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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들의 일상생활에서 왕이 선택하여 밤에 행차하는 경우 그의미는 필수적인 잠자리가 마련되어졌는데,

이러한 왕의 선택에대하여 궁녀는 거부할 방법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예외적으로 궁에사는 여자중 거부할수있는 사람이 왕후,황후들이었는데 이들의 거부권도 오로지 한가지 이유일때만 가능했고,대신할 역할이 주어져야 인정되어 질수 있었다.

춘향전에서 춘향이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는것이 오늘날에서야 죄에 해당하지 않는것이지,그당시 기준에서는 그러하지 않았다.오늘날에는 성적결정권이 여성에게 주어졌지만,봉건체제하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고,이것을 거부하는것은 죄에 해당하고,하물며 왕의 선택에 거부는 왕에대한 모욕적 반역과 동격으로 극형에 해당할수 있었다.

왕비나 황후들이 거부할때도 명분이 있어야했는데,생리하는 경우에만 인정이 되었고,이러한 경우도 왕후나 황후는 왕를 위하여 자신의 시중을드는 궁녀 가운데 한명을 대신 지정하여 왕과 잠자리를 하도록 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중전의 시중을 드는 나인들중에 단한번의 잠자자리로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왕비나 황후등의 생리는 대면적인 거부권이 가능했지만,궁녀들도 여자인지라 생리하는 경우에 왕의 선택을 받았을때 거부할수조차  없게되는 숙명인데,이러한 경우는 애시당초 대면하기 전에 미리 왕의 선택권영역에서 내시나 환관등이 조언하거나 제외시켰다.왕비나 황후는 이에 해당하지 않을 뿐이었다.

왕에대한 궁녀의 잠자리 선택권은 궁녀에게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왕후나 황후도 자신의 기분에따라 거부할수없고,거부하는 경우는 투기로 몰아,사약을 통한 극형에 처해질수도 있었다.왕비나 황후가 왕이 밤에 자신의 침실에 들어와 잠자리를 하는경우,죄를 받지않고 거부할수있는길은 생리하는 경우라는 명분을 말할수 있었고,이러한 명분도 자신의 기분이나 투기에 해당하지 않음을 보여주고자,왕비나 황후를 시중드는 궁녀가 대신하여 동침하도록 시켰다.

이처럼 투기라는 죄명은 궁녀,왕후나 황후,일반여염집 여자들 모두에게 코에걸면 코걸이,귀에걸면 귀걸이에 해당하는 조항이었기에,봉건제하에서 여자에게있어 성적결정권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고 왕비나 황후라고 할지라도 스스로가 잠자리를 하고 싶다고 왕의 침소를 찾아갈수 없었고,신체적인 특성상 주어지는"생리"에 대하여도,왕이 기분나쁘지 않도록 대신 잠자리를 할 궁녀를 지정해 주는것이 투기에 해당하지않는 여자가 행하여야 할 덕으로 규정되어졌다.

유교사회에있어 궁녀,왕비등의 신분의 변화는 혼자의 운명이 아니라,그자신이 속한 일가친족의 삶과죽음을 가르는 운명공동체였기에,여자로서의 성적결정권의 기준은 자신의 기분이나 기쁨은 부차적일것을 숙명적으로 교육받아졌고,그것이 당연한것으로 사회적도리가 형성되어졌던 시대적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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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60년 6월21일 소정방이 이끄는 10만명의 당군이 인천의 덕적도라는곳에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다.

소정방과 신라의 협력을 위하여,신라에서는 태종의 둘째아들인 김인문을 소정방과 동행하게하여 군사를 이끌게하고,

태종의 첫째아들인 김법민은 김유신장군과 함께 군사를 이끈다.김법민은 훗날 왜적으로 침입으로부터 동해의 용이되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문무왕이 된다.

신라에게 있어 왕자들의 배치를보면 당나라의 군사보다는 김유신장군이 이끄는 군사에 더 중요성을 두었음을 알수가 있다.두나라가 작전회의를하여,660년 7월10일날에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백마강입구에서 모여 함께 사비성을 공략하는것으로 했는데,여기서부터가 백제의 계백 오천명의 미스테리가 시작되어진다.

먼저 백제측에서보면 당나라군사의 침략이 갑자기 이루어져 사비성을 친게아니라,20여일이 터울을 두고,신라의 영역이던 인천지역을 당도한후,대강의 작전계획을 신라와 짜고,배의 방향을 바꿔,백마강하구로 진격해드러 갔다면 이에대한 대비를 백제에서도 할수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을 알수가있다.

백제의 충신들이 당나라의 침공이 있기 4년전에 "전투가 벌어지면 당나라군은 백강을 넘지않게 하시고,신라군은 탄현을 넘지말게하소서"라고 계책을 올리는것을 보면,백제는 국제정세를 잘파악하고 있었고,고구려와 연합하여,신라를 공격했을때 어떠한 국제정세가 벌어질것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 알수있고,



당나라 수군이 직접 백강입구로 들이 닥친것이 아닌 인천에서 대규로 집결한후,다시 백강입구로 쳐들어왔는데,이에대한 대비를 할수있는 여건은 충분히 마련할수있는 상황이었다.그러나 백제가 보여준 전투다운 전투는 황산벌에서 벌어진 오천명의 군사들이 방어가,제대로 싸워본 처음이자 마지막기록이 되어진다.

여기서 드는 두번째 의문은 백제의 군사력이 신라를 압도했고,역사서에 패망당시 80여만호에 인구가 600만명이 넘었다고 하였는데,농번일치의 제도로 외적의 침입하면 남자는 모두 군인이 되는 제도로 보았을때,600만명의 절반이 남자라면 300만명,여기에 노인이나 어린이를 빼고,정상적인 젊은이를 최소한 10%잡아도 위급시에는 최대 30만명의 군사력을 동원할수있는 국력을 가졌다고 추측해 해볼수가 있다.

고려 광종때,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30만명의 광군사를 조직 할수있는 인적환경을 보았을때,고구려이든,백제이든,신라이든 아무리 어려울때에도 결전을 할수있는 15만정도의 군사는 마련 할수있는 국력이 삼국에는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이러한 군사력이 추정이 가능함에도 신라군 자체로만 5만명을 동원하는 황산벌싸움에서 계백은 단지 오천명만을 가지고 출전할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을수 밖에없다.신라군은 인천의 덕적도에서 당나라군과 만났을때 작전회의를 통하여 당나라군의 배에는 신라의 두번째 왕자가 길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백제의 지리를 선도할 신라군이 일정정도 함께 승선하여 백마강입구로 나아갔음을 충분히 예상할수있다.그러므로 신라의 원정군 규모는 김유신이 이끄는 5만명이외도,식량이든 군수품이든 당나라군사와 함께하여 지원할 공병.식량부대격인 신라인들이 동해하여 지원하고있었을 것인데,이러한 군사도 대략 2만은 넘었을것으로 볼수있다.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거나,당나라군의 변심에의한 공격을 방어하기위한 대비로 ,신라는 일정정도의 예비군사력을 신라지역내에 자체 보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면,신라가 백제와의 일전에 대비하여 최소한 10만명 이상의 신라군을 움직일수있음을 알수있고,얼추 예상 삼국의 국력과 맞아 떨어진다.



백제의 군사들은 다들 어디에 가있었느냐라는 의문이 들수밖에 없는데,이것의 진실은 계백의 계급이 낮은것에 주목해야한다.오늘날에보면 병마원수라든지,수륙양용원수라든지 삼군통제사라든지,왕이 내릴수있는 직위는 여러가지가 있었을것인데,달랑 계백장군일뿐이다.달랑이나 달솔이나 발음이 비슷한것을보면,정말 달랑 그것밖에라는 의문이 들수밖에 없는 달솔의 계급을 가진 장군일뿐이었다.

이것은 훗날 백제가 멸망한후 신라에서 논공행상이 행하여졌는데 계백의 군사와 출전했던 달솔보다 위에 계급인 좌평 충상,달솔 상영등을 태종무열왕이 이들에게 일길찬이라는 높은관직을주며 후대하였다는 기록을 봤을때,아래것인 계백은 전사하고,그보다 위에 계급으로 참전하여 포로로 잡혔던 충상,상영이 신라의 높은 관직을 하사받는것을보면 백제가 신라군을 맞아 싸운 황산벌의 백제군 규모는 오천명이 아닐수있고,오천명을 제외한 군사는 싸우지않고 항복했거나,그렇게 되겠끔 충상,상영이 협조했기에,그에대한 공으로 신라의 태종이 관직을 제수했음을 유추해 볼수가 있다.

계백의 이끈 오천명은 별동대고,그와 함께 출전한 본진은 최소 3만이상의 백제군이 뒤에 대기 하였다라고 할수가있다.삼국사기의 기록은 삼국의 초기국가부분의 신뢰는 미약하나,그이후에 기록되어진 역사기록의 정확도는 아주높은데,계백이 오천명의 결사대로 싸웠다라는 기록이 사실에 부합하다라는것을 부정할수없고,그렇다면 이해될수없는 백제의 국력에 비해 터무니없는 황산에서의 군사수는 충상.상영의 논공행상에서의 부귀영화에서 답을 찾을수 있을것같다.

이러한 결과가 아니라면,어디에선가 역사에 기록 되어지지 않은 백제군이 대규모의 피해를 입은 전투가 있었다는 것인데,이러한것이 있었다면 삼국사기에는 없다해도 중국측 역사서나,일본역사서등에는 있어야할것인데 전혀없는것을 봤을때,계백은 싸움에 있어 선봉대역할을 했던 특공선발대를 이끌었던 장수의 하나였을 뿐임을 알수가 있다.

특공대가 무너지자,백제군의 본진은 우두머리들과 함께 그대로 항복해버린 상황으로 보는게 자연스럽고 다른방향인 당나라군사를 대비한 백제군의 본진도 보전되어 그쪽에서도 황산벌싸움과 비교되어지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역사의 단편적 기록들로 미루어 짐작할수가 있다.신라군이 합류할 약속시간까지 미리맞춰 백강하구에서 상륙작전을 진행하던 당나라군이 신라군이 올 동안 전진하지않고 있다가,김유신장군의 신라군이 늦게라도 합류하여 앞으로 나아가자하는데도 소정방군이 머뭇거렸다는 기록을보면 소정방은 단독적인 백강하구상륙전에서 대대적인 백제의 공격을 받았고,그영향으로 더이상의 전진을 하지않고 약속시간이 지났는데 도 신라군을 기다렸다고 볼수있고,

이후에 신라와 당나라군이 합세하여 사비성의 8킬로 지점에 이르렀을때 다시 대대적인 백제군사의 반격이 있었는데 중국측 역사서에는 이때 일만명정도의 백제군이 죽었다라고 했음을 볼때,포로를 감안하면 2-3만명의 백제군이 공격했음을 알수가 있다.

660년 7월10일날에 백강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던 김유신의 신라군이 예상기일인 660년 7월11일 늦은오후에 백강입구에 당도했을때,소정방이 김유신장군의 부하에게 늦게 당도한 책임을 물어 참수하려고 하자, 도끼자루를 손에들고 소정방등의 당나라장군들을 바라보며 황산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는것들이 늦은책임을 물으려하다니,당나라군사를 먼저 없애버리고,백제를 치겠다라는 기록이 남겨있음을 봤을때,

김유신의 사내다움은 삼국의 제일이요,대국의 군사에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음을 알수가 있고.이러한 모습은 한번 어쩌다가 아니라,김유신장군 자체가 지나온 전사에있어 기록이 말해주고있는데,

김유신이 아버지와 함께출전하여,고구려와 싸울때 신라군이 고구려군을 두려워하여 사기가 떨어지자,아버지에게 말하고,혼자 적진으로 들어가 상대방 장군의 목을 베어서 돌아와서 그기세를 몰아쳐서 이겼다는기록이나,황산싸움에서 김유신의 친동생 아들인 반굴 그리고 사촌의 아들 관창등이 홀로 적진에 드러가 싸우다 전사했다는것등을 보면,

김유신장군이 살아온 무인의 길이,자신과 자신의 집안사람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생명을걸고 전투에 임하는것을 기본으로 했음을 알수가 있다.뒤에 앉아서,돌격하라의 장군스타일이 아니라,나를 따르라하며 앞으로 먼저 나아가 싸우는 장군 스타일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반굴과 관창이 희생양이라고 하는데,어찌보면 맞지만,김유신이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홀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의 목을베고 돌아와서 승기를 잡았듯이 반굴과 관창이 계백의 목을 치고 가지고 돌아왔다면 반드시 죽어야할 운명은 아니었다.단지 반굴과 관창은 그러할정도의 운명의 그릇을 가지고있지 못했음이다.

계백이 신라대장군 김유신을 두려워한 이유도,김유신장군이라는 사람됨이 자신을 따르는 부하의 목숨을 자신의 아들과 친척들보다 못하다 생각치않고,오히려 힘든상황일수록 먼저 자신들의 가족들이 솔선수범을 보이도록 행동했다는 점이다.김유신 장군의 참모들에게 유독 김씨가 많은데,이러한 인물들이 공통점은 가장 어려울때 가장먼저 선봉의 죽음을 맞이해야함을 김유신의 삶의 행적을보면 이미 각오하고 참전함을 알수가 있다.

계백은 마지막 순간에 전사하면서도 이러한것을 생각한다.왜 자신은 죽고,김유신이 승전의 장군이 될수밖에 없는지,왜 자신은 달랑 오천의 군사만을 가지고 싸워야했는지, 백제가 김춘추와 김유신의 분노를 만들어내게된 원천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었는지,등을 말이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백제 정벌전이 벌어지기 이전에 자신의 장녀가 대야성에서 백제군의 윤충에게(이사람의 집안은 백제에게 병주고 약주는 집안이 되는데,위에 형님인 성충은 백제의 3충신이 하나가되고,이사람의 동생인 윤충은 신라의 김춘추와 김유신장군의 불구대천의 원수의 감정을 갇게 만들어 내어 백제패망의 근원적 감정을 만들어낸 장본인인데,특이하게도 이들은 실무진급 장군들이아니라,부여씨를 성으로하는 왕족 집안출신이라는 점이다.실무자급 장군이었다면 김춘추의 장녀의 머리를 베어 사비성으로 보내는 이러한 원한의 감정을 갖게할 짓을 독단적으로 처리할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든다.)목베여 죽여졌다는 소리를 듣은이후로 미친사람처럼,자신의 장녀를 그리워했으며,그 분노로인하여 술이 밥이었다고 전해지고있다.

김유신은 자신의 동생의 딸이 목베여져서 그머리가 사비성으로 보내졌다는것을 알고,한 하늘을 이고 같이 존재할수없는 나라라고 규정하여,분노에찬 정벌을 계획하게 되는데,목베여진 머리가 사비성으로 보내진후 6년이 넘어가도록,유해를 돌려받기위해 노력하다가,김유신 자신이 포획한 백제우두머리급 장수들 8인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신라로 유해를 돌려 받았을만큼,김유신에게 있어,목베어진 동생의 딸에대한 복수의 칼날을 가는 시간이 일반인의 예상을 벗어날 정도의 기다림이었다는 점이다.대야성에서 목베어진 여자에대하여,나중에 문무왕이되는 김법민이 항복한 백제태자에게 분노하여하는 말이나,김유신의 혼신을 다하여 유해를 돌려받으려고 했던 기록등을보면,이복누이라기보다는 친누이로 판단하는것이 자연스럽다.

어찌되었든 그당시 김유신을 건들이고는 나라의 멸망을 각오해야할 만큼,절대적인 부하들의 믿음과 신뢰를 김유신장군이 갖고있었음을 알수있고,고구려의 연개소문조차도 김춘추를 죽이려했지만,그후에 닥칠 김유신장군과의 일전을 두려워하여 살려보내줬음을 김춘추와 김유신의 약속의 기록을 보지않더라도,실제로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죽였다면,백제가 먼저 멸망하는것이아니라,고구려가 먼저 대상이 되었을것을 김유신의 행적상 능히짐작할수있다.

오늘날 역사인물들에대한 평가에서 우리나라의 오천년역사의 제일의 장군을 뽑으라면 연개소문,계백,이순신등이 많이있지만,제일은 신라의 김유신대장군이다.천오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그 많던 왕이나 영웅호걸들의 무덤은 어디에있는지 전해지지 않는것이 다수이지만,김유신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나라의 흥망성쇠로 국가명들이 여러 바뀌었지만,그의 무덤은 어느나라 시절이던간에 잘보전하여,후세에 전할 위대한 장군이라는 개념으로 관리되어 계속이어져 왔다는점이다.

오늘날의 한민족의 뿌리가 어디서왔는지 아는분들이 드문것같다.오늘날의 한민족이라는 민족개념을 만들어낸것은 김유신대장군이후에 생긴것이고,김유신장군이 없었다면 한민족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을것임을 알아야한다.대한민국인이면서 대한민국의 한이라는 개념이 어디에서 나온것인지 모른다면 부끄러운것이다. 한민족의 개념을 말하고,일통삼한이 한민족이 되어야함을 유언을 할정였고,그것이 죽어서도 소원이라고했던 김유신대장군의 애국혼을 모르고는 한민족을 말할 자격이 없다.한민족을 만들어낸 오천년 역사의 제일의 장군인것이다.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되던날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강물로 뛰어 내렸다고 하는것에 패망의 군주를 험담하기위해서 숫자를 부풀렸다고 하는데 이러한것도 그당시 백제라는 나라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록된다.삼국시대에는 순장이라는 풍습이 존재했는데 왕과 관련되어진 여자들은 왕이사후,같이 자결하거나 무덤에 뭍히는 전통이 있었는데,백제의 패망의 순간은 다시는 돌아올수없는 국가의 상태를 의미했고,의자왕의 기록되어진 아들들만도 40여명이 넘었음을 알수가있는데 그만큼의 아들이 태어날려면,비율상 여자들도 그만큼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의자왕은 보통으로 잡아도 100여명의 아들딸을 슬하에 두었음을 알수가 있고,

궁녀라는 신분이 잠자리를 같이하는 궁녀만이아니라,밥을 짓는 궁녀,옷을 담당하는 궁녀등등 여러부류의 일을 담당하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궁녀라했기에,600만명의 인구를 가졌던 백제가 3천명의 궁녀가 있었다는것이 믿을수 없다는것이 무지다.잠자리하는 궁녀라는 개념으로 받아드린다면 말도안되는 숫자이지만,궁녀라는 개념이 그렇게 쓰여진것이 아니라,궁의 일을하는 모든 여자들이라고 받아드리면 이상할것도 없다.



일주일정도 항전하던 사비성의 마지막날 당군이 들이닥쳤을때 당군과 신라군이 백강입구에 도착하여 집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지 3일도 안돼어 먼저 사비성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도망간 의자왕과 귀족계층은 살아남고,왜 궁녀들은 거이 대부분 강물에 몸을 던져을까하는 의문이 생길수도있다.이것은 궁녀라는 직업이 모두 여자였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면 당나라군사들에게 치욕적인 행위를 당하다가 죽거나,노예로 당나라에 끌려가 팔리는 신세가 되어짐을 충분히 예상할수 있었고,오늘날은 조금 개방적으로 되었다는 의견도 있지만,근세에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정조를 중요하게 여겼는데,하물며 왕을 위한 순장까지 명예로운 전통이라고 남아있던 삼국시대에서 이민족에게 정조를 빼기는것은 왕의 아내로 규정되어지는 궁녀라는 신분의 여자들에게는 삶보다 더한 불명예였기에,왕의 여자로 죽는것을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함이없이 낙화암에서 몸을 던질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낙화암에서 백제의 꽃다운 궁녀들이 강물에 몸을 던져을까? 그런 의문이 든다면,그렇다에 목숨을 걸것인지,아니다에 목숨을 걸것인지 선택하라면,그렇다에 백번이라도 거는것이 지혜로운 판단이라고 할수가 있다.낙화암에서 있었던 궁녀들의 애국혼은 그만큼 신뢰 할수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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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나 기타사정으로 궁궐밖에 나가살게되는 궁녀들은 비록 민가에서 산다고해도,왕의 여자들이었던 까닭에 결혼하거나,남자와같이 살수가없었다.


형식상으로는 민간인 처녀들이었기에 법으로 궁녀의 신분이었다가,민간인이되었다고 결혼하지말라는 그러한법은 없었지만,


왕가의 입장에서 왕조의 여자였던 궁녀들을 신하가 데리고산다는것은 주.종의 신분관계가 엄격한 조선유교주의사상하에는 불충의 개념이 될수밖에없었기에,나서서 결혼하려는 사람들은 존재할수가없었다.


이러한 예외를 깬 특이한 경우가 있었는데,남치원이라는 사람이다.병으로 궁궐밖을 나간 궁녀을 첩으로 맞아들여서 살고도,무사했을뿐만아니라,벼슬까지도 할수있었는데,어떠한 사연이 있었길래 감히 왕의여자를 첩으로 두고도 살아남을수있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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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의 슬하에는 배다른 형제자매가 많았다.성종의 첫째아들이 연산군이었고,배다른 둘째아들이 진성대군인 중종이었다.연산군과 진성대군의 나이차는 12살이었는데,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는 일찍죽었고 진성대군의 생모인 숙의윤씨(정현왕후)는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의원수를 갑는다고 일으킨 피바람속에서도 숨죽이며 살아남아 자신의 아들인 진성대군과 자신의 목숨을 유지할수있었다.


연산군과 진성대군의 배다른 형제자매중에 성종의 후궁인 숙의심씨의 맏딸인 경순옹주가 남치원에게 시집을갔기에 남치원은 성종의 부마이면서,연산과진성의 처남이기도했다.숙의 심씨와 훗날 중종의 어머니가되는 숙의 윤씨는 서로를 잘아는 사이의 친분을 가지고있었다.


연산군시대에도 남치원은 우대를 받았고,중종시대에도 배려를받았는데,중종은 연산군을 내쫓고 왕이된 임금이었기에,쫒겨난 왕의 측근들은 대부분 처단되기마련인데,남치원은 연산군의 배려를많이 받았는데도,중종대에 이르러도 특혜를 받는걸보면 평소처신을 잘하지 않았을까하겠지만,


남치원이라는 사람의 일상생활행동을 살펴보면,오늘날의 망나니나 조폭같은 인물이었기에,성종의 여러 부마들중 한사람인 부마라는 관점보다는 경순옹주의 어머니인 숙의심씨와 중종의 어머니인 숙의윤씨의 관계가 특별했다고 생각할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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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치원에대하여 기록된 행동들을보면,다른지방을 50명정도의 무리를 이루어 여행다니며,자신에게 잘못보이는 사람은  일부러 시비나꼬투리를 잡아 그자리에서 패거나 가둬둔다든지,승려들이 사냥하는데 방해가된다고 절간자체를 박살내버린다든지 일반사람같았으면,중한형벌을 받았을것인데,유야무야로 넘어가는 기록들뿐이다.


평소행실이 이모양이었던 남치원이 궁궐의 대비전에서 나인으로 일했던 궁녀가 병으로 민가에 나가살게되었는데,그 궁녀를 데려다 자신의 첩으로 만들어 버린일이 생기게된다.다른것은 그냥 넘어간다고해도,이것은 그냥넘어갈수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조정에서는 연일 궁녀를 데려다 첩을삼은 남치원은 불충이기에,잡아다 죽여야한다고 상소를하니,


처음에는 이복동생의 남편이였기에 생각해서 눈감아 줄려고해도 궁녀의 체계자체를 무너뜨릴수있는 행위였기에 형벌은 내려야겠고 잡아들이면,반드시 죽여야하는 불충에 해당했기에,처단해버릴까 하다가도,어제밤에 자신의 모후이면서 대비인  정현왕후가 한말이 귀가에 멤돌았다.


"성종시대,악독한 폐비윤씨의 피박속에서 그리고 연산군아래에서도 나와 숙의심씨는 서로를 도우며,이겨냈었는데 이번일은 불문하고 넘어갔으면 하네" 하지만 어머님,신하들의 상소가 너무강해서......."신하들의 말은 중요하고,내말은 암것두 아니라는 말이지,아이고 내가 지금까지 누굴믿고 모진 연산군의 핍박속에서도 살았는데,늙으면 빨리죽어야 할까보네 내말은 상관말고,신하들 말 잘듣고 잘사시게,그만 물러가게......."  어머님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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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대간들이 남치원을 잡아들여 죽이라고 탄핵했지만,중종의 입에서 나오는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불허한다,불허한다,불허한다" 결국 남치원을 유배를 시키는가싶더니,유야무야되어지게된다,중종의 생몰년은 1488-1544 이고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는1462- 1530 이기에,남치원은 중종25년 1530년까지는 중종의 어머니의 보호를 받았을것같기는 한데,남치원의 공식적인 벼슬은 중종14년 1519년이후로 사라져,생몰년을 알수가없다.


병으로 민가에나가 사는 궁녀에대하여,사람들이 남치원처럼 행동했다가는 목숨이 열개라도 부족한 왕과신하의 관계가 엄격했던 불충하면 같은형제라도 죽임을 당하는 조선시대에서 부마로서 대놓고 꺼리김없이 행동하며 살다간 인물 1위를 고른다면  남치원이다.중종과 남치원의 기록을 살펴보다보니,왕이라고할지라도,자신의 어머니가 후원하는 사람에게는 어쩔수가 없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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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속에서 최후의 순간에 "나는 조선의 국모이니라"라고 외쳤다는 고종의 왕비 민황후는 과연 그러한 말과 자세를 보여줬을까를 아무리 역사기록을 찾아보아도 보이지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로 궁녀의 복장을하여,구차하게라도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려고했을뿐이었다.


조선의 민황후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정반대의 행동을했던 대비되는 왕비가 고려에 있었으니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14세기 후반에 머리에 빨간두건을쓴 도적의 무리였던 홍건적이 자주 고려를 침범하여,우리나의 백성들 괴롭히곤하였다.훗날 이 도적의 무리의 괴수인 주원장이 명을 건국하는데,근본부터가 도적의 무리들이였기에 허약한 근본토대를가진 왕조일수밖에없었다.


1363년 고려 공민왕의 나이 33세가 되던해,홍건적을 물리친 공훈의 논공행상에 불만을품은 김용이라는자가,자객단을 이끌고 흥왕사의 행궁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나라일을 보던 공민왕을 암살하려고하였다.


김용의 자객단이 흥왕사로 급시에 습격을가하자,공민왕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는데,공민왕의 아내였던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공민왕을  어머니의 방에 왕을 숨기고,그문앞에 서서 자객단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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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단의 무리가 칼을 휘두르며 방문앞에 이르러 말하길 왕은 어디에있는가? 왕비가 홀로 나아가 외치길"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방안에 들어가려거든 먼저 나를치고 들어가라"하메,무리들이 두려워 태후의 방안에 들어갈수없었다.


김용의 자객단은 나중에 최영의 정예군에의하여 처단되어 반란은 진압되게되고 훗날 아내의 도움으로,자신의 목숨을 구한 공민왕은 흥왕사의 변이 일어난후 2년이 지난 35세되던해 눈이 소복히 많이 내린 2월 추운겨운날에 자신의 아내가 아이를 낳다죽자,


훗날 자신의 아내를 위하여 남긴 조의문에 그때의 상황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는데 자신을 남기고 떠나버린 아내를향한 사랑과 비통한심정을 느낄수가있다."나에게있어 아내보다 중한것이 없었고,흥왕사의 변이 일어나메,나의 몸의 지척에서 적을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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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사후  공민왕은 3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죽은왕비를 살아있는사람처럼대하며,식사할때마다 자신의 음식과 왕비의음식을 같이차려  함께 대화를하며 음식을먹었고,일체의 고기를 먹지않았을뿐아니라,나라를 다스리는 일조차 관심을 끊어버려,국제정세에 밝아 요동을 정벌하며 호기롭고,영민했던 공민왕은 이후 360도 다른 무기력한 왕의 모습을 보이며,슬픔속에서 살아가다 결국 신하의 손에의하여 죽음을 당하게된다.


훗날 조선을 개국한 반역의무리들이 공민왕의 후손인 우왕과창왕의 씨를 가짜라고하며,역성혁명을 정당화하기위하여 역사를 왜곡했지만 오늘날의 관점에보아도 공민왕은 35세에 이미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하여,아이를 낳다가 죽었던걸보면,공민왕의 남성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했음을 알수있고,공민왕 스스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했던 우왕을 훗날 반역의 무리가 "아니다"라고 기록것은 반역을 정당화하기위한 역사조작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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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역사에서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는 자객단앞에서도 당당히 홀로맞선 여인이었지만,궁중에서의 일상생활모습은 내성적이고,여린마음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전해지는데,사랑앞에서는 한발자국도 물러 서지않았다.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의 사랑을보면,남녀간의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라는 말이 사실인거같다.


드라마나 사극일지라도,역사를 조작하여 거짓을 만들어내는것은 반역의무리들이 늘행해왔던 목적을위하여 수단을 정당화하는 논리와 다르지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반만년역사에 왕비로서,노국공주가 행하였던 행동은,실존하는 유일한 기록이며,"나는 고려의 국모이다"라는 그러한 비장미와 당당함을 보여줬던 인물을 찾는다면  인덕공명자예선안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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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나,저제나 오직 한남자를 숙명처럼받아드리는 왕조시대의 궁녀들은 일반적인 혼인절차를통하여 남자의 아내로서 살아가는일반여자와는 궁녀가되어지는 목적과삶이 달랐다.



가난은 나라도 어찌할수없다라는 왕조시대아래에서는
한입이라도 덜수있는 길이 딸들을 궁녀로보내는것이었으며,


기득권신분층인 집안에서는 왕비나 후궁으로는 보낼지언정 일반궁녀로 보내려고 하지않았다.



오늘날 초등학교 입학연령쯤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여자들인 궁녀들은 오직 한남자인 왕의 성은을 입지않는한 늙어죽을때까지 처녀의 삶으로 생을 마감해야했다.


왕이 70먹은 할아버지이든,배볼딱한 못생긴눔이건 상관없이 궁녀의 남편이 될수있는 사람은 오직 한남자로 궁궐에 들어갈때부터 정해져있었기에 선택에 여지는 죽을때까지 존재하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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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궁녀에서 임금과 하룻밤이라도 보내면 일반궁녀에서 하루아침에 후궁이라는 신분상승을 얻을수있었기에,궁녀는 남자와남편으로서 왕을대하는게아니라,어렵게살아가는 자신의 가족과삶의 편안함이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기에,왕의 눈에 띠려고 궁녀들사이에는 불꽃티는 암투가 벌어지곤했지만 왕이 남자나남성으로서 신체적인 매력이 있어서 그러한것은 아니었다.

 


일반궁녀에서 후궁이나 왕비가되었다고해도 왕을 남편이나 남자로 독점하려는경우에는 질투나 투기로몰아 최악에는 사약을받아 죽을수도있었기에,왕의 여자들은 왕의 사랑을받는시기에는 친정과 가문그리고 자신의 모든편의와혜택을 얻을수있었지만,관심이 멀어지면 명목상의 신분만을 유지할뿐 쓸쓸한 삶을 살다가 죽어야하는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오늘날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남편이라는 개념은 애시당초 존재할수가없었고.바람둥이 남자가 될수밖에없는 왕의 환경속에 놓여있던 왕비와후궁그리고 궁녀들의 사랑이란 왕의관심을 얼마나 오래 얻을수있는 기간을 가질수있느냐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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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의 품계는 다음과같았다.정1품 : 빈,종1품 : 귀인 정2품 : 소의 종2품 : 숙의 정3품 : 소용 종3품 : 숙용 정4품 : 소원 종4품 : 숙원 정5품 : 상궁 종5품 : 상복 정6품 : 상침 종6품 : 상기 정7품 : 전빈 종7품 : 전설 정8품 : 전찬 종8품 : 전등 정9품 : 주궁 종9품 : 주치

우리가 흔히 티브에서 상궁이라는 부르는 사람은 정5품의 품계를가지고 종4품인 숙원과는 한단계 벼슬의차이였지만 종4품이상부터가 왕의 성은을입은 후궁의 신분이었기에 김상궁이나 안상궁이나로 불리는 궁녀들은 평생 왕의 성은을입지 못한 신분을가진 일반궁녀의 최상의 단계임을 알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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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의 화면속에서는 궁녀들사이에 무수리라는 명칭도보이는데,무수리는 궁녀의 신분을가진 여자는아니었고,궁궐내에서 궁녀들의 잡다한일을 도와주는 오늘날의 파출부형식으로 궁궐내에 살지않으면서 궁궐로 출퇴근하여 일하는 여자들이었다.


무수리들도 궁궐로 왔다갔다할수있었기에 왕의 눈에띄어 왕의 잠자리상대되어 후궁의 신분을 얻을수도있었지만,극히드물고 무수리의 자식중에 왕이된경우는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있는데,영조의 어머니인 최무수리(종4품 최숙원)는 무수리라는 신분상의 제약으로인하여,왕의 신분을가진 영조조차도 자신의 어머니를  비로 높일수가없었다.무수리와 궁녀사이에도 신분질서차이가 존재하고있음을 알수었다.


영조는 늙어서도 자신과 60살차이넘는 여자를 신부로맞이해서 산걸보면 배볼딱나왔든,머리가 허연 할아버지이든 남자라고는 왕밖에 선택할수없는 운명적신분인 왕의 여자들인 궁녀들의 일생은 오늘날에 중요시하는 사랑.좋아함의 감정은 배부른 소리일수밖에없는 슬픈존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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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점을치는 사람이었던 지화라는 사람의 관계를 통하여,세종이 풍수나 점같은것에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수가있다.


지화는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때부터 국가의 점치는 일과,혼례에대한 궁합을 보는일을 맡아서했다.

지화의 운명은 태종과 세종에대한 "말한마디"인과응보에의하여  극과극인 운명을 살게된다.


태종은 세종처럼 남녀관계에는 금슬이 좋아서 왕비뿐아니라 많은 궁녀들에게서 아이를 낳았다.




태종은 궁녀에게서 나은 자신의 딸들이 혼례할 나이가 차자,궁합을 잘보는  판수인 지화를 시켜,알맞은 사위감을 찾도록한다.지화는 장성한 아들이 있는사대부집들을 돌아다니며 생년월일을 알아보러다니던중,이속이라는 관리의집에가서 그 집의 아들의 생년월일을 묻자,


이속이 지화에게 말할길 "명문가의 비빈의 딸이아닌,일반궁녀에게서 난 딸의 혼례를 위하여 우리아들의 생년월일을 묻는거라면,우리아들은 죽을걸로 가서 말해주게" 지화는 자신의 들은 말을 그대로 태종에게 해버렸다.


태종이 누구인가? 자신을 거스리는것은 외척이고,형제이고 박살내버리는 조선조 최대의 터프가이 왕이 태종이었다,대노한 태종은 이속을 잡아오게하고는 말할길" 근본이 틀려먹은 가문인걸 내 익히 알고있었기에,나도 혼인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그러나 네놈의 말투는 용서할수가없다"하고는 이속을 감옥에 가두어 말에대한 댓가를 치루도록한다.


지화의 입장에서는 꼭 이속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궁합을 맞춰볼 사대부집의 아들들이 많이있었기에,이속이 한말을 사적인 대화로알고 뭍어주고 태종에게 말하지않을수도 있는 문제였다.지화는 평소 이속을 좋게보지않았거나,태종이 자신에대한 신임을 널리 자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훗날 이러한 말실수에대한 연은 결국 지화 자신도 범하여 자신의 운명이 박살나버리걸보면 연에의한 인과응보라는 말을 되새겨보게된다.


세월이 흘러 태종이 죽고,세종이 왕위에 올랐다.지화는 선대부터 국가의 점과 혼례에대한 일을 잘한 공이있었기에 세종은 신하들이 "점쟁이에게 벼슬을 내리는것은 가당치 않습니다"라는 상소를 물리치고 지화에게 사옹원사직이라는 3품에 해당하는 꽤 높은 벼슬을 내린다.


1444년 겨울 어느날에 부련듯 나라의 일에대한것을 점쳐보려는 생각이 들었던 세종이 신하를 시켜 지화를 보고싶다고 하였다.신하가 지화의 집을 찾아가보니,지화는 없고,그대로 돌아갈수없어 여러곳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지화를  찾아냈는데 다른사람의 집에서 술을 먹고있었다.


신하가 말하길 "전하께서,나라의 일에대하여 점을 칠일이 있다고 부르십니다" 술을 먹어서인지 눈에 뵈는게 없던 지화가 말하길 (오늘~꺼억,노새,노새 젊어서 놀아~ 아 좋다~ )"술을 많이 먹어,오늘은 점을 칠수가 없으니 잘말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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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가 세종에게가서 그대로 말하길 "술을 많이 먹어 오늘은 점보는 일을 못하겠답니다" 이말을 들은 세종이 대노하여 "이눔이 운명보는것을 좀 안다고 음흉하고 간교하기 짝이 없는눔이구나,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그 말뽄새에대하여 문초하도록하여라"하고는 결국 세종은 지화를 남도땅 외딴섬인 진도로 귀향보내버려,지화의 운명도 한순간에 막장인생으로 변해버리게된다.


세종이 풍수지리나 점치는것에대하여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진 왕인지는 1449년 4월의 조선왕조기록으로 분명하게 알수가있는데 세종이 말할길 "장님인 지화가 운명에 대하여 점친것들이 모두 맞은것은 아니지만,예로부터 성현들이 풍수지리등인 복서를 중히여겼는데,인간세상일로는 알수없는 일들이 생겼을때 무엇으로 의지할수있겠는가,그렇기에 운명에 관한책은 널리 구하여 올리도록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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