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중원이 통일제국을 이루면 연례적으로 행해졌던 일이 여자를 바치는 일이었다. 이러한 폐해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유독 더 심하고 많이 행해졌는데 극단적인 사대주의를 행했던 조선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공녀는 양반이라는 사대부 집에서는 차출되어 지지 않았고 대부분 일반백성들의 여식이 주 타깃이 되었는데 공녀로 선발되는 것은 어떠한 보상도 주어지지 않는 강제적인 징집이었다. 힘없는 백성들이 여식들이 성의 도구로 끌려가더라도 집권층이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허울뿐인 공맹을 입으로 외치는데 그칠 뿐 누구도 그러한 악역에 자발적으로 여식을 내 놓는 양반집은 조선역사 전체를 통틀어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중원제국에서 공녀의 요구가 있을 때마다 향리출신인 아전들이 마을에 할당된 공녀의 수를 채우기 위하여 제일 힘없고 항의가 없을 것 같은 집안을 찾아가 강제로 끌고 가 숫자를 맞추는 것이 일상이었고 이러한 점고과정에 벼슬아치들에게 성을 유린당하고 보내어지는 것 또한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공녀로 강제로 징집되어 끌려간 여자들은 열에 아홉은 성매매도구나 중원제국의 관리들의 첩으로 팔려나가 성적학대를 받는 삶을 살다가 이름 없이 사라져 갔다.

혹여 공녀를 좋게 표현하고자 출세를 한 여인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하늘에 별 따기만큼 희귀한 경우이고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얼굴과 나이에 따라 돈으로 팔려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조선에서 보내진 공녀가 황제의 궁궐 같은 곳에 들어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고려시대에도 공녀의 개념은 있었으나 원과 고려의 관계는 부마국인 관계로 이때의 공녀의 개념은 황제의 궁궐이나 고관대작들의 부인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조선시대처럼 애초부터 성적도구로 매매하기위하여 보내진 경우와 개념이 달랐다.

조선시대의 공녀는 조선의 집권층이 지속적 영화를 위하여 힘없는 백성들의 여식을 강제로 잡아다 중국에서 성매매여성으로 매매되도록 바쳤을 뿐이었다.

조선왕조 600년 역사의 집권세력의 모습은 겉으로는 도덕과 공맹을 외치면서 뒤로는 집권층의 부귀영화의 지속을 위해서는 그 어떠한 악행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것이 집권층의 일상화된 행태였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kungmi
,