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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은 북한을 망하게하는법인가,국민을 절름발이로 만드는 법인가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국가보안법의 피해를입고,탄압을 받았던 사람들이 대통령이되고 장관들도 되고 사회.경제 각부처의 주요인사들이 된지,

군부독재가 타도된이후로 강산이 두번 바뀌는 20년이 넘었다.그런데도 2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정권을 잡은사람들은,

권력을 쥐면 권력이 달콤한인지,갇다붙일 코걸이와 귀걸이의 통제의 편리함인지 악법이라고 그렇게 외치던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않았다.


과연 북한을 망하게 할수있는법이 국가보안법인가라고 보면,전혀 그런거같지 않다.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의 기록을 살펴보았을때,아무리 공고한 정치.경제 사회신분질서가 고착화되게 독재체제를 만들었던 시대라고해도,민심과 역행했던 지배계층은 백성이나 신하의 손에의하여 처단되어졌다.

우리나라의 근래사를 보더라도 국민에의하여 부패대통령을 강제로 쫓아냈던 경험이 있으며,군부독재도 국민의 힘으로 타도했던 경험도 있다.이것은 우리나라의 국민의 자산이며,민족성이다.

간첩을 잡고,북한을 망하게하는 법이라는 국가보안법은 지금까지 국민을 잡았고,엉뚱한 사람들의 사상과가치관을 빨갱이로 몰아 국민의 양심의 자유와 인권을 절름발이로 만든 악법일뿐이다

간첩이 대놓고 간첩이라고 하겠나,뒤에서 은밀히 숨어서 활동하거나 조정하는 진짜간첩은 국민의 눈에는  전혀 딴 평가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결과적으로보면 공개적으로  "빨갱이"라고 매도되는 99,999%는 북에서 직접 걸어내려온 간첩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멀쩡한 국민들이라는 점이다.

북한의 체제는 국가보안법으로 망하게할수있는게 아니라,자유와인권 보호법일것이다.그리고 북한의 백성들이 한민족의 역사를 공유해왔던 민족성을 가졌다면,한민족의 동일한 피가 흐르고 있다면 시간이 다소일뿐 사필규정에의하여 북한의 폭악적 독재정권은 붕괴될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국가보안법이 지켜온게아니라,일반 민초들이 지켜온것이고,앞으로도 그럴것이다.자유와인권에 대한 국민적 경험과가치관이 성숙되고 높아졌음에도,오히려 국가보안법의 편리한 통제성을 핑계로,덜떨어진 국민성을 가졌다고 우기는꼴일 뿐이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상관없이 국가보안법이 오늘날 민주화된 대한민국을 지켜줄것이라고 믿는사람이 있다면,그런사람에게는 짱돌을 던져주고싶다.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할 때가 되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우리나라의 국가보안법은 북한의 폭압적 독재정권이 존재하는 특수성에 대항한다는 의미는 이미 존재가치가 없다.오히려 국가보안법은 국민의 양심과자유를 절름발이로 만들고 통제의 편리성이란 악법의 기능만을 담당하고 있을뿐이다.

북한에 대항할수있는법은 자유와인권의 강화와 국민의 자유와인권에대한 정부의 확고한 의식과가치관,그것이 북한을 붕괴시키고,우리나라의 미래가 밝은것이지,병맛같은 대가리만 그럴듯한 허울데기 명분을 가진 국가보안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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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왕중에 전투의 신으로 불리우는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은 주몽의 손자이다.대무신왕은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이름은 고무휼이었고,서기 4년에서-44년까지 살아 이른 나이인 40세에 죽었지만,그의 재위기간은 27년으로 짧지는 않았다.

11세에 태자가되고 15세에 아버지인 유리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특이한점은 대무신왕의 두번째 왕비의 아들중에 호동왕자가 있었고,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첫번째 왕비의 모함으로 ,스스로 자결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게되는데,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있다.



역사기록에 나타난 대무신왕의 행적을 살펴보면, 대무신왕 3년 봄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그해 겨울 10월에 부여왕 대소가 몸은 두개이고 붉은머리가 하나인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왔다.고구려가 부여에 병합되는것이 마땅하다는 의미로 보낸것이었다.


이에 대무신왕은 붉은 까마귀에 대하여 해석하길,두나라가 합쳐지는 의미를 가진것은 맞으나,그 새가 나에게로 보내줬으므로,나에게 길한징조이다 라고하였다.


대무신왕 5년 2월에 부여국의 왕인 대소를 잡아 죽였다.대무신왕 9년 10월에 개마국을 쳐서 멸망시키고,스스로 항복한 구다국을 병합시켰다.


대무신왕 15년 11월에 둘째왕비의 아들인 왕자 호동이 스스로 칼을 세워 엎드려 자결하였다.대무신왕 20년 낙랑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대무신왕 27년 10월 고무휼이 죽자,대수촌언덕에 장사를 지내고,시호를 대무신왕이라고 하였다.대무신왕의 뒤를 이어 동생인 민중왕이 고구려 4대왕이 되었으나 재위 5년만에 죽었다,


고구려 5대왕은 대무신왕의 맏아들이 왕위를 이었다.이왕을 모본왕이라고하는데,오늘날로 보면 개망나니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서,아버지인 대무신왕은 나라의 부강과 번영을 위하여 온힘을 기울여 싸웠다면,그 아들인 모본왕은 자신의 백성과 신하를 잡아죽이는데 온힘을 기울이다,신하인 두노의 칼을 맞고 재위 6년만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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