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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들의 일상생활에서 왕이 선택하여 밤에 행차하는 경우 그의미는 필수적인 잠자리가 마련되어졌는데,

이러한 왕의 선택에대하여 궁녀는 거부할 방법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예외적으로 궁에사는 여자중 거부할수있는 사람이 왕후,황후들이었는데 이들의 거부권도 오로지 한가지 이유일때만 가능했고,대신할 역할이 주어져야 인정되어 질수 있었다.

춘향전에서 춘향이 변사또의 수청을 거부하는것이 오늘날에서야 죄에 해당하지 않는것이지,그당시 기준에서는 그러하지 않았다.오늘날에는 성적결정권이 여성에게 주어졌지만,봉건체제하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고,이것을 거부하는것은 죄에 해당하고,하물며 왕의 선택에 거부는 왕에대한 모욕적 반역과 동격으로 극형에 해당할수 있었다.

왕비나 황후들이 거부할때도 명분이 있어야했는데,생리하는 경우에만 인정이 되었고,이러한 경우도 왕후나 황후는 왕를 위하여 자신의 시중을드는 궁녀 가운데 한명을 대신 지정하여 왕과 잠자리를 하도록 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중전의 시중을 드는 나인들중에 단한번의 잠자자리로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왕비나 황후등의 생리는 대면적인 거부권이 가능했지만,궁녀들도 여자인지라 생리하는 경우에 왕의 선택을 받았을때 거부할수조차  없게되는 숙명인데,이러한 경우는 애시당초 대면하기 전에 미리 왕의 선택권영역에서 내시나 환관등이 조언하거나 제외시켰다.왕비나 황후는 이에 해당하지 않을 뿐이었다.

왕에대한 궁녀의 잠자리 선택권은 궁녀에게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왕후나 황후도 자신의 기분에따라 거부할수없고,거부하는 경우는 투기로 몰아,사약을 통한 극형에 처해질수도 있었다.왕비나 황후가 왕이 밤에 자신의 침실에 들어와 잠자리를 하는경우,죄를 받지않고 거부할수있는길은 생리하는 경우라는 명분을 말할수 있었고,이러한 명분도 자신의 기분이나 투기에 해당하지 않음을 보여주고자,왕비나 황후를 시중드는 궁녀가 대신하여 동침하도록 시켰다.

이처럼 투기라는 죄명은 궁녀,왕후나 황후,일반여염집 여자들 모두에게 코에걸면 코걸이,귀에걸면 귀걸이에 해당하는 조항이었기에,봉건제하에서 여자에게있어 성적결정권은 전혀 주어지지 않았고 왕비나 황후라고 할지라도 스스로가 잠자리를 하고 싶다고 왕의 침소를 찾아갈수 없었고,신체적인 특성상 주어지는"생리"에 대하여도,왕이 기분나쁘지 않도록 대신 잠자리를 할 궁녀를 지정해 주는것이 투기에 해당하지않는 여자가 행하여야 할 덕으로 규정되어졌다.

유교사회에있어 궁녀,왕비등의 신분의 변화는 혼자의 운명이 아니라,그자신이 속한 일가친족의 삶과죽음을 가르는 운명공동체였기에,여자로서의 성적결정권의 기준은 자신의 기분이나 기쁨은 부차적일것을 숙명적으로 교육받아졌고,그것이 당연한것으로 사회적도리가 형성되어졌던 시대적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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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독재자의 공통점,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윤씨 사건때문에 폭군이되어진것으로 인식되어지고있지만,사실은 그렇지않다.


역사속에 남겨진 기록들을 살펴보면 연산군 그자체가 독재자 유형의 길을 즐겨하고,좋아하는 왕이었을뿐이었다.


연산군의 모델을 통하여,인류역사가 시작된이래 시간과공간에 상관없이 독재자가 되어가는 과정상에 공통점들이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연산군은 집권을하자,제일 처음 한일이,백성과 자신과의 관계설정의 신비주의였다.자신이 사는 궁궐의 성벽을 높이,높이 쌓아올리도록하는것도 모자라,아예 자신의 사는곳에서 자신이 무슨짓을하든 아무도 볼수없도록,궁궐주위 사방 40km주변을 누구도 살수없는 지역이라고 "금표"를 부착하여 자신이하고 싶은행동을 꺼리낌없이 할수있는 장소를 만들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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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행동하는것들이 백성들이나 외국에 전파되지못하도록 외국으로가는 사신들에게는 미리 예상문답내용을 암기시켜보내고,자신이하는 행동들에대하여 누설하는 신하를 가장큰 죄로 다스렸으며,궁궐안의 비밀스러운 일들을 잘알수있는 내시들의 결혼상대 배우자까지도 법으로 규정하여,사대부나 국민들속에 자신의 행동들이 새어나가는것을 금했다.이렇게 연산군은 자신의 행동들에대하여 비밀이 유지될수있게 철저하게 주변환경을 만든후,오로지 신하와 백성들에게는 충성과 도리에대한 이야기들 강조하였다.

중종반정인 군사쿠테타로인하여 힘없이 연산군이 강제퇴위 당하는것을보면 연산군이 자신을 지켜줄 군사의 양성이나 무에대하여  연약한 왕이었지 않나 생각할수있지만,연산군은 자신의 부모들의 제사에도 군복을입고 참여할정도였고,개성이나 주요도시를 순시를 할때는 3만명에 이르는 기병과보병을 완전무장시킨채 이끌고 행차할만큼 자신을 보위하는 친위군을 많이두었으며,그자신이 말위에서 활을쏘고 말달리는것을 즐겨하던 힘이나 무에있어 강성한 체력을 가지고있었다.

이런 평상시 강대한 군사수로 자신을 호위하고,만일의 사태에 대비를 철저했는데도 왜 연산군이 박원종이 이끄는 소수의 임시규합적인 군사들이 궁궐을 포위하던 그날밤에 한번 대항도 못해보고,친위군들이 무너졌냐하면 궁궐을 지키는 친위군들이 반란군이 궁궐로 쳐들어오고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마자,단 한사람도 우리의 왕을 지키자하는 군사들이 없었고,평소에는 아양과 아첨을떨며 연산군에게 잘보이려던 장교들과 군사들이었지만,막상 연산군을 지켜야할때에는 평소봐왔던 연산군의 모습을 잘알고있었기에 이런왕을 보호해,자신들의 목숨을 바칠 필요가 뭐있냐는 생각으로 궁궐의 개구멍을 통하여 모두다 도망가버려,반란군이 궁궐로 진입했을때는 연산군을 지키던 군사들은 하나도 보이지많고,연산군만이 궁안에 덩그러니 남아있게 되었다.

연산군은 먼저 자신과 백성과의 간격과 거리를 벌리게하고는 두번째로 한일은 여자들에 관한것이었다.여자의 신분이나 유부녀인지 처녀인지 상관없이,이쁘거나 반반한 몸매를 가진 여자들을 전국에서 불러들였을뿐만아니라,거사라하는 이동할수있는 임시가옥을 만들어,그곳이 길가이든,산이든,민가한복판이든, 밤이든,낮이든 반반한 여자가 보이면 불러들여 그것이 놓인곳은 그자체로 침실이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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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로 한일은 백성들의 송사나 분쟁,경제적어려움등 사사로운일들이나,천재지변같은 현상들은 자신에게 절대 상소하지 못하도록하여,애시당초 자신을 향한 불평 여론근원이 자신에게 도달되지 않도록 한반면에,자신의 보위와 관련되는 문제는 형제자매나 일가친족이라고해도,아예 호적을 파버리거나,서슴없이 죽여버리며 "가엽게 생갈할 가치도없다"라는 말로 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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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로 한일은 자신보다 힘이큰 나라였던 중국에게는 잘보이려고 갖은 아양을 다떨었는데,중국사신이 오면,"내가 어찌 황제의 어명을 갖고온 사신과 마주보고 앉을수있겠습니까"하며,중국사신보다 아래좌석에 앉으며 자신보다 강자인 사람이 존재하는 나라에게는 철저하게 비굴했다.

다섯번째는 신기한 동물들에 관심이 많고 음악과시같은 예술적분야게 관심이 많은척,후원하는척하며,예술적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으레 시를 짓거나,음악을들으며, 나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지?라는 칭찬을 항상듣고 싶어했고,술을 좋아라했다.술을 좋아한 나머지,법률로 업무시간이라도  술을먹고 비틀거리거나,헤롱헤롱한다고,아랫사람이 그러한것을 흉보는 투서를한다면,그 투서를한 아랫사람을 세상의 도를 모르는것들이라하여 잡아다 벌주도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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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는 궁녀처럼 벼슬인 품계를 받는 신분도 있었지만,궁궐을 드나들며,대비전,동궁전등에서 궁녀들이 담당하지않는 허드렛일을하는 노비신분의 천인들인 파지와 무수리가 있었다.


파지는 사내아이를 말하고,무수리는 소녀아이를 말했는데,이들의 신분은 천민이었다.


천출이기에 양인신분을 얻기도 쉽지않았는데,중전의 낳은 아이에게 젓을 먹이는 유모들의 신분또한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특별대우를 받는 신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민이었다.



간혹,아이를 잘 키워준 유모역할의 공으로,노비의 신분을 벗어나 양인의 신분을 얻는 경우도있긴 했지만 특별한 경우일뿐이었다.파지나 무수리들은 궁녀들보다 신분상으로 낮은 천민이었지만,궁녀들에게 메인 숙명적 한계인 오로지 왕이외의 남자는 업다라는 속박은 없었다.

궁녀들중에서 병이들어,간혹 궁궐을 나가서 사는 경우도 있었는데,이런경우도 죽을때까지 궁녀였던 굴레는 벗어날수가 없었다.궁녀의 신분이었다가,궁궐밖에 나가서 일반인으로 살아갈때,이들을 아내로 맞아드리려는 "간큰남자"도 드물었지만,있었다해도,그결과는 비극적이었는데,역사속에서 궁녀를 자신의 아내나첩으로 삼았던 "간큰남자"는 있었을까? 있었다.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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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광해군이 집권하던 시대인 1613년,궁녀중 영생이라는 여자가 병이들어,궁궐밖으로 나가서 살게되었는데 광해군의 옹립에 공을 세운 정인홍의 일파중에 임혁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신분질서가 하늘의 뜻이고,진리처럼,공자왈,맹자왈했던 시대에 왕의 여자였던 궁녀를 자신의 아내나 첩으로 맞아드리는것은 간이 배밖에 나오지 않고는 실행할수없는 일이었다,

간큰남자 임혁과 영생은,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영생왈:아무리 제가 병때문에 궁밖에 나와서 살게되었다해도,궁녀였는데,궁에 알려지면 나리에게 피해가 있을것인데 저를 버리시옵소서 임혁왈:영생아,사랑에 국경이 어디에 있겠느냐,너가 비록 궁녀였다고는해도,현재는 아니지않느냐,그리고 우리가문이 명문가인데,너하나 못지켜주겠느냐,내가 목숨을 잃을지언정,너를 버리지 않겠다.

이둘이 서로같이 살고있다는 소식이 급기야,궁궐에까지 들어가게되었는데,신하들이 들고일어나 임혁은 쳐줄일놈이고,위아래도없는 금수만도못한 강상의죄를 지었으니,참수형으로 다스려야한다고 연일 광해군에 상소를 하게된다.

광해군이 생각하기에,임혁의 잘못은 있으나,임금에대한 역신으로 참수형으로 처단하면,임혁뿐만아니라,가문자체가 멸문지화가 되기에,자신의 측근공신인 정인홍의 일파였던 임혁의 가문만은 살려주고자,사약을 내려 죽이는 형벌로 마무리하려고 하였다.

왕조시대에는 같은죽음일지라도,어떤형으로 죽느냐에따라 죄를 진 본인에게만 화가 미치기도하고,일가친족모두가 연좌로 걸려 효수가되기도했기에,tv속에서 임금이 신하에게 사약을 내렸는데 신하가 사약을 마시며,임금의 성은에 감사합니다라고 임금이 사는 궁궐을 향하여 절을하고 죽는 모습을 볼수있는데,이게 다 이유가 있는것이다.

부모,형제,자식등을 묶어서 목숨을 댕강시키지않겠다는 표시였기에,죽는 신하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억울하게 죽게되었든,그렇지 않던간에,부모,형제,자식의 장래와 목숨의 안전은 보장해주겠다는것이기에 감사할수도 있는것이다.우리나라에서 사약을 내리는것이 선처였다면,이웃나라 일본에서는 할복이였다고 볼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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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되었은 연일 신하들의 상소에 항복한 광해군은 임혁을 참수형에 처하게되는데,같은날 영생도 죽음을 맞이하게되었지만,영생에게는 사약을 내렸다.같은장소에서 같은날,같은시각에 두사람은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게되는데,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묻자,임혁왈:사랑이 죄라면,떳떳이 죽겠다.영생왈:우린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인가봐요,마지막 죽는순간까지 눈물맺힌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무언가를 기원하듯 미소와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죽었는데.주위에 이모습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궤이하게 생각하며 말하길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구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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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공통적인 기록중에 하나가 중요한 인물인 왕이 돌아가기전에
 

미리 자연현상적인 기이한 징조들이 나타남을 예고하는데,어떠한 징조들이 나타나고,


왕의 죽음을 미리 알려주는 베스트 1위에 해당하는 기괴한 자연현상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글이다.

왕이 죽음에 앞서 일반적으로 나타났던 현상들중에 대표적인 것들이 다음과 같았다



"궁궐이 있는 성문의 문짝이 부셔진다.궁궐안에있는 우물안속에서부터 구름이나 안개같은 현상속에 용같은 괴물체가 튀어나와 사라진다,궁궐이 있는 산위에서 개가 사흘 밤낮으로 운다.염전이있는 소금창고에서 소울음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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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를 지키는 성문의 문짝이 무너지거나 부서지는 일이 발생하는것은,역사서에서 아주 불길한 징조를 의미하는데,일반적인 개인들의 사생활에서도 실제로 자연현상에 의하여 집에 문짝이 날아거나,꿈속에서 집의 대문이나 방문이 부서지는 꿈은 집안에 중요한 인물이 하늘나라로 올라가게됨을 의미하는 흉조인 꿈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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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우물안에서 구름과 안개속에 용같은 괴물이 홀연히 나와서 사라진다,이런경우 왕이 하늘나라로 올라가기전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기록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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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을 둘러싼 산위에서 개가 사흘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들린다.이런 경우 일반 개인들의 사생활에서도,개가 밤에 우는 현상은(개가 우는것과 짓는것은 그 소리가 다르다) 민간에서도 길조가 아니라 집안에 우환이 생기는 흉조로 여겨졌기에,밤에 우는개는 집안에서 기르지 말아야한다고 선조들의 경험의 산물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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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전이있는 소금을 모아두는 창고안에 소가 없는데 소금창고에서 소울음소리가 들린다.이런경우 소금이 모여져있는 창고안에서 소의 울음소리가 나오면 왜 흉조라고 여겨졌는지는 요즘의 일반사회생활에서 흔히 볼수없는 모습이기에 알수는 없으나,미루어 짐작해보면 일상생활에 안좋은 일이나,재수없는 사람이 다녀가면  "에이,소금뿌려라"하는것처럼,소금과 소울음이소리가 결합되는 소리는,액운과 곡소리를 의미하지않나 생각할수가있다.

어찌되었든 대표적인 현상중에,삼국사기에 기록된 왕의 죽음을 예고하는 베스트 자연현상 1위는 궁궐의 성문이나 문짝이 무너지거나 부서지는 현상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왕조체제가 없기에,이러한 현상으로 알수있는 왕의 죽음은없다고 생각했는데,가만히 생각해보니,족벌왕조체제가 아직 존재하는 미수복된지역이 아직 존재하기에,역사기록대로라면 자연현상으로 평양의 성문이나 문짝이 무너져내렸다는 언론기사가 나온다면,조만간에 생명운이 다한 인간이 소식이 들려오겠구나라고 생각해볼수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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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년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왕위를 차지하고자하는 사람들사이에 암투가 벌어졌다.



김우징과 김양은 김우징의 아버지인 균정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하였고,제륭의 어머니를 누이로둔 김명은 제륭을 왕위에 오르게하려고하였다.


이 두세력간에 궁중암투가 벌어지는데,먼저 왕궁을 접수하여 왕위에 오른것은 균정이었으나,이러한소식을 들은 제륭과김명의 군대가 적판궁을 포위하여 두세력간에 전투가 벌어지게된다.



이 두세력간의 군사를 지휘하는 실세인물은 김양과김명이었다.포위된 궁의 수비대장인 김양이 말하길"새 임금이 여기에 계시는데,어찌하여 반란을 일으키는가?"하고 반란군의 사기를 꺽으려고하였으나 김명의 부하였던 배훤백이 김양을 향하여 화살을 쏘아 맞추며 물러서지않는다면 죽이겠다는 표시를하자,


이에 균정이 거사가 실패했음을 알고 김양에게 말하길"적의 군사와 맞서싸우기에는 궁을지키는 우리의 군사가 숫적으로 너무적다,각자 포위를 돌파하여 훗날을 도모하자"하니,포위를 뚥고 김양은 나아갈수있었지만,균정은 도중에 잡혀 죽음을 당하게된다.


균정이 잡혀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양은 하늘을 두고 "균정의 한을 반드시 갚겠다"는 맹세를 한다.궁궐의 전투에서 승리한 제륭이 왕위에 오르니 이사람이 희강왕이었다.희강왕은 제위3년만인 838년에 자신의 매부였으면서,왕위계승을 도왔던 김명의 반란에의하여 스스로 자결을하게되는데,김명 희강왕의 뒤를이어,신라의 44대 민애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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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식을들은  김양은 자신의 맹세를 지킬때가 왔음을 알고,군사를 모아 장보고가 지휘하는 청해진으로가서 균정의 아들 김우징과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군사와 합류하여 막장 민애왕을 치러 경주로 진격하게된다.


이때 김양과장보고의 연합군사의 군세는 기병3,000명 보병 2,000명인 대략 5,000명의 군사였다.이러한 소식을 들은 민애왕은 838년 12월 광주에 군사를 집결하여 김민주로하였금 막게하였으나,대패하게된다.


839년 1월 김양의 군사가 대구에 이르렀을때 민애왕은 남은군사를 모두모아 직접나아가 결전하였으나 또다시 패하자 도망가다가 김양의 병사들에게 포로로잡혀 죽음을 맞이하게되는데,포로중에는 김양을 화살로 쏘아 맞추었던 배훤백도 있었다.민애왕을 처단한후,배훤백을 보고 김양이 말하길 "개는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주군을 위하여 나에게 화살을 쏘은것은 부하의 당연한 도리이다"하고 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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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년 4월 왕궁을 정비하여,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하니,이사람이 신라45대 신무왕이다.김양은 대중11년 8월13일(857년) 김우징의 아들인 문성왕19년에  50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문성왕은 김양의 장례를 김유신장군의 장례와 동급으로 행하였고,문성왕또한 김양이 죽은후 한달후에 연이어 죽게되는것을 보았을때 그당시 신라에있어 김양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있다.


김양은 균정,김우징(신무왕),문성왕 3대에걸친 인연을 가진 무인이었을뿐만아니라,그당시 신라에서 최대의 군사조직이라고 할수있는 청해진의 장보고와 맞설수있는 대등한 힘을가진 무장이아니었을까 생각해볼수가있고.역사의 이면속에 감춰진 장보고의 최대 라이벌이었을것같은 김양장군에대하여는 일반인들의 역사속에서는 잘알려져 있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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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속의 역사드라마나 사극들을보면,기껏해야 궁궐밖에서 문을 지키는 병졸들이나 포도대장정도만이 칼을차고 있는 모습이고,

왕들앞에서는 모두 유약하게보이는 유교문신들만이 대가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인다.

문치의 시대라는 조선시대,그중에서 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던 세종조의 기록을 통하여 오늘날 tv속의 역사드라마처럼 왕의주변에 칼을차고 서있는 사람들이 없었는지 살펴보자.

세종14년(1432년) 세종과 신하인 권맹손과 나눈 대화는 이러했다.



세종:중국은 무신만이 칼을차고 시위하는게아니라,일반신료들도 칼을차지 않는사람이 없다하고,아버지인 태종때에도 중국에 사신으로갔던 정역이 아래기를,중국의 신료들은 모두 칼을 차고있습니다라고 했는데 그러지 아니한가?



 

권맹손:중국에서는 그렇게하고 있사옵니다.



 

세종:그런데 왜,우리나라에서는 무반재상들조차 칼을차고 다니는것을 부끄럽게여기고,들고다녀야할 칼을 시종에게 들고다니게하니,이게 뭔꼬라지냐,왕앞에서 신하들이 시위할때 칼을 차는 문제에대하여 격식을 정하여 아래도록하여라.



세종대왕의 분부에의하여 세종14년(1432년)10.29일 병조에서 신하들이 궁궐에 들어올때나 시위할때 칼을차는 문제에대하여 격식을 정하여,왕에게 아래었다.


"중국의 대소무관은 모두 칼을차고 다니는데,오직 우리나라 무관만이 입직과 시위할때 칼을 차고있지않고 2품이상의 무관이 되어도,별운검이외는 칼을 들고다니지 않으니 잘못된것으로 생각합니다.앞으로는 품계와 상관없이 무관은 칼을차고 시위하도록하고 유신이라도 무관직을 겸하는경우는 칼을차도록 제도화하는것이 좋겠습니다하니,세종이 이르기를 제도화하여 지키도록하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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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이러한 혜안은 뒷날의 엄청난사건의 성공과실패의 단서가되는데,세종의 아들문종 그리고 문종의 아들 단종대에 이르러,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을 제거하기위한 사육신사건이 일어났다.이때 무관으로 칼을차고 왕을 시위하던 사육신중의 한명이 유응부였는데,명나라 사신을위한 연회를 창덕궁에서  베풀고있을때 재수없게도 한명회의 충고를받은 수양대군이 그날따라 칼을찬 무관이 시위하는것을 하지말라고하여,결국 사육신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게된다.


세종이 좀더 엄격하게 제도화시켰다면,손자가 불행하게 왕위를 찬탈당하여 수양대군에게 죽게되는일을 막을수도 있었을것이다.어찌되었든 역사드라마에서 유약한 신하들만이 기립하여 서있는 모습은 그당시 실제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점이다.조선시대의 왕앞에서 칼을차고 서있는 무관신하들도 있는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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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봉상왕때의 창조리라는 사람에대한 기록이있다.

고구려에 흉년이들어,식량은부족하구,백성들은초근목피로 연명하며,정처없이 유량하는 백성들이많았다.


그러나 봉상왕은,황실의 위엄을보이기위해서는 궁궐을 크게지어야한다구 생각하여,전국에 15세이상의 장정들을 강제루 데려다 궁궐짓는 노역을하게하였다.


이에,고구려의 재상이었던 창조리가 봉상왕에게 충언을하였다.



창조리:폐하,백성이 곤궁하구,유리걸식을하며,노인과어린아이들이 굶어죽어가는 현실입니다.지금은 하늘을 두려워하구,백성을 불쌍히여겨,스스로를 경계하여야할때입니다.폐하께서,이러한현실을 외면하시구,궁궐짓는일에 백성들을 동원하는것은 올바르지않다구 생각합니다.



 

봉상왕:황제가 사는궁궐이 허접하면,지나가던 개두 나무랄것이아닌가,궁궐이 화려하지않으면,위엄없게된다.그대는 나를 비난함으로서,백성들에게 인기를얻으려는것이 아닌가?



 

창조리:폐하가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않는것은,어질지않음이옵니다.이러함에두,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않는것은 불충이라구 생각합니다.



 

봉상왕:으하하하,네가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기전에, 내가 너를 죽일수있다는걸 모르느냐? 더이상말하지말라.




이후 창조리는 봉상왕이  백성들의 곤궁함을 살피기보다,일신의안위와 잘먹구,배터지는길만추구하므로 ,신하들과 모의하여 거사를 일으켜,봉상왕을 패위시킨다.거사날 봉상왕은 주위의 모든사람에게,자신을 도와달라구 구원을 요청해지만 아무도 봉상왕을위하여,나서는사람이없었다.이에 모든것이끝날걸 안 봉상왕은 스스로,나무에 목메어죽었다.



우리나라는,신분의차이가 엄격한,봉건왕조시대라구해두,임금이 어질지못하면,신하와백성들에의하여,폐위를 당하였다.그런데 북한의 뽀그리는,봉상왕보다 더 악한일을 많이했음에두,창조리같이 충언을하는 인간이 단1명두없는 체제라는것은,사상이나 문화나 사회적의식의 문제가아니라,근본적인 무엇인가,우리나라의 민족성과는 다른 괴상한 짱개의피가 그속에 흐르구있다구봐야한다.바꿔말하면,북한의체제는 사람의영혼을 말살해버렸다구 볼수가있다.북한을 6글자로 요약하면,"로보트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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