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군사
kungmi
2012. 1. 26. 21:31
2012. 1. 26. 21:31

고구려의 제도와 풍습을 이은 발해의 주축군은 고구려기병이었는데,고구려기병과 발해기병은 모습은 같았다.
사극에서나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갑기병이 고구려의 기병으로 묘사되는데 순전히 엉터리다.
유목민족은 빠른 공격과 기동성을 위하여 식량조차 말린고기를 휴대할정도로 무게에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말에다가 쇠갑을 입히고,군사들의 몸에는 철갑을 입혔다는 그러한 철갑기병은 전투와는 전혀 맞지않는다.유럽의 기사들이 훈족이나 기타 몽골기병을 이기지 못한것은 차림새부터가 정반대였기 때문에 철갑으로 무장한 유럽기병이 전멸할때 맨몸인 빠른 유목기병은 거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철갑기병의 용도는 전투용도가 아닌 유목기병에 있어서는 의전이나 행사용이지 실전기병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구려와 발해기병은 적과 싸울때 정면으로 부딪치는게 아니라 항상 측면으로 일정간격을 유지하며,적의 측면과 정면을 돌아가면서 빠른속도로 움직이며 활을 쏘고 치고빠지는,치고빠지는 전술이고 결국 상대군사가 절대적인 열세라고 판단되어질 때서야 기동력을 멈추고 나머지 군사를 쓸어버렸다.
자연으로보면 정면으로 돌격해 들어오는 멧돼지를 정면에서 받아쳐서 승부를 보는게아니라,정면으로 들어오면 옆으로 갈라지고,옆으로 들어오면 다시 횡으로 갈라지고,결국 어떻게든 정면승부를 할수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데 이러한 전략을 구사하는 기병은 상대편보다 월등하게 기동력이 빨라야 하는데 철갑을 두른 유럽풍기사들은 거이 학살수준으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하게 되었다.
대등한 기동력의 기병과 만났다면,이럴경우는 정면승부를 할수밖에 없는데 이때를 대비하여 고구려기병은 대도와 함께,활의 거리와는 비교할수 없는 단거리에서 던질수있는 단검을 다리와 양옆구리등에 지니고 있었다.
고구려기병의 기본휴대칼의 갯수는 6개이다.단검과 장검을 휴대하는 고구려기병뿐만 아니라 동이족을 이루는 몽골족도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할수가 있다.고구려와 발해의 기병은 싸움을 위하여 필수적으로 여러개의 칼을 휴대하는것이 군사의 기본무장이었고,머리에 철갑투구를 두르는것도 전혀 맞지 않는 고구려기병의 모습이고,
머리에는 천으로 두른 모자정도에 새의 깃털을 꼽아두른 정도로 단순했다.거란이나 여진등의 유목기병들이 머리카락의 앞 이마쪽을 완전히 밀어버리는 스타일을 하는것도 멋있으라고 하는게 아니라 말을타고 바람을 가를때 앞머리의 머리카락이 휘날림으로 인하여 시야의 제약을 받기에,상대방보다 기병 전투력의 장점을 유지한다는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고구려.발해기병은 머리를 밀어버리는 풍습을 행하지는 않았지만,기병의 자존심인 고구려기병이 머리에다가 철투구를 쓰고,말에다가 철갑을 입히고 싸웠다는것은 아예 동이족임을 포기한 모습이다.이럴 가망성은 거이없고,한곳에 완전히 정착하여 살았던 농경풍 유럽의 기병이나 중국 한나라처럼 농경기반의 기병들은 머리에다가 투구와 철갑을 두르는게 이상할것이 없지만 사냥이 의식주고,전투가 삶인 고구려기병의 머리는 두건정도 그이상은 실제적인 고분벽화모습이 그려져있지 않은한 그러한 경우가 없다라고 하는것이 옳다.
kungmi
2012. 1. 21. 17:44
2012. 1. 21. 17:44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에게는 무예에가 뛰어난 광개토태왕를 닮은 아들들이 있었으니 발해2대왕이되는 무왕 대무예와 그의 친동생 대문예다.
대조영이죽고 2대 황제로 즉위한 대무예(676-737)는 국가의 튼튼한 기틀을 마련한 조선의 태종처럼,국내외의 상황들을 정리해야할 임무가 주어질수밖에 없었다.
당나라의 현종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로 영속되는것을 마땅치않게 생각했으며,신라의 성덕왕또한 고구려의 영토의 주인을 자처하면 발해와 대립하며 영토를 확장하는데 노력하고있었다.
726년 당나라는 백두산과 연해주부근에 근거를삶아 세력권을 형성했던 흑수말갈족을 이용하여 발해의 세력이 팽창되는것을 견제하고,아울러 옛고구려영토의 일부라도 간접적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였다.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발해의 무왕은 자신의 대에서 고구려 패망의 원흉이며,한민족의 천년원수인 당나라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계획한다.
먼저 내정의 안정을위하여 당나라와 손을 잡은 흑수말갈을 제압하기위하여,황제의 군령권을 발령하여 동생인 대문예를 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정예기병 5만의 군사로 흑수말갈을 제압하라고 하였다.이에 대문예가 상소하여 말하길"소신이 당나라에 숙위하며 당나라의 국력과 나날이 발전되는 정세를 그동안 보아왔는데,흑수말갈과의 전초전으로 당나라와 대립하여 전쟁를하려는것은 발해의 국체를 어렵게 할수있기에 재고해주시길 바랍니다"이에
인안황제인 무제가 꾸짓어 가로대"너는 당나라의 강함만을 두려워하고,고구려의 혼은 잊었으냐?,평화는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가 있을때 지킬수 있는것이다.여기서 굴복하기 시작한다면 후대의 기틀을 기약할수없음을 알고 출전하라."대문예는 내키지않는 심정으로 흑수말갈의 제압을위하여 백두산쪽으로 나아갔다.
오늘날에 보았을때 이 흑수말갈은 중국대륙을 삼킨 건주여진이 일족으로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갈래이며 조선 인조임금의 대갈박을 땅에 두드리게했던 삼전도의 주인공 청태종의 속한 갈래이기도 하다.
흑수말갈의 경계선에 다달을쯤에 다시 대문예는 전령을 통하여 상소를 올리며 회군하기를 청한다.이에 분노한 무제는 즉시 군사령관을 대일하로 바꾸고 임지로 나아가게하고,대문예는 궁성으로 돌아오라는 소환명령을 하게된다.이에 대문예는 돌아가면 황제의 군령을 어긴죄를 지게될까 두려워 당나라로 투항하여 도망을갔다.
나라를 끝까지 지켜야할 지도층 장수가 먼저 당나라에 투항해버리는 어이없는 상황에서 흑수말갈과의 싸움은 싸워보기도전에 무너져내리게된다.패전을 접한 무제는 당나라에대하여 친동생인 대문예의 소환을 요구하였으나,당나라현종은 오히려 대문예에 당나라 대장군의 벼슬을주며 우대하였다.
이에 발해황제 대무예는 신하들을 모아두고,발해국 국체의 안위를 모두걸고,당나라와일전을 할 뜻을 비추며"우리선조의 나라 고구려가 망할때 형제들의 대립을 이용하였듯이,오늘날에 와서도 똑같은 정책으로 우리발해를 망하게하려는 의도를 숨지지 않고 있소,이에 이후로 당나라가 발해를 건드릴 생각조차하지 못하도록 전멸적 보복을 가하도록 하려고 하며,이싸움에 유불리논하면 개전을 머뭇거리는 신하들은 짐에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겠으며,2년내에 정벌준비를 완료하도록 하시오"
발해국의 문무신하들은 당나라의 정세염탐과 주변국들과 전략적 선택을 추진하게된다.이때당시 거란은 당나라에 복속하여 굴종의 평화를 얻으려는 세력과 투쟁하려는 세력간의 타툼속에있었는데 발해는 강경파의 우두머리인 가돌한을 적극지원하여 당나라의 복속을 받아드리려는 온건파 이소고를 처단하게한다(730),
거란과 돌궐세력들을 발해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만들기에 2여년을 공을드린 732년 9월,무제는 장문휴(693-749)장군을 수군원수로 삼아 발해정예수군 2만명과 함께,당나라 동북아 수륙합동군기지인 등주(산동성 봉래현=중국 칭다오=청도)을 선제공격하도록 명령하고,아울러 동시에 무제는 직접 수륙합동연합총사령관의 직책을 가지고,발해 고구려기병 5만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진격해 드러간다.
먼저 선제공격 별동임무를 맡은 장문휴장군이 이끄는 발해수군은 압록강하구를 출발하여 등주에 도착하여
상륙작전을 개시하자,등주에는 당나라군 10여만명이 지키고있었으나,기습적인 공격에 당나라군은 사분오열 흩어져 도망가기에 바빴고,등주자사 위준또한 대적하여 전열을 정비하여 싸워보지도못하고,목이 달아났다.
등주를 점령한 장문휴장군이하 병사들은 등주에 살아있는 모든것과 건물들을 완전히 전멸시켜 이후 등주가 복구되는데 당나라의 국고의 대부분이 소비될 정도로 참혹했다.당나라 현종은 이러한 전황를 전했듣고 즉시 장군 개복신으로하여금 지원군을 이끌고 등주로 내려보냈지만,개복신이 도착했을때에는 상황이 종료되고 모든것이 폐허가 된 이후였다.
육로쪽으로는 대무예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북경쪽으로 진격해 들어온다는 전령을 들은 현종은 대문예를 사령관으로여 2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가서 대적하도록하고,급히 신라의 성덕왕에게 도움을 청하여,발해의 남쪽방향을 공격해주도록 요청하자,성덕왕은 이기회를 이용하여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에대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해달라는 요구조건을 선행하자,당나라현종은 상황을 타개하고자 요구조건을 들어주었다.
이에 성덕왕은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에게 3만의 군사를 주며 밀명하길"발해국의 무왕은 선조인 광개토태왕의 환생이라고 할만큼 군신으로 불리는 인물이고,서로말이 통하는 백성들인 발해와 우리는 같은 뿌리이기에,싸울일이 생기면 피하고,피할수없는 상황이면 후퇴하여 도망해도 가하니 공격하는 척만하도록 하라."
대문예와 출전하는 당나라군사들은 발해국의 무제가 직접 친정하여 공격한다는 소리를 듣고,싸우기도전에 이미 사기가 땅에 떨어져,발해국의 군사들을 만나기도전에 80-90%가 추위에 죽거나,도망을 가버려,대문예는 싸워보기전에 철군할수 밖에 없었다.
김윤중의 이끄는 신라군또한 당나라군의 전세를 이제나 저제나 지켜만보다가,후퇴했다는 전황을 듣자마자,행군방향을 바꿔 신라로 돌아가 버렸다.발해황제 대무예가 이끄는 육로군은 북경근방까지 진격하여 정복한후,이후로 발해가 멸당할때까지 발해영토로 지배하였고,당나라는 이후로는 발해에대하여,군사적공격을 할생각을 전혀 하지못했음을 보았을대,이때 무제의 공격의 얼마나 공포스럽고 참혹했는지 미루어 짐작할수있고,
춘추필법으로 유명한 중국의 사서들이 발해 대무예의 공격과 당나라의 패전에대하여 숨김없이 기록해놓은것을보면 그당시 당나라역사에있어 반드시 기록되어져야할 정도로 충격이었음을 알수가 있다.당나라 역사서들이 패전했을때 승전한 상대국 장수의 이름을 기록치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발해의 수군원수였던 장문휴장군에대하여는 정확하게 이름을 전하는것을 봤을때,우리선조인 장문휴장군에대한 연구와 관심이 더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