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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謹弔

경주 마우나리조트에서 100여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죽고 다치는 사상자가 발생하는 인재에 의한 대참사가 발생했는데 따뜻한 청기와처마 밑에 몸이 얼마나 무거우시기에 앉아서만 위로니 철저조사니 읊조리고만 있으면 그 참담한 희생에 대한 책임과 처벌이 제대로 되나? 가족의 돌잔치나 결혼식에는 가시는 게 몸이 안 무거울 수 있으시겠지......

이런 천인공노할 인재에도 분노하지 못하고 분향소에 조문도 찾아가지 않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국격과 품격인가? 인재에 의하여 100여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면 맨 먼저 마우나리조트 대주주나 총관리책임자부터 일단 구속시켜 수사해야 하는 것이 기본 중에 기본 아닌가.......

 

 

 

 

 

 

 

 

전 세계인들이 만약에 누군가 나에게 한국의 대학교 총장분들중에 누구를 존경하십니까? 라고 물어본다면 하나를 보면 열을 짐작 할 수 있는 것처럼 개인적으로 이 세분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모르지만 정갑영총장, 화여 김선욱총장, 부산외대 정해린총장 이라고 말할 것이고 이러한 분들이 있어 진정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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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6년 흥덕왕이 후사없이 죽자,왕위를 차지하고자하는 사람들사이에 암투가 벌어졌다.



김우징과 김양은 김우징의 아버지인 균정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고하였고,제륭의 어머니를 누이로둔 김명은 제륭을 왕위에 오르게하려고하였다.


이 두세력간에 궁중암투가 벌어지는데,먼저 왕궁을 접수하여 왕위에 오른것은 균정이었으나,이러한소식을 들은 제륭과김명의 군대가 적판궁을 포위하여 두세력간에 전투가 벌어지게된다.



이 두세력간의 군사를 지휘하는 실세인물은 김양과김명이었다.포위된 궁의 수비대장인 김양이 말하길"새 임금이 여기에 계시는데,어찌하여 반란을 일으키는가?"하고 반란군의 사기를 꺽으려고하였으나 김명의 부하였던 배훤백이 김양을 향하여 화살을 쏘아 맞추며 물러서지않는다면 죽이겠다는 표시를하자,


이에 균정이 거사가 실패했음을 알고 김양에게 말하길"적의 군사와 맞서싸우기에는 궁을지키는 우리의 군사가 숫적으로 너무적다,각자 포위를 돌파하여 훗날을 도모하자"하니,포위를 뚥고 김양은 나아갈수있었지만,균정은 도중에 잡혀 죽음을 당하게된다.


균정이 잡혀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양은 하늘을 두고 "균정의 한을 반드시 갚겠다"는 맹세를 한다.궁궐의 전투에서 승리한 제륭이 왕위에 오르니 이사람이 희강왕이었다.희강왕은 제위3년만인 838년에 자신의 매부였으면서,왕위계승을 도왔던 김명의 반란에의하여 스스로 자결을하게되는데,김명 희강왕의 뒤를이어,신라의 44대 민애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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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식을들은  김양은 자신의 맹세를 지킬때가 왔음을 알고,군사를 모아 장보고가 지휘하는 청해진으로가서 균정의 아들 김우징과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군사와 합류하여 막장 민애왕을 치러 경주로 진격하게된다.


이때 김양과장보고의 연합군사의 군세는 기병3,000명 보병 2,000명인 대략 5,000명의 군사였다.이러한 소식을 들은 민애왕은 838년 12월 광주에 군사를 집결하여 김민주로하였금 막게하였으나,대패하게된다.


839년 1월 김양의 군사가 대구에 이르렀을때 민애왕은 남은군사를 모두모아 직접나아가 결전하였으나 또다시 패하자 도망가다가 김양의 병사들에게 포로로잡혀 죽음을 맞이하게되는데,포로중에는 김양을 화살로 쏘아 맞추었던 배훤백도 있었다.민애왕을 처단한후,배훤백을 보고 김양이 말하길 "개는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주군을 위하여 나에게 화살을 쏘은것은 부하의 당연한 도리이다"하고 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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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9년 4월 왕궁을 정비하여,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하니,이사람이 신라45대 신무왕이다.김양은 대중11년 8월13일(857년) 김우징의 아들인 문성왕19년에  50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문성왕은 김양의 장례를 김유신장군의 장례와 동급으로 행하였고,문성왕또한 김양이 죽은후 한달후에 연이어 죽게되는것을 보았을때 그당시 신라에있어 김양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수있다.


김양은 균정,김우징(신무왕),문성왕 3대에걸친 인연을 가진 무인이었을뿐만아니라,그당시 신라에서 최대의 군사조직이라고 할수있는 청해진의 장보고와 맞설수있는 대등한 힘을가진 무장이아니었을까 생각해볼수가있고.역사의 이면속에 감춰진 장보고의 최대 라이벌이었을것같은 김양장군에대하여는 일반인들의 역사속에서는 잘알려져 있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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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동안 죽어있었다가 살아난 사람에대한 기록이 우리나라의 삼국역사서에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은 사흘동안 죽어있다가 살아나셨는데,무려...무려....무려....한달....우리나라의 정사인 역사서에 기록된것이기에,허튼소리보다는
진실일 가망성이 많다.


또한 위대한 왕이나,인물을 높이기위한 기록이아니라,일반백성에게서 일어난 기이한 현상을 기록해둔것이기 때문이다.




때는 서기 222년 신라 10대왕 내해왕때였다.경주 남쪽지역에 있는 남신현이라는곳에 사람이 죽어,장례까지 다치루었는데,죽은지 한달뒤에 살아서 무덤에서 관뚜껑을 열고 나왔다.사람들이 이를보고 기이하게여겨 나라에 고하니,그에관한 기록이 역사서에 기록되게 되었다.


사람의 부활이라는것이 부활은 사전적의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이다.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에대한 기록은 현대화된 오늘날에도 언론기사로 때때로 전해진다.


의사에게 사망진단서를 받고,냉동실에 안치되었다가 살았났다든지,죽은사람의 장기이식을 위하여 수술하다가,아픔때문에 죽은사람이 살아났다든지하는 기사들이 전해진다.


현실적으로도 바다의 물고기인 복어의 독을 이용하여,의학적인 사망선고를 받게하고,매장해서는 며칠이 지나 무덤의 관에서 사람을 살려내어,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그러한 부류의 집단도 존재하고있다.사람의 부활이라는 개념이 종교에서만 일어날수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흘만에 죽었다가 부활한것을 믿습니까,안믿습니까?라는 단순한 종교의 선택이아니라,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현상은 공상이아니라,현실적으로 그러한 많은 사례들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다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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