에는 칼로써,예의에는 예의로써 화답하여 죽을때까지 이웃나라와의 전쟁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고 승전했기에,백성과 신하들이 군신으로 추앙하여 고구려의 군신 대무신왕이 되었다.

고구려 왕들에관한 많은 이야기와 내용들이 있었을 것인데,다사라지고 고구려의 기상과는 전혀 딴판인 왕이었던 유리왕이 여자와 희희낙낙했던 시조가 삼국사기 기록속에 남아전혀지는걸 보면,자신의 아들의 잘못에는 추상같이 자결을 명령하는 사람이 "여자싸움에는 이내 몸은 외롭구나" 이따구 시조를 써서 자랑스럽게 기록했다는것은 그당시 상황과 이웃국가간의 대처능력을 보았을때 허구적인 내용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황조가의 작자가 유리왕이라고하더라도 이러한 고구려기상과는 전혀딴판인 왕의 시조는 교과서에서 가르쳐 배우게할 교훈적 가치가없으며,후세에 전혀 모범이 될수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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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속의 역사드라마나 사극들을보면,기껏해야 궁궐밖에서 문을 지키는 병졸들이나 포도대장정도만이 칼을차고 있는 모습이고,

왕들앞에서는 모두 유약하게보이는 유교문신들만이 대가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인다.

문치의 시대라는 조선시대,그중에서 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던 세종조의 기록을 통하여 오늘날 tv속의 역사드라마처럼 왕의주변에 칼을차고 서있는 사람들이 없었는지 살펴보자.

세종14년(1432년) 세종과 신하인 권맹손과 나눈 대화는 이러했다.



세종:중국은 무신만이 칼을차고 시위하는게아니라,일반신료들도 칼을차지 않는사람이 없다하고,아버지인 태종때에도 중국에 사신으로갔던 정역이 아래기를,중국의 신료들은 모두 칼을 차고있습니다라고 했는데 그러지 아니한가?



 

권맹손:중국에서는 그렇게하고 있사옵니다.



 

세종:그런데 왜,우리나라에서는 무반재상들조차 칼을차고 다니는것을 부끄럽게여기고,들고다녀야할 칼을 시종에게 들고다니게하니,이게 뭔꼬라지냐,왕앞에서 신하들이 시위할때 칼을 차는 문제에대하여 격식을 정하여 아래도록하여라.



세종대왕의 분부에의하여 세종14년(1432년)10.29일 병조에서 신하들이 궁궐에 들어올때나 시위할때 칼을차는 문제에대하여 격식을 정하여,왕에게 아래었다.


"중국의 대소무관은 모두 칼을차고 다니는데,오직 우리나라 무관만이 입직과 시위할때 칼을 차고있지않고 2품이상의 무관이 되어도,별운검이외는 칼을 들고다니지 않으니 잘못된것으로 생각합니다.앞으로는 품계와 상관없이 무관은 칼을차고 시위하도록하고 유신이라도 무관직을 겸하는경우는 칼을차도록 제도화하는것이 좋겠습니다하니,세종이 이르기를 제도화하여 지키도록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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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이러한 혜안은 뒷날의 엄청난사건의 성공과실패의 단서가되는데,세종의 아들문종 그리고 문종의 아들 단종대에 이르러,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제거하기위한 사육신사건이 일어났다.이때 무관으로 칼을차고 왕을 시위하던 사육신중의 한명이 유응부였는데,명나라 사신을위한 연회를 창덕궁에서  베풀고있을때 재수없게도 한명회의 충고를받은 수양대군이 그날따라 칼을찬 무관이 시위하는것을 하지말라고하여,결국 사육신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게된다.


세종이 좀더 엄격하게 제도화시켰다면,손자가 불행하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수양대군에게 죽게되는일을 막을수도 있었을것이다.어찌되었든 역사드라마에서 유약한 신하들만이 기립하여 서있는 모습은 그당시 실제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점이다.조선시대의 왕앞에서 칼을차고 서있는 무관신하들도 있는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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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요 10조중

8조 차령산맥이남,금강밖은 배역의 산형지세이므로,그지역의 인물을 조정에 등용하지말것

차령산맥:태백산맥의 오대산 부근에서 분기되어 충청남도의 중앙부를 거쳐 서해안의 금강 하구에 이르는 중국 방향의 산맥

금강: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의 신무산(神舞山, 897m)에서 발원하여 군산에서 황해로 흘러드는 강






943년(태조 26)에 신하 박술희를 어전으로 불러 친히 고려태조인 자신의 정치이념이면서,
고려의 집권이념인 훈요10조를 전수하였다.

배역: 은혜(恩惠) 따위를 저버리고 거스름

실생활에서보면 배역은 뒤통수친다라는 의미로 볼수가있다.

무려 1100년전의 고려태조가 배역을 경계하며 조정에 등용치말라는것은,의미가 심장하다
갑자기 오늘날의 시류에서 생겨난게아니라,그기원이 korea의 시조 태조였다는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우리는 개만두 못한인간이라구한다.
고려,즉 korea의 영문명이 기원이되는 고려를 창업한 태조가,오늘날의 영문명인
korea는 고려시대에 서양에 알려졌기에,한국의 의미인 korea는 고려에 그기원을
두고있는 국가명임을 알수가있다.


무려 1,100년이 흘러었두,아직두 변한것이없구,지역색이 오늘날에두 나타나구
있다는것이다.세계에서 그유래를 찾아볼수없는 악독한 독재자 김정일정권이
핵무기를 갖게해주고,그정권을 유지할수있도록 도와준 이 죄는 하늘에 다았다.
이것은 배역보다 더큰 민족에대한 반역이다.

잘못꺼구로간 역사를 바로잡구,자유와정의에 바탕을둔 민족정기를 북한동포들에게
두 누릴수있도록 되살려놓아야한다.

자유와정의는,외면해서 얻어진경우는 한번두없었다.외면하구 도와주면 잘될것이라는
엉뚱한 역사의 반역의 댓가는 너무나 참혹한 북한동포의 삶을 만들어놓았다.
자유와정의를 억압하여 백성들을 300만명이나 굼겨죽이구,수십만을 고문하구 살해하구,
수용소에 가두는 세계에서 그유래를 찾아볼수없는 악독한 김정일정권을 거슬리면 싸움이
일어나며,피해를 본다느니,전쟁이나면 피해가크다든지라는,염병할 논리루,도탄에 빠진
북한동포의 삶인 자유와정의를 외면한 그죄는 아무리좋은명분을 같다붙인다해두,
반역이며
민족에대한 배역죄다.


사신은 논한다.

역사의 물줄기를 꺼꾸러 흐르게했던 지난 10년간의 정권은
민족적인 시각으로 봤을때 반역이며,배역이라구 볼수가있다.그러나 이것을 햇볏정책
이라는 너울로 덮구,북한동포의 자유와정의를 외면한 그죄는,그 10년동안에 죽어간
북한동포가 300만명이 넘는다는것은,북한동포를 도와준게아니라,백성을 도구로 이용
해먹은 악독한 김정일정권을 도와줬다구밖에 볼수가없다.

북한은 월드컵경기에두,우리나라의 태극기나,애국가는 연주하지말라구한다.이것이
지난 10년간의 상호존중정신이 결과인가? 인공기는 게양하라구하구,자신의 국가는
연주하라구하면서,이것은 김정일정권이 하나두 변하지않았다는것이구
korea의 실체를 인정못하겠다 말과 다름이아니다.


햇볏정책이 북한동포를 진정도와줬는가? 아니면 압제와 고문에 더욱
고통받아 더많은 우리동포들을 죽게만들었는가? 300만명이 죽었다는데,햇볏정책이
무슨 우박만쏫아서 다들 얼어죽게했는가? 차라리 엄격한 잣대루 승부를 벌였다면
30만두 안죽었을것이다.또한 악독한체제자체가 바뀌지않구,개혁과개방이란 말조차
에두 두드러기가 생길정도의 김정일정권에게는 아무리 좋은것을 퍼다준다해두
더많은 북한동포의 죽음이 이어질것이라는점이다.

역사를 꺼구로 흐르게한 죄는,배역이며 반역이다.그러한것을 옹호하는 어떠한
논리두,10년동안 300만명이 굼겨죽인 그원혼을 달랠수가없다.

사신은 결론을 논한다.

반역이며,주댕아리며,배역이며,민족적수치이며,역사를 꺼구로돌린 햇볏은
300만명을 죽인데,협조한 정책이라 판단한다.

여기에 동조했던 어떠한 세력들두,모조리 처단받아야한다구 생각하며,이러한
반역사적인일이 다시는 생기지않도록해야한다.

우리나라가 새롭게 전진하는 의미인 korea와 고려는 그의미가 같다.
반역을 뭉개구,올바른 대한민국의 정도를 가야할때인것이다.

지역색을 논하자라는 의미가아니라,잘못된 지도자의 정책은,역사의 물줄기를 꺼구로
흐르게하는 배역을 만들어낼수가있다는점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정이나 개인적감정에 얶메일때가아니라,회초리를 들어야할 때라는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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