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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병사들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고구려의 군인들은 평상시에는 자신의 주업을 영위하다가 나라가 위급해지면,군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평상시에 일반평민들의 모습이라고해도 몸에는 칼을 5자루를 차고다니며 사냥이나,일들을 하였다.

고구려병사의 완전한 모습은 알수가없지만,남겨진 기록으로 살펴보면 고구려병사들은 머리에는 2갈래의 깃이달린 모자를썼고,좌우옆구리와 등뒤로 4개의 칼을차고있었고,긴칼인 대도를 손에 들고 다녔다.

왜 고구려백성들이 평상시에도 칼을 5자루를 차고다녔을까 생각해보면


고구려의 마을들은 산이나 계곡같은 농사를 짓기에는 알맞지않는 주거환경속에,사냥이나 목축을 대다수가 영위하며 살았기에,여러종류의 칼이 필요했을수 있음을 알수가있다.사냥한 동물의 가죽을 벗기거나,요리,기타 싸울때 사용하는 칼등을 일률적으로 몸에 차고다녔다는 점이고,이러한 모습의 고구려백성은 언제,어디서든지 싸울수있는 상무의 상태를 유지했다.

고구려의 상무전통에는 신분상의 제약이없고,높은신분이든,미천한신분이든 누구나 무예와 무술을 교육받을수있었다.기록을 토대로 고구려 병사의 모습은 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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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과 모자의 위치를 참고해 초고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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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고그림에 색깔을 넣어본 고구려병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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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직여본 고구려병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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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병사의 모습은 뿔난투구를 쓰는 모습은 맞지않고,머리에는 쇠로된 투구같은것을 쓴게아니라,천이나 면으로 만든 건이나 모자를 썼음을 알수가있고,오늘날에는 불편하게 보일지모르지만,다수의 칼을 일상생활에서 차고 다녔고,이러한 무기들은 나라가 위급할때,그자체가 고구려병사의 무기가되었다.

이민족이 침략했을때 고구려병사들이 강할수있었던것은 깊숙히 들어올수록,쳐들어온 적군이 되돌아 나갈수있는 안전한 길이 없었기때문이다.자체적으로 모든 고구려의 남성들은 자신이 사는지역에서,삶을 영위하는 성을근거로,자체무장이 생활화되어있었기에,한번에 붙어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면 이길수있는게아니라,오늘날의 지역적 게릴라전술을 사용했기에,

한번 이긴곳을 지나가더라도 다시 되돌아 그곳을 지나갈려면,자체적으로 생활화된 상무전통을 유지한 고구려 일반백성이 군사로 변신하여 다시 싸웠기에 전지역의 활로를 확보한 상태가 아닌한 침략한 적군은 살아서 돌아갈 확률이 극히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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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칭기스칸과 연개소문를 비교해보았다.단재 신채호선생이 우리나라의 오천년역사의 제일의 인물이라고했던 연개소문,뭔가 두 영웅에는 닮은꼴과 차이점이있을것이다.

역사에서 왜 칭기스칸은 위대한 인물로 전해내려오고,연개소문이 그렇지못했는지 무엇이 닮았고,무엇이 달라는지,만약 두사람이 세계의 판도를 놓고 일전을 벌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았다.

칭기스칸과 연개소문의 공통점 1.두 영웅의 아버지는 신분자체가 높은지위를 가지고있었으나,그 신분를 대를 이어 얻는과정이 순탄치 못했고,스스로의 힘과능력으로 쟁취하였다.


2.칭기스칸과 연개소문은 어릴적부터 활과 칼에 뛰어난능력을 가지고있었다.3,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있어 존재자체가 카리스마였다.4.결단성에있어서 상식을 뛰어넘었다.5.종교자체에 관대했으며 특정종교가아닌 일종의 샤머니즘같은 자신만의 종교를 믿었다.6.외적과 싸울때는 저항했던 적은 하나도 남기지않고 죽였다.7.전장에서 싸우다 말위에서 죽는것을 신념으로 삼았다.


연개소문이 칭기스칸처럼 위대한 인물로 전해지지않는것은 첫째가 스스로가 황제가 되려고하지않았고,둘째가 자식간의 우애를 만들어 내지못했기때문이다.연개소문이 스스로 고구려의 지존으로 나아갔다면,자식들이 불화도 생기지 않았을것이다.칭기스칸의 아들들또한 권력에있어 화합하지 못했다.그러나 아들대에서 나라가 더욱번창한것은,각자가 다스릴나라를 생전에 정해줬기때문이다.하지만 연개소문은 말로는 자식간의 우애를 강조했으나,스스로가 황제가 아니었기에,각 아들들에게 물려줄 나라가 없었다.


칭기스칸이 가장혐오했던 인간상은 자신의 주인을 배신하는 인간이었으며,아무리 자신에게 이득되는 배신을 한사람일지라도,자신이 모시던 주인을 배신한 부하는 상을주는게아니라 모조리 죽였다.그러나 반대로 적이라고할지라도 자신의 주인을 위하여 끝까지 저항했던 사람은 후하게대하고,신하로 삼았다.


만약에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있은후 500년지난후 생겨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과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세계의 판도를 놓고 싸우게되었다면,전력상으로 몽골기병은 최대 20만이 넘지않았고,연개소문의 사수대첩에서 당나라 30만군대를 전멸시켰을때 고구려의 기병은 20만명정도로 볼수가있다.


연개소문의 군사력은 국력이나 기병수에있어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보다 못하지않았다.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지휘하던 고구려기병은 당시 중원을 통일하여 적수가없었던 당나라의 기보병을 맞아 이긴것이고,칭기스칸의 몽골기병또한 자신보다 훨씬 전력상으로 많은군사를 가진 당시 최대의 세력을 이루었던 금나라의 40만대군을 전멸시킨것을 보았을때 연개소문과 칭기스칸은 지휘력에있어 탁월했음을 알수있지만,중원통일제국을 상대하여 이겼던 연개소문이,고려,송나라,금나라의 삼국균형을 유지한 판도에서 하나씩 상대했던 칭기스칸보다는 좀 더강한 지휘력을 가졌다는 생각이든다.


만약에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과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금나라와 몽골의 결전의 분기점이되었던 야호령전투와같은 상황으로 일대결전을 벌인다고 가정한다면,승패는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전멸이었을것이다.연개소문은 우리나라 역사상  군사를 지휘하는 전술,전략에있어 신적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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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제국 당나라는 연개소문이라는 존재가 살아있는 그자체에도 상당한 공포를 느꼈음을 역사기록들은 말해주고있다.연개소문이나 칭기스칸은 일반 황제나 왕처럼 싸우는 군사들의 뒤에서 양산을쓰고 말로만 지켜보는 그런 스타일을 가진사람들이 아니라,직접 선두에서 군사들과함께 적과싸우는 스타일이었다.


전투지휘 스타일로봤을때 연개소문과칭기스칸이 전장에서 만났다면,선두에서 서로 맞짱을 떳을것이고,그 주위를 호위하며 주군을 보호하려는 군사의 사기가 승패를 결정지었을것인데,연개소문은 왕조차도 직접 단칼에 두동강내버릴정도로 과감한 기를 가지고있었고,전장에서는 항상 병사들이 자는것과 먹는음식을 똑같이하여 한몸을 이루어지냈기에,연개소문이 나아가서 싸운싸움은 생애에있어 단한번도 패한기록이없는  불패의신화를 가졌다.


그에반해 칭기스칸을 따르는 몽골기병은 패한적없는 기병같지만,칭기스칸의 생애있어 패하여 도망다니는일도 많았다.고구려 불패신화를 이끌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 20만,그리고 세계를 제패했던 칭기스칸의 몽골기병 20만이 결전하게된다면,선방은 연개소문이 "나를 따르라"하고 치고 나갔을것이고,마찬가지로 칭기스칸또한 선두에서서 돌격하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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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의 주특기는 직접 적의 기병이나보병과 일대일로 싸우는게아니라 말위에서 적을 옆면이나 사면을 회전하며 적이 나아가는 속도에 맞춰서 화살를 쏘며 빠지는 전술이었기에,뭉쳐서 일대일로 육탄전으로 싸우는 전술과전략을 가진 중원이나 유럽의군대들은 적과 싸워보기도전에 토끼몰이처럼 희생만당하다 전멸하게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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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에게있어 고구려벽화고분에서도 볼수있듯이 달리는 말위에서 뒤를 돌아보며 화살을 쏘는 모습이 낮설거나,신기한것이 아니었다.중원이나 유럽에서나 통할 그러한 칭기스칸의 전술과전략은 고구려기병들에게는 통하지않는다.몽골기병이 가졌던 장점은 고구려기병또한 다 가지고있는것이고,승부의 분기점은 군사를 지휘하는 전술과전략이었을것인데,이점에있어서 연개소문의 능력은 중원통일제국 당나라도 전패를하고 돌아갈만큼 뛰어났다는점이다.


아무리 몽골초원을 통일한 칭기스칸이라고해도,연개소문에게는 패했을것이다.역사에서 가정은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칭기스칸의 몽골기병vs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의 승패를 걸라고한다면,나는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에 걸겠다.그만큼 연개소문의 전술과전략은 신묘그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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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기병이 패전한 상대방에게 냉혹하게했다고하지만,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관용을 주는 기병은아니었다.우리나라 역사기록에서 외국의 침략군에대한 대승의 기록을 남기게했던,수나라와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도 전멸은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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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성격과기록을 보았을때 사수대첩에서 당나라의 30만명의 병사중에 단1명도 살려보내주지않았고,외국사료나 우리나라사료 모두에 전멸이라고 기록되어진 대첩은 연개소문의 사수대첩이 유일하다.그만큼 극강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 12세기 다른나라들이  칭기스칸의 몽골기병이 온다는 공포보다,


통일제국 당나라를 더 무서움에 떨게했던 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은,전술과전략,용맹성,기마능력에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보다 한수위에 군사집단이었다고 생각한다.결과적으로 칭기스칸의 몽골기병vs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맞짱을 떴다면,몽골기병이 전멸했을것이고.연개소문의 고구려기병이 12c에 존재했다면,고려와 강화하는정도가아니라,칭기스칸의 몽골제국자체가 탄생하지 못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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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년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왕위를 차지하고자하는 사람들사이에 암투가 벌어졌다.



김우징과 김양은 김우징의 아버지인 균정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하였고,제륭의 어머니를 누이로둔 김명은 제륭을 왕위에 오르게하려고하였다.


이 두세력간에 궁중암투가 벌어지는데,먼저 왕궁을 접수하여 왕위에 오른것은 균정이었으나,이러한소식을 들은 제륭과김명의 군대가 적판궁을 포위하여 두세력간에 전투가 벌어지게된다.



이 두세력간의 군사를 지휘하는 실세인물은 김양과김명이었다.포위된 궁의 수비대장인 김양이 말하길"새 임금이 여기에 계시는데,어찌하여 반란을 일으키는가?"하고 반란군의 사기를 꺽으려고하였으나 김명의 부하였던 배훤백이 김양을 향하여 화살을 쏘아 맞추며 물러서지않는다면 죽이겠다는 표시를하자,


이에 균정이 거사가 실패했음을 알고 김양에게 말하길"적의 군사와 맞서싸우기에는 궁을지키는 우리의 군사가 숫적으로 너무적다,각자 포위를 돌파하여 훗날을 도모하자"하니,포위를 뚥고 김양은 나아갈수있었지만,균정은 도중에 잡혀 죽음을 당하게된다.


균정이 잡혀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양은 하늘을 두고 "균정의 한을 반드시 갚겠다"는 맹세를 한다.궁궐의 전투에서 승리한 제륭이 왕위에 오르니 이사람이 희강왕이었다.희강왕은 제위3년만인 838년에 자신의 매부였으면서,왕위계승을 도왔던 김명의 반란에의하여 스스로 자결을하게되는데,김명 희강왕의 뒤를이어,신라의 44대 민애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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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식을들은  김양은 자신의 맹세를 지킬때가 왔음을 알고,군사를 모아 장보고가 지휘하는 청해진으로가서 균정의 아들 김우징과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군사와 합류하여 막장 민애왕을 치러 경주로 진격하게된다.


이때 김양과장보고의 연합군사의 군세는 기병3,000명 보병 2,000명인 대략 5,000명의 군사였다.이러한 소식을 들은 민애왕은 838년 12월 광주에 군사를 집결하여 김민주로하였금 막게하였으나,대패하게된다.


839년 1월 김양의 군사가 대구에 이르렀을때 민애왕은 남은군사를 모두모아 직접나아가 결전하였으나 또다시 패하자 도망가다가 김양의 병사들에게 포로로잡혀 죽음을 맞이하게되는데,포로중에는 김양을 화살로 쏘아 맞추었던 배훤백도 있었다.민애왕을 처단한후,배훤백을 보고 김양이 말하길 "개는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주군을 위하여 나에게 화살을 쏘은것은 부하의 당연한 도리이다"하고 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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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년 4월 왕궁을 정비하여,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하니,이사람이 신라45대 신무왕이다.김양은 대중11년 8월13일(857년) 김우징의 아들인 문성왕19년에  50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문성왕은 김양의 장례를 김유신장군의 장례와 동급으로 행하였고,문성왕또한 김양이 죽은후 한달후에 연이어 죽게되는것을 보았을때 그당시 신라에있어 김양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있다.


김양은 균정,김우징(신무왕),문성왕 3대에걸친 인연을 가진 무인이었을뿐만아니라,그당시 신라에서 최대의 군사조직이라고 할수있는 청해진의 장보고와 맞설수있는 대등한 힘을가진 무장이아니었을까 생각해볼수가있고.역사의 이면속에 감춰진 장보고의 최대 라이벌이었을것같은 김양장군에대하여는 일반인들의 역사속에서는 잘알려져 있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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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평왕때 백제와의 국경지역에있는 봉우리성 성주인 찬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에게는 해론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해론이 나이 7살이 되었을때,백제가 많은군사로 봉우리성을 포위하여 백여일동안 공격하였지만 성을 함락할수는 없었다.


진평왕은 악전고투하는 찬덕을 위하여 상주,하주,신주의 3개주의 군사로 봉우리성을지원하도록하였다.





3개주의 장군은 백제군사의 위세가 강함을보고,싸우는척만하고 이길수 없다고 말하며 퇴각하여 돌아가버렸다.멀리 성안에서 이모습을 지켜보던 찬덕이 하늘을 우러러 말하길"아군이 위급함을 알고도,적의 강함을 생각하여 싸워보지도 않고 가버림은  의가 아니다.의를 버리고 구차하게 살기보다,의를 위하여 죽을것이다"하고 분전하였지만,포위된지 4개월이 넘어가자 성안에 음식과 물이 다 떨어졌다.



이에 이르자 찬덕은 물대신 오줌을 받아 마시면서까지 최후의 항전을하였지만,이미 성이 함락되는것을 막을수는 없었다.최후의 순간이 온것을 안 찬덕이 남아있는 부하들에게는 항복하여 살도록 명하고,정작 자신은 항복하지않고,눈을 부릅뜬채 나무에 스스로 머리를 박아 죽었다.그후 13년이 흘러,찬덕의 아들 해론이 20살이되었을때,신라와 백제는 다시 봉우리성에서 전투를 하게되었는데,기이한 인연에 따라 종군한 장수중에 해론이있었다.



해론은 백제와의 싸움에 앞서 주위 장수들에게 말하길"나의 부친이 이곳에서 죽었다.내가 앞에 나가 싸우려는것은 의를 버리고 구차하게 사는것보다,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애달픈 선친의 맹세를 느끼기에,기쁜마음으로 신라의 정신을 보여주고 오늘 죽을것이다"하고 칼을 들고 홀로 적진으로 달려가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싸우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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