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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가 한민족의 국가였다는 근거에대하여 살펴보자.발해의 시조는 대씨이며,대중상,대조영등이.대중상은 말갈족출신이 맞으나

오늘날에보면 귀화한 한국인이라는것이고 귀화한 말갈인이 수대를 거치다보니 고구려인으로 되어진것이 대중상이었다.

이러한것을 고구려의 별종이다라고 기록한것은 역사기록이 정확하게 표현 했음을 알수가있다.

역사기록에서 발해의 건국과정을 나타날때 당나라장군 이해고의 천문령전투당시에 이에맞선 군사들은 고구려군인과 말갈족군인들로 구성된 대조영군사들이라고 고구려군과 말갈족군을 구분하여  기록하는것을 보았을때 말갈군사와 고구려군사는 그당시에도 서로 의미있게 구분되어졌고,발해건국의 주체군사에 고구려기병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대중상이나 대조영의 군사는 말갈족 지휘관이라기보다는 패망한 고구려군사를 이끌었던 세력을 대표하고,말갈족군사는 따로 말갈족추장이 이끌었음을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는데,발해의 풍습은 부여를 이었고,부여의 풍습은 고구려,백제와 동격이었으므로 발해는 말갈을 강조한것이 아닌,고구려인의 풍습을 건국초기부터 강조하고 있음을 알수가있다.

역사기록에 남아있는 발해의 풍습중에 발해의 관리들은 신분에따라 '금색,은색등의 복주머니를 몸에 차고 다녔다'라고 하였는데 그모양은 물고기모양과 비슷한 복주머니였다고 기록 되어져 있다.오늘날 한민족의 복주머니 풍습은 삼국시대이후로 고려,조선에까지 이어졌고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복주머니의 모습은 복주머니의 입구는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처럼 생겼고 전체적으로보면 물고기모양과 비슷함을 알수가있다.

이러한 복주머니를 몸에지니고 복을 받거나,액운을 물리치거나하는 풍습은 고조선이래에 한민족의 풍습이었다.이것이 첫번째로  발해인은 한민족이었다는 증거이다.

두번째는 발해라는 국가명에서보듯이,건국초기에는 발해인과 말갈인의 연합으로 이루어졌기에 고구려인의 국가인 발해로할것인가,아니면 말갈인의 국가인 말갈로 할건인가 명칭의 문제로 보인다 결국은 지배계층의 주류인 고구려인을 나타내는 발해로 국가명이 정해졌음을 보았을때,발해는 스스로를 고구려인다라는 주체적 표현으로 한것이 두번째증거이다.이러한 사례는 훗날 이성계가 세운 조선의 창건과 궤를 같이하는데,이성계가 말갈족속에서 살고,혼인관계를 유지했고 말갈족 연합세력의 구성으로 조선을 창건했다고해서 조선을 말갈족정권이었다라고 주장하는것은 현세를 살아가는 한민족이 존재가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한 그렇지 않다는것을 한민족 스스로가 증거할수있다.

세번째는 발해는 온돌이나 된장등 한민족의 생활문화를 답습했고,고구려인 중심의 천하관을 바탕으로 주변 말갈족을 제압하고 합병해 갔다는것이다.말갈족이 고구려인을 통치해 다스리는 국가로 표현되기 보다는 주변말갈족을 하나씩 발해인으로 통합해가는 과정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이때 당시에도 말갈족과 부여족은 서로 다른종족임을 서로 알고있었고,고구려이든,발해이든 국가의 주체는 부여족이라는 부여에서 여러국가가 나왔다라는 부여일통의 관념은 발해국에도 확실하게 이어졌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멸망할때까지 말갈족의 풍습을 따랐다고 한것이 아니라,부여와 고구려의 풍습을 따랐다라고 일관되게 주장했고,역사에서도 발해는 말갈의 풍습을 따랐다라는 기록은 없고.특이하게도 말갈과는 전혀다른 거란의 풍습도 남아있었다라는 기록을 봤을때,발해는 말갈정권이다라고 주장하는것은 머리와 꼬리를 빠꾸는 황당한 왜곡이다.

네번째 오늘날까지 이루어지는 역사왜곡중에 동북지방의 조선족은 조선말기에 이루어진 현상이다라는것이다.동북지방은 발해가 멸망했을 당시에도 그지역에는 고구려인들이 존재했었고,고려로 10만명이 넘는 고구려인들이 귀순했지만,계속 동북삼성지역에는 고구려인들의 후예들이 남아서 살아갔다.

원나라때에도 고려국왕이 요동지역의 왕을 겸임했던 이유도 그곳에 고구려인들이 계속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고,명나라때에도 이곳이 누구의 관할이냐에 따른 대립으로 위화도회군문제가 발생하여,반역의 정권이 탄생되었지만 이쪽지역에는 고구려인들과 말갈족들의 후예가 사는 땅이라는 개념은 이어져왔고,동북지방에대한 한민족의 삶의 터전과 역사는 고구려,발해가 망한이후에도,오늘날의 동북삼성의 조선족이 존재하듯이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동북삼성의 고구려인들이 후예가 이어져 오는것이 조선말기에 형성된 일시적현상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그래서 조선과 청나라간에 국경분쟁이 생겼다라는 관점은 잘못 되었다.중국를 지배했던 한나라,수나라,당나라,원나라,명나라,청나라,오늘날의 중국까지 동북삼성지역이 고구려.발해인들의 영토이며 터전이라는 관념은 계속 이어져왔다.이것을 조선말기에 갑자기 조선인이 이주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라것은 궤변일뿐이다.

애시당초 한민족은 일본의 남방계민족이 아니라,북방계민족이 민족의 주류였다.한민족하면,말을달리며 활을쏘는 북방민족의 피가 흐름을 말을 안해도 본능적으로 느낄수있다.특이한것은 전라도지역에서 발견되는 왕릉급 거대고분의 인골들은 일본의 남방계민족과 관련 되어지는것이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유물들이 만들어졌고,오늘날까지 전해졌는지는 역사가 전하지 않기에 뭍혀있다.발해인은 고구려인이고,백제인이고,신라인이고 같은뿌리인 북방민족계의 고조선인이다라는 점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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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라는 나라는 이해하기위해서는 大(큰대)라는 민족의 전통에대하여 살펴봐야한다.

우리나라는 밖으로 한민족의 위대함을 나타낼때 대라는 글자를 병기했다.왕에다가 대자를 첨가하여 대왕이라고 부르는 전통이 그러하며

오늘날 우리나라의 국명인 대한민국에 대를 붙인이유도 우연히 그렇게 붙인것이 아니라 위대한 민족이라는 천손의식이 내포되어있다.

몽골의 왕은 칸이라하고,일본의 왕은 천황이라하며,중국의 왕은 황제라고 불렀다면 한민족의 왕은 대왕이라고 표기했다.우리나라의 역사중에 가장 사대주의적 태도를 취했던 조선의 왕들조차 죽어서 시호는 대왕으로 표기하려고 했을만큼 왕이라는 표현보다 대왕이라는 표현을 좋아했다.

발해도 또한 한민족이었기에 발해왕들은 스스로를 대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고,스스로 황제라고 표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황상이라는 말은 사용되었지만 이때의 황상은 천손의 자손이 다스리는 나라의 왕이라는 주체성의 표현이지,천자라는 의미의 황제를 의미하지 않았다.천자와 천손의 차이는 이미 설명했기에,부연하지않는다.

고구려는 고씨의 나라였고,발해는 대씨의 나라였다는데는 관직명에 기록된 이름들을 보면 쉽게 파악할수있다.그런데 고씨와 대씨 (높다는것과 크다는것)는 일반적인것보다 더하다라는것에는 동격의 표현이다.

발해의 관직을 가졌던 사람들의 성씨들에는 대씨도 있고,고씨도 존재하는데,역사서에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고,고구려의 풍속을 지킨다고 하였다.고구려시대부터 이미 대씨와 고씨는 존재하였고,대씨는 바다쪽를 담당하는 갈래의 성씨였고,고씨는 산악쪽을 담당하는 갈래의 성씨임을 알수가 있다.고구려는 육군도 용맹했지만,수군도 수.당의 수군을 궤멸시킬만큼 강했다.

고구려와 발해는 그 근원을보면 동격적인 명칭임을 알수있다.즉 지배계층의 부족의 성씨를 표현한 국가명임을 알수가 있다.발해는 대발해라고하면 되겠는데,바다를 지배했던 나라의 의미를 가지고있다.발해의 명칭이 호수의 지명이거나 고어에서 유래한다는 주장은 맞지않고,

고구려의 부족중에 고씨족의 부족과 대씨족의 부족이있는데,이중에 고씨족의 국가가 고구려,대씨족의 부족은 발해라고 불려졌음을 알수가있다.고씨족은 산악쪽,대씨족은 바다쪽으로 지배했던 부족성씨임을 의미하고있다.

발해는 고구려,백제,신라와같은 북방민족의 계통인 한민족이었고,(전라도지역은 제4의 무엇인가 존재했었는데무엇이 존재했는지 역사자체가 완전히 뭍혀버렸기에 논외로하고)그의미는 바다를 지배했던 부족의 명칭임을 알수가있다.발해는 정식명칭이 고구려와 동격으로 대발해라고해도 이상할것이 없다.

우리나라의 조선기술은 오늘날에도 최고지만 이미 삼국시대부터 세계최고였고,한민족은 북방민족계열이면서도,바다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가진 민족으로,중국처럼 육지만을 중요시하는 민족성을 가졌던게아니라,우리나라의 역사이래,바다라는 지역의 지배권을 고구려의 광개토태왕,백제의 담로,신라의 유라시아해상무역,고려의 아라비아무역,조선의 수군등 바다의 해전뿐만아니라 바다의 역사기록은 한민족이라 할만했다.

발해의 당나라 선제공격이 바다의 수군을 이용하여 당나라를 기습적 궤멸시킨것이나,발해시대에 고구려유민의 우두머리인 이정기장군이 당나라의 등주를 바다를 이용하여 진격해 들어가 60여년을 지배하여 독자적 세계를 구축한것등을 보아도 고구려인들은 바다에 능했고,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국가의 국명이 발해인것은 고구려와 발해는 동일한 민족이 세운 국가의 연속성을 가졌음을 증명한다.

우리나라를 활만 잘쏘는 기마민족의 특징뿐아니라 수전에도 강한 민족이었음을 고구려,발해,고려,신라,조선수군이 증명해주고있다.여진,거란,몽고,한족등의 민족은 바다에서는 약했고,고래로부터 동아시아민족중에서 바다하면 한민족보다 활발했던 민족이 위에 갈래민족은 어디이겠고.발해는 어느나라의 역사인가는,바다라것이 어떤뿌리의 민족에게 어울리는 명칭이었겠는가?고구려,백제,신라의 각각건국신화에도 나온다.바다와 강의 신의 딸이 어머니이고,천손과 바다와 관련된 민족의 결합임을 강조함을 알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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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고구려의 풍속을 지키며 유지하고,왕을 기하라고 부른다고 중국역사서에는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고구려의 왕은 대왕또는 태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음을 알수있는데,

쉽게생각하는 부분이 대왕이나 태왕이라는 호칭이다.일본의 왕을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우리나라가 국서를 주고받았음을 나타내주는 역사기록은 무수히 많다.

오래전 발해의 3대 황상인 대흠무가 일본국 왕을 천황이라고 국서에 표기하는것을 보았을때,천황이라는 호칭은 일본국 왕을 부르는 고유명사로 삼국시대이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왔음을 알수가있다.

중국은 진시황이후로 황제라는 호칭을 오늘날까지 고유명사로 이어져 오고있다.그러나 오직 우리나라만이 우리나라의 왕들에게 주어진 고유명사인 명칭을 통일되게하여 오늘날에 이르지 못하고있다.

우리나라의 왕의 명칭인 대왕은 일반적인 의미가아닌 중국의 황제,일본의 천황,한국의 대왕이라고 정하여도 이상할것이 전혀없을 정도로 고구려,백제,신라,발해의 각나라에 두루 고유명사로 사용되어졌다.



같은뿌리인 이들 나라들에는 왕에대한 여러가지 명칭이 존재했지만 공통적인 명칭으로 널리쓰인게 대왕 호칭이다.발해또한 같은뿌리인 우리나라 민족이기에 대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고,이때의 대왕의 의미는 황제,천황과 동격의 의미를 가지는 호칭으로 쓰였다.

대왕폐하라는 의미가 전혀어색하지 않았고,황제만이 폐하라는 호칭을 쓴다는 의식또한 우리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았다.왕폐하는 없어도 대왕은 폐하라는 호칭을 함께붙여 사용할수가 있었음을 볼때,

대왕의 의미는 단순히 왕이라는 의미로 쓰이지 않았음을 알수가 있다.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배울때 고구려이든 신라이든 백제이든 모든 임금을 표현할때 왕으로 표기하고 부르는것은 선조들도 행하지않은 사대주의적 표현이다.

선조들은 외교문서에는 상대방국가에대하여 스스로를 낮추었지만,현실적인 통치속에서는 황제와 천황과 동격으로 생각하고 명칭이나 호칭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연원을 사용하거나 시호를 사용하는점에서도 독자적이었고,조선시대에 들어 독자적연호와 시호를 굴복하여 사대굴종한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이것은 조선의 태생뿌리자체가 배역의땅에서 나온 존재들이었기때문에 이루어진것이다.

배역의 땅이라는것에는 민족의 뿌리와는 다른 별종의 뿌리가 우리나라의 역사속에 존재했었다는 의미다.오늘날에 와서는 교묘히 감춰져 포장되었지만 종자부터가 달랐다.

우리나라의 역사속에있던 나라들의 기본인식은 우리나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천손의 자손이라는 관념을 가지고있었다.중국은 천손의 개념이아니라 천자의 개념으로,같은 의미같지만 전혀다른 개념으로 천자는 어떤부족이나 민족이든 뛰어난 자는 하늘의 아들을 자처할수있지만,

우리나라  천손의 개념은 동일한 부족이나 민족의 뿌리속에서 나온다라는 개념을 가지기에 이민족이 우두머리가 될수가 없는 통치체제관념을 가지고 오늘날까지 이어져왔다.발해의 대왕을 기하라고 했는데 기하라는 표현은 폐하와 동격이면서 우리민족이 독창적 황제나 천황에 동격으로 불리어진 명칭이다.

발해의 황제가 폐하라는 명칭을 몰라서 기하라는것을 사용했다고 볼수 없는것이 발해2대 대무예가 당나라에 보낸 국서에"폐하가 천하를 속이려고하시오?"라는 구절에서보면 폐하라는 명칭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있었지만,폐하라는 명칭을 사용하지않고,발해의 신하들은 자신들의 황상에대하여 기하라고 사용했음을 알수가있는데,발해는 건국초기부터 고구려의 풍습과 제도를 이었다고 주장했었는데 고구려가 대왕기하,태왕기하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것은 발해와 고구려의 건국터울이 30년이 넘지않기에 고구려시대의 대왕들에게도 똑같이 사용되어졌음을 미루어 유추할수가 있다.

고구려,발해등의 황제들에게 황제폐하라고 사극에서 표현하는것은 잘못되었고,만약에 실제로 사용되었다면 대왕기하나 단독으로 기하라고 불려졌을것이다.대왕기하는 우리나라의 고유명칭이었고,황제폐하는 중국의 고유명칭이었고 이둘은 그당시부터 서로의 의미를 알고있었고 명칭이 상호존재했기에 어떤것을 취사선택하여 사용했겠는가는 민족의 입장에서 봤을때 당연히 알수가 있다.





조선왕조 600년동안이 우리나라역사와 문화에 끼친 영향은 그 폐혜가 너무깊고 악해서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어지고있다.민족과 역사의 반역집단인 조선이라는 나라는 우리나라역사에서 존재하지않았다면 더 좋았을뻔 했다.

고구려,신라,백제,발해,고려는 우리나라 민족의 계통이 세운나라가 맞고,조선은 그 근본이 백제와 대립각을 세웠던 특정지역의 일부지역에서 태동되어,여진족쪽으로 도망갔다가 그쪽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결국 한민족을 집어삼킨것으로,조선이 태동자체가 항명과 배역으로 시작하였듯이,원래뿌리자체가 배역의 땅에서 근거를 두고 정권이 탄생되었기에 어쩔수없는 운명이었다.

오늘날에 와서 이들지역에서 있었던 감춰진 역사가 역사속에서 사라져 없어졌지만,어찌되었든 두번다시 조선과같은 정권을 탄생시켜서는 한민족의 미래가 없다는 점이다.자주적,민족적이며,호방했던 기상을 조선이라는 기풍속에서 전부 꺼꾸로 민족성을 이끌어갔을뿐아니라 민족의 기상을 갈가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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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이세민의 눈을 파서 눈물을 머금게했던 고구려의 유명한 안시성전투에서의 장군의 이름은 역사기록속에서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않다.

안시성전투는 실제했으나,양만춘은 실제하지않는 가공의 인물이라는것이다.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살펴보면,설혹 이것이 의미가있다고 조금이라도 가정해보더라도 이것은 이름이아니라

당나라와 고구려의 전투가 벌어졌던 계절을 의미할뿐,장군의 이름은 아니다.


안시성싸움이 벌어진 고당전쟁의 계절은 이른봄부터 초가을까지인데,양만춘을 문자그대로 풀이하면 "버드나무가 만발한 계절인 봄"이라는 의미일뿐이다.고구려시대에대한 정확한 기록들은 고려시대에 작성된 역사서들이 그나마 사실적이고,조선시대에 기록되어지는 고구려역사들에대한 기록은 거이가 창작이거나 사실과 동떨어진 경우가많고,그 일례가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야사에다가 기록했다는것이다.

안시성 성주와 연개소문은 동시대 사람이기에 안시성 성주가 누구였느냐를 이해하려면 먼저 연개소문의 생몰년을 살펴봐야한다.연개소문이 죽을때 나이가 백전노장의 흰수염을 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진 전투도가 보이긴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고 연개소문은 광개토태왕처럼 이른 나이에 죽었는데,

생몰년은 616-665년이 역사적 기록과 부합하고,오늘날의 나이로보면 49세정도에 죽었기에 그당시 사회상에서는 노인이라고 주장할지모르지만 오늘날의 나이로는 이른나이에 죽었음을 알수가 있다.안시성 성주가 누구냐를 유추해보기 위해서는 안시성성주와 연개소문은 서로 상명하복의 관계가 아니였음에 주목해야한다.

이러한 의미는 안시성 성주나 연개소문은 독자적인 세력과부족을 가지는 지위에있는 우두머리였음을 알수
가있고,연개소문은 기록에보아도 서부대인의 부족장의 위치에 있음을 알수있고,영류왕을 단칼에 내리칠때에 동원된 부하들은 서부에 소속된 부족군 집단이었기에 왕의 말보다,직속 우두머리의 말에 더 충성했음을 알수가 있다.

안시성 성주가 연개소문에 맞서 자신의 지위를 주장하고 맞설수 있었던것도 자신또한 하나의 부족의 우두머리였기에 가능했고,그에따른 부족민들의 절대적 신임이있었기에 가능했다.연개소문과 안시성성주의 관계를 알아봤다면,역사에 기록되어지지않은 안시성 성주의 부족은 무엇이냐라는 의문이 들어야 정상일것이다.



이사람의 부족을 알려면 현재 중국에 속해있는 동북삼성의 위치에 어떠한 부족들이 강했는지 살펴보면 알수가있는데,러시아쪽 국경으로는 흑수말갈,요동과요서를 구분하는 중국과 맞따은 쪽은 속말말갈,그리고 두만강이나 백두산쪽으로 위치한 말갈이 존재했는데,안시성이 위치했던곳에는 속말말갈부족이 강했던곳이다.

오늘날에 와서야 말갈은 다른나라로 민족으로 구분되어졌지,고구려라는 나라에서는 여러부족들속에 하나로 뭉쳐진 통합 고구려의 나라였기에,중원에서 보기에는 말갈부족은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기록하여도 이상할게 전혀없다.

말갈은 우리나라역사속에서는 물길,여진,만주족등의 여러이름으로 불려졌는데 공통적으로 강이나 물하고 깊은 의미를 가지는 부족이름을 가지고있다는것이다.물길이나 말갈의 의미는 호수나 강물과 관련되어 불려진다는것이다.안시성 성주는 정체는 어느정도 파악이되었다.



연개소문처럼 하나의 부족의 우두머리라는 것인데,그휘하에 속한 안시성의 부족민이 기록상 10만명 정도되었음을 알수가있는데 이정도의 일가를 이루는 부족은 안시성근처에서는 속말말갈뿐이었다.오늘날에 중국의
동북삼성은 러시아쪽에있는곳은 흑룡강성,중원쪽 경계에있는곳은 요녕성,중앙인 조선족이 살고있는 연변이있는 길림성으로 구분되어지는데,

여기서 흑룡강성은 흑수말갈지역이니 검은 흑이 붙어있고,중간에 위치한 길림성은 조선족의 자치구이니 의미를 알수가있는데 요녕성쪽에 존재했던 속말말갈의 존재는 지리명으로는 알수가 없다.속요녕성 이랬으면 쉽게 알수도있었겠는데,그러지않은 이유는 더 큰 위대한 나라가 그곳을 기반으로 세워졌기때문이다.

고구려의 장수이면서 역사기록속에 연개소문과 동시대에 살았고,안시성을 근거지로했고,망한 고구려를 대신하여,끝까지 저항하고 결국에는 고구려의 후예라고 선언한 나라의 아버지였던 대걸중상이라는 사람을 역사속에서는 기록하고있다.

대걸중상은 연개소문보다 8년이 늦게 태어난 생몰년이 622-698 이다.대걸중상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이고 대조영은 중국사서에" 고구려의 별종"으로 기록되어져있는데 별종이라는 의미는 고구려의 사람이나 부족이 다르다는 의미로 받아드려도 이상할것이 없다.

안시성은 고구려가 망한후에도 끝까지 저항한 성에 속하는데 이러한 저항정신의 밑바탕은 자신들의 부족이 속한 토착 지역이었기에 안시성이 함락되는 670년대까지 항전했다고 볼수있고 성이 함락되면서 당나라에 끌려가지만,결국은 당군을 격파하고 고구려가 망한지 30년도 넘지않아서 발해라는 고구려의 계승국이 탄생한것이다.

대걸중상은 그의 아들 대조영이 발해를 세우기이전부터 이미 당나라의 측천무후가 왕이라는 칭호를 내려줬어도,그런칭호 필요없다라고 할만큼 독자적 군사력과 세력을 갖추고 이끌수있는 힘을 가진 장군이었음을 알수가있고,대조영의 아버지 대걸중상이 안시성 성주였다라는 것은 역사에 기록을 살펴보면 양만춘이라는 허울데기 거짓말 가공의 인물보다는 더 사실적인 역사에 부합될수 있음을 알수가있다.

양만춘이라는 이름의 장군은 애시당초 고구려에는 존재하지않았다.대걸중상은 역사속에 확실하게 기록되어진 안시성의 위치했던 지역의 이름난 장군이었고,연개소문도 힘으로 해서 국력을 낭비할만큼의 출혈을 감수하면서까지 안시성성주와 싸울필요가 없다고 느겼을 만큼 당대의 영웅이었고,당태종을 격파할정도의 담력과 베짱이 있었기에 고구려의 기상을 계승하여 발해를 세울 수있었던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발해를 우리나라의 역사로 보지 않는다면 안시성전투는 우리나라의 역사가 아니라는 부정이 되어버리기에,고구려역사왜곡만 관심을 가지고 발해를 내버려두는것은 황당한 논리이고,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낸 조선후기 인물이 적은 다른내용을 보면,광개토태왕비를 아예 말갈황제인 금나라의 왕의 비석이라고 전한다고 기록할만큼 역사인식이 미천했던 사람이 안시성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전한다고 적었놨다고 맞는 이름이라고 한다면 지나가던 소대가리가 웃을 일이다.

역사기록에서 유명한 사람은 후손들이 중시조이든 어떤형식이든지 자신의 성씨의 시조로 숭상하는것이 우리나라의 풍습이었는데 양만춘은 누구의 시조라는 말을 들은적이 전혀없다.애초부터 가공의 양씨 성을 가진 만춘을 날조했기 때문이다.엉터리 야사의 인물을 사실인냥 이름을 전하는것 또한 역사왜곡이며,연개소문과 맞짱을 뜨고,당태종 이세민을 격파할정도의 담력을 가진 동시대의 인물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아버지 대걸중상인 고구려의 대중상 장군뿐이다.

안시성 성주는 대걸중상인데 왜 역사에 기록되어져있지 않았는가 하는것은,역사의 기록이 되어있지 않은게아니라 역사기록의 행간에 의문을 갖지 않기때문이다.고구려를 망하게한 측천무후가 왜 별볼일없던 아무 전공이 기록되어지지않은 대걸중상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내리겠다고 애걸했는지,그만한 무력과 전공을 고구려 장군이었을때부터 보여줬기에 인정받은것이고,고구려가 망하자 그러한 칭호를 주려고했다는 것이다.역사교과서에 안시성전투의 장군은 양만춘이라고 기록하는것은 광개토대왕이 말갈황제라고 전한다고 기록한것을 믿는것과 다르지않을 정도로 코메디임을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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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훈요 10조에는 전라도지역은 배역의 땅이니 인재라도 등용하지 말라는 조항이 들어있다.

이러한 훈요 10조에대하여 위조설이나 첨삭했다는 의견등 여러가지 견해들이 있지만,이러한 구절은 우리나라의 역사, 일부의 미스테리를 숨겨 놓았기때문이고,훈요십조의 내용은 위조나 첨삭된 구절이 아니라 진실한 구절이었으며,


그당시 동족인 발해를 멸하는 거란에대하여 극한 분노를 표현했고 배척했던 고려인의 모습을보면 왜 이러한 구절이 훈요10조로 후대에 널리 전하라고했는지 충분히 이해할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를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로 축소하여 삼국의 시대로 이해하고 은폐하려했던되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오늘날의 전라도지역은 삼국시대에 백제가 다스리던 백제지역이 아니었고,백제의 주류문화는 충청도이고,전라도는 우리민족이 입장에서 볼때는 이민족이 한민족을 협박하고 멸하려는 세력의 주거점지역이었다.

역사속에서는 이들에관한 기록이 역사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리고,충청도와 아울러 백제의 나라였다고 두리뭉실 역사를 만들었기때문에,이웃나라의 역사기록이나 우리나라의 역사기록속에 틈틈이 전라도지역에 존재했던 주체세력에대한 삼국시대와는 동떨어진 비상식적인 기록들이 나타나고있다.

이러한 전라도지역에 지배 주체세력이 이룬 국가가 백제가 아니라면 누구였는가가 문제인데,결론적으로보면 이민족중에 유물이나 유골등으로 봤을때 북방계통의 민족이아니라,일본계통의 민족이었음을 알수가 있다.전라도지역에 살았던 주체세력이나 주민들은 고구려,신라,백제의 입장에서 봤을때 멸해야할 대상이고,정복해야할 대상이었다.이러한 역사적사실을 후삼국을 통일했던 고려의 왕건이나 그당시 사람들은 잘알고있었고,민중의 밑바탕에 그러한 역사의식이 존재하고있었기에,전라도지역의 사람은 정부관리로 중용하지말라는 훈요10조구절이 들어있게 되었고 역사속에서 전해졌다고 할수가있다.

백제와 전라도의 관계는 정복과 멸해야할 대상으로 규정했는데,역사적으로보면,백제는 점차적으로 전라도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정복하고 멸하면서 확장되어갔는데,이러한 전라도지역은 백제만 정복전쟁을 한것이 아니라,고구려나 신라또한 이지역에대한 정복을 꾸준히 진행하였다.

광개토태왕비에 나오는 왜라는 세력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국경과 인접했음을 알수가있는데,이러한 구절은 왜라는 세력이 일본열도에있는 왜라는 나라와 혼동하기때문에 생기는것이고,한반도내에 고구려,백제,신라와 국경을 맞대는 왜라는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세력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에있어 멸하고 정복해야할 대상이었으며,오늘날 그지역이 어디였는가하면 전라도지역이다.오늘날 고구려의 지배지역을 경상도는 신라이고,전라도는 백제가 지배했던 지역이라는식으로 뚜렷하게 구별하여 표시하는데,사실은 지금의 전라도지방에는 고구려가 정복하고 지배했던 고구려지역도 존재하고있었고.마찬가지로 신라지역이라고 표시된곳 또한 고구려가 정복하고 지배했던 고구려지역이 존재하고 있었다.

고구려가 영향을 미치던 지역은 한강이북지역만이 아니라,남으로는 제주도까지 그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삼국사기 문자명왕 13년 4월의 기록에는
특이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고구려 사신이 위나라에 가서 나누는 대화가 기록되어있다.

고구려 문자명왕 13년은 서기 504년이기에 그시기에 涉羅爲百濟所幷:섭라를 백제가 병합하였는데,이것때문에 섭라에서 생산되는 옥이라는 특산품을 바칠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섭라는 제주도를 말하고,섭라가 백제에 복속되었을때는 동성왕 20년 서기 498년이었는데

복속이라는 말은 공납과 조세를 바친다는 의미였고,이말은 그전까지는 섭라는 고구려에 공납과 조세를 바치고있었는데,중간에 백제가 가로채서 지금은 제주도에서 생산되는 전복껍데기속에 들어있는 옥이라는 제품을 바칠수가 없다고 생각할수가 있다.

이런의미가 아니라면,고구려,백제,신라등 모든 국가는 서로 국가간의 교역을 하였는데,그전에는 구했는데 섭라가 백제에 복속되어 제품을 구할수가 없어서 바칠수가 없다는것은 비상식적이다.이러한것을 보았을때,충청도지역을 제외한 남쪽지역은 무주공산이었고 상황에따라 고구려,신라,백제에의하여 정복되거나 멸하게되었다고 볼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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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년 9월 가을 고구려 양원왕때,투르크 기마병인 골촐싹이 이끄는 3만의 돌궐군이 고구려을 침략하여,신성을 공략하고 백암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고흘:대왕마마,돌궐이 우리나라의 백암성을 포위하여 공격중입니다.


양원왕:돌궐이? 우리나라에 무슨 원한이있다고 돌궐이 쳐들어왔다는 말이냐


고흘:중국의 남북조상황과 관련되어 쳐들어온것 같습니다.



양원왕:장군 고흘은 지금즉시 고구려 정예기병 1만을 이끌고가서 백암성을 원조하고,돌궐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온 이유를 들어보고,대처하도록 하시오.고흘:알겠습니다.

고흘은 신속하게 백암성으로 진군하여 백암성의 들판에서 돌궐의 적장 골촐싹을 마주하게된다.

고흘:돌궐과 우리나라는 원수진일이 없는데,어찌하여 우리나라를 공격하는가?

골촐싹:우리 돌궐은 요즘 서위의 공격에 시달려서,배가고프다,우리 돌궐도 먹고살기위해서는 고구려를 공격할수밖에 없다,얼른 항복해라

고흘:서위는 무섭고,고구려는 만만하다 이거구나,오늘 고구려가 어떤지 직접 경험해보거라,한놈도 살려두지않겠다.

골촐싹:짖는 개치고,무는개는 못봤다,이리하여 돌궐기마병과 고구려정예기병이 백암성 들판에서 일대전투가 벌어졌는데 결과는 돌궐군이 대패했고,고구려의 고흘장군은 싸움에서 사로잡힌 돌궐군 1천명또한 모두 수급을 베어,한놈도 살려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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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국제상황를 살펴보면,중국은 분열되어 강남을 근거지로하는 남조화북을 근거지로하는 북조의 왕조가 나뉘어 대립되어왔는데,고구려는 북조와 우호친선관계를 유지하여 북조의 왕조인 북위와 동맹관계를 맺었고 북위는 다시 서위동위로 나뉘어 존재하다가 북주북제로 이어지게된다.

백제는 이와는 정반대로 남조의 왕조(송,제,양,진)와 우호친선관계를 맺으며 고구려의 외교전략에 맞써고있었다.고구려는 북위와 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했는데,북위가 분열하여 서위와 동위왕조로 갈라지자,동위와는 친선을 맺고,서위와는 대립관계를 유지했는데,훗날 동위는 북제왕조로 이어지고,서위왕조는 북주왕조이어졌는데 북주가 훗날 중국을 통일하여 수나라가되게된다.

같은 북위의 갈래에서 나온 왕조였지만 동위와 북제와는 우호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서위와 북주와는 대립했기에 고구려에대하여 서위-북주를 모태국가로하는 수나라로서는 눈에 가시거리 일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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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년 고구려에게 얻어터진 돌궐은 그이후,세력이 수.당의 견제와 공격에의하여 급속히 약화되어가다가,657년에 망하게된다.돌궐이 망한후 11년이지난 668년,돌궐은 또다시 당나라의 고구려공격의 선봉에서서 고구려를 패망시키는데 앞장서게되어,고구려가 망하게된다,

돌궐은 고구려에게 이처럼 병도 주었지만 약도 주는 역할을 하게되는데,돌궐인 골출록이 당나라에 대항하여 7세기말 돌궐국가를 재건시키는데,이러한 국제질서환경이 고구려가 망한지 30년이 채되지않은,698년 대조영이 고구려를 이어받은 국가인 발해를 세울수있도록 유리한 환경를 제공하는 역할을 돌궐이 조성해주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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