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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2대왕 유리왕은 주몽의 아들로 예씨부인의 소생이었다.


주몽에게는 많은 부인이 있었으나,부여에 있을때 결혼하여 태어난 맏아들인 유리가 자신을 찾아오자,여러 왕비들과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리를 태자로삼아 고구려 2번째왕이 되게하였다.


역사속에서 유리왕의 발자취는 고구려의 옛시조인 황조가라는 시조가 전해 내려오고있는데 유리왕은 남녀의 운우지정에는 관심이 많은 왕이었으나,자식과 나라일에 관해서는 망조의 왕이었다.



유리왕의 첫번째 아들이며 태자인 도절의 죽음은 유리왕때문이었다.고구려가 아직 나라의 깃틀이 잡히않아,부여가 더 강할때였기에,부여의 왕은 고구려의 태자를 볼모로 보내기를 원했고,유리왕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태자 도절을 볼모로 부여국에 보내려고했으나,도절은 죽어도 볼모로 가기싫다고 거절했기에,아버지인 유리왕의 미움을 샀고,그일이 있은후 6년만에 세상을 떠난다.

다시 두번째 아들인 해명을 태자로 삼았으나,해명또한 아버지인 유리왕의 미움을 사 스스로 달리는 말위에서 창을 땅에박은후 자결하였는데 그 이유또한 이웃나라의 왕에게 자신의 아들이 밉보여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태롭게하였다는 이유로 자결을 명하였다.이처럼 유리왕은 자신의 두아들을 이웃나라와의 관계에 도움이 되지않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게하였는데,

유리왕의 이러한 처사는 자신의 아버지인 주몽의 호방하고 ,주위나라에 당당하게 맞써 싸웠고,주위에 신하와 왕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속을 천금같이 여겨 유리를 태자로 삼아 왕으로 만들어준 고주몽이 이룩한 고구려제국의 기상과는 전혀 딴판인 모습이었다.

이렇게 자신의 아들들을 쳐죽이면서,그와반대로 여자들 문제에있어서는 "훨훨나는 저꾀고리 암수 서로 정겹구나......."이따구 희희낙낙하여,역사에 전해지는것을 보았을때 유리왕은 애시당초 고구려제국을 건국한 고주몽과는 전혀다른 기질을 가진 별종의 아이였거나,돌연변이가 아니라면 고주몽의 핏줄이 아닐가망성이 매우 높다.

두명의 형이 이웃나라와의 관계때문에 처참하게 죽어가는것을 보았던 유리왕의 세번째 아들이 있었으니 이사람이 고구려의 전후후무한 전략과 지략의 군신으로 추앙받게되는 대무신왕이다.후에 대무신왕이되는 무휼은 아버지인 유리왕에게 자신의 주장을 해보지도 못하고 어처구니없게 죽어가는 형들의 모습을 봐왔기에 형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게된다.

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고구려의 유리왕을 찾아와서 꾸지고,가르치기에 또다시 유리왕은 굴복하여,부여의 요구대로 잘따르는것이 만복이 근원이될것이다라고 말하자,무휼은 부여의 사신을 따로 불러내어 말하데,"고구려를 무시하는 너희 부여왕 대소가 문제이다.칼에는 칼로써 맞써겠다"고 꾸짓고 사신을 돌려보내자,이를 들은 유리왕은 전철의 태자들처럼 이웃나라와의 관계를 망치다는 명목으로 벌을준게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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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휼의 기상에 놀라 잠자코 따르게되는데 이후로 부여와의 전투는 무휼이 직접나아가 싸우게되고,무휼이 고구려의 3대왕에 오르고나서도 이웃나라의 칼에는 칼로써,예의에는 예의로써 화답하여 죽을때까지 이웃나라와의 전쟁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고 승전했기에,백성과 신하들이 군신으로 추앙하여 고구려의 군신 대무신왕이 되었다.

고구려 왕들에관한 많은 이야기와 내용들이 있었을 것인데,다사라지고 고구려의 기상과는 전혀 딴판인 왕이었던 유리왕이 여자와 희희낙낙했던 시조가 삼국사기 기록속에 남아전혀지는걸 보면,자신의 아들의 잘못에는 추상같이 자결을 명령하는 사람이 "여자싸움에는 이내 몸은 외롭구나" 이따구 시조를 써서 자랑스럽게 기록했다는것은 그당시 상황과 이웃국가간의 대처능력을 보았을때 허구적인 내용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황조가의 작자가 유리왕이라고하더라도 이러한 고구려기상과는 전혀딴판인 왕의 시조는 교과서에서 가르쳐 배우게할 교훈적 가치가없으며,후세에 전혀 모범이 될수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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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왕중에 전투의 신으로 불리우는 고구려 3대왕 대무신왕은 주몽의 손자이다.대무신왕은 어떠한 인물이었을까?

이름은 고무휼이었고,서기 4년에서-44년까지 살아 이른 나이인 40세에 죽었지만,그의 재위기간은 27년으로 짧지는 않았다.

11세에 태자가되고 15세에 아버지인 유리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특이한점은 대무신왕의 두번째 왕비의 아들중에 호동왕자가 있었고,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첫번째 왕비의 모함으로 ,스스로 자결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게되는데,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있다.



역사기록에 나타난 대무신왕의 행적을 살펴보면, 대무신왕 3년 봄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그해 겨울 10월에 부여왕 대소가 몸은 두개이고 붉은머리가 하나인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왔다.고구려가 부여에 병합되는것이 마땅하다는 의미로 보낸것이었다.


이에 대무신왕은 붉은 까마귀에 대하여 해석하길,두나라가 합쳐지는 의미를 가진것은 맞으나,그 새가 나에게로 보내줬으므로,나에게 길한징조이다 라고하였다.


대무신왕 5년 2월에 부여국의 왕인 대소를 잡아 죽였다.대무신왕 9년 10월에 개마국을 쳐서 멸망시키고,스스로 항복한 구다국을 병합시켰다.


대무신왕 15년 11월에 둘째왕비의 아들인 왕자 호동이 스스로 칼을 세워 엎드려 자결하였다.대무신왕 20년 낙랑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대무신왕 27년 10월 고무휼이 죽자,대수촌언덕에 장사를 지내고,시호를 대무신왕이라고 하였다.대무신왕의 뒤를 이어 동생인 민중왕이 고구려 4대왕이 되었으나 재위 5년만에 죽었다,


고구려 5대왕은 대무신왕의 맏아들이 왕위를 이었다.이왕을 모본왕이라고하는데,오늘날로 보면 개망나니 스타일을 가지고 있어서,아버지인 대무신왕은 나라의 부강과 번영을 위하여 온힘을 기울여 싸웠다면,그 아들인 모본왕은 자신의 백성과 신하를 잡아죽이는데 온힘을 기울이다,신하인 두노의 칼을 맞고 재위 6년만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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