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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는 궁녀처럼 벼슬인 품계를 받는 신분도 있었지만,궁궐을 드나들며,대비전,동궁전등에서 궁녀들이 담당하지않는 허드렛일을하는 노비신분의 천인들인 파지와 무수리가 있었다.


파지는 사내아이를 말하고,무수리는 소녀아이를 말했는데,이들의 신분은 천민이었다.


천출이기에 양인신분을 얻기도 쉽지않았는데,중전의 낳은 아이에게 젓을 먹이는 유모들의 신분또한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특별대우를 받는 신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민이었다.



간혹,아이를 잘 키워준 유모역할의 공으로,노비의 신분을 벗어나 양인의 신분을 얻는 경우도있긴 했지만 특별한 경우일뿐이었다.파지나 무수리들은 궁녀들보다 신분상으로 낮은 천민이었지만,궁녀들에게 메인 숙명적 한계인 오로지 왕이외의 남자는 업다라는 속박은 없었다.

궁녀들중에서 병이들어,간혹 궁궐을 나가서 사는 경우도 있었는데,이런경우도 죽을때까지 궁녀였던 굴레는 벗어날수가 없었다.궁녀의 신분이었다가,궁궐밖에 나가서 일반인으로 살아갈때,이들을 아내로 맞아드리려는 "간큰남자"도 드물었지만,있었다해도,그결과는 비극적이었는데,역사속에서 궁녀를 자신의 아내나첩으로 삼았던 "간큰남자"는 있었을까? 있었다.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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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광해군이 집권하던 시대인 1613년,궁녀중 영생이라는 여자가 병이들어,궁궐밖으로 나가서 살게되었는데 광해군의 옹립에 공을 세운 정인홍의 일파중에 임혁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신분질서가 하늘의 뜻이고,진리처럼,공자왈,맹자왈했던 시대에 왕의 여자였던 궁녀를 자신의 아내나 첩으로 맞아드리는것은 간이 배밖에 나오지 않고는 실행할수없는 일이었다,

간큰남자 임혁과 영생은,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영생왈:아무리 제가 병때문에 궁밖에 나와서 살게되었다해도,궁녀였는데,궁에 알려지면 나리에게 피해가 있을것인데 저를 버리시옵소서 임혁왈:영생아,사랑에 국경이 어디에 있겠느냐,너가 비록 궁녀였다고는해도,현재는 아니지않느냐,그리고 우리가문이 명문가인데,너하나 못지켜주겠느냐,내가 목숨을 잃을지언정,너를 버리지 않겠다.

이둘이 서로같이 살고있다는 소식이 급기야,궁궐에까지 들어가게되었는데,신하들이 들고일어나 임혁은 쳐줄일놈이고,위아래도없는 금수만도못한 강상의죄를 지었으니,참수형으로 다스려야한다고 연일 광해군에 상소를 하게된다.

광해군이 생각하기에,임혁의 잘못은 있으나,임금에대한 역신으로 참수형으로 처단하면,임혁뿐만아니라,가문자체가 멸문지화가 되기에,자신의 측근공신인 정인홍의 일파였던 임혁의 가문만은 살려주고자,사약을 내려 죽이는 형벌로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왕조시대에는 같은죽음일지라도,어떤형으로 죽느냐에따라 죄를 진 본인에게만 화가 미치기도하고,일가친족모두가 연좌로 걸려 효수가되기도했기에,tv속에서 임금이 신하에게 사약을 내렸는데 신하가 사약을 마시며,임금의 성은에 감사합니다라고 임금이 사는 궁궐을 향하여 절을하고 죽는 모습을 볼수있는데,이게 다 이유가 있는것이다.

부모,형제,자식등을 묶어서 목숨을 댕강시키지않겠다는 표시였기에,죽는 신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되었든,그렇지 않던간에,부모,형제,자식의 장래와 목숨의 안전은 보장해주겠다는것이기에 감사할수도 있는것이다.우리나라에서 사약을 내리는것이 선처였다면,이웃나라 일본에서는 할복이였다고 볼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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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은 연일 신하들의 상소에 항복한 광해군은 임혁을 참수형에 처하게되는데,같은날 영생도 죽음을 맞이하게되었지만,영생에게는 사약을 내렸다.같은장소에서 같은날,같은시각에 두사람은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게되는데,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묻자,임혁왈:사랑이 죄라면,떳떳이 죽겠다.영생왈:우린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인가봐요,마지막 죽는순간까지 눈물맺힌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무언가를 기원하듯 미소와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죽었는데.주위에 이모습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궤이하게 생각하며 말하길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구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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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9대왕 김춘추가 재위2년에 접어든 655년,백제,왜,고구려의 연합전선으로 연이은 공격을받은 신라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되었다.


이에 태종무열왕은 장수 김흠운이 전지,예파,적득,보용나등과함께 백제의 조천성을 공격하도록하였다.



김흠운은 어려서부터 나라가 어려움에빠졌을때 나라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바쳐 나라를 지켜냈던 화랑들에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곤했다.





김흠운이 백제의 조천성아래 양산이라는곳에 진을치고있을때 백제의 대군이 야음을틈타 기습공격을해오자,신라군의 진중은 혼란에빠져 미쳐 전열을 가다듬고 싸워보기도전에 많은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수많은 화살이 날아오는중에서도 김흠운은 홀로 말위에서 창을 든채 맞서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어려운상황에 처하자,김흠운이 부하였던 전지가 김흠운을 구하기 위하여 다음과같이 말하였다.


" 적이 어둠속에서 지척을 분간할수없는 상태로 공격해오니,만일 장군께서 그들에게 죽더라도 아무도 아는사람이 없을것입니다.또한 장군께서는 신라의 명문가의 자제이고,대왕의 사위이므로 적의손에 죽게된다면 백제의 자랑거리가되겠지만,우리에게는 커다란 슬픔이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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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운이 말하길"대장부가 나라를 위하여 몸을바친이상,남이 알아줄 상황이든,그렇지않든 무슨상관이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앞으로 나아가 힘이다하는 순간까지 적과싸우다 죽었다.이를지켜보던 예파와 적득도 적에게 달려나가 함께싸우다 전사하였다.


후군에서 지원 기마병대를 이끌었든 보기당주 보용나가 흠운이 죽었다는말을 전해듣고 말하길"흠운은 권세와영화가있어,사람들의 사랑과 아낌을 받을수있었는데도 스스로 절개를지켜 죽었다,나 보용나는 생이무익,사이무손호?"라고 말하며 적진으로 달려나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훗날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를듣고,슬퍼하며 그들을 추모하기위하여 양산가를 지어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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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점을치는 사람이었던 지화라는 사람의 관계를 통하여,세종이 풍수나 점같은것에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수가있다.


지화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때부터 국가의 점치는 일과,혼례에대한 궁합을 보는일을 맡아서했다.

지화의 운명은 태종과 세종에대한 "말한마디"인과응보에의하여  극과극인 운명을 살게된다.


태종은 세종처럼 남녀관계에는 금슬이 좋아서 왕비뿐아니라 많은 궁녀들에게서 아이를 낳았다.




태종은 궁녀에게서 나은 자신의 딸들이 혼례할 나이가 차자,궁합을 잘보는  판수인 지화를 시켜,알맞은 사위감을 찾도록한다.지화는 장성한 아들이 있는사대부집들을 돌아다니며 생년월일을 알아보러다니던중,이속이라는 관리의집에가서 그 집의 아들의 생년월일을 묻자,


이속이 지화에게 말할길 "명문가의 비빈의 딸이아닌,일반궁녀에게서 난 딸의 혼례를 위하여 우리아들의 생년월일을 묻는거라면,우리아들은 죽을걸로 가서 말해주게" 지화는 자신의 들은 말을 그대로 태종에게 해버렸다.


태종이 누구인가? 자신을 거스리는것은 외척이고,형제이고 박살내버리는 조선조 최대의 터프가이 왕이 태종이었다,대노한 태종은 이속을 잡아오게하고는 말할길" 근본이 틀려먹은 가문인걸 내 익히 알고있었기에,나도 혼인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그러나 네놈의 말투는 용서할수가없다"하고는 이속을 감옥에 가두어 말에대한 댓가를 치루도록한다.


지화의 입장에서는 꼭 이속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궁합을 맞춰볼 사대부집의 아들들이 많이있었기에,이속이 한말을 사적인 대화로알고 뭍어주고 태종에게 말하지않을수도 있는 문제였다.지화는 평소 이속을 좋게보지않았거나,태종이 자신에대한 신임을 널리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훗날 이러한 말실수에대한 연은 결국 지화 자신도 범하여 자신의 운명이 박살나버리걸보면 연에의한 인과응보라는 말을 되새겨보게된다.


세월이 흘러 태종이 죽고,세종이 왕위에 올랐다.지화는 선대부터 국가의 점과 혼례에대한 일을 잘한 공이있었기에 세종은 신하들이 "점쟁이에게 벼슬을 내리는것은 가당치 않습니다"라는 상소를 물리치고 지화에게 사옹원사직이라는 3품에 해당하는 꽤 높은 벼슬을 내린다.


1444년 겨울 어느날에 부련듯 나라의 일에대한것을 점쳐보려는 생각이 들었던 세종이 신하를 시켜 지화를 보고싶다고 하였다.신하가 지화의 집을 찾아가보니,지화는 없고,그대로 돌아갈수없어 여러곳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지화를  찾아냈는데 다른사람의 집에서 술을 먹고있었다.


신하가 말하길 "전하께서,나라의 일에대하여 점을 칠일이 있다고 부르십니다" 술을 먹어서인지 눈에 뵈는게 없던 지화가 말하길 (오늘~꺼억,노새,노새 젊어서 놀아~ 아 좋다~ )"술을 많이 먹어,오늘은 점을 칠수가 없으니 잘말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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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가 세종에게가서 그대로 말하길 "술을 많이 먹어 오늘은 점보는 일을 못하겠답니다" 이말을 들은 세종이 대노하여 "이눔이 운명보는것을 좀 안다고 음흉하고 간교하기 짝이 없는눔이구나,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그 말뽄새에대하여 문초하도록하여라"하고는 결국 세종은 지화를 남도땅 외딴섬인 진도로 귀향보내버려,지화의 운명도 한순간에 막장인생으로 변해버리게된다.


세종이 풍수지리나 점치는것에대하여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진 왕인지는 1449년 4월의 조선왕조기록으로 분명하게 알수가있는데 세종이 말할길 "장님인 지화가 운명에 대하여 점친것들이 모두 맞은것은 아니지만,예로부터 성현들이 풍수지리등인 복서를 중히여겼는데,인간세상일로는 알수없는 일들이 생겼을때 무엇으로 의지할수있겠는가,그렇기에 운명에 관한책은 널리 구하여 올리도록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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