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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나는 조선의 국모이니라"라고 외쳤다는 고종의 왕비 민황후는 과연 그러한 말과 자세를 보여줬을까를 아무리 역사기록을 찾아보아도 보이지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로 궁녀의 복장을하여,구차하게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려고했을뿐이었다.


조선의 민황후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행동을했던 대비되는 왕비가 고려에 있었으니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14세기 후반에 머리에 빨간두건을쓴 도적의 무리였던 홍건적이 자주 고려를 침범하여,우리나의 백성들 괴롭히곤하였다.훗날 이 도적의 무리의 괴수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데,근본부터가 도적의 무리들이였기에 허약한 근본토대를가진 왕조일수밖에없었다.


1363년 고려 공민왕의 나이 33세가 되던해,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의 논공행상에 불만을품은 김용이라는자가,자객단을 이끌고 흥왕사의 행궁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나라일을 보던 공민왕을 암살하려고하였다.


김용의 자객단이 흥왕사로 급시에 습격을가하자,공민왕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는데,공민왕의 아내였던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공민왕을  어머니의 방에 왕을 숨기고,그문앞에 서서 자객단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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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단의 무리가 칼을 휘두르며 방문앞에 이르러 말하길 왕은 어디에있는가? 왕비가 홀로 나아가 외치길"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방안에 들어가려거든 먼저 나를치고 들어가라"하메,무리들이 두려워 태후의 방안에 들어갈수없었다.


김용의 자객단은 나중에 최영의 정예군에의하여 처단되어 반란은 진압되게되고 훗날 아내의 도움으로,자신의 목숨을 구한 공민왕은 흥왕사의 변이 일어난후 2년이 지난 35세되던해 눈이 소복히 많이 내린 2월 추운겨운날에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죽자,


훗날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남긴 조의문에 그때의 상황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는데 자신을 남기고 떠나버린 아내를향한 사랑과 비통한심정을 느낄수가있다."나에게있어 아내보다 중한것이 없었고,흥왕사의 변이 일어나메,나의 몸의 지척에서 적을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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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사후  공민왕은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은왕비를 살아있는사람처럼대하며,식사할때마다 자신의 음식과 왕비의음식을 같이차려  함께 대화를하며 음식을먹었고,일체의 고기를 먹지않았을뿐아니라,나라를 다스리는 일조차 관심을 끊어버려,국제정세에 밝아 요동을 정벌하며 호기롭고,영민했던 공민왕은 이후 360도 다른 무기력한 왕의 모습을 보이며,슬픔속에서 살아가다 결국 신하의 손에의하여 죽음을 당하게된다.


훗날 조선을 개국한 반역의무리들이 공민왕의 후손인 우왕과창왕의 씨를 가짜라고하며,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위하여 역사를 왜곡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보아도 공민왕은 35세에 이미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하여,아이를 낳다가 죽었던걸보면,공민왕의 남성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했음을 알수있고,공민왕 스스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했던 우왕을 훗날 반역의 무리가 "아니다"라고 기록것은 반역을 정당화하기위한 역사조작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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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역사에서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자객단앞에서도 당당히 홀로맞선 여인이었지만,궁중에서의 일상생활모습은 내성적이고,여린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전해지는데,사랑앞에서는 한발자국도 물러 서지않았다.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사랑을보면,남녀간의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라는 말이 사실인거같다.


드라마나 사극일지라도,역사를 조작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것은 반역의무리들이 늘행해왔던 목적을위하여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르지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반만년역사에 왕비로서,노국공주가 행하였던 행동은,실존하는 유일한 기록이며,"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라는 그러한 비장미와 당당함을 보여줬던 인물을 찾는다면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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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재미있는 사건과이야기들이 많다.조선시대에 로또라구 볼수있는 호랑이
대한 기사를 살펴보자.

태종5년(1405년) 호랑이가 궁궐의 근정전에 돌아다녔다.호랑이가 엄격한 사람의 통제를받는 궁궐안까지 침입해서 돌아다닐정도면,허허벌판이나 경계병이없는 일반백성들이 사는 주거지는 쉽게돌아다니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을것이다.

비디오테이프에서 나왔던 어린아이의 울음두 그치게만든다는 호환마마 이런구절이 말장난이아니라 조선시대의 민중의 삶속 현실에서 직접적인 공포그자체였음을 알수가있다.


저녁 으쓱한 시간에 싸립문밖에 혀를 내름두르고,사람을 잡아먹으려구 집문밖을 돌아다니는
호랑이문제는 단순한 호기심차원이아니라,백성의 삶과연결된 조선시대의 정권안위의 차원이었다.

이런현실이다보니,다음과 같은구절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성종2년(1471년) 군인가운데 호랑이에게 창이나 화살을 맨먼저 맞힌자에게는 휴가 50일을주고,
두번째루 맞힌자에게는 휴가 45일을 주고.......

세조9년(1463년) 호랑이를 잡는 궁술에 능한 권이(權耳)라는 사람에게 겸사복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세조14년(1468년)
악한 짐승(호랑이)을 잡아 죽이는것은 상줄 만하니
, 그것을 논공(論功)하여 아뢰라

몇가지 구절만을 살펴보더라두,조선시대에서 호랑이를 잘잡아 죽이는것은 휴가를 얻는
길일뿐만아니라 벼슬까지두 얻을수있구, 말이나 비단등의 물질적혜택두 아울러 상으로
받을수있는 로또였다.

이와는 반대루 호랑이문제를 잘대처하지못하는경우는  잘나가던 벼슬두 댕강되어
파직당하는 사람두있었으니

중종26년(1531년) 호랑이를 잡을때 임무를 소홀히한 대장 김호를 파직하였다.

500년이 넘는 조선시대동안 호랑이에 대한 피해인 호환문제는 어느왕때만 발생하는
일부인 20-30년의 단기간의 문제가아니라 조선시대내내 고질적인문제였다는점이다.

세계각국에는 야생호랑이들이 사는나라들두 많다.그러나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동물원이
아니라,우리나라에서 야생호랑이가 멸종된것이 슬픈일이니 복원하여 지리산이나 설악산,
한라산
등에 야생호랑이를 풀어논다는 정책을 나라에서 시행한다면 과연?  현실적면에서
그 슬픔만으로 국민들이 호환의 문제를 받아드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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