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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의 고구려를 칠때 내세웠던 4대가능론과  고려가 명나라를 치려고할때 조선의 태조가 내세운 4대불가론을 비교하여,왜 조선이라는 나라는 우리나라역사에 있어서 한민족의 민족성을 저열하게 만들었는지 살펴보고자한다

당태종의 4대가능론  당태종왈:큰것으로 작은것을 치는것은 가하다. 이성계왈:작은것으로 큰것을 치는것은 불가하다.당태종왈:자연의 이치로 반역을 토벌하는것은 순리이다.이성계왈:농사철에 군사를 동원하는것은 순리가 아니라 불가하다.당태종왈:평안한 나라가 어지러운 나라를치는것은 가하다.이성계왈:적국을 치러갔을때,다른나라가 침입할수있으니 불가하다.


당태종왈:사기있는 군사로 군기가빠진 군사들을 치는것은 가하다.이성계왈:군사들의 무기가 여름철에 형편없기에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니 치는것은 불가하다.당태종의 가능론의 정신을 물려받은 당나라는 이후,태평성대를 구가하며 중원을 제패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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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4대불가론으로 만들어지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후,600년동안 한민족의 기상을 갈가먹고 명분과 논리에 치우친 이중적문화와 태도를 만들어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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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역사에있어 가장부끄러운 역사이며,민족사적으로 봤을때,생겨나지 말았어야할 왕조였다.반역의 왕조가 바로 조선이며,뒤통수를 치고도 잘먹고 잘살수있다는 저급하고 비열한 민족성과 사회문화에 예속되도록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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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을 살펴보다보면,잘알려지지않은 풍습이나,이야기들이 많다.그중에서 세종21년(1439)의 기록을보면 고구려라는 나라를 함께 구성했던,여진족의 결혼풍습에 대한기록이 보인다.


고구려시대의 결혼풍습을 배울때,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는 풍습이있다는것을 학교의 역사교육시간에 배운다.


형사취수제라는것이,형이죽으면 그아내를 동생이 아내로 맞아드리는 결혼풍습이라는것은,일반적상식으로 대부분 알고있다.




그런데 고구려가 망하구 700여년이 지난후인 세종대왕시기에,여진족의 결혼풍습에대한 조선왕조실록의기록을보니,더확장된 내용이 보였다.원문구절을 보면,"父死娶其妾, 兄亡娶其妻" 여기에 보이는 취자는 "娶=장가들 취"이기에,형이죽으면 그아내에게 장가를들고라는 의미가되는데,이풍습은 고구려시대의 형사취수제라는 말과 동의어라고볼수있다.


여진족또한 고구려라는 나라의 한백성을 이룬 구성원이기에,그들의 풍습이 고구려의 풍습이라구해도 이상할것은없다.그런데 앞구절인 "부사취기처"라는 단어이다.이풍습은 고구려의 역사를 배울때,결혼풍습으로 배운적이
없는 단어다.의미는" 아버지가 죽었을때,그첩에게 장가를들고" ,궁금증이 생기는이유가,고구려가 망한이후,700년이지난 세종조에까지도,여진족이 이러한풍습을 가지구있었다면,고구려시대에서도 이러한 결혼풍습이 행해져을거라는것은 미루어 짐작할수있다.


형사취수제는 고구려의 결혼풍습으로 기록하구,부사취기처라는 결혼풍습이있었다는것은,뭍혀버린것이아닌가 라는 생각이든다.이러한 결혼풍습은 고구려시대를 아룰러함께했던 중국의 당나라 왕조에두,그사례가 남아있다.당태종의 아들인 당고종이 아내인 측천무후는,당태종의 후궁 즉,첩이기에, 아들이 아버지의 첩에게 장가든경우이다.부사취기처라는 여진족의 결혼풍습은,고구려시대상을 고려해봤을때,고구려시대의 결혼풍습으로 존재했다구 미루어짐작해두,이상할게 전혀없다.알송달송 역사기록찾아보기는 이정도로하구,믿어서는 안될 남자의 거짓말 7가지에대하여,적구 글의 포스팅을 마무리하려구한다.


                                          믿어서는 안될 남자의 거짓말 7가지

첫번째:일이 바빠서,전화를 못받았어:숨쉴 힘만있어두 전화는 받을수있어
두번째:오빠믿지? MT가서 이야기만하자:7살만도 못한이해력을 가지구있다는것이다.
세번째:내가 다책임질게,걱정마:상대방이 허수아비를 벗어나면,보복할남자이다.
네번째:한번만용서해줘,다시는 절대 안그럴께:맹세하는 사람은,뒤통수를 꼭친다.
다섯번째:돈빌려줘,나중에 꼭갚을께:좋아하는여자에게 돈꿔달라는 남자는,인생이 마이너스이다.
여섯번째:우린 속궁합이 잘맞는것같애: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일곱번째:지금은 못해줘도,나중에 다해줄께:오늘 못해주는사람은 평생 내일이면 잘해줄께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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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행적과 이미지는 다양한해석이 가능하지만,그사람의 공이나 전술등의 면에있어서는 제대로 알려져있지않다.

연개소문에대한 공에대한 기록은 달랑 2줄밖에없다.
삼국사기의 보장왕21년(662)에 기록되어있다.


"21년 봄 정월, 좌효위 장군 백주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개소문과 사수 언덕에서 싸우다가 그의 군사가 전멸하였다. 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소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다. 그 때 마침 폭설이 내렸으므로 그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역사란 문장구절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그당시 시대적상황을 고려하여 전체적인 문맥을 이해하구
풀이해야한다.세계3대해전의 한사람인 도고헤이아치로 제독두 실전사령관은,수도나 궁성에 머물러
지휘하는게아니라,직접 현장에서 지휘했다는것이다.또한 당나라 장군 이세적을 보더라두,
옛날의 장군들은 80살먹었더라두,현장에서 싸우지,수도에 머물며,현장의 군을 지휘하지않는다는것이다.


그런데,유독 연개소문은은 실전사령관이었는데,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에서 연개소문이 위치는
언제나  평양성에서 지휘했을것이라는 어리석은추정에서 사수대첩의 의미가 축소되구있다.


사수는 평양성근처에 위치해있지않았으며,연개소문은 고,당전쟁시 수도평양에서 머물면서
지휘했다는 이런엉터리해석은 기본적으로  상충되는구절을 만들어내는 허구의 가설일뿐이다.


연개소문은 왕이아니었구,실전사령관이었다.적국과 싸울때 누구보다 먼저,앞장서서 나아가
싸웠을것이다.
연개소문은,평양성에서 지휘하다가,방효태군의 별동대가 온다는것을알구,
소정방에게 포위되어진 평양성을 빠져나가,평양성근처에서 방효태군을 기다리다가 싸워서 이겼다라는
이러한 논리는 전혀 엉터리가설일뿐이다.


좌효위대장군 방효태가 이끄는 군은 별동대가 아니라,핵심적 지원군으로,그병력규모는
기존에 평양성을 에워싼 당군사보다 더많았을것이며,군사의 수는 못해두 30만명은 넘었을것이다.


방효태가 이끄는 군사는 수군이아니라,육로로 행군해서 들어왔다.이미 평양성이 포위된상태에서
지원부대가 오구있다는걸 알았다면,연개소문이 위치는 원래부터,평양성에있지않았구,최전선에
위치해있었다구 보는것이 타당하다
.요동성이나 안시성등 지금의 동북3성근처의 사수라는 강
어디에서인가 퇴로를 끊구,연개소문이 기다리구있었다구 볼수있다.


이때 주목해봐야할 기록이 사수대첩이 일어난 당고조때가 아닌 당태종이 이전에 고구려를 침입하여,
도종이라는 사람하구 나눈대화의 요점이,어째서 자신이 고구려공략에 실패하였는가라구 물었을때
안시성에 집착하지말구,평양에 먼저 별동대를 보내서 혼란케해어야 하지않았나 대답하는기록이다.


연개소문은,최전선에서 싸웠을것이며,싸움에 승리는,오히려 당나라영역으로 꺼구로 진격하는
전술로 맞대응했다구볼수있다.당태종이,늪지를 급하게 도망갔던 이유도,후방이 연개소문에게
차단되었구,오히려 당의 영역에 연개소문이 진격하였기때문이었을것이다.


연개소문이 평양성에 머물러 지휘했다면,어느세월에 평양성에서 연개소문이나와  당태종이 그렇게 겁을
먹구 살기급급하여  급히퇴각하구 도망갔는지 그해답이 나오지않는다.


사수대첩에서두,연개소문의 위치는 평양성이 아니라,최선에위치해서 싸웠을것이구
평양성에 밀구올라간게아니라,최선에서 오히려 당나라영역쪽으로 밀구올라갔다구 볼수가있다.


후방이 퇴로가 막혀있던,소정방군대뿐만이아니라,지원군으로  넘어왔던 모든 행군도총관들두,
요동지역에서 현장지휘를했던,연개소문에 의하여,다 궤멸되었다구볼수있다.


그러므로 사수대첩에서 죽은 당군의 숫자는 최소한 30만명이상이었으며,연개소문의 성격상
단1사람두 남김없이 죽였을것이다.전멸이 뜻하는것은,포로가 없다라는의미로 해석하는것이
타당하다.


어찌되었든,고.당전쟁에서 연개소문의 지휘위치는 평양성이아니라,최전선이었으며,안시성전투,
사수대첩등 모든전투에서 연개소문이었을것이다. 안시성성주 양만춘이라는 인물두 허구일
가망성이 100%라구 생각한다.안시성이 포위되었을때 고구려에서 지원군을 10-20만을 보냈다는것은,
안시성을 구하기위하여 우리나라는 전력을 기울였다구 볼수있으며,그렇게한 가장중요한이유는,
그러한 병력을 동원할수있구 지원할수밖에 없는 중요한인물이 안시성에 포위되어 지휘하구
있었다구볼수있다.


즉,당태종의 눈까리를 맞춘화살이나,당태종이 늪을따라 목숨을 구걸하면서 도망가게한,당나라영토
깊숙히 추격할수있는 권한이나 배포를가진것은,그당시 상황하에서는 일개성주가 그렇게했을리는없구,
현장지휘자가 연개소문이었다면,가능한 이론이라구볼수있다.


안시성전투나,사수대첩 이모든 일련의 전투는 연개소문이 직접지휘했구,당태종이 눈까리에 화살을
맞구,안시성성주를 기특하게여겨,비단과 의복을 내렸다는데,그대상은 허구인 양만춘이아니라,
연개소문을 역적이라구 기술한 삼국사기의 잘못된평가기록때문이었다구 볼수있으며,역적에게는
공이 있었두,작게하거나,없게기술하는게 역적기술에 더합당하기에,누구인지는 모르는 안시성성주라는
두리뭉실한기록으로 넘어가버렸다구 볼수있다.


이런한 시대적기록이 조선후기에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로기록돼지만,조선시대는 고구려역사의
암흑기였기에,제대로된 개념을가지구 고구려역사를 논할수있는 사관이나 역사가는 애시당초 존재하지않구
멸종되었던시대였기에,조선시대에 기록된 고구려역사기록은 가장신뢰할수없는 기록이라구 볼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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